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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1.20.) 참세상 기사를 통해 1월 18일에 민주노총에서 '96~97년 총파업 15주년 토론회'를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토론회 자료가 있나 해서 찾아봤지만 아직 올라오지 않았다.
'96~97년 총파업투쟁의 현재적 의미'에 대해 2012년 정치총파업 투쟁 전망과 관련해서 토론했다는 내용만 기사를 통해 접했다.
기사 자체만으로는 토론된 내용을 깊이 있게 파악하기 힘들었다.
1987년 이후 한국사회의 대중파업에 대해 지금 시점에서 총괄적인 평가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가져왔던 터라 토론된 내용이 궁금했다.
참고로 96~97년 총파업투쟁에 대해 그간 간략히 정리했던 내용을 올린다.
빠른 시일 내에 좀 더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정리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
<1996~97 노동법 개악저지 정치총파업>
1) 1996년 12월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개악 배경
(1) 김영삼 정권은 초기 개혁시도가 좌절되면서, 1993년 하반기부터는 자본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하는 ‘세계화전략’을 추구하는데, 독점자본의 국제적 진출을 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입을 추진했다.
그런데 OECD가입을 위해서는 ‘국제노동기구’(ILO)에서 요구하는 ‘노동법 개정’ 요구를 수용해야만 했다. 동시에 국내 자본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는 노동통제의 강화를 통한 노동조합의 무력화와 인원감축을 필연적으로 요구했다. 이처럼 1987년 이후 국내 자본의 ‘신경영전략’과 ‘세계화 전략’에 따른 자본의 경쟁력 강화를 법적⋅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줄 필요성과 ILO의 노동법 개정 요구가 맞물리면서, 자본의 새로운 축적운동에 걸 맞는 새로운 협조적 노사관계의 틀을 구축해 나갈 필요가 있었다.
또한 김영삼 정부는 1993~1994년 ‘노-경총 사회적 합의’의 실패를 통해, 그동안 실제로 노사관계 변화를 주도해 왔고, 또 주요한 전략사업장을 포괄하고 있는 민주노총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노동정책도 실효성이 없다는 점을 확인했다. 따라서 민주노총을 인정한 조건 속에서의 새로운 노사관계 패러다임을 구체화시켜 나가야 할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2) 이에 김영삼 정권은 1996년 4월24일, ‘21세기 세계 일류국가로의 도약을 위한 신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했다. ‘신노사관계 구상’은 ‘참여와 협력의 새로운 노사관계’를 기치로, ‘공동선의 극대화의 원칙’, ‘참여와 협력의 원칙’, ‘노사 자율과 책임의 원칙’, ‘교육 중시와 인간존중의 원칙’, ‘제도와 의식의 세계화의 원칙’ 등 5가지의 원칙을 제시했고, 노동법만이 아니라 노사관계 제도, 관행, 의식까지도 개혁 목표로 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할 기구로서 5월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로 ‘노사관계 개혁위원회’ 설치했다.
‘참여와 협력의 새로운 노사관계’라는 기치나 ‘5가지 원칙’이라는 화려한 수사와는 달리, ‘신노사관계 구상’의 의도와 목표는 구체적이고 분명했다. 즉 정리해고 요건 완화와 월차 및 생리휴가제의 폐지, 변형근로제의 도입 등 노동유연화를 법적으로 제도화하고, 민주노총을 협조적 노사관계의 틀로 포섭해 내는 것이었다.
(3) 그러나 김영삼 정권의 ‘신노사관계 구상’은 ‘참여와 협력’이라는 기치와 ‘5원칙’에 걸맞지 않게 낡고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추진되었다. 1996년 5월에 만들어진 ‘노사관계 개혁위원회’에서 노동법 개정을 둘러 싼 논란은 의례적인 겉치레 과정에 불과했다. 1996년 8월 한총련 사태를 전후하여 김영삼 정권은 5․6공 비리인사를 석방, 사면하는 것을 시점으로 경찰력 증원, 국방비 증액, 안기부법 개정 시도 등 반개혁적인 공세를 강화하더니, 9월 초 제출한 ‘향후 경제운영방안’에서는 재벌 규제완화와 고임금 구조 해소, 노동시장의 유연화 등을 통해 경기불안과 무역적자를 해결해 나가겠다는 방침을 구체화했다.
김영삼 정권의 이러한 공세와 맞물려 자본가진영은 9월6일에 전경련 41개 주요 재벌 기획조정실장회의를 열어 ‘임금총액 규모 동결’ 방침을 발표하고, 노동법 개정과 관련해서는 정리해고 요건 완화와 함께 복수노조와 제3자 개입 인정을 신중히 추진할 것을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했다.
또한 화이트칼라를 주 대상으로 하는 대량감원이 명예퇴직제, 배치전환, 직급정년제 등을 활용하여 대대적으로 이루어졌고, 이는 기업 전반의 구조조정과 연관되어 추진되었다. 민주노총과의 ‘사회적 합의’를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 이데올로기적 압박을 통해 ‘신노사관계 구상’을 관철시켜 나가겠다는 것이었고, 결국 이런 의도는 1996년 12월 26일 “노동악법의 날치기 통과”로 그 본 모습을 드러냈다.
2) 1996~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총파업투쟁
(1) 김영삼 정권이 1996년 4월 ‘신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하자, 민주노총은 초기에 ‘노사관계 개혁위원회’에 참여냐 불참이냐를 둘러싸서 혼란과 동요에 휩싸였다.
- 민주노총은 그해 7월 단위노조대표자 수련회에서 현장으로부터 강력한 문제제기가 있었음에도 이후 집단적 노사관계법과 개별적 노사관계법의 맞바꾸기 구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 결국 노동법 개악 의도가 분명해진 가운데 11월 들어 총파업 돌입 여부를 둘러 싼 민주노총의 동요와 혼란에 종지부를 찍어준 것은 김영삼 정권의 노동악법 날치기 통과였다.
(2) 1996년 12월 26일,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과 안기부법의 날치기 통과에 항의하여, 민주노총은 즉각 총파업에 돌입했다. 1996년 12월 26일에서부터 1997년 1월 말까지 40여 일간, 누적규모 3,206개 노조, 연인원이 359만7,011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정치총파업이었다.
- 1996~97년 노동자 총파업은 한편으로는 ‘정리해고제’의 법적 제도화 자체가 전체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키는 조건이 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987년 이후 지속된 대중투쟁동력과 투쟁 경험, 그리고 민주노총이라는 내셔널센터의 존재와 대공장 노동조합이라는 주력부대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 총파업은 1997년 1월 18일, 민주노총 지도부가 ‘유연한 전술’이라는 명목으로 수요파업으로 전환한 이후, 투쟁의 주도권을 상실하면서 결국 3월 국회에서 노동악법 재개정이 통과됐다.
(3) 총파업 투쟁은 노동악법을 완전히 저지시켜내지 못했지만, 민주노조운동의 민주적⋅계급적 발전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사적 의의와 가능성을 남겨 주었다.
- 1996~97총파업은 ‘노동악법 전면무효화’라는 정치적 요구를 중심으로 전노동자계급의 이해와 단사별, 지역별, 업종별, 산업별 이해를 일치시켜 하나의 계급으로 단결시켜 내는데 성공했다. 이는 한편으로는 금속노동자를 중심으로 강고한 파업투쟁동력을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19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소위 넥타이부대라 일컬어지면서 하나의 ‘시민’으로 민주주의투쟁에 참여했던 사무전문직 노동자들이 1996~97총파업투쟁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일부로 총파업투쟁에 조직적으로 나섰기 때문이기도 했다.
- 또한 1996~97년 총파업투쟁은 투쟁의 형태에서도 민주노총의 조직적인 준비를 통한 총파업투쟁이 중심이 되어 가두 집회와 시위를 결합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대중적 정치 총파업투쟁을 통해 정권의 존립 자체를 위협할 수 있는 세력적 접근전이 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현실에서 확인시켜 주었다.
- 나아가 1996~97년 총파업투쟁은 그 성격에서 실질적 민주주의(사회⋅경제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정치적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를 계급 내적으로 결합시킨 새로운 형태의 민주주의투쟁으로서 기존의 무계급적 민주주의투쟁과는 다른 성격, 다른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이를 통해 한국의 사회운동은 이제 청년학생이나 재야세력이 사회운동을 주도하던 시대로부터 노동운동이 사회운동을 주도하는 시대로 전환됐음을 현실적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에 맞서 내셔널센터 수준에서의 정치총파업을 전개한 것은 1980년대 이후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상 유래가 없는 것이었고, 따라서 신자유주의 공세로 고통받고 있었으나 침묵했던 전세계 노동자들을 고무시켰고,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선 전세계노동자들의 반세계화투쟁에 하나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노동운동은 국제적인 고립을 벗어날 수 있었다.
(4) 신자유주의적 노동정책을 ‘노동법 개악’ 강행을 통해 법제화하려던 김영삼 정권의 시도는 노동자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부분적으로 좌절됐다. 민주노총의 1996~97년 노동법 개악저지 총파업투쟁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1996~97년 노동자총파업은 ‘신노사관계 구상’이라는 허구적인 ‘사회적 합의’ 시도는 무산시켰지만, 노동법의 개악 그 자체는 저지시켜 내지 못했다.
- 1997년 하반기 들어 재경원을 중심으로 기업의 인수⋅합병 시 정리해고를 가능케 하는 ‘구조조정 특별법’ 개정이 추진되고, 8월 말에는 임금과 인원감축에 대한 노조동의서 첨부를 주 내용으로 하는 부도유예협약이 개정되는 등 국내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위한 공세가 본격화될 즈음, 그해 10월 말에 한국 사회는 외환금융위기에 직면하게 됐다. 결국 김영삼 정부는 그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처방으로 IMF에서 제시한, 긴축정책과 구조조정, 개방화, 국공유기업의 사유화, 노동유연화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정책 권고를 전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5) 민주노총의 96~97년 총파업투쟁은 한편으로는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개되어 왔던 총자본과 총노동간의 대립을 총괄하는 투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투쟁의 승패와 관계없이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과 세계화 시대에 다가 올 노동과 자본간의 피할 수 없는 격돌을 알리는 서곡이었다.
-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개악 날치기 통과 시도는 1997년 대선에서의 정권재창출을 위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플랜이기도 했지만, 보다 근저적으로는 90년대 이후 격화되는 자본의 세계적 경쟁 속에서 노동유연화라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강화를 통하지 않고는 생존할 수 없는 국내 자본의 사활이 걸린 공세였기 때문이다.
3) 1996~97년 노동법개악 저지 총파업투쟁의 교훈
(1) 1996~97년 총파업은 파업투쟁의 역동적인 과정을 거쳐 계급적 힘관계를 전환시켜 낼 수 있는 결정적인 시점에 지도부의 ‘수요파업’이라는 전술 전환으로 막을 내렸다.
- 정치총파업 자체의 힘을 통해 계급적 힘관계를 전환시켜 내고, 바로 그러한 정치적․물리적 주도력을 가지고 대정부협상을 하지 못할 때, 총파업 이후의 현실적인 결과는 그것이 갖는 숱한 역사적인 의의에도 불구하고 참담했다.
- 정권과의 협상의 주도권은 보수야당에게 넘겨주었으며, 끝내 1997년 3월에 노동법은 개악됐다.
- 40여 일간 역동적으로 총파업에 참여했던 현장의 노동자들은 아무런 가시적 성과도 얻지 못한 채 뒤이은 자본의 탄압과 공세를 고스란히 짊어지게 됐다.
- 총파업투쟁이 계급적 힘관계를 변화시켜 내지 못한 결과, 이후 10년간 노동자의 상태와 민주노조운동의 위기를 초래하게 되었다.
(2) 민주노총 지도부는 총파업의 패배 원인을 “의회 내에서 노동자계급의 입장을 대변할 정치조직의 부재”라고 진단하고, 총파업의 정치적인 성과만을 챙긴 채, 97년 대선을 향해 달려 나갔다. 노동자대중은 정치적 무력감과 패배감 속에서 다시 대선에 출마한 자신의 대표자를 위해 몸과 돈을 대야 했으며, 대선의 결과는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무력감을 더욱 심화시켰다.
(3) 결국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후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제를 수용하는 잠정합의를 하게 되고, 그 결과 민주노총은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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