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나는 지갑이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View Comments

『나는 지갑이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 권일영 옮김, 랜덤하우스, 2007.
2009. 11. 19 새벽에 읽다.
 
나는 지갑이다제목을 보고 영화 ‘나는 전설이다’가 생각났다. 하지만 그와는 완전히 다른 추리소설이다. 원래는 연구실에 왔다갔다 하면서 천천히 읽으려고 했는데, 의외로 재미있어서 이틀만에 단숨에 읽어버렸다.
 
연쇄살인사건을 둘러싼 에피소드가 지갑의 목소리를 빌어 이어진다. 물론 각 지갑의 이야기들은 그 화자가 다르고, 주인도 다르며, 시점도 다르다. 열 개의 이야기이지만, 맨처음과 맨마지막은 형사의 지갑이 털어놓는 이야기이니 등장하는 지갑은 아홉 개다. 형사, 공갈꾼, 소년, 탐정, 목격자, 죽은 이, 옛 친구, 증인, 부하, 범인의 지갑이 등장한다. 이 중에서 역시 반장으로 나오는 형사의 지갑 이야기가 제일 마음에 든다.
 
이런 형식의 소설을 본 적이 있던가. 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 ‘인더풀’, ‘면장선거’에서도 비슷하긴 한데, 거기서는 이라부 종합병원 신경과 의사인 이라부 이치로의 병원을 방문하는 환자들의 눈을 중심으로 서술되는 단편이 이어지지만, ‘나는 지갑이다’에서는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역시나 옮긴이의 말을 보니 1989년 12월부터 월간지에 연재된 것이란다.
 
사물의 목소리로 사람의 행태를 묘사하는 건 재미있는 시도일 터이다. 이를테면 거의 컴퓨터를 끼고 사는 나는 집에 있는 노트북, 연구실의 데스크탑 컴퓨터의 입장에서 보면 어떻게 보일까. ‘나는 지갑이다’에서는 지갑이 오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이런 가정 자체가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생각해볼 수 있지 않나.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단편소설을 연결해 하나의 장편을 만들어낸다는 방식은 제법 손이 많이 가는 일이지만, 독특한 ‘장치’로서 재미가 있고, 여러 가지 얄궂은 기교를 부리며 쓸 수가 있습니다. ‘지갑이 사건을 이야기한다’는 엉뚱한 설정도 이런 연작 장편이라는 형식을 따왔기 때문에 가능했을지 모릅니다.
 
이 소설은 미야베 미유키의 책으로는 처음 접하는 것이다. 앞으로는 오쿠다 히데오에 이어 미야베 이유키의 소설도 눈에 띄는 대로 읽게 될 것 같다. 물론 이런 소설들에서 뭔가 의미있는 삶의 교훈을 얻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머리를 좀더 유연하게 하고, 다른 식으로 회전시킨다는 점에서 한다는 점에서 가끔씩 읽어줘야 한다.
 
여기에서도 생각나는 구절 몇 개를 옮겨놓는다.
 
곁에 누구도 없는 사람은 나이를 먹기는 하지만 세월을 헤아리지는 않는다. 생일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은 아무도 자기 자신을 위해 나이를 먹지 않는다. 그래서 나의 탐정은 나이를 잊었고, 나 역시 그의 나이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탐정이 세고 있는 것은 아내가 죽은 뒤의 햇수다. 아내가 죽었을 때 그도 죽었다. 그는 이미 2년이나 죽어 있다. 앞으로도 계속 죽어 있을 작정이다. 나는 죽은 사람의 돈을 보관하는 지갑인 것이다.
(112쪽)
 
나의 탐정-이라고 나는 부른다. 그는 나를 단순히 자신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사실은 그가 나의 것이다.
아내가 죽었을 때 그는 그녀의 추억이 묻어 있는 것을 모두 처분했는데, 나는 버리려 하지 않았다. 나는 유일하게 아내의 손이 닿은 적 있는, 그녀의 유물이었다.
(113쪽)
 
남의 마음을 자기 손안에서 주물럭거리는 것은 무엇보다 재미있는 놀이임에 틀림없다. (260쪽)
 
세상엔 온통 바보들뿐이다. 나하고 달라. 내 가치를 누구도 이해 못해. 내가 너무 커서 조무래기 녀석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야.

이 세상엔 너 만한 능력과 머리를 지닌 사람이 많아.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아. 세상 사람들은 부모님이 너를 대견하게 여겨준 것처럼, 부모님이 너를 자랑스럽게 여겨준 것처럼, 너를 그렇게 여기지는 않아―.
요즈음의 가즈야 모습을 보면, 예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 생각이 난다. 합성피혁으로 된 지갑인데, 자기가 진짜 가죽으로 만들어진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했다. 자기 가격이 잘못되어 있다, 부당하게 싼 가격이 매겨져 있다―. 이렇게 주장했다.
하지만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 지갑은 자기가 합성피혁이란 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걸 인정하는 게 두려워서 모르는 척 했다는 사실을, 자신의 진짜 가격표를 무시하려 했다는 사실을.
가즈야가 하는 일, 가즈야의 행동에도 그것과 비슷한 면이 있다―.
(346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1/10 05:49 2010/01/10 05:49

4 Comments (+add yours?)

  1. 로자 2010/01/16 16:32

    미야베 미유키 재밌죠. 미유키 거 저는 한 예닐곱권 정도 읽었는데, 이건 안읽었네요. 그 중에서 <화차>하고... 음, 또 제목이 생각이 안나네. -_- <화차> 등은 추리소설이지만 훌륭한 사회소설이기도 합니다. ^^;

     Reply  Address

    • 새벽길 2010/01/17 13:25

      미야베 미유키 책은 사서 읽는 게 아니고(물론 헌책방에 있으면 사겠지만) 도서관에서 여유있을 때 빌려보려고 하는데, 대부분 이미 대출되어 있는 상태여서 보기 어렵더라구요. <화차>는 기회되면 한번 읽어봐야겠네요.

       Address

  2. 로자 2010/01/17 16:06

    물론 저도 빌려서 읽습니다. ㅋ

     Reply  Address

    • 새벽길 2010/01/18 02:00

      이제는 졸업을 해서리 빌려서 읽지 못할 듯... ㅋㅋ

       Address

Leave a Reply

트랙백0 Tracbacks (+view to the desc.)

Trackback Address :: https://blog.jinbo.net/gimche/trackback/907

Newer Entries Older Entries

새벽길

Recent Trackbacks

Calender

«   2024/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