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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국가-권력-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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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학생사회주의정치연대라는 그룹에서 발간한 신질서 제3호에 실린 것이다. 그날이 오면에서 책을 읽으려고 갔더니 책상에 놓여져 있어서 알았다. 학사정연이라는 이 학생운동단체는 구성된지 6개월 쯤 되었고, 서울지역, 특히 서울대에 구성인자가 제법 있는 것으로 보인다. 원칙을 가지고 활동하는 건 좋은데, 노동자들의 투쟁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사회주의는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갔으면 좋겠다.

 

아직도 민주노총의 중앙파로 표현되는 전진을 국민파와 거의 비슷한 류의 사회적 합의주의 세력으로 파악한다. 하긴 좌파들이 다 그렇지. 그래도 나름의 건강성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좀더 세련되게 선전,선동하기를 바란다.

 

아래 글은 니코스 풀란차스의 저작 [국가-권력-사회주의]를 정리한 것인 듯하여, 따로 퍼왔다. 전진 정책위원회에서 진행했던 대안사회 세미나에서 처음으로 다루었던 주제에서 핵심이 되는 것이 풀란차스의 저작이라 관심이 있었다. 대체로 쉽게 잘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왜 같은 저작을 보고도 다른 결론이 나온다고 그럴까? 그래서 해석이 중요하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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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국가-권력-사회주의


『이것은 다음과 같은 교조적 진부함보다 별로 나을 것이 없다. …자본주의 국가는 부르주아의 국가이며, 자본주의 국가 일반 및 모든 개별적인 자본주의 국가는 부르주아의 독재라는 것이다. 최근까지 그러한 주장은, 프랑스 공산당 내부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논쟁에서 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관념의 ‘유지’를 지지하는 그러한 사람들에 의해, 특히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하여」의 저자인 발리바르에 의해 거듭 단언되었다. 그러한 분석이 연구를 일보도 전진시킬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유사한 것이라는 외형을 제외한다면, 자본주의 국가의 상이한 형태와 역사적 변화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자본주의 국가이론은 구체적 상황을 분석하지 못한다. 이러한 분석의 불모성은 무한한 정치적 귀결을 초래한다. 이러한 분석은 국가에 대한 스탈린주의적 단순화-교조화의 결과이며 부수적 효과이다』   

- 니코스 풀란차스 『국가·권력·사회주의』 中

 

『일상적인 국가개념은 일방적이며 기괴한 오류를 범한다는 사실은, 다니엘 알레비의 <자유의 쇠퇴>라는 책을 보면 알 수 있다. 나는 새로운 문학에서 그 책의 서평을 읽었다. 그가 보기에 ‘국가’란 대의제적 장치인데, 1870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들은 보통선거를 통해 만들어진 정치적 유기체들이 주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적인 유기체(자본주의 기업들, 참모부 들)들이나 또는 나라 전체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거대한 시민봉사자들이 주도한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발견이야말로 바로 ‘국가’란 단지 정부의 장치일 뿐만 아니라 ‘사적인’ 헤게모니 장치, 또는 시민사회이기도 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안토니오 그람시, 『국가와 시민사회』中


 현 시기 민주노조 운동은, 내부적으로 노사협조주의로 경사하면서, 그리고 외부적으로 노조운동에 대한 도덕성 타격으로 사면초가의 상황에 있다. 활동가들은 스스로 건설한 민주노조에게서 배신당하고 있다. 최근에 벌어진 울산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의 투쟁이 사측으로부터 근로기준법을 지키겠다는 당연한 약속만으로 마무리 된 것은, 현재의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민주노동당의 의회입성 이후 본격화되는 사회적 합의주의의 흐름은, 한편에서는 코포라티즘의 외형적 기구를 완성하는 것으로, 즉 노사정 대표자회의의 재개와 개량적 산별노조 건설 흐름의 가시화로 드러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전투적 계급투쟁에 대한 방기와 정리로 드러나고 있다. 한 마디로 현재의 민주노조운동은 국가권력의 계급투쟁관리기제로 전락할 상황에 놓여있다. 이것은 ‘민주노조운동’이라고 해서 항상적으로 국가장치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은 국가권력은 공식적인 국가장치만으로 행사되는 것이 아님을, 즉 공식적 국가장치 이외에도 수많은 사적,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로 구성된 국가장치를 통해 행사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국가는 결코 행정, 입법, 사법의 기구로, 군대와 경찰 기구로 한정되지 않는다. 국가는 공식적/폭력적 국가기구로 한정되지 않으며, 또한 전일적으로 제도화된 메커니즘에 근거한 것도 아니다. 그것이 단일한 법으로 구성된 전일적 이미지에 근거할지라도, 그것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것은 각 장치의 내부에서, 그리고 각 장치간의 관계에서 수많은 균열을 내포한 체계인 것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국가다. 민주노동당 역시 국가다. 국가인권위 역시 국가이며, 노사정위도 국가다. 각종 법안의 발의와 시행에 공식·비공식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시민단체도 국가이다. 자본주의적 의식화를 행하는 교육기관, 언론 역시도 국가이다. 누가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느냐가 다를 뿐 자본주의 국가장치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남한의 민주노조 운동 역시 얼마든지 국가장치로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서유럽의 노동운동의 역사는 변혁성을 잃은 노동조합운동과 합법정당 운동이 종국에는 그 자체가 국가장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노조가 앞장서서 노사협조주의를 조장하고, 반노동자적인 행태를 서슴지 않는 현실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은 어떻게 행사되는가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람시와 풀란차스의 유산을 바탕으로 국가를 <세력관계의 물질적 응축>으로 규정하며, 또한 <전략적 장>으로 규정한다. 니코스 풀란차스는 그람시의 유산을 바탕으로 『국가·권력·사회주의』에서 기존의 국가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함으로써 사회계급과 국가와의 관계를 보다 세밀하게 규명했는데, 그의 논의를 따라가며 우리의 생각을 확립시켜보자.


사물-도구로서의 국가테제

 

 사물-도구로서의 국가테제는 국가를 말 그대로 ‘도구’나 ‘사물’로 이해하는 이론이다. 이것은 정통 맑스주의(즉 제2인터내셔널 시기의 맑스주의)이후의 오랜 관념이다. 이는 <공산당 선언>에서 자주 인용되는 유명한 구절처럼, 국가를 ‘부르주아의 집행위원회’와 동일시하며, 지배계급의 손에 놀아나는 제도화된 전일적 도구로 이해한다. 레닌의 국가개념 역시 이런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국가를 ‘화해할 수 없는 계급적대의 산물’이자 ‘조직된 폭력’으로 정의하였으며, ‘국가장치’와 ‘국가권력’을 구분하며 부르주아의 국가장치는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그대로 사용될 수 없으며, 모조리 분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일면 타당한 정의이지만, 국가권력의 구체적 작동양태와 그 분쇄의 과정에 대해서 말해주는 바는 없다는 점에서 한계적이다. 국가는 다만 지배계급에 의해 ‘조종’되는 제도화되고 체계화된 외재적 권력 정도로 이해하기 십상이며, 계급관계에 외부적인 영향력과 폭력을 행사하는 권력정도로 이해된다.  

 

 이 국가이론에서는 국가의 자율성은 全無하다. 따라서 국가는 오로지 지배계급의 의도에 움직이는 꼭두각시 같은 것이다. 이 테제에서 국가는 헤게모니 분파들에 대해 어떠한 자율성도 보장되지 못하며, 국가는 부르주아에 의해 수동적으로 작동되는 되는 오락기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결국, 부르주아는 항상적으로 통일된 집단이라고 말하는 것이며,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의 투쟁은 국가에 어떤 균열도 낼 수 없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국가가 부르주아의 전일적인 도구가 되기 위해서는, 부르주아지는 국가를 전제하기 전에 이미 하나의 이해관계로 통일되어 있어야 하며, 국가가 한 계급(부르주아)의 전일적 도구로 상정되는 이상 피지배계급이 국가에 균열을 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이 국가에 균열을 낸다면, 그것은 이미 한 계급의 도구가 아니지 않은가? 지배계급은 선험적으로 단일한 이해관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통해서 통일된다. 도구적 국가테제는 경험적으로건, 이론적으로건 오류를 내포한다.

 

주체로서의 국가테제

 

 ‘주체로서의 국가테제’는 사물-도구로서의 국가테제와 현상적으로 정반대이지만, 본질적으로 공통점을 내포하고 있다. 도구주의적 국가이론과는 다르게 ‘주체로서의 국가’는 자신의 합리화 의지와 고유한 권력을 지니고 또한 사회계급들에 대해 절대적 자율성을 지니는 것으로 상정된다. 이에 따라 국가의 정치라는 것은 어느 사회계급의 이해관계에도 직접적으로 속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관료제와 정치엘리트만의 것으로 복속되며, 국가는 부르주아 분파 내에서 벌어지는 경쟁과 사회계급간에 벌어지는 갈등에 대한 조정자의 역할로 상정된다. 주체로서의 국가테제는 절대적으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국가권력을 상정하는데, 이것은 결국 국가가 부르주아의 이해관계를 선험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결론을 야기한다. 도구적 국가이론에서 상정되었던 것과는 반대로, 주체로서의 국가테제에서, 부르주아는 이질적인 수많은 분파이며 국가는 통일적 권력체이다. 그렇기에 통일적 국가에게는 제멋대로 날뛰는 부르주아 분파간의 이해관계를 조정할 절대권력이 부여되며, 국가는 전체 부르주아에게 궁극적으로 이로운 무엇인가를 총자본의 입장에서 관철시켜야 하는 것이다. 국가는 절대권력을 가진 신으로 상정되는 것이다(이런 이해의 연원은 헤겔이며, 베버가 이를 답습하였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자면 국가의 균열은 오로지 정치엘리트 내부의 불협화음으로 환원된다.  

 

 그러나 국가권력은 선험적으로 부르주아의 이해관계를 파악하고 있지 않다. 국가권력은 수많은 계급분파간의 충돌과 그를 통한 역학관계의 형성을 통해 행사된다. 어떤 식으로 국가권력이 행사되는가, 그 자체가 계급간의, 그리고 계급분파 내의 역학관계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다.


국가와 사회계급들의 관계 맺음 - 진지전의 문제

 

 상반되는 듯 한 두 국가테제의 공통점은 바로 “국가와 사회계급들은 외재적으로 관계한다는 관점”이다. 자율성 0, 혹은 100. 이런 관점 속에서 국가는 침투 불가능한 요새와 같은 일괴암(monolith)으로, 즉 계급관계에서 외부적으로 존재하기에, 내부적 모순과 균열이 존재하지 않는 존재로 인식된다. 이것은 알튀세르에게서 역시 마찬가지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경제, 정치, 이데올로기 등 환원불가능한 각 ‘심급’의 총체이며, 각 심급은 중층결정되기 이전에 독자적 심급으로 존재해야 한다. 본질적으로 ‘국가’의 심급과 ‘계급관계’의 심급은 분리되는 것이다. 결국 알튀세르에게 국가는 계급관계에 외재적인 것이며, 따라서 국가내부의 균열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자본주의의 재생산에 대해서 할 말이 있었다 할지라도, 국가라는 전략적 장(field) 내부의 계급투쟁의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가 외재적 국가론에 근거한다면, 계급적 역학관계에 따른 국가형태의 구별은 불가능해지며, 따라서 전략적 선택의 폭 역시 엄청나게 축소된다. 계급적 역학관계의 변화에 국가권력은 외재적이기에, 파시즘 국가의 본질은 무엇인지, 서구식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국가는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 것인지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그렇기에 이런 파악 속에서 유연한 전략전술은 불가능해진다. 균열을 내는 것이 불가능한 공간이기에, 가능한 것은 결정적인 순간의 타도 밖에 없다. 곧 진지전을 배제한 기동전을 상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지전을 배제한 기동전은 파괴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을 뿐, 이행의 난관에 대해서는 완전한 침묵으로 귀결된다. 국가는 전일적 도구 혹은 규율권력이며, 그렇기에 어떤 형태로건 이용될 수 없다는 전제 속에서, 새로운 권력기구를 ‘건설’하는 과정은 국가를 ‘파괴’하는 것과 어떤 유기적 관련도 가질 수 없게 된다. 레닌 역시 오로지 파괴의 문제에 집중하나, 그 역시 실질적 이행과정에 부딪혀 짜르체제가 남긴 권력기구들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가 이를 이행과정의 어려움에 기인하는 ‘어쩔 수 없는 문제’로 평가한다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아무것도 없다. 레닌이 부딪힌 난제는 우리에게 기동전을 전제한 진지전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경제와 정치의 분리의 지양, 생산자 민주주의의 실현, 폭력적 국가기구의 분쇄라는 과정은, 결코 파괴를 통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바로 지금에서부터 그 신질서의 맹아적 형성이 준비되어야 한다. 건설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구 체제의 파괴조차 이루어질 수 없다.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는 프롤레타리아의 질서가 안정적으로 확대재생산 가능할 때에만 완수된다. 이런 건설과정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가능한 것은 스탈린적 국가주의일 뿐이다. 『국가와 혁명』, 혹은 『프랑스 내전』을 읽고 오늘 PT혁명이 일어난다면, 내일 군대를 폐지하고 노동자 민병대로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몽상가일 것이며, 이런 낙관이야 말로 이행과정에서의 국가주의의 근원이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이행의 과정이라는 것, 우리의 임무는 피지배계급의 독자적 질서형성에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국가는 결코 계급관계에 외재적인 형태가 아니다. 헤게모니 분파는 국가 내부에서 끝없는 분쟁과 다툼으로 인해 분열과 통합을 반복하고 있고, 계급투쟁 역시 국가의 장 내부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생산관계 내에 국가는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투쟁과 대비되는 의미에서의 정치투쟁은 체제자체의 본질상 있을 수 없다. 경제와 정치의 공간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단지 자연발생적인 투쟁과 의식화된 투쟁이 있을 뿐이지,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의 대비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속류적 정치투쟁 우위론은, 그 자체가 국가주의 혁명론의 표현이거나 민주노동당 류의 저열한 의회투쟁론으로 귀결될 뿐이다.

 

세력관계의 물질적 응축으로서의 국가, 그리고 전략적 장으로서의 국가

 

 국가가 지배계급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거나, 혹은 반대로 사회계급들의 갈등을 완벽하게 조정하는 모습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탄핵 사건, 비정규개악법안 관련 국가인권위의 권고안, 그리고 노사정 대표자 회의의 기능 등에서 드러나듯, 국가는 계급간 역학관계의 물질적 응축인 동시에, 계급갈등을 구현하는, 수많은 균열을 내포한 이질적 장치의 총제이자 전략적 장이다.  

 

 국가는 생산관계 내에 경제적 소유 권력(생산수단 소유와 독점)과 노동대상의 영유(생산수단에 대한 노동의 종속)의 이중적 권력으로 생산관계 내에 현존한다. 경제외적 공간(상부구조)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관계의 구성요소로 경제적 공간에 존재하는 것이다. 곧 부르주아의 권력은, 본질적으로 “생산수단을 침탈하면 군대가 투입된다!”라는 협박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가의 개입을 통한 소유관계와 임금노동 관계를 재생산하는 항구적 과정을 통해 유지된다는 것이다. 토대-상부구조 모델과 달리, 경제적 공간은 그 자체로 완결적인 공간이 아니다. 결국 풀란차스는 그의 초기저작에서 알튀세르로부터 빌어온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이란 개념을 폐기한 것이다. ‘상대적 자율성’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경제는 절대적으로 자율적이어야 한다. 『국가·권력·사회주의』에서의 풀란차스는 이제, “그렇다면 경제는 국가에 대해 절대적으로 자율적이란 말인가?”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물론, 경제는 완결적으로 자율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생산관계 내부에서, 부르주아 우위의 권력관계를 형성·재생산하는 구성요인으로서 국가가 존재한다. 생산관계는 부르주아의 소유권력 그 자체로는 결코 재생산되지 않는다. 생산관계 속에서의 적대, 곧 계급투쟁은 그것이 물적으로 표출되건 아니건 간에 언제나 존재하며, 생산관계 내에서 이 적대를 규율함으로써 소유관계와 임노동관계를 재생산 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국가의 실체이다. 국가는 계급모순으로 구성되고, 또한 계급모순으로 인해 분화된다. 즉 계급모순을 통해서, 그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계급모순은 국가를 관통하며, 국가는 계급모순을 통해서만 작동한다.  

 물론 부르주아가 국가장치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지배적’ 위치이며, 이것은 국가장치의 중핵들이 기동전에 의해 전복되지 않는 한 유지된다. 그럼에도 국가가 사회계급에 대해 내재적이라는 말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이 국가장치를 관통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계급투쟁이 밖에서 안으로 국가를 관통한다는 뜻이 아니라, 국가장치의 형성·변천의 전 과정이 계급투쟁의 과정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부 서유럽 국가의 노동조합을 하나의 국가장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노골적인 부르주아 계급성을 띠지 않은 것은 ‘부르주아 국가’에서 배제된 기구여서가 아니라 여전히 프롤레타리아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는 국가장치이기 때문이다. 현 시기 남한의 민주노조를 국가장치라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러나 언제라도 그것은 국가장치화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현 시기의 사회적 합의주의와 노사관계 로드맵으로 표상되는 자본의 공격은 본질적으로 노동조합을 국가장치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들은 이미 국가장치로 불러도 전혀 이상할 바 없는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의 변별선 자체를 지워버리려 한다.

 

학원 사회의 국가장치

 

 이런 점에서 본다면, 학원 사회 내에서도 부르주아 국가장치는 존재한다. 먼저, 대학자체가 국가장치이다. 그것은 의식화·조직화 기능을 행사함으로써, 구성원들을 부르주아 당파성으로 이끌어낸다. 물론 대학은 언제나 균열을 내포한 것이었다. 문제는 대학 내의 이런 균열들이 점점 무력화되고 있으며, 점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만이 생산되는 장으로 변모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흐름과 함께 나타나는 것이 대학 내의 학생사회 내에 형성되고 있는 각종 금융동아리와 부르주아 경제학 담론들이다. 이런 집단과 담론들은, 일상적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을 유포하는 국가장치로서 역할하고 있는 것이다. 학생 대중은 금융강좌에 몰리고 있으며, 주식투자 동아리에 몰리고 있다. 대중은 우리 운동권보다 부르주아 경제의 동학에 대해 더욱 민감하며, 우리 운동권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이전 정치경제학 연구회의 자리를 벤처투자모임이 밀어낸 것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우리의 진지상실이다. 학생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가장 민감한 존재임을 감안한다면, 이것은 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지반자체를 뒤흔든다는 점에서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교육투쟁은 현 시기 학생운동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결코 등록금인상 반대투쟁으로 한정될 수 없다. 그것은 교육내용에 대한 투쟁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학원 사회 내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맞서 굳건히 투쟁할 수 있어야 하며, 공교육 체제에 균열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계급적 관점에 입각해 현 사회의 모순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중국효과’, ‘제조업 공동화’운운하며 노동의 욕구수준을 낮출 것을 요구하는, 학생대중에게 부르주아 당파성을 견지할 것을 요구하는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어떻게 맞서 싸울 것인가에 대한 무기를 벼리는 것은 한 시도 지체될 수 없는 문제라 판단한다. 정치경제학에 대한 철저한 학습을 바탕으로, 현실 자본주의의 구체적 동학에 대해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자.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철저한 계급적 당파성에 입각한 이데올로기 투쟁을 시작하자. 이런 이데올로기 투쟁의 성과 속에서 자본의 진지를 걷어내고 우리의 진지를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영원히 학원내의 소수자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면, 이 점에 답하지 않고서 학생운동의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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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8/10 16:48 2005/08/10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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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새벽길 2005/08/19 14:45

    정병호님이 한겨레신문 8월 16일자에 쓴 [삼성이 본 자본주의 국가]는 결론은 애매하지만, 플란차스의 이론글을 현실에 적용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http://www.hani.co.kr/kisa/section-008005000/2005/08/008005000200508151911650.html

     Reply  Address

  2. 새벽길 2005/08/19 14:45

    풀란차스의 눈으로 삼성사건을 살펴보자. 삼성은 자본권력을 가지고 억압적 국가기구의 상징인 검찰에 돈을 뿌렸고,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의 핵심인 언론사 대표를 동원해 정치자금을 뿌렸다. 그리고 이 두 국가기구의 정상이 될 대통령 후보군에게 돈을 뿌렸다고 한다. 이 외에도 삼성은 상시적으로 정부 고급관료 출신을 삼성 경영진으로 충원함으로써 정경유착을 통해 정부 간섭과 감독으로부터도 벗어나고자 하였음도 엿볼 수 있다.

     Reply  Address

  3. 새벽길 2005/08/19 14:46

    우리는 여기서 삼성이 자본주의 국가론을 세상에 어떻게 읽어주었는가를 보게 된다. 삼성은 국가기구들의 상대적 자율성마저 인정하지 않으면서 자본권력으로 국가기구들을 지배하려 하였고, 국가기능의 축소와 퇴각을 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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