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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94회 – 아름다운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1

 

읽는 라디오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아흔 네 번째 방송 시작하겠습니다.

오늘 방송을 진행하는 저는 성민이입니다, 반갑습니다.

최근에 들려온 두 분의 죽음에 대한 얘기로 오늘 방송 시작해볼까 합니다.

 

울산에서 노옥희 교육감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지병도 없던 분이 식사를 하시다가 급성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다고 하니 얼마나 황망한 소식인지 모릅니다.

제가 울산에서 노동운동을 할 때 노옥희 선생과는 정파적 입장이 달라서 친하게 지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정파적 논리와 상관없이 조그만 투쟁현장에도 함께 자리를 하고, 뭔가 주장을 하기 보다는 포근한 얼굴로 얘기를 듣기만 하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습니다.

그 이후 저는 울산을 떠났고 울산에서 활동을 계속 이어갔던 노옥희는 교육감이 돼서 제도권으로 들어갔더군요.

교육감이 된 이후에 어떻게 활동했는지를 모르지만 무난하게 재선에 성공했다는 소식도 들려왔었는데...

이제 주위에서 하나 둘 떠나는 소식이 익숙해지는 나이가 돼서 그런지 이런 소식들이 덤덤하기는 하지만, 갑작스럽게 들려온 소식에 마음이 알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첫 제사를 준비하기 위해 가족들이 모여서 이것저것 음식을 만들던 도중

잠시 쉬는 짬에 휴대폰을 들여다보는데

이태원에서 살아남았던 한 분이 먼저 간 친구들을 따라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마음이 쿵 하고 떨어지더군요.

살아남은 지난 한 달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월드컵과 화물연대파업으로 뜨겁던 세상이 얼마나 추웠을지

그 분의 마음에 가닿지는 않았지만

그 냉기는 매서운 한파와 함께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마음속으로 다시 주문을 외웠습니다.

“외면하지 말자, 참견하지 말자, 몸으로라도 바람을 막아서 온기를 지켜주자.”

 

 

2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요즘 이곳은 월동채소 수확이 한창입니다.

지난 9월에 심어놓은 모종들이 따뜻한 가을 날씨 덕에 무럭무럭 자라서

곳곳이 진한 초록 채소로 풍성합니다.

잘 자란 채소들을 흐뭇하게 보며 즐거운 마음으로 수확을 해야 하는데

주위의 얘기를 들어보면 그렇지 못하다고 하네요.

 

지난 가을이 너무 포근해서 채소들의 성장이 너무 좋았던 것이 문제라고 합니다.

전국 대부분 월동채소의 성장이 좋고 포근한 날씨 때문에 출하시기도 빨라지다 보니

시세가 형편없다고 합니다.

평소 한 묶음에 5~6천 원 하던 쪽파가 1천 원에 나간다고 하니

겨울농사로 먹고사는 이곳 농민들 입장에서는 한숨이 나올 판입니다.

쪽파만이 아니라 브로콜리 취나물 등 대부분이 다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시세가 좋아질 때까지 수확을 마냥 늦출 수도 없어서

때마침 몰아친 한파 속에 바쁜 손길을 움직이고 있는 요즘입니다.

 

 

3

 

우리는 평화롭고, 성스럽고, 영적인 지점에 이르려면 내면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내면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외부에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 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릴 독자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저 안’보다는 ‘이 밖’에서 뭔가 놀라운 것을 발견할 가능성이 더 크다.

세상으로 나가 원하는 일을 하고 싶다면 우선 머릿속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머릿속에 갇혀 있으면 온갖 생각과 감정, 감각이 혼란스럽게 끓어오르고, 바깥에 있는 의미 있는 연결점들이나 통찰, 영감에 접속할 수 없다. 스스로 만들어 낸 흙탕물 속에 갇히기 때문이다. 자신에 대하여, 그리고 무엇이 가능할지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을 얻고 싶다면 내면의 벽을 뛰어넘어 자신의 주변을 ‘진정으로’ 바라보고, 꽃향기를 맡고, 다른 사람들과 진심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그래야 완벽하게 새로운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배런 뱁티스트의 ‘나는 왜 요가를 하는가?’라는 책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양한 관점을 가질 수 있고,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따라 또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제가 이 글을 읽었을 때, 저에게 필요한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읽는 라디오를 진행한지 11년이 됐습니다.

그동안 많은 생각을 늘어놓았고 그만큼 많은 것을 경험하며 느껴왔습니다.

그 시간들 속에서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알게 됐고, 그렇게 내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다보니 편안하고 여유로운 삶이 덤으로 주어졌습니다.

그 편안함과 여유로움에 안주하지 않으려고 세상으로 눈으로 돌려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고 주문을 외워보지만 세상에서는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고 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그렇게 때문에, 저는 더 편안하고 여유롭습니다.

 

이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바라보면서 제가 늙어가고 있음을 느끼게 됐습니다.

변화와 도전보다는 익숙한 현실에 안주하면서 적당히 능력을 갉아먹으며 살아가는 삶

외부의 충격에 저항하기보다는 얼마 되지 않는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물러서며 합리화하는 삶

점점 왜소해지는 자신을 객관화하기 보다는 내면으로의 침전을 통해 주관적 아집에 집착하는 삶

이렇게 살아가는 것도 남들에게 크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그리 나쁠 것이 없겠지만

제가 갖고 있는 자산이 그리 많지 않고 제 삶이 너무 많이 남아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읽는 라디오 네 번째 시즌인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는

그런 문제의식에서 세상을 향해 눈을 돌려보자고 시작했지만

원심력보다는 구심력이 강해서 점점 원점으로 회귀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목표했던 것이 실패하고 있다는 걸 자각하고 있는 샘이죠.

그래서 과감하게 이번 시즌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자꾸 내면으로 향하는 시선을 다시 저 밖으로 향하기 위해 또 다른 무엇이 필요할지 좀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그렇게 다시 밖으로 향할 준비가 됐을 때 다섯 번째 시즌으로 돌아올 생각입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를 오늘 방송에서 마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그냥 마무리 짖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기에

앞으로 여섯 번의 방송을 더 이어가서 100회까지 진행하고 마치기로 했습니다.

그러면 이 겨울의 끄트머리쯤에서 마무리가 될 것 같은데요

남은 겨울 동안 좀 더 귀를 쫑긋 세워서 세상의 소리를 들어보려고 노력해보겠습니다.

여러분, 아름다운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윤선애의 ‘아름다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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