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트 영역으로 건너뛰기

[강정마을] 신용인 교수(제주대 법학대학원), 전경들을 향한 길거리 강의

[강정마을]  신용인 교수(제주대 법학대학원), 전경들을 향한 길거리 강의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월 26일, 양규헌, 그리고 ---

2월 26일, 양규헌, 그리고 ---

 

그냥 모르고 지나갈 뻔 했습니다.

누군가가 귀뜸을 안해줬으면.

아마 이 글을 쓴 후 ‘까칠한’ 양규헌 선배로부터 한마디 들을 겁니다.

왜 쓸데없는 글 썼냐고.

그래도 그냥 모른척 넘기기가 영 그렇습니다.

망설이다가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혼날 때 혼나더라도 얘기는 하고 가야겠다고.

하고 싶은 얘기 하지 못해서 괜히 병나느니 할 얘기는 하고 살아야겠다고.

 

아직도 나는 그 이유를 잘 모릅니다.

요새 ‘환갑’이라는 것이 옛날 같지 않아 별 기념할만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서 굳이 나서서 올해 2월 26일이 환갑이라는 걸 알릴 필요는 없지만,

극구 그것을 감출 필요가 있는지.

아직 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얼굴이 그래도 동안이라 주변에서 그래도 몇 살은 더 젊게 보는데, 사실이 드러날까 봐 감추려 그런 건 아닌지.

올해 백기완 선생님도 8순인데, 괜히 ‘환갑’ 정도의 명함을 내밀었다가 백기완 선생님께 혼나는 것이 두려워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환갑’은 ‘환갑’입니다!

 

근데 이 말을 글로 쓰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전노협 깃발을 세우고 투쟁하다가 그 깃발을 가슴에 품어 새겨넣은 지가 벌써 20여년이 지났구나.

그 때는 40대 초반이었을텐데 --- 벌써 산하가 두 번 바뀔 만큼의 세월이 흘렀구나.

그 깃발 하나만을 가슴에 새겨, 오직 민주노조와 노동해방을 위해 꼬장꼬장하게 살아 온 세월이 벌써 수십년이 흘렀구나. ---.

세월이 그렇게 흘렀구나.

 

그래도

그 깃발 옆에서 양규헌 선배와 함께 한 20여년은 '동지'로서 행복했습니다.

앞으로 남은 30년(?)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야성 형, 그리고 한내 제주위원회 1주년 기념식

'야성' 형, 그리고 한내 제주위원회 1주년 기념식

 

뜻밖에 ‘야성’ 형을 사진으로 만났다.

10년이 넘었다.

형이 간암으로 돌아가신 때가 2002년이었던가.

그 전 해, 그러니까 2001년에 서울에 있는 아산병원에 입원해 있던 형의 얼굴을 본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해 초, 내 아내도 교통사고로 척추를 다쳐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제대로 돌봐 드리지도 못했다.

더 이상 치료할 여지도 없이 제주도에 내려갔던 형은 얼마 후 돌아가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가 제주도에 가끔 내려갈 때면 빼놓지 않고 만나뵜던 유일한 선배가 야성 형이었다.

지금도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제주도 도농 의장으로 있던 형이 지자체 선거를 앞두고 어떻게 할 지 상의해 와서 함께 토론을 했던 탑동의 어느 다방이.

내려갈 때마다 찾아뵜던 모슬포 집과 비닐하우스도.

그리고 훨씬 그 전, 91년도던가 내가 감옥에 있을 때 형에게 보냈던 편지 구절도 어렴풋하게 생각이 난다. 아마 ‘다랑쉬굴’ 발견과 관련한 내 소감이었을 거다.

“우리에게 남겨지고 기억되는 4.3.은 다랑쉬굴이지만, 48년의 4.3.은 희망이었을 거”라고 썼던 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형은 지금, 황사평 천주교 공동묘지 어딘가에 누워있다.

그간 두 차례밖에 찾아뵙지 못했다.

10주기가 될 때 형을 추모하는 책이라도 함께 만들었으면 했는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렇게 10여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

사진이 아니라, 1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 실물을 직접 보고 싶다.

 

2월 11일, 노동자역사 한내 출범 1주년 기념식 사진전에 걸린 형의 사진을 보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