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공허한 '희망과 대안'

View Comments

박원순 변호사의 최근 행보와 '희망과 대안'이라는 단체를 보고 있노라면 조금 답답한 생각이 든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뭔가 기대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고...
 

박원순 변호사에 대한 정부의 탄압(?)에 대해서는 하승우가 레디앙에 적절하게 쓴 바 있다. 박원순 변호사는 진실을 말했나? [정치사회비평] 연대 힘들게 한 행보…그가 가까이 한 곳과 멀리 한 곳 (레디앙, 2009년 09월 21일)

 
아래 김상봉, 김규항의 글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물론 그렇다고 김상봉 교수가 몸담고 있는 진보신당의 행보가 맘에 드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들은 '희망과 대안'에서 희망과 대안을 찾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면을 지적하고 있기에 담아놓는다. 
 
------------------------------------
[금요논단]공허한 ‘희망과 대안’ (경향, 김상봉 | 전남대 교수·철학, 2009-10-22 18:09:26)
 
얼마전 진보개혁시민단체 및 학계와 종교계 인사 100여명이 ‘희망과 대안’이라는 이름의 모임을 만들어 내년 지방선거부터 선거연합이나 좋은 후보 추천 및 지원을 통해 정치에 개입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타까운 마음이야 이해가 가지만, 경기하는 선수가 힘이 달리는데 밖에서 훈수를 두어 판세를 바꾸려는 발상이 퍽 놀랍고 기이하기까지 하다.
 
박정희가 그리도 오랫동안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야당 탓도 크다. 4·19를 통해 새 정부가 들어섰지만, 당시 집권당이던 민주당은 자유당처럼 대놓고 독재를 하지 않았을 뿐 안으로는 부자들을 편들고 밖으로는 미국을 따르는 보수 정당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민주당 정부는 4·19를 추동한 진보적 열정을 끌어안는 대신 ‘반공임시특별법’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로 데모를 규제할 궁리나 했으니 정치의 퇴행은 예고된 일이었다.
 
그랬으니 5·16 이후 다시 야당의 자리로 나앉은 옛 집권당 사람들이 민중의 신뢰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김대중의 도전에 화들짝 놀란 박정희가 아예 유신 독재로 치달을 때, 당시 야당이 한 일은 중도통합론의 간판 뒤에 제 부끄러운 비겁을 숨기는 일뿐이었으니 그런 야당에 무슨 희망이 있었겠는가.
 
4·19에 비하면 6월항쟁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공든 탑인지라, 그 뒤 우리는 전에 없던 좋은 시절을 꽤 오래 살았다. 그러나 4·19 이후 집권했던 민주당처럼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역시 노동자가 아니라 자본가의 정당이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물론 나는 그것을 무조건 비난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노동자의 정당이 필요하듯 자본가의 정당도 필요하다. 그리고 김대중 및 노무현 정부가 인권 신장과 언론 자유와 남북 화해에 크게 기여했음을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이 정부가 4대강에 삽질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이전 정부가 새만금에 삽질을 했기 때문이며, 이 정부가 쌍용차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해고할 수 있는 것은 이전 정부가 이미 외환위기를 정리해고로 돌파했기 때문이다.
 
시민단체들에 그때는 참 좋은 시절이었다. 그래서 정치는 잊고 ‘자본과의 중도통합’을 말할 수 있었다. 나는 그 관대함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깨어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좋은 시절에 미래를 위해 준비했어야만 했다.
 
형식적 민주주의 뒤에 숨어 자본가들과 지역토호들을 편드는 정당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민중을 위한 진보정당을 키웠어야만 했다. 자본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 되는 세상이 어떻게 가능한지 우리 시대에 어울리는 진보적 상상력을 보여주었어야만 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훌륭한 시민운동가들과 학자들이 진보정당에 많이 참여해 진보정치의 길을 넓혀 나갔어야만 했다. 그랬더라면 민주화에 대한 대중의 좌절이 도리어 새로운 진보에 대한 열정으로 전환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시민단체는 그 시절 한 줌의 시민적 자유에 안주했고, 그 결과 여전히 시민들은 4대강에 삽질하려는 한나라당과 새만금에 삽질했던 민주당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부유한다. 78년 총선에서 중도통합론의 신민당조차 공화당에 총득표수에서 승리한 일도 있었으니, 세상이 더 힘들어지면 지금 야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반작용이 역사의 퇴행을 막을 수 있겠는가. 오직 새로운 사회를 적극적으로 설계하고 그것을 새로운 정당을 통해 실현하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정치는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럴 자신이 없다면 나는 희망과 대안의 깃발을 들어 올린 분들이 밖에서 훈수를 두시기보다 차라리 민주당에 입당하시길 권한다. 대의민주주의 시대에 정당 밖에서 정치의 희망과 대안을 말하는 것은 기만이 아니면 착각일 뿐이다. 그분들이 제대로 된 보수정당이라도 만들어주신다면, 가난한 진보신당에 몸담은 나는 그분들께 감사하면서 오늘 일은 그분들께 맡기고 내일의 진보정당을 위해 조용히 땀을 흘릴 것이다.
  
-----------------------------
[야!한국사회] 사회 디자인 (한겨레,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2009-10-28 오후 09:11:21)
 
능력이나 노력의 차이에 따라 부의 격차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똑같은 인간이기에 그 격차는 지나쳐선 안 된다. 이를테면 오늘 평범한 정규직 노동자 한 사람이 이건희씨의 재산만큼 벌려면 월급을 한 푼도 안 쓰고 꼬박 50만년을 모아야 하는데 우리는 이것을 능력과 노력에 따른 정당한 격차로 인정할 수 없다. 우리 사회가 큰 틀에서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것인가, 즉 사회의 미래를 디자인하는 작업도 결국 그 격차를 최소화하는 것, 어떻게 하면 부자들의 돈을 빼서 가난한 약자들의 삶을 괼 수 있는가 하는 데서 출발한다.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독점함으로써 그걸 해결하려던 현실 사회주의가 일단 퇴장한 오늘, 우리 앞엔 대략 두 가지 사회 디자인이 제출되어 있다. 첫째는 기부나 자선을 기반으로 하는 미국식 사회 디자인이다. 빌 게이츠 같은 이가 엄청난 거액을 기부하는 모습을 보며 부모들은 제 아이에게 말한다. “부자가 되어야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단다.” 그러나 미국식 사회 디자인은 부자들의 일방적인 의사로 운영된다는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 알다시피 세상엔 남을 위해 한 푼도 내놓지 않으려는 부자가 훨씬 더 많고, 천사 같은 얼굴로 내놓다가 제멋대로 돈줄을 끊어버리는 부자도 많다.
 
세금을 기반으로 하는 유럽식은 그런 결함을 상당 부분 보완한 사회 디자인이라 할 수 있다. 거액을 기부한 부자가 사회적 영웅이 되고 가난한 약자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그 부자 앞에 머리를 조아리는 풍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부자들은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든 사악한 마음을 가졌든, 내고 싶든 내고 싶지 않든 상관없이 내야 한다. 그들이 내는가 안 내는가, 혹은 얼마를 내는가를 결정하는 건 그들 자신이 아니라 사회다. 사회적 약자들은 그 부자들을 의식하기는커녕 오히려 당연하다는 얼굴로 사회적 도움을 받는다.
 
사실 당연한 것 아닌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많은 부를 가진 사람이 사회에 더 많은 돈을 내놓는 건 말이다. 또한 사회 성원으로서 의무를 다하며 살아온 사람이, 말하자면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내고 심지어 병역의 의무도 이행해온 사람이 삶의 위기에 빠졌을 때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는 건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대체 왜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내고 군대를 가야 하는가? 미국식 사회 디자인은 바로 그 당연하게 누려야 할 권리를 비굴하게 구걸하게 만드는 부자들의 쇼다.
 
애석하게도 우리 사회는 이미 미국식으로 접어들었다. 그 흐름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인물은 역시 박원순씨일 게다. 그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공언하며 부자들과 손잡고 일해왔다. 그러나 얼마 전 국정원의 명예훼손 소송에 대응하여 발표한 그의 글은 그의 사회 디자인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드러낸다. “(이명박 정권 이후) 아름다운 가게와 희망제작소를 드나들었던 기업인들이나 대기업의 임원들은 철새처럼 모두들 날아갔습니다. 다시 원점에 섰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게 대통령 후보 시절까지도 돈독한 사이였다는 이명박씨의 변심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그의 사회 디자인에 있다. 양식을 가진 사람 가운데 박원순씨의 인간적 진정성과 사회적 헌신을 의심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의 실패, 지난 10년 이상 우리 사회의 의인이자 대표적 사회 디자이너로 추앙받아온 그가 부자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준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9/10/30 20:18 2009/10/30 20:18

댓글0 Comments (+add yours?)

Leave a Reply

트랙백0 Tracbacks (+view to the desc.)

Trackback Address :: https://blog.jinbo.net/gimche/trackback/865

Newer Entries Older Entries

새벽길

Recent Trackbacks

Calende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