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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간 베를린 묵언기행(黙言紀行)

25일간 베를린 묵언기행(黙言紀行)

 

몸이 불편했지만 발도로프 교사자격 취득을 위한 마지막 연수과정을 포기할 수 없다는 아내의 간청(?)을 받아들여, 보호자 자격으로 연수생 일행과 함께 동베를린에 도착한 것은 1월 21일경이었다.

 

출발 이전부터 이미 각오하고 예상도 했지만, 독일어라고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어 25일간 눈만 부릅뜨고 입은 꾹 다문 묵언기행(黙言紀行)이 시작됐다. 간혹 통역자로 함께 간 동갑나기 이(李) 선생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것 외에는 돌아다니며 직접 보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처음에는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서 멀리 가는 것조차 두려워, 아내가 교육을 받고 있는 낮 시간 동안 숙소와 학교가 있던 동베를린의 중심가인 알렉산더프라츠(광장) 근처만 걸어서 돌아다니곤 했다.

 

독일어를 모르니 궁금한 것을 누구에게 물어 볼 수 없고, 책이나 자료도 읽을 수 없어, 그냥 발 가는대로 돌아다니면서 가벼운 눈요기만 하던 어느 날, 낯선 거리와 광장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로자 룩셈부르크 스트라셰(거리)’, ‘칼 리히프크네히트 스트라셰’, 그리고 ‘마르크스엥겔스 광장’이었다.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 아니 자본주의체제로 흡수 통일된 지 벌써 15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과거 동독 시절의 거리 이름이 그것도 자본주의체제를 혁명을 통해 타도하려고 했던 사회주의 사상가와 지도자의 이름을 딴 거리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가?

 

만약 한반도에서 북한이 남한 자본주의체제로 흡수통일된다면 ‘김일성 광장’, ‘김정일 거리’ 등등의 이름이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을까? 이미 내전을 통해 분단된 체제에서 태어나 숨막히는 반공 반북의 메카시즘적 제도와 문화 속에서 47년간 살아 온 남한의 한 활동가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겨우 이런 정도였다. ‘동서독의 분단체제는 남북간의 6.25.와 같은 대량살육의 내전을 겪지 않아, 서로에 대한 증오와 적대가 그리 크지 않았던가 보구나.’ 아니 ‘과거 마르크스의 혁명이론이 소련의 도덕교과서로 박제화됐던 것처럼, 로자 룩셈부르크나 칼 리히프크네히트의 사상과 실천도 그 생생한 혁명성이 거세되어 아스팔트 거리 이름으로 박제화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그러나 머릿속을 맴도는 이런 저런 상념과 궁금증에 대해,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 후배의 답변은 나의 알량한 상상과 추측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리는 것이었다. “독일인은 칼 마르크스나 로자 룩셈부르크를 사회주의 혁명가가 아니라 동서독 분단 이전의 ‘독일인’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거리 이름과 광장 이름을 그대로 남겨둔 것이다. 과거 동독에 있던 구소련의 잔재들은 이미 대부분 정리했다.”

 

독일 민족이 위대하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독일이 지배계급이 무섭다고 해야 하나? 25일간의 묵언기행(黙言紀行) 동안, 겨울 내내 검은 구름에 가려 햇빛이라고는 거의 볼 수 없는 베를린의 날씨처럼, 무겁고 어두운 상념만이 머릿속을 짓눌렀다. 아내를 학교까지 데려다주느라 매일 지나쳤던 로자 룩셈부르크 거리에도 다른 거리와 마찬가지로 개똥들이 이리저리 뒹글고, 마르크스엥겔스 광장 주변의 건물도 다른 건물들처럼 온통 뜻 모르는 낙서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되돌아보니 단지 독일어만 몰라서 25일간 묵언(黙言)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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