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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는 '낯선 땅 이방인'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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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A. 하인라인. 장호연 옮김. 2008. 『낯선 땅 이방인』. 서울: 마티.
Robert Anson Heinlein. Stranger in a Strange Land. 1961.
곤조(GONZO)시리즈 첫째권.
 
2010. 8. 12 완독하다.
 
○ 옮긴이의 글 중에서
오늘날 『낯선 땅 이방인』은 SF의 고전을 넘어 한 시대를 증거하는 미국 현대문학의 대표작으로 당당히 거론된다. (6-7쪽)
이야기의 큰 줄기로 보자면, 화성인들 손에서 자란 밸런타인 마이클 스미스라는 인물이 지구로 돌아와 겪는 모험을 다룬 일종의 지구정착기라 할 수 있다. (7쪽)
성장 소설과 모험물의 관습을 취하고 있는 이 소설은 방대한 인류학 보고서라 할 만하다. 낯선 세계에 떨어진 이방인의 모험을 그린다는 점에서는 『걸리버 여행기』를,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인생을 배우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생각나게 하지만, 사실 『낯선 땅 이방인』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책은 예수의 행적을 그린 복음서라 할 수 있다. 특히 세상의 온갖 핍박을 받으면서도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제 몸을 바치는 마이클의 모습은 예수의 희생을 히피 버전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보이며, 그의 곁을 지키는 사원의 신도들은 명백히 예수의 열두 제자를 재현한 것이다. 소설의 제목 ‘낯선 땅 이방인’은 출애굽기 2장 22절에서 가져온 말이다. 그럼에도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배하는 것은 SF 소설 특유의 쾌감이다. … 이야기에 또 다른 재미를 부여하는 요소는 소설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쥬발 허쇼의 장광설이다. “법학학사이자 의학ㆍ과학박사이며 미식가, 포도주 전문가인 동시에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기는 유명 대중 작가이자 염세주의 철학자이기도 한” 쥬발 허쇼는 SF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캐릭터이면서 동시에 작가 하인라인의 분신이기도 하다. 그는 직접적으로는 소설에서 마이클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정신적 스승으로 등장하며, 간접적으로는 하인라인의 개인적 사상을 설파하는 대변인 역할을 한다. 하인라인은 『낯선 땅 이방인』에서 서구의 종교와 도덕 전반에 대해 맹렬한 비판을 쏟아낸다. 작품의 질을 떠나 작가 개인의 독특한 무정부주의 사상만으로도 화제를 불러일으키는 하인라인의 면모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더없이 흥미롭다. (8-9쪽)
 
○ 하인라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기 때문인지, 『낯선 땅 이방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쉽게 읽혀지지 않았다. 하인라인의 아나키즘이 드러나 있고, 60년대 초반 미국의 기독교ㆍ중산층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였다고 하지만, 그래서? 소설은 그냥 소설 그 자체의 텍스트로만 읽어야 하는 걸까.
 
책 전반에 걸쳐서 예수의 가르침을 흉내낸 마이클 스미스의 메시지는 지금 나에게도 조금은 불편하다. 스미스의 출생, 엄청난 초능력, 순교, 그리고 종교의 창시 등이 예수의 삶을 본뜬 느낌이다. 하지만 예수가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던 것처럼, 그 사랑을 공감과 프리섹스로 풀어낸 스미스의 주장에 공감하기 어렵다면 내가 보수적인 것일까.
 
하인라인 주위에 제대로 된 사회주의자라도 있었으면 좀더 그럴싸한 인간상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그들이 공감하는 것에 공감하기 어려웠다. 여기서 드러나는 혁명적인 행동이나 사고라는 게 상당히 낡은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게 시대적 한계 때문일지, 책의 내용상 한계 때문일지는 분명치 않다. 당시에는 과연 참신하고 혁명적이었을까? 마지막에 가서는 쥬발 허쇼마저 공감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게 되는데, 그런 과정들이 갈수록 공감을 획득하기 어렵더라. 그 이유가 뭘까. 나는 벤 캑스턴에 호감이 갔는데, 그는 한 순간에 마이크에 ‘공감’해버리고, 주연의 지위로 떨어져버렸다.
 
‘물 형제(water brother)’, ‘그대는 신입니다(Thou art God)’ 같은 마이크의 말은 유행어가 되었다는데, 그게 사용되는 맥락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리... 소설의 초반에 나오는 공증인의 개념도 많이 생소하다. 객관적으로 보고 듣고 기억한다고? 그런 게 가능할까? 사랑과 평화(Love and Peace)! 이 단어가 상당히 많이 나오는데, 『스타십 트루퍼스』를 썼던 이가 사랑과 평화를 설파하는 게 형용모순이라는 생각이...
 
나에게 750쪽 짜리 분량은 버거웠다. 마지막 50여페이지를 남겨두고는 그냥 던져두었다가 오늘에야 마무리 독서를 하였다. 역시 예상대로 애매한 결말.
 
재미가 그리 있었던 것도 아니고, (현재의 나에게는) 뭔가 교훈을 주는 것도 아니지만, 하인라인은 이 소설을 통해서 뭔가를 말하고 싶었고, 60년대 초반 당시에는 통했나 보다. 그래서 SF 고전은 이런 느낌인가? 고전 중에서도 공부하는 느낌은 나지 않으면서 재미난 것이 있는데 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나름 뭔가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 있다. 여기서도 몇 군데 발췌.

 

이곳은 시간과 형태가 기묘하게 뒤틀려 있어서 소리와 광경을 아직 제대로 공감할 수 없을뿐더러 시간을 대하는 문화 자체가 자신의 고향과 달랐다. 지구 생명체가 더 오래 살기도 했지만 기본 태도부터 차이가 있었다. 이를테면 화성인들은 ‘가능하면 서둘러’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서두르면 일을 망친다’는 표현 역시 이유는 다르지만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첫 번째 표현은 아예 이해 자체가 어려웠고, 두 번째 표현은 마치 물고기한테 헤엄치라고 말하는 것처럼 불필요한, 화성인들한테는 너무도 당연한 말이었던 것이다. (104-105쪽)
 
쥬발은 포스터교가 말하는 진리가 엄정하면서 유일한 진리일 수 있음을 인정했다. 우주는 아무리 잘 봐줘도 어리석은 곳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위의 우연을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최악의 설명이다. 이를테면 추상적인 뭔가가 ‘우연히’ 원자가 되었고, 그것이 ‘우연히’ 함께 어울려 일관된 법칙을 이루게 되었고, 또 ‘우연히’ 배치되어 자의식을 가진 존재가 되었고, 그렇게 해서 ‘우연히’ 화성에서 온 사람과 머리가 벗겨진 고집쟁이 쥬발이 되었다는 이론 말이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쥬발은 그와 같은 ‘우연의 이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것이 과학자라 자칭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리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더라도. 무작위의 우연은 우주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무작위의 우연은 무작위의 우연을 설명하기에 충분치 않다. 항아리는 스스로를 담지 못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241-242쪽)
 
그나저나 화성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다른 동물과 어떻게 다르게 보일까? 공중부양을 할 수 있는 종족이라면 인간의 공학 기술에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까? 만약 그렇다면, 아스완 댐이나 수천 마일 뻗어 있는 산호초가 일순위가 되겠지. 인간의 자의식은? 그건 지나친 자만이다. 향유고래나 세쿼이아 거목이 인간을 능가하는 뛰어난 철학자와 시인이 아님을 누가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이 독보적인 분야가 하나 있기는 하다. 상대편을 죽이고 노예로 삼고 괴롭히기 위해 더 규모가 크고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해내는 데 무한한 재능을 보이며, 그 과정에서 인간은 인간에게 참을 수 없는 골칫거리가 되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스스로에 대한 가장 소름끼치는 농담이야. 유머의 기본은―
“인간은 소리 내어 웃는 동물이네.” 쥬발이 대답했다.
마이크는 이 말을 찬찬히 생각했다. “그렇다면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248-249쪽)
 
“특수조사국도 도구일 뿐이네. 추잡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늘 필요하니까. … 싫은 소리는 필요하네. 다만 내 말은 현재의 악당을 몰아내기 전에 다음에 들어설 악당이 어떤 자인지 살펴보라는 거야. 민주주의는 어설픈 제도네. 그렇더라도 다른 제도에 비해서는 훨씬 낫지. 민주주의의 최대 과실은 지도자가 유권자들의 수준을 반영한다는 사실이네. 낮은 수준이지. 하지만 뭘 기대하겠나? … 그의 정부가 무너졌을 때 총장 자리에 들어서게 될 사람을 생각해보게.”
“별 차이 없습니다.”
“차이는 언제나 난다네! ‘나쁜 것’과 ‘더 나쁜 것’의 차이 말일세. 그리고 이것은 ‘좋은 것’과 ‘더 좋은 것’의 차이보다 훨씬 더 뚜렷하지.” (320쪽)
→ 쥬발 허쇼가 더글러스 총장을 물러나게 하려는 캑스턴에게 하는 이러한 말에서 하인라인이 민주주의에 대해 가진 사고를 파악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럴싸한 정의라고 생각되는 한편으로, 그의 상상력이 지나치게 제한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공감’은 이 모든 것을 뜻합니다. 그것은 ‘두려움’을 뜻하고 ‘사랑’을 뜻하고 ‘증오’를 뜻합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화성인들의 ‘지도’에 따르면, 여러분이 무엇을 공감하지 않고서는 증오도 할 수 없으니까요. 철저하게 이해해서 여러분과 그 대상이 하나가 되어야 증오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스스로를 증오함으로써 말이죠. 하지만 이것은 그것을 사랑하고 소중히 아낀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내 생각에) 화성인의 증오에 가장 가까운 인간의 감정이라면 온화한 혐오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흐무드는 얼굴을 찌푸렸다. “‘공감’은 ‘완전히 동등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상투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그렇습니다. 화성어의 뉘앙스를 살리자면 ‘이것 때문에 당신보다 내가 마음이 더 아파’ 정도가 될까요. 화성인들은 우리가 현대 물리학을 통해 어렵사리 배운, 관찰자가 관찰의 과정에서 관찰 대상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 같습니다. ‘공감’은 관찰자가 대상을 속속들이 다 이해해서 그 대상의 일부가 된다는 뜻입니다. 완전히 하나가 되어 집단의 경험 속에서 정체성을 잃어버린다는 뜻이죠. 우리가 종교니 철학이니 과학이니 하는 말로 의미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의미합니다. 결국 앞을 못 보는 사람한테 색깔이 무의미하듯 우리한테 공감이라는 말도 그렇게 무의미합니다.” (368-269쪽)
→ 여기에 등장하는 ‘공감(grok)’이라는 단어는 영어사전에도 올라 일반명사가 되었다는데, 그 영향력은 인식할 수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이를 사용할 이는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마흐무드의 설명에 따르면 변증법을 체화한 단어로 보이는데, 그 공감에 공감하기 어렵다.
 
마흐무드의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 여자들이 수다스럽지도 않고 남자들의 진지한 대화에 끼어들지도 않으면서 음식과 술을 친절하고 신속하게 내왔다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미리엄이 주인(쥬발)한테 무례하게 구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지만, 곧 그것이 고양이와 사랑하는 아이들을 가정에 마음껏 풀어놓듯 그렇게 허용된 자유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370-371쪽)
→ 마흐무드와 미리엄은 나중에 결혼하는 것으로 나온다. 여기에서의 여성에 대한 묘사가 옮긴이의 글에서 언급된 페미니스트들을 영원히 분개하게 만든 문장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전반적으로 여성에 대해 차별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마이크의 종교에서 여성에게만 여사제 운운하는 것도 그렇고, 마이크를 쥬발과 연결시켜 주는 스토리의 매개자 역할을 하는 여성 질의 다음과 같은 말 또한 그러하다.
“만약 당신이 내 비명소리를 듣고 내 마음속에 들어와 내가 정말로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안다면, 그때는 다른 문제겠죠. 하지만 나는 당신이 화성에 있을 때 엉큼한 늑대들을 많이 상대해봤어요. 여자가 강간을 당하면 십중팔구는 여자한테도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어요. 그러니 섣불리 행동에 나서지 말아요.” (525쪽)
 
“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지혜가 생기지는 않네. 대신 두루 돌아볼 수 있는 시야는 넓어지지.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게 뭔지 아나? 자신이 거부했던 유혹들이 저 멀리 흘러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하는 거네. 나라고 해서 그렇게 후회하는 일이 없겠나.” (633쪽)
→ 결국 벤은 쥬발의 말을 듣고 마이크의 둥지로 다시 간 후에 물 형제가 된다.
 
“고백은 참으로 필요해요. 가톨릭교가 그 점을 잘 알죠. 그래서 고백을 받아줄 수 있는 강한 사람들이 가톨릭 교회에 포진해 있어요. 포스터교는 신도들끼리 서로 고백을 주고받음으로써 고민을 희석시키죠. 나는 처음에 죄를 씻어낼 때 고백을 하게끔 합니다. 아, 물론 우리가 고백을 받아줍니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하죠. 우리는 고백을 받아줄 수 있는 강한 사람들이 필요해요. 사실 ‘죄’는 진짜 잘못됨과 별로 관계가 없어요. 죄인이 죄라고 공감하면 그게 죄이죠. 그리고 당신이 그런 그와 함께 공감하면 당신도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마이크는 진지하게 말을 계속했다. “올바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결코 충분하지 않죠. 화성인들에게는 올바름과 지혜가 똑같은 것이거든요. 하지만 우리들은 그렇지 않죠. … 질의 한없는 인내심이 우리를 구한 겁니다. 그동안 내가 인간이 되는 법을 배웠고,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배웠으니까요.
하지만 올바름만으로는 결코 충분하지 않아요. 올바름이 선을 이루려면 냉혹하고 차가운 지혜가 거기에 더해져야 합니다. 지혜 없는 올바름은 항상 악으로 빠지게 마련이죠. 그래서 내가 당신의 도움을 절실히 원하는 거랍니다. 물론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도 있죠. 당신의 지혜, 당신의 힘이 필요해요. 그래야 내가 당신한테 고백할 수 있으니까.”(716-717쪽)
 
“내가 풀어줄 수 없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어요. 아주 나쁜 사람들이었죠. 그래서 나는 철창과 문을 날려버리기 전에 그들부터 제거했죠. … 나의 이런 행위에 대해 질이 까다롭게 굴다가 마음을 바꿔서 애정 어린 지지를 보내게 된 계기는 그녀의 공감이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일은 불가능하며, 우리가 하는 일은 ‘불필요하게 거친 플레이’를 한 선수를 경기장에서 퇴장시키는 심판과 아주 비슷하다는 사실을 그녀가 마침내 충만하게 공감하게 된 겁니다.”
“자네는 신의 노릇을 하는 게 두렵지 않나?”
마이크는 노골적으로 즐거워하며 씩 웃었다. “나는 신입니다. 그대는 신입니다. 그리고 내가 제거한 얼간이들도 모두 신입니다.” (727-728쪽)
→ 이 대목도 공감하기 어렵다. 자신이 탈옥을 하면서 자신의 기준으로 아주 나쁜 사람들은 제거한다?
 
“핵심적인 한 가지 사항을 놓치고 있었어요. 인간은 화성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스스로 잘못을 교정해가면서도 실수는 계속되었죠. 화성인한테 통한다고 해서 그게 꼭 인간한테도 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화성어로만 포착되는 개념적 논리는 두 종족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논리는 변하는 게 아니니까요. 하지만 자료는 달라요. 따라서 결과도 당연히 다르죠.
나는 이해할 수 없었어요. 왜 사람들이 배가 고플 때, 나머지 사람들이 자신을 먹을 수 있게 제 몸을 희생하는 자원자가 나오지 않는지. 화성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하고, 그건 명예로운 일이거든요. 또 아기들이 왜 그렇게 소중한 보살핌을 받는지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화성에서는 아기들이 죽든 살든 그냥 집밖에 내다버려요. 그리고 애벌레의 십중팔구는 첫 번째 계절을 넘기지 못하고 죽죠. 문제는 그거였어요. 나는 논리는 맞지만 자료를 잘못 읽은 겁니다. 여기서는 아기들이 경쟁하지 않고 어른들이 경쟁을 합니다. 화성에서는 반대죠. 어른들은 아기 시절에 솎음질을 거쳐 선택된 자들이니까요. 아무튼 경쟁과 솎음질이 일어나는 건 어디서나 마찬가지예요. 그렇지 않다면 그 종족은 내리막길을 걸을 테니까. 내가 너무 무리해서 경쟁을 배제하려고 한 게 잘못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습니다.” (7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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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2 18:50 2010/08/12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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