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95회 – 이 추위에도 성탄절은 찾아오고

 

 

 

 

1

 

읽는 라디오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가자, 아흔 다섯 번째 불을 꼅니다.

안녕하세요, 들풀입니다.

 

오래전에 어느 절에서 진행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가

제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어서 정리했던 글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그 글을 다시 읽으며 지금의 저를 돌아보게 됐습니다.

 

 

프로그램 중에 스님과 대담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는데

참 많은 얘기를 하면서 느끼는 점이 많았어요.

스님이 얘기 중에 ‘강해져야 한다’고 해서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 했는데요

얘기를 듣다보니 나중에는 고개가 끄덕여지더라고요.

길게 얘기하긴 그렇고 아주 간단히 요점만 정리하면

풍진세상을 살아가려면

허약한 것보다는 건강한 게 낫고

나약한 것보다는 강직한 게 낫다는 겁니다.

강하다는 것이 남을 누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누름을 떠받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빠가 아이를 누른다고 아이가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빠가 아이에게 가해지는 누름을 떠받쳐줌으로 아이가 잘 자랄 수 있고

아이가 잘 자라야 아빠도 잘 자랄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직 혼자인 저는 떠받쳐줄 아이는 없고

우선 제 자신을 떠받쳐주는 것부터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을 떠받쳐주려면 제가 강해져야 하겠지요.

그렇게 제 안의 저와 밖의 제가 서로 잘 자라도록 해봐야겠습니다.

 

 

‘강해져야 한다’는 의미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 떠받쳐줄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어서

이래저래 치이며 힘들어하던 제게 소중한 이정표처럼 다가왔었습니다.

 

그리고 8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저를 힘들게 했던 문제들은 그냥 지나가버렸거나 여전한 숙제로 남아있기도 하지만

지금의 저는 조금 단단해진 것 같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강해지기 위해 특별히 노력한 것은 아닙니다.

쓰러지지 않으려고 버티다보니 지구력이 조금 생겼고

뒤처지는 것에 불안해하지 않으려하다 보니 약간의 여유가 생겼고

답이 보이지 않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려다보니 지금에 충실하게 됐습니다.

 

읽는 라디오를 2년 가까이 진행하면서

헤매고 고민하는 제 자신을 수없이 다독여왔습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의 얘기를 많이 듣게 됐고

그 얘기에 귀 기울이면서 저를 이해하게 됐고

그 과정을 솔직히 드러내면서 저를 격려해주었던 과정이었습니다.

읽는 라디오를 진행했던 지난 2년은

이렇게 저를 떠받쳐주는 힘을 기르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읽는 라디오를 그만두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애초에 제가 읽는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성민씨와 했던 약속은

읽는 라디오와 성민씨가 세상을 향해 한발자국 다가서는 것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전혀 이뤄지지 못한 채 제 자신만 내면의 평온함을 갖게 돼버린 것이죠.

내면의 평온함을 얻게 된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읽는 라디오가 가고자 했던 방향으로 나가지 못한 채 제자리에서 맴돌고 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너무도 아쉽지만, 이번 시즌을 마무리하는 것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으로 남아있는 다섯 번의 방송은 그런 아쉬움들을 듬뿍 담아서 후회 없이 진행할 수 있도록 노력해봐야겠습니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그리 거창하지도 화려하지도 않겠지만 말이죠.

 

 

2

 

북유럽국가에는 얀테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제도나 법률로 굳어진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 널리 퍼져있는 규범이라는데

우리의 가치관으로 봤을 때는 조금 의아합니다.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만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남들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당신이 모든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남들을 비웃지 마라.

누군가 당신을 걱정하리라 생각하지 마라.

남들에게 무엇이든 가르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마라.

 

 

개인의 성공보다는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하는 나라여서 이런 가치관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고 하는데

평등한 인간관계를 자연스럽게 만들어나가는 장점과 함께 개성과 창의력을 암묵적으로 눌러버리는 억압의 요소도 있다고 합니다.

경쟁과 개인주의에 찌들려 삭막하게 살아가는 우리네 현실에서는 살짝 부러울 수 있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지만

혈연과 지연이라는 공동체의식이 강했던 부모님세대에게서 느낄 수 있는 전통적 가치관과 많은 부분 닿아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과거의 관습은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지금의 현실에는 적응하고 싶지 않은

나는 어떤 가치관을 가져야할지 고민하면서

얀테의 법칙에 비춰서 저를 들여다봤습니다.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 내가 특별하지는 않아.

당신이 남들만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어.

당신이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 나는 똑똑하지도 않아.

당신이 남들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마라. -> 남들보다 나은 면도 있고 못한 면도 있는데...

당신이 남들보다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 마라. -> 나는 아직 배워야할 것이 많아.

당신이 남들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중요할 수 있어.

당신이 모든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 내가 하는 일은 잘하고 싶어.

남들을 비웃지 마라. -> 절대로! 절대로! 그렇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어.

누군가 당신을 걱정하리라 생각하지 마라. ->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너무 슬플 거야.

남들에게 무엇이든 가르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마라. -> 누군가를 가르치기 보다는 누군가에게 배우는 것이 더 좋아.

 

 

3

 

매서운 추위와 함께 적지 않은 눈까지 내려 겨울다운 겨울을 실감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겨울다운 겨울’이라는 표현을 쓰기에 올 겨울 추위가 매서워서 조금 조심스럽기도 합니다.

‘삼한사온’이니 ‘삼한사미’니 하는 말은 옛날이야기고 올해는 ‘삼한사냉’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한번 추워지면 좀처럼 그 기세가 수그러들지 않네요.

 

이렇게 추운 겨울의 한복판

지지율 반등에 자신감을 얻어 어깨에 힘을 주는 이들에 맞서

허망하게 죽어간 가족들의 영정을 들고 울부짖는 유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제 마음도 서늘하게 얼어버립니다.

그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들이 걸어가야 할 고난의 길이 얼마나 힘들지는 알 것 같아서

아무 말 없이 바라볼 뿐입니다.

 

이곳보다 더 추운 우크라이나에서 견뎌야 하는 겨울은 또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독재에 맞서 싸우기도 버거운데 점점 관심에서 멀어지는 현실에 미얀마 사람의 겨울은 또 얼마나 쓰라릴지

상상하기 어려운 맹렬한 눈보라와 혹한에도 따뜻하게 몸 기댈 곳이 찾기 어려운 미국 빈민들의 겨울은 또 얼마나 공포스러울지

감히 상상이 되지 않아서

그냥 떠올려보기만 합니다.

 

그 와중에 성탄절은 찾아왔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쟁에 지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하자”고

성탄메시지를 보내셨네요.

김민기가 부른 ‘금관의 예수’ 들으면서 오늘 방송 마치겠습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