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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합의주의 현황과 문제점(노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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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노무현정권의 ‘사회적 합의’공세와 노동운동의 대응"이라는 주제로 2004년 7월 3일 서울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노중기 한신대 교수가 발표한 발제문으로, 울산노동자신문 자료실에서 다시 퍼온 것입니다( http://www.ulnews.net/pds_read.asp?num=2817&sec=자료 ). 노중기 교수는 민주노동당에서 정책자문을 맡고 있습니다. 저는 아래 글에 대부분 동감하며, 사회적 합의주의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 한번 숙독했으면 합니다. 단지 노사정위 참여나 이수호 집행부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주의에 대해 왜 단호해야 하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 글은 잘 서술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합의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IMF 위기 이후 최근까지 ‘사회 통합적 구조조정(노사관계)’, ‘사회통합’의 이데올로기가 노사정위 참가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입니다. 노중기 교수의 글에도 나오지만, 사회과학에서 ‘사회통합’(social integration)이란 가치중립적인 개념이 아니며 보수적 함의를 갖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단순한 것인데, '사회적 합의주의'라는 것은 이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이죠. 사회과학의 대립되는 두 패러다임을 얘기하라고 하면 '통합, 조화, 합의'의 관점과 '갈등, 대립, 모순'의 관점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사회적 합의주의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노동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에 동의할 때만 ‘사회적 합의’는 가능하다”는 딜레마를 어떻게 풀 수 있을까요? 노힘이나 노중기 교수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 대동맹 아래에서는 진정하게 “합의할 내용(지점)이 없다”고 봅니다. 아래 글의 뒷부분에 나오는 것처럼, "‘구조적 여건의 척박함으로 인해 민주적 조합주의체제의 구축은 현실적으로 난망’하고, 전략적 참가의 여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사회적 합의주의가 고려될 수 없으며, 분쇄의 대상이라는 것이죠. 이를 노힘의 논리와 같다고 해서 배척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올바름 아닐까요?


전략적 참가가 아니면 전술적 참여를 검토해봐야 하는데, 이 또한 "전체 노동자(민주노조운동)의 계급세력화라는 전략적 관점 하에 배치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참가 여부는 참가의 형식이 문제가 될 수 없으며, (예상되는)참가의 ‘내용과 결과’를 중심에 놓고 그 결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민주노총은 우선 참여하고 보자는 식으로 반응을 하고 있습니다.

 

"참가가 조합원의 대중적 요구에 기반하여 이루어지고, 그 과정이 충실해야 하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그러나 노사정위의 문제는 그 같은 절차적 정당성으로 모든 일이 정당화되는 일이 아니라는 점에 그 심각성이 있다. ... 참가가 거의 불가능한 제반 조건 속에서, 또 ‘노사화합과 경쟁력’을 앞세운 상대와 함께 하는 노사정위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반세기 민주노조운동의 정체성과 역사성의 문제가 걸려있다. 목숨으로 방어한 민주노조의 자주성과 민주성, 그 계급적 연대성이 시험받는 문제인 것이다. 또 더불어 신자유주의의 전방위적 압박 속에 있는 노동대중의 미래가 걸려있는 중차대한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원칙의 문제입니다. 2월 1일의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 다음날 폭력사태의 주범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조성웅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노조위원장은 레이버투데이와의 인터뷰를 통해 사회적 교섭틀에 들어가자고 주장하는 민주노총 현 집행부는 민주노조 운동을 배신하고 있으며 이것(사회적 교섭) 아니면 안된다고 하는 비겁한 협박을 하고 있으며, 이런 노사협력주의에 물든 집행부와 절충이나 대화를 통해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하면서, 현 민주노총 집행부는 자본과 기업이 민주노조 운동 내에 파견한 세력이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소 과장이 있을지언정 비정규직 노동자나 현장활동가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을 겁니다. 



사회적 합의주의 현황과 문제점 - ‘사회적 합의’와 노동운동

                   노중기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1. 문제제기

민주노총의 노사정위원회(이하 노사정위로 줄임) 참가문제가 지금 중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지난 6년의 경험을 고려하면 이것은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고 신중을 거듭할 필요가 있다. 물론 민주노조운동이 ‘참가’에 대해 지나친 ‘피해의식’은 가질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정이 갖는 장기적 효과, 결과가 중대한 것이라면 보다 책임 있는 자세가 요구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총선 이후 더욱 두드러지는 정부의 ‘대화의지’의 실체가 무엇인지, 그것이 참가의 가능 요건이 되는지를 꼼꼼히 따져보아야 한다. 특히 참여할 경우 그것이 과연 ‘자발적(전략적) 선택’인지, ‘강요된 선택’인지를 고민해보아야 한다.

먼저 이 문제의 중차대함을 고려해 볼 때 참가문제에 대한 관점 정립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크게 3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노사정위 참가문제는 단순한 ‘실익’의 크기 문제로 이해해선 안 될 것이라는 점이다. 참가를 둘러싸고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단순히 양적인 지표로 환원되기 어려운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예컨대 실익을 논의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장ㆍ단기 실익, 그리고 정치적ㆍ경제적 실익 등의 복잡한 방정식으로 계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노ㆍ자 간) 교환되는 이익(interest)의 내용이 서로 다르므로 이를 양적으로 비교하는 것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과거의 합의(1998년 2월 합의 등)에서 경험했듯이 그 형평성에 대한 판단은 더욱 곤란하다. 노동운동의 자주성, 민주성에 훼손이 올 경우 ‘실익 계산’은 더욱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참가하는 만큼 이익’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닐 뿐만 아니라, ‘해보고 안 되면 그만두어도 무방한’ 문제도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둘째, 노사정위 참가는 단순한 ‘정책참가’로 협소하게 이해할 수 없는 문제이다. 여러 정책참가 영역 중 하나의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란 것이다. 그것은 한국사회 노동체제의 총체성과 연관해서 여타 전략적ㆍ전술적 과제와 결합된 문제인 탓이다. 예컨대 그것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 파업권의 보장 문제 등 국가 노동정책 일반과 분리될 수 없는 문제이다. 참가는 반드시 일정한 책임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또 계급적 관계 일반의 흐름을 규정한다는 의미에서 노동 측의 계급세력화나 계급적 정치세력화의 과제와도 맞물려있다고 파악된다. 특히 노조운동의 기본 원칙인 ‘자주성’과 ‘민주성’ 곧, ‘노동운동의 계급성’ 문제와 직접 맞닿아 있는 문제란 점이 지적되어야 한다.

셋째, 다양한 ‘이데올로기’가 노사정위 참가문제와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 함의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최근 참가를 둘러싼 논쟁에서는 ‘전략주의’, ‘생산성연대’, ‘사회적 합의-협의주의’, ‘타협주의(노사협조주의)’, ‘실리주의-경제주의’ 등 반 계급적 이데올로기가 횡행하는 실정이다. 참가의 논의나 결정과정에서 자칫하면 이 같은 반 계급적 이데올로기를 묵인하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것이다. 특히 IMF 위기 이후 최근까지 ‘사회 통합적 구조조정(노사관계)’, ‘사회통합’의 이데올로기가 노사정위 참가를 정당화하는 논리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다. 사회과학에서 ‘사회통합’(social integration)이 가치중립적인 개념이 아니며 보수적 함의를 갖고 있다는 너무나 단순한 사실이 완전히 무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노사정위의 문제는 단순한 선호나 손익계산으로 처리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우리사회에서 신자유주의가 야기하는 ‘사회분절성 고착구조’, ‘사회해체’를 ‘지양하는 사회통합의 기구’인지, ‘신자유주의 수단, 실행 기구’인지는 이론ㆍ실천적으로 엄격히 따져 볼 문제라는 것이다.

2. ‘사회적 대화전략’은 노조에게 필요한 것인가?’

원론적으로 노조의 참가전략은 전략ㆍ전술 수준, 모두에서 필요한 일이다. 이를 부인하는 것은 과도한 일이 된다. (주1. 주지하듯이 노동조합은 모순적 조직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재생산에 기능적인 동시에 변혁적인 단초를 포함하고 있다.) 논란이 있겠으나 필자의 판단으로는 지금까지 민주노총의 입장도 동일하였다. 문제는 참가의 수준과 내용, 그리고 방식은 무엇인가이다. 그리고 우리사회에서 그 조건이 구비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예컨대 전두환 정권에서 3자 합의기구 참가는 불가한 일이 된다. 1980년대 우리사회에서는 참가를 위한 조건들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어진 사회의 맥락에 따라 노동조합의 참가에 대한 다양한 입장, 즉 전략과 전술이 가능해진다. 우리가 다른 나라의 참가 사례, 과거의 경험을 중요한 준거로 삼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현재 노사정위 실험을 둘러싼 비교연구는 서구의 사례에 집중되어 왔다. 특히 네덜란드, 아일랜드, 이태리 등이 주요한 연구 대상이었다. 이 같은 비교연구는 정부기관인 노동연구원이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 이후 주도해 왔으며 최근 일부 진보적 노동연구자들도 서구의 실험에 주목하고 있다. 이제 서구사회 코포라티즘에 대한 연구는 연구실을 떠나 정치적 장에서 주요한 쟁점이 되고 있다.
(주2. 2003년 7월 청와대 수석의 네덜란드모델 발언과 이후의 소동은 하나의 지표가 된다. 이는 과거 민주노조운동에 참여했던 이른바 다수의 ‘친 노동계’인사들이 노무현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 이들 연구의 정책적 함의는 서구의 실험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는 단순한 논리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연구들은 서구모델의 ‘전략적(정책적) 이식’(strategic transplantation) 가능성이라는 가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 네덜란드와 아일랜드, 심지어 이태리는 우리의 미래상으로 서술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네덜란드는 바람직하며, 나아가서 우리의 경우에도 가능하다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연구는 잘못된 비교연구일 뿐만 아니라 서구의 수많은 연구결과에 대한 의도적인, 혹은 의도치 않은 왜곡을 포함하고 있다. (주3.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노중기(2002, 2004a, 2004b)를 참고할 것.) 서구에서 연구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압력 속에서 서구 노동체제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서구 노동체제의 ‘수렴-분산’(convergence/divergence) 논쟁의 형태를 띠었고 압도적 다수의 결론은 분산이었다. 즉 1970년대까지의 전통적 노동체제는 해체되기보다 각 국가의 조건에 따라 다양한 경로를 밟아 변화하고 있다는 결론이었다. 대개의 연구들은 코포라티즘은(주4. 사회적 대화(social dialogue), 사회적 합의-협의(social concertation), 삼자주의(tripartism), 각종 코포라티즘(corporatism) 등을 둘러싼 복잡한 개념 논쟁은 생략한다. 이 글은 ‘코포라티즘’이론의 유용성이 여전하다고 본다.) 변형, 유지되었으며 신자유주의의 영향은 분명했으나, 제한적이었음을 지적하였다.
서구 연구의 결론 및 함의는 노동체제 변동의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e)의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에 있었다. 즉 대체로 동일한 외적 압력(신자유주의,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각 사회는 그 사회가 가진 사회구조적, 역사적, 문화적 조건에 따라 다르게 변동한다는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만큼 모델의 이식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분명한 인식이었다.

문제는 이 결론이 ‘신자유주의시대에도 코포라티즘은 가능하다’로, 그리고 ‘한국에서도 가능하다’라는 단순 도식으로 확대, 해석된 것에 있었다. 서구 코포라티즘은 그 성격, 요건 및 결과에 상관없이 한국의 노사정위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이다. 노동연구원 주도의 국내 비교연구는 서구의 연구결과를 ‘합의체제의 (이식)가능성’, ‘노사정위의 가능성’으로 비약시켰다.

특히 최근 국내 비교연구에서 두드러진 오류는 이른바 ‘전략적 선택’의 문제였다. 일부 국내연구는 ‘조건은 부재하지만 그래도 전략 선택이 중요하다’는 일종의 ‘전략선택 만능론’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전략적 형성론’ 혹은 ‘구성론’(strategic constructivism, configurational theory)이라는 이름 아래 ‘구조적인 여건 충족 여부와 관계없이 위기의 존재, 주체들의 해결 의지-공감대, 이행능력’만 있으면 코포라티즘(사회적 대화)이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곧 ‘전략선택’이 유일한 요건이며, 민주노총의 ‘참가전략’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마법의 약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런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노동연구원이나 노사정위는 각종 국제세미나에서 ILO 소속 연구자들까지 동원하기도 했다. (주5. 민주노총도 최근 이 대열에 끼기 시작하였다. ILO-KCTU, ‘유럽 각국과 비교한 한국의 노사관계 현황과 민주노총의 사회적 대화전략’, 2004. 6. 21 참고.)

이런 주장은 사회과학 일반의 상식에도 반하는 심각한 자원론(voluntarism)이자 관념론이다. (주6. 관변의 학자들이 예찬하는 네덜란드사례도 마찬가지이다. 네덜란드는 상대적으로 취약하나마 산별노조와 중앙 집중적 사용자조직, 사민주의정당, 시민사회의 그물 연줄망, 역사적 경험과 사회적 이데올로기가 기반이 되고 있다. 그리고 네덜란드모델을 ‘기적’으로 보는 것은 매우 편향된 인식이다. 장점과 함께 여성노동-비정규직의 증가, 고용의 양극화, 임금의 상대적 하락, 기술 수준의 하락 등 여러 가지 한계가 동시에 존재한다. 자세한 것은 노중기(2002, 2004a, 2004b) 참고.) 그리고 서구사회 다수 연구자들의 연구 결과, 나아가 이른바 구성론, 형성론자들의 연구결과와도 배치되는 주장이었다. 서구 연구자들은 중앙 집중적 조직구조와 교섭체제, 좌파정당과 타협적 제도정치구조, 계급 간 힘 관계의 균형, 타협의 역사적 경험과 문화 등 구조적 요건이 신자유주의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한 것으로 평가하였다. 전략만이 중요하다면 사회과학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더욱 문제인 것은 최근 논의가 서구뿐만 아니라 제3세계 많은 사회의 역사적 경험, 구체적 사례를 완전히 무시한 점이다. 예컨대 이들은 결코 ‘사회적 대화체제’로 분류될 수 없는 멕시코를 사회적 합의 체제라고 주장하였다. 이는 비교연구가 무지를 넘어 의도적 왜곡,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일 것이다.

관변 연구들이 거의 소개하지 않는 3세계 사례들에서 이른바 ‘사회적 대화기구’는 대개 ‘노조 통제기구’였다. 멕시코로 대표되는 라틴아메리카(브라질, 아르헨티나, 칠레 등)에서 그것은 신자유주의 통제기구이자, 노동 포섭기구였다. 멕시코에서는 그것은 IMF와 미국이 주도하는 가혹한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침묵(‘sound of silence’)이 계속되도록 만든 핵심장치였다. 그리고 동유럽(체코, 헝가리, 폴란드, 불가리아, 러시아 등)에서도 그것은 구조조정과 자본주의이행, 민주화과정에서 발생하는 위기를 관리하고, 비용을 노동 측에 전가하는 핵심 통제장치였다.

그나마 유의미한 시도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우, 그 성과와 한계에 대한 논쟁이 끊이지 않는 실정이다. 또 남아공에는 강력한 집권 좌파정당, 중앙 집중적 노조조직과 높은 조직화, 곧 강한 계급역량, 인종차별(Apartheit) 철폐투쟁의 역사적 경험과 민중적 연대의 전통이 존재한다. 이 구조적 조건은 여타의 3세계 국가와 크게 다르며, 한국사회와 비교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자본주의의 세계체제 내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구보다 제3세계에 훨씬 가깝다.(<표> 참고) 그것은 한국 노동체제의 전근대성, 그리고 한국 노동운동의 취약한 역량에 기인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사회적 합의를 모색한다면 서구와의 비교 이전에, 제3세계 사례에 대한 보다 자세한 연구가 긴요하다.
체제특성 동유럽 멕시코 한국 린코포라티즘
(실험) 주도권 국가 주도국가 주도국가 주도국가-이익조직
쌍방
이익조직 특성분산, 역량 취약분산, 중간 역량극도 분산, 취약조직된 분권화,
중간
노조-국가관계일부 종속국가에 종속일부 종속/대립자율성
정당-노조관계조직적 관계부재 지배정당에 종속조직적 관계부재유기적 연관
정부 성격우파(신자유주의)우파(신자유주의)우파(신자유주의)다양한 가능성
계급 힘 관계국가 우위국가 우위국가 우위약한 국가우위
단체교섭분권화.
기업단위
중간정도
분권화
분권화.
기업단위
중간정도.
부문별
지배의 기제 시장, 위계 위계, 폭력 폭력, 시장 네트워크
역사적 배경 사회주의.
단원주의
국가코포라티즘 국가 억압체제 사회코포라티즘
<표> 3자 합의실험의 사례 비교 (주7. 린코포라티즘은 네덜란드사례를 중심으로(Traxler, Blaschke and Kittel, 2001), 그리고 멕시코는 임영일(1998), 이성형(1998, 1999), 노중기(2004a), 동유럽은 노중기(2004b)를 참고하여 정리함.)

결론적으로 신자유주의시대에 수많은 제3세계 사회에서 대동소이한 ‘사회적 합의’실험이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설명해야 할 일이다. 더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겠으나 크게 세 가지 구조적 상황적 요인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대부분의 제3세계 사회는 1990년대 초반까지 민주화이행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노동사회도 일정한 범위 내에서 민주화가 진행되었고 이는 이른바 ‘통제의 위기’를 발생시켰다. 사이비 합의체제는 무엇보다 통제의 위기에 대응한 국가-자본의 이데올로기공세였다. 또 이 과정은 1990년대 이후 본격화된 초국적 자본의 신자유주의 압박, 자본축적의 위기와 중첩되었다. (주8. 우리의 경우 1997년 연초와 연말의 두 커다란 사건이 이런 조건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수세기 국면을 맞이한 제3세계 노동운동 일반의 취약한 역량은 또 다른 조건이었다. 사이비 합의나 강제된 합의가 노동대중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시도되고 일정한 통제 효과를 발생시키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들 중 하나는 노동계급 역량의 취약성이란 것이다.

3. ‘한국적 토양 위에서 사회적 대화전략은 유효한가?’

이 질문은 노사정위 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 결정적인 물음이 된다. 서구 비교연구가 ‘이식의 관점’보다 ‘개별 사례에 적합한 정책 개발’을 강조하였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즉 우리 사회에서 대화와 합의의 여건이 존재하는가라는 결정적인 문제이다. 또 그것은 소위 ‘전략적 형성론’의 입장에 선다 하더라도 국가ㆍ자본에 의지가 있는가를 판별할 수 있는 중요한 준거점이 된다.

먼저 우리사회에 합의를 위한 구조적 조건은 존재하는가를 살펴보자. 국가ㆍ자본의 선한 의지, 전략적 선택이 있다면 합의가 가능한 그런 구조적 상황인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크게 네 가지 구조적 제약요건이 고찰될 수 있다.

먼저 우리의 경우 노동계급의 역량이 매우 취약하다. 여기에는 무엇보다 기업별 노조 조직체제가 결정적이다. 기업노조체제에서는 높은 민주성에도 불구하고 이익(interest)의 결집, 민주적ㆍ집중적 의사 결정이 매우 어렵다. 이는 낮은 조직율의 효과를 더욱 반감시키는 요인이 된다. 그리고 11-12% 대의 낮은 조직율과 대기업중심의 조직적 편중성도 문제가 된다. 노사정위 문제에서는 한국 노총을 제외하고 5% 수준의 조직율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관련된 물적, 정책적 역량의 취약성은 재론이 불필요하다.
한편 최근의 ‘민주노동당의 의회진출’ 문제는 그나마 취약한 조직역량을 보완하는 정치적 힘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역사적 의의와 가능성을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3% 의석’을 과장해서도 안 될 것이다. 벌써부터 이를 사회민주주의의 ‘양 날개론’으로 띄우는 것은 그자체가 개량주의일 뿐만 아니라 그 의미를 과장하는 관념론이다. 결국 이제 제도화의 첫 단추를 끼운 민주노동당이 노사정위 참가의 ‘새로운 근거’가 될 수 없다.

둘째, 국가, 정치구조의 틀이다. 15년 이상의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국가는 여전히 수구-냉전국가, 분단국가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분단국가의 억압적 관료체제가 여전히 경제부처, 공안부처를 중심으로 주도권 장악하고 있으며 노동배제의 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제한적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종속적 신자유주의(‘경쟁력주의’와 ‘법치주의’, ‘대미 종속성’)라는 국가 내부의 전략적 헤게모니가 더욱 굳건해지고 있다. 대통령 중심의 노동억압, 줄 이은 노동열사, 각종 파업진압, 손배소송, 소위 로드맵과 파견노동자제도의 확대 시도 등 지금까지의 경험은 현재의 정치구조 틀의 반영이었다. 노무현(정부)의 ‘변신 선언’은 그 상징이었다. 그것은 향후에도 노동 배제, 신자유주의 경제ㆍ노동정책이 지속될 것임을 말한다.
전체적으로 정치사회는 보수ㆍ수구의 압도적 우위가 지속되고 있다. 민주노동당의 진출에 대한 경계로 양당의 정책연대가 이미 가시화되고 있는 것도 주목할 일이다. 이는 곧 민주노동당에 대한 왕따전략으로 나아갈 전망이다. 상생(相生)의 대상이 민주노동당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열우당의 정책적 가능성에 대한 과대평가는 금물이다. 오히려 열우당은 ‘신자유주의 대 동맹’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별로 없다. (주9. ‘정권 내 개혁 블럭과의 정책연대’ 주장은 각색한 비판적 지지론에 불과하다. 선거 이후 경제부처 각료들의 선긋기나 이른바 개혁분파의 대표 ‘유시민’을 보면 그 한계와 가능성이 보다 분명해진다. ‘신자유주의 대동맹’이란 열우와 한나라, 전경련과 보수 언론이 주도하며, 신자유주의를 엄호하는 동맹전선을 말한다.(조돈문,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개원토론회’ 발표문 참고)) 요컨대 노사정위가 ‘경쟁력주의’, ‘노사화합주의’를 벗어나서 노동개혁을 논의할 수 있게 해주는 정치적 환경은 여전히 없는 것이다.

셋째, 시민사회 구조적 지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신자유주의 담론을 전파하는 이데올로기기구, 적대적 보수 언론의 이데올로기공세는 여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소위 언론개혁도 이 문제와는 무관한 일이다. 언론개혁은 자유주의적 개혁으로 계급의 문 앞에서 그 선이 분명히 그어져 있는 것이다. 계급적 대안 매체, 즉 노사화합-국가 경쟁력 제고의 담론을 넘어설 언론은 현재 없다.
그리고 1998년 이후 지속된 시민운동의 보수화 경향도 강화될 전망이다. 형식적 민주화에 따라 시민단체들이 국가에 의해 동원되고 조직되는 경향은 우려할 만한 일이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그 시민단체들이 주도하는 노동자 적대는 한층 강화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노동계급의 역량이 시민사회 조직, 시민운동에 미치지 않은 조건에서 반노동자 정서, 낮은 시민의식의 장벽은 지속될 전망이다.

넷째, 역사적 경험의 차원에서도 노사정위 합의의 기반은 일천할 뿐만 아니라 더 약화되어 왔다. 반세기 노동배제의 정치ㆍ사회체제에서 이제 겨우 이루어진 민주노조, 민주노동당 합법화를 과장할 순 없는 일이다. 그보다는 노조조직을 동원하여 국가가 조직노동을 배제하고 지배해온 오랜 역사적 유산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있다. 예컨대 1970년대 한국노총이 산업평화를 앞세우며 유신정권의 노동탄압에 ‘합의’했던 경험은 한국사회에 고유한 역사적 조건인 것이다.
특히 1990년대 중반 이래 노사관계개혁위원회, 노사정위와 이른바 각종 ‘합의’의 경험들이 이제는 구조적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1993년과 1994년의 노경총 임금합의, 1996년의 노개위 합의와 날치기 법개정, 1998년 정리해고 합의와 현대자동차 합의, 2001년 한국노총의 복수노조합의 등 노동대중에게 각인된 ‘배신’의 경험들은 이제 하나의 역사적 조건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지금 진행되고 있는 합의 실험은 내외의 독점자본이 주도하는 ‘신자유주의 경제정책’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란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정리해고, 노동시장 유연화정책, 비정규직 확대정책이 ‘참여와 협력’의 이데올로기 아래서 진행되는 모순이다. 한편에서 인력 감축, 비용 삭감 위주의 경쟁력 강화방안이 실행될 때 다른 쪽에서 실업자 생계대책, ‘일자리 만들기’ 사회협약을 체결해야 하는 모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노동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노동유연화에 동의할 때만 ‘사회적 합의’는 가능하다”는 딜레마인 것이다. 신자유주의 대동맹 아래에서는 진정하게 “합의할 내용(지점)이 없다”. (주10. 노동자의 힘(2004), 노중기(2002) 참고.)

요컨대 노무현정부의 의지와 무관하게 한국에 ‘합의의 구조적 조건’은 부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자본의 전략선택, 특히 노동의 전략선택이 문제가 된다면 노사정위의 지난 6년 경험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노사정위 6년 경험에서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노사정위 참가’는 ‘강제된 참가’였다는 점이다. 1기 노사정위로부터 국가는 일관되게 노동의 참가를 강요하였다. 1998년 1월의 참가, 6월 2기 노사정위의 참가는 물론 한국노총의 참가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2000년 하반기 이래 불참에 대한 대가로 민주노총은 가혹한 탄압을 경험하였다. 자주적 참가를 봉쇄하는 ‘비자주성의 전략적 지형’이 튼튼하게 작동하였던 것이다. 이 기간동안 국가는 노동정치의 모든 쟁점, 문제들을 노사정위로 떠넘기는 전략을 고수하였다. 노사정위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마법의 조직이 되었다. 불참조직에 대해서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여론 공세의 압력이 가하였다. 또 동시에 불참은 ‘법과 원칙’을 정당화하는 근거였고 민주노조에는 무차별적 폭력이 계속 가해졌다. 현재 민주노조 조직 내부에서 노사정위 참가의 대중적 요구가 존재하는 객관적 기반은 바로 이 같은 ‘비자주성의 전략적 지형’이다.

둘째로 살펴봐야 할 것은 한국노총의 참가 경험이다. 먼저 노동은 불참한 것이 아니라 ‘참여한 것’이라는 점에 대한 환기가 필요하다. 한국노총은 이 기간동안 불참-참가를 되풀이하였으나 전략수준에서 참가방침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민주노총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은행파업 등 산하 노조에 대한 구조조정과정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지도부의 실추된 위상은 왜곡된 형태로 보상받고 유지되었으나 소속 노동대중의 거부로 인한 조직력 약화-민주노조운동 강화의 역설적 결과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때로 2001년 2월 합의(전임자임금지급금지 유예, 단위사업장 복수노조금지 존속)처럼 소위 ‘실익’을 얻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는 노사정위 관련자들도 인정하는 잘못된 합의였을 뿐이다.

셋째, 합의 건수, 합의사항 이행여부 문제이다. 우선 정부와 노사정위가 자랑하는 ‘합의 이행 숫자 나열’은 무의미한 일이다. 불이행 사례는 ‘실업자의 초 기업단위 노조가입’ 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합의 이행으로 분류되는 ‘노동참가 방식의 구조조정’, ‘부당한 정리해고 등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 근절’, ‘재벌 개혁과 조세 개혁’ 등 핵심 사안의 실제는 노동대중에게 충분히 알려져 있다.
한편 노사정위의 대표적인 업적인 교원노조는 1998년의 대규모 정리해고에 대한 대가였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노총의 노사정위 탈퇴, 민주노총 위원장의 한겨울 길거리 단식농성을 거쳐 겨우 이루어진 일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1997년 겨울총파업의 성과였다. 또 공무원노조의 합법화의 경우에는 당사자를 배제한 일방적 합법화 시도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법정 노동시간단축은 ‘임금저하-노동조건 후퇴’의 개악으로 끝났을 뿐이다. 노사정위가 주도한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합의는 그 직후부터 지켜지지 않았고, 현재에도 해고자들의 투쟁이 계속되고 있는 실정이다.

넷째, 지난 6년의 합의 실험은 국가폭력으로 뒷받침된 ‘참여와 협력’이었을 뿐이다. ‘참여와 협력’의 구호 뒤에서는 ‘손배 청구’, ‘이른바 공권력 투입이라는 파업파괴’, ‘불법쟁의 이데올로기 공세’, ‘구속, 수배 등 형사처벌’, ‘적나라한 폭력배-경찰 동원’이 계속되었다. 노사정위는 애써 이를 무시하였으나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를 수는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네덜란드 린코포라티즘의 ‘국가 협박’('shadow of hierarchy')은 한국적 토양에서 항상적인 법적, 제도적 폭력 행사로 나타난 셈이다. 이른바 ‘참여정부’의 국가 폭력도 2003년 경험했듯이 만만치 않았다.

다섯째, 노사정위의 구성과 의사 진행도 합의의 정치에는 걸맞지 않았다. 주요 의사결정과정에서 민주노조의 지분은 1/3-1/6에 불과하였다. 정부위원과 ‘친 자본 공익위원’이 수적으로 압도하였으며 이들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한국노총의 존재로 말미암아 분할 지배의 가능성이 상존한 것도 지분을 더욱 축소시켰다. 또 노사정위에서 자료나 정책적 지원은 국가기구인 ‘한국노동연구원’이 전담하였다. 그리고 실무구성원의 인적 배경, 예산 배정과 집행도 완벽하게 정부가 주도하였다. 결국 운영 전반의 자율성은 없었다. 그 결과 의사진행과정에서 국가ㆍ자본의 요구는 쉽고 빠르게 관철된 반면, 노동의 요구는 흔히 지체되었고 초점이 흐려지거나 무시되었다. 국가의 정치적 판단, 경제상황 관리에 노사정위 운영은 항상 종속되었다.

여섯째, 참가의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6년간의 사회경제적 결과는 신자유주의의 일방적 관철이었다. (주11. 김유선, ‘민주노총정책연구원 개원기념 토론회’ 발표문, 2004. 4. 30 참고.) 정리해고, 구조조정-매각, 노동시장 유연화-비정규직 확대 등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노사정위 존재 여부와 무관히 관철되어 왔다. 그것은 노사정위의 존속이 ‘사회 통합적 구조조정’을 가져다준다는 가설의 실상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2001년 봄 민주노총의 조직적 투쟁의 결과였던 ‘노동시간 단축’은 참가한 한국노총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사정위에서 ‘노동시장 유연화’로 귀결되었다. 민주노총이 참가조직이었으면 더 나은 합의안이 가능했다는 주장은 과거의 합의 경험을 낭만적으로 해석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이 시기동안 민주노조운동의 경험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기와 2기 참가과정에서 민주노조가 얻은 것은 정리해고 만이 아니었다. 민주노조운동 내부의 이념적ㆍ조직적 혼란이 계속되었던 것은 주요한 결과 중 하나였다. 1998년 2월 합의, 2기 노사정위 참가, 사회적 조합주의논쟁, 발전파업의 파행, 선거 과정에서의 대립 심화 등 노사정위의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영향은 뚜렷하였다. 자주성의 훼손 문제는 특히 심각하게 나타났다. 발전합의에서 나타나듯이 ‘한국노총과의 (무차별)통합론’, ‘경쟁력-생산성주의 담론’, ‘노사협조주의’, ‘이른바 국민적 관점과 국민경제론’, ‘전투성-파업투쟁에 대한 과도한 비판’ 등 이데올로기적 폐해가 조직 내에서 속출하였던 것이다. 노조운동의 모든 것을 노사정위로 환원시켜 설명할 순 없다. 그러나 노사정위 참가문제가 조직 내 균열을 심화시켜온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결국 ‘한국적 토양’의 함의는 그 토양이 (참가)전략 선택의 선택지를 매우 협소하게 하였다는 점에 있었다. 또 참가하더라도 장외의 ‘(전투적) 대중투쟁’이 참가전술과 체계적으로 결합해야 함을 분명히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민주노총의 불참 결과, 개입의 여지가 없어 실익에서 손해를 봤다’는 주장에서 ‘실익’, ‘참가’의 관점은 그야말로 노사 협조주의와 경제주의, 실리주의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이는 불참 상황에서도 노동정책에서 의제를 설정하고 실익의 정도를 결정하는 등 정책적 영향력 행사의 주체는 민주노총이었던 현실을 전혀 도외시하는 사고이다. 모두가 알듯이 교원노조ㆍ공무원노조ㆍ교수노조 합법화, 노동시간 단축, 비정규노동자 대책 마련, 이주노동자 대책 등 모든 핵심 주제에 관해 정부는 물론, 한국노총조차도 장외의 민주노총의 요구가 기준선이었다. 최근 총선과정에서 공무원노조가 전투적 투쟁을 수행한 함의도 바로 이것이었다. 더 나아가 4대 악법 철폐, 민주노조운동 합법화라는 ‘제도개선’은 전투적 대중투쟁의 결과였다. 장외 투쟁은 제도개선과 무관하다는 인식은 합법주의, 제도주의, 개량주의의 다른 표현인 것이다.
세계의 노동운동이 한국의 민주노조운동을 주목했던 것도 바로 이런 특성 때문이었다. 또 우리 사회에서 이미 그 맥락이 왜곡되었으나, 이런 특성을 서구의 학자들은 ‘사회 운동적 노동조합주의’(social movement unionism)라고 불렀다.

국가가 노사정위원회를 고집하는 이유는 과거의 경험에서, 또 구조적 조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것은 ‘배제적 노동체제’와 정부의 ‘노동정책’에 심대한 변화를 야기했던 전투적 민주노조운동의 ‘투쟁동력’을 거세하자는 것이다. 대통령의 담론에서 노사정위가 노사화합과 협조, 산업평화, 국가 경쟁력 제고, 신인도 개선과 동의어로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구체적인 기제는 민주노조운동의 특성인 ‘자주성’과 ‘민주성(현장성)’을 제어함으로써 그 계급적 성격을 탈색시키는 데에 있다. 더불어 노동의 저항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신자유주의시대의 노동통제기제를 새로 구축하려는 국가-자본의 시도이다. 이른바 ‘사회 통합적 구조조정, 신자유주의’를 하자는 것이다.

4. 사이비 합의주의와 노사정위 참가 : 노동운동의 위기

여러 가지 단서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은 이미 ‘참가’를 결정하였고 ‘참가’하고 있다. (주12. 모두가 알고 있듯이 노사정대표자회의와 노사정위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우려했던 바와 같이 현재의 참가는 민주적 절차를 지키는 것은 물론 실리주의적 관점에도 미치지 못하는 막무가내 식의 참가인 것처럼 보인다. 민주노총 주최의 두 차례 토론회는 가식적인 수순 밟기에 불과하였다. 정책기획실의 검토의견으로 제출된 ‘참가의 전제조건이나 의제’는 내용이 거의 없다. 이런 정도라면 그냥 노사정위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상학(2004) 참고.) 별로 일관되지 않는 여러 근거들과 논리들 보다 참가를 가능케 했던 가장 중요한 힘은 민주노총 조직 내부의 요구였다. 조직 내외에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중적 참가 압력, 그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수많은 부정적 효과를 예견하면서도, 또 별로 대책도 없이 참가하는 민주노총을 설명하는 것은 현재의 민주노조운동의 위기 진단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 된다. (주13. 자세한 내용은 이상학(2004)을 볼 것. 참고로 필자는 이전에 ‘전술적 참가론’을 제시한 바 있었다. ‘전술적 참가론’의 내용은 말미의 보론에 정리해 둔다.)

우리 사회에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보조적 통제기구로써 사이비 노동포섭전략, 사회적 합의정책이 힘을 발휘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물론 국가와 자본의 새로운 통제전략의 구사이다. 기존의 1987년 노동체제의 해체가 시작된 이후 국가는 높은 절차적 정당성 위에서 일관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여기에 전 세계적인 차원에서 강화되어온 신자유주의 축적체제의 급속한 확산도 중요한 배경요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노동운동 내부의 구조적 한계도 사이비 합의전략의 효과를 배가하는 요인이 되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기업단위 노조, 특히 대기업노조에 기반을 둔 전투적 대중투쟁은 더 이상 ‘계급적 단결’의 모델이 되지 못하고 있다. 여전히 중요한 대기업의 조직 기반은 계급적 단결-연대의 확장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협소한 경제적 이해의 실현으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비정규직/여성/이주/특수고용노동자 등 제반 의제들은 해결의 실마리가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있다. 요컨대 민주노총의 합법화 이후 계급적 단결의 새로운 전망은 열리지 않았던 반면 노동계급 내부의 분절화, 상태의 악화는 크게 진전되었다. 수세기 국면에서 계급적 단결의 전망을 점차 상실하고 있는 노동계급 대중이 사이비 개량주의적 포섭전략에 견인되는 것은 어쩌면 이해할 만한 일일 것이다. 사이비합의주의 공세의 이면에는 체제 변동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노동운동의 위기, 전략적 대응 부재의 위기가 가로 놓여 있다.

물론 1987년체제 하의 노동운동 전략, 전투적 대중투쟁전략의 합리적 핵심은 보존,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변화된 노동체제의 구조적 조건에 부응하고 질적으로 한 단계 높은 계급적 연대전략, 계급적 단결의 새로운 모델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를 위해서 보다 새로운 발상, 열린 토론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보론 : 전술적 참가론】

참가여부는 물론, 참가할 경우 무엇을 조건으로 어떻게 참가하며 그 결과에 대해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는 중요한 고민거리이다. 이 논의를 위해 먼저 고민해야 할 점들을 정리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노사정위 참가의 폭과 수준을 미리 결정해야 할 것이다. 참가한다면 그것이 전략적 참가가 될 것인가, 전술적 참가에 국한될 것인가. 이제야말로 제대로 된 ‘전략적 고민’이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우선 앞서 보았듯이 ‘구조적 여건의 척박함으로 인해 민주적 조합주의체제의 구축은 현실적으로 난망’하고, 전략적 참가의 여지는 없다.
그러므로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남은 것은 전술적 차원의 참가일 뿐이다. 이 때 전술은 전략적 요소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즉 전체 노동자(민주노조운동)의 계급세력화라는 전략적 관점 하에 ‘전술적 참가’가 배치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때 참가 여부는 참가의 형식이 문제가 될 수 없으며 (예상되는)참가의 ‘내용과 결과’를 중심에 놓고 그 결정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컨대 ‘자주성’을 뺏기고, 혹은 ‘신자유주의 경쟁력주의’나 ‘노사협조주의’를 용인하고 실익을 얻는 방식의 참가는 불가하다는 점이다.
특히 전략적 차원에서 ‘계급적 대중투쟁’(전투적 대중동원) 전술과 ‘참가’ 전술의 연관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남는다. 전술적 참가라면 양자의 체계적 결합이 전제될 것이다. 즉 전투적 동원은 참가처럼 여전히 중요한 전술적 수단이 된다.
그리고 너무 자명한 일이나 전술적 참가라면 참가의 전제조건을 확인하고 내부에서 민주적 의견수렴 과정을 거치는 등 분명한 수순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참가 이후 의사과정을 모니터할 수 있는 내부의 조직적 장치, 또 상황 전개에 따라 전술적 불참과 탈퇴의 수순을 밟을 수 있는 기준을 미리 마련해 두어야 할 것이다.

둘째, 참가의 전제가 되는 조건들에 대한 문제이다. 이미 민주노총은 참가의 전제 조건을 제시한 상태이다. 다만 그 내용이 추상적이거나 불충분한 것으로 판단된다. 크게 서너 가지의 조건을 걸 필요가 있다.
먼저 이미 정부가 제안하고 있는 노사정위 조직의 개편문제가 있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수준의 조직의 형식적 재편이 아니라 근원적인 문제제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노사정위의 정부로부터의 재정적, 조직적 독립성ㆍ자율성 확보, 위원(회) 구성ㆍ선발의 중립성 제고 및 노동의 대표성 확대, 실무자의 충원과 관련 연구자ㆍ연구기관 선정에서의 중립성 등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또 과거 투쟁-참가의 결과이자 현안인 사항들에 대한 분명한 해결이 요구해야 할 것이다. 로드맵, 공무원ㆍ교수 합법화 방안(주체 참가와 기본권 범위), 파견제 확대-이주노동자 단속의 노동부 정책방침과 공공부문 노동시간 단축 방안, 특히 노동정책 중 ‘불법파업 엄단방침’, ‘법 만능주의’ 문제 그리고 기타 여러 가지 현안이 있다.
이들 중 몇 가지는 난제이나 포기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여기에는 노동의 ‘실질적 참가’를 보장한다는 국가-자본의 최소한의 약속의 의미가 담겨있다.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고 참가할 순 없는 일이겠으나 분명한 문제제기는 꼭 필요하며, 최소한의 관철 수준은 미리 결정해두어야 한다. 지불의지가 있는 상대와 값 싼 거래를 해선 안 될 것이다.

셋째, 참가 이후 의제 설정도 미리 준비되어야 하는 중요한 사안이다. 참가 이후의 논의 의제는 노사정위가 ‘구조조정 보조기구’, ‘사회통합기구’로 전락치 않도록 제어할 중요한 문제이다. 이 문제에는 민주노동당과의 정책적 협조, 공동의 요구 방안에 대한 고민도 포함되어야 한다.
우선 산별노조-산별교섭의 문제를 어떻게 의제로 만들 것인가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 기존의 연구와 경험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만큼 의제 설정방식과 민주노총의 정책 대안을 상대적으로 쉽게 마련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산별노조 건설 노력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가 핵심 논의주제가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와 관련된 정책적 요구가 다양하게 제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논제로 되어 온 비정규직-파견노동자-특수노동자의 문제뿐만 아니라 산업재해문제, 빈곤과 복지제도 개혁 및 예산 확대의 문제, 세제의 전면적 개편, 이주노동자의 문제, 기타 여러 가지 산업-통상정책의 요구들이 가능할 것이다. 특히 이미 상당히 진척되거나 마무리된 자유무역협정(FTA)문제를 재론하는 것이 필요하다. 폐기가 불가하다면 재협상이나, 그 과정에서의 노동참가는 충분히 요구할 수 있는 사안이 될 것이다.
또 노동기본권의 문제도 본격적으로 다루어야 한다. 교원ㆍ공무원ㆍ교수의 기본권 보장 확대문제, 집시법 개정, 노동조합의 정치참가(정치자금법), 손해배상 청구소송의 문제, ‘최저임금제’의 전면적 개편 문제, ‘노동시간단축’법안 재개정 문제, 노동쟁의의 불법 규정문제 등 과제는 산적해 있다.


한편 지금까지 의제가 되지 않았던 사안도 새로이 제기할 필요가 있다. 그간 국가 기구가 완벽히 통제하고 있는 노동행정, 관련 기관에 대한 개입이 시작되어야 한다. 근로감독제도 개편, 노동위원회 개편문제(노동법원), 근로복지공단 등 제반 산하기구에 대한 노동자 경영참가와 통제가 필요하다. 특히 노동연구원-노동교육원의 운영에 대한 개입과 통제는 중요하다. 기타 일반적인 여러 가지 정책 기획 과정에서의 개입과 모니터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잊혀진 재벌개혁, 언론개혁의 의제를 다시 제기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간 개혁방안을 제안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2003년에 또다시 경험했던 언론의 노동에 대한 무차별 공격을 그대로 방치해선 안 된다.
물론 노사정위가 이 문제들을 모두, 동시에 해결할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리고 주체 역량 상으로도 그럴 수 없다. 그러므로 내부적으로는 우선과제, 핵심과제를 설정하고 이를 매개로 전국적ㆍ계급적 전선을 만드는 수단으로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넷째, 참가 이후의 전략적 행동의 경로도 미리 전략적으로 기획되어야 한다.
먼저 혹시 합의가 된 부분이 있다면(과거 합의를 포함해서) 합의 이행을 강력히 요구해야 할 것이다. 현실적으로 쉽지 않겠으나 약속 이행을 담보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에 대한 고민을 보다 구체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 자본의 노골적인 약속 위반/이행 거부 등 참가의 전제가 소멸할 경우, 불참-탈퇴는 언제라도 가능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그 수순 혹은 그 근거를 둘러싼 나름대로의 기준이 필요하다. ‘전술적 참가’는 ‘이런 조건이 안 되면’ 언제라도 탈퇴할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을 전제로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1998년과 2002년에 보았듯이 탈퇴의 시기와 수순을 놓치면 그 반대급부는 노조 조직에 대한 심각한 타격으로 귀결할 것이다. 다만 참가 그 자체에 따르는 대중조직으로서의 책임이 있으므로 그 수순과 결정은 신중하게, 그리고 사전에 고민될 필요가 있다.

< 느리지만 바르게 빨리 가는 길 >

모두가 알고 있는 바이지만 현 민주노총 지도부는 노사정위 문제와 관련해서 새로운 입장을 천명하고 당선된 지도부이다. 또 위원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새로운 방식의 사업을 천명해왔다. 노사정위 문제는 조직 내부의 민주적 토론과정을 거쳐 대의원대회의 의결을 통해 결정될 것이라고 한다. 후자가 충분히 진행될 경우 노사정위 참가 문제에 관한 한 민주노총 지도부는 두 차례에 걸쳐 절차적 정당성을 구비하게 된다. 일종의 알리바이가 만들어지는 셈이다.
참가가 조합원의 대중적 요구에 기반하여 이루어지고, 그 과정이 충실해야 하는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그러나 노사정위의 문제는 그 같은 절차적 정당성으로 모든 일이 정당화되는 일이 아니라는 점에 그 심각성이 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참가가 거의 불가능한 제반 조건 속에서, 또 ‘노사화합과 경쟁력’을 앞세운 상대와 함께 하는 노사정위인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반세기 민주노조운동의 정체성과 역사성의 문제가 걸려있다. 목숨으로 방어한 민주노조의 자주성과 민주성, 그 계급적 연대성이 시험받는 문제인 것이다. 또 더불어 신자유주의의 전방위적 압박 속에 있는 노동대중의 미래가 걸려있는 중차대한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무게만큼의 깊은 고민, 체계적인 준비, 신중한 결정과 진행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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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xler, Franz, Sabine Blaschke and Bernhard Kittel eds.(2001), National Labour Relations in Internationalized Markets: A Comparative Study of Institutions, Change, and Performance, Oxford University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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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2/04 22:15 2005/02/04 2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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