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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 사회학과 78동기들! 너희는 아직도 내게 설레임으로 남아있다

사회학과 78동기들! 너희는 아직도 내게 설레임으로 남아있다
- 연세대 사회학과 40주년에 부쳐, 2012년

 

박성인/사회학과 78

 

어떻게 할까 망설여진다.
쓸까? 말까?
그냥 써야 하니까 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연세대 사회학과에 대해 할 말이 있을까?
고작 78년에 1년 정도를 다녔는데. 17년 만에 간신히 졸업장을 받기는 했지만.
자꾸 뭔가 ‘학벌’을 중심으로 엮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데.
‘사회학’ 자체에 대해 배운 것도 별로 없지만, 사회학이 이 시대의 절박한 사회문제들에 대해 어떤 질문과 답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미덥지 않다고 생각해 왔는데.

 

근데 내 삶에서 연세대 사회학과란 무엇인가?
--- ‘진정’ 무엇인가?
아~ 이 한마디는 해야겠구나.
이 말만은 꼭 해야겠구나.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애기를 할 수 있는가?
내게 연세대 사회학과는 ‘78년에 함께 입학한 30여명의 동기들’이었다.
학교 다닐 때는 몰랐지만 그 후 살아가면서 언제나 보고 싶었고, 매번 볼 때마다 가슴이 설렜고, 몇 년을 못 보더라도 늘 옆에 있을 거라는 아련한 느낌을 주는 동기들이었다.

 

왜 그럴까?
친한 듯하면서도 거리감이 느껴지고, 멀리 있는 듯하면서도 늘 곁에 있다고 느껴지는---.
이건 뭘까?
‘아쉬움’?
20대 초반의 그 젊은 시절을 4년간 온전히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

 

벌써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뚜렷이 기억한다.
제주도 시골 촌놈이 처음 서울로 상경해서 사회학과 동기들에게서 느꼈던 그 ‘문화적 충격’들을.
서울 표준말에 익숙하지 못해 늘 가슴이 답답했는데, 모두가 자신들의 갖는 생각이 또렷하고 말을 잘한다는데 놀랐고, 78년 3월 말인가 신입생 환영식에서 여학생들이 술을 잘 마신다는 거를 보고 놀랐고, 서로가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거를 보고 놀랐다.
지금 생각하면 그게 놀랄 일인가라고 헛웃음이 나올 수도 있지만, 그 땐 그랬다.

 

대학 입학 후 1년간 나는 겉돌았다.
대학에 대한 기대는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깨졌다.
지긋지긋한 고등학교를 벗어나 대학만 가면 자유롭게 내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으라는 기대는.
70년대 말이라는 시대 자체가 그랬는지, 아니면 대학이라는 곳이 오늘날이나 옛날이나 여전히 그러한 건지 ---.
종철이와 기독교와 신에 대해서 토론도 해보고, 영철이와 ‘인간걱정반’에서 <광장>을 읽으며 시대에 대해 토론도 해봤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내 스스로에게 숱한 질문도 해 보고, 학교 후문 하숙집에서 해결할 수 없는 고민을 붙들고 밤새 술을 먹어대기도 했다.
그 때는 왜 산다는 것이 그렇게 공허하고 시시하게 느껴졌을까?
왜 ‘대학’이라는 곳이 내가 기대했던 것을 이룰 수 없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을까?
지금 생각하면 건방진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대학’이라는 게 참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인가를 갈망하고 있었는데 ---- 대학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없겠구나는 생각만이 온통 나를 짓눌렀다.

 

그래서 1학년을 마치자 그냥 ‘대학’을 미련없이 내려놨다.
뒤도 안돌아보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979년 11월 초에, 박정희가 죽은 뒤 며칠 안되서 군대로 갔다.
휴학 처리는 부친께서 하셨다.
덕택(?)에 군 제대 후 1983년에 다시 복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내 삶의 방향과 목표가 달라져 있었다.
80년대 많은 대학생들이 그랬듯이, ‘대학생’이라는 기득권을 버리고 노동 현장으로 향했다.
80년대라는 시대가 우리들에게 요구했던 ‘역사적 사명(?)’에 따라, 나는 사회학 학문은 하지 않지만, ‘사회학’을 실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스스로 위안했다.

 

그리고 그 후 30여 년이 흘렀다.
그 사이 성수, 성남, 구로, 안산, 울산 등 노동현장을 돌고, 두 차례 징역을 살았다.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노동관련 연구소를 만들어 10여 년간 노동이론과 정책에 대해 연구하고, 지금은 출판사에서 인문사회과학 책을 만들고 있다.
그렇게 30여 년의 세월은 흘렀다.

 

그 30여 년의 긴 세월동안, 78동기들과 멀리 떨어져 살았지만, 그들을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다.
아직도 아련하게 기억한다.
80년대 중반 첫 징역을 살 때, 홀로 창살에 갇혀 있을 때, 그 때 가장 보고 싶었던 사람이 78동기들이었다. 사무치게 보고 싶어 했다.
왜 그랬을까? 지금도 궁금하다.
내가 가지 못했던 길을 내 동기들이 가고 있는 것에 대한 그 어떤 부러움 때문이었을까?
젊은 날, 세상과 삶에 대해 동기들과 고민을 같이 나누고 함께 부대끼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외롭고 힘들 때마다, 78동기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간혹 영덕이나 성득이한테서 전화 와서 안부를 묻는다.
전화기를 받는 순간, 마음은 30여 전으로 되돌아간다.
78동기 모임에 자주는 못나가지만, 이멜로 동기들의 소식들을 들을 때마다 지금도 여전히 마음이 설렌다.

 

그리고 너무 궁금하다.
동기들 하나하나 살아왔던 30여 년의 세월이.
동노도 궁금하고, 유경이도 궁금하고, 홍균이도 궁금하고, 경환이도 궁금하고, 용우도 궁금하고, 현옥이도 궁금하고 ---.
그 세월 속에서 동기들이 겪었을 어려움이나 기쁨이나,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가 너무 궁금하다.
언젠가 양말까지 벗어 앉아서 밤새는 줄 모르게 그들의 얘기를 듣고 싶고, 내 얘기를 하고 싶다.
어쨌든 한 시대를 함께 살아왔는데---
근데 어떻게 1년 정도 맺은 인연뿐인데 이렇게까지 되지?

 

사회학과 78동기들!
니들과 35년을 함께 해서 너무 좋았다.
너희는 내가 가지 않은 길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내 마음에 아직도 설레게 남아있다.
남은 세월도 그럴 거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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