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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세미나를 한다. 한동안 끊었던 세미나를. 하도 공부를 안했더니..머리에서 통 소리가 난다. 아마 통 소리가 났어도 안했을 수도 있다. 오랫동안 그렇게 살았으니까. 하지만 뭔가 알고 싶어졌나 보다. 다큐에 대해 말이다. 그래서 세미나를 시작했다. 한텀이 끝나고 이제 새로운 커리로 시작한다. 역시 공부는 좋은 거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잘 알게 되었으니. 아주 오래전에 한 십년은 넘은 시간 전에 그를 알게 되었다. 아니 그의 다큐를 알게 되었다. 제목은 <베트남, 돼지의 해>. 처음 볼 때는 졸았다. 어찌나 인터뷰가 많고 게다가 영어로 말하니 뭔 소린지. 그런데 두번째 보고 잠이 깨고 세번째 보고 전 존재가 떨리는 경험을 했다. 전 존재가 떨린다. 그런데 다른 표현이 없는 거 같다. 69년에 만든 다큐인데 베트남전에서 미국이 질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다. 조목 조목..여러 가지 사실들 중에서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고 알고 있는 것들을 하나둘 보여준다. 그 다큐는 68년 이후 조금씩 싹트고 있던 반전 열풍에 불을 지폈다. 기름에 불을 던진 셈이다. 그 역사의식에 박수를 쳤다. 아 이거 해보면 재미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포즈... 한동안 난 이러 저러한 것들을 하러 이리 저리 뛰어 다닌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그 다큐를 봤을 때의 떨림을 잊을 수가 없었던 듯 하다. 그러다 다큐를 시작하고... 그런데 그런 그를 만났다. 세미나 책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있었다. 한 십이년 만의 재회인 듯 하다. 그때는 그의 이름도 몰랐다. 이젠 그의 이름을 안다. 에밀 디 안토니오. 에밀 디 안토니오


History is the Theme of All my Films AN INTERVIEW WITH EMILE DE ANTONIO - source : From an interview by Gary Crowdus and Dan Georgakas, in Cineaste, 1982 Emil De Antonio(1920~1989)는 펜실베니아의 태어났고 일찍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다. 바지선 선장, 선생님, 부두 노동자 등 몇 가지 직업을 전전한 후 1964년, 그는 맥카시 공청회에 대한 편집물, Point of Order!를 들고 영화 영역에 발을 디딘다. 그 후 그는 다수의 자신의 좌파적 견해를 반영한 다큐를 제작했다. In The Year of the Pig(1969) : 베트남 전쟁에 대한 Milhouse : A White Comedy(1971) : 닉슨 대통령을 풍자한 영화 Underground(1976) : 급진적인 반자본주의자의 지하활동에 대한 영화 Painters Painting(1972) : 전후 뉴욕 화가 학교에 대한 전형적이지 않은 다큐멘터리 Mr. Hoover and I : 그가 죽기 전에 마친 이 영화는 자화상 같은 것이다. 만 페이지 달하는 그에 대한 FBI의 문건, 그는 그것을 정보의 자유 법령을 기반으로 해서 법정 소송 끝에 회수했다. Q: 어떻게 In the Year of the Pig 와 같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게 되었는가? 당신은 당신이 설명하고 싶은 정치적 논제를 기반으로 출발하는가 아니면 먼저 조사를 하고 입수할 수 있는 소재들을 가지고 구성을 해본 다음에 시작하는가? De Antonio : 좌파적 입장을 견지하며 모든 작업을 한다. 그 영화는 분노, 분개, 열정이 동기였다. 그 열정은 결국 전쟁의 전체 역사에 걸친 조사를 하게 하고 그 범위는 전쟁의 초기에서부터 영화를 마친 해 신년 공격까지를 포괄하게 된다. 영화제작은 그 자체로 역사이다. 솔직히 말한다면 역사는 내 작업의 주제이다. Q : 관련 자료들을 모두 읽은 후에 당신의 얻은 대체적인 윤곽을 바탕으로 이미지들을 찾는 것에 당신은 흥미를 느낀다는 것이죠? 요컨대 어떤 영화 제작자들은 많은 영상 자료들을 뒤지고 거기서 영화를 찾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반해서. A : 네 그렇습니다. 맞아요. 나는 책들을 읽고 나서 주제에 관한 혼란스러운 초안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연대기적인 방식이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역사적 윤곽을 따라 가려 했다. 친구 중에 하나가 박스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한테 큰 종이를 얻어 와 사무실 벽에 붙이고 중국의‘한나라’에 대해서 쓰기 시작했다. 비록 ‘한나라’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나의 영화에 없지만‘한나라’는 베트남이 중국을 경험한 처음 시기여서 의미 있었다. 내가 명확하게 ‘Dien Bien Phu, 1954, May 8th’를 벽에 썼을 때 거기에는 추상적인 개념들이 있었다. ‘고문’, ‘무자비’. 때로는 몇 개의 사진들을 아무렇게 붙였다. 비쥬얼한 이미지들은 내겐 단지 벽에 쓰인 단어들과 같다. 대략의 윤곽이 잡히면 난 필름 조사로 넓힌다. 이를테면 나는 NLF의 메인 사무실이 있는 프라하에 갔다. 그들은 내게 많은 양의 영상들을 줬다. 내가 독일에 갔을 때 거기에서 난 소련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나에게 로만 카르멘의 Dien Bien Phu 전투에 대한 영상의 재사용권을 주었다. 또한 나는 프랑스 군대 필름 도서관에도 갔다. 그곳은 존재하는 베트남 영상 자료실 중 최고이다. Pierre Schoendoerffer 의 1902년 영상도 있다. 그것은 아무도 보지 않은 영상이다. 나에게 두 명의 군인이 붙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내게 말했다. ‘여기 관련자들이 당신에게서 그것을 뺏어 갈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당신이 누군지 안다. 아마 당신은 이것들 중에서 한 프레임도 못 얻을 거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했을 때 나는 이미 그 필름을 통째로 집은 상태였다. 미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아름다운 영상이 the Pig에는 있다. 베트남의 프랑스 통치자와 함께 호치민이 전투함에 있는 장면 같은. 그 영상은 매우 중요하고 상징적인 장면이다. 왜냐하면 지금 전쟁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상징적인 장면이다. 호치민이 그 배를 떠날 때 프랑스식 경례를 하면서 담배를 입에 물고 있다가 무심결에 툭 던지는 그런 장면, 나는 그 장면을 가져야만 했다. 나는 애새끼에게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이걸 훔칠꺼야. 밖에 나가 있을래. 나는 니가 휩쓸리는 것이 싫어.’ 그래서 난 그 장면을 35mm 필름 속에서 잘라서 내 호주머니에 넣었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현재 내가 뭘 하는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나서부터 그 건물의 정문에서 총 들고 있는 몇 몇 사람들이 나를 제지할 좋은 기회가 있었다. 그들이 날 체포했다면 프랑스에서 오 년형 정도 받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훔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다. Q : 영화를 프로파간다로 만들어 버리는 것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A : 영화 안에서 밖으로 표출되는 프로파간다가 있다. 분명히, 근데 난 프로파간다와 열정의 차이, 프로파간다와 정치의 차이를 잘 모르겠다. 하지만 표출되는 프로파간다가 있다. 호치민을 좋게 보이게 하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었다. 한 무리의 어린이들에게 둘러 쌓여 있는 호치민의 사랑스러운 장면이 있는데 댄 베리건은 나레이션을 한다. ‘베트남 인민들은 소박한 생활을 하는 지도자를 갖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나는 호가 살았던 장면도 사용을 했다. 그곳은 작은 타자기가 있고 여벌의 베트남 옷이 걸려 있는 그런 작은 소박한 공간이었다. 내가 1969년 콜롬비아 대학에서 이 영화에 대해서 강의를 할 때에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영화에서 샘3 미사일이 미국 비행기를 때려 버리는 장면이 영화에 있었는데 비행기 안에 있는 미군이라는 표시가 선명하게 보이는 체로 첫 번째 비행기가 날아 올랐는데, 그 비행기가 격추되자 거기에 있는 관중들이 박수를 보냈다. 나는 시발 이상하다. 안 그냐? 내가 뭐 한 거지? 내가 만약 공군에 있었고 비행도 해봤고 그리고 그 장면을 그냥 편집책상에서 봤다면 박수 같은 것은 안 쳤을 거다. 내 반응은 복잡했지만 그 사람들이 옳았다. Q : 편집에 대한 당신의 접근법은 무엇입니까? A : 나는 굉장히 느리다. 2주만에 새로운 편집을 한다. 그렇다면 그건 내 영화가 아니다. 난 편집할 때 정말 열심히 한다. 만족할 때까지 한다. 나는 편집할 때 항상 전체 그림을 그려놓고 한다. 내가 어떤 한 장면을 끝냈을 때 그 장면이 어떻게 보이는지 처음부터 다시 돌려본다. 그래서 그 장면에서 내가 만족할 때까지 계속 작업을 한다. 예를 들어, Pig 에 적절한 엔딩을 찾는 것은 진짜 문제가 뭔지를 보여줬다. 원래 내가 쓸려고 했던 엔딩 장면은 하노이 사람들이 나에게 줬던 몇 영상들이었다. 나는 그 영상을 몇 주 동안 봤다. 그 장면 동안 그것은 북 베트남의 어떤 길거리를 찍은 조용한 장면이었는데 갑자기 길 주변의 숲풀들이 일어났다. 베트민(호지명을 지도자로 하는 1941~1954년의 베트남 독립 동맹(군), 그 일원)이었다. 베트민이 돌격해 왔다. 나는 생각했다. '나는 재수 없게도 미국인이다. 무슨 말이냐면 나는 북베트남이 이기기를 바란다. 나는 미군이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 맑시스트이다. 하지만 난 베트남 사람이 아니다. 그 장면을 쓰는 것은 베트남인의 영화에게는 적당할 수가 있다. 하지만 나는 미국인이다.' 그래서 나는 결정했다. 우리가 비록 미국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사람들이 우리를 단죄할 수 있음을 보여줘야겠다고 결정했다. 그래서 나는 눈 주위에 붕대를 한 부상당한 미군들 죽은 미군들, 실명한 미군들 빠져 나오는 미군인들을 찍은 모든 영상을 썼다. 그러고 나서 그 장면이 있음 다음에 남북 전쟁의 어떤 상황 하나를 이어서 붙였다. 게티스 버그에서 죽은 어떤 청년의 모습을 담은 영상 하나를 넣었다. 그리고 그것을 뒤집어서 네거티브 필름에 넣었다. 그래서 보여줬어. 베트남에서의 우리의 이상이 1863년에 죽었던 그 청년의 이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 장면에다가 'The Battle of Hymn of the Republic'의 스크래치 버전을 거기에 추가시켰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이 적절한 엔딩이었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결론이었다. Q : 당신은 당신의 관객을 어떻게 이해하느냐? 당신은 누구를 위해서 영화를 만드느냐? 당신은 어떤 종류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느냐? A : 위대한 미국인 월트 휘트만이 말했다. 니가 위대한 시를 쓴다면 너는 위대한 독자를 만날 거다 라고 이야기를 했다. 나는 역사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내 영화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관심이 많다.(역사가 어떻게 내 영화를 평가할지 관심이 있다)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들이 보길 원한다. 나도 더 많은 관객을 만날 수 있다면 내 영화를 바꾸는 것말고는 뭐든지 할거다. 하지만 미국과 대부분의 서구 자본주의 국가에서 영화는 엔터테인먼트처럼 일종의 아편으로 보여졌다. 나는 결코 헐리우드에 영화를 보내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큐멘터리를 헐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기 위해 거쳐야 하는 길목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재수 없다. 나는 언제나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을 선택했다. 나는 다큐멘터리를 사랑한다. 나는 다큐멘터리의 정치적 전통을 사랑하고 그리고 다큐멘터리 영화가 다루는 그 주제들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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