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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책 몇 권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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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의 『스텝파더 스텝』을 읽고 몇 개의 글귀를 발췌하다가 미야베 미유키의 다른 책들도 함께 올려놓는다. 당분간은 소설 보는 거 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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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 권일영 옮김, 2007, 『누군가』, 북스피어.
2003년 출간
 
2010. 2. 11 독서 완료
 
주인공은 재벌가의 딸과 결혼한 서른 다섯 살의 아저씨로, 결혼의 조건으로 들어간 장인의 회사 이마다 콘체른에서 사내보를 만드는 출판 편집자 스기무라 사부로다. 소심하고 겁 많은 이 남자가 탐정 역할까지 하는데, 나와 비슷한 것 같아서 감정이입이 되었다. 즉 우리가 자주 접하게 되는 미스터리 소설의 명석한 머리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가 아니라서 더 친근감이 있었던 것이다.
나오는 인물들: 아내 이마다 나호코, 딸 모모코, 장인, 가지타 씨 부부와 그 두 딸 가지타 사토미, 가지타 리코, 하마다, 그리고 노세 유코.

 
美空ひばり-車屋さん 미소라 히바리의 운전기사 양반이라는 노래를 찾아봤다. 내 입장에서는 그저 그런... 
http://www.youtube.com/watch?v=_JnjbWJ14to
  

믿어지지 않는 행운을 누리면서도 그걸 언제 빼앗길지 몰라 조마조마해하지 않으려면 배짱이 얼마나 필요한 걸까. 만약에 그게 양동이 하나만큼이라면 내가 갖고 있는 것은 한 컵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컵이 양동이만큼 커질 가능성도 없다.
결혼한 지 칠 년. 나는 늘 내 컵을 소중하게 다루어 왔다. 작기는 하지만 전혀 없는 것보다는 낫다. 자주 뒤집어 안에 든 것을 쏟아 버리는 컵이라도 손바닥으로 긷는 것보다는 낫다. (13쪽)
 
‘이마다 그린 가든’의 서무과장의 말 (120쪽)
“여사원의 경우 서무과장이나 총무 쪽의 차장이 되면 상당히 출세한 걸로 여겨집니다. 하지만 남자 사원의 경우에 그런 포지션들은 출세 코스에서 벗어나 있는 걸로 생각합니다. 결국 총무나 서무는 남자가 평생 할 일은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여자에게 맡겨도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일 겁니다. 그런 시각부터 바꾸지 않으면 앞으로 회사는 더 나아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회사 안살림은 중요합니다. 소규모 회사라면 이 분야에 힘을 기울여 일이 잘 돌아가게 하기만 해도 대폭적인 경비 절감이 되어 무턱대고 하는 구조조정보다 효과가 더 좋은 경우도 있습니다.”
 
내 재량이라거나 내 분수라는 소리는 꺼내지 않는다. 비현실적인 느낌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더라도, 그건 내가 나 자신의 문제로 혼자서 처리하면 되니까. (200쪽)
 
어린아이는 모든 어둠에서 괴물의 모습을 찾아낸다. 그리고 천에 하나, 만에 하나는 그 어둠 속에 진짜 괴물이 숨어 있을 수가 있다. 한번 진짜 괴물을 본 사토미는 모든 어둠에 숨어 있는 괴물이 실체가 있는 것이 되고 말았다. (361쪽)
 
내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독이 있는 입으로 여러 가지를 가르쳐 주셨다. 그 중 ‘미결’인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지금 이 미즈초라는, 태어나 처음 찾아온 곳의 휑한 논밭 한복판에 있는 주차장에서 ‘기결’ 상자 한으로 옮겨졌다.
“사내와 계집은 말이야, 붙어 있다 보면 품성까지 닮게 되는 법이다. 그래서 사귀는 상대를 잘 골라야만 해.”
“인간이란 누구나 상대가 제일 듣고 싶지 않은 소리를 하는 주둥이를 갖고 있지. 아무리 바보라도 듣기 싫은 소리는 아주 정확하게 한다니까.” (389쪽)
 
조명이 그리는 그림자가 맹금 같은 장인의 얼굴을 더욱 날카롭게 보이도록 만들고 있다. 그렇지만 장인은 무척 느긋해 보였다. 아주 친근하게 느껴졌다.
순간, 나는 오싹 소름이 끼쳤다.
장인의 표정이 이야기하고 있다. 법에 저촉되지는 않았지만 난 훨씬 더 무서운 일을 몇 번이나 했지. 배신도, 음모도, 흥정이나 암투도, 수탈, 은닉도.
인간이란 원래 그렇다. 필요하면 뭐든 한다. 장인은 눈곱만큼의 꾸밈도 없이 내게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짊어지고 갈 수 있느냐 없느냐 뿐이다, 라고.
나는 그 이야기를 알아들었고, 그리고 그걸 친밀하게 느꼈다.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미소를 띠는 것이다.
 
소노다 편집장이 한 말도 기억에 남는다. “결혼식은 함부로 연기하지 않는 게 좋아.” 연기하면 숨어 있던 문제가 표면화되는 경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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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은 필요 없어』
미야베 미유키 단편집. 한희선 옮김. 북스피어. 2006.

 
2010. 2. 12 독서 완료

대답은 필요 없어미야베 미유키가 그리는 인물들은 어떤 역경에 빠져도 긍정적인 마음을 잃지 않으며 언제나 밝게 열심히 살아가려는 긍정적인 사람들이다. 그녀가 그리는 주인공들은 미야베 미유키 본인의 분신이며, 그녀의 사람됨이나 인생관을 솔직하게 투영하고 있기 때문에 세세한 표현이 두드러지게 독자에게 전달된다.
미야베 미유키는 속기 전문학교에 다녀 속기사가 되었고, 법률사무소에서 일하는 한편, 테이프 녹취 아르바이트도 하였다. 그때 ‘강연회 등의 테이프를 글로 옮기면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을 전하는 것이 훌륭하다고 생각하던 도중에 좋아하는 추리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였단다. 이런 경험을 글로 옮겼다는 것이 이 소설에 묻어난다.
 
○ 「대답은 필요 없어」
어디에 이렇게 쓰여있던데, 이에 공감. “표제작 「대답은 필요 없어」는 주인공인 치카코의 실연에서부터 어떤 범죄에 협력하는 데 이르기까지 미묘한 여성 심리의 움직임, 신용사기로서 잘 다듬어진(즉, 실현 가능한) 플롯, 설득력 있는 스토리 전개, 달콤하고 서글픈 연애 묘사 등이 완성도 면에서는 최고일지도 모른다.”
 
“시류에 민감한 신문기자군.” 히사코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왕 기댈 바엔 큰 나무 밑이 안전하다는 태도 가지고는 사회의 목탁이 못 되지.”
“목탄?”
“목탁. 당신 같은 젊은 아가씨들은 우리말도 제대로 모른다니까.” “그런 식이니까 반한 남자의 눈을 통해서만 세상을 보게 된 거야.”
치카코는 무릎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히사코의 말이 맞는 걸까. 간자키와 교제했던 이 년간 언제나 그의 뒤에 숨어서 그의 어깨 너머로 그가 가리키는 방향만 보아 온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치카코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간자키는 그게 짐이 되었다고 했죠.”
히사코는 코웃음을 쳤다. “그야 나중에 붙여 넣은 변명이지. ‘안녕’ 뒤에는 시시한 말이 잔뜩 따라오거든. 그래도 ‘안녕’이라는 말이 제대로 들렸다면 변명 따윈 무시해.” (25쪽)
 
→ 모리나가 부부의 기상천외한 은행털이 묘사도 흥미롭다.
 
“노인들 중에는 은행에 나가는 것도 힘들고, 막상 가 봐도 기계를 조작할 줄 모르는 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한 고객들에게 소이치와 같은 외근 사원은 귀중한 존재다. 하지만 은행에게 그는 단지 실적이 신통치 않은 한 사람의 은행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소이치가 컴퓨터에 밝고 흥미를 가지고 정보를 계속 모아 왔는데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 조직이란 어떤 인간의 능력을 인정해서 배치하는 것이 아니야. 먼저 그 인간을 배치하고 나서 거기에 맞는 능력을 개발하든지 틀에 맞추는 거야.
간자키가 자주 했던 말이다. 그래서 우선 자신이 희망하는 위치에 확실히 들어갈 좋은 요령이 필요한 거야, 라고도. (40쪽)
 
“당신들과 만나서 다행이었습니다. 이걸로 만족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도 이렇게 해서 형사라는 직업에 안녕이라고 말하려 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둘이서 마주 보며 웃음을 교환했다. 다키구치가 말했다. “그리고, ‘안녕’에는 대답이 필요 없습니다.”
치카코의 어깨를 가볍게 툭 하고 두드린다.
“그러니까 하다 씨도 아무 말 할 것 없습니다.” (52쪽)
 
○ 「말없이 있어 줘」
사토미는 일부러 샌들 뒤축 소리를 요란하게 내며 생각했다.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걷는 것은 앞뒤 분간 못하고 일을 저지르고 난 뒤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후회할 때뿐이다, 라고.
 
아파트로 얼른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발길이 돌려지지 않는다. 애당초 이런 늦은 밤에 볼일도 없이 편의점에 간 것은, 딱히 컵라면이나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던 게 아니라 좁은 방에 혼자 틀어박혀 있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탓이다. (57쪽)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되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여섯 개의 찻잔을 올린 쟁반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이나 그렇겠죠.”
귓불이 엄청 뜨거웠던 것이 기억난다.
“당신은 좋겠어요. 하루 종일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 주는 사무실에 우두커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남이 끓여다 주는 뜨거운 차를 마실 수 있으니까. 그런데 저는 어때요. 반나절이나 밖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하는 저는 어떻게 되는 거냐구요.”
보면 볼수록 과장의 눈썹과 눈 사이가 점점 새하얗게 질려간다. 아, 핏기가 가신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구나 하고 사토미는 어렴풋이 느꼈다. (59쪽)
→ 주인공 사토미가 상사와 충돌하는 장면 묘사가 일품이다.
 
심부름만 하면서 나이를 먹어 간다. 그런 생각에 더욱 지쳐 있었다. 그래서 과장의 말을 농담으로 되받아칠 수 없었다.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발끈 화를 낸 것은 제 자신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반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회사에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이미 그런 시기가 아니라는 것은 잘 알았습니다. 저…… 지금 같은 회사에서 그런 일을 하기에는 나이를 너무 먹었어요.”
… 결국 여성 일반직 따위는 그런 것이다. 젊음이 곧 최고의 능력이므로 그것을 잃는다면 탈락할 수밖에 없다. (77쪽)
 
→ 미즈타의 아파트에서 발견된, 나가사키 사토미에게 보낸 아시하라 쇼지의 편지.
어떤 우연의 장난으로 다른 기회에 만나더라도, 그것은 운명일 겁니다. 결과도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희들의 죽음을, 죽을 당시에 내던진 말을 분명 당신은 수상하게 여길 겁니다. 조사해 주시겠지요. 그것을 기대하고 이 편지를 썼습니다. (89쪽)
 
→ “스산한 거리에 유월의 비가 계속해서 내리고 있다”는 마지막 줄의 글. 번역이 잘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제목이 ‘말없이 있어 줘’인가 보다.
 
○ 「들리세요」
전화를 걸어 누군가와 이야기한다. 그래도 정말로 알고 싶은 건 아무리 이야기해도 알 수가 없다. 전화를 끊은 후, 상대방이 전하가 놓여 있는 곳에서 옆에 있는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
하지만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은 정말로 무서운 일이다. 진실이 있으니까. 본심이 있으니까. 자칫하면 잔인한 모습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169쪽)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일은 있어.
태어났을 때부터 따라붙어 다니는 읽기 힘든 희귀한 성(姓)처럼.
아무리 연습해도 극복할 수 없는 서투름과 같이.
어쩔 수가 없는 것은 있어.
그래도 알아 줬으면 좋겠어. 같은 정원에 심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쓸쓸해한다는 것을. 전화를 끊은 뒤 더는 그것을 알아들었을까?
그것을 알고 싶어. 하지만 아는 것은 무서워.
츠토무는 일어나 지금은 이미 장식품이 되어 버린 검은 전화기의 무거운 수화기를 들었다.
헬로, 헬로.
―들리세요? (170쪽)
 
○ 「나는 운이 없어」
이건 약혼반지, 부모님의 결혼 십오 주년 기념 반지 등 반지를 둘러싼 사연이다.
이쓰미 누나, 이구치 씨, 이미테이션. 나름 유머러스하게 풀어나가고 있는데, 그냥 그저 그런 느낌. 이 작품을 통해서 알게 된 것, 바람을 피우다 켕기면 반지를 사오는구나.
 
디제이의 목소리에 이어 린다 론스태드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나는 운이 없어 Poor poor pitiful me>였다. 지금 기분에 딱이다. 너무나 딱 들어맞는다! (112쪽)
→ 내가 알지 못하는 노래인데. http://www.youtube.com/watch?v=KKv_vJks2gM 들어봤는데, 별로다.
 
○ 「배신하지 마」
→ 「배신하지 마」는 『화차』의 원형으로 추측된단다. 『화차』는 아직 읽어보지 못했는데...
 
과연 도쿄라는 곳은 실재하는 걸까. 그런 것은 이런 종류의 잡지나 텔레비전에서 만들어낸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게 아닐까.
젊은이들이 ‘그곳에 가면 누구든 행복해질 수 있다’고 꿈꾸는, 꿈 속에서만 존재하는 도시가 아닐까. …
나가사키도 후쿠오카도 오사카도 고베도 실체가 있다. 그것은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도쿄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엇 하나도.
지도상의 도쿄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도 사정은 전혀 다르지 않다. 도쿄 사람에게도 ‘도쿄’는 보이지 않는다. 있는 것은 그저 기타센주나, 다바타나, 세타가야나 스기나미나 아라카와나 에도가와. 자신을 키워 준 동네뿐이다. 그곳에서는 보통의 동네와 보통의 삶이 있다.
하지만 ‘도쿄’는 환상이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한 환상이다.
밖에서 보면, 국제도시, 정보 도시 TOKYO가 있다. 무한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도시, 엘도라도 도쿄가 있다. 지방에서 보면 꿈이 이루어지고 부가 기다리는 화려한 삶이 약속된 도쿄가 있다.
그것은 어차피 허상이다. 밖에서만 볼 수 있는 움켜잡을 수 없는 도시. 처음부터 어디에도 없는 도시.
잠깐 동안이라도 그곳의 주민이 되기 위해서는 젊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이를 먹으면 이 도시에 있을 수 없어진다.
미치에도 요코도, ‘도쿄’에 속았는지도 모른다. ‘도쿄’에서 ‘행복 사기’에 걸렸던 것이다.
‘도쿄’는 무한정 돈을 공급해 준다. 즐거움을 공급해 준다. 결코 배신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로.
요코가 육교에서 밀어 떨어뜨린 것은 그녀를 배신한 ‘도쿄’였다. (209-210쪽)
→ 여기에서 묘사되는 대도시 도쿄를 서울에 대입해도 그럴싸해 보일 듯하다.
 
아내에게 등을 돌린 채 가가미는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저어, 미치코.”
“왜요.”
“도쿄 타워의 정면이 어딘지 알아?”
미치코는 가만히 있었다.
“나는 어디서 봐도, 언제 봐도 도쿄 타워는 나한테서 등을 돌리고 있는 것처럼 보여.”
미치코는 조용한 걸음으로 나와 가스레인지에 주전자를 올렸다.
“상관없잖아요. 어느 쪽이든 우리 집 창문에서 도쿄 타워는 보이지 않으니까.” (210쪽)
 
○ 「둘시네아에 어서 오세요」
→ 이 책에 실린 단편들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작품이다. 주인공 시노하라 신지는 미유키의 분신인 것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고, 속기공부를 한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다.
 
그는 ‘둘시네아’ 앞에 실제로 가 본 적도 없다. 미와 속기는 역을 끼고 ‘둘시네아’와는 백팔십도 반대 방향에 있어서, 금요일 밤마다 롯폰기에 와도 신지는 ‘둘시네아’에서 등을 돌려 걸어가고, 돌아갈 때는 ‘둘시네아’에 닿기도 전에 역의 지하로 내려간다.
그런데도 ‘둘시네아에서 기다릴게’라는 메시지를 적는다.
그가 쓴 메시지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역에 돌아왔을 때에도 그대로 그를 맞이한다. 그리고 몇 시간쯤 후에는 역무원의 손에 지워진다.
그걸로 끝이다. 신지의 메시지를 읽는 상대는 없다.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신지는 매주 똑같은 메시지를 쓴다. 실재하지 않는 상대를 향한 존재하지 않는 약속.
그렇게 해 두면 화려한 주말의 롯폰기에서 원고를 손에 들고 닳고 해진 운동화 차림으로 홀로 걷는 자신을 조금은 참아낼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218-219쪽)
 
요시코는 진지했다.
“‘둘시네아’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 같은 가게가 아니야. 오히려 당신 같은 사람이 가끔 기분 전환하러 와서 즐기는 가게야. 나는 그럴 마음으로 해 왔어. 가게가 손님을 고르다니 내가 의도한 바가 아니야. 난 어떻게 해서든 마음대로 생겨버린 그 벽을 부수고 싶었어.”
나를 봐, 하고 요시코는 가볍게 양손을 펼쳤다.
“일하는 것에 푹 빠져서, 내 몸에 신경 쓸 여유 따위 없어. 그래도 나는 좋아. 다만 나처럼 일하는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호화로운 기분을 맛볼 수 있으면 그걸로 만족해.”
미안해, 하고 요시코는 다시 한번 말했다.
“‘둘시네아’가 『돈키호테』에 나오는 공주님 이름이라고 했지? 둘시네아는 주인공의 망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공주야. 현실에서 그녀는 알돈사라는 술집여자일 뿐이지. 그래도 주인공은 그녀 안에 숨겨진 진짜 공주를 찾아내는 거야.”
둘시네아는 그저 환상인 것이다. 그래도― (242쪽)
 
개찰구를 빠져나온다. 그곳의 메시지 보드 가득 친근한 둥근 글씨로 커다랗게 메시지가 씌어 있었다. <둘시네아에 어서 와>라고. (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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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한 사냥꾼』
미야베 미유키 연작소설 | 권일영 옮김 | 북스피어 | 2008(1993).

2010. 5. 7 독서 완료
 
‘다나베서점’이라는 헌책방이 주 무대이고, 헌책방 할아버지 이와 씨와 손자 미노루가 사건을 풀어나가는 탐정 역할을 한다.
당연히 언제나 책을 계기로 일어나는 사건들.
각 단편의 마무리는 할아버지 이와(나가 고키치) 씨와 손자 미노루 사이의 잡담으로. 둘 사이의 감정대립,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나름 유쾌. 그 과정에서 커나가는 손자. 일종의 성장소설?

 
○ 「유월은 이름뿐인 달」
→ 후반부가 봉인되어 있는 「이와 손톱」을 둘러싼 에피소드.
 
“비는 계속 잘도 내리네.”
“유월은 이름뿐인 달이라잖니. 유월은 다른 말로 미나즈키(水無月 물이 없는 달)라고 한단다.”
“마리코 씨 씨의 유월의 신부도 이름뿐이었네.”
“영어로 ‘이와 손톱’이란 말에는 이런 뜻도 있대. 우리말로 이야기하자면 ‘필사적으로’라는 정도의 의미지.”
“그다지 좋지 않구나.”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필사적이 되어야 한다는 게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라는 기분도 들고. 그런데, 할아버지는 필사적으로 오래 살려고 하잖아.”
 
○ 「말없이 죽다」
“청년은 큰 뜻을 품는다. 하지만 노인은 비밀을 안고 죽어간다.” - 미노루
 
○ 「무정한 세월」
→ 할아버지 이와 씨에게 관심이 있는 듯한 헬퍼 도시에 씨의 등장.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여기에만 나온다.
 
○ 「거짓말쟁이 나팔」
→ 「장서 5만 권」이라는, 미노루가 쓴 액자에서부터 얘기를 풀어나간다. 과장 또는 거짓말을 둘러싼 에피소드.
 
동화책이나, 겉보기와는 달리 「거짓말쟁이 나팔」의 스토리는 너무 우울해서 차라리 ‘어둡고 참혹하다’고 할 만큼 희망 없는 이야기였다.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정도였다.
“거짓말쟁이 나팔은 거짓말을 워낙 잘하기 때문에 대장님의 뒤를 따라 전쟁에 나가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이 세상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일인지, 얼마나 돈을 벌 수 있는지, 큰 소리로 떠들고 돌아다녔습니다. 워낙 거짓말을 잘해, 계속해서 사람들이 모여들 정도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고물상에서 나팔은 오케스트라의 동료 가운데 딱 하나 남은 피콜로와 다시 만난다. 다른 동료들은 전쟁 때문에 망가지거나 어디론가 팔려가 버렸다. 전쟁은 좋은 거라고 한 것은 바로 너였다―피콜로는 나팔에게 말했다. 그 비난이 완전히 파괴된 마을에서 전쟁을 한탄하고 있던 사람들의 귀에 들어갈까 봐 두려웠던 나팔은 피콜로의 가느다란 소리를 없애 버릴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며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나팔은 하루 종일 계속해서 노래를 했습니다. ‘전쟁은 끝났다. 새로운 마을, 즐거운 마을, 평화로운 마을을 만들자……’ 나팔의 밝은 노랫소리에 마을을 다시 세우려는 사람들은 힘을 얻었습니다. 그 소리에 피콜로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하소연하는 말은 아무도 듣지 못했습니다.”
“… 완전히 고물상의 명물이 되어 있던 거짓말쟁이 나팔은 다시 오케스트라에 들어오라는 권유를 거절했습니다. ‘나는 전쟁에 나가 많은 고생을 했으니 이제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마을사람들은 나팔의 말에 감동해 거짓말쟁이 나팔을 마을 박물관에 걸어두게 된다.
 
→ 이와 씨는 하필이면 이 책을 골라 훔쳐 주위에 SOS를 보낸 아타카란 소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아이 주위에, 바로 가까이에, 그 아이를 그렇게 학대하는 「거짓말쟁이 나팔」이 있다. 그 정체를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큰 소리로 밝게 노래하기 때문에 유타카라는 피콜로의 도움을 청하는 절규를 지워 버리고 있다. 거짓말쟁이 나팔이. 그 아이는 그걸 고발하고 싶었던 것이다.
 
○ 「일그러진 거울」
→ 『붉은 수염 진료담』의 제일 마지막에 수록되어 있는 「얼음 아래서 돋아나는 새싹」의 주인공 오에이는 이렇게 말한다. “남자란 언젠가 망가져 버릴 수레 같은 겁니다. 망가져 버린 뒤에 등짐을 져 나르기보다는 차라리 처음부터 스스로 지는 게 낫죠.” 이 말에 혼자 살아가는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유키코.
 
옛날처럼 변변치 못한 남자는 얼마 없다. 그만큼 세상 전체가 풍요로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신에 누구나 늘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자기 얼굴 하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내내 거울을 찾고 있다. 거울을 찾아 연애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 헌책방에 있는 헌책에 명함을 끼워넣는 새로운 홍보 방법, 이런 것도 있었나.
 
○ 「쓸쓸한 사냥꾼」
「쓸쓸한 사냥꾼」은 아다치 아키코라는 아가씨의 아버지가 쓴 책 제목이다.
“『쓸쓸한 사냥꾼』은 실패작이었습니다. 그건 미완성 작품이 아니라 실패작이기 때문에 완결시킬 수 없었던 소설입니다. 따라서 계속해서 일어나는 다섯 차례의 살인도 정합성이 있는 스토리라거나 동기로 연결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바꿔 말하면 저는 그것을 마무리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없었기 때문에 도망갔던 거니까요.” 아다치 가즈오는 도중에 좌절한 작가지만 가짜는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쓸쓸한 사냥꾼이다. 돌아갈 집도 없이, 거친 들판에 내던져진 외톨이다. 이따끔 휘파람을 불어도 대답하는 것은 바람소리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사람의 따스한 온기를 그리워한다.’
 
→ 고등학생 미노루와 연애하는 연상의 연극배우 도시미의 등장. 그러나 이와 씨가 불을 끈다. 며느리 대신 도시미를 만난 이와 씨와 도시미의 대화가 인상적이다.
“아가씨는 미노루와 달라 순수하다면 뭐든 옳고 불순하면 뭐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어린애는 아니잖아요? 우리가 걱정하고 있는 것도 그런 부분이에요.”
“저는 지금까지 미노루 씨만큼 저를 좋아해 준 사람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기쁜 일은 한 번도 없었죠. 그래서 제게는 너무 소중합니다.”
이와 씨는 도시미 속에 겁먹은 어린애 같은 존재가 숨어 있는 걸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린애 같은 존재’다. 사실은 어린애가 아니다.
“분명히 그렇겠죠. 미노루는 아가씨에게 그만한 의미가 있는 남자일 겁니다. 한데 말이죠, 아기씨는 어른이에요. 어른이 애를 도피처로 삼으면 안 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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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상, 하
미야베 미유키 장편소설 |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08(1990).

2010. 5. 12 완료
 
‘레벨7’이라고 하는 수수께끼의 키워드를 둘러싼 두 개의 스릴 넘치는 추적을 그린 서스펜스 스릴러.
이야기는 프롤로그 후, 도쿄의 극동 지구에 있는 맨션의 한 방에서 두 사람의 젊은 남녀가 눈을 뜨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웬 일인지 둘 다 기억을 잃고 있었고 사에구사 다카오라는 옆집 사람의 협력을 얻어 자신들의 신원 조사에 착수한다. 한편 같은 도쿄의 반대쪽, 기치조지에 사는 미망인 신교지 에쓰코는 일을 통해 알게 된 후 돌연 실종된 여고생 가이바라 미사오의 행방을 쫓기 시작했다……. 아 두 추적 모두 ‘레벨7’에 관련되었다는 것은 처음에 밝혀졌지만, 전반부에는 접점을 갖지 않은 채 거의 병행해서 진전되어간다.
 
‘그때 봉인되어 있던 시간이 최후의 일 초까지 전부 되감기는 소리를 유지는 분명히 들은 것 같았다.’
흐트러진 질서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이건 정리 못했다. 정리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고... 그래도 끝까지 결론이 어떻게 날지, 각 인물들은 어떤 생각을 가진 채 등장하는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이야기가 진행된다. 첨에는 SF인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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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베 미유키. 양억관 옮김. 2006. 『스텝파더 스텝』. 서울: 작가정신.
宮部みゆき. 『ステップパㅡザㅡ ステップ』. 1993.

2010. 7. 28 하루만에 완독하다.
 
스텝파더 스텝1. 미야베 미유키의 다른 소설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재미있다. 가볍고 경쾌하게 코메디성 짙은 얘기를 담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글 전반적으로 유머와 낙관적인 시선이 흐른다. YES24의 책소개가 이를 말해준다.
 
미야베 미유키가 이런 소설도 썼나 싶을 정도로 색다른 느낌의 소설이다. 불륜의 상대와 각각 사랑의 도피를 한 부모 때문에 유기 아동으로 시설에 수용될 위기에 처한 쌍둥이 형제. 둘은 자신들을 돌봐줄 부모 대용 어른을 원하게 되고, 마침 벼락을 맞아 지붕에서 떨어져내린 서른다섯 살 남자 도둑과 만나게 된다. 자, 이 도둑 아저씨를 협박해서 아버지로 만들어 볼까? 여차저차 얼렁뚱땅 ‘아버지와 두 아들’의 관계가 된 그들 앞에 잇달아 일어나는 미스터리한 사건들!
서른다섯 살 프로 도둑을 세상에서 가장 멋진 스텝파더로 만들어가는 열세 살 쌍둥이들의 활약과 그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스터리하고 유머러스한 이야기가 경쾌하게 펼쳐진다. 나오키상, 일본추리작가협회상 등 다양한 수상경력으로 입증된 뛰어난 구성과 문체는 여전하며, '이렇게 재미있는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의 유쾌한 농담이 시종 웃음을 짓게 한다. 일본 내 설문에서 미야베 미유키 소설 중 가장 재미있는 소설 1위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2. 주인공 4명 모두 괴짜다. 전직변호사로서 프로도둑들의 매니저인 아버지와 그 밑에서 일하는 귀여운 도둑인 나, 그리고 서로 바람이 나서 가출해버린 부모님을 둔 영악한 쌍둥이, 이 넷이 풀어가는 이야기이다. 특히 부의 재분배를 실현하기 위해 도둑질을 한다는, 아버지의 자본주의에 대한 개똥철학이 빛난다. 아들이 아버지를 묘사한 대목이 정곡을 찌른다. “아버지는 우유 같은 전직 변호사야. 썩어도 도움이 된다는 말이야.” (156쪽) 이 우유에 대한 비유, 참 유용한 표현 같다.
 
3. 내가 이 책을 재미있다고 느낀 건 아마 결혼을 하지 않았으면서도 주인공 도둑넘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런 쌍둥이를 받아들이고 싶진 않다. 마지막 즈음에 쌍둥이의 학교 샘과의 썸씽이 이루어졌다면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런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스텝파더 스텝 2』가 나와도 괜찮지 않을까. 물론 15년도 넘은 지금 시점에서 후속편을 쓸리 만무하지만... 너무 에피소드가 짧아서 아쉽다는 얘기.
 
4. 7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단편이고, 각각이 연결은 되지 않지만, 옴니버스식이라고 해야 하나. 이 책과 비슷한 시기에 나온 미야베 미유키의 연작소설 『쓸쓸한 사냥꾼』과 비슷한 형식을 띠고 있다고 해야 할 것 같다.
 
5. 한페이지에 20줄도 안되면서 한두 단어짜리 대화가 이어지는데, 이건 좀 짜증난다. 미야베 미유키도 이렇게 썼나? 물론 쌍둥이가 말을 연속해서 이어가면서 말하는 습관이 있어서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는 거 같기는 하지만, 종이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6. 어느 리뷰에 각 에피소드를 정리해놓았다.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은 옆집 여자의 집에는 왜 그렇게 많은 거울이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스텝파더 스텝>을 비롯해, 진품 명화 도난 사건을 다룬 <트러블 트래블러>, 쌍둥이는 왜 학교에 협박장을 보내고, 학교를 바꿔 출석하게 된 건지를 다룬 <원나이트 스탠드>, 쌍둥이가 사는 마을 근처 호수에서 발견된 백골의 사체 2구에 대한 미스터리 <헬터 스켈터>, 펜팔을 하던 유부녀가 협박을 받게 된 사건을 의뢰받은 <론리 하트>, 다른 지역 신문이 며칠마다 배달되는 집의 비밀을 다룬 <핸드 쿨러>, 쌍둥이 유괴 사건 <밀키 웨이>까지 이들이 가는 곳마다 사건이 터지고, 이들은 자연스레 그 사건에 관련이 된다.”
 
[인상적인 구절들]
○ 스텝파더 스텝
벽을 타고 올라가는 동안 뒤통수 쪽에서 두 차례 번개가 쳤다. 지붕에 발을 디뎠을 때 볼 위로 첫번째 빗방울이 떨어졌다. 아이쿠, 오셨습니까, 하고 작업을 서둘렀지만 이구치의 집 지붕에 로프를 걸었을 때는 벌써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분명히 밝혀두지만 작업하는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은 아니다. 뇌우의 스피드에 추월당했을 뿐이다.
비에 젖거나 머리 위에서 천둥번개가 요란을 떨어대는 걸 싫어해서는 아웃도어 라이프를 즐길 수 없으므로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악천후일 때 더 느긋하게 일할 수 있다. 아예 어딘가에 벼락이라도 떨어져 이 일대가 정전이라도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어딘가에 떨어지라고 했지, 내 머리 위에 떨어져달라고 부탁한 기억은 없다.
그것이 떨어져버렸다. 친절하기도 하시지. (19-20쪽)
 
“다만…….”
드디어 왔다. 이 ‘다만’이란 놈이 무서운 법이다. ‘다만’으로 지금까지의 분위기가 송두리째 뒤바뀐다.
“뭔데?”
“돈이 없어.” …
“그래서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데,” “아저씨는 프로 도둑이잖아?”
“장비가 굉장했거든.” “아마추어 같지 않아.”
“돈 엄청 잘 벌지?” “우리, 보살펴주지 않을래?”
이게 다 그 벼락 탓이다.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미친 술병 콤비를 잠시 노려본 다음 물어보았다.
“싫다면?”
둘은 능글맞게 웃었다. “우리, 아저씨 지문을 채취해뒀어.” “아저씨 전과 있지? 곤란한 텐데?” “또 감옥에 들어가는 거, 싫지 않아?”
차라리 죽는 게 낫다. (26-28쪽)
→ 화자인 도둑넘과 쌍둥이들은 이렇게 인연을 맺는다.
 
먼저 ‘father-in-law’라는 단어가 나왔다. 법률 따윈 재수 없다. 그 아래 ‘stepfather’가 있고, ‘(계부)’라고 적혀 있다. 스텝파더. 왠지 춤만 추고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아버지 같잖아. 하지만 ‘계부(繼父)’란 ‘잇는 아버지’라는 의미지……. 역시 열이 있었던 거다. 단연코. (35쪽)
→ 스텝파더가 뭔 뜻인지 여기를 보고 알았다. 이 알량한 영어단어실력.
 
무릉도원처럼 신록이 가득한 이 동네는 분명 도쿄에서 멀다.
“엄마, 아빠의 무릉도원은 아마 도쿄가 아니었을까?” 타다시가 말했다.
아이들이 똑똑하면 부모가 빗나간다. (40-40쪽)
→ 명언이다.
 
“그 여자가 완전히 이구치 씨가 된다는 건 가족과 친구를 버린다는 뜻이잖아. 용케도 그런 결심을 했네.”
입을 다물고 있는 동안 사토시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정말 갖고 싶은 게 있다면, 그런 거, 간단히 버릴 수 있는 거야. 아마도.”
쌍둥이는 살짝 시선을 맞추고는 쓸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건 아주 소중한 뭔가가 빠져 있는 사람이야” 하고 타다시가 말했다. (62쪽)
 
○ 트러블 트래블러
도둑이지만 난 절대로 ‘없는 곳’에서는 훔치지 않는다. ‘있는 곳’에서만 가져온다. 그 ‘있는 곳’이 어딘지를 찾아내는 것이 아버지의 역할이다. …
아버지는 자신의 몫에서 정보를 흘려준 거래처에 배당을 지급한다. 거래처는 현재 열세 곳. … 돈은 안 되지만 세상과 사람을 위한 일에 열정을 쏟는 곳들이다. …
나도 아버지에게 얼마간의 고문료를 지불한다. 내가 아버지를 그냥 이용하는 것도, 아버지가 나를 마음대로 주무르는 것도 아닌 대등한 관계라는 명분을 세우기 위해서다. 하기야 겉으로만 그럴 뿐이지만.
그런 시스템이니, 내가 하는 일도 돌고 돌아 조금은 세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의적’을 자처할 생각은 없다. 남아도는 곳에서 부족해서 곤란을 겪는 곳으로 돈을 이동시키고 수수료를 좀 챙기는 것뿐이다. 택배업자나 마찬가지다. (68-69쪽)
 
내 이름을 듣고 난 쌍둥이는 이렇게 말했다.
“별로 범죄자 같지 않은 이름이네.” “건전한 이름이야.”
“하지만 이름 따윈 상관없어.” “그래 맞아. 아버지니까.”
나는 삼십오 년을 살고서야 겨우 깨달았다. ‘여자가 무서워’, 그 따위 말을 하는 자는 아직 수행이 부족한 것이다. 진짜 무서운 건 오로지 하나. 자식뿐. (71쪽)
 
너희들은 진짜 부모를 ‘엄마, 아빠’라고 부르고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는구나.
왜 나를 ‘아버지’라 부르는 걸까.
의외로 깊은 뜻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118쪽)
 
○ 원나이트 스탠드
법에 걸리는 위험한 일을 생업으로 하다보면, ‘귀를 의심하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게 되다’와 같은 관용어에는 도저히 고개를 끄덕일 수 없게 된다. 범죄라는 외줄타기를 할 때 의지할 것이라고는 오로지 자신의 오감밖에 없다. (119쪽)
 
“아, 너, 그 아이들의 글씨를 구분할 수 있는 거냐?” 아버지가 물었다. “내 눈에는 똑같은 글씨로 보이는데.”
“돋보기 도수 안 맞는 거 아냐? 타다시 쪽이 각이 지고 삐침도 정확한 글씨를 써. 사토시는 대충 쓰지만. 봐, 바로 알 수 있잖아.” …
“역시 아버지는 대단하군,”
“농담하지 마.”
“부모가 없어도 아이들은 자라지만, 아이가 없으면 부모는 자라지 않아. 넌 훌륭히 성장하고 있는 것 같구나.”
나는 아버지가 제정신인지 의심스러웠다. … 나를 제쳐두고 쌍둥이와 점점 친해지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126-127쪽)
 
시간을 죽이기 위해 가끔 미스터리를 읽는 정도로 문학과는 인연이 없는 인간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이상할지 모르지만, 어쩐지 현대국어라는 과목이 좀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적어도 시나 소설을 들어 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정말이지 이상하다. 제정신이 아니다.
나다오 선생이 오른쪽으로 올라가는 그 독특한 필체로 쓴 질문 내용을 보면, ‘다음 부분에서 오츠벨의 기분을 설명해보자.’ ‘이 말에는 어떤 감정이 포함되어 있는지 생각해보자’ 등이 있다. 정말 웃긴다.
본래 문학작품이나 소설, 이야기는 생각하거나 설명하려고 음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선 즐기고 그 다음에 해석, 그것도 자유로운 해석이야말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내가 학교에 다닐 무렵의 교과서에도 ‘설명하시오’, ‘생각하시오’라고 되어 있었다. 요즘 교과서는 좀 간사해져서, ‘함께 생각해보자’고 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마지막에 ‘시험’이 기다리고 있으니 출구는 하나, 결과는 마찬가지다. 자유롭게 해석하고 자유롭게 감동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모두 시험에서 동그라미를 받을 만한 대답을 찾는다. 그리고 당연히 책 읽기가 싫어진다. 그런 의미에서는 어설프게 친절한 ‘생각해보자’라는 제안 투의 교과서가 훨씬 더 죄가 많은지도 모른다. 이런 걸 교육망국이라고 한다. (144-145쪽)
→ 이 소설은 이처럼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교육에 대한 개똥철학도 들어있다. 그런데 상당부분 수긍이 간다는 거, 그게 오묘하다.
 
○ 헬터 스켈터
각자 애인이 도망치면서 쌍둥이의 부모는 ‘단 한 번뿐인 인생을 후회 없이 살기 위해서’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들은 사랑을 위해서 가정을 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열세 살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어버린 나는 절절히 생각해본다. 인생이란 결코 드라마틱한 연애나 격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인생은, 기한이 지나지 않은 건강보험증이나 주택융자금 상환이 이 달에 무사히 지불되었다는 은행의 통지서 같은 사소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184쪽)
→ 맞는 말이긴 한데, 그런 것으로만 이루어졌다고 하면 넘 슬프지 않나.
 
“정말로 좋아지면 상대가 결혼을 했건, 아이가 있건 관계없잖아?” …
“관계없는 게 아냐. 적어도 나는, 나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은 싫어해.” (187-188쪽)
 
“엄마가,” “소포를 보내왔어.”
“감기 안 걸리게 조심하라고.” “편지도 들어 있었어.”
부모란 나의 이해 범위를 넘어서는 존재인 모양이다. 너무 복잡하다. 도대체가 불가사의한 존재다. (216쪽)
 
○ 론리 하트
남자도 여자도, 누구든 반드시 한 번은 어린애였던 시절이 있으므로, 절대로 어린애에게는 잔혹한 행동을 할 수 없다. … 쌍둥이에게 상처를 주면, 내 과거 속 어린이 시절이 동시에 상처를 입는다. 그래서 나는 각오를 하고 신중하게 말을 가렸다. (227쪽)
 
“편지란 나중에 후회하기 위해 쓰는 거니까.”
“나중에 공개할 생각으로 쓴 것이라면 문제가 없을 테지. 비공개라 생각하고 쓰니까 곤란해지는 거야.”
공개와 후회의 차이. 아버지도 나도 하는 말은 똑같다. (235-236쪽)
→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도 비슷한 것이 아닐까. 비공개라 생각하고 쓰면 곤란해질 수 있다.
 
“감기란,” “빨리 안나아.” “걱정하게 만들려고,” “오래 끄는 게 아닐까?”
걱정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코감기에 걸리는 것도 즐겁다. (260쪽)
→ 하지만 걱정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나는 아프지 말아야 한다. 쩝...
 
○ 핸드 쿨러
○ 밀키 웨이

길을 걷다가 나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순간 다시 주위를 둘러보면, 가슴 뛰는 보너스의 계절인데도 별로 밝은 표정들이 안 보이는 건 또 무슨 사연인지 모르겠다. 은행 로비에서도 그렇다. 콧노래는 나 말고는 아무도 안 부른다. 쓸쓸한 세상이다.
생각해보니, 이건 모두 은행 입금이란 놈 때문이다. 꽤 많은 보너스를 받지만 그게 통장에 숫자로 나열되어 있을 뿐이니 실감이 안 나는 거 아닌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원래 콧노래라는 놈은 ‘기쁨’과 ‘행복’이라는 복잡한 인간기계의 옵션이라 가만있어서는 따라붙지 않는다. 그리고 숫자의 나열만으로는 옵션을 확보할 수 없다. (310쪽)
 
저렇게 문을 열어두다니, 여태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었다. 그것도 반이나.
무슨 일이든 어중간한 것은 기분이 산뜻하지 않다. 예를 들어 싸움도 그렇다. 도중에 말리면, 에너지를 모두 쏟아부어 팔이 안 올라갈 정도로 싸웠을 때보다 뒤끝이 별로다. 옷이 젖을 때도 그렇다. 인간의 감각이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라, 흠뻑 젖으면 상쾌한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어중간하게 젖으면 오히려 기분이 찜찜하다. 눅눅한 셔츠는 기분 나빠서 입을 수도 없다.
어중간하게 열려 있고, 어중간하게 닫혀 있는 현관문은 나에게 십 분 빨리 건조기에서 꺼낸 팬티를 입은 듯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314-315쪽)
 
→ 자세한 인용은 하기 어렵지만, 쌍둥이의 아버지가 돌아와서 더 이상 쌍둥이와 만날 수 없다고 생각한 뒤부터 화자인 도둑넘이 술집을 전전하다가 쫓겨나면서 “그 자리에서 폴짝폴짝 뛰어오르면 위장 속의 그 덩어리가 ‘미련미련미련’ 하고 노래라도 부를 것 같다”고 할 정도로 청승을 떠는 대목은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큼 감동적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좋은 인생공부를 했다고 투덜거리며 밤길을 걸었다. 교훈. 어린아이가 뚫은 구멍은 술로도 여자로도 메울 수 없다. 어디에 뚫린 구멍? 심장에.
미련. 내게는 인연이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327쪽)
→ 어느새 스텝파더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면서 거기에 몰입해버린 주인공 도둑넘의 인간적인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이상의 잘잘한 에피소드가 있다 하여 과연 스텝파더가 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나는 어려울 것 같은데...
 
쌍둥이의 아버지는 언젠가는 반드시 집에 들를 것이다.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어머니도 그렇게 돌아올지 모른다. 그러나 그게 언제일까?
그건 아무도 모른다. 내일 일을 미리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 않던가.
하늘을 흐르는 강이 어디서 끝나는지 누가 알까. 운명도 미래의 일도 그와 같은 것이다. 가야 할 곳으로 갈 따름이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흘러가면서 즐겁게 살자.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행복하니까. (3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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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2 18:44 2010/08/12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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