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칫솔

하얗다 상이 몇 번 우리집에서 자고갔다.

한 번은 그 다음날 일본으로 출장 예정이어서 (고향에 가며 '출장간다'라고 말하는 건 좋을까, 나쁠까. 고향은 닳고 닳은 단어라지만, 그말에 동의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고향이란 단어에 연상되는 이미지는 가슴 뻐근하게한다.) 가방에 세면도구들을 챙겨왔었는지, 아침엔 당당하게 자기 칫솔을 꺼내어 썼다.

그러고는 그 칫솔을 놓고갔다.

 

음, 이걸 어쩌나.

1초 생각하고, 그냥 그대로 두었다.

그냥 그대로 둔 것이 하얗다 상이 다음에 올 것을 대비하는 착한 마음이었다면 이런 곤란한 벌을 하늘이 주지 않았을까.

하룻밤을 다른 곳에서 자게 되었을때, 세면도구 챙길 것을 전수찬에게 부탁했더니, 이냥반이 자기칫솔, 규민칫솔은 다 잘 챙기고서는 내것이랍시고 하얗다 상의 칫솔을 가져왔다.

그걸로는 왠지 도저히 이를 닦을 수 없었다. 그김에 이 안 닦고 먹고 자고 했다.

(그랬더니, 이게 늙어가는 징조인가, 지금 한쪽 잇몸이 마구 시리다.)

 

그러고 집에 돌아와 세면도구를 제자리에 정리하던 중, 하얗다 상 칫솔을 들고 또다시 음, 이걸 어쩌나 1초간 생각하였다. 모조리 칫솔꽂이에 꽂아두었으면 한 번에 일이 끝날 것을, 칫솔꽂이까지 걸어가서 몇몇 칫솔은 꽂아두고 다시 돌아서서 쓰레기통까지 걸어가 하얗다 상 칫솔만 따로 버리는 수고를 했다. 어차피 이 집 안에선 필요없는 물건인 걸, 남의 칫솔로 수채구멍 청소하기도 그렇고 버리자.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지, 갈잎을 먹으면 죽는다고, 애초에 게으름뱅이 짓을 했으면 게으름뱅이 다운 마감을 할 것이지, 괜한 이중의 노동을 해가지고 하늘은 일을 한 번 더 꼬아 벌을 주셨다.

 

어젯밤 하얗다 상이 또 우리집에서 자고 갔다.

오늘 아침 일어나 그는 아껴두었던 나의 새 칫솔을 썼다.

아까와 뜯지도 못하고 있던 걸.. 무심하게 뜯어제껴져 한 쪽에 나뒹굴고 있는 포장, 공포 속에 떨며 마모되었을 여리딘 여린 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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