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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 붕괴 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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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9일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20년이 되는 날이었다. 뉴스에 보니 각국의 유명인사들이 베를린 장벽에 다시 모여 그날의 감격(?)을 되새겼다고 한다. 
 
하지만 진보진영에서 이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 알기는 어려웠다. 한국은 물론, 다른 나라에서도... 물론 노력하면 찾아볼 수 있겠지만, 의미있는 논평 같은 것이 있을리 없으리라 생각한다.
 
나에게 베를린 장벽 붕괴는 별다른 감흥이 있지 않았다. 이미 그 이전부터 조짐이 보였기 때문이다.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하여 이를 인정할 것인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이는 이후 동유럽의 변화과정에서 많은 문제와 폐해가 나타난 것만으로도 입증된다.
 
체제 전환된 현재에 대해 동구의 많은 민중들이 불만을 가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과거로 회귀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일지는 의문이다. 남한 민중들이 경제가 어려울 때 박정희 시절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그리워하는 것에 비교하면 비슷한 비유가 될까.
 
자본주의의 병폐를 철저히 분석하고 이를 넘어서는 대안을 마련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한 과제이겠지만, 동유럽이 가졌던 문제점 또한 잊어서는 안된다.
  
음... 이런 코멘트를 하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그냥 이대로 베를린장벽이 붕괴된지 20년이 되는 이 날을 그냥 넘기는 것이 거시기해서 끄적이다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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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의 열정 되살려 “우리가 인민” 함성 (한겨레, 조일준 기자, 2009-11-10 오후 10:22:42)
각국 정상등 10만여명 참여 ‘자유의 축제’ 열려
도미노 1천개 쓰러뜨리며 통일의 의미 되새겨

 
인파 속에선 “비어 진트 다스 폴크!”(Wir sind das Volk·우리가 인민이다)란 외침이 다시 한 번 터져나왔다. 20년 전 동독 시민들이 군인들에 둘러싸였을 때 두려움에 맞서 외쳤던 구호다. 당시 동독 시민들의 시위를 이끌었던 요아힘 가우크 목사는 “‘우리가 인민’이라는 주제는 독일뿐 아니라 자유와 민주를 추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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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 붕괴 20년 동독을 가다]<上>상전벽해 뒤의 그림자 (동아, 베를린=송평인 특파원, 2009-10-13 02:50)
베를린 건물 쑥쑥 ‘유럽최대 공사판’ 드레스덴 옛 동독 비포장로 그대로
 
베를린에서 만난 옛 동독 기관지 ‘노이에스 도이칠란트’의 기자 페터 키르샤이 씨에게 궁금했던 그 풍차에 대해 물었을 때 “동독 지역에 어떻게 해도 공장이 들어서지 않자 정부는 재생에너지 산업을 키운다는 아이디어를 냈다”며 “그러나 풍차가 신성장동력으로선 턱없이 부족하다”는 답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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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 붕괴 20년 동독을 가다]<中>동독인 마음속의 응어리 (동아, 베를린·라이프치히=송평인 특파원, 2009-10-14 02:57)
 
“옷차림이나 말투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서독인은 신경 써서 옷을 입는 스타일이고 동독인은 수수하게 입는다.”
 
“탈출을 목적으로 결혼했던 남편과는 일찌감치 헤어졌고 혼자 살면서 식당종업원, 광고대행사 직원, 스포츠제품 판매원, 재봉사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지금은 재취업하려고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하다. 몸이 건강하고 가고 싶은 극장이나 식당에도 가고 좋아하는 춤도 배운다. 동독 시절엔 돈이 있어도 살 물건이 없었다. 300유로짜리 월세에 살지만 동독 시절처럼 쥐가 시끄럽게 굴어 잠을 잘 수 없는 날도 없다.”
 
“동독 사회주의 체제의 개혁이라는 것이 통일의 요구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 시위대는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동독의 주권은 우리 인민에게 있다)’를 외쳤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 붕괴를 전후로 ‘우리는 한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를 외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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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장벽 붕괴 20년 동독을 가다]<下·끝> (동아, 파리=송평인 특파원, 2009-10-17 02:30)
“동서독 정신적 통일까진 시간 더 걸릴것”
통일조약 성사 주인공 쇼이블레 장관 인터뷰
통일비용 많이 들었지만 성공기준은 돈 아닌 평화
‘분단 40년’ 벽 존재해도 ‘통일 20년’ 큰 진전이뤄

 
“통일의 성공 기준은 ‘돈’이 아니다. 오늘날 모든 독일인이 평화와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한때 생명까지 위협했던 적대적이고 중무장한 두 블록의 어느 한쪽에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좌파 언론인들이 흔히 주장하는 것과 달리 동독은 서독에 병합되지 않았다. 동독은 기본법 23조(동독 지역은 서독에 가입함으로써 기본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내용)에 따라 서독에 가입한 것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 1990년 3월 18일 동독 자유총선에서 과반 의석을 확보한 정당들은 기본법 23조에 따른 통일의 ‘패스트 트랙(fast track)’을 원했다. 그해 8월 23일 동독 의회는 4분의 3의 찬성으로 동독의 서독 가입을 통과시켰다. 새 통일헌법을 제정하는 게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상황을 그르쳤을 것이다. 협상에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위험한 상황도 나왔을 것이다. 게다가 소련이 얼마나 오래 참아 줄지 알 수 없었다. 우리는 재빨리 기회를 잡아야 했다.”
 
“우리는 동독 경제의 건전성을 과대평가했고 그 때문에 수리하는 데 드는 비용을 과소평가하는 실수를 했다.”
 
―서독이 동독에 많은 경제적 지원을 하고 교류를 한 것이 장벽 붕괴에 기여했는가.
“그렇다. 서독인들이 동독인들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여행이나 우편으로 많은 사람이 접촉하도록 했고 스포츠 교류, 문화 교류, 도시 간 자매결연에도 힘썼다. 방송의 힘도 간과할 수 없다. 동독인들은 대부분 서독 TV를 보았고 서독 라디오를 들었다. 한 언론인은 ‘통일은 매일 TV 앞에서 일어났다’고 말한 적이 있다. 1987년엔 동독 주민 100만 명이 서독을 방문했다. 많은 동독인이 당의 선전과는 다른 서독의 모습을 보고 자신들이 처한 조건에 불만을 품게 됐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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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붕괴 20년> ① 새로운 세계의 시작 (베를린=연합뉴스, 김경석 특파원, 2009-10-25 07:45)
20세기 후반 세계사 최대의 정치적 변혁
양극체제 종식..탈냉전 다극체제 출발점

 
동독의 시민 혁명은 1989년 7월 헝가리에서 여름휴가를 보내던 동독인들이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서독으로 탈출하면서 신호탄이 올라갔다. 이어 9월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 촛불 시위'를 계기로 동독 개혁의 바람은 태풍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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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붕괴 20년> ② 필연이 만든 우연 (베를린=연합뉴스, 김경석 특파원, 2009/10/25 07:45)
"설익은 발표.선정보도가 촉발한 돌발적 사건"
자유와 개혁 향한 의지가 빚은 역사적 필연

 
1989년 11월9일 오후 7시 동독 사회주의통일당(SED.공산당) 정치국원이자 선전담당 비서였던 귄터 샤보브스키는 당사에서 열린 기자회견 막바지에 호주머니에서 메모 한 장을 꺼내 아침에 있었던 내각의 결정 사항을 낭독했다. "앞으로는 여행 동기나 친인척 관계 같은 조건을 제시하지 않아도 자유롭게 외국여행을 신청할 수 있으며 누구에게나 출국비자가 발급될 것입니다." 역사적인 여행 자유화에 관한 발표였지만 실제로는 행정 절차에 관한, 어찌 보면 그리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었다.
 
단지 출국비자를 발급하는 새로운 기관을 설립한다는 조항이 반발을 야기하자 내각은 이를 무마하기 위해 포고령의 형태로 출국비자 발급에 별다른 제한이 없다는 점을 설명하려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탈리아 안사(ANSA) 통신의 리카르도 에르만 특파원이 "언제부터요?"하고 물은 것이 '화근'이었다.
 
공산 체제의 아성이 대규모 시위로 비틀거리고 있는 위기 상황에서 한 법안, 그중에서도 한 조항의 내용을 조금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라 별다른 준비를 하지 않았던 샤보브스키는 일순 머뭇거리다가 즉흥적으로 "지금부터입니다"라고 답변했다. 조용히 끝날 수도 있었던 그해 11월9일이 20세기 후반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기념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샤보브스키의 '지금부터'라는 말에 주목한 언론은 수 분 만에 다소 과장되고 선정적인 표현으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긴급뉴스를 전 세계에 타전했고,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치달았다.
 
TV 중계와 뉴스로 소식을 들은 동베를린 주민들이 서베를린으로 가는 검문소로 몰려들었고 그 수는 금세 수천명으로 불어났다. 이 검문소 건너편에는 지금은 베를린의 관광명소가 된 미군의 '체크포인트 찰리(찰리 검문소)'가 세워져 있었다. 주민들의 강한 통행 요구에 압박을 받던 동독 경비병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상부의 지시가 없자 우왕좌왕하던 끝에 결국 밤 10시쯤 한 장교의 결단으로 서쪽으로 가는 출입문을 열었다. 찰리 검문소에서 만난 동.서베를린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포옹했고 28년간 세계를 양분했던 베를린 장벽은 동서독 분단, 동서 냉전의 상징에서 순식간에 쪼개서 기념품으로나 쓸 만한 콘크리트 더미로 돌변했다.
 
이날의 '실언'으로 이듬해 초 공산당에서 쫓겨났던 샤보브스키는 최근 인터뷰에서 "여행 자유화는 인도주의가 아닌 대중의 압력에 따른 전술적 결정이었다"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조치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 "11월9일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었지만 아주 운이 좋았다"면서 이 일이 있은 후 슈타지(동독비밀경찰) 요원이 "샤보브스키 동지, 국경이 열렸소. 그런데 보고할 게 없소"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이날의 사건은 베를린 장벽 붕괴를 재촉한 도화선일 뿐 동서독 통일과 동유럽 공산권의 붕괴는 역사적 필연이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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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붕괴 20년> ③ 장벽을 찾아서 (베를린=연합뉴스, 김경석 특파원, 2009/10/25 07:45)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내달 복원 완료
경비초소는 박물관, 분단지역은 상업중심지 변신

 
베를린 장벽은 붕괴 이후 거의 모든 곳에서 자취를 감췄다. 무너진 벽의 부스러기는 쓰레기로 처리됐고 일부는 기념을 위해 장벽을 망치로 조각내 가져가는 소위 '월 페커(Wall Pecker)'에 의해 사라졌다. 일부 남은 장벽 중 가장 긴 구간(1.3㎞)은 1990년 `이스트사이드 갤러리'로 변신했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인 '형제의 키스'는 이미 복원이 완료됐다. 러시아 화가 드미트리 브루벨이 자신이 그린 이 작품은 에리히 호네커 전 동독 공산당 서기장과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입맞춤 장면을 해학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주여, 이 치명적인 사랑을 이겨내고 살아남게 도와주소서'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그라피티와 낙서로 가득한 장벽의 건너편에는 동독 시절 축구 경기가 열리곤 했던 동베를린의 스포츠 경기장 조명탑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 만난 군나르 바그너(35) 씨는 "어렸을 적 이곳에 와서 서베를린의 현대적 모습을 보고 동경했던 적이 있다"고 말했다. 구동독 지역인 바이마르 출신으로 지금은 개인 사업체를 운영 중인 그는 "일부 동독 주민들이 과거에 가졌던 것 중 일부를 잃게 돼 불만을 표시하지만 대다수는 통일로 행복해졌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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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붕괴 20년> ④ 동유럽의 변화 (부다페스트=연합뉴스, 황정우 특파원, 2009/10/25 07:45)
시장경제체제로 전환 후 경제 급성장
취약 경제구조.빈부격차 확대로 갈등
 
동·서독 베를린 장벽 붕괴를 계기로 시작된 동유럽의 체제전환이 어느덧 20주년을 맞고 있다. 그간 시장경제를 일궈온 오늘의 동유럽에서 과거 계획경제의 공산체제의 모습을 찾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동유럽 국가들은 공산체제 하 낙후한 지역이란 뜻이 배어 있는 '동유럽'이라는 용어를 떼어내려 애쓰고 있다. 서유럽과 다를 게 없는 그냥 유럽국가이며 유러피안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번 세계경제 위기에서 동유럽은 대체로 서유럽에 비해 더 큰 타격을 받았다. 서유럽에 비해 취약한 경제기반과 구조 때문이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동유럽 경제가 국제금융시장과 세계경제에 이미 완전히 편입돼 있음을 방증한다.
 
그러나 체제전환 이후 성장의 과실만 따라온 게 아니다. 시장경제의 이면에 드리게 마련인 빈부격차가 동유럽을 파고들고 있다. 부다페스트에 사는 토마스 오스테르레이쳐(48) 씨는 지난 20년간 헝가리의 주된 변화 중 하나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을 꼽았다. 그는 "당시에도 잘 살던 사람은 더욱 잘살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예전보다 못 살고 있다. 중산층이 없어졌다"고 비판했다.
 
제법 큰 청소회사를 운영하다 실패하고 10년 동안 엑스트라 배우 일을 하며 사는 차바 에데르(58) 씨도 변화에 적응을 못해 한 번 낙오했는데 국가에서 아무런 보호막도 돼주지 못한다며 서민들이 살기 어려워졌다고 토로했다. 차바 씨는 체제전환 이후 경제가 좋아졌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연금은 예나 지금이나 그저 그만하고, 의료보장은 더 나빠졌다. 또 1989년 이전엔 3년 이상 일하면 제 발로 나가지 않는 한 직장에 계속 다닐 수 있었는데 지금은 내일을 모르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그는 교직원인 부인의 월급 15만포린트를 포함해 한 달 18만포린트(120만원)가 총수입이라면서 연금이 나오는 62세 이후에도 계속 일거리를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자영업자 스페케르 게자 요제프(47) 씨도 "헝가리 경제상황이 20년 전보다 낫다고 생각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그는 "많은 사람이 작은 아파트에 살면서 예전보다 일은 더 많이 하고, 또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불안감에 떨고 있다"면서 "과거엔 여유 시간도 더 많았고 실업 걱정도 안 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자신을 중산층으로 믿는 두 자녀의 아버지인 그는 "만일 내가 지금 가정을 꾸린다면 아이를 갖지 않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헝가리 경제가 성장했는데도 이들은 예전보다 좋아지기는커녕 더 나빠졌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헝가리 등 동유럽 경제는 체제전환 이후 급성장을 해왔다. 1997~2008년 사이 1인당 국내총생산(1인당 GDP-PPS.유로스타트 기준)이 헝가리는 EU 27개국 평균치의 53%에서 63%로 상승했다. 그러나 유럽 내에서 서유럽과의, 그리고 자국 내에서의 계층 간 격차는 확대되고 있다. 이에 따른 박탈감이 불만의 가장 큰 원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지난 4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소득불평등도를 나타내는 지니계수가 헝가리의 경우 0.273(1990년)에서 0.291(2005년)로 높아져 소득불평등도가 심화했다.
 
다른 동유럽 경제도 마찬가지다. 체코는 0.232(1990년)→0.268(2005), 폴란드는 0.316(2000년)→0.372(2005년)로 상승했다. 폴란드를 제외하고 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 등의 지니계수가 OECD 24개국 평균치(0.313, 2005년)보다는 낮지만 성장의 그늘에서 빈부격차 확대가 진행됐음을 알 수 있다. 체코의 1인당 GDP는 EU 27개국 평균치 대비 73%(1997년)에서 80%(2008년)로 높아졌고 같은 기간 슬로바키아는 51%에서 72%로, 폴란드는 47%에서 57%로 각각 상승하는 등 고속 성장을 지속해왔다.
 
문제는 이번 금융위기가 동유럽의 빈부격차 확대와 상대적 박탈감을 가속할 공산이 커 보인다는 점이다. 동유럽 국가들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은 대가로 재정적자 축소를 약속했고 이를 위해 공적서비스 등 사회안전망 지출에 손을 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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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붕괴 20년> ⑤ 러시아의 부활 (모스크바=연합뉴스, 남현호 특파원, 2009/10/25 07:45)
푸틴 이후 경제성장.강국 위상 회복
정치적, 경제적 민주화 등 과제

 
정작 소련은 사회주의 붕괴에 대한 불안감이 컸던지 몰락 속도는 동유럽에 비해 더디게 진행되는 아이러니한 장면이 연출됐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는 체제 전환에 따른 상당한 후유증을 감내해야 했다. 기업들이 사유화되고 가격결정이 시장 자율에 맡겨지면서 물가가 폭등했다. 자본주의 체제에 익숙하지 못한 은행들은 문을 닫았고 빈부 격차는 갈수록 벌어졌다. 급기야 러시아 경제는 1998년 디폴트(지급 불이행)선언과 함께 파산 직전까지 갔다. 민족분열도 심해져 그루지야, 아르메니아, 체첸 등 곳곳에서 유혈 전쟁이 터졌다. 이런 불안정한 정치, 경제 상황은 블라디미르 푸틴 체제가 출범하기 전인 1999년 말까지 계속됐다.
 
지난해 미국발 금융위기로 10년 만에 위기를 맞고 있지만, 소련 해체 후 비싼 대가를 치르고 배운 경험은 위기를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특히 푸틴의 뒤를 이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자유시장주의를 러시아에 뿌리내리기 위해 추진 중인 각종 경제와 정치 개혁 작업은 러시아인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기대하게 하고 있다.
 
물론 한편에서는 아직 서방에서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러시아에는 없다는 비판도 없지 않다. 관료와 과두재벌 등 소련 시절과는 또 다른 소수특권층의 전횡과 빈부격차 심화 등도 큰 사회적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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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붕괴 20년> ⑥ 메지에르 前동독총리 (베를린=연합뉴스, 김경석 특파원, 2009/10/25 07:45)
마지막 동독총리.."한국판 헬싱키 프로세스 필요"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피해야"

 
-- 20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 당시 가장 힘들었고, 아직도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은 토지 소유권 문제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많은 토지가 국가에 몰수됐다. 40년이 지나고 나서 우리는 몰수된 토지를 원소유자에게 모두 돌려주기로 했지만, 현실에서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오히려 상황을 그대로 놔두고 보상을 하는 방식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일 그랬다면 독일 기본법(헌법)에 위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헌법재판소가 용인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다. 어쨌든 토지 소유권 반환 문제가 가장 어려웠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마 북한도 개인 소유의 토지를 몰수했을 것이다. 이 토지를 모두 돌려주는 것은 매우 어려운 문제이다. 독일의 경우 지난 20년간 약 120만 건의 토지소유권 반환절차를 완료했다. 물론 아직 처리되지 않은 것도 있고 소송이 진행 중인 건도 있다. 이 문제를 제외한다면 다른 복잡했던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잘 해결된 편이라고 본다.
 
또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우리가 동유럽 국가들과 교역을 유지하는 데 좀 더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는 것이다. 통일 이후 구동독 지역의 실업률이 높은데, 그 원인 중 하나는 동독이 갖고 있던 동구권 시장의 붕괴라고 생각한다.
 
▲ 경제적으로 보면 성공적이지만 사람들의 의식에는 여전히 문제가 있다. 구동독 지역의 실업률은 서독지역보다 2배 이상 높은 상황에서 구동독 출신들은 자신이 `2류 시민'이라고 느끼고 있다. 큰 문제다. 대학생 같은 젊은 세대는 동서독 시민 간의 의식격차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중장년층은 간극을 느끼고 있으며 문화적으로, 생활 감각 상으로 서로 낯설어하고 있다. 공산주의 이념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심각하게 많은 사람의 의식을 형성하고 좌우했다. 서독인들을 부르주아로, 서독을 완전히 다른 문명으로 인식하게 했다. 이런 점에서 현실적으로 독일은 여전히 2개의 나라라고 할 수도 있다. 구동독 지역에서는 좌파당의 세력이 강한 반면 서독지역에서는 좌파당의 영향력을 거의 볼 수 없다. 베를린만 하더라도 서베를린 지역은 기민당을 지지하는 반면 동베를린은 좌파정당들이 득세하고 있다.
 
-- 구동독 지역에서 좌파당의 지지세가 강한 것은 동독에 대한 향수 때문인가.
▲ 동독에 대한 향수라기보다는 세계화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구동독 시민은 세계화에 적절히 적응하지 못했다. 구동독의 세계는 좁았지만 현재의 세계는 너무 넓다. 구동독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현재의 세계는 적응하기가 힘들다. 대부분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서독시민에 비해 구동독 주민은 외국어 구사능력이 부족하고, 외부세계는 너무 넓고 낯설다. 하지만 이러한 문제는 구동독 체제에서 성장한 중장년층만이 갖고 있는 문제이다. 현재의 젊은 세대는 동서독 간 지역차이를 느낄 수 없다. 동서독 통합 과정은 1-2세대가 지나야 완성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한 세대가 지났고 또 한 세대, 즉 향후 20년이 또 흐르면 동서독 통합이 완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세대교체가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독일 통일이 평화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남북한도 군축으로 나아가야 하며 상호 군사적 위협을 포기해야 한다. 한국은 이미 전쟁의 비극을 겪었고 그로 인해 분단은 더욱 고착화됐다. 이러한 점에서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남북 간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피해야 한다. 또 북한의 기아를 해결해야 한다. 북한 주민은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고 아동들은 영양실조로 고통을 받고 있다. 기아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북한 주민들은 한국으로 이주할 것이다. 통독 당시 동독 시민의 소득은 서독 시민의 40%에 불과했다. 만일 소득이 60%만 됐으면 동독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북한의 소득수준을 개선해 남쪽으로 이주할 필요를 느끼지 않게 해야 한다.
 
독일에 비해 한국은 한 가지 유리한 점이 있다. 한국은 자원이 부족한 대신 기술 노하우가 있는 반면 북한은 풍부한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한국은 북한의 자원을 활용함으로써 경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기술과 자원이 결합할 때 이루어질 상황은 매우 흥미롭다. 한국이 석탄, 철광석 등 북한의 풍부한 지하자원에 투자한다면 북한 경제의 발전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북한 내의 관광자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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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붕괴 20년> ⑦ 쇼이블레 독일 내무장관 (베를린=연합뉴스, 김경석 특파원, 2009/10/25 07:45)
통독 협정 주역.."교류 활성화가 통일의 길"
"정보사회에서 고립된 체제 유지 어려워"

 
한국 정부에 해주고 싶은 말은, 독일의 경험으로 볼 때 북한과 좀 더 많이 교류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독일도 분단 당시에는 최대한 많은 교류를 위해 노력했다. 상호방문과 서신교환을 위해 노력했고, 동독 주민들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은 언론보도와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유를 억누르는 정권은 스스로 고립되려고 한다. 자유는 전염병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서독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도 북한 정권의 이해관계를 이용해야 한다. 서독은 동독 정권이 여행의 자유, 서독과의 서신 및 통신 교환을 확대하는 등 인도적 조치를 취한다면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유도했다. 원조를 제공하고 상응한 조치를 이끌어내는 데에서 이미 협력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한국정부에 해줄 수 있는 조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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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붕괴 20년> ⑧ 독일문제연구소 울 박사 (모스크바=연합뉴스, 남현호 특파원, 2009/10/25 07:45)
"장벽 붕괴로 냉전 종식, 공산주의 몰락"
"미.러 등 외교.군사마찰은 新냉전 아니다"

 
 "냉전은 이미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끝났으며, 지금 새로운 냉전을 얘기할 이유가 없다." 모스크바 소재 독일문제연구소 마티우스 울 박사(39)는 베를린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최근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하고 현재 국제사회에서 나타나는 군사적, 외교적 마찰은 항상 일어나는 수준의 문제로 굳이 이를 신냉전이라고 부를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다.
 
▲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인해 유럽의 민주화가 시작됐다. 베를린 장벽 붕괴가 아니었다면 동구권에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현재 많은 나라가 민주주의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완벽한 의미의 민주주의는 아직 달성되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항상 문제를 일으키고 의문점을 제기한다. 완벽한 의미의 민주주의가 달성될지 또 가능은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 민주주의는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 통일에 대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한 나라의 통일은 특정 세력이 기득권을 잃는 것을 걱정할 만한 수준의 일이 아니다. 통일에 앞서 경제적인 피해나 어떤 손해를 볼 것인지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역사적으로 두 나라는 같은 나라고 두 나라는 합쳐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서둘러서는 안 된다. 일단 북한의 체제가 바뀌기 전까지는 이렇다 할 결과물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현재 한반도 상황을 고려한다면 통일이 언제 될지 예측하기 어렵지만, 통일은 꼭 되어야 하고 언젠가는 그렇게 될 것이다. 갈라서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독일은 이미 이런 경험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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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변화” 외쳤던 곳 신나치즘 시위로 몸살 (한겨레, 라이프치히/글·사진 조일준 기자, 2009-10-28 오전 08:12:46)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① 독일, 라이프치히 민주화시위 현장
이민자 혐오 네오나치 반파시즘 단체와 대립
 
라이프치히는 꼭 20년 전 가을 옛 동독 시절,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기도회를 중심으로 “자유” “변화” “우리가 인민이다”를 외쳤던 ‘민주와 저항의 도시’다.
 
각종 깃발과 커다란 인형들, 시위 차량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남미풍의 음악과 참가자들의 ’와~’ 하는 함성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체 게바라의 초상이 그려진 깃발과 히틀러 망령 부활 금지를 풍자한 깃발들이 눈에 들어왔다. 진보단체 시위대였다. 참가자들은 인터넷 검열 철폐를 주창하는 해적당, 환경운동 단체, 사회민주주의자, 좌파 운동가들까지 다양했다. 그들은 음악 리듬에 맞춰 몸을 흔들고 구호를 외치며 즐겁게 시위를 했다. 러시아에서 왔다는 한 이주노동자는 기자에게 서투른 영어로 뭔가 이야기하려 애썼다. 다양한 그룹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반나치즘, 반파시즘 연대감이었다.
 
경찰 저지선 저편에는 네오나치 시위대가 있었다. 이들의 시위 계획은 이미 라이프치히를 며칠 전부터 긴장시켜 왔다. 드레스덴 등 다른 지역에서 벌어진 시위는 있었지만, ‘자유와 연대’의 상징인 라이프치히에서의 네오나치 시위는 3년 만이었기 때문이다. 검은색 후드점퍼를 입은 네오나치 정당인 독일국가민주당(NPD) 청년조직의 시위는 애초 예상됐던 600명의 2배인 1200명으로 순식간에 불어났다. 흩뿌리는 빗방울에 아랑곳없이 열기가 고조되던 오후 5시께, 경찰이 물대포를 쏘며 네오나치 해산에 나섰다. 하이델베르크에서 왔다는 한스 슈나이더(25)는 “네오나치는 배타적 인종주의자들이다. 그러나 라이프치히 정신은 자유와 연대다. 오늘 우리가 나치를 굴복시켰다”며 “정말 대단하다!”를 연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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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명소·통일학교된 분단의 흔적 (한겨레, 베를린/글·사진 조일준 기자, 2009-10-28 오전 08:21:46)
베를린 곳곳 전시회…장벽기념관도 40만여명 방문
완전한 통합 멀어…“화합 안될 것 같다” 42% 대답

 
상처의 온전한 치유와 통합까지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지난달 독일 여론조사기관인 이포스연구소의 조사를 보면, “통일이 옳았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응답자의 89%가 “그렇다”고 답했으나, “통일로 많은 문제들이 해결됐느냐”는 물음엔 35%만 그렇다고 했다. 독일 일간 <디벨트>가 지난 20일 보도한 여론조사에선 “동·서독 양 지역이 앞으로 잘 화합할 것으로 보느냐”는 물음에 낙관이 58%로 많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는 비관도 42%나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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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동독 민주화 진앙지에서 20년전 ‘촛불집회’ 재현 (한겨레, 라이프치히/조일준 기자, 2009-10-28 오전 09:50:52)
니콜라이 교회에 10만여명 모여 ‘월요기도회’ 기념
산증인 퓌러 목사 “자유 얻었지만 분배문제 박탈감”

 
퓌러 목사는 “동독인들은 그토록 원하던 사상의 자유와 민주적인 선거를 얻었고 경제 규모도 커졌지만, 분배 문제로 박탈감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동독지역의 50대 이상 장년층에는 ‘옛날이 더 살기 좋았다’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실업이 없고, 여가를 누릴 수 있고, 공동체 정서가 있고, 지금처럼 각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서독 출신으로 라이프치히대 대학원에 재학중인 마르틴 로스(26)는 “아직은 계급적 차이나 갈등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런 것을 바꾸기를 원한다”며 “진정한 통일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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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년 연대노조 ‘투사’…생계 걱정에 한숨만 (한겨레, 그단스크/글·사진 조일준 기자, 2009-10-29 오후 09:18:26)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② 폴란드, 연대노조의 터전 그단스크 레닌조선소

 
스테로노프스키는 “옛날엔 월급은 많았지만 살 게 없었고, 지금은 돈이 없는데 물건은 많아졌다”고 말했다. “미래가 불안하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도 했다. 대화를 나눈 지 10분이나 지났을까, 자전거를 탄 작업감독자가 다가와 “일하지 않고 뭐하느냐”고 소리쳤다. 늙은 노동자는 힐끔 이마를 훔친 뒤 다시 삽을 집어들고 허리를 굽혔다.
 
야체크 리비츠키 연대노조 전국위원회 사무총장은 “자유와 민주적 권리는 이뤘지만 급격한 체제전환의 충격으로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었다. 옛 기득권층이 여전히 권력과 돈을 쥐고 있고 빈부격차가 극도로 커진 것도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줬다”고 말했다.
 
중년의 택시 운전사는 “정부와 국민간에 믿음이 중요한데 지금은 그런 게 전혀 없다. 옛날보다 좋아졌다고 하지만 정부의 부패가 너무 심하고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않는다”며 극도의 불신감을 드러냈다. 그는 “정부가 뭐든지 내다팔아서 국민들의 일자리가 없다. 젊은이들이 결혼하고 나서도 일자리를 찾아 따로 사는 경우가 많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6월 국내 한 민간 경제연구소가 OECD 회원국 27개국을 대상으로 산출한 사회갈등 지수 순위는 폴란드가 터키에 이어 2위였다(한국은 4위다). 반면 국민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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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안정감 잃어” vs “개인 가능성 발휘” (한겨레, 바르샤바/글·사진 조일준 기자, 2009-10-29 오후 09:01:07)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20년 변화’ 세대별 시각차
 
엘리자비에타(50)= 공산 시절엔 가게에 물건들도 없고 외국에 나살 수도 없었다. 개인이 능력을 발휘할 수도, 인정을 받을 수도 없었다. 체제가 바뀌어서 개인들이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됐다.
 
다니엘(30)=옛날엔 자신과 가족을 배려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집도 신청하면 공짜로 제공됐지만 기다렸다가 20년 뒤에나 받는다. 지금은 당장 집을 구할 수 있고 20년 뒤에 갚을 수 있는 게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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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셔 이사장 “장벽은 높은 게 아니라 깊었다” (한겨레, 베를린/글·사진 조일준 기자, 2009-10-30 오후 04:34:32)
[만프레드 피셔 베를린장벽기념재단 이사장 인터뷰]
“후대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건 파괴된 삶과 상처가 있기 때문”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① 독일, 라이프치히 민주화시위 현장 

 
베를린장벽은 1989년 11월9일 대부분 걷어치워졌지만, 일부는 역사적 기념의 현장으로 보존되고 있다. 장벽기념재단이 관리하는 장벽기념관도 그 일부의 앞에 있다. 이 재단의 만프레드 피셔(MANFRED FISHER) 이사장은 베를린 장벽이 동서를 가르고 있던 시절, 장벽 바로 앞의 동독 땅이었던 동베를린 베르나워 거리에 자리잡은 ‘화해의 교회’의 목사이기도 하다. 지난 15일 만프레드 피셔 이사장을 장벽기념관에서 만났다. 
 
-기념재단 이사진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재단이사는 모두 6명이다. 독일 연방정부 1명, 베를린시 1명, 학계 1명, 교회(종교계) 1명 등 관련 전문가들로 구성된다.
 
-최근 들어 장벽기념관 방문객이 늘고 있는가?
=베를린장벽 기념관을 찾은 방문객은 2007년 26만5000명, 2008년 30만5000명이었고, 올해 들어선 10월 중순 현재에만 40만명에 육박해 지난해 보다 30%이상 늘었다. 
 
-방문객들이 방명록에 남기는 문구에 어떤 특징이 있나?
=독일인들은 장벽에 얽힌 기억과 경험 등 자기 주변의 구체적 이야기를 남기는 경우가 많다. 반면 외국인들은 현장 자체가 주는 깊은 인상과 감명을 남긴다. 올해 들어 헝가리 체코 등 동유럽 젊은이들이 부쩍 늘어난 것도 주목할 만하다. 
 
-방문객들은 베를린장벽 붕괴의 현장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방문객 대다수는 어떤 신화적 이미지나 상상을 갖고 이 곳을 찾는다. 권력, 동독 공산정권, 폭력, 살인, 분단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갖고 물결처럼 휩쓸려 온다. 영화나 포스터, 사진으로만 봤던 극적인 장면만 머릿속에 담고 왔다가, 정작 이곳 현장을 보고 실망한다. 아니 장벽이랄 것도 없잖아, 이렇게 작은 것은 것이 우리를, 동서독을 가르고 있었던 거야? 한다.
장벽은 높았던 게 아니라 깊었던 것이다. 위험하고 두려웠던 것은 장벽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1961년 처음 세워진 장벽은 해가 바뀔때마다 두터워졌고 경비도 삼엄해졌다. 장벽 자체가 하나의 과정이었다. 장벽은 생각보다 훨씬 더 공고한 것이었다. 그러나 동독 정권의 문제는 인민들이 더 이상 그곳에서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선거권도, 자유도 없었다. 베를린 장벽이 생기기 이전에는 동-서독 간에 왕래가 가능했다. 동독 정권은 장벽을 세우고 인민을 가둬두면 억압적 지배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장벽은 사람들이 동독을 빠져나가려 했던 이유를 하나도 해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문제를 더욱 선명하게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장벽의 위력과 단절감은 대단히 크지 않았나?
=장벽이 공고하면 할수록 저항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장벽을 평화적으로 극복할 세력이 동독 지역에서 생겼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드문 일이다. 1989년 가을에 수천, 수만명의 시민이 거리로 나서서 “우리가 인민이다”라고 외치며 행진했다. 시위는 평화적이었고, 군대와 경찰의 총격은 없었다. 시위대 중에는 공산당 간부들의 자녀도 있었다. 권력이 내부에서 스스로 무너졌다. 사람들의 공포심이 바로 권력의 도구이자 무기다. 그러나 당시 시위에 나선 시민들에게는 공포심보다 용기가 더 컸다.    
 
-장벽기념관의 교육적 효과도 클 것으로 보인다.
=모든 기념시설은 정치교육의 현장이다. 가장 좋은 것은 부모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와서 당시의 일과 교훈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것이 산교육이다. 이 곳에선 방문객들을 위한 가이드 투어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독일인 뿐 아니라 외국인을 위해 여러나라 언어로 설명한다. 베를린 장벽 밑으로 터널을 만들어 탈출을 돕던 서독인, 동독에서 민주화 시위를 이끌었던 반체제 인사 등 당시를 직접 겪었던 사람들의 증언도 이해를 돕는다. 
 
-장벽기념재단이 과거의 아픈 기억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후대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바로 이 곳에 파괴된 삶과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트라우마다. 동독 시절엔 우등생이라 할지라도 냉전과 대립을 반대한다는 뜻의 평화 상징마크를 달고 다녔던 학생들은 퇴학을 당했고, 대학 진학의 길이 막혀 직업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한마디로 사회적 출세의 길이 막혔다. 왜그랬던가, 잊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 이룬 것은 당시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1961과 1987이라는 두 개의 숫자, 2개의 메시지를 가르친다. 그 메시지는 역사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해인 1961은 “결코 망각하지 말자”는 다짐의 숫자다. 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7은 “결코 희망을 포기하지 말자”는 뜻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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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따지면 끝이 없어요…사람보고 살아야죠” (한겨레, 사라예보/글·사진 김순배 기자, 2009-11-02 오후 08:21:52)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③ 보스니아, 내전 상처 속 공존의 사라예보
세르비아계 남편-보스니아계 부인
예배는 따로따로
27년째 행복가정

 
부부는 옛날을 그리워했다. “지금은 옛날과 비교할 수가 없어요. 전혀, 전혀 못해요. 옛날에는 일자리가 있고 먹고 살기가 좋았어요. 제가 청소부였는데 늘 지갑에 돈이 있었어요. 밤새도록 마셔도 아침에 돈이 남았다니까요.” 일자리가 없어 놀고 있는 브란코는 “지금은 한달한달 살아가는 게 고민”이라고 말했다. 부부는 특별히 차려입은 듯 했지만 어딘가 꾀죄죄했다. 저녁으로 나온 쇠고기 요리의 접시가 금새 비었다. 브란코는 “대통령이 세명이나 되지만, 한명만 있는 것보다 못해요”라며 “정치가 이래서는 안 된다”고 화가 치민 듯 내뱉었다.
 
오랜 세월 민족과 종교를 넘어선 공존의 도시 사라예보로 그들은 돌아갈 수 있을까? 브란코가 말했다. “어느 민족이냐, 무슨 종교냐를 따지면 끝이 없어요. 사람이 좋은지 안좋은지 보고 사귀어야죠. 그러면 예전처럼 평화로운 사라예보가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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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예보 한지붕 세민족, 학살상처 딛고 화해로 (한겨레, 사라예보·모스타르/글·사진 김순배 기자, 2009-11-02 오후 09:42:31)
“용서하는게 낫다” 일상속 사라지는 야만
‘1국가-2체제-3민족’ 현실에 갈등도 여전

 
내전을 끝낸 1995년 데이턴 평화협정은 보스니아계(이슬람)와 크로아티아계(가톨릭), 세르비아계(세르비아 정교)가 섞여 살던 보스니아 안에 세르비아계로 이뤄진 스르프스카공화국을 새로 만들었다. 보스니아는 1국가 2체제로 갈라졌고, 지금은 3개 민족 3명의 대통령이 8개월마다 번갈아 대통령직을 수행한다.
 
사라예보에서 택시를 타고 20분 남짓, 산을 넘자 스르프스카공화국이었다. 세르비아계의 반응은 달랐다. 50대의 랑코 바트미츠는 “밀로셰비치가 아니라,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한 게 문제”라고 말했다. 대형 슈퍼에서 만난 이들 가운데엔 “우리도 가족이 숨진 희생자다”라는 대답이 많았다.
 
버스는 3시간 가까이 계곡을 따라 돌아, 보스니아 남서쪽 모스타르에 멈췄다. 세르비아계에 맞서 함께 싸웠던 보스니아계와 크로아티계가 ‘스타리 모스트’ 다리를 사이에 두고 다시 갈라져, 서로 죽이고 죽었던 곳이다. 한 70대 노인은 “다리를 잘 건너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슬람계가 다리 건너편의 집을 바꿀 수도 팔 수도 없게 하고 있다” “크로아티아계가 자기네 사람에게만 일자리를 준다”는 불만이 엇갈렸다.
 
이렇게 전쟁은 상처로 남았지만 일상은 계속됐다. 기념품을 팔던 한 모스타르 상인이 말했다. “평생을 원수처럼 살 수는 없잖아요. 같이 먹고살아야죠.” 전쟁 중에 무너진 모스타르의 다리는 2004년 복원됐고, 서로를 겨눴던 총탄은 볼펜으로 만들어져 기념품으로 팔린다. 점심을 먹은 식당의 주인은 크로아티아계이지만 이슬람계 지역에서 장사를 한다. 이슬람 사원에서 햇볕을 쬐던 60대 이슬람계 노인은 “제일 친한 친구가 크로아티아계다. 전쟁으로 가족이 죽었지만 증오하지는 않는다. 싸우는 것보다 용서가 낫다”고 말했다.
 
다시 사라예보로 왔다. 골목골목 내전 희생자의 이름이 새겨진 바닥 위로 20대 청년들이 시내로 몰려들었다. 1㎞ 안에 이슬람 사원, 가톨릭 성당, 정교회 성당, 유대교회당이 잇따라 나타났다. 성당의 종소리와 사원의 예배 소리가 뒤섞였다. 가톨릭계라는 50대 블라도 유리체는 “진짜 종교는 전쟁을 하지 않는다. 정치인들만 우리를 가만두면 된다”고 말했다. 거리에서는 “전쟁이 세르비아인, 보스니아인, 크로아티아인으로 나눴지 우리는 모두 사라예보인이다” “정치가들이 보스니아를 갈라놓았을 뿐이다”라는 대답도 자주 들었다. 시내 공원에는 유고를 하나로 묶어 세웠던 요시프 브로즈 티토 대통령의 책과 사진이 팔렸다. 사라예보든, 스르프스카공화국이든, 모스타르의 다리를 건너든 건너지 않든 카페에서 담배를 지독하게 빨아대는 것은 똑같았다. 보스니아에 진정 평화는 왔는가? 사라예보에서 4년 남짓 산 일본인 유학생이 말했다. “누구는 평화롭게 살 수 있다고, 누구는 평화롭게 살 수 없다고 말한다. 전쟁은 끝나지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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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 사라진 거리 ‘넘치는 자유’ 팍팍한 살림살이 ‘가득찬 한숨’ (한겨레, 부다페스트·부쿠레슈티/김순배 기자, 2009-11-03 오후 10:48:44)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④ 루마니아, 차우셰스쿠 처형 현장
루마니아·헝가리 일상속 뿌리내린 ‘자유’
경제위기에 빈부격차 확대 ‘불만’ 가득

 
이제 루마니아나 헝가리인들을 괴롭히는 것은 독재와 탄압 대신 팍팍한 살림살이다. 트르고베슈떼역 앞 택시기사들은 “사는 게 정글이다. 빚이 얼마나 많은지 아나?” “옛날은 줄을 섰지만 먹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가득찬 물건을 쳐다만볼 뿐이다”고 불평했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도 “가스와 전기가 없어 촛불에 우유를 데워 아이를 먹일만큼 어려웠다”는 과거보다는, 누구나 직장이 있던 젊은 시절을 자주 떠올렸다.
 
헝가리 특산품인 고추가 가득찬 부다페스트 중앙시장. 과일을 팔던 카탈린(60)은 “돈 없어서 못 사먹고, 휴가도 못가고 일해야 되는데 무슨 자유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침 물건을 사러온 손님은 “맞아, 맞아. 당연히 20년 전이 더 살기 좋았다”고 맞장구를 쳤다. 부다페스트와 부쿠레슈티의 거리에서 비슷한 불만을 수없이 들었다. 통역은 “평범한 헝가리 사람들이 한달에 100만원도 안되는 월급을 받아서, 물가는 한국 수준인 곳에서 살아가는 걸 보면 신기하다”고 말했다.
  
헝가리와 루마니아는 세계 경제위기 뒤 모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아 겨우 위기를 넘겼다. 루마니아 텔레비전에서는 연신 총리 불신임 관련 뉴스가 흘러나왔다. 1989년 체제전환 이후 처음으로 10월13일 정부가 의회에서 불신임을 받아, 에밀 보크 총리가 퇴진하게 됐다.
 
크리스토퍼 버르거 헝가리 열린사회연구소 선임연구원은 “경쟁은 더 사악하지 않으면 가난해지는 시스템인데, 국민들은 아직 스스로의 책임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며 “경쟁의 규칙이 공정하지 않아서 국민들은 경쟁을 꺼려한다”고 말했다. 다니엘 바부 루마니아 브쿠레슈티대 정치연구소장은 “중공업 등 중추적 산업을 외국에 팔아넘겼고, 정치 엘리트들의 전문성 결여가 오늘의 혼란을 낳고 향수만 부추겼다”며 “법과 제도에 기초한 정의가 확립되려면 20~40년은 더 걸릴 것이다”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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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전 우리는 자유만 말했지 책임은 얘기하지 않았다” (한겨레, 부다페스트/김순배 기자, 2009-11-03 오후 11:11:53)
헝가리 체제 전환 전문가 탈러시 헝가리 전략방위연구소장(48) 
 
-체제 전환 20년의 성과는?
“독재 체제를 무너뜨리고 자유 체제를 받아들였고 시장경제와 민주주의가 옳았음을 확인했다. 이제 사람들은 자유롭게 시위하고 유럽으로 공부하러 가고 여행도 할 수 있다. 20년 전보다 독립적인 경제를 갖춘 것도 성과다.”
 
-하지만 서민층 등의 불만은 높아 보인다.
“20년 전 우리는 더 자유로워질 것이라고만 말했지, 책임이 많아질 것은 얘기하지 않았다. 부를 얻은 게 아니라, 부를 얻을 ‘기회를 얻었을 뿐’임을 모른다. 자본주의의 좋은 점과 사회주의의 안정을 동시에 가지려고만 한다. 10년도 못 타는 차를 10년 할부로 사고, 정부가 알아서 다 해주겠지라고 기대하는 식이다. 공산주의 시절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고, 독일 등 최고 소득 수준의 나라와만 비교한다. 국민 상당수는 체제 전환 이후의 삶이 더 짧다. 20년은 긴 시간이 아니라 아주 짧은 시간이다.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헝가리가 구제금융을 받은 것은 일종의 ‘실패’로 볼 수 있지 않나?
“공산주의 시절 경제구조는 빚을 끌어와서 빚을 갚는 불안한 상태였다. 체제 전환 이후에도 소비와 생산의 간극을 계속 빚으로 메우면서, 사회를 지탱하기 어려웠다. 오늘의 경제위기는 체제 전환이 아니라, 전세계 금융위기에 따른 것이다. 정부가 긴축재정에 실패했고, 장기적 안목 없이 정책을 펴왔다.”
 
-옛 공산주의 엘리트의 지배가 계속된다는 비판이 있는데?
“선거에서 최고가 아니라 차악을 고른다. 공산당이 사회당으로 전환됐을 뿐, 낡은 공산정권이 정치·경제적 권력을 모두 갖고 있다. 권력층이 체제 전환 과정에서 주요 기업과 토지 등을 인수하고 쉽게 부자가 됐다. 정치인들은 20년간 똑같았고, 그래서 진정한 변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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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부르짖다 온기잃은 ‘프라하의 봄’ (한겨레, 프라하/ 글·사진 조일준 기자, 2009-11-05 오후 08:51:08)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역사의 현장을 가다
⑤ 체코, 사라진 벨벳혁명의 프라하 
체코 벨벳혁명 뒤 고속성장 속 취약계층 양산
하벨 “시장논리 과신하고 도덕성 소홀은 실수” 

 
중세풍의 건축물들이 온전히 보전된 도시는 관광객들로 넘쳐난 반면, 벨벳혁명을 기념하는 다양한 전시회와 공연들은 잘 드러나지 않았다. 카를대학 부설 경제연구소의 루보미르 리잘 소장은 “10년 전만 해도 혁명 10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했지만, 지금은 (혁명이) 당연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역사 속 사건으로 기억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체코는 옛 공산권 국가들 중 가장 발빠르게 자본주의화에 성공한 나라로 꼽힌다. 1995년 동유럽 국가로는 최초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합류한 데 이어, 99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했다. 이듬해부턴 경제성장이 급물살을 탔다. 2005년엔 1인당 국민소득이 2만 달러를 넘어섰다. 특히 그 해부터 2007년까지의 국내총생산(GDP)은 3년 연속 6%대의 초고속 성장을 했다.
 
주로 외자유치와 대유럽 수출에 의존하는 경제구조 탓에 체코도 금융위기의 영향으로 올해엔 10년만에 처음으로 마이너스 성장이 확실시된다. 그 타격은 사회적 취약계층에 쏠릴 수밖에 없다. 카를대학 경제연구소의 루보미르 리잘 소장은 “체코 경제는 대외 의존도가 높고 외부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과세와 복지 체계가 다른 나라들보다 잘 작동하는 편”이라고 말했다. 그는 “공산주의 경제체제에서 실업률은 제로였지만, 신기술 투자나 산업간 교류가 폐쇄적이고 비효율적이었다”며 “지금보다 나은 점도 있지만 경제성장에 도움되지 않는 시스템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바츨라프 하벨 전 대통령은 지난 1일 영국의 런던정경대에서 열린 한 토론회에서 “1989년 벨벳혁명으로 집권했을 당시 (시장경제 논리만을 앞세운) 경제학자들을 과신하고 도덕성 강조에 소홀했던 실수를 저질렀다”고 반성했다. 그의 회고는 당시의 체코 뿐 아니라 오늘날 대다수 나라들에도 여전히 유효해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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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 붕괴 후 동독인 ‘삶의 질’ 높아져 (경향, 김향미기자, 2009-11-05 18:08:08)
ㆍ동유럽 국가 ‘베를린 장벽 붕괴 20년’ 경제상황은 대체로 악화

아이젠휘텐슈타트는 폴란드와 국경을 접한 항구도시로 철근 조립공업이 발달한 동독의 대표적인 상공업 도시였다. 그러나 20년 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주민 40%가 빠져나가면서 황폐한 도시로 전락했다. 이곳 아이젠휘텐슈타트에 ‘독일민주공화국 일상생활기록센터(GDR Daliy Life Documentation Centre)’가 있다. 1993년 개관한 이 센터에서는 과거 동독에서의 삶에 관한 여러 가지 문서와 물건 15만점을 수집, 전시해 놓고 있다. 대부분 동독인들이 기부한 물건과 자료다. 센터의 안드레아스 루드비히 박사는 “동독 출신 사람들은 이러한 물품들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강한 충동을 느끼고 있다”면서 “이러한 물품이 자신들의 삶을 대변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들을 끌어당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만 방문자들이 동독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것이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것은 아니라고 덧붙였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지 20년. 독일을 포함한 동유럽 국가는 현재 자신들의 삶을 어떻게 평가할까. 여론조사기관인 퓨리서치가 최근 동유럽 9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동유럽인들은 대체로 민주주의로의 변화에 대해 수용도가 줄어들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동독인의 지지도는 91년 당시 91%였지만, 올해는 85%로 나타났다. 동유럽 국가들은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대체로 반감이 증가했다. 헝가리의 경우 공산 국가로 있을 때보다 경제상황이 더 악화됐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72%를 차지했다. 불가리아는 62%, 러시아는 45%가 더 악화됐다고 대답했다. 이는 현재 각국의 경제상황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헝가리의 내년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 0.9%, 불가리아는 마이너스 2.5%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됐다.
 
독일 통일에 대한 동독인들은 의식은 20년 전보다 다소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동독인의 31%만이 독일 통일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답해 91년 당시 45%보다 감소했다. 그러나 동독인 43%가 현재의 삶에 대해 만족한다고 답해 91년(15%)보다 삶에 대한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세대 간의 인식 차이도 나타났다. 러시아의 경우 18~29세의 젊은층은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65%가, 시장경제에 대해서는 63%가 지지한 반면 65세 이상은 민주주의나 시장경제에 대해 모두 27%만이 변화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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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벽 허물고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다 (경향, 설원태 선임기자, 2009-11-05 18:11:39)
ㆍ‘통일독일’ 유럽통합 가속화 세계질서 재편
ㆍ연방공화국 탄생 60돌 ‘겹경사’ 베를린 활기
 
2009년은 독일인들에게 2중의 의미를 갖는다. 독일연방공화국 탄생 60주년을 맞기 때문이다. 60년 전인 49년 5월23일 독일인들은 그들의 헌법인 기본법(그룬트게제츠·Grundgesetz)을 공표함으로써 독일연방공화국을 탄생시켰다. 장벽이 붕괴된 지 20년이 지난 오늘 베를린은 활력 넘치는 통일 독일의 새로운 수도로 거듭나고 있다. 과거 베를린을 동서로 갈라놓았던 장벽은 이제 흔적만 남아 있다. 역사가 남긴 흔적을 굳이 보고 싶다면 베를린의 ‘미테’ 구역에서 생생한 역사를 체험할 수 있다.
 
대사건 ‘독일 통일’은 세계화의 흐름을 타면서 동시에 세계적 발전과 변화를 이끌었다. 독일은 2000년 하노버에서 세계박람회를 열었고, 2006년 월드컵 대회를 개최해 세계인의 이목을 독일로 끌어들였다. 유럽연합은 2004년과 2007년의 결정을 통해 회원국을 12개국에서 27개국으로 크게 늘렸다. 연방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어젠다 2010’ 프로그램을 추진하면서 복지제도의 개선과 실업문제 해결을 추진했다. 2005년 11월 독일에서는 동독 출신의 정치인 앙겔라 메르켈이 여성 정치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총리가 됐고, 프랑크-발터 슈타인마이어가 부총리 겸 외무장관이 됐다. 메르켈은 최근 선거 승리를 통해 연임에 성공했다. 요시카 피셔 전 독일 부총리 겸 외무장관(재임 98~2005·녹색당원)은 최근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칼럼을 통해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냉전체제의 붕괴뿐만 아니라 세계화라는 새로운 흐름의 시작도 의미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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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은 어느 날 올 수 있어… 해법은 남북이 알 것” (경향, 설원태 선임기자, 2009-11-05 22:50:31)
ㆍ베를린 장벽 붕괴 20돌
ㆍ한스-울리히 자이트 주한 독일대사 인터뷰
ㆍ군비 절감해 남긴 돈 동독 등 재건 투자… 유럽·세계 변화 일궈
ㆍ한반도의 불행 절감… 통일 지원 요청땐 독일, 기꺼이 도울 것

 
경향신문은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2009년 11월9일)을 앞두고 자이트 주한 독일대사와 특별 인터뷰를 했다. 자이트 대사는 장벽 붕괴가 독일과 유럽에 몰고온 엄청난 변화를 설명하면서 “독일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의 통일을 지지하며, 이를 위해 도움이 되고 싶다”고 밝혔다.
 
-베를린 장벽 붕괴에 관련된 개인적인 체험이 있습니까.
“89년 11월9일 저는 나이로비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 소식을 접했습니다. 저는 가족에게는 나이로비에 남아 있으라고 말한 뒤 즉시 장벽 붕괴의 현장을 체험하기 위해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저는 평생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2주 동안 바이마르 등 동독 지역 몇 군데를 돌아다녔습니다. 그 여행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브란덴부르크 문 앞을 걸어보았고, 베를린 장벽에서 파쇄된 벽돌 조각들을 제 손으로 만졌습니다. 그것은 정말 감격스러웠고, 저로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습니다.”(자이트 대사는 당시 감격이 되살아나는 듯 말하면서도 뭔가 목이 메는 듯했다.)
 
-한국 사람들은 가끔 한반도 통일 시에 드는 비용(통일 비용)을 거론하면서 통일에 대한 준비 또는 부담감을 얘기합니다. 독일인들은 ‘통일 비용’에 관해 어떤 얘기를 하고 있습니까.
“통일 비용을 말하자면, 구체적으로 계산하기 어려운 많은 돈이 서독에서 동독으로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통일 비용은 단순히 얼마나 많은 돈이 서독에서 동독으로 흘러갔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통일 이후 모든 독일인들은 ‘연대세(solidarity tax)’를 내면서 동독 지역의 재건을 도왔습니다. 하지만 서독인들은 냉전 시절에도 부유한 주(란트, Land)에서 가난한 주로 돈이 흘러가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국가의 균형적인 발전을 위한 정책의 하나이며, 독일의 기본법(그룬트게제츠, Grundgesetz)에 규정돼 있습니다. 이런 균형발전의 정책은 2차 대전 이래 독일 내에서 전해져 내려 왔습니다. 그리고 통일 독일은 수도를 서독의 수도였던 본에서 구동독 지역에 있는 베를린으로 옮겼습니다. 수십만명의 공무원, 외교관, 정치인 등이 베를린으로 근거지를 옮겼고, 베를린은 이제 명실상부한 통일 독일의 수도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통일 비용’을 좁게만 해석해선 안된다는 얘기인가요.
“사실 독일인들도 통일 비용의 범위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재통일은 ‘유럽의 재통일’로 범위를 넓혀 해석할 수 있습니다. 왜냐 하면 유럽연합에서 가장 강력한 경제력을 가진 독일의 많은 돈이 통일 이후 동독 지역은 물론이고 동유럽 국가들(폴란드·체코·헝가리·발트 3국 등)에로 흘러갔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돈이 공산 통치 기간 피폐해 있던 이들 지역으로 흘러가 국가 재건의 바탕이 됐습니다. 독일의 통일은 유럽과 발칸지역에까지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재건과 변화의 근저에는 독일의 돈이 있었고, 강한 독일 경제는 이런 금전적 부담을 견뎌낼 수 있게 했습니다.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우리 독일인들은 독일을 통일하는 데에도 성공했고, 유럽을 재통합하는 데에도 성공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독일 통일은 독일과 유럽, 세계를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는 이런 엄청난 도전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 통일이 국내외에 미친 영향의 범위에 관한 사례로는 무엇이 있습니까.
“예컨대 독일은 통일 당시 동독에 주류하던 소련군 40만명과 그들 가족의 소련 귀환과 주택 마련을 위한 비용을 지불했습니다. 아울러 독일 통일 직후 시작된 유고 내전(1991~95년)으로 발생한 40만명의 유고 난민들이 독일 남부 뮌헨 등지로 들어왔을 때 독일은 이들에게 식량과 거처, 교육을 제공했습니다. 이것은 독일 경제에 또 다른 부담이었습니다. 독일의 남부지역은 유고에서 차를 타고 4시간가량 북으로 달리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입니다. 유고 내전이 데이튼 협정으로 종식되자 독일은 전후 유고의 재건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독일 통일은 단지 동서독의 범위에서만 보면 안됩니다.”
 
-구서독 지역의 독일인들도 통일된 독일에 만족합니까. 서독에서 흘러나온 자금이 구동독 쪽으로 흘러간다고 불만을 표시하지 않습니까.
“통일된 독일에서는 20% 정도의 사람들이 왜 우리가 통일비용을 부담해야 하느냐며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80%의 사람들은 독일 통일의 긍정적인 측면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통일 전 서독은 46만명 규모의 군대, 동독은 22만명 규모의 군대를 유지했습니다. 이런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는 것은 양측 정부의 재정에 엄청난 압박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통일 후에는 독일 군대의 규모는 26만명으로 줄었습니다. 아울러 군 복무의 기간도 짧아졌고 군비지출도 줄었습니다. 독일은 이렇게 군비 절감에서 남긴 돈을 동독의 재건에 투입했다고 이해하면 됩니다. 만약 냉전 시절 미국과 소련이 충돌했더라면 가장 유력한 전장은 독일이었을 것입니다. 독일은 냉전 중 유럽 갈등의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탈냉전 시대를 맞아 통일된 독일은 여러 가지 이점을 발생시키는 중심국이 됐습니다. 독일은 수 년 전 경제위기와 지난해의 경제위기를 잘 극복하고 유럽통합의 기관차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유럽연합에서 가장 강한 경제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세계적 금융·경제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독일 통일의 경험을 되살려 지금도 분단된 남북한 사람들에게 건넬 만한 조언이 없을까요.
“저는 분단과 통일을 경험한 독일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아직도 분단돼 있는 한반도의 불행한 상황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단된 한반도의 고통은 남북한 사람들이 가장 잘 알고 있으며, 저는 한반도 사람들이 그 해결책도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조언을 한다는 것은 매우 조심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한반도의 남북 쪽 사람들이 원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도움을 제공할 것입니다. 한반도 사람들이 독일인들의 지원을 원한다면 정치적 영역 외에 다른 영역의 지원도 기꺼이 할 것입니다. 언어와 문화가 동일한 하나의 ‘문화국가’가 반세기 이상 분단돼 있다는 것은 정말 부자연스럽습니다. 언제 한반도 통일이 실현될지 알 수 없지만, 저는 한반도 분단이 종식될 날이 언젠가는 올 것이라 믿습니다.”
 
-한반도의 통일을 예상할 수 있습니까.
“독일인의 경험을 말하자면, 통일이 어느날 갑자기 실현됐습니다. 이것을 보면 남북한 사람들은 재통일의 기회와 도전을 맞을 마음의 준비를 미리 해두어야 합니다. 한국은 한국전쟁 후 50여년 만에 가난한 나라에서 주요 20개국 정상회의(G20)를 주최할 정도의 부국으로 크게 발전했습니다. 골드만삭스는 한반도가 통일되면 엄청난 경제적 성장이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한국에는 잘 훈련된 지도층이 있기 때문에 저는 한국인들이 통일에 관한 여러 도전들을 잘 이겨낼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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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붕괴 20주년]“남북한 다양한 교류통해 공유된 정체성 확보해야” (경향, 홍진수기자, 2009-11-09 18:01:36)
ㆍ통일 동의 얻으려면 동아시아 ‘평화허브’ 역할 중요
 
한국과 독일 양국 전문가들은 “통일을 위해서는 남북한 사회가 다양한 교류를 통해 사회 각 부문의 공유된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면서 “다름보다는 같음과 공통의 이익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기조발표자로 나선 베른트 플로라트 구동독 국가안보문서 연방위원회 이사는 ‘베를린 장벽 붕괴, 회고와 재조명’이란 연설을 통해 “1989년 11월9일을 독일통일의 시작으로 보는 외부 시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외부 요인만이 아니라 동독에서 이미 진행되던 민주화라는 내부요인까지 복합적으로 작용해 장벽이 붕괴한 것”이고 말했다. “동독 내부에서 면면히 내려 오던 노동운동 세력과 기독교 공동체, 시민사회 진영이 공산 독재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동독 주민들이 여기에 호응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의 발터 클리츠 대표는 “1949년 이후 수십년 동안 서독의 대외정책은 군사안보, 주권문제, 그리고 2차 대전으로 인해 분단된 국가의 통일에 초점을 맞춰왔다”며 “서독은 대동독 접근 시 점진적 변화를 추구했고, 차이보다는 공통점과 공통의 이익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클리츠 대표는 또 “이해관계와 관심사의 공유를 통해 궁극적으로 차이점과 이질감을 극복하고, 공통의 장에서 만날 수 있도록 서로가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한반도 통일에 대한 주변 국가들의 동의를 얻기 위해 한국이 동아시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평화 허브’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숭실대 조홍식 교수는 “독일의 정치인들이 유럽공동체의 성립을 염두에 두고 통일정책을 마련했기 때문에 독일 통일이 수월할 수 있었다”며 “한반도 통일은 남북만의 관점이 아닌, 역내국가들 차원에서 논의하는 동아시아 공동체의 성립 여부와 관련지어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역사적으로 축적된 유럽공동체의 협력과 통합의 경험은 주변국이 독일 통일을 승인하는 데 주요하게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연세대 박명림 교수는 “동아시아는 집단안보기구나 다자적지역기구가 존재하지 않는 유일한 지역으로, 과거 역사 문제, 상이한 정치체제 등으로 유럽과 같은 강력한 지역협력 기제가 발전하기 어려운 조건하에 있다”며 “동아시아에선 오히려 각 국가의 주권을 보장해주는 느슨한 연계 형태의 ‘중위 통합체’가 대안이 될 수 있을 것이며 한국이 이 안에서 가교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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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잘 작동” 11%뿐… BBC, 주요 27개국 국민 여론조사 (경향, 김향미기자, 2009-11-09 23:43:36)
ㆍ“규제·개혁으로 풀어야” 51%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주요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시행된 여론조사 결과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우려가 매우 커진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 BBC방송이 주요 27개국 성인 2만9033명을 대상으로 지난 6월19일부터 10월13일까지 진행해 9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시장경제를 주축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응답은 11%에 불과했다. 시장경제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응답이 20%를 넘은 국가는 미국(25%)과 파키스탄(21%) 등 2개국뿐이었다.
 
전체 응답자 중 51%는 현재 자본주의의 문제를 더 많은 규제와 개혁으로 풀어가야 한다고 답변했다. 또 응답자의 23%는 자본주의에 치명적인 결함이 있으며 새로운 경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답변했다. 이 같이 답변한 비율은 프랑스 43%, 멕시코 38%, 브라질 35% 등으로 나타났다. 27개국 중 15개국에서 과반수의 응답자는 정부가 주요 산업을 소유하거나 직접 관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옛 소련의 몰락에 대한 찬반 응답 비율은 국가별로 차이가 있었다. 미국이 81%로 옛 소련의 몰락을 지지하는 의견이 가장 많았고 이어 독일(79%), 영국(76%) 등 서방국가에서 지지 의견이 우세했다. 반면 ‘잘못된 일’이라는 답변이 러시아에서는 61%를 차지했고, 우크라이나(54%)에서도 다수를 차지했다. 전체 응답자 가운데 옛 소련의 해체가 ‘잘못된 일’이라고 답한 응답자는 22%, ‘잘 모르겠다’고 답한 응답자는 24%로 나타났다. 전체 응답자 가운데 옛 소련의 몰락을 지지하는 의견은 54%였다. 27개국 중 22개국의 67%가 정부가 부(富)를 좀 더 공평하게 분배해야 한다고 답변했다.
 
이번 여론조사를 시행한 영국 BBC 글로벌스캔 대표인 도그 밀러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공산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이번 여론조사는 지난 1년간 금융위기로 자본주의가 폭풍우를 맞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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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 23% “자본주의 치명적 결함” (한겨레, 류이근 기자, 2009-11-09 오후 07:10:53)
BBC, 27개국 3만명 설문…11%만 “잘 작동하고 있다” 
 
1989년 11월9일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사회주의에 맞선 자본주의의 승리를 상징하는 세계사적 사건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세계인들의 다수는 자유시장 자본주의가 불완전하다고 여긴다. 이러한 여론은 30년대 대공황 이후 지난해부터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시장만능주의에 대한 반성이 커진 데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비비시>(BBC) 방송은 장벽 붕괴 20년을 맞아 27개국의 2만9000명 이상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23%가 “자본주의는 치명적 결함이 있어, 다른 경제시스템을 필요로 한다”고 응답했다고 9일(현지시각) 보도했다. “자본주의는 규제와 개혁을 통해서 다뤄야 할 문제들을 지니고 있다”는 응답까지 합하면, 거의 80%가 자본주의 시스템이 불완전하다고 보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자본주의는 잘 작동하고 있고, 규제는 자본주의 시스템을 덜 효율적으로 만든다”는 응답은 단지 11%에 불과했다.
 
<비비시>는 “베를린장벽의 붕괴는 20년 전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결정적 승리처럼 보였다”며 “하지만 이번 여론조사의 결과는 지난 1년 사이 금융적, 경제적 위기로부터 자유시장에 대한 신뢰가 큰 타격을 입었음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세계인들은 시장의 실패와 결함을 국가의 개입과 조정을 통해 수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비비시> 방송은 정확한 수치를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조사 대상국 가운데 22개국에서 다수가 “정부가 나서서 부를 더욱 평등하게 재분배해야 한다”는 데 동의했다는 조사 결과를 전했다. 또 터키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다수의 국민들은 정부가 나서서 시장에 대한 규제를 더욱 적극적으로 펴길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앞서 미국의 여론조사 기관인 라스무센이 4월 미국의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선 미국인들의 53%가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보다 낫다고 믿는다”고 답했으며, 응답자의 27%는 “어느 쪽이 우월한지 확신하지 못하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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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장벽붕괴 20년…공산주의 향수 ‘솔솔’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2009-11-10)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독일을 비롯한 세계가 잔치 분위기에 휩싸였지만, 한편에서는 공산주의 향수가 솔솔 피어나고 있다. 미국 일간 크리스천사이언스모니터(CSM)는 8일 체코를 비롯한 동유럽에서 공산당 일당독재가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발전하는 데 따른 부작용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면서 이같이 보도했다. 자유시장 경쟁은 물가와 실업률을 치솟게 했고, 자유선거로 극단주의 정당이 출현했고, 언론 자유는 자극적인 선동을 가능하게 했으며 이동의 자유는 국경을 넘나드는 범죄와 서방으로의 두뇌 유출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체코의 리부세 발렌토바 교수는 현재에 대한 깊은 환멸에서 공산주의 향수가 나온다고 진단했다. 1968년 체코 민주화 운동 당시 거리를 누볐던 경험이 있는 발렌토바 교수는 “체코 사람들은 서구의 자유와 풍요를 부러워했다.”면서 “(그러나) 지금 그들이 보는 것은 물질주의와 부패, 인플레이션, 무법천지이며 정신적이거나 물질적인 풍요는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공산주의 치하에서 자랐던 세대들은 의료와 교육을 무상으로 받을 수 있었고 상품과 서비스가 충분히 공급됐던 시절을 그리워하면서도 억압과 감시, 검열이 판치던 기억은 쉽게 잃어버렸다고 신문은 전했다.
 
높은 실업률 때문에 젊은이들도 공산주의 시절의 ‘완전고용’을 동경한다. 잔 클랜(26)은 체코 3대 정당인 보헤미아모라비아공산당의 청년 조직에 가입했고 내년 의회 선거에 공산당 후보로 출마할 계획이다. 그의 할아버지와 어머니는 공산당원이었다. 클랜은 실업률이 14%에 달하는 체코에서 공산주의식 완전 고용을 주창하는 공산당에 마음이 끌린 것이다.
 
그러나 프라하 전체주의체제 연구소의 지리 라이치 연구원은 “젊은 세대가 (과거를)잊지 말아야 한다.”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가족이 겪은 역사, 그리고 그때 실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기를 바란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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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1 22:38 2009/11/11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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