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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 2차 생명평화축제에 가기전에 일독을! - <제주도 군사기지화 정책의 역사와 반기지운동의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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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군사기지화 정책의 역사와 반기지운동의 지평

 

정영신(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

 

제주도에서 오끼나와를 생각한다!

 

제주도 서남부 강정마을에 해군기지를 설치하려는 국방부의 계획에 따라 ‘육지경찰’이 투입되어 강동균 마을회장을 비롯한 활동가들이 구속되었고, 국방부는 구럼비바위를 깨뜨리는 공사에 들어갔다. 이 와중에 제주도와 국방부가 협약서를 서로 다른 이름으로 체결했다는 소식까지 들린다. 강정마을 해군기지건설 사업은 중대한 고비를 맞고 있다. 보수언론은 ‘해군기지 부지가 좌파단체 해방구’가 되었다며 공사강행을 촉구하고 있으며, 평화운동 단체들은 제주해군기지의 건설이 한중관계를 악화시키고 ‘미래의 불확실한 위협’을 ‘확실한 위협’으로 확정해 버릴 것이라고 우려한다.

 

최근 위키리크스의 폭로에 의해 밝혀진 것처럼, 군사·외교·통상과 같은 분야들에서는 고위관료들의 뒷거래와 밀약이 횡행하며 대통령을 기망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관료들 스스로가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등 ‘간첩행위’를 일삼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과 내용은 ‘국가기밀’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감춰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당장의 사실들에 대한 추적 못지않게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맥락에서 사태를 짚어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 글은 현실에서 눈을 돌려, 사태를 보다 큰 공간 속에 위치시키고 보다 긴 역사적 맥락에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동아시아의 전후라는 맥락에서, 특히 오끼나와의 관련성 속에서 제주도 군사기지화 시도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네 번의 시도: 한 번의 성공, 두 번의 실패, 그리고 마지막 시도?

 

길지 않은 한국 근현대사에서 제주도는 네 번의 군사기지화 압력에 직면했었다. 1940년대에 제주도는 일본제국주의에 의해 군사기지가 되었다. 이제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고 다수의 연구 성과도 나와 있지만(신주백, 2003; 츠카사키 마사유키, 2004; 황석규, 2006; 이병례, 2007), 간략하게 이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참패 이후 점차 태평양에서 주도권을 잃어가던 일본군은 1944년에 몇 차례의 결정적인 패배를 경험하였고, 이후에는 일본의 남방에 있는 여러 섬들을 기지화하여 본토결전에 대비하려 했다. 44년 3월에는 ‘10호작전준비요강’을 발표하여 우선 대만과 오끼나와를 항공기지화 했다. 44년 7월에 작성한 ‘첩호작전’과 45년 1월에 작성한 ‘천호작전’ 역시 남방의 섬들을 기지화하여 해상항공작전을 벌이는 동시에 본토결전에 대비한다는 구상이었다. 45년 2월에 이오지마가 함락되자 일본군은 본토결전 계획인 ‘결호작전’을 기획하는데, 이 가운데 ‘결7호작전’은 일본 영토 이외의 지역으로는 유일하게 제주도를 군사기지화하려는 것이었다.

 

제주도에는 이미 1931년 3월에 모슬포 평야(알뜨르)에 항공기지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중일전쟁과 더불어 기지기능이 더욱 강화되었다. 1945년 4월 15일에는 제58군사령부가 신설되었고, 일본본토의 부대와 만주의 관동군 등 종전 직전까지 7만5천의 병력이 제주도에 결집하였으며, 제주도 섬 전체가 군사기지로 전변되었다. 상륙 예상지점이었던 서남부에는 각종 참호와 동굴진지, 비행장이 건설되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투하와 소련군의 대일참전을 계기로 일본이 항복하면서 제주도는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났지만, 상륙부대에 타격을 주는 ‘해안결전’과 장기적인 지구전을 벌이는 ‘내륙결전’을 결합한 ‘결호작전’이 진행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 것인가는 오끼나와전(沖縄戦)의 피해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오끼나와인들이 ‘철의 폭풍’으로 기억하는 오끼나와전에서 일본군 6만 5908명, 미군 1만 2520명, 오끼나와에서 차출된 군인과 군속 2만 8228명, 일반 현민 9만4천 명이 희생되었던 것이다. 좁은 섬 지역에서 주민의 몇 배에 달하는 군인들이 집결하여 벌인 전쟁의 결과는 상상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항복으로 일본군이 해체․철수하였지만, 제주도 곳곳에는 당시 군사기지화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미군점령기(45~48)를 거쳐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후방보급과 군사훈련지의 역할을 담당했던 제주도에 다시 군사기지화의 위기가 닥친 것은 뜻밖에도 오끼나와의 일본반환교섭이 진행되던 1960년대 말이었다. 이미 1965년 8월 일본의 사토 에이사쿠 수상은 전후 일본의 수상으로서는 처음으로 오끼나와를 방문하여 “오끼나와 조국 복귀가 실현되지 않는 한 일본의 전후는 끝나지 않는다”고 언명하고, 복귀협상을 본격화했다. 오끼나와가 일본으로 복귀한다는 소식은 당시 한국과 대만 정부에게 큰 두려움을 주었다.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의 상당수가 철군하고 미군기지의 상당수가 폐쇄될 것으로 예측되었기 때문이다.

 

1968년 6월 18일, 한일 양국 사이에 오끼나와 미군기지에 있는 메이스B 등의 핵무기를 포함한 주요 전략기지와 ABM(미사일요격망) 레이다망 등의 미군 시설을 제주도로 옮겨 한일 양국과 극동지역 방위에 임하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비공식적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69년 3월에 진행된 국회의 대정부 질의에서도 국회의원들은 주한미군과 오끼나와에 있는 미군기지 철수설에 대한 대응방안을 집중 추궁했다. 3월 15일에는 정일권 국무총리가 UPI와의 회견에서 미군이 오끼나와에서 부득이 철수하게 될 경우 한국 영토를 새로운 미군기지로 제공할 뜻을 밝혔고, 이후에도 정부당국자들은 오끼나와 미군기지의 철수에 반대하고 한국이 기꺼이 대체기지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4월 15일에는 최규하 외무부장관이 주한 미국대사와 일본대사에게 오끼나와 반환에서 극동의 안보가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는 각서를 전달했다는 사실이 보도되었다. 즉, 오끼나와의 미군기지가 한국과 대만의 안보에 극히 중요하며, 불가피하게 그 기능을 축소할 경우 한국으로의 이전을 환영하며, 그 대상지역은 제주도라는 것이 당시 정부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러한 한국정부의 입장을 그다지 실효성 있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 주된 이유로는 오끼나와의 전략적 장점을 대체하기 힘들다는 점, 제주도가 중국 대륙에 근접하여 레이다망에 포착된다는 점, 기지로서의 입지조건과 건설비용에 난관이 많다는 점, 적절한 항만시설이나 기본적인 수도 및 전력시설이 부족하고 바람이 세다는 점 등이 거론되었다. 오끼나와 반환협상 결과, 오끼나와에서 핵무기는 철수되었지만 주요 기지가 그대로 잔류하게 되자 오끼나와 미군기지의 제주도 유치 움직임은 사라지게 되었다. 요컨대, 제주도 군사기지화의 두 번째 움직임은 일본으로 복귀한 후에도 오끼나와 미군기지가 그대로 유지된다는 조건 하에서 중단되었던 것이다.

 

세 번째 군사기지화 시도는 냉전이 끝나가던 1980년대 말에 진행되었다. ‘송악산투쟁’으로 명명할 수 있는 당시의 사태 전개와 주민들의 대응양상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나와 있다(김수열, 1989; 조성윤, 1992a; 1992b; 2003; 조성윤․문형만, 2000a; 2000b; 2005). 남제주군 대정읍 모슬포 지역에는 한국전쟁 시기부터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이 많았고, 이 지역을 빌려서 농사를 짓는 사람들도 많았다. 1987년 11월 대통령선거에 나섰던 노태우 후보는 이 토지들을 보호구역에서 해제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국방부는 대선이 끝난 직후 군사시설보호구역 심의위원회를 열고 오히려 그 주변지역까지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버렸고, 이 사실은 88년 8월 12일 『제주신문』의 보도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정부가 송악산 일대의 관광개발계획을 취소하고, 기존 국공유지 70만평에 주변 토지를 더 포함시켜 197만평 규모의 군사기지와 비행장을 건설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대정지역의 청년들이 만든 ‘대정사회연구회’가 나서서 마을 주민들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10월 1일에는 ‘모슬포 군비행장 설치 결사반대 대정읍 공동대책위원회’가 구성되어 마을 이장들과 각 지역조직의 대표들이 함께 기지설치 반대행동에 나섰다. 주민들은 “전쟁없는 실향민이 될 수 없다”며 “생존권을 위협하는 어떠한 군사기지 설치도 거부”한다고 밝히면서 “대통령 선거공약의 이행”, 그리고 일제시기와 6.25에 이르기까지 국가안보라는 차원에서 희생을 강요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군비행장을 설치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강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한편, 87년 민주화운동을 통해 성장한 도내 19개 종교 및 민주단체들은 ‘송악산 군사기지 설치 결사반대 도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한반도 평화’, ‘주한미군 철수’와 ‘한반도 비핵화’, ‘남북한 평화협정 체결’등을 주장하며 집회나 평화대회를 개최하였다. 지역 정치인들과 재경 유학생조직까지 나선 이 반대운동의 결과, 정부는 1990년 3월 송악산 군사기지 설치 계획을 전면 백지화한다는 결정을 내렸고 국방부 소유 군사기지 중 47만 평을 주민들에게 불하하기로 하면서(이후 국방부는 토지를 불하하지 않았다) 송악산투쟁은 종료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에 군사기지를 확장하려는 군부의 계획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고, 이러한 시도는 관광지개발을 요구하는 지역 주민들의 요구와 얽히면서 오늘날까지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정마을에서 진행되고 있는 현재의 사태는 직접적으로는 세 번째 군사기지화 시도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보이며, 보다 길게 보자면 대륙과 해양세력이 교차하는 변경의 섬들을 군사요새로 만들려는 (어느 나라의 군대인지와 관계없이) 군사주의 세력의 오래된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네 번째 사태의 전개양상에 관해서는 다수의 신문방송 기사로 대신하는 것으로 하고, 한 가지만 첨부해 두고자 한다. 해군과 군사기지 유치세력들은 2007년 4월에 있었던 강정마을회의 유치 결정, 5월 김태환 전 도지사의 강정마을 최우선지 선정 결정, 2009년 12월 제주도의회의 강정해안 절대보전지역 변경 의결, 2010년 11월 제주도지사의 해군기지 수용입장 발표 등을 토대로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이 ‘가장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평택에서 국방부는 지역 주민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강권으로 기지건설을 강행한 바 있다. 더구나 현지 여론을 먼저 움직여서 마을회나 시장, 시의회의 유치 결정을 이끌어 내고 이것을 근거로 기지건설을 강행하는 방식은 오끼나와의 헤노코 지역에 신기지를 건설하고자 일본정부가 이미 사용한 방식이었다. 기층 주민들 가운데 찬성파를 지원하고 지방선거에 중앙정부가 직접 개입하며 지역 유지들이 장악한 의회를 활용하여 ‘민주적 절차’라는 합리성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개발자금 지원을 미끼로 하여 추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군사기지 설치에 대한 반대의 의미는 군사․외교 분야에 국한되지 않으며 개발과 환경, 삶의 질의 문제로까지 연결된다. 이러한 절차적 합리성의 의도적인 창출은 민주주의 진전의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형해화의 징표이다. 주민들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여 정말로 기지건설을 반대하면 곤란하기 때문에, 오직 그런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서만 주민들의 의사가 ‘존중’되기 때문이다.

 

네 번의 계기들은 각각 동아시아체제가 크게 변동하는 시점에 제기

 

동아시아의 전후, 오끼나와, 그리고 제주도를 군사기지로 만들기 위한 네 번의 시도가 동아시아체제의 변동기 혹은 이행기에 발생했다는 점은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다. 전후 동아시아의 군사․외교적 질서를 동아시아(냉전․분단)체제라고 부른다면, 네 번의 계기들은 각각 동아시아체제가 크게 변동하는 시점에 제기되었던 것이다.

 

일본군에 의한 첫 번째 군사기지화 시도는 20세기 전반기를 지배했던 제국주의의 식민지지배체제가 연합군과 아시아 민중들의 저항에 의해 파국을 맞는 시점에 발생했다. 요컨대 제주도와 오끼나와의 군사기지화는 오끼나와전, 제주4.3항쟁, 대만의 2.28사건, 한국전쟁 등 동아시아에서 벌어졌던 대규모의 폭력사태들을 예감하는 것이었다. 이 사건들은 구체제가 냉전체제로 전환되어가는 거시적인 체제변동 과정에서 서로 각축하는 힘들이 충돌하는 과정이었고, 동아시아의 변방에서 그 힘들이 폭발한 결과였다. 이 힘들은 한국전쟁의 휴전협정과 더불어 일정한 세력균형 상태를 보이면서 안정화되었다. 그 사이에 북한과 중국, 소련은 상호간에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을 맺었고, 미국은 필리핀, 대만, 한국, 일본과 상호방위조약 혹은 안전보장조약을 맺었다.

 

제주도 군사기지화의 두 번째 계기는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와 경제력의 쇠퇴, 일본 경제력의 부상을 배경으로 하여, 오끼나와 민중들의 반기지투쟁에 의해 오끼나와 미군기지의 자위가 위태롭게 되면서 부각되었다. 오끼나와의 일본복귀가 핵무기를 비롯한 주오끼나와미군의 군사력을 약화시킬 것이라는 판단은 베트남전 전황의 악화 및 1.21사건, 푸에블로호사건, 닉슨독트린 등과 겹치면서 한국정부에 심각한 안보불안을 자극했던 것이다. 오끼나와를 여전히 ‘기지의 섬’으로 남긴다는 미일의 밀약과 한국정부의 일방적인 바람으로 끝난 두 번째 계기는 이어지는 미중접근(1969-1972)과 일중수교(1972) 속에서 동아시아체제의 긴장이 완화되는 것으로 귀결되었지만, 한국 내에서는 오히려 미군철수에 상응하는 군사력을 건설하기 위해 반공권위주의체제가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세 번째 계기는 이른바 민주화와 탈냉전의 조류 속에서 부각되었다. 당시의 민주화를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라 권위주의체제 하에 있던 제3세계의 조류로 파악할 경우, 특히 필리핀 민주화운동과 반기지운동의 공세에 따라 필리핀 미군기지의 존재 여부가 불투명했다는 맥락이 중요했다. 당시 언론들은 필리핀의 반기지운동을 자주 소개하고 있었고, 1990-91년에는 미군기지 이전과 관련된 기사들이 대폭 증가했다. 한국 언론들은 일본 언론보도를 인용하여, 미군이 필리핀에서 철수할 경우 공군은 싱가포르나 괌으로, 해군은 일본의 사세보나 한국의 남부 항구로 배치하는 계획이 구체화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었고 미국에서 관련 법안이 통과되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따라서 당시 반기지운동 주체들은 미군기지의 제주도 이전 여부를 주목하고 있었으며, 이것은 비슷한 시기에 벌어졌던 서산군 해미읍의 반기지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민주화에 따른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탈냉전에 따른 국제정세의 혼란 속에서 기지화는 중단되었고, 한국은 중․소와 수교를 함으로써 동아시아체제의 긴장은 한층 완화되었다.

 

마지막 네 번째 계기의 맥락으로 필자는 전후에 형성되었던 동아시아체제가 장기 이행기에 접어들었다는 점을 거론하고자 한다. 한편으로 90년대에 전개된 한국과 중국․소련의 수교 및 협력 증대, 남북한 관계개선, 그리고 중국과 대만의 접근은 긴장완화와 평화체제 구축의 전망 고조시켰지만, 다른 한편으로 2001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대테러전쟁과 미군재편계획(2004), 핵개발과 체제의 안전보장을 둘러싼 북미관계의 악화, 동아시아 각국 사이의 영토․역사분쟁의 강화는 동아시아체제의 방향을 카오스 상태로 몰아가고 있다. 여기에 점차 군사화와 팽창의 욕구에 사로잡힌 일본과 한국의 대미동맹 강화정책이 맞물리면서 제주도의 네 번째 군사기지화가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경향들은 전후 동아시아 질서를 주도적으로 구축했던 ‘쇠퇴하는 미국’과 13억 인구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세계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 사이의 힘의 대결이 만드는 블랙홀 속으로 흡수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제주도의 군사기지화는 미․중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의 상호협력과 공동개발이라는 ‘구조적 대안’에 대한 명백한 거부의 신호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정부와 군부가 어떤 명분을 제시하든 사태의 전개 방향은 그리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남중국해에서 벌어진 영토분쟁의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동아시아의 어떠한 영토분쟁도 결국은 미․중 사이의 힘의 교차양상에 따라 결정될 것이며 제주도 해군기지를 미군이 사용하게 될 것도 피할 수 없다. 최근 국회 예결위 제주해군기지사업조사소위원회에 출석한 국방부 관계자는 SOFA 규정상 미군이 우리 시설을 활용하려면 한국정부의 승인이 필요하다고 발언했지만, 이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미군은 한반도 어디에라도 주둔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나아가 SOFA 제10조 3항의 규정에 따라 미군함정은 한국의 항구에 입항할 때 ‘통고’만 하면 된다. 미군의 안전이 위험하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이 조차도 면제된다. 1960년대 말에 미군이 제주도를 거부했던 ‘조건들’을 떠 올려볼 필요가 있다. 오끼나와 기지의 대체불가능성과 기반시설의 부족. 오끼나와 반기지운동의 공세로 오끼나와 미군기지의 존재는 이미 위협받고 있으며, 기반시설이 마련되고 있다. 한국은 거부할 권리가 없고, 중국의 불편한 심기와 경계조치를 받아내는 것은 한국정부의 몫이 될 것이며, 만일의 사태시에 제주도는 일차적인 방패막이가 될 것이다.

 

군사기지에 반대하는 운동은 군사기지망 전체의 축소를 지향해야

 

동아시아냉전분단체제의 변동은 이 체제에 참여하는 각 국가와 시민사회의 힘과 역량이 충돌하고 연결된 결과에 의해 발생했다. 각각의 중요한 고비마다 동아시아의 변경에는 군사기지화를 둘러싼 소동이 벌어졌다. 오끼나와가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제주도 역시 동일한 압력이 존재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계기의 맥락이 우리에게 동아시아에서 자행되었던 일련의 ‘폭력의 연쇄’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다면, 두 번째 계기의 맥락은 전후에도 동아시아의 군사기지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알려준다. 미군기지를 중심으로 하여 전체 군사기지들은 폭넓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두 번째와 세 번째 계기의 맥락은 1980년대 이후 군사기지들의 네트워크에 병행하여 시민사회들간의 네트워크가 형성될 개연성과 필요성을 알려준다. 오끼나와와 필리핀 반기지운동의 공세는 오히려 제주도에 군사기지화의 압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군사기지에 반대하는 운동은 군사기지망 전체의 축소를 지향해야 하며, 이때 지역주의에 반대하는 시민사회간 연대는 피할 수 없는 전제조건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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