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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1/30
    제주, ‘가장자리’에서
    푸르른 날
  2. 2021/01/07
    연세대 사회학과 78동기들! 너희는 아직도 내게 설레임으로 남아있다
    푸르른 날

제주, ‘가장자리’에서

 

 

제주, ‘가장자리’에서

 

박성인/가장자리 농원지기

<질라라비>2020.10월호

 

사용자 삽입 이미지

 

뿌리! 더 아래로, 더 왼쪽으로!

 

땅속 깊이 내리는 것은

그만큼 줄기를 위로 솟게 하기 위해서다.

칠흙 같은 어둠 속을 헤매는 것은

잎이 햇빛을 마주하게 하기 위해서다.

왼쪽으로 뻗는 것은

꼭 그만큼 가지를 오른쪽으로 뻗게 하기 위해서다.

주근이 굵어야

잔뿌리가 많아지고,

그 가는만큼 흙속 무기물을

생명으로 바꾸어낸다.

뿌리!

살아서 땅속 길을 내고,

죽어서 땅속 거름이 된다.

 

시인은 꽃을 보지만,

농부는 뿌리를 본다.

시인은 꽃을 통해 뿌리에 다다라야 하고,

농부는 뿌리를 통해 꽃을 기다려야 한다.

 

8년차 초보농부다. 8년째 농사를 짓고 있는데도 여전히 한심하고 어설픈 ‘초보’ 농부다. ‘농사(農事)’라기보다 차라리 ‘농도(農道)’에 가깝다. 생태순환적인 자연농업으로 30~40가지 밭작물을 재배한다고 하지만, 하는 것마다 변변치 못하다. 8년간 겪어보고, 이것저것 주어들은 것도 있고, 책도 보고 해서 머리로는 자연농업을 조금 안다고 하지만, 무엇보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나이도 있고, 농사짓는 평수(2,500여평)도 혼자 감당하기에 벅차지만, 역시 농사는 ‘몸’이 짓는 것이다. 체력뿐 아니라 몸의 리듬까지 농사를 짓게 몸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 몸에서 농부다운 ‘농심(農心)’이 생긴다. 그래서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집안에서 농사를 했었더라면, 귀향해서 농사를 짓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도 ‘자연 농업’을! 몰랐다. 농사가 이렇게 힘들고 진입 장벽이 높은 줄은. 농사를 짓기 시작할 무렵에 우연히 후배로부터 ‘자연농업’에 대해 소개받아 괴산에서 교육받고, 자연농업을 한답시고 지금까지 버텨왔다. 흔히 오해하듯이 자연농업은 ‘방치’가 아니다. 자연의 생태적인 순환을 이해하고, 그 자연의 흐름에 맞춰 그 땅에 맞는 자신만의 농법을 하나씩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자연의 생태적인 순환을 이해하려면, 흙과 미생물, 농작물과 종자, 농작물의 영양 관리, 검질(잡초) 관리, 병해충 관리, 기후 변화 등을 알아야 한다. 알아야 할뿐 아니라, 필요한 조치를 ‘제때’ 해야 한다. 밭 만들기와 파종에서 수확과 보관까지 4계절의 변화에 맞춰 제때 해야 한다. 제때! 변화무쌍한 자연의 변화와 흐름 속에서 제때를 알아내는 것! 안다고 하다라도 제때 필요한 조치를 하는 것! 자연재배 농사 10년 안에 이걸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이제 2~3년 남았는데. 그래서 여전히 ‘초보 농부’다.

 

검은 보리

 

검은 보리, 알이 여물어간다.
제 머리 무게를 감당하기에 벅찬,
가는 보리대는
흔들려야 버틴다.
흔들리면서 버틴다....

검은 보리가 흔들리면서
바람이 인다.
바람이 봄을 조금씩 밀어낸다.
초여름 볕이 따갑다.
검은 보리가 영글어간다.

흔들리며 영글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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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8년차’다! 검질(잡초)과 버렝이(벌레)에게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는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몸이 따라주지 않아서 밀리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멋모르고 허무하게 밀리지는 않는다. 작지만 큰 깨달음도 얻었다. 자연 농업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 먼저 최소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깨달음이다.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무엇을 하지 말기 위해서는 자연의 생태적 순환을 자연 자체로부터 배워야 한다. 자연 자체의 자생적인 복원력을 신뢰해야 한다. 그 바탕에서 농사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을 자연으로부터 얻어내는 것! 그것이 자연농업에서 농사 실력이다. 무엇을 하기는 쉬워도 무엇을 하지 않기는 어렵다. 자연에 대한 ‘신뢰’와 자연에 대한 ‘실력’이 없으면 힘들다.

문제는 ‘과잉’이다. 21c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문제의 근원이 과잉생산과 과잉소비이듯, 지금 농업에서도 ‘과잉’이 문제다. 제초제, 화학농약, 화학비료의 과다 사용을 통한 농작물의 과잉생산이 흙과 바다를 오염시키고, 인간의 건강을 헤치며, 결국 자연의 생태적인 순환을 파괴해 버리고 있다. 이런 농업의 현실에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지속가능한 미래를 위한 농업에서의 자그마한 대안적 시도가 자연 농업이다. 그래서 버티고 있다. 자연 농업이 현실에서 지속가능한지를 직접 확인해보려고.

 

'생태화장실'이 부른다!

 

오라!

마려운 자는

큰거든

작은거든

가리지 말고

 

버리고

뒤도 안돌아 보는 것!

버리지 않으면

살 수 없어

살기 위해

매일 버리는 것!

 

모으고 모아

썩히고 썩혀

땅심으로,

다시 생명으로

되살려 낼테니

 

주저말고 와라

가장자리 농원으로!

생태화장실로!

 

자급자족을 위한 텃밭농사가 아니라면, 농사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작물을 수확하고, 가공하거나 보관하고, 판매하는 것이다. 특히 자연재배를 하는 소농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점은 힘겹게 재배한 농작물을 판매할 통로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자연 농업은 농사 자체도 힘들지만, 판매는 더 힘들다. 그래서 지속가능하지 않다. 많은 경우 몇 년 힘겹게 시도하다가 농사를 포기하거나 관행농업(석유화학농업)으로 방향을 바꾼다. 당분간 자연 재배 소농을 위한 농업 정책도 기대하기 힘들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기에 스스로 해결 방안을 찾아나가야 했다.

그래서 지난 2018년 10월에 자연재배를 하는 5개 농민단체들이 모여, 3무(무제초제, 무화학비료, 무화학농약)+Non GMO 농작물을 판매하는 주말(매주 토요일) 직거래장터인 ‘자연그대로 농민장터’를 열었다. 생산자인 ‘농민’이 직접 나서서 연 소규모 농민장터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버텨온 결과, 다음 주에 100회 장터를 연다. ‘100번의 고집! 100번의 소통!

 

자연그대로농민장터 ‘시농제’ 축문(2019.3.24.) 가운데서

 

이 ‘자연그대로 농민장터’를 통해,

생산자인 농민이 소비자를 살리고, 소비자인 시민이 농민을 살려 생산과 소비가 다시 하나로 이어질 수 있도록!

농민이 제주의 흙과 자연을 살리고, 그 흙과 자연이 다시 농민과 시민을 되살려 자연과 인간이 다시 하나로 이어질 수 있도록!

농촌이 도시를 살리고, 도시가 농촌을 살려, 농촌과 도시가 하나로 되살아날 수 있도록!

‘농민장터’가 그 씨앗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노동의 가치’, ‘농업의 가치’, ‘생태적 가치’, 그 가치를 공유하는 농민들끼리 만나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만나고, 또 소비자와 소비자가 만나 그 가치와 문화를 공유하고 확산해나가는 ‘농민장터’가 되도록!

그래서 농민의 건강한 삶과 노동이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를 원하는 소비자의 바램과 충돌하지 않고, 이런 생산자와 소비자의 만남이 청정제주의 흙과 자연을 지켜나갈 수 있게 하는 ‘농민장터’가 될 수 있도록!

포기하지 않고 끝내 함께 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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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질이 안심하고 자라는 농원, 버렝이가 안심하고 먹는 농작물’을 모토로 내걸었다. 8년째 그 검질과 버렝이 때문에 속타고 허덕이는 한심한 농부다. ‘가장자리’에서. 근데 농사를 지을수록 몸이 땅에 뿌리를 조금씩 내려 발목을 잡는다. 사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이게 내가 할 일인가? 내가 해야 할 일인가?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인가? 검질을 메고 버렝이를 잡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묻는다.

‘가장자리 농원’! 사실 한반도와 동북아의 가장자리인 제주도에서, 도시와 농촌의 경계에 놓인 가장자리 땅에서, 자연 농업을 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 보겠다고, 역동적이고 다양한 변화에서 지속가능한 미래를 찾아보겠다고, 그 의지와 바람을 ‘가장자리 농원’으로 표현했다. 8년차 초보농부!, ‘가장자리’에 발 딛고 서서 다가 올 태풍을 어떻게 맞을까?

 

태풍과 소나무

 

기회다

솟구쳐 날아오를!

내 뿌리가 발목을

잡지만 않는다면

 

꺾이지 않고

엎드려 휘지 않고

스스로 태풍이 되어

태풍이 되어

다시 솟구쳐 오를!

 

뿌리에 발목잡혀

끝내 발목잡혀

아우성을 치는

소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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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사회학과 78동기들! 너희는 아직도 내게 설레임으로 남아있다

사회학과 78동기들! 너희는 아직도 내게 설레임으로 남아있다
- 연세대 사회학과 40주년에 부쳐, 2012년

 

박성인/사회학과 78

 

어떻게 할까 망설여진다.
쓸까? 말까?
그냥 써야 하니까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연세대 사회학과에 대해 할 말이 있을까?
고작 78년에 1년 정도를 다녔는데. 17년 만에 간신히 졸업장을 받기는 했지만.
자꾸 뭔가 ‘학벌’을 중심으로 엮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데.
‘사회학’ 자체에 대해 배운 것도 별로 없지만, 사회학이 이 시대의 절박한 사회문제들에 대해 어떤 질문과 답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미덥지 않다고 생각해 왔는데.

 

근데 내 삶에서 연세대 사회학과란 무엇인가?
--- ‘진정’ 무엇인가?
아~ 이 한마디는 해야겠구나.
이 말만은 꼭 해야겠구나.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애기를 할 수 있는가?
내게 연세대 사회학과는 ‘78년에 함께 입학한 30여명의 동기들’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몰랐지만 그 후 살아가면서 언제나 보고 싶었고, 매번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렜고, 몇 년을 못 보더라도 늘 옆에 있을 거라는 아련한 느낌을 주는 동기들이었다.

 

왜 그럴까?
친한 듯하면서도 거리감이 느껴지고, 멀리 있는 듯하면서도 늘 곁에 있다고 느껴지는---.
이건 뭘까?
‘아쉬움’?
20대 초반의 그 젊은 시절을 4년간 온전히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

 

벌써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뚜렷이 기억한다.
제주도 시골 촌놈이 처음 서울로 상경해서 사회학과 동기들에게서 느꼈던 그 ‘문화적 충격’들을.
서울 표준말에 익숙하지 못해 늘 가슴이 답답했는데, 모두가 자신들의 갖는 생각이 또렷하고 말을 잘한다는데 놀랐고, 78년 3월 말인가 신입생 환영식에서 여학생들이 술을 잘 마신다는 거를 보고 놀랐고, 서로가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거를 보고 놀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놀랄 일인가라고 헛웃음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 땐 그랬다.

 

대학 입학 후 1년간 나는 겉돌았다.
대학에 대한 기대는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깨졌다.
지긋지긋한 고등학교를 벗어나 대학만 가면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으라는 기대는.
70년대 말이라는 시대 자체가 그랬는지, 아니면 대학이라는 곳이 오늘날이나 옛날이나 여전히 그러한 건지 ---.
종철이와 기독교와 신에 대해서 토론도 해보고, 영철이와 ‘인간걱정반’에서 <광장>을 읽으며 시대에 대해 토론도 해봤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내 스스로에게 숱한 질문도 해 보고, 학교 후문 하숙집에서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을 붙들고 밤새 술을 먹어대기도 했다.
그 때는 왜 산다는 것이 그렇게 공허하고 시시하게 느껴졌을까?
왜 ‘대학’이라는 곳이 내가 기대했던 것을 이룰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건방진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대학’이라는 게 참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었는데 ---- 대학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없겠구나는 생각만이 온통 나를 짓눌렀다.

 

그래서 1학년을 마치자 그냥 ‘대학’을 미련없이 내려놨다.
뒤도 안돌아보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979년 11월 초에, 박정희가 죽은 뒤 며칠 안되서 군대로 갔다.
휴학 처리는 부친께서 하셨다.
덕택(?)에 군 제대 후 1983년에 다시 복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내 삶의 방향과 목표가 달라져 있었다.
80년대 많은 대학생들이 그랬듯이, ‘대학생’이라는 기득권을 버리고 노동 현장으로 향했다.
80년대라는 시대가 우리들에게 요구했던 ‘역사적 사명(?)’에 따라, 나는 사회학 학문은 하지 않지만, ‘사회학’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스스로 위안했다.

 

그리고 그 후 30여 년이 흘렀다.
그 사이 성수, 성남, 구로, 안산, 울산 등 노동현장을 돌고, 두 차례 징역을 살았다.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노동관련 연구소를 만들어 10여 년간 노동이론과 정책에 대해 연구하고, 지금은 출판사에서 인문사회과학 책을 만들고 있다.
그렇게 30여 년의 세월은 흘렀다.

 

그 30여 년의 긴 세월동안, 78동기들과 멀리 떨어져 살았지만, 그들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다.
아직도 아련하게 기억한다.
80년대 중반 첫 징역을 살 때, 홀로 창살에 갇혀 있을 때, 그 때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 78동기들이었다. 사무치게 보고 싶어 했다.
왜 그랬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내가 가지 못했던 길을 내 동기들이 가고 있는 것에 대한 그 어떤 부러움 때문이었을까?
젊은 날, 세상과 삶에 대해 동기들과 고민을 같이 나누고 함께 부대끼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외롭고 힘들 때마다, 78동기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간혹 영덕이나 성득이한테서 전화 와서 안부를 묻는다.
전화기를 받는 순간, 마음은 30여 전으로 되돌아간다.
78동기 모임에 자주는 못나가지만, 이멜로 동기들의 소식들을 들을 때마다 지금도 여전히 마음이 설렌다.

 

그리고 너무 궁금하다.
동기들 하나하나 살아왔던 30여 년의 세월이.
동노도 궁금하고, 유경이도 궁금하고, 홍균이도 궁금하고, 경환이도 궁금하고, 용우도 궁금하고, 현옥이도 궁금하고 ---.
그 세월 속에서 동기들이 겪었을 어려움이나 기쁨이나,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가 너무 궁금하다.
언젠가 양말까지 벗어 앉아서 밤새는 줄 모르게 그들의 얘기를 듣고 싶고, 내 얘기를 하고 싶다.
어쨌든 한 시대를 함께 살아왔는데---
근데 어떻게 1년 정도 맺은 인연뿐인데 이렇게까지 되지?

 

사회학과 78동기들!
니들과 35년을 함께 해서 너무 좋았다.
너희는 내가 가지 않은 길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내 마음에 아직도 설레게 남아있다.
남은 세월도 그럴 거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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