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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에 대한 이해와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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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길님의 [한국, 소통하면 되는 걸까?] 에 관련된 글.
경향신문에 [한국, 소통합시다] 기획기사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에 대해 강준만 교수가 진보언론으로서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높게 평가하는 기고를 하였다. 하지만 절반의 성공이라고 하면서 최장집 교수의 기고글을 언급하였다. 거의 한달여 전의 글이기에 그에 대한 요약글도 함께 실었고...
 
이러한 강준만 교수의 기고글은 소통만으로 포괄되지 않는 지점이 있다는 점을 경향신문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실 최장집 교수의 '소통에 대한 이해와 오해'라는 기고문에 대한 몇 가지 반응이 있었는데, 노사모를 비롯한 친노진영의 반응은 예상대로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었다. 단지 MB정부는 민주정부'라고 한 언급을 물고 늘어지면서 최장집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바마저 왜곡했기 때문이다. 하긴 민주-반민주 구도가 유의미하다고 보는그들 입장에서 보면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여기에 강준만 교수의 글은 경향신문의 소통 논의에 최장집 교수의 문제의식을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전향적이다. 하지만 정작 최장집 교수가 논의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빼먹었다. 바로 소통문제로 넘어갈 때 프레임 자체가 바뀐다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에서도 그렇고, 현재의 MB정부하에서도 그렇고,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의 핵심은 아니다. 그러하기에 불통의 문제를 풀기 위해 소통하자고 하는 노력은 노동 없는 민주주의, 사회경제적 의제의 무시를 지적하는 이들을 무의사결정의 영역으로 밀어놓고 자신들이 틀지어놓은 소통의 문제를 강제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아예 경향신문의 설문 자체에 응답하지 않았던 이들을 높게 평가하는 것이고...
 
이를 응용해보더라도 내가 관여하고 있는 조직내의 문제나 조직간 문제가 소통의 문제는 아닌 듯 싶다. 그럼 뭐냐라고 하면 딱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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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통합시다]최장집교수 특별기고 ‘소통에 대한 이해와 오해’ 요약 (경향, 2009-08-10 18:13:31)
 
소통이 사회적 논의의 주제가 된 데는, ‘불통정부’라는 말이 지칭하듯, 소통을 거부하는 현 정부를 비판적으로 겨냥하는 것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해된다. 현재 정치적 조건에서 소통의 의미는 몇 가지 상황을 가정한다.
첫째는 사회적 의견이 적대적 양상을 보이는 두 개의 세력으로 양극화되었다. 둘째,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은 소통 부재를 가져온다. 셋째,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계기로, 소통은 위기 수준에 이르렀다. 현재 소통문제는 세 가지 요소가 합쳐진 것이라 하겠다.
 
‘민주 대 반민주’라는 말만큼 정치갈등이 두 개의 진영 사이에서 전개된다는 인식을 잘 표현하는 것은 없다. 복고적 성격이 강한 이런 이해방식은 민주주의 틀 안에서의 정치경쟁을 선악개념으로 치환하고 집단적 열정을 동원하려고 시도한다. 일방의 진영이 자신의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대 정치연합을 강조하고 미덕으로 삼는 분위기에서, 내부 비판이 자유롭게 표출돼 여러 의사형성이 가능하고 이를 토대로 다원적인 세력형성이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세계화로 빈부격차·노동문제, 사회적 상향이동이 더욱 불가능해지는 사회구조 등 풀어야 할 여러 새로운 이슈가 등장했다. ‘소통 대 불통’이든 ‘민주 대 반민주’든 양극화의 논리·담론은 현실변화의 문제를 대면하고 다루는 데 부응할 수 없다.
 
소통문제가 두 개의 세력으로 양극화된 정치의 맥락에서 논의될 때, 정치발전에 어떤 긍정적 기여를 가져올지 의문이다. 이명박 정부가 서민·노동자를 소외시키며, 경찰·사법·정보기구들이 권위주의적 양태를 보인다고 비판할 수 있다. 보수정부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반민주적이라고 평하게 되면, ‘민주정부’라고 생각하는 앞선 정부들은 그만큼 긍정적으로 미화될 것이다. 이런 이해방식은 소통불능을 오히려 강화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과 과거 정부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문제가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이른바 진보적인 정부들 역시, 신자유주의 성장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양극화 비전에 입각한 신문 논조는, 민주화 과정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객관적으로 보고,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배우는 일을 어렵게 한다. 야당(들)은 성장과 노동, 분배를 결합해 보수정당보다 우월한 대안적 성장정책을 가질 때 집권할 수 있다. 민주정치에서 소통은 투표에서 다수의 평결을 통해 소통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소통하도록 강제되는 조건의 함수로 이해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잘하는 것이 소통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지, 소통에 대한 강조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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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통합시다]최장집 교수 특별기고-소통에 대한 이해와 오해 (경향, 최장집 | 고려대 명예교수, 2009-07-13 17:43:45)
ㆍ민주주의를 잘 하는 것이 소통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지,소통에 대한 강조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소통이 사회적 논의의 주제가 된 데는, 이명박 정부의 권력 운영방식과 리더십 스타일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소통이라는 말이 어떻게 사용되든, “불통정부”라는 말이 지칭하듯, 그것은 소통을 거부하는 현 정부를 비판적으로 겨냥하는 것에서 출발한 것으로 이해된다. 정부가 시민들의 의견에 귀기울이지 않고, 반응하지 않는 것을 뜻하는 것이라면, 소통이라는 말보다 정부가 시민들의 의견 및 여론에 귀기울이는 것을 뜻하는 “책임(성)”이라든가, “반응성”이라든가 하는 정치학적으로 보다 정확하게 정의될 수 있는 말을 쓰는 것이 더 좋았을 것 같다. 그렇지 않고 소통이라는 말이 현재 정치적 갈등이 양분화되고 격화되는 상황에서 사용될 때 원래의 문제의식과는 달리, 어떤 공정하고도 합리적인 의사소통을 증진하고, 이를 통해 정치발전에 기여하기보다 의도하지 않았던 역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생긴다.
 
소통문제를 생각할 때, ‘누구와 누가 무슨 내용을 가지고 어떤 맥락에서 소통하는가’를 생각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의 여론 형성은 주류언론들이 압도적인 영향력과 더불어 이슈를 설정하고, 지식인들이 이 논의에 참여하는 방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른바 진보언론은 자주 보수언론에 대한 거울이미지로 반대 논리를 제시해왔다. 그러면서 사회의 집단적 의사형성은 냉전반공주의나 정치에 대한 도덕주의적 관점에 의해 좁게 제한된 이데올로기적 틀을 통해 만들어져 왔다. 공론장에서 논의되는 이슈들은 이렇게 정형화된 이념범주로 분류되어, 언론매체들을 통해 사회화되고 정치화되었다. 사회의 의사형성이 언론과 지식인 엘리트들에 의해 선점되고 좁게 제한된 이데올로기 범위로 한정되는 조건에서, 공공여론이 사회현실을 반영하고 그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를 이슈화하기는 쉽지 않다. 소통의 문제가 이런 맥락에서 제시될 때, 엘리트주의라는 특징과 아울러 그러한 의사형성과 여론이 사회현실로부터 크게 괴리되었다는 비판을 면하기는 어렵다. 민주주의가 잘 발달된 나라 같으면, 여러 사회집단들, 특히 사회적 약자, 소외세력들의 의사를 정당하게 반영하고 조직함으로써 사회적 의사가 일방적으로 지식인 엘리트와 소수 언론매체들을 통해 형성되는 것을 어느 정도는 제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정치 밖의 소수언론과 엘리트들의 역할이 절대적이다.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정치는 어떠해야 하고, 공익은 무엇이고, 시민이 도덕적이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정치의 밖으로부터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성급하게 시민을 가르치려는 태도를 보여줄 때가 많다. 이러한 공론장의 구조에서, 소통이 강조된다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정치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
 
현재 정치적 조건에서 소통의 의미는 몇 가지 상황을 가정한다. 첫째는 사회적 의견이 적대적 양상을 보이는 두 개의 세력으로 양극화되었다. 둘째,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은 타기(唾棄)할 만한 것이고, 소통의 부재를 가져온다. 셋째, 이명박 정부에 들어와,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계기로, 소통은 더욱 악화되어 위기의 수준에 이르렀다. 현재 논의되는 소통문제는, 이러한 세 가지 요소가 합쳐진 것이라 하겠다.
 
이런 관점은 정치갈등과 경쟁이 두 개의 세력으로 양극화되었다는 이해의 방법에 기초한다. “민주 대 반민주”라는 말만큼 정치갈등이 두 개의 진영 사이에서 전개된다는 인식을 잘 표현하는 것은 없다. 이 말은 민주화운동과 그 과정에서의 격렬한 대립과 투쟁을 상징하고 당시의 정조를 불러들이는 것으로, 분명 과거 지향적이고 복고적인 성격이 강하다. 정치에 대한 이러한 이해방식은, 현실에서 발생하는 정치갈등과 민주주의 틀 안에서의 정치경쟁을 좋은 것과 나쁜 것, 도덕적인 것과 반도덕적인 것 간의 투쟁, 곧 선악개념으로 치환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집단적 열정을 동원하려고 시도한다. 일방의 진영이 자신의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대 정치연합을 강조하고 이를 미덕으로 삼는 분위기에서, 내부비판이나 생각의 차이들이 자유롭게 표출되고 여러 의사형성이 가능하고 이를 토대로 다원적인 세력형성이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는 선호가 강한 사람들만이 지배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적인 의사형성이란 차이를 인정하고 이들 차이 간의 합리적 경쟁을 통해 일정한 합의를 넓혀가는 과정이라 할 때, 사전에 정해진 어떤 의사, 가치를 위로부터 부과하는 것은, 무엇보다 민주주의원리와 부합하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소통이라는 말을 쓰면서 발생하는 역설적인 현상은, 그것이 개인의사든, 집단의사이든 의견, 의사의 소통을 더 자유롭게 하고 그 범위를 넓히기보다 이를 제한하고 억압하는 이데올로기 효과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협애하게 제한된 좌우 스펙트럼의 틀에서 비춰지는 양극단은 나쁜 것이고, 중간이 좋다는 가치판단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결과는 중산층적 온정주의를 강화하는 것과 더불어, 그렇지 않은 여러 의사를 제약하면서 차이를 인정하는 것보다 없애는 효과를 갖는다는 것이다.
 
정치를 이렇게 양극화된 대립구조로 볼 때, 그것은 현실의 변화를 보기 어렵다. 그동안 세계화는 한국 사회를 전면적으로 변화시켰고, 빈부격차, 노동문제, 사회적 상향이동이 더욱 불가능해지는 사회구조 등 우리 사회가 풀어가야 할 여러 중요한 새로운 이슈가 등장했다. 투표자들의 선호 역시 크게 변했고 한나라당, 민주당 등 정당들의 사회적 기반과 정당 자체의 구조도 변했다. ‘소통 대 불통’이든 ‘민주 대 반민주’든 양극화의 논리와 담론은 이런 현실변화의 문제들을 대면하고 다루는 데 제대로 부응할 수 없다.
 
이처럼 소통문제가 두 개의 세력으로 양극화된 정치의 맥락에서 논의될 때, 그것이 정치발전에 어떤 긍정적 기여를 가져올지 의문이다. 사람들은 이명박 정부가 사회의 최상층 이익만을 보장하고 서민과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며, 법의 지배와 인권보장, 권력 운영방식에서 경찰, 사법, 정보기구들이 권위주의적 양태를 보인다고 비판할 수 있다. 이런 점 때문에 오늘의 정부를 보수정부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 정부를 반민주적이라고 평하게 되면, 역으로 “민주정부”라고 생각하는 앞선 정부들은 그만큼 긍정적으로 미화될 것이다. 이러한 정치에 대한 이해방식은, 소통불능을 오히려 강화하는 것이 될 것이고, 이른바 진보세력의 발전에도 기여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과 과거 정부의 잘잘못을 평가하는 문제가 동일한 것일 수는 없다. 과거 이른바 진보적인 정부들 역시, 경제와 사회정책에서 신자유주의 성장정책을 일방적으로 추진했다. 그 결과로 서민과 노동자들의 삶의 조건은 나빠졌고, 국가의 사법, 경찰기구들은 충분히 민주화되지 못했다. 또 소통이 잘 안 되었던 것은 그때도 비슷했다.
 
양극화 비전에 입각한 신문의 논조는, 민주화 과정에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부족했던가를 이념적 스펙트럼을 가로질러 객관적으로 보고,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배우는 일을 어렵게 한다. 야당(들)은 여당의 실패를 통해 집권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 노동, 분배를 결합해 보수정당보다 우월한 대안적 성장정책을 가질 때 집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위로부터 만들어진 최대 민주연합을 강요하는 담론과 운동을 통해 그동안 표출될 수 없었던 사회적 약자의 소리나 여러 사회집단의 의사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다원적 토대 위에서 이를 결집하는 방식으로 다수를 형성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소통은 공익, 정의, 도덕적이라는 말과 같이 좋은 말이다. 그러나 좋은 말은 캠페인 같은 방식으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는 정치적, 사회적 조건이 성숙되는 과정을 통해 결과적으로 실현되는 현상이다. 민주정치에서 소통은 투표에서 다수의 평결을 통해 소통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소통하도록 강제되는 조건의 함수로 이해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잘하는 것이 소통을 가능케 하는 방법이지, 소통에 대한 강조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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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교수에게 MB정부는 민주정부? (오마이뉴스, 09.07.15 09:41  주광재 (sbadco)) 
  
최장집 교수가 이런 견해를 내놓을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다. 그분의 학자적 식견이라면 그저 그러려니 해야 도리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MB정부가 보수정부라서 그렇지 민주정부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는 부분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애도와 지난 정부의 잘잘못에 대한 평가는 다른 것이다'는 주장이 특히 거슬린다.
 
이명박 정권은 국민의 민주적 선택에 의하여 수립된 정권이다. 수립과정이 민주적 절차를 통한 것이니 민주정부라 한다면 독일의 나치정권은 어떤가? 분명 선거를 통하여 대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합법적 정권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나치정권을 민주정권이라 칭할 수는 없다. 그들의 행태는 세계정치사에 큰 흔적을 남긴 나치즘일 뿐이다. 가장 비민주적인 운영방식과 독선으로 끔찍한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지금 한국에서는 권력기관이 정권의 시녀로 전락하고 있으며, 대중의 의사표현이 심각히 제약되고 있다. 사상의 자유도, 결사의 자유도 침해되고 있다. 심지어 사법부의 독립성에도 심각한 하자가 드러난 바 있다. 특정 사건에 대하여 정권의 편에서 부당한 일을 한 법관이 대법관에 올랐다. 비판적 언론인들은 가혹한 수사를 당하고 있다. 정부를 비판했다고 네티즌이 옥고를 치르다 나왔다. 희대의 정치보복성 수사로 인하여 전직 대통령이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내몰렸다. 그를 따르던 측근은 물론 가족과 지인들이 모두 고초를 당하며 그에게 끝없는 고통을 강요하였다. 자신이 목숨을 버리거나 비참한 굴욕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연일 증거와 확실한 사실관계의 확인도 없이 혐의를 언론에 브리핑하기도 하였다. 사법부의 독립에 대한 의구심, 대중의 의사표현에 대한 제약, 언론의 자유침해, 정치보복성 수사 등으로도 민주정부가 아니라는 증거가 부족한가?
 
또 그런 모든 것이 단지 보수정권이라는 증거일 뿐이라면 보수 세력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보수주의자라면 충분히 다른 의견에 대하여 관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법부의 독립성이나 언론의 자유, 사상과 결사의 자유, 정치보복 반대 등을 지극히 당연히 받아들여야 옳다. 만일 그러한 민주적 가치를 부정하는 세력이 보수를 표방한다면 그것은 보수가 아니라 반민주 세력이 맞다. 그래서 민주정부가 아니라 할 수는 없고, 보수정부라서 그렇다는 주장은 궤변으로밖에 해석될 수 없다. 진보적 학자라는 분의 글에서 이런 궤변을 대하는 것이 입맛을 씁쓸하게 만든다. MB정부는 단지 보수적인 정부가 아니라 반민주적인 정부가 맞다.
 
말의 뜻은 유감스럽게도 정확히 맞다. 아무리 큰 슬픔으로 애도를 하더라도 잘잘못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 없는 것이다. 슬프기 때문에 갑자기 그가 했던 모든 일을 미화해선 안될 것이다. 과도하게 미화하려 한다면 그 자체로 고인의 뜻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위험성도 있을 것이다. 참여정부에 대한 공과는 이미 많이 평가가 내려진 듯하다. 최장집 교수의 주장대로 신자유주의적 세계질서 속에서 서민대중의 어려움이 더욱 커지고 양극화가 심화된 것이 가장 큰 비판점이 될 듯하다. 한미 FTA 추진과정에서 절차의 문제나 소통의 결여는 제법 심각하게 진보진영의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난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는 지나치게 가혹한 측면이 있었다. 한나라당과 지금의 집권세력으로부터는 무능하다는 덧칠이 위력을 발했고, 진보진영은 그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을 비판하는 데 바빴다. 마치 세상에서 가장 무능하고 한 일 없는 정권처럼 평가되지 않았던가? 결국 MB정권의 탄생은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피할 수 없었는지 모르겠다. 과연 그러한 평가들이 객관적으로 옳고 당연한 것이었을까? 그렇게 형편없는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면 현 정권과의 상대평가에서는 어떤가? 지금처럼 국민들이 자신의 할 말도 조심하고 위축된 분위기 속에서 전전긍긍해야 했던가?
 
애도를 한다고 해서 과도하게 미화해서는 곤란하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과도하게 저평가된 측면이 있었고, 그분의 서거를 통해 되돌아보고 수정 평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좋은 일이 아닐까? 그 일이 연로한 학자가 그렇게도 걱정하고 염려할 일인지 묻고 싶다. 잘못된 평가는 수정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혹시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애도의 분위기가 보수정부일 뿐 민주정부가 아니라 할 수 없다고 하는 MB정부에게 불리한 분위기가 될까 염려하는 것일까? 처절하게 저평가되어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던 지난 정권에 대한 평가가 좀 다시 내려진들 뭐가 그리 염려할 일인지 모르겠다.
 
진보적 주장을 해오던 최장집 교수가 스스로 대단히 우스운 사람들로 정의해버린 보수세력을 도와주고 싶어서 이런 글을 썼을 리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정권이 민주성의 문제가 아닌 보수성 때문에 이렇게 운영되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글의 맥락에서 묘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민주 대 반민주, 소통 대 불통 같은 양극화된 접근방식에 대한 의문도 이해하기 어렵다. 물론 그렇게 양극화된 구도를 가지고는 뭔가 생산적이고 진취적인 논의진전이 어려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 민주당과 친노세력 간의 결집움직임에 대한 견제구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상대적으로 지금 보수 세력의 대연합도 역시 논란이 시작되고 있는 시점에서 민주세력의 연합에 대한 의미심장한 견제구는 아닐까? 스스로 민주정부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 없다는 MB정부에게 무엇이 유리할 것인지를 생각해보면 의구심이 더욱 커진다. 지난 참여정부를 신자유주의 정권이라고, 양극화를 심화시켰다고 비판했던 그가 지금의 정부를 변호하고 싶은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하지만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문제는 탈권위적이던 지난 정권에 대하여 날리던 그 서슬 퍼렇던 비판이 지금의 정부에 대하여는 한마디도 없다는 점이다. 지금의 정권이 비판할 거리가 그렇게 없이 잘하고 있어서 일까? 아니면 스스로 민주정부가 아니라 할 수 없다고 하는 정권의 보복이 두려워서 비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수많은 의문부호는 그 분의 향후 행보를 지켜보자는 결론에서 멈추고 말았다. 시원한 대답은 어디서도 당장 듣기 어려울 듯싶다. 대다수의 국민도 민주 대 반민주, 보수 대연합, 민주 대연합 같은 양극화된 대결구도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상당히 심각한 퇴행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권의 운영방식은 심각히 퇴행하고 있는 데 대응하는 시민사회와 정치권은 그렇게 하지 말고 어쩌란 말인가? 그냥 각기 갈라진 목소리를 높이며 분열하고 있으면 누구에게 이익이 되겠는가? 그가 언젠가는 이러한 의구심에 답해줄 것이다. 그저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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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통이 문제’라는 거짓말 (레디앙, 2009년 07월 20일 (월) 10:28:01 민주희망)
[독자 투고] 노동-시민-야당 없는 민주주의가 문제…‘정당의 귀환’이 정답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핵심은 ‘야당’이다. 견제세력의 건재함이 필수다. 이명박 정부의 한국정치가 보여주는 특징은 ‘야당 없는 민주주의’다. 집권여당의 박근혜 전 대표 발언에 야당의 명암이 달라진다. 야당의 부재에서 이명박 정부에게 소통을 강조할 수 없다. 정치는 신이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하는 것이다. 견제세력이 없는데 소통을 하라는 건 도덕적인 관점이다. 낭만일 뿐이다. 정치는 도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으로 하는 것이 정치다.
 
이명박 정부는 지지자 혹은 대중들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지지자 혹은 대중에 대한 정권의 책임성과 반응성 부재가 문제다. 소통 대 불통, 소통 담론은 정치적인 책임성과 반응성을 간과한다. 소통 담론은 정치적인 것을 도덕적인 것으로 보는 오류를 범한다. 사회담론을 소통과 불통으로 양극화한다. 노동 없는 민주주의, 시민 없는 시민사회,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 등 사회적 문제에 대한 반응을 차단한다.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나타난 소통 담론은 엘리트 중심의 여론형성이 가지는 폐해다. 이러한 담론들은 사회 현실과 크게 괴리돼 사회 문제에 대한 진단을 할 수 없다. 사회적 약자들의 목소리는 차단되고 대중적인 담론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정치적인 폐해도 만만찮다. 소통 대 불통으로 양극화된 담론은 사회경제적 담론을 둘러싼 정치대결이 아닌 선악이란 극단적 구도를 불러온다.
 
진보진영도 소통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진보정치 1번지 울산이 현실이다. 집권 8년의 경험이 있는 울산 북구는 진보진영의 미천한 실력을 다 드러냈다. 구청장 8년 동안 한 것은 화장장 유치와 음식물자원화시설(쓰레기재활용시설) 건설이었다. 조승수 의원이 구청장 시절 화장장 유치를 주민투표로 실패하자 음식물자원화시설을 만들어 이상범 구청장에게 넘겼다. 당시 이상범 구청장은 음식물자원화시설을 강행했다. 음식물자원화시설은 공직자와 당이 야합한 결과물이다. 집권 8년간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지역주민들과 갈등에서 택한 길은 현 정부 못지않다.
 
이전 한나라당 집권 시기보다 더 강력한 공권력을 동원했다. 당시 지역에서는 "저것들 시켜놓으니 진짜 무식하게 밀어 붙인다"는 반응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연상되지만 엄연히 진보정당 집권기 일이다. 믿기 싫겠지만 진보진영 지방행정 8년이었다. 진보 국회의원을 배출한 지역임에도 당선자와 현장 노동자들의 네트워크조차 없었다. 현장 노동자들이 진보 국회의원을 감시 혹은 소통할 수 없는 현실은 MB의 불통정치에 맞먹는다.
 
진보진영은 정파를 통해 현장노동자들을 계몽의 대상으로 대했다. 정파는 현장노동자들을 기계적으로 동원하고 이용한 이들이다. 진보진영의 노동운동과 정당운동은 공조직 중심이 아니다. 오로지 정파다. 정파가 조정해 공조직을 무너뜨려왔다. ‘세팅투표’와 ‘줄 세우기’ 정치에서 소통은 있을 수 없다. 현장 지도자들은 정파의 지침과 정치방침을 관철해왔다. 대리정치, 대리투쟁일 뿐. 하부영 전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은 노조 간부들이 자주성을 상실했다며 “정파의 ‘꼬봉’과 ‘똘마니’”라고 비판했다.
 
최근 지자체 정당공천제 폐지도 이러한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정당을 통한 지방정치가 위기를 맞은 것은 정당의 사회적 기반이 약하기 때문이다.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풀뿌리 정치는 정당의 뿌리 깊은 사회적 기반이 절실하다. 현 정치개혁 논의처럼 ‘영호남 일당독재구도 타파’와 ‘중대선거구제’에 초점을 맞추면 제도권 정당들과 아닌 정당으로 양극화된다. 영남에서 민주당, 호남에서 한나라당이 나눠먹는 제한된 이데올로기적 틀로 수용된다. 다원적인 세력형성을 차단하는 효과도 나타난다. 정당의 허약한 사회적 기반이 문제의 초점이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책임성과 반응성이다. 지지자와 대중의 목소리에 얼마나 반응하는지는 정권의 사회적 기반을 보여주는 척도다. 정권과 대중의 매개체로 정당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집권여당은 어떤가. 책임과 반응이 없다. 정부의 거수기 혹은 계파 수장에 충성을 다할 뿐이다. 야당들도 다르지 않다. 노무현 정권시절 주요정책들을 집행, 추진하면서 지지자와 대중에 반응하지 않았다. 정권을 넘겨준 지 2년째임에도 기본적인 책임조차 지지 않았다.
 
문제는 정당이다. 책임성과 반응성을 기반으로 성찰과 대안을 만들어야 한다. 정치시장에서 현 집권세력보다 더 좋은 대안들로 유권자들에게 선택받아야 한다. 정치적,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목소리를 끌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 과거불문 ‘묻지마 대통합’도 소통도 아니다. 다시 ‘정당의 귀환’을 말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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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소통합시다]“이제 상대편 보다 우리편에게 소통문제를 제기해보자” (경향, 2009-08-10 18:18:21)
ㆍ“소통의 엘리트주의·양극화 함정 지적엔 전적으로 동의”
ㆍ강준만 교수 특별기고 경향신문 소통특집은 ‘절반의 성공’
ㆍ<최장집 교수 특별기고에 대한 나의 의견>

 
나는 경향신문의 소통 특집을 한국 진보 언론의 획기적 업적으로 평가하고 싶다. 이는 진보 언론의 가장 큰 문제가 비전과 대안보다는 비판과 저항에서 정체성을 찾는 관행이라는 나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그 업적은 ‘절반의 성공’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최장집 교수의 기고문과 관련돼 있다. 최 교수는 경향신문 지식인 설문 결과 ‘소통 잘하는 인물’ 3위로 꼽혔다. 보수 인사들로부터는 ‘소통할 만한 진보 인사’로 선정됐다. 나는 왜 그가 1위로 뽑히지 않았는지 의아스럽지만, 이 결과만으로도 그가 소통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걸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아니 반드시 말해야만 한다. 왜 그런가?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정권 출범 이후 소통 문제가 심각해졌다고 주장하는데, 내가 보기엔 노무현 정권 시절이 훨씬 더 심했다. 이명박의 선거 공약은 애초부터 개혁·진보파와 소통 가능한 게 아니었다. 노 정권은 그런 문제에 더하여 다수 지지자들과의 소통도 외면했다. 최 교수는 당시 노 정권이 잘못 간다고 경고한 내부 비판자였다. 그때 친노 세력이 최 교수를 향해 퍼부은 비판은 ‘언어 폭력’의 수준에 가까운 것이었다. 지난 대선·총선의 비참한 결과는 친노세력의 이런 독선과 오만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반성하기는커녕 오히려 일부 개혁·진보세력이 노 정권을 돕지 않았다며 원망하고 있다.
 
나는 이 문제가 반드시 거론될 것이라 믿었고, 이와 관련된 최 교수의 발언을 기대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최 교수와 경향신문 사이에 소통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그의 기고문 내용은 뜻밖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소통 문제가 두 개의 세력으로 양극화된 정치의 맥락에서 논의될 때, 그것이 정치발전에 어떤 긍정적 기여를 가져올지 의문이다”라는 최 교수의 생각에 동의한다. 내가 궁금하게 생각한 건 왜 최 교수가 그런 의문마저 소통의 문제와 연결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경향신문이 소통을 다루는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으면 그걸 지적하면서 다른 방향에서 소통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이념의 차이를 소통으로 넘어설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노 정권 시절 최 교수와 친노 세력의 차이는 이념의 차이는 아니었다. 방법론의 차이였다. 물론 그 차이도 소통으로 넘어서기 어려운 것이긴 하지만, 다른 방법을 제시했을 때 그걸 대하는 태도를 문제삼을 수는 있다. 쉽게 설명해보자. 진보적이긴 하지만, 절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진보적 가치보다는 자기들의 이해관계를 앞세우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들은 열성 추종자들에게만 둘러싸인 채 세상과 멀어지면서도 세상 탓만 한다. 어쩌면 이런 의식이나 행태는 이념보다 더 극복하기 어려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바로 이런 경우를 소통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실제로 ‘인간소통학 개론’은 독선, 오만, 탐욕, 완고, 경박, 자폐성, 피해의식 등과 같은 개인·집단 심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소통이 심리학만의 영역은 아니다. 소통의 정치경제학에도 주목해야 한다. 한국의 정치학 교과서들은 실제 정치 행위와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 한국 정치의 알파이자 오메가는 지대추구(진보·보수를 막론하고 국가 부문의 자원과 영향력에 접근하여 수익을 얻고자 하는 행위)와 이를 실현하기 위한 ‘줄서기·줄세우기’인데, 이런 건 거의 다루지 않고 서양 이론만 화려하게 나열돼 있다. 직·간접적으로 정권에 참여한 사람들이 정권이 잘못된 길로 간다고 느껴도 말을 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고위 공직, 영향력 행사, 인정 욕망 등과 같은 이해관계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해관계는 무의식의 영역에까지 침투해 곧잘 신념으로 둔갑하곤 한다. 게다가 한국인들은 전반적으로 ‘내부고발’보다는 ‘조폭식 의리’를 더 멋있게 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잘못가는 정권에 브레이크를 걸려는 시도를 하는 건 속된 말로 ‘남는 장사’가 아니다.
 
나는 그런 문제까지도 소통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럴 경우 개혁의 지점은 명확해진다. 시위에 의존해 판을 엎어보려는 단기 모험주의, “우리편 이겨라”를 외치면서 우리편의 승자독식을 꿈꾸는 한탕주의보다는 장기적으로 지대추구와 맞물린 전 사회 영역의 정치화·정략화를 완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게 우선이라는 깨달음이 올 것이다. 즉, 소통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게 아니라 “왜 소통이 안 되는가?” 하는 문제 의식으로 접근해 문제점을 발견하면 정치경제적 개혁 의제들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걸 다룸으로써 사회진보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 최 교수는 이미 끝난 정권에 대해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다고 보는 걸까? 그렇다면 지난해 촛불시위 정국으로 돌아가보자. 주류파를 형성한 많은 개혁·진보적 지식인들이 감격이 지나쳐 허황된 촛불시위 예찬론을 펼 때에 최 교수는 냉정하게 그 한계를 지적하면서 차분한 대안을 제시했다. 그의 대안은 피가 끓는 그들의 공격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후 벌어진 사태는 최 교수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입증했다. 일부 과격파들의 화끈한 담론과 행동은 이명박 정권에 정권 전복의 가능성에 대한 과잉된 공포감을 심어 주었고, 그래서 이후 이명박 정권이 사실상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비슷한 증상을 보이게 된 건 아닐까?
 
그러나 그들은 이마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 정권에 대한 이해심이 지나치다며 음모론을 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최 교수의 발언 당시 일부 촛불시위 예찬론자들의 입에서 “최 교수가 이명박 정권에서 한 자리를 하려는 건 아닌가?”라는 따위의 말이 나오는 걸 듣고, 절망감을 느낀 적이 있다. 이 사람들은 정신 나간 예외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게 사이버 정치담론의 평균적 수준이다. ‘지도자 추종주의’와 더불어 ‘정치의 종교화’ 현상이 매우 심각하다. 이명박 정권의 문제는 이명박 정권의 문제인 동시에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문제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게 이념의 문제인가, 소통의 문제인가?
 
이 물음을 파고 들면 우리는 사회적 소통 구조와 관행의 문제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다. ‘양극화 상업주의’ 논리와 ‘적대적 공존’의 원리에 주목해보자. 정치사회적 갈등 시 강경한 주장이 인터넷을 포함한 각종 매체의 장사에 도움이 되고, 갈등을 빚는 세력들 내에서 강경파들끼리 서로 돕는 관계가 형성된다. 의도는 순수한 것이라 해도 그런 원리에 의해 강경파의 발언이 필요 이상의 무게를 갖게 됨으로써 소통은 시궁창에 처박히고 만다. 내가 보기에 최 교수의 기고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대목도 바로 언론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지금 우리의 소통이 빠져있는 함정을 정확하게 지적한 이 진단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최 교수께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소통의 문제가 이런 맥락에서 제시될 때”라고 소극적으로 말씀하실 게 아니라, 소통에 관한 소통의 문제를 주로 ‘우리편’을 향해서 적극 제기하자는 제안이다. ‘우리편’이 달라지면 ‘상대편’도 달라진다. ‘상대편’이 먼저 달라져야 ‘우리편’도 달라진다는 주장은 일리는 있지만, 누가 더 아쉬운 입장인가 하는 걸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간 이미 그런 역할을 잘 수행해온 최 교수의 노고에 경의를 표하면서, 경향신문이 나머지 절반의 성공도 쟁취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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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코리아, 소통을 논하라 (경향, 김종목기자, 2009-06-12-17:31:52)
▲대한민국소통법…강준만 | 개마고원 
 
‘중간파’를 자처하고 나선 강준만 전북대 교수(53)가 한국사회를 지배해온 구호 ‘다이내믹 코리아’를 ‘커뮤니케이션 코리아’로 바꾸자며 ‘소통’을 들고 나왔다. 지금 정치·경제·사회 영역의 ‘대한민국 소통법’이 헌법 위의 법으로 군림하며 불통법으로 작동하는 한국 사회 현실에 대해 강 교수는 여러 텍스트를 근거로 구조적·심리학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제1장 ‘소통의 구조적 장애’에서는 <지방은 식민지다> 등에서 꾸준히 제기한 서울 중심의 ‘초강력 1극 구조’의 문제를 되짚고 있다. 극소수가 절대다수에게 퍼붓는 오락 위주의 소통 질서 즉 대중매체의 사회적 결과가 소통의 일방통행을 가져왔다고 지적한다. 정치·경제적 경로가 대중매체의 중앙집중과 그에 따른 쏠림·소용돌이 현상을 낳고 또 역으로 대중매체 경로가 정치·경제적 경로를 고착·강화시키는 악순환의 문제를 짚었다.
 
불통의 인적 문제에서 ‘꼴통’을 빼놓을 수 없다. 강 교수는 “꼴통의 행태는 전문적 용어로 표현하면 ‘전투적 근본주의’ ”라며 “꼴통의 법칙 즉 꼴통의 영도하에 분열은 촉진되고 예찬되고 있다”고 말한다. 연장선상에서 ‘사실 물신주의자’로서의 조갑제 전 월간조선 대표,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라이벌 의식이 앞서며 당대의 수평적 소통을 그르친 김영삼 전 대통령에 관한 특유의 인물론도 양념처럼 들어 있다.
 
제2장 ‘정치와 소통’에서 “우리 사회는 전반적으로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라는 문제 의식을 담았다. 연고·반감·응징으로 결정되는 유권자들 투표 행태, 정치인을 ‘출세한’ 직업으로 여기는 서열주의와 사회 현실이 소통의 장애물이다. “국회의원이 되기 위해 안달하는 이유도 소통 불능 사회에서 권력만이 유일한 소통의 무기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회 각계에서 존경받던 이들조차 금배지를 달기 위해 ‘난장판 국회’에 뛰어들고 있다는 분석이다.
 
‘개혁·진보세력의 소통 장애’를 분석한 장에서는 의식화가 고도로 이루어진 헌신파의 ‘아름다운 헌신’이 대의를 죽이는 역설로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자신의 헌신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대중과의 소통을 죽이고 있다. 소통 없는 마이웨이로 치달으면서 개혁·진보적 대의를 자기 만족·양심의 마스터베이션 제물로 전락시키고 만다.”
 
대안은 무엇인가. 강 교수는 ‘소통의 실천 전략’ 장에서 통섭·성찰적 사회학·기우뚱한 균형 등 인문사회과학적 개념을 제시하지만 구체적인 실천론은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가’라는 보론에서 다룬다.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을 소통 불능 시대의 비극으로 진단한 강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이 서거 80일 전 <사람사는 세상>에 올린 ‘정치하지 마라’가 진정한 유언이라고 말한다. 곧 ‘정치하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역설적 메시지로 해석했다.
 
2001년 출간한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에서 말한 “정치가 썩었다고 침 뱉으면서 기존 정치판 문화에 저항하는 정치인(노무현)은 ‘지도자감’이 아니라고 배척하”는 게 ‘제1사기극’이었다면, 노 전 대통령이 언급한 “거짓말·정치자금·사생활검증·이전투구의 ‘지옥 같은 터널’ ”로 전락한 정치에 대해 우리가 취하는 이중적 자세는 ‘제2의 국민사기극’이다. 노조·총학·성직자·봉사 단체의 지도자 선거는 과연 깨끗한가. “깨끗해선 정치할 수 없다”는 상식을 알면서도 방관한 채 정치판 선거에 침을 뱉고 이러쿵 저러쿵하는 게 온당한가라는 물음이다.
 
이슈·대의에 관한 판단을 정치의 부차 요소로 치부하는 과도한 인물 중심주의와 정치지도자와의 자기동일시는 불통·분열의 주요 장벽인데, 강 교수는 “소통은 자신의 정치색깔을 자제하면서 포용의 자세를 취할 때에만 가능하다” “한나라당이 저주스러워도 한나라당을 지지한 유권자까지 저주할 수 없다는 대원칙만 확인한다면 답은 먼 곳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출판사는 책의 부제에 보론 제목을 달았다. 보도자료도 ‘보론’ 위주로 만들었다. ‘노무현 마케팅’인데, 보론은 강 교수가 책의 인쇄 직전 서거 소식을 접하고 추가한 20여페이지 분량 뿐이다. 다작·다산의 학자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또 낸’ 책이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다독·다상량이 빚어내는 문제 의식은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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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그의 죽음에 대한 독해 (레디앙, 2009년 06월 13일 (토) 02:04:19 손기영 기자)
[새책] 『대한민국 소통법』…"인물중심주의 넘어서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소통불능 시대의 비극으로 진단하고, 그 처방을 담은 강준만 전북대학교 교수의 『대한민국 소통법(개마고원, 295쪽, 12,000원)』이 출간됐다. 강 교수는 고인이 서거 전 홈페이지에 남긴 “정치, 하지마라”는 발언이야말로 그의 진짜 유언이라고 말한다. 동시에 “정치하라”고 말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는 것이 그의 진정한 메시지일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어 저자는 이번 사태의 핵심은 '제2의 국민사기극'이라고 밝힌다. 그는 '국민사기극'을 “정치가 제일 썩었다고 침을 뱉으면서도 기존 정치판의 문화에 저항하는 정치인은 지도자감이 아니라고 배척하는 이중적인 한국인의 정치관”이라고 지난 2001년 저서 『노무현과 국민사기극』에서 정의한 바 있다. 그러면 ‘국민사기극’을 우리 사회에서 종식시키기 위한 방법은 있을까. 저자는 '국민사기극'의 근본 원인을 ‘정치의 과부하’로 꼽는다. 이어 정치가 제공해줄 수 있는 '줄'의 위력과 그에 따른 이권이 너무도 막강하기 때문에, 정치의 힘을 축소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정치인을 중심으로 편 가르기가 일어나는 과도한 ‘인물중심주의’를 넘어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정당이 단지 과도한 인물중심주의를 반영하는 조직에 그치고 있는 현실에서는 정당민주주의도 당분간은 답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차이와 분열을 극대화하기 보다는 모든 이들이 소통할 수 있는 최대공약수 이슈들부터 출발해 그 범위를 넓혀 나가는 것이 우리의 살 길이라는 데 수긍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해서 정치의 개념이 지금과는 달라진다면, 그때 가서는 ‘우리 모두 정치하자’고 외쳐댈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본문 중
 
마지막으로 저자는 이러한 문제들을 극복하기 위해 △중앙정부에서 기초자치단체에 이르기까지 예산과 인사 투명성 확보 △권력을 시민사회 영역으로 이전 △정치인들의 자원봉사 활동 을 ‘자율적 의무’로 △인물중심 정치의 변화 △인물중심 지지모임의 변화 등 다섯 가지 처방을 내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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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10 23:34 2009/08/10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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