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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작의 행진'을 위하여(이어서)

알엠님의 [좋은 사람] 에 관련된 글.

내가 고 3때 처음으로 골방이긴 하지만 내 방이 생겼다.

직사각형으로 길다란 방이였다. 

한 쪽면에 책상이 들어가면 그쪽면이 꽉찼고 나머지 공간에 겨우 누울 수 있는 그런 방이었다. 

그래도 너무 기뻤다. 나만의 공간이 생긴 것이 왠지 어른이 됐다는 의미로 여겨져서 뿌듯했다.

나만의 공간을 꾸미는 것에 재미도 들렸던 거 가다.

그 동안 그렸던 그림이며 이런 저런 포스터를 벽에 여기 저기 붙여 놓았다. ^^

거기엔 맥가이버 사진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내 방에도 가전제품이 들어 왔으니 그게 TV였다.

14인치 정도 되는 TV였는데, 어릴 적 부터 토요명화를 열심히 봤던 나로서는 내 방에 나의 TV가 생긴다니 꿈만 같은 일이었다. 물론 TV는 그때 마침 시작한 TV과외를 보라고 놓아준 것이긴 했지만 ....

난 TV과외를 조금 보다가 채널을 다른 곳으로 돌려 그 시간대에 하는 다큐멘터리를 봤다.

이런 저런 역사에 대한 것, 자연에 대한 것, 사회적 이슈에 대한 것 등 참 다양했는데 닥치는 대로 봤던 거 같다. 그러다 아....이렇게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면서 나도 저런 거 만들어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왠지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행복해질 것 같았다.



대학에 들어가자 마자 다큐멘터리를 공부할 수 있는 강좌를 듣기도 하고 거기서 TV에서 보는 다큐가 아닌 다른 종류의 다큐가 있다는 것을 알고 다큐를 통해 그 동안 알고 있었던 것들은 반쪽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신나게 공부를 했다. 거기서 이전에 포스트로 썼던 '첫사랑' 다큐도 만났다. 그렇게 다큐에 대해 알아갔지만 정작 만드는 것은 엄두가 나질 않았다.

 

꿈은 쉽게 이룰 수 없었다.

 

겉으론 활발하지만 난 속으로 참 많이도 곪아 있었던 것 같다. 자신을 긍정하는 방법을 몰라 끙끙댔고 자신감이 없어서 항상 어딘가로 숨고만 싶었다. 그러면서도 이런 저런 일들을 계속 했다. 하지만 그속에서 행복하지는 않았다. 인간관계도 참 척박했다.

 

그러다 정보통신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도 '5년만 있으면 인터넷으로 동영상을 볼 수 있어, 그건 말이지 너만의 채널을 가질 수 있단 뜻이야'란 친구의 꾐에 빠져서 말이다. 지금이야 넘 당연한 것이지만...당시가 95년이니 그 친구의 멘트는 좀 오버였다. 그렇게 정보통신운동을 시작했지만 참 어려웠다. 여전히 온라인의 세계에 익숙하지 못한 나인데 그 당시는 어떻겠는가?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하루하루가 참 힘들었다. 

 

그런 와중에 사무실을 자주 오는 비슷한 또래의 영상활동가가 오는 날은 난 더 초라해졌다. 

그녀는 항상 바쁘게 사무실에 왔다 일을 보고는 휭하니 가곤 했다. 그녀는 너무 당당했고 지금 제작하는 영상 때문에 고민이 많다고는 했지만 그저 멋지게만 보였다. 그녀가 그렇게 멋지게 보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항상 카메라 가방을 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저거 하고 싶은데.....난 내 꿈에서 너무 멀리 온 것이 아닌가? ' 

참 많이 부럽고 슬펐다. 

 

그러다 아는 친구가 중국으로 여행을 가는데 그걸 다큐로 만들고 싶다고 내게 기획을 맞아달라며 부탁을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게 그런 부탁을 한 친구가 너무 고마웠다.

몸 담고 있는 단체에서는 나의 나이를 생각하라며 새로운 영역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했다. 그때 나의 나이 28정도였다. 틀린말은 아니지만 그때는 그게 마지막 기회처럼 느껴졌다. 내꿈을 향해 가는 ...

 

이래 저래 그 작업은 미완성으로 끝났지만 난 그 일을 통해서 내 안에 있는 욕망이 더 이상 덥어둘 것이 아님을 알았다. 그때 나는 참 맑았다. 한가지 욕망 밖에 없었다. 다큐를 하자. 사람들고 만나고 사람들과 호흡하고 그렇게 다큐멘터리를 만들자. 당장 마음 속에서는 하나의 생각만 났다. 

'카메라를 사자!' 푸훗...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지만 당시는 참 절박했던 것 같다.

그래서 생전 처음 회사를 들어가 돈을 벌었다. 딱 카메라 살 돈만 벌자. 그런 맘으로 일을했다. 그리고 딱 그 돈

을 벌어 나왔다. 그돈으로 카메라를 사고는 닦고 닦고 또 닦았다. 그 카메라가 PD100 이었는데 이름도 지었다. "카멜" 이걸 이름으로 부르면 '카멜아'가 된다. 소리로는 '카메라' ㅋㅋ...그러면서 어찌나 좋아했던지.

 

회사를 나오기 전에 강좌를 하나 들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배울 것이 없는 그런 강좌였다. 그래도 그때는 강좌를 들으러 가는 길이 너무 좋았다. 그 길은 걸어가기에는 어둡고 추운 길이었는데 그길만 들어서면 이상하게 가슴이 뛰고 꿈을 다 이룬 것 마냥 벅찼다. 

 

무대뽀도 그런 무대뽀가 있을까?

참 운도 좋았던 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아는 선배가 동영상 컨텐츠 만드는 것을 부탁했다.

먹고 사는 것이 그때 만큼 쉽게 풀렸던 적이 없는 것 같다. ^^

프리미어를 조금 배워서는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긴다.) 그걸로 막 산 카메라로 촬영한 영상을 하루 종일 주물럭 거리면서 편집해서 겨우 납품을 하곤 했다. 

그래도 그때는 그게 먹혔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이제 일을 시작해야 하는 데 정말 내가 갈 곳은 없었다.

영상 동아리 출신도 아니었고 푸른영상이며 노뉴단, 서영집이 있었지만

새내기로 시작하기엔 너무 나이가 많은 날 선뜩 받아 줄 곳은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받아달라고 말할 그럴 용기도 없었다.  

 

그런 와중에 방송국에 아는 사람이 생겼다.

인터넷 한 카페에 가입했는데 그곳에서 알게된 사람들이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아는 것도 하나도 없으면서 사람들을 막 만나고 다녔다.

그래도 기뻤다. 그저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는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참 좋아보였다.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던 중에 촬영을 하러 가지 않겠냐고 전화가 왔다. 그것도 뉴스 꼭지를 위해서...떨렸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게 그러겠다고 했다. 그렇게 방송국에서 일을 시작했다.

 

처음으로 촬영하러 나간 날,

같이 나간 기자에게 내가 초보자인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꽤나 노력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카메라를 돌렸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난 자괴감에 빠졌다.

도대체 뭘 찍었는지 생각이 안났다. 너무 막막했다. 너무 쪽팔려서 얼굴을 들수가 없었다.겨우 방송국에 돌아와서 내게 전화를 해 일을 시킨 선배를 찾아갔다. 그리고 일을 시켰으니 책임지라고 땡깡을 부렸다. 그때 그 선배가 했던 말은 지금도 명언이다. "촬영할 때는 딱 두가지만 생각해. 앵글과 사이즈. 그것의 조합이야. 그 다음이 컨텐츠고..."

그리고 자꾸 하면 는다고도 했다. 카메라를 들고 자신감이 없을 때 그만한 조언도 없다. 지금도 가끔 강좌를 할 때 그말을 써먹는다. 그때 그말은 쪼그라들대로 쪼그라든 나의 마음을 쫙 펴준 말이었다. ㅋㅋ

 

방송국은 거대한 공장이다. 각기 맡은 일을 하면 되고 그 일을 제대로 못한다 싶으면 다음날 연락이 안온다. 그 첫날 내가 그 선배에게 했던 행동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거다. 어디 뭘 모른다는 이야기를 다른 사람 앞에서 할 수 있나. 방송국에서...그곳은 정글이고 살아남아야 하는 공간이었다. 

 

 

임산부 체조하러 가야 한다...다음 이야기는 갔다 와서..........

^__________________^

 

 

으흐....이 뒷 부분이 다 날라갔다.

다시 힘내서 마무리를!

 

방송국에서 좋은 사람들도 만났다. 운이 좋았던 게지.

얼마나 개차반 같은 사람들이 많은 곳인데.

다행히 카메라를 든 여자는 별로 없었고 아이들과 여성에 관한 아이템이 오면

언제나 내 차지였다. 조금씩 카메라를 드는 것이 힘들지 않았고 또 나름대로의 내 장점도 발견하면서 일하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그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열심히 A를 찍어 가면 편집 후에는 B가 되어 방송 되는 모습을 보면서 오래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곳에서 참 얄굿은 것을 많이도 배웠다. 돈도 벌었고.

 

그러다 여성노조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하지만 작업에 대한 미련 때문에 그리 활발히 활동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거기서 좋은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독립다큐멘터리를 하고 있던 친구였는데 그 친구와 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경험이 많은 친구는 얄굿은 경험만 있는 내게 별 불편한 표도 내지 않고 같이 일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작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친구 덕분이 아닌가 싶다. 그때는 그저 작업을 한다는 것에 정신이 없어서 별말 못했지만 고맙다는 이야기를 해야 할 듯. 친구~~고마워~~

 

왜 이런 이야기를 주저리 주저리 할까?

시작할 때의 나의 무대뽀를 자랑하고 싶어서?

아니 어쩌면 졸작이 될 것이 뻔한 이번 다큐를 생각하면서

그래도 지금은 작업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고 내 마음을 다지는 것이다.

 

그때는 한가지만 있었다.

하자.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고 그럴 능력이 되지도 못했다.

난 참 이해력이 느리고 머리로 보다는 마음으로 느끼고 겪어야 겨우 이해한다.

 

그래서 다행이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머리로 '아,,,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고'해서 다큐를 만들 수 없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의 경험을 같이 마음으로 경험하면서 그들의 경험을 나누고 다른 사람에게도 그걸 나눠 주고 싶다. 그렇게 소통하고 싶다. 다른 사람의 경험은 그게 즐거운 경험이든 힘든 경험이든 다 나에게로 오면 아프다. 이렇게 힘든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마음이 짠하다. 어쩌면 사는 것 자체가 참 아픈 건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아픈 마음은 다 마찬가지 일테지. 아닌척 이런 저런 것들을 갔다 붙여도 말이다. 이런 마음을 어떻게 하면 잘 나눌 수 있을까 고민하고 고민하다 보면 처음에는 안보이던 이런 저런 것들이 조금씩 보이고 그러면서 나도 성장할 수 있다.

어쩜 난 소통을 잘 못하는 사람인지 모른다. 너무 자기 안에 갇혀 있어서 남의 안에 뭐가 있는지 느끼기에 모자란 것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다행이다. 다큐멘터리가 있어서.

 

남을 느끼고 그걸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그 과정을 겪으면서 난 확장되고 사람들과 만나 소통한다.

 

'소재로 다큐를 한다.' 그건 아마 진짜 다큐가 아닐 것 같다.

겪고 경험하고 이애하고 소통하기 위해 고민하고 고민하고 방바닥을 구르면서 또 고민하고 그렇게 해서 겨우 만들어 내는 것이 다큐인데.....그걸 어찌 소재만 좋다고 할 수 있을까?

 

이번 작업?

졸작이 되겠지. 정말 졸작이 될 것 같다.

하지만 졸작이면 어떠랴. 계속 다큐멘터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다행이 아닐까?

 

요즘 심한 딜레마에 빠졌다.

아기를 만나는 때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정말 아기가 힘이 될 것 같다.

아기를 만나면 고맙다고 몇번을 이야기해주고 싶다. 일 욕심 많은 엄마를 만나 고생했는데 고맙다는 말을 꼭 해야 겠다.

그런데 아기를 만나기 전에 작업을 마쳐야 한다.

작업을 졸작이 되더라도 마치려면 시간이 부족하다. 턱 없이 부족하다.

이야기를 여기서 하나만 팔까? 아니면 넓혀야 하나?

이상은 멀고 현실은 가깝다.

고민에 고민은 꼬리를 문다.

시간을 막 붙들고 늘어지고 싶다.

그래서 괴롭다. 어잉.....

 

그래도 해보자.

'졸작의 행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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