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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를 둔 아빠의 선택(2003)

두 아이를 둔 아빠의 선택

 

 

빡빡머리

 

“아빠, 나 머리 빡빡 밀어도 돼?”

몇 달 전, 초등학교 졸업을 앞 둔 큰 애가 뜬금없이 내게 물어왔다. 기가 막히기도 하고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물었다.

“왜?, 튀고 싶어서?”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

이 대답을 듣자마자, 나는 즉각 “쓸데 없는 생각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고 윽박질렀다. 평소 가져왔던 “아이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을 존중해 줘야 한다”는 ‘이성적인 교육관’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고, ‘빡빡 머리’에 대한 ‘감성적 반감’이 느닷없이 먼저 튀어나온 것이다.

 

왜 그랬을까? 지금 곰곰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빡빡 머리’에서 첫 애의 ‘자유로운 개성’을 본 것이 아니라, 내가 자라 온 지난 수십년 간 나를 억압했던 ‘군부독재의 망령’같은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사실 나는 40대 중반에 든 지금까지 한번도 머리를 길게 길러보지 못했다. 60년대 국민학교 때에는 강제된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의 가난 자체가 머리를 짧게 깎도록 했고, 70년대 중고등학교 때에는 무조건 머리를 ‘이부’로 깎아야만 했다. 이어 70년대 말에 대학교에 들어가서 머리를 길러보려다 곧장 군대에 가게 되어, 다시 머리를 ‘스포츠’형으로 깎아야 했다. 제대한 후 노동운동을 한다고 들어간 80년대 노동현장에서도, 두 차례에 걸친 투옥으로 신세진 4년간의 징역에서도, 나의 머리는 항상 ‘통제’의 대상이 되어. 짧게 깍여야 했다.

그래서 30대인 90년대까지, 나의 ‘민주주의’에 대한 바램은 “언제가 머리를 길게 길러보리라”는 문화적(?) 욕구와 얽혀 나의 내면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4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이 꿈을 끝내 이뤄내지 못했다. 그것은 군부독재시절과 같은 억압이 여전히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짧은 머리에 이제는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왜 머리를 빡빡밀면 안돼?”라고 불만스럽게 재차 묻는 첫 애에게, 아빠의 이런 속사정을 장황하게 이야기 해 줄 수는 없었다. “그냥 안돼”라는 나의 답변에, “알았어”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돌아서는 첫 애의 뒷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의 ‘자유로운 개성’조차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 세대의 ‘역사적인 잔재’가 다시 나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음을 느꼈다.

 

졸업식장에서

 

“이제 여러분이 ‘신자유주의적인 경쟁의 시대’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

한겨울 추위가 여전한 2월 중순의 어느 날, 첫 애의 초등학교 졸업식에서, 두 발을 동동거리며 지리한 졸업식 행사가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나는, 학교 교장의 ‘훈시’를 흘려 듣다가 갑자기 두 귀와 뒷머리를 곤두세우게 됐다.

“‘신자유주의적 경쟁의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 ---”라는 대목 때문이었다. 주위가 소란해서 그 이후 ‘훈시’를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실력’을 갖춰나가야 한다”는 요지의 ‘훈시’였다.

 

“‘신자유주의적 경쟁’이라는 뜻을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 때문에 두 귀와 뒷머리가 곤두 선 것은 아니었다. ‘자유로운 개성’을 추구하면서 한 ‘인간’으로 성장해 나가야 할 우리 아이들이 교장의 훈시처럼 ‘신자유주의적인 무한 경쟁의 바다’로 내던져저서, 오직 그 ‘경쟁’에서 이길 때에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뼈 속 깊숙이 새겨 넣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이 나의 뒷머리를 한없이 곤두서게 했다.

그날 첫 애의 졸업식 이후, 후배와 함께 한 어느 술자리에서 이런 느낌을 이야기했다가 “뭘 새삼스럽게 이제야 그런 이야기를 하느냐”는 면박만 받았다. 요새는 과거와 달리 성적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초등학교 4~5학년 때 이미 판가름이 다 난다는 것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기회의 평등’의 마지막 보루라고 여겨져 왔던 교육에서의 양극화는 이미 구조화되었고, 그것도 초등학교 시절에 승부가 결정난다는 것이었다. ‘신자유주의적 경쟁이라는 대세’가 이미 초등학교 학생들의 미래까지를 규정하는 이 ‘냉혹한 현실’ 앞에서, 초등학생을 둘이나 둔 아빠인 나는 새삼스럽게 망연자실해졌다. 이 ‘신자유주의적 경쟁’에서 내 아이를 ‘승자’로 키울 것이냐, ‘패자’로 키울 것이냐의 양자택일이 나의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짧은 머리’를 강요했던 지난 세대의 억압에 맞서 소위 ‘민주화’라는 기치를 내걸고 투쟁한 수십년 간의 투쟁의 결과, 아빠의 세대는 자녀들에게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개성’을 추구할 수 있는 가능성과 물질적인 조건을 열어 주었지만, 동시에 그 ‘자유로운 개성’이 신자유주의적 무한 경쟁의 틀 속에서 경쟁의 승자와 패자로 나뉠 수 밖에 없는 ‘냉혹한 현실’ 또한 남겨주었다.

그래서 아빠인 나는 갈등한다. 한편으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반대를 위해 투쟁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신자유주의적 경쟁’에서 우리 애들이 패배하지 않도록 공부할 것을 부추긴다. 두 아이가 ‘자유로운 개성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할 것을 바라면서도, 현실의 경쟁에서 뒤쳐지면 어쩌나 하고 불안해진다.

머리를 빡빡 깍고 싶다는 첫 애에게 “쓸데 없는 생각 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라고 윽박지른 것은 나의 ‘빡빡 머리’에 대한 ‘감성적 반감’도 있었지만, 동시에 이 신자유주의적 경쟁에서 살아 남으려면 쓸데 없는(?) 것에 시간을 소비하지 말고, 공부를 통해 경쟁력을 키원야 한다는 초조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빠의 결단과 선택

 

이런 딜레마와 불안은 나만의 고민은 아닌 것 같다.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식을 둔 현장의 많은 ‘전투적인 활동가’들 역시 이런 딜레마에 처해 있다고 한다. 현장에서는 고용안정과 임금인상을 위해, 나아가 고용불안을 항상화하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에 맞서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전투적으로 전개하는 현장활동가들도 자기 자식들은 학교에서의 ‘신자유주의적 성적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도록. 감당할 수 없는 사교육비조차 아낌없이 투자한다고 한다.

현장에서의 반신자유주의 투쟁을 통해 쟁취한 고용안정과 임금인상이 고스란히 자녀들의 신자유주의적 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한 밑걸음으로 투자되는 모순된 현실, 이런 모순된 현실의 쳇바퀴를 벗어날 수는 없는가?

 

이런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해, 두 아이를 둔 아빠로서 내가 결단하고 선택한 것은 두 가지 실천이다.

 

하나는 두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는 것이다. 시험성적에 의해 아이들을 판단하지 않고, 경쟁 논리보다 공동체 속에서의 상호 협력을 중요시 여기며, 무엇보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소질과 개성을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게 교육하는 ‘대안학교’에 두 아이를 보내는 것이다. ‘대안학교’운동 자체에 대한 여러 논란, 그 실험의 성공 가능성 여부 등 아직 초창기의 여러 어려움이 있지만, 이 딜레마를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하나의 시도’일 수 있는 판단에서 결단을 했다. 만약 이러한 시도가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이루어 진다면 소위 ‘공교육의 정상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다른 하나는 활동가로서 ‘신자유주의적 교육 개혁․교육 개방’에 맞선 투쟁을 해 나가는 것이다. 올해 3월, 한국 정부는 2001년의 WTO 뉴라운드의 계획에 따라 교육 부문에 대한 개방 계획을 확정하여 발표할 예정이다. 교육 개방을 위해 그 간 정부는 4대 입법을 추진해 왔는데, “무자격 외국인도 외국어 교사로 임명할 수 있는 ‘교육공무원법개정(안)’, 학교의 기업화를 더욱 빨리 촉진시키려는 ‘산업교육진흥법(안)’, 국공립대 사유화를 밀어부치는 ‘국립대특별법(안)’, 외국인 학교를 제한없이 허용하여 귀족학교-평민학교를 공공연하게 서열화하려는 ‘경제자유구역법’”(노동자의 힘 정치토론자료(2) [3월 WTO-교육개방 저지투쟁, 노동자계급이 나서야 한다] 가운데서) 등이 그것이다.

만약 교육 개방이 WTO의 계획대로 추진된다면, 교육에서의 신자유주의적 경쟁은 더욱 격화되고, 교육의 상품화와 양극화로 인한 교육 비용 증대의 고통은 더욱 우리 노동자들의 삶을 압박할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 애들의 운명은 이제 초등학교가 아니라 유치원 때부터 구조적으로 결정될 지도 모른다.

교육부문에서의 신자유주의적 개혁과 개방은 노동자들의 현실에서의 삶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미래인 우리 아이들의 삶의 전망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개혁과 개방에 맞선 투쟁은 미래의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대안 사회’의 건설을 위한 투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과거 ‘민주화투쟁’ 시기에 짧은 머리를 강요하는 억압에 맞서 싸우면서 동시에 그 짧은 머리에 익숙해져 버리는 어리석음을 다시 범하지 않으면서, ‘자유로운 개성’을 발전시켜 나가고자 하는 아이들이 욕구가 ‘새로운 대안공동체’ 속에서 실현될 수 있도록, 40대 중반의 아빠가 다시 디딤돌을 놓아 나가야겠다.

 

20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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