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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였으나, 대중정치가로서는 부족했던 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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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성 지음. 『박헌영 평전』. 실천문학사. 2009. 
 
『박헌영 평전』을 읽은지 보름쯤 되었나. 평전을 읽고 나중에 다른 이들과 함께 생각했으면 하는 구절들을 발췌해놓았는데, 지금 다시 보니 막 읽었을 때 덧붙여놓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더 추가하기가 어렵다. 역시 그때그때 정리를 해놔야 하는데...
 
사실 책상에 앉아서 읽은 것이 아니라 버스, 지하철 속에서 읽은 것이라 당시 읽으면서 머리에 떠올렸던 것을 다시 재생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뭘 읽어도 교훈은 있는 법.
 
반세기가 넘은 시절에 활동했던 이의 평전을 읽는 것이 지금의 현실을 반추하는 데에 어떠한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더욱이 내가 박헌영과 같은 혁명가를 롤모델로 하는 것도 아니고, 당시의 상황은 지금의 상황과 전혀 다르기에 이 또한 감안해야 할 필요가 있겠다.
 
어제 김진균 기념사업회 운영위원회 회의를 마치고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이성형 선생의 『대홍수 - 라틴아메리카 신자유주의 20년의 경험』과 관련된 얘기를 하면서 한국에서의 폭압정치가 아무리 가혹하다고 해도 필리핀이나 남미 등과 비교해서는 안된다는 말이 나왔다. 집권 보수정당이 혁명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법과 제도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지대가 버젓이 존재하고 대낮에도 사설 폭력집단으로부터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와, 장기간의 국가에 의한 파쇼폭압통치를 거치면서 국가 이외에는 제도화된 폭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한국사회는 다르다는 것이다. 아마 해방 전후의 한국사회는 바로 전자에 가까운 사회였고, 거기에서 좌파가 살아남고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은 쉬운 과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은 아무리 어렵다 해도 그 당시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훨씬 활동하기 용이한 상황이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하여 세상이 쉽게 바뀔 리는 만무하겠지만...

 

○ 입만 벌리면 진보적 민주주의니 자유평등을 외치던 공산주의자들에게 넌덜머리가 났던 보수 기득권 세력들이 오늘도 계속되는 민주주의와 진보의 행렬에서 공산주의의 유령을 발견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에 의해 빨갱이라 불리는 것은 결코 불명예스런 일이 아니다. 빨갱이란 호칭은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투쟁하는 모든 선인들을 가리키는 명예훈장인 것이다.
박헌영은 좌우대립이라는 주요 모순의 최고 정점에 올라가 있는 인물 중의 한 명이다. 한민족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제대로 알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박헌영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지금까지 수집된 자료와 증언만으로 보건대, 박헌영을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라거나 불세출의 영웅이라 찬양하기는 어렵다. 그는 공산주의 이론에는 탁월했지만 선동력과 포용력 등 대중정치가로서 필요한 정치수완은 거의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다. 근본 성품은 온후하고 지성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입장은 다분히 교조주의적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표범처럼 단단한 인상에 좀처럼 웃지 않는 과묵하고 비밀주의적인 성향은 지하운동의 지도자에게는 적합했을지라도 공개정당의 지도자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정황과 증거자료로 보건대, 그는 결코 미국의 간첩 노릇을 했거나 비겁자인 적은 없었다. 그는 일제 후반기 내내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조직의 최고책임자로 임명되어 있던 사람이었다.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이 해방되자마자 그를 최고지도자로 옹립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원칙적이고 교조적인 성향이 ‘결과적’으로 적을 이롭게 했다고 공박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면모가 없었다면 공산당 지도자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한계요, 시대의 한계였다. (26-28쪽)
 
○ 국제레닌학교 교수단은 박헌영의 수업 성과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활동성이 매우 만족스러우며 몹시 열심히 공부한다는 총평이었다. 그러나 아직 극복하지 못한 관념적 성향을 드러내는 데 대해 심각하게 지적했다.
“발전 정도가 매우 우수하다. 매우 적극적이며 학업에 열심히 정진하고 있다. 실천적 경험이 상당히 빈약하다. 그 때문에 지나칠 정도로 학구적이며 도식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한 자기비판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만약 이춘 동지가 이러한 결함들을 극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당에 헌신적인 일꾼으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조선공산당 내의 지도적인 집단에서 사업할 역량을 구비하고 있다. 그러나 반드시 낮은 수준의 일상적인 대중적 사업과 견고히 결합되는 것이 필수적이다.”
공산주의자들은 공장노동자나 농민 같은 기본대중 속에서 조직적 경험을 하고 선전선동의 훈련을 하는 것이 전통처럼 되어 있었다. 낮은 수준의 일상적인 대중사업 속에서 훈련되어야 관념주의나 교조주의에 빠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불행하게도, 운동의 시작 단계부터 지도자로 출발한 박헌영은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다. 대중운동의 경험 부족은 그를 자주 학구적이고 도식적인 경향에 빠뜨리게 했다. 레닌학교 교수들은 이 점을 간파해낸 것이다. (148-149쪽)
 
○ 1929년 12월 중순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 구내에서 개최된 조선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합동토론회에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 자격으로 참석해 발언한 박헌영은 파벌 문제로 인해 신랄한 비판에 직면했다. 당 간부 선발에 대해서, 박헌영은 다양한 종파에서 일하고 있는 좋은 인재들과 감옥에 수감된 공산주의자들 중에서 선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여러 공산대학생들은 박헌영이 노동계급 속에서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을 당 간부로 선출하지 않고 파벌투쟁에 익숙한 감옥의 지식인들 중에서 선발하려 한다며 비판했다. 박헌영이 과거의 혁명역사 위에 공산당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자신의 화요회 활동에 대해서는 철저한 반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문제는 박헌영이나 화요회에 대해 국내에서부터 끈덕지게 비방해온 이들이 현실 운동에서 그다지 헌신적이지 못한 이들이란 점이었다. (152-153쪽)
 
자본주의의 근원적인 모순밖에 읽을 줄 모르는 교조주의자들의 눈에는 세상은 항상 혁명적이고 민중은 항상 혁명을 갈구하는 것처럼 보이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민중은 혁명을 요구하는데 전위가 이를 지도하지 못한다고 불평하며 보다 분발할 것을 요구하기 마련이었다. 해외에서 조선을 바라보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국제선을 자처한 이들의 주관적이고도 조급한 요구는 느리고 힘겨운 사업에 매진해온 국내 운동가들의 반발을 사는 것이 보통이었다. (156쪽)
 
○ 1932년 7월에 발간된 『콤무니스트』 제6호에서 박헌영은 「상해폭탄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제목으로 윤봉길의 폭탄 투척 사건을 다루었다. 그는 윤봉길의 의거는 결코 살인이 아니며 일제의 대표들을 죽이고 ‘병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라고 전제하면서도 개인적인 테러와 공산주의와는 무관하다고 못 박았다. 개인적인 테러는 군중의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투쟁에 장해가 되며 그들에게 비조직적이고 개인적인 투쟁의 환상을 심어 결과적으로는 적에게 유리한 무기가 되고 만다고 보았다. 빨치산과 같은 무장유격대의 활동이 혁명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시기도 있으나, 이는 대중적 투쟁이 무르익어 무장폭동의 기세가 충분히 성숙되었을 때 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의병운동이나 암살운동조차 없었다면 조선의 망국사는 더욱 비참했으리라고 인정하면서도, 모든 투쟁은 민중의 이익을 위해 민중적으로 이뤄져야 가치가 있다고 본 것이다. (160쪽)
박헌영은 조선인 자본가와 지주, 고급 지식인 등 조선인 유산계급이 동맹파업이나 농민쟁의 같은 민중시위는 반대하면서도 윤봉길 사건 같은 개인적 테러 행동은 찬양하는 현상에 대해서도 일갈했다. 그들이 민중적 시위를 반대하는 것은 자신의 이권도 침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며 개인적 테러를 찬성하는 것은 적당히 일제에 자극을 가해 보다 많은 양보를 받아내기 위함이라고 보았다.
“그렇다고 해서 윤봉길 사건을 ‘너희끼리 싸우든지 말든지 우리는 모른다’고 손을 씻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기회에 개인적 테러 행동이 결코 혁명적 투쟁 방법이 아닐 뿐 아니라 도리어 군중의 조직적 투쟁을 방해하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저 부르주아들이 무엇 때문에 개인 테러를 환영하는가를 광범한 노동자와 농민 대중에게 폭로하는 동시에 우리의 투쟁 방법을 널리 선전하여 대중화시켜야 한다.”
구체적인 투쟁 방법으로는 공장 파업, 실업자의 군중적 행동, 농민쟁의의 조직화 등을 들었다. 이런 싸움들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공동의 정치적 파업과 시위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161-162쪽)
 
○ 소련에서 한인에 대한 숙청은 192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반자본주의 투쟁에 평생을 바쳐온 그들에게 씌워진 죄명은 다름 아닌 자본제국의 간첩이라는 것이었다. 진정 안타까운 것은 러시아왕조와 일본제국주의의 탄압을 두려워 않고 생명을 내걸고 싸웠던 그 많은 혁명가들이, 이 부당하고 참혹한 숙청을 당하면서도 감히 누구도 공개적으로 스탈린과 공산당에 저항하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실천에 옮기지도 않은 개인의 욕망과 사상까지 고백하도록 할 뿐 아니라 타인의 생각까지도 끄집어내어 비판하게 만들고 이렇게 들춰낸 관념에 죄를 물어 처형하거나 수용시설로 보낼 수 있게 한 집단비판의 효력이었다. 유물론적 세계관으로 시작한 공산주의가 최악의 관념론에 정복당하고 만 것이다. 이 불가사의한 집단적 광기의 전조는 중국공산당 내부에서도 나타나고 있었다. 수백 명의 조선인 항일운동가들이 아무 죄도 없이 동료 공산당원들에게 무자비하게 고문을 당하고 학살되고 있던 것이다. 이른바 민생단 사건이었다.
스탈린의 대숙청과 중국공산당의 민생단 사건은 수많은 공산주의 동조자들을 혁명으로부터 등 돌리게 만들었다. 다수의 서구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식 공산주의를 거부하고 보다 민주적인 사회주의 혹은 보다 사회주의적인 요소를 가미한 자본주의를 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회주의는커녕 민주주의라는 말도 한마디 할 수 없는 식민지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어떠한 퇴로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돌아갈 조국조차 없었다. 무사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177-179쪽)
 
○ 모순된 것은 파시즘의 최대 적수인 공산주의자들 역시 전체주의를 활용했다는 사실이었다. 우익 전체주의에 대해서는 타도를 외치면서 좌익 전체주의에 대해서는 민주주의라고 옹호한 것이다. 박헌영을 포함한 공산주의자들은 파시즘이라는 이름의 전체주의를 맹렬히 공박하면서도 사회주의란 이름의 파시즘에는 면죄부를 주었다. 이는 명백히 이중적인 잣대였다. 식민지 조선의 가혹한 현실에 두 눈이 가려진 그들은 자기들이 추구하고 있는 이상의 나라와 현실 속의 국가인 소련은 많이 다르다는 점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209쪽)
소련공산당에 대한 박헌영의 입장은 언제나 동일했다. 당은 무오류라는 원칙 아래, 소련공산당 혹은 코민테른의 결정이라면 일말의 의심도 표현하지 않고 무조건 복종했다. 벌써 10년 전부터 혁명과 개인,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의 문제를 고민해온 당대 진보적 지식인들의 고충은 박헌영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공산주의 이론이 아무리 좋은 의도로 출발했다 할지라도 그 실현과정에서는 무수한 모순에 부딪힐 수 있고, 그 모순을 지적한다고 모두 반공주의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진정으로 진보를 사랑하는 이라면 반드시 이 새로운 이념의 허실을 캐내고, 새로 세워진 권력을 더 철저히 감시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박헌영은 죽는 그날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단 한마디라도 공산주의에 대해 회의하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사상적으로 박헌영에게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면 바로 이 점이랄 수 있었다. 공산주의 내부의 공격과 달리, 그는 일제의 간첩도 미제의 간첩도 아니었으며, 그 어떤 증언이나 기록에도 그가 비겁자로 굴었다는 내용은 없었다. 오히려 우익의 공격대로 철두철미한 소련파였으며, 그것이 그의 치명적인 결함의 출발이었다. 그는 오로지 소련공산당과 스탈린이 나눠준 교과서대로 세상을 보려 했다. 일제하 공산주의자들이 모두 그랬던 것도 아니었다. 다른 이들은 행동은 같이하더라도 여러 가지로 번민하는 흔적을 남겼다. 유독 박헌영은 교조적인 원리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모습이 그를 불변의 공산당 지도자로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 될 수 없게 만든 이유도 되었다. (210-211쪽)
 
○ 박헌영이 그랬듯이, 이관술ㆍ이현상ㆍ김삼룡ㆍ이주하 등 경성콤그룹의 핵심들은 자신의 존재를 영웅적으로 부각시키는 것은 물론 대중적으로 드러내는 것조차 극히 꺼리며, 아무런 사심도 개인적 시간도 없이 오로지 당 활동에만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공산주의운동에 대한 일체의 회의나 비판도 용납하지 않는, 거의 맹목적이라고나 할 이 철두철미한 헌신성은 그렇지 못한 대다수를 포용하기에는 너무 엄격했다. 그들은 과거에 조금이라도 일제에 타협한 흔적이 있거나 운동에서 이탈했던 사람들, 혹은 분파적인 태도가 확인된 이들을 가차 없이 배격했다. 나아가 자신들과 함께한 이력이 없는 지방의 운동가들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불신과 경계심을 갖고 대했다. 특히 조직책임자인 김삼룡은 한 번 배신했던 이들을 믿지 않았다. 그는 차라리 운동경험이 일천하여 좌익맹동주의에 경도되기 쉬운 젊은 공산주의자들을 파견해 지방조직을 장악하게 함으로써 거센 반발을 자초했다. 합법적 대중정당으로 출발하는 이제는 진보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보다 다양하고 복잡한 생각과 경험을 가진 이들을 하나로 끌어모아 화합을 이뤄내 단결시킬 필요가 절실했으나, 박헌영은 그렇게 하지 못함으로써 스스로를 고립시키게 된 것이다. (240쪽)
 
○ 박헌영 평전은 시종일관 박헌영이 미제의 간첩이라고 주장했던 북한 재판정의 판결을 반박하는데 초점이 놓여져 있다. 사실 북한의 주장을 수긍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남한에서도 엔엘운동권을 빼면 거의 인정하지 않는 것인데, 이를 책 전반에 걸쳐 서술하는 것은 조금 지나친 느낌이 있다.
 
그렇다고 해도 함께 해왔던 동지들을 간첩, 스파이로 모는 짓은 아무리 선전선동 차원의 것일지라도 지나치다. 비단 박헌영 일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소련에서, 중국에서도 빈번하게 발생했던 간첩몰이를 어떻게 봐야하나. 아마도 지나친 체제유지, 세력유지의 강박에서 나온 과도함이 아닐까 싶다.

 
○ 박헌영 일파가 분파적이었던가, 아니면 해방 전후의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좌파 일반이 그렇게 종파적인 것인가. 각 세력들의 노선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시종일관 서로에게 적대적이었던 이유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하긴 나도 상대적으로 그런 점이 있었던 것 같다. 이전에 동지였던 이들과도 갈라지게 되고... 과거에는 나보다 더 과격했으나 이제는 시민운동을 하는 이들, 관악에서 함께 민주노동당 활동을 했던 이들, 전진에서 탈퇴한 이들... 운동권과 완전히 선을 그은 경우가 아니면 그렇게 적대적일 필요가 없을 듯하다. 물론 그 전제는 그들과 명확하게 차이가 나는 내 입장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다. 진정 싸워야할 대상도 많은데, 그렇지 않은 이들과 극단적으로 선을 그을 필요는 없다. 문제가 있으면 그때그때 지적하면서 함께 해나갈 수 있는 틀거리를 만들어내도록 노력해야 한다. 앞으로는 좀더 포용적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박헌영은) 동지의 인연을 맺은 사람에 대해서는 파벌주의라 비판이 나올 만큼 애정을 갖고 보호하되 적으로 분류된 이들에 대해서는 예리한 비판과 신경질적인 반응을 감추지 못했다. 동지에게 소탈하고 온유한 반면 적에게는 맹렬한 이 태도야말로 정치적 권위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상대방을 어루만져 유리하게 결정지어야 할 경우에도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여 협상을 결렬시키고 마는 경우가 있던 게 사실이었다. (277쪽) 
- 박헌영은 이론에 밝은 공산주의자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항상 원칙과 이론에 근거한 주장만을 내세우는 고집 센 혁명가였다. 때로는 소년의 고위 장성들에게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단순무지한 군인들은 말 많고 고집스러운 박헌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283쪽)
→ 이는 해방 초기에 그러하였을 뿐 아래에 나타난 바와 같이 북한에서 김일성이 주도권을 장악한 후에는 박헌영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니면 그런 말을 할 생각 자체가 없었거나...
 
당성이니, 자아비판이니 하는 심리적 압박이 일상화되면서, 언제 어떻게 비판당하고 숙청당하게 될지 모르게 된 공산주의자들은 일제하나 남한에서의 패기를 잃어버리고 점차 위축되어 결국 스스로 전체주의의 부속물이 되어갔다. 극소수를 제외한 대다수 공산주의자들의 비겁함은 들이 당한 불행을 동정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박헌영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대개 옳은 소리를 하면서도 막상 당에서 결정한 잘못된 정책을 가장 앞장서 수행하여 오명을 뒤집어쓴 트로츠키와 같은 처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제2인자들의 정해진 운명이었다. (394쪽)
 
어떤 권위에도 굴복하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결벽증은 조선공산당 출신들의 일반적인 성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주하를 비롯한 이강국ㆍ최용달ㆍ배철ㆍ이원조ㆍ이태준ㆍ이현상ㆍ김응빈ㆍ김태준 등의 원칙주의는 유명했다. … 이들에 비하면 박헌영은 지나칠 만큼 입조심을 하는 편이었다. 하나하나 실권을 잃어가고 있던 1949년 8월경에도 박헌영은 남한의 현실을 맹공격하고 북한을 찬양하는 판에 박힌 연설만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490쪽)
실상 북한 주민과 단체들에게 주어진 자유란 공공의 이익을 위한 희생에 한정되어 있었다. 사적인 감정에 충실하거나 개인적인 자유를 얻으려는 태도는 집단적으로 규탄받았다. … 당은 무오류요 지도자는 곧 당이라는 명제 아래 노동당 중앙이나 김일성에 대한 일체의 비판은 물론 만평 같은 불경스런 묘사도 엄금되었다. 박헌영의 생애에 진정한 오류가 있다면 이 전대미문의 전체주의 체제를 끝까지 찬양한 데 있었다. 그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자였던 것, 이상사회를 지향했던 것은 죄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평화통일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무력통일에 찬성했던 것처럼, 파시즘의 죄악에 대해 그토록 많은 논문을 썼으면서도, 스스로 새로운 전체주의 국가를 건설하고 그 체제에 맹동한 것은 그의 씻을 수 없는 오류였다. (491-492쪽)
 
- 2ㆍ7 구국 투쟁 선포 당시 많은 남로당원들이 체포되어 고초를 당하고 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처럼 무모하고 극단적인 투쟁으로 돌파해야 할 상황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막는다는 명목이었지만 북한 역시 단독정부 수립의 최종 절차를 밟고 있었다. 남로당의 전면 투쟁이 박헌영이나 그 측근들의 독자적인 결정이 아니라 소련군정과 김일성의 제안 또는 승인에 의한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에 대해 어떤 항의도 하지 않고, 투쟁을 최종적으로 지시한 박헌영의 책임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결재한 모든 투쟁에 책임을 져야만 했다. (417쪽)
이 시기 박헌영이 보다 장기적으로 역량을 보존하는 데 힘쓰지 않고 너무나 많은 고귀한 생명들을 죽게 만든 것은 그의 커다란 오류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박헌영 혼자 그 모든 책임을 뒤집어쓸 수는 없다는 것도 명백했다. (418쪽)
→ 숙청 당시 박헌영이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신의 지난 과오에 대해 응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책은 곳곳에서 평전의 저자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그러한 서술들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경우도 있지만, 논란이 될 만한 부분도 있다고 본다.
  
○ 1945년 12월 28일 북한을 첫 방문한 박헌영이 남한 최고의 지식인이자 항일투쟁의 전력도 화려한 인물들(김태준, 박치우, 최용달, 이순근 등)을 대동한 것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서울의 조선공산당 중앙당에는 기본계급인 저학력 노동자 출신이나 10년 이하 감옥살이를 한 이들은 찾을래야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아 무렵 공산당원의 80%가 양반 출신 지식인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 북한이 해방되자마자 어려운 한자를 폐기하고 한글을 전용하게 한 반면, 대개 고급지식인으로 이뤄진 남한의 빨치산들은 한국전쟁 중에도 온통 한문으로 된 보고서를 주고받는 게 보통이었다. 계급과 학벌에 의한 이 신분적 이질감은 북한 출신들이 남한 출신을 경원시하고 경계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308-309쪽)
→ 이것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었어야 했을까. 아무래도 남쪽의 사회주의자들에게 더 많은 책임이 있다고 할 수밖에 없을 듯한데...
 
○ 1945년 말 1946년 초 신탁통치에 대한 찬반논란은 확실히 남쪽의 좌파에게 커다란 오류가 되었다. 조선공산당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바꾼 것은 무슨 말을 하더라도 변명이 안된다. 더구나 박헌영이 북쪽에 갔다와서 소련의 지시를 받고 입장을 변경하였다니... “소련의 사주를 받는 공산당이 조선을 또다시 강대국들의 식민지로 전락시키고 나아가 소련의 연방으로 흡수시키려 한다는 우익들의 선동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음을 말할 필요도 없다. 3상협상안이 무조건 신탁통치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임시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결정임을 강조하여 입장을 바꾸었다면, 처음부터 그리했어야 한다. 이로 인해 조선공산당이 정국의 주도권과 대중의 지지를 우익들에게 넘겨준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점이라고 본다.
  
남한과 비슷하게 80년대 후반 민중혁명에 성공한 필리핀에서도 좌파는 신인민군을 조직하고 바얀당을 건설하여 제법 상당한 세력을 이루었다. 그래서 그들의 활약이 한국에 소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일순간에 몰락하고 말았는데,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중국 천안문 사태가 났을 때 유혈사태를 유발한 중국공산당을 견결하게 옹호한 점이었다. 그로 인해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고 하부조직이 붕괴되어 버리고, 지금은 거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역사는 이렇게 여기저기서 반복된다. 앞으로 남한의 진보진영이 그런 실수나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 인간의 역사를 자유와 평등을 위한 투쟁으로 보는 역사적 유물론을 배운 공산주의자라면 어느 특정 개인에 대한 숭배를 용납하지 않는 게 당연했다. 봉건제를 타도한 자본주의까지 넘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이들이 봉건적인 지도자 신격화에 반발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일제 때부터 사회주의운동을 해온 대부분의 운동가들은 박헌영에 대한 최소한의 찬양에도 반발했다. 김학철은 조선공산당사에 걸린 박헌영 만세 구호들을 보고 경악했다. 그는 YMCA 회관에서 열린 공산당집회에서 박헌영이 스탈린 덕분에 조선이 해방되었다고 연설하자 벌떡 일어나 항의하고 퇴장해버렸다. (321쪽)
 
박헌영 일파가 조선공산당에서 주류를 장악하였기에 그들은 중앙파로 분류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중앙파들은 항상 논란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아래 간담회의 분위기는 상당히 이례적인 것이었다고 안재성은 평하고 있는데, 좌파 정치조직이라면 이게 당연한 것이 아닌가.
 
민전 결성 직후인 1946년 2월 19일부터 이틀간 공산당 본부에서 열린 ‘중앙 및 지방동지 연석간담회’에서 반중앙파들은 경성콤그룹 출신들이 자기들만 불굴의 혁명가라 자처하고 그 외의 그룹들의 운동경력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 중앙당에서 지방으로 파견한 조직담당자들이 지방의 정통 운동가들을 배제하고 독단적으로 새로이 자기들의 조직을 만들고 있다는 것등을 비난하며 이러한 종파주의를 맨 앞에서 지휘하고 있는 김삼룡ㆍ이주하ㆍ김응빈ㆍ이주상 등을 퇴진시키라고 요구했다. 혁명단계 설정 문제, 우익과의 통일전선 문제 등에 대한 박헌영의 오류가 당을 망치고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결론적으로, 전당대회를 열어 현 중앙을 타도하자는 것이 그들의 공식적인 주장이었다.
당 중앙에 대해 이처럼 자유롭고도 무자비한 비판이 제기되고 또 이를 정중하게 수용하는 광경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었다. 남한에서 열린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이 간담회야말로 일제 때부터 공산주의운동을 해온 국내파들의 자유롭고도 민주적인 분위기가 그대로 투영된 유일한 회의라 할 만했다. (325-326쪽)
 
○ 일반적으로 권좌를 놓고 물러나는 것이 비판자들을 위해 권력가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이었다. 그러나 혁명가가 직책을 벗으려는 것은 무책임한 도피로 비난받을 뿐이었다. (328쪽)
→ 타당한 말이지만, 후자의 이유는 자신의 자리를 보존하려는 변명인 경우가 많다. 
 
○ 미국과 손잡은 이승만과 한민당의 테러 탄압 아래 남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세력은 거의 없었다. 필요한 것은 투쟁뿐이었다. 조선공산당과 그 후신인 남로당이 우익과 타협하지 못해 정치 주도권을 잃었다는 비판은 순박하거나 아니면 고의적인 왜곡이었다. 오히려 그들의 가치는 타협이 불가능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유일하게 맞선 세력이라는 점에 있었다. (355쪽)
 
○ 남한의 우익들이 자기가 좌익사범들을 얼마나 참혹하게 학살했는가를 평생의 자랑으로 삼는 것과 달리, 공산주의자들은 폭력주의자로 몰리는 것을 제일의 불명예요 수치로 알았다. 진정한 공산주의자라면 누구나 전쟁과 폭력을 반대하고 단 한명의 인명이라도 구하려 애써야 옳았다. 때문에 남로당 출신들과 북로당 출신들은 서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자기 자신이 아닌 내부의 다른 누군가가 폭력을 유발시켰다고 믿고 싶어했다. 그러나 누구도 그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386-387쪽)
 
○ 어떤 사람이 아무리 개인적으로 활달하고 매력적인 성품을 가졌다 해도, 나눠줄 것이 없으면 그저 좋은 친구에 불과한 법이다. 대위 김일성을 수령 김일성으로 만든 힘의 원천은 새 나라를 건설하는 데 필요한 수십만 개의 직책과 금전자원을 배분하는 막강한 권력에 있었다. (390쪽)
 
한국전쟁 전후 북한 사회에 대한 안재성의 묘사도 주목할 만하다.
 
- 남한 지식인들에게 북한은 마치 ‘상부 명령’이라는 원동기와 ‘연락’이라는 벨트로 움직여가는 거대한 기구처럼 보였다. 일찍이 어떤 사회도 도달하지 못했던 기계적인 체계 속에, 각 개인은 그 일부를 형성하는 부품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430쪽)
→ 이 대목을 보고 갑자기 ‘뇌봉’이 생각났다. 혁명의 나사못이 되고자 했던 뇌봉...
 
- 학생들은 음악, 무용, 연극 같은 문예활동에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나 그만큼의 시간을 농장이나 공장 혹은 국가적 토목행사에 동원되어 노동을 해야 했다. 학급회의는 쾌활하고 집단주의적인 인간성을 양성한다는 목표 아래 소극성, 시기심, 질투 같은 심리까지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개인주의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을 전체주의로 개조하려 하고 학생들을 집단노동에 동원하는 행위야말로 모든 파시즘 정권들의 공통적인 정책이었다. 겉으로는 누구나 이 체제를 수용하고 찬양했지만 내면으로는 반발이 누적되었다. 불과 2년 후 전쟁으로 국가적 통제가 마비 상태에 빠졌을 때, 최소 200만 명 이상의 북한 주민들이 월남했고 그 중 상당수가 학생들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했다. (434쪽)
→ 한국전쟁 발발 전 방북자들의 눈을 통해 본 북한의 실상에 대해 안재성은 위와 같이 평가한다.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면도 있지만,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책 곳곳에서 일방적으로 정의된 전체주의에 대한 반감을 내비치는 대목이 그러하다. 슬라보예 지젝이 ‘전체주의’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던데, 그걸 봤다면 다른 식으로 평가하게 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개인주의적일 수밖에 없다고 한 것에 대해서는 최근 이타적 유전자 관련 글을 참고할 수 있겠고, 집단노동에 동원하는 행태에 대해서도 그 자체는 문제가 있겠지만, 정신노동에 종사하는 자들도 필수적으로 일정 시간을 내서 육체노동에 종사하도록 하는 사회(소설에서는 자본주의 행성에 대비되는 사회주의 행성의 모습)를 건강하게 보았던 어슐러 K. 르귄의 『빼앗긴 자들』을 보았다면 다르게 볼 수 있겠다.
결국 안재성은 공산주의적인 요소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다가도 어느 면에 가면 전체주의적인 요소에 대해 부정적으로 서술하는데, 그 접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약간 모순적인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지점들을 안재성은 회피하고 넘어가는 듯하다.

○ 조선공산당은 3만여 명의 정예집단을 유지했으나 남로당은 사상이나 투지가 검증되지 않은 이들이 대거 유입되었다. 20만이 넘는 신규 당원의 상당수는 이론학습이나 지하조직의 훈련이 되지 못한 상태였다. … 사상적으로나 조직적으로 훈련이 되지 않은 당원들은 경찰에 체포되기만 하면 자신이 알고 있는 비밀을 너무 쉽게 털어놓아 고구마줄기처럼 줄줄이 체포되게 만들었다.
정적들은 이 결과를 두고 박헌영이 종파적인 욕심으로 당원 배가 사업을 벌여 당을 망쳐놨다고 공격했다. 그러나 당원 배가 사업은 전위정당이던 공산당을 대중정당인 노동당으로 바꾸기 위해 남북노동당이 동시에 실시한 사업이었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당원은 1945년 12월에 4,500명에 불과했으나 1948년 북로당원은 무려 80만 명이나 되었다. 북쪽이라 해서 교육이나 훈련이 충실한 것도 아니었다. (419-420쪽)
→ 예나 지금이나, 진보정당의 당원 배가 사업은 많은 문제를 낳았다. 민주노동당과 분리하여 창당한 진보신당은 그 오류를 개선하여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이기는커녕 더 퇴보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지난 촛불집회 이후 대거 입당한 이른바 촛불당원이었고... 물론 대중정당인 이상 당원의 문호를 넓힐 필요는 있으나, 좀더 당원이라면 단지 당비를 내는 것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교육과 학습, 조직활동이 수반되도록 해야 했으나 갈수록 요원해지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차치하고라도 진보신당이 과연 변모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 제대로 된 진보정당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사노준이 조금더 변하면 좋으련만...
 
○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 비극의 역사는 남침을 선동하는 말과 남한 내의 무장폭동을 선동하는 말의 차이를 중시하지 않았다. 더구나 겉으로 표현되지 않은 머릿속의 생각이란 현실정치에서는 어떤 의미도 갖지 못했다. 박헌영은 마음속으로는 전쟁에 반대하고 샤브신에게 개인적으로 그 속내를 털어놓았을지 몰라도, 어떤 공식적인 회의나 문건에서도 전쟁에 반대하는 의사를 표출한 적이 없었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남한 민중들에게 전면적인 폭동을 요구하는 맹렬한 선동뿐이었다. 마음속에만 들어 있는 생각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는 김일성이 주도한 전쟁의 제1 공범임에 틀림없었다. (481쪽)
 
○ (한국전쟁의) 전선이 고착되어 있던 3개월이 안 되는 기간 동안 남한 땅에 이식되었던 북한체제도 실망을 주었다. 중농에도 들지 못하는 이들의 토지를 마저 빼앗아 더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다던가, 매일 저녁 사람들을 불러 모아 사상교육을 시킨다든가 하는 모습들은 남한 민중의 거부감을 샀다. 무엇보다도 큰 충격은 김일성 우상화였다. 이승만이 아무리 독재라 하더라도 그를 독재자라 비판하는 다양한 야당들이 모인 국회도 있고 언론도 있었다. 경애하는 지도자나 위대한 수령으로 묘사되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미사여구로 치장된 김일성에 감동받을 남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공산주의에 대한 남한 민중들의 막연한 기대감은 깨져버리고, 빨치산과 인민군은 차가운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당사자들은 남한 인민이 공산주의를 염원하지만 ‘미제와 그 괴뢰’들의 잔인하고 혹독한 탄압 때문에 본심을 숨기고 있는 거라고 믿었지만, 이 역시 주관적인 착각이었다. 과학적이고 이성적이어야 할 공산주의자들이 너무 쉽게, 상식 이하의 주관적인 관념에 빠져버리고 있었다. 패배는 필연적이었다. (529-530쪽)
→ 박헌영 평전에서 한국전쟁에 대한 언급은 흥미롭다. 특히 북이 패한 주된 요인 중의 하나가 지휘관들의 무능력이라는 점은 이전에는 전혀 생각해내지 못했지만(물론 큰 관심도 없었다) 충분히 납득이 가는 내용이다. 기껏해야 항일유격대 식의 경험만으로 정규전을 치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나아가 인민군이 그렇게 고전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으로 김일성 우상화를 든 점도 설득력이 있다. 이 또한 미쳐 하지 못했던 생각이다. 다른 책들에서도 보지 못한 내용이고... 나는 단지 미군의 공습만을 떠올렸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진정으로 부끄러운 일은 남한 민중이 봉기하지 않았다는 점이 아니었다. 북한 민중이 봉기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북한 주민들은 밀려오는 미군과 국군들에게 맞서 빨치산투쟁을 벌이기는커녕, 앞장서서 환영하고 나섰다. … 연합군은 아무런 장애도 없이, 불과 1개월 만에 거의 북한 전역을 점령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2개월 후 국군이 후퇴하기 시작하자 엄청난 수의 북한 민중들은 그 뒤를 따라 남하해버렸다.
북한 수뇌부는 미군의 폭격에 모든 원인을 돌렸으나, 남한은 물론 북한까지 겨우 1개월 만에 빼앗긴 것은 결단코 무장력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현상과 하준수가 이끄는 남한의 빨치산들은 그보다 훨씬 끔찍한 악조건 속에서도 국군의 무기와 탄약을 탈취해가며 2년여를 싸워왔다. 북한의 험준한 산악을 이용해 유격전으로 저항했다면 얼마든지 버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 장성과 군관들 누구도 산악 빨치산으로 전환하지 않았다. (531-533쪽)
 
○ 1951년 5월 문화선전성의 유럽부장이었던 박갑동에게 박헌영이 집무실에서 한 말. “직장에 불평불만을 가져서는 안 돼요. 남에서 온 동지들은 모든 것을 꾹 참아야 해요. 남에서 온 당원들은 일제 때부터 부정적 사실에 대해 남달리 예민했고 불평불만을 품고 그것을 올바르게 해결하기 위하여 혁명의 길로 들어선 것이에요. 해방이 되어서도 우리의 불평불만은 해결되지 못했지요. 북에 와서 불평불만을 품어서는 큰일나요. 모든 것이 일조일석에 해결되는 것은 아니에요. 참기 어려운 것을 참아야 진실한 혁명가가 될 수 있으며 정치가가 될 수 있어요.” (549쪽)
→ 이게 타당한 자세일지...
 
○ 이 전쟁을 시작한 자는 누구라도 전범으로 취급되어야만 했다. 원인 제공자는 해방된 나라의 권력자로 재등장한 부일매국노들이었으나, 피해자는 남북의 민중들이었다. 악당들은 건재했을 뿐 아니라 전쟁특수를 통해 장차 독점자본의 기초를 쌓아갔다. 반면에 남한의 압도 다수 민중들은 반공주의자가 되어버렸다. 일제강점기 동안 축적되었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신뢰는 파탄이 나고, 동족상잔을 불사하는 전쟁과 인민재판을 떠올리게 만드는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무리들로 각인되었다. 남한의 진보운동은 씨앗이 자랄 토양조차 잃고 말았다. (552쪽)
→ 이러한 이유로 전쟁을 경험한 세대의 반공주의를 몰지각한 것이라고 몰아붙일 수 없다. 반공주의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좀더 지난하고 섬세한 노력이 필요하다.
 
○ 남한 권력의 주력이 친일파와 친미파들로 이뤄진 데 비해 북한 권력의 핵심이 항일빨치산파로 구성된 점 자체는 비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공산주의 이론에 대한 고민과 그 대중적 실천의 경험이 부족한 군 출신들의 권력화는 북한을 갈수록 질곡에 빠지게 했다. 이 특수한 사회구조는 과연 북한을 사회주의국가로 볼 것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까지 제기하게 만들었다.
지배권력의 세습과 출신성분의 구별, 거주 이전과 이동의 부자유, 정보통제와 언론, 출판결사의 부자유 등은 명백히 봉건시대의 유물이었다. 심지어 토지와 산업의 국유화조차도 봉건제가 갖고 있던 특성이었다. 북한을 사회주의라는 명분으로 포장되어 반제투쟁이라는 동력으로 돌아가는 전근대적 봉건국가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공산주의 이론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 이 새로운 국가 형태는 주체사상이라는 비과학적 사상으로 합리화되었다.
대숙청 이후 북한에는 정통 공산주의자라고 할 만한 이들이 거의 살아남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봉건적 위계의식이 강한, 의타적이고 복종적인 이들만 살아남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점은 실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제거된 자리를 봉건의식 뚜렷한 민족주의자들이 차지함으로써 북한 사회가 자본주의보다도 더 반동적인 봉건체제로 회귀할 가망성을 열었기 때문이다. (610-611쪽)
 
○ 북한의 유일한 승리자 김일성의 집권 50년은 주체사상이라는 이름의 자주노선으로 요약되었다. 그러나 김일성이 죽는 그날까지, 주체와 자립은 구호요, 희망에 머물러 있었다. 북한이 1960년대까지 남한의 두 배 이상 경제력을 유지한 것은 사실이지만 소련의 무상 지원 13억 루블 등,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 및 중국의 막대한 지원 덕분이었다. 소련과 중국의 경제 사정이 악화되어 지원이 어려워진 1970년대 이후로는 다시는 남한을 능가해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김일성은 줄곧 국민총생산의 20~30%에 이르는 군사비를 지출하며 4대 군사노선을 유지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도 중소규모 무장유격대 남파를 계속했으며 미얀마에서 남한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는 등 기습공격을 거듭했다. 무장유격대와 테러에 대한 집착은 정통 사회주의자들과 구별되는 김일성 특유의 성향이었다. 그는 항일빨치산의 경험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었다. (614쪽)
 
○ 문제는 언제나 실천하는 인간에게 있음을, 인간의 역사는 잘 보여준다. 보다 자유롭고 보다 평등하고 보다 평화로운 사회를 위해 인간이 창안해낸 이념들은 언젠가 반드시 현실에 적용된다는 점을 역사는 증명한다. 처음 한동안은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킬지라도, 결국 그것을 해결하는 것도 인간임을 보여준다. 언젠가는 평등과 평화의 나라가 도래하리라던, 박헌영을 비롯한 조선의 혁명가들이 품었던 염원을 한낱 망상이었다고 단정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622-6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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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20 16:38 2009/12/20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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