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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80회 – 태풍이 지나가고

 

 

 

1

 

읽는 라디오 시작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성민이입니다.

 

태풍이 지나가고

날씨는 더없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눅눅해진 이불과 베개를 밖에 널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거의 1주일 동안 역대급 태풍이 온다는 말에 긴장하며 지냈고

태풍이 몰아친 그날 밤에도 긴장 속에 보냈더니

태풍이 지나고 난 후의 하늘이 더없이 편안해 보였습니다.

저희 하우스만이 아니라 주변에도 그리 큰 피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주변 밭에 애써 심어놓은 모종들이 걱정이었지만 그것도 생각보다 큰 타격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우스에도 큰 피해는 없지만 구석구석 짜잘하게 찢어지고 떨어진 것들이 있어서 반나절 정도 보수를 했습니다.

 

역대급 설레발은 쳤던 언론들이 쏟아내는 태풍피해 소식을 접하면서

안타까운 마음과 씁쓸한 마음이 교차합니다.

내가 사는 곳에 별다른 피해가 없었음에 안도하는 것이 이기적으로 느껴져서 TV를 꺼버렸습니다.

태풍이 오기 전에는 불안감만을 잔득 불어넣고

태풍이 지나고 나서는 죄의식만을 쌓아버리는

빌어먹을 뉴스들을 멀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태풍이 지나고나니 완연한 가을 날씨가 됐습니다.

이래저래 할 일들이 많은 요즘이지만

일하는 것이 훨씬 편해져서 그리 조급하지도 않습니다.

선선해진 날씨에 훨씬 활발해진 사랑이와 함께

평상에 앉아 쉬면서 시원한 바람결을 느꼈습니다.

 

 

2

 

재미있는 책을 하나 읽고는 인터넷서점 알라딘에 간단한 서평을 남겼습니다.

구질구질한 현실에도 기죽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30대 청춘의 얘기가 너무 좋아서

‘이 책 좆나 짱이다’라고 제목을 달아서 올려놓았습니다.

 

읽는 라디오도 그렇지만 알라딘 서재 역시도 찾는 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저 기록을 남겨둔다는 의미로 짧은 서평을 적어두고 있는데

며칠 후에 알라딘측에서 메일이 왔더군요.

제가 올린 글에 부적절한 비속어가 있어서 공개범위를 제안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것까지 검열하듯이 걸러낸다는 사실에 황당하더군요.

내용에 상관없이 비속어가 포함됐다는 이유만으로 블라인드 처리하는 것도 짜증났습니다.

하지만 알라딘에 항의하고 정정을 요구하는 것들이 귀찮아서 그냥 메일을 지워버렸습니다.

그리고 해당 글을 다시 읽어보고는 ‘좆나’라는 표현을 ‘진짜’로 수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끝이었죠.

 

예전의 저였다면 알라딘측에 장문의 항의서를 보내서 부당한 검열을 중단하라고 요구했을 겁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가능한 범위에서 이슈화시키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들도 했겠죠.

당연히 ‘좆나’라는 표현을 고치지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귀찮다는 이유로 어떠한 항의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문제된 표현을 순순히 고치기까지 했습니다.

예전에 읽는 라디오에 ‘신천지’와 관련된 내용이 들어갔을 때 포털측에서 이의신청이 들어왔기에 블라인드 처리한다고 했을 때도 어떤 항의도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었던 일도 있습니다.

 

성민이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요?

귀찮다는 거는 그냥 변명이고 사실은 그런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항의하거나 이슈화하면서 에너지를 쏟기가 싫은 겁니다.

지금 제가 살아가는 삶이 편안하고 조용하기 때문에 외부에서 오는 자극에 반응하기 싫은 거죠.

세상의 잘못된 관행과 행태들이 있어도 그에 맞서는 게 싫어서 순순히 그 요구를 들어줘 버리는 것은 지난 시절 제가 그토록 비판해왔던 삶의 태도였습니다.

현실의 변화를 막아서는 강력한 힘은 거대한 악의 추악한 권력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귀찮다는 이유로 순순히 그것을 받아들이는 기성세대의 현실순응적 태도들이었습니다.

지금의 저는 그런 기성세대의 모습으로 변해하고 있는 겁니다.

 

언론의 보도태도가 싫다고 뉴스에서 등을 돌려버리고

부당한 간섭에 항의하는 것이 귀찮다고 검열에 동조해버리면서

한발씩 한발씩 세상에서 뒷걸음질 치며 저만의 평화로 숨어들고 있으니

추악한 세상은 점점 굳건해지고 저는 조용한 보수주의자가 되어갈 뿐입니다.

 

 

3

 

내 자신의 보수화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들을 곱씹고 있었는데

내 안의 성민이가 고개를 쑥 내밀더군요.

 

 

내 안의 성민이 : 아이 씨, 시끄러워 죽겠네. 야, 그만 좀 궁시렁거려라.

 

성민이 : 그렇지 않아도 너랑 대화하고 싶었는데...

 

내 안의 성민이 : 대화는 개뿔, 너는 가끔 보면 별 시답잖은 걸 같고 심각하게 고민하더라.

 

성민이 : 야, 그렇게 얘기하지마. 나한테는 나름 중요한 문제라고.

 

내 안의 성민이 : 모든 고민은 다 자신에게 중요한 문제야. 그런데 제3자가 보면 별거 아닌 게 태반이거든.

 

성민이 : 남들이 봤을 때 별거 아니라 해도 당사자가 심각하면 그건 심각한 거야.

 

내 안의 성민이 : 아후~ 야, 니가 예전에 혁명을 꿈꾸면서 황성하게 활동할 때 말이야, 그때 2년 넘게 아르바이트 하던 곳에서 일을 그만두고 퇴직금을 못 받았잖아. 그때도 너는 사장한테 한마디로 못했다면서 자괴감에 빠져서 막 고민하고 그랬어, 기억나?

 

성민이 : 어.

 

내 안의 성민이 : 그때 ‘정당한 퇴직금도 받아내지 못하는 소심한 인텔리겐차’는 그 후에 어떻게 됐어? 너는 이런저런 투쟁에 열심히 결합했고, 몇 년 후에는 목숨 걸고 싸우다가 구속되기 했잖아.

 

성민이 : 그랬지. 그때 퇴직금을 받아내지 못한 건 그 문제에 대해 내가 그만큼 절박하지 않았던 것일 뿐이었지.

 

내 안의 성민이 : 그래, 그거야. 지금도 마찬가지야. 너는 블로그에 올리는 글에 대해 이래저래 간섭해도 그게 별로 절박한 문제로 느껴지지 않을 뿐이야. 그냥 그것일 뿐이라고. 그걸 갖고 무슨 보수화니 어쩌고 하면서 쓸데없이 머리 싸매고 난리냐.

 

성민이 :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내 안의 성민이 : 야! 니 입으로 했던 말이 있어. 너는 지금까지 최전선에서 최선을 다해 싸워왔는데 어느 날 여기까지 밀려왔을 뿐이라고. 지금도 너는 최전선에 있는 거야. 너의 방식으로 최선을 다해 싸워나가고 있는 거고.

 

성민이 : ...

 

내 안의 성민이 : 더 하고 싶은 얘기 있어?

 

성민이 : 음...

 

내 안의 성민이 : 그럼 나 갈테니까. 그만 좀 궁시렁거려라.

 

 

내 안의 성민이가 들려준 얘기를 곱씹으며

독려도 하고, 싸움도 하고, 회피도 하고, 그러고 있었는데

옆에 있는 펜션에 놀러온 사람들이 술 먹고 노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

머릿속을 헤집어 버렸습니다.

 

 

 

(조성일의 ‘망치와 칼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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