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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국가의 역할 - 신자유주의의 극복 (장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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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말에 이 책을 샀다가 2008년에 다 읽었다. 분명히 중요하고 관심이 가는 책임에도 불구하고 읽을 시간이 없다고 토로한 바 있는데, 공기업 사유화에 대해 정리하면서 참고하고자 이 책을 읽게 되었고, 공기업 사유화를 다룬 부분 이외의 부분도 흥미롭게 읽었다. 
 

장하준 교수의 책들이 많이 출간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 그의 주장을 가장 명징하게 정리하고 있는 책이 <국가의 역할>이라고 본다. 이 책만큼 신자유주의의 허구를 방대한 데이터를 통해 지적하고 있는 책도 드물 것 같다. 물론 홍기빈이 말하다시피 지금의 현실과는 약간 괴리된 느낌이 없지 않아 있고, 그의 주장을 좌파의 입장으로 보기엔 어폐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시사받을 점은 무궁무진하다. 
 
아래에 서울신문과 프레시안, 그리고 새사연의 서평을 담아온다.
개인적으로 길기는 하지만, 프레시안의 홍기빈의 서평을 추천한다. 장하준 교수 책의 장점과 한계에 대해 잘 서술해놓았다. 시사인에 노무현 대통령이 추천하는 책과 관련한 기사 중 이 책을 언급한 것이 눈에 뜨여 담아온다.   

 

 

[Book Review] ‘신자유주의’ 허구 낱낱이 밝히다 (서울신문, 임창용 기자, 2006-11-25 12 면)

국가의 역할/장하준 지음 
  

지난 20여년간 신자유주의는 시대의 총아로 등장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의 역할을 줄이면 줄일수록 경제에는 이롭다면서 규제가 없는 시장의 미덕을 설파하고, 탈규제와 개방·민영화를 설교했다. 그리고 이 같은 주장은 지난 10여년간 부상한 세계화 담론과 결합하면서 한층 더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처럼 무서운 확장세와는 달리 실제 결과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실시된 국가들의 경우 소득 불평등이 심화된 것은 물론 경제전반의 불안정성이 증대되었다. 이에 따라 정치적 불안과 사회적 분열이 빚어지게 되었다.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과 장하준 교수에 따르면 국가의 역할을 억압하는 신자유주의적 개혁 프로그램은 이처럼 근본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국가의 역할’(이종태 황해선 옮김, 부키 펴냄)은 그동안 직설적이면서도 명쾌한 논리로 현실경제를 진단해 온 장하준이 그 특유의 논법으로 국가를 억압하는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현실적 문제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대안을 제시한 책이다.

  

책에 따르면 세계의 1인당 소득은 신자유주의가 등장하기 이전인 1960∼1980년대 평균 3.1% 증가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가 대세를 이룬 1980∼2000년에는 소득 증가율이 2%에 그쳤다. 같은 기간 개발도상국의 1인당 소득증가율도 3%에서 1.5%로 떨어졌다. 그나마 중국과 인도의 가파른 성장이 없었더라면 그 수치는 더 낮아졌을 것이다.중국과 인도는 보기 드물게 신자유주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반면 신자유주의 물결의 중심에 있었던 옛 공산주의 국가들이나 금융위기 이후의 인도네시아,2000년대 초반의 아르헨티나 등은 경제 불안정과 함께 소득 불평등, 정치·사회적 불안이라는 초라한 개혁의 성적표를 받아들어야 했다. 지은이가 신자유주의자들이 내세우는 경제의 효율화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대목이다. 지은이는 신자유주의가 이론적으로도 틀렸다고 잘라 말한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이 자연발생적이며, 시장에서 결정되는 가격이 객관적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 시장의 발생은 거의 항상 국가에 의해 신중하게 조정되어 왔다. 시장이 작동되게 하기 위해 국가는 소유권에 관한, 공정거래에 관한, 독과점 금지에 관한 법 등 무수한 법률과 규제를 통해 관리하고 규제했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신성시하는 가격의 객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시장가격은 임금과 이자율 등에 의해 영향받고 있으며, 임금과 이자율은 상당 부분 정치적이기 때문에, 가격도 정치적이라는 것이다.뿐만 아니라 각종 정보에 대한 평등이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에서 신자유주의는 시장조절 기능을 결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은이는 이처럼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것을 실증적, 이론적으로 논박하면서 그 대안을 도출한다.그것은 바로 마지막 갈등 관리자이자 비전을 제시하고, 혁신을 촉진하는 역할 담당자로서의 국가의 존재이다.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듯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시장에 맡겨야 하는가? 아니면 국가로 하여금 공론의 장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고 제도화함으로써 우리의 의지가 반영되도록 할 것인가?결국 지은이는 이 책을 통해 이 두가지 선택 가운데 하나를 결정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있다. 1만 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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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경제학', 설 땅을 잃다 (프레시안, 홍기빈 국제정치경제 칼럼니스트, 2006-12-06 오후 4:50:05)
[화제의 책] 장하준의 <국가의 역할>과 '경제적 현실주의' 
 

  장하준 교수의 책 <국가의 역할>(이종태, 황혜선 역, 부키 출판사)이 출간되었다. 원저인 (London: Zed Books, 2003)는 이미 세계의 많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중요한 교재로 채택되어 명성을 얻은 책이다. 다행히도 500쪽에 달하는 이 역저가 이종태, 황혜선 두 분의 노고 덕분에 근래에 보기 힘든 훌륭한 번역으로 한국의 독자들에게 널리 읽힐 수 있게 되었다.
  
  이전에도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논리적, 실천적 파산과 그 폐해를 지적한 책들이 없지 않았으나, 장하준 교수의 저서는 그 중요성과 의의에서, 특히 난마와 같은 정치경제 구조변환의 혼란에 빠진 한국사회에 대해 갖는 함의에서 특기할 만하다.
  
  사이비과학의 위험에서 정치경제학 구해내기  
  과학철학의 중요한 작업 중 하나는 과학과 사이비과학(pseudo-science)의 경계를 명확히 하는 것(demarcation)이다. 사이비 과학의 특징은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는 모호한 개념들을 기초로 하여 경험적으로 입증할 수도 논박할 수도 없는 명제를 도출한 뒤 이를 보편적인 법칙으로 승격시킨다'는 데 있다. 한때 유럽을 풍미했던 연금술이나 점성술 같은 것들이 그 예다. 이것들은 '5행성의 성질'이니 '여러 금속의 서열'이니 하는 형이상학적 개념들을 사용하여 예언과 주장을 내어놓은 뒤, 그것이 현실에서 어긋나게 되면 "이 경우는 특수한 경우로서…"라는 갖은 특수설명(ad hoc)으로 둘러대 논증도 논박도 불가능하게 만들고, 나아가 인생과 사회의 나아갈 바라는 추상적인 법칙으로까지 그것들을 승격시킨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전 세계를 풍미하면서 전 지구의 정치경제 체제를 소위 '전지구적 시장 체제'로 바꾸어놓은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논리적 체계를 장 교수는 기본적으로 1970년대 이후 벌어진 신고전파와 오스트리아 정치경제학파의 '정략결혼'으로 파악한다. '경제적 최적화의 계산'이라는 기술적 한계를 넘지 못한 신고전파 경제학이 오스트리아 학파로부터 자유, 시장, 국가 등의 개념에 대한 일관된 자유주의적 논리를 제공받는 대신, 그동안 주류 경제학에서 따돌림당하던 오스트리아 학파 경제이론의 '과학성'을 인정해주는 일종의 '빅딜'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결혼이 신랑 쪽이나 신부 쪽이나 모두 100살이 넘었다는 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현재 신고전파 경제학의 기본축을 이루는 이론들은 모두 파레토, 왈라스, 클라크, 혹은 그 이전에 나온 19세기 경제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또 오스트리아 학파의 정치경제 사상이라는 것은 미제스나 하이에크 등이 이미 1930년대부터 끝없이 반복하며 설파했던 '19세기식 시장사회', 즉 "자유주의 정치경제 사상의 중심 가치는 신성불가침의 자연법"이라는 생각을 골자로 한다. 하지만 20세기 100년 간의 역사는 시장도 국가도 사회도 자유도 후생도, 어느 것 하나 19세기 식으로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렇다면 세계대전, 파시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과 관련된 파란만장한 대사건들 속에서 계속 변모해 온 현대의 정치경제 체제를 과연 이 100년 묵은 이론 두 개를 합쳐서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증손자, 아니 고손자를 기다리면서 학설사의 한 페이지로 그냥 조용히 늙어가야 할 이 할머니 할아버지 이론들이 과연 '회춘'하여 왕성한 생산력으로 새롭게 자손을 번창시킬 수 있을까. 혹시 현실과는 동떨어진 추상적 개념들로써 논박도 논증도 애매한 명제들을 마구 쏟아놓으면서 "한 나라, 아니 전 세계의 정치경제가 나아갈 바는 이런 것"이라는 터무니없는 거대담론으로 치닫는 '사이비과학'이 나오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이러한 사태가 이번이 처음인 것도 아니기에 의혹이 더 짙어진다. 이미 20세기 전반에 카를 만하임은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에서 19세기식 자유주의 정치경제 사상의 패러다임이 지닌 '과학'으로서의 가치가 파산상태에 달하여 이미 '이데올로기'에 불과한 것이 된 현실을 폭로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정자들, 나아가 지식대중 전부가 그렇게 '이데올로기'로 변해버린 자유주의 사상에 대해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가운데 현실은 더욱 악화되어 마침내 전 세계가 파시즘과 세계대전이라는 위기로 치닫는 기막힌 현실이 전개되기도 했다.
  
  그런 사태에 부닥쳐 카아(E. H. Carr)와 같은 사람은 사회연구는 더 이상 '유토피아와 사이비 실증과학이 뒤섞인' 기존의 지배적 패러다임이라는 색안경을 낀 채 현실을 재단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사회적 현실을 관찰하여 신중한 정책제안을 가능케 하는 '현실주의' 정신을 가지라고 제창한 적이 있다. 이 저서에서 장하준 교수가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비판의 방법으로 삼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러한 카아의 '현실주의'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장 교수는 자신의 방법을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정치경제학을 사이비과학의 위험으로부터 구제하여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과학으로 재정립하려는 노력으로 간주돼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장 교수는 이런저런 현실의 폐해 사례를 극적으로 강조하거나 '사회적 관계와 가치의 파괴'와 같은 도덕적, 윤리적 명제에 호소하여 비판을 전개하고 있지 않다. 사상, 이론, 정책의 세 측면 모두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에 정면으로 맞서 씨름하면서 (1) 그 사상적 기초와 개념이 대단히 모호하거나 그릇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고 (2) 그것이 주장하는 숱한 이론들이 얼마나 실증적 기초가 박약하거나 현실적 사례에 의해 종종 논박되며 (3) 그 정책적 귀결이 비현실적이고 해롭기까지 함을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더욱이 이 저서 전체에 걸쳐서 장 교수는 한 순간도 글을 '날려서 쓰는' 법이 없다. 치밀하고 촘촘한 논리가 펼쳐지는 가운데 그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동원된 문헌과 데이터의 양과 규모도 실로 압도적이라 할 만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저서는 21세기 초에 새롭게 역동하고 있는 정치경제학의 발전 속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경제적 현실주의'의 선언으로 자리매김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대안으로서의 산업정책   
  이 책 1부의 1장과 2장에서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기둥이 되는 두 개의 핵심 개념, 즉 '시장'과 '국가'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은 보통 자유, 효율성, 정보, 자발성 등에 의해 작동하는 동시에 그런 것들을 확보해 나가는 것이야말로 '시장'이며 불필요한 규제, 정치적 왜곡, 비효율, 무지, 자유의 억압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 '국가의 경제개입'이라고 규정해, 전자를 최대한으로 확장하고 후자를 최소한으로 축소하는 것이야말로 경제운영의 나아갈 바라는 단순명쾌한 주장을 그 사상적 기초로 삼는다.
  
  장 교수의 비판은 이런 식으로 단순하고 모호하게 정의된 '시장'과 '국가'의 개념이 실제 현실에서는 그 발생과 작동 및 운영에 있어서 얼마나 복잡하고 다양한 측면들을 가지고 있는지를 지적하고, 결국 그러한 단순한 개념화에 기반을 둔 사상적 명제가 터무니없이 단순화된 현실의 희화화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대신 시장도 국가도 인간사회 속에서 존재하며 숨을 쉬는 수많은 제도 중 하나로서 현실적으로 자리매김돼야 한다. 그 후에야 비로소 두 제도에 대한 그릇된 환상이나 신화를 넘어서서 현실의 여러 제도들과 가장 잘 결합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러한 문제와 방안을 담아낼 수 있는 새로운 정치경제학 방법론으로서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이 제안된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새로운 방법의 틀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주장과 정책적 제안 양자를 반박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2부에서는 먼저 대외경제의 측면, 즉 최근의 경제적 지구화의 담론 속에서 가장 예민하게 떠오르고 있는 세 가지 쟁점을 다루고 있다. 초국적기업, 지적소유권, 산업정책의 문제가 그것이다. 4장에서는 초국적기업이 시대의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며, 초국적기업이 최대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각종 규제를 철폐하여 경제를 개방하는 것만이 개발도상국이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는, 다른 여지가 없는 선택이라는 명제를 실증적으로, 논리적으로 부수고 있다. 이를 통해 장 교수는 초국적기업의 요구에 무조건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투자대상국이 얼마나 건전하고 수익성 높은 내부적 경제 틀을 갖추고 있는가가 오히려 더 많은 외국투자를 불러들이는 데 관건이 된다는 주장을 내놓는다. 5장에서는 특히 '지식기반 경제'에서 초국적 지적소유권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장치가 필수적이라는 명제가 근본적으로 비판된다. 지적소유권 보장과 경제성장의 관계는 대단히 의심쩍은 것이며, 개도국의 입장에서는 오히려 일방적인 손해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된다.
  
  6장에서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어라 할 '산업정책'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은 지구적으로 확장된 세계시장의 역동성 속에서 하나의 국가가 자국 자본과의 관계 속에서나 이룰 수 있는 산업정책이라는 것이 더 이상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 특히 일본, 프랑스 등 산업정책으로 성공한 나라들은 독특한 제도적, 사회적 환경이 그런 정책의 성공요건으로 존재하고 있었던 경우이며, 따라서 산업정책을 보편적으로 시행할 수도 없고 시행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장 교수는 20세기 자본주의 경제에 있어서는, 서구에서나 제3세계에서나 순수한 '시장경제'보다는 오히려 국가에 의한 산업정책이 더 보편적이었음을 들어 반박한다.
  
  이러한 6장의 논지는 곧 국내경제를 어떠한 방식으로 조직할 것인가를 다루는 3부의 논의로 이어진다. 2부에서 소위 '지구화로 인한 불가항력의 외적구조 변화'라는 담론을 비판하고 난 뒤 3부는 국내경제를 조직함에 있어서 바로 이 국가에 의한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산업정책 부활만이 오히려 이 지구화 시대의 세계경제에 가장 효과적으로 적응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길임을 역설한다.
  
  실로 논쟁이 많은 이 주제에 대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 쪽의 주장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기 위해 이 책은 '시장경제' 대 '산업정책'이라는 논쟁의 역사적 궤적을 살펴본 뒤, 20세기의 대규모 산업경제에서는 산업정책이 선택사항이 아니라 '시장의 비효율성'을 피할 수 있는 필연적인 선택이 될 수밖에 없음을 경제이론의 차원에서 입증하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는 이 논쟁에서 실로 가장 첨예한 전투장이요 가장 많은 사상자, 피해자가 발생한 장인 '공기업'의 문제, 즉 '공기업은 반드시 수익성이 낮을 수밖에 없는가'를 다루고 있다.
  
  '더 많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지난 몇십년 간 대학에서, 매체에서, 정계에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휘둘러 온 일사천리의 주장, 그리고 자신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이들에 대해 "시대착오에 빠져 있거나 경제법칙의 과학성을 무시하는 철없는 좌파"라고 하던 매도에 속절없이 말문이 막혔던 이라면 이 책의 출판을 반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경제적 현실주의자'라면 그러한 지난 몇십 년 간의 '시장개방'이 과연 지구적 규모에서나 일국적 규모에서나 고도성장과 보편적 풍요와 효율성이라는 낙원으로 우리를 인도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참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 신자유주의적 구조개혁이 우리의 경제체질을 개선하고 경제성장을 이루게 해줄 것이라고 하던 IMF와 김대중 정부의 경제관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저투자, 저성장, 양극화, 투기 붐, 고실업, 가계경제 파산 등의 현실을 모르쇠하지 않는 경제적 현실주의자라면 장하준 교수가 목 놓아 역설하고 있는 "문제는 산업정책"이라는 목소리에 전적으로 공명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장하준 교수의 노고에 대해 감사하면서도 굳이 몇 가지 비판적 문제제기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자 한다. 첫째, 산업정책이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을 '국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빠져 있어 국가가 여전히 어떤 집권세력이든 자신들의 뜻대로 활용할 수 있는 일종의 '블랙박스'로 놓여 있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이는 프랑스의 정치학자 풀란차스가 지적한 바 있듯이 '제도주의' 정치경제학 일반에 나타나는 편향으로서, 국가를 다양한 사회세력들 간의 충돌과 이익대립과는 무관한, 아무런 내용도 갖지 않는 중립적인 제도로 본다는 문제점이다. 1960년대 일본의 국가든 1970년대 한국의 국가든, 그러한 사회세력들 간의 충돌이라는 복잡한 정치역학과 무관하게 '중립적이고, 순수하게 경제적 효율성만을 모토로 하여' 산업정책을 추진한 국가는 없었다. 따라서 21세기의 환경에 걸맞은 산업정책을 추진할 국가는 어떠한 내용과 성격을 가진 국가여야 하는가라는 논의가 빠져 있다면, '국가의 산업정책이 효율성을 담보할 것이다'라는 명제는 '시장의 자유로운 작동이 최고의 효율성을 담보할 것이다'라는 명제나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사고실험(thought experiment)의 차원에 머무는 것은 아닐까.
  
  둘째, 장하준 교수가 제시하는 산업정책의 정의와 그 사례들은 사실상 1980년대 이전의 상황과 현실에 근거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산업정책의 정의는 "국가가 경제 전반에 효율적인 것으로 인식한 결과를 특정 산업-그리고 그 요소로서의 기업-으로 하여금 달성토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 즉 '선별적 산업정책'과 유사한 것이다(265쪽). 하지만 이러한 산업정책은 1990년대 이후 일본과 한국을 필두로 하여 세계 곳곳에서 포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이 책에서 장 교수가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득세로 인한 이념공세가 큰 몫을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포기가 진행되고 있는 21세기의 현실을 천착하여 그 실정을 좀 더 파악하고 그에 걸맞은 21세기형 산업정책의 정의와 원칙을 제시하는 작업이 추가되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런데 이 두 개의 문제는 별개로 볼 수 없다. 1990년대 이후에 나타난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사실상 국가와 기업 양자 모두에게 있어서 '새로운 축적전략'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현실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 이전처럼 효과적인 산업정책을 통한 경제성장과 고용창출이라는 축적전략이 포기된 대신에 금융적 기법을 통한 다양한 방법의 재자본화(recaptialization)가 주된 축적방식으로 떠오른 것이 1990년대 이후 지구정치경제의 현실임은 누누이 지적된 바 있다. 이러한 변화는 곧 국가의 성격, 기업의 행태, 정책의 선호체계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공세에 맞서는 대안은 곧 이러한 변화에 맞설 수 있는 대안적 성격의 국가, 대안적 성격의 경제주체를 형성하는 전략과 무관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이 책에 제시된 수많은 혜안과 지혜를 좀 더 효과적인 전략으로 벼리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민주주의'의 관점이 아닌가 한다. 지금 간절히 필요한 21세기형 산업정책을 수행하는 국가라면 신자유주의적 정치경제학의 공세에 의해 피해를 입고 있는 광범위한 경제주체들이 폭넓게 참여하여 더 공격적인 경제정책을 펼 수 있는 성격의 국가일 수밖에 없다. 즉 '더 많은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국가의 성격을 구체적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또 그렇게 해서 시행될 산업정책의 내용도 단지 '경제 전반에 효율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위한 예전의 산업정책과 같은 기술관료적 합리성의 좁은 틀을 벗어나야 한다. 작업장 민주주의의 실현, 노동과정의 인간화, 생태환경의 보전, 나라의 정신적·문화적 고양 등 한 나라의 살림살이인 경제를 운영하는 데서 국가가 고민해야 할 문제들을 끌어안으면서 좀 더 포괄적인 '정치경제 모델'을 건설하는 틀로 산업정책이 확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본의 세계화를 앞세운 21세기 지구정치경제의 현실에 국가가 역동적으로 개입할 수 있기 위한 조건이 아닐까 싶다.
  
  이러한 비판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러한 관점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도 장하준 교수의 저서는 중요한 출발점의 역할을 해줄 것 같다. 이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갖은 '교조'들을 영구불변의 자연법이나 되는 것처럼 외쳐대는 '사이비과학'은 딛고 설 땅을 크게 잃었다고 생각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말해두고 싶은 것은, 이 저서의 위력을 십분 증가시켜 준 두 번역자의 훌륭한 번역문장이다. 시중의 번역서에 나오는 알쏭달쏭한 문장들과 씨름하다 지친 경험이 있는 이들에게 이번에는 걱정을 붙들어 매시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이 책을 만들어준 저자, 번역자, 출판사 모두의 노고가 값진 열매를 맺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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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극복할 '국가의 역할' [작성일:2007-01-23 | 작성자:이상동/새사연 상임연구원]
    
신고전학파는 현재 한국을 포함한 세계 경제학계의 주류를 점하고 있다. 한계효용주의학파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학파는 경제 현상을 분석할 때 ‘시장’에서 시작해서 '시장'으로 끝난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다. 경제학이라고 하면 수요공급 곡선부터 떠올리게 만들거나, 시장을 통해 두 곡선의 교차점에서 자율적으로(!) (균형)가격이 형성된다는 통념을 형성하는 데 실로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도 바로 이 학파다.
   
1970년대 들어 완전히 경제학계를 장악한 신고전학파는 1980년대가 되자 경제 정책마저도 장악해 들어갔다. 영국과 미국에서 시작되어 이후 많은 개발도상국의 ‘시장 개방’을 이끌어 낸 신자유주의 정책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왔다. 이제 신자유주의의 대안은 신고전학파의 논리를 넘어서지 않으면 불가능한 상황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신고전학파 경제학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드러내며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국가의 역할>. 이 책의 원 저자인 캠브리지 대학 경제학과 장하준 교수는 이미 ‘쾌도난마 한국경제’, ‘사다리 걷어차기’, 그리고 ‘개혁의 덫’을 통해 끊임없이 한국경제에 대한 통찰력을 던져왔다.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국가의 역할’ 부상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자유'를 위해 점점 더 깊이 '국가에 개입'해 오고 있다. 경제는 시장 그 자체이니 경제가 아닌 국가는 빠지라는 것처럼. 그러나 과연 경제활동은 시장 내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인가?
   
200여년의 근대 경제학사에서 국가의 역할은 언제나 중요한 연구 주제가 되어왔다. 최근 신자유주의가 국가를 거세시키기 위해- 실제로는 많은 부분 금융자본의 이해를 대변하기 위해- 이런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고 있을 뿐이다. 신자유주의는 경제 정책뿐만 아니라 정치, 법률 그리고 사회 제도에까지 개입하고 있다. 신자유주의는 경제 성장을 위해 소득 불평등, 경제적 불안정, 그리고 사회적 불안과 같은 부작용은 감내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논리가 전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신자유주의가 경제 성장조차 촉진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과연 저자가 이야기하는 비판의 근거와 대안은 무엇인가?
  
한국은 90년대 이후 세계화 담론과 IMF 구제 금융이 이식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모범적인 신자유주의 수입국의 하나가 되었다. 금융이 개방되고 은행과 공기업이 민영화되었으며, 급기야 대통령의 입에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 갔다’는 말까지 나오게 되었다. 모든 경제 활동을 시장과 등치시키는 것, 그래서 소위 ‘시장 자율’에 모든 것을 맡기자는 논리이다.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여기서부터 이 책의 논점은 시작한다.
  
저자는 ‘시장 자율’에 대비시킬 만한 ‘국가 개입’을 주장한다. 국가 개입 논의의 오랜 역사적, 이론적 배경을 제시하고 ‘신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이론적 전제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드러낸다. 반대 논리는 국가를 오직 이해 집단의 대리인들로 치부할 뿐이며, 국가 개입에 관한 논쟁에서 얻은 오랜 지적인 자산과 경험을 사장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국가 개입에 의해 성공적인 발전을 이룬 동아시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사례가 종종 등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가는 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에만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 발전 과정의 구조 변동에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요구받는다고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국가는 시장의 종속적 행위자가 아니라 시장과 동등한 또 하나의 '제도'라는 점이다.
  
국가의 개입이 비효율적?   
저자는 신자유주의를 통렬히 비판하기를 그들이 신봉하는 '시장'에 대해 스스로 적확한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다만 자신들의 윤리적 정치적 관점에 따라서 선호하는 곳에 시장과 국가를 가르는 경계선을 그렸을 뿐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신자유주의가 국가의 개입은 비효율적이라는 결론을 이미 신념화한 다음, 역으로 시장과 국가를 구분 짓고 최종적으로 시장의 정의를 내렸다고 하는 시각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국가 개입의 비효율성에 대한 반론은 책의 곳곳에 펼쳐져 있다. 먼저 개입 자체가 점점 불가능해지는 '세계화' 상황에 대해 검토해 보자.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를 앞세워 국가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세력이 있다. 바로 초국적 기업이다. 초국적 기업은 개발도상국에 지적재산권을 엄밀히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독자적인 산업정책을 펴지 말 것을 강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 시장을 개방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실제로 외국의 초국적 기업이 개도국의 경제 발전과 기술 역량 축적에 도움이 된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협상력을 발휘해 정책 선택권을 확보할 것을 개발도상국들에 권고한다. 초국적기업이 투자를 결정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사항은 해당국의 경제적 상황이지 규제나 개방화의 정도에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나아가 저자는 국가의 강력한 선별적 산업 정책을 주문하고 있다. 시장 중심적 정책은 보편적인 정책이고 선별적 산업 정책은 특수한 정책이라 여기는 통념이 있다. 특수 정책은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키기 때문에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은 선별적 산업 정책이 비현실적이라 여기지만 이는 잘못된 견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완전한 보편적 정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국제기구의 규제가 선별적 산업 정책의 실행을 극도로 어렵게 만든다는 견해는 과도하다며 여전히 방법을 찾을 여지는 많다고 결론짓는다. 저자는 국가 개입의 유력한 수단으로 산업 정책을 제시하며 그 성공적 사례를 펼쳐보이고 있다.
  
정부의 규제에 대한 오해도 풀어준다. 신자유주의의 대표주자격인 미국이 바로 ‘정부 규제의 나라’라는 실제 사례도 들어서. 1970년대까지 전 세계적으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은 당연했으며, 이때에 전례 없이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도 있었음도 사실이다. 저자는 규제가 국가마다 다르게 인식되고 있지만 규제가 없었다면 시장도 없었음을 논증한다.
  
특히 마지막 장에 소개된 ‘개발도상국에서 공기업의 효율성’은 특히 관심이 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는 공기업의 민영화로 인해 많은 노동자들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공기업은 비효율적'이라는 주장은 허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공기업의 비효율성을 실증적으로 증명하는 강력한 데이타는 아직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저자는 또한 공기업 민영화 과정에는 대부분이 이데올로기적인 편견과 매각 과정에서의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은폐되어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우리에게 '공기업 민영화'의 본뜻을 고찰할 기회를 주고 있다.
   
오히려 민영화는 공기업이 갖고 있는 다양한 사회적, 정책적 목표를 사장시켜 버린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설명이다. 공기업은 계층과 계급 또는 지역의 분배를 위해 설립되기도 하고, 고용 확충과 같은 거시경제의 조절 장치로 활용되거나 민간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는 등 효율성이 크다고 강조한다.
  
“시장은 객관성, 효율성, 자발성과 같은 개념들을 대표하고 국가는 불필요한 규제, 정치적 폐해, 경직성과 같은 개념들을 대표하여 시장에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 이상적인 가치를 구현할 수 있다”라는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을 저자는 이론적, 실천적 그리고 정책적으로 정면 비판한다. 현실 속에서 시장은 국가와 마찬가지로 대단히 복잡한 인간 사회 속에서 작동하는 하나의 제도 그 이상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저자는 선진국을 포함한 어떠한 사회에서도 국가를 제거한 채 완전한 시장을 갖고 발전을 한 예가 없다는 점을 실로 방대한 문헌과 데이터를 이용해 역사적인 사실로 보여주고 있다. 이제 출간된 지 약 3년 밖에 되지 않은 이 책이 이미 해외의 많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경제학 교재로 사용되고 있는 저력은 아마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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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vs 정부, 우리 미래를 누구에게 맡길까 (조선, 이준 논설위원, 2006-11-24)
국가의 역할 | 장하준 지음
이종태·황해선 옮김 | 도서출판 부키 | 496쪽 | 1만6000원

 
“우리의 미래를 누가 결정하게 할 것인가. 신자유주의자들은 우리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보이지 않는 손’이 지배하는 시장에 맡기라고 한다. 반대론자들은 국가로 하여금 공론의 장을 통해 합의를 끌어내고 제도화함으로써 우리의 의지를 반영해야 한다고 한다.”
  
‘우리의 미래를 누가 결정하게 할 것인가’라는 물음은 이 책을 왜 썼는지를 설명한다. 우리의 미래를 불확실성에 가득 찬 시장의 손에만 내맡길 수 없다는 믿음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필자는 그 점에서 국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을 향해 분노한다. 국가를 “약탈자나 정치적으로 강력한 집단이 그 당파적 이익을 챙기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로, 정치를 “집단적 의지에 빌붙어 시장이 내린 결과를 뒤엎는 합법적 수단”이라고 보는 신자유주의자들을 경멸한다.
 
그의 비판은 날이 서있다. 신자유주의는 적어도 이 책 속에선 이론적으로나 실증적으로 ‘백전백패’다. 무엇보다 사회경제적 구조변동과 개발도상국에서 국가의 역할이 왜 중요한지를 논한 대목은 설득력이 있다. 시장의 개별적 경제주체들은 체제(system) 전체를 보는 비전이 없거나 다른 경제주체의 행위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우왕좌왕한다. 그래선 구조조정이 불가능하다. 장 교수는 “경제 전체를 효율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선 어떤 한 경제주체가 중심적 위치에서 조정 기능을 해주어야 한다. 그러려면 사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분산된 경제주체보다는 공적 이익을 추구하는 정부가 그 역할을 맡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한다. 실패 위험이 있더라도 조직이 나아갈 비전을 제시하는 ‘기업가적 역할’을 정부가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장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제도주의’(institut ionalism)를 제시한다. 국민경제의 성패는 그 나라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제도들에 달려있다. 시장은 매우 중요한 제도이기는 하지만 여러 제도들 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이다. 지나치게 저평가된 ‘국가의 역할’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그의 문제 제기는 의미 있다. 그러나 정부와 시장의 역할 논쟁을 너무 ‘신 자유주의와 안티 신자유주의’의 이분법적 틀 속에서 보려고 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그러다 보니 시장이 갖는 역동성, 효율성, 자기조절과 자기복원 능력과 같은 장점들을 평가하는데 인색했다. 한국 사회가 요구하는 국가의 역할도 ‘신자유주의와 안티 신자유주의’의 중간 어디쯤 있다는 걸 그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치밀하고 촘촘하게 설계된 신자유주의 대안서 (시사IN [98호] 2009년 07월 25일 (토) 00:14:57 홍기빈 지구정치경제 칼럼니스트)
이 책은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이데올로기에 맞선 ‘경제적 현실주의’ 선언이다. 
 
<국가의 역할> 원저인 (London:Zed Books, 2003)는 이미 전 세계 많은 대학과 대학원에서 중요한 교재로 채택되어 교과서처럼 쓰이는 책이다. 이전에도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논리적·실천적 파산과 그 폐해를 지적한 책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장하준 교수의 저서 출간은 특히 난마와 같은 정치경제적 구조 변환의 혼란에 빠진 한국 사회에 갖는 함의가 크다고 보여진다.  
 
장 교수는 이런저런 현실적 폐해를 극적으로 강조하거나 ‘사회적 관계와 가치의 파괴’ 같은 도덕적·윤리적 명제에 호소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을 사상·이론·정책 세 측면에서 정면으로 맞받아친다. 다시 말해 장 교수는 이 책에서 첫째, 신자유주의의 사상적 기초와 개념이 대단히 모호하거나 그릇된 전제에 기초하고 있으며, 둘째,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숱한 이론의 실증적 기초가 박약할 뿐 아니라 현실을 설명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폭로한다. 나아가 세 번째로는, 신자유주의의 정책적 귀결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해롭기까지 한 것인가를 조목조목 밝힌다.
 
이 책 전체에 걸쳐 장 교수는 한순간도 글을 ‘날려 쓰는’ 법이 없다. 치밀하고 촘촘한 논리가 펼쳐지는 가운데 그 논지를 뒷받침하기 위해 동원하는 문헌, 데이터의 양과 규모는 실로 압도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21세기 초 새롭게 역동하는 정치경제학의 발전 속에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이데올로기에 맞선 ‘경제적 현실주의’ 선언으로 자리매기기에 부족함이 없다. 신자유주의적 구조 개혁이 경제 체질 개선과 경제 성장을 이룩해줄 것이라던 IMF와 김대중 정부의 경제 관료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저투자, 저성장, 양극화, 투기 붐, 고실업, 가계경제 파산 따위 현실을 모르쇠하지 않는 경제적 현실주의자라면, 장하준 교수가 목 놓아 역설하는, “문제는 산업 정책이다”라는 명제에 전적으로 공명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장 교수의 노고에 대한 감사를 무릅쓰고 몇 가지 비판적 문제 제기를 해보자면 첫째, 이 중요한 역할을 맡을 ‘국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빠져 있어 국가가 여전히 일종의 ‘블랙 박스’로 놓여 있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곧 집권 세력이 국가를 여전히 자기 뜻대로 활용할 여지가 열려 있는 것이다. 둘째, 장 교수가 제시하는 산업 정책의 정의와 그 사례들은 사실상 1980년대 이전 상황과 현실에 근거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별개로 볼 수 없을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나타난 신자유주의적 전환은 사실상 국가와 기업 양자에게 ‘새로운 축적 전략’에 대한 합의가 나타났다는 현실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 전처럼 효과적인 산업 정책을 통한 경제성장과 높은 고용 창출이라는 축적 전략을 포기하고, 대신 금융 기법을 통한 다양한 방법의 재자본화(recapita- lization)가 주된 축적 방식으로 떠오른 것이 1990년대 이후 지구 정치경제의 현실임은 누누이 지적된 바 있다. 이러한 변화는 곧 국가의 성격이나 기업의 행태와 정책 선호 체계에도 근본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책에 제시된 수많은 혜안과 지혜를 좀 더 효과적인 전략으로 벼리기 위해서는 21세기형 산업 구조에 근간한 ‘더 많은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할 방안으로 이후의 작업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 신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갖은 ‘교조’들을 영구불변의 자연법이나 되는 것처럼 외쳐대는 ‘사이비 과학’은 설 땅을 크게 잃은 것으로 보인다. 더 자유롭고 진취적인 미래의 상상력을 해방시키기 위한 작업으로서 이 책은 상당 기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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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0 12:36 2009/08/10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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