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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심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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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광현. 2009.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 예술-학문-사회의 수평적 통섭을 위하여>. 문화과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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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공학-인문학 수평적 통섭 못하면 미래는 재앙 (한겨레, 이세영 기자, 2009-08-12 오후 06:21:03)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 쓴 심광현 교수
한예종서 ‘통섭사업’ 주도로 중징계 처분 요구받아
기술 위주 통섭, 인간 무력해진 ‘디스토피아’ 예고
“불통공화국…예술통해 학문간 대등한 통섭 가능” 
 
지난봄 계간 <문화과학>이 ‘지엔알(GNR·생명공학 나노 로봇) 시대의 도래와 문화변동’이란 주제를 특집으로 다뤘을 때 독자들은 당혹스러웠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여파로 서민의 삶은 벼랑에 내몰리고 용산 학살이 야기한 사회적 분노가 정치적 임계점을 향해 치닫던 상황이었으니, 유전학·나노기술·로봇공학이 가져올 미래의 변화상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현실의 긴박함을 외면한 ‘먹물들의 한담’쯤으로 여겨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편집위원들 사이에서도 너무 ‘앞선’ 주제가 아니냐는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일종의 기술결정론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고요. 하지만 눈앞의 사태에 매몰돼 사회의 심층에서 진행되는 거대한 변화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심광현 교수의 문제의식은 최근 그가 펴낸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문화과학사)란 책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도르노 미학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영상이론을 가르쳐온 그가 ‘유비쿼터스’라는 기술공학적 주제로 책을 쓴 것이 의아할 법도 하지만, 그는 4년 전 프리고진의 복잡계 과학의 사유에서 인류 문명의 돌파구를 모색한 <프랙탈>(현실문화연구)의 저자이기도 하다.
 
심 교수가 <유비쿼터스…>에서 다루는 내용은 지엔알 혁명에서 탈근대 문화정치, 학술·사회운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데, 핵심 주제를 꼽으라면 ‘예술-인문학-과학기술의 통섭’이다. 지엔알 혁명이 가속화하는 유비쿼터스 사회는 필연적으로 자연과학과 기술공학, 인문사회과학, 예술 간의 접속과 소통을 요청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지엔알로 상징되는 새로운 지식혁명이 근대화 과정에서 수백 개의 분과학문과 전공지식들로 세분화됐던 지식들을 유비쿼터스 컴퓨팅 기술을 매개로 하나의 통합적 지식으로 융합시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본다.
 
문제는 지금 논의되고 있는 지식의 통·융합이 대단히 위계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최재천 이화여대 교수 등이 주도하는 ‘통섭’ 담론이 대표적이다.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과 제자인 최재천 교수는 모든 지식의 대통합을 강조하면서 사회과학과 인문학은 물론 예술까지도 자연과학적(사회생물학적) 원리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회·심리현상도 인과관계가 있고, 이걸 찾아내면 사회도 인간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 얼마나 끔찍한 결정론입니까.”
 
심 교수는 이런 자연과학 중심의 통섭 담론에는 예술을 과학자들에 의해 언젠가 정복될 ‘처녀림’으로 간주하는 근대 과학기술 제국주의의 오만한 전제가 함축돼 있다고 본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런 수직적 통섭론이 신자유주의적 권력관계와 결합되는 상황이다. “유비쿼터스로 상징되는 기술 발전의 성과를 자본과 국가권력이 독점할 때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이라크전에서 선보인 무인공격 시스템 등에서도 드러났지만, 인간이 배제된 상태에서 기계-기계(M2M) 간 커뮤니케이션에 의해 사회 시스템이 작동하게 된다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와 같은 묵시론적 시나리오가 현실화될 수 있습니다.”
 
반면 첨단 과학기술이 민주적 사회관계와 결합된다면 새로운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이 지식과 지식 간의 수평적(비환원주의적) 통섭이다. 수평적 통섭에서는 예술의 역할이 중요한데, 그 이유를 심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평적으로 통섭하려면 과학·기술·인문학·사회과학·예술이 대등한 지위에서 접속하고 소통해야 합니다. 이걸 시작하기가 어려워요. 전문가일수록 자기 영역이 아닌 분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술의 전문성이 뭡니까. 자기도 모르는 것을 떠드는 것입니다. 다른 분야에 손 내밀고, 이질적인 것을 섞고, 실험하고, 상상력을 제공하고…. 통섭의 촉매제이자 예인선 역할로는 예술이 제격인 셈이죠.”
 
심 교수는 이처럼 예술이 매개하는 수평적 통섭을 자신이 가르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유-에이티(U-AT) 통섭교육사업’을 통해 실천하려고 했지만, 상급기관인 문화부의 반대로 좌절된 상태다. 이 과정에서 ‘장관의 사업 중단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지난 6월 문화부로부터 ‘중징계’(파면·해임·정직) 처분 요구까지 받았다. “장관이 통섭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거 같아요. 자기가 아는 예술은 기악·발레·연극·회화 등 장르적으로 전문화된 것인데, 여기에 과학기술과 인문학이 들어오니까 이상하게 생각한 거지요. 모르면 토론을 하면 되는데, 일방적으로 누르고 (인력과 예산을) 자릅니다. 이건 예술과 학문의 자율성에 대한 중대한 침해 행위입니다. 중요한 건 자신의 지시가 그런 자율성을 침해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불통공화국’으로 나아가는 대한민국의 현주소를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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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지식에 수평적 가치 부여하는 통섭이 중요, 작금의 통섭은 단기 성과 위주 기술공학에 치중" (한국, 유상호 기자, 2009/08/11 02:43:19)
'통섭' 관련 책 낸 심광현 한예종 교수
 
최근 통섭(consilience)이라는 말을 듣고 쓰는 일이 잦아졌다. 통섭은 19세기 과학사학자 윌리엄 휴얼이 '더불어 넘나들다'는 뜻으로 만든 개념어인데, 사회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학문 간 대통합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면서 21세기의 핵심 키워드로 떠올랐다. 정보처리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연구 방법의 혁신으로,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학자들의 오랜 꿈으로 남아있던 지식의 대통합이 가능한 미래로 다가왔다. 자연과학과 인문학, 그리고 예술이론의 소통과 융합은 이제 세계적으로 거스르기 힘든 대세로 인식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과는 별개로, 한국에서는 정부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갈등으로 통섭이 쟁점이 됐다. 한예종이 추진하던 'U-AT 통섭교육사업'이 정부의 반대로 좌초하면서 황지우 전 총장을 비롯한 한예종 교수 등이 경질되는 사태를 빚은 것이다. 한예종 미래준비교육단장으로 이 사업을 준비했던 심광현(52) 영상이론과 교수가 마침 통섭의 방향을 제시하는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문화과학사 발행)를 펴냈다. 정부의 중징계 처분을 기다리고 있기도 한 심 교수는 인터뷰에서 "비환원주의적이며 수평적인 통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유비쿼터스는 기술적ㆍ도구적 측면이 강한 반면 통섭은 학문 담론의 차원에서 이해된다. 둘은 어떤 연결고리를 갖는가.
"유비쿼터스는 SF영화 속에서 가능하던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센서가 부착된 안경, 옷 등의 등장으로 일상이 컴퓨터의 제어 대상이 됐다. 생체칩을 삽입해 내장의 박동 상태를 컴퓨터로 관리하는 것도 가능하다. 시간적ㆍ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던 것들이 컴퓨터를 매개로 통합되는 것이다. 학문에서도 마찬가지다. 뇌과학이 철학과 맞물리고, 사회생물학에 윤리학이 스며들고 있다. 하기 싫어도 통섭이 돼 가는 것이다."
 
- '제3공간의 출현'이라고 표현한 유비쿼터스의 사회상은 유토피아적 측면과 디스토피아적 측면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 같은데.
"제1차 정보화 혁명도 양면성을 갖고 있다. 정보화ㆍ자동화가 신자유주의와 맞물리면서 고용 축소, 금융세계화, 양극화 등을 낳았다. 유비쿼터스 혁명도 제1차 정보화 혁명과 마찬가지로 자본과 권력의 필요에 의해 설계된 것이라는 점을 간파해야 한다. 그런데 유비쿼터스 혁명은 종래의 양극화 위험에 더해 '통제'와 '인간 배제'라는 가공할 위험성까지 안고 있다. 통섭 담론은 사변적 차원만이 아니라, 기술 본위의 환원주의적 융복합 흐름이 갖고 있는 이런 측면에 대한 비판도 포괄해야 한다."
 
- 환원주의적 통섭과 비환원주의적 통섭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그리고 비환원주의적 통섭은 어떻게 가능한가.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물리적 인과 법칙에 의해 설명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다. 사회과학과 인문학뿐 아니라 예술의 원리도 종국엔 자연과학으로 통합될 것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런 통섭의 관점은 유비쿼터스의 디스토피아를 막아내기는커녕 오히려 증폭시킬 것이다. 반대로 비환원주의적 통섭은 모든 지식과 경험체계에 수평적 가치를 부여한다. '기술과학에 의한 사회의 구성'뿐 아니라 '사회에 의한 기술과학의 재구성'도 함께 추구하는 것이다. 올바른 통섭의 방향은, 비트겐슈타인의 설명 구조를 빌리자면, 부분적인 유사성이 중첩된 '가족적 유사성'을 추구하는 것이다. 마치 각기 고유한 색채와 모양을 지닌 다섯 원이 부분적으로 겹쳐 하나를 이루는 오륜기와 같은 구조일 것이다."
 
- 통섭의 '엔진' 역할을 철학이나 자연과학이 아니라 예술에서 찾는 이유는.
"칸트의 철학체계에 빗대 설명하자면 제1비판서(순수이성비판)의 주제는 자연과학, 제2비판서(실천이성비판)의 주제는 사회과학으로 분화ㆍ발전했다. 그 둘의 직접적인 접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제3비판서(판단력비판)의 주제인 아름다움은 둘을 포괄할 가능성이 크다. 예술은 경계를 넘어서는 자유, 이질적인 것들을 접속해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는 상상력을 생명으로 삼기 때문이다."
 
- 통섭의 관점에서 현 정부의 교육정책, 학문정책을 평가하자면.
"지금 진행 중인 통섭은 철저히 기술공학 중심의 환원주의적 통섭이다. 더구나 단기적으로 성과를 낼 만한 것에만 치중돼 있다. 카이스트의 통섭 대학원은 놔두면서 한예종의 통섭 교육을 없애는 것이 단적인 예다.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이 균형적으로 융합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낡은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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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의 도래'를 바라만 볼 것인가" (프레시안, 강이현 기자, 2009-08-30 오후 2:51:05)
[화제의 책]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
 
사실 우리는 이미 어느새 유비쿼터스 시대 속에 살고 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타며 교통카드를 찍고, 무선인터넷을 활용하고, 휴대전화와 노트북을 통해 동영상과 TV를 즐기며, 네비게이션에 의존해 길을 찾는 일은 이제 '신기한 무엇'이 아니다. 정부는 지난해 '유비쿼터스도시의건설등에관한법률'을 제정하면서, 이런 흐름을 더욱 촉진하고 나섰다. 경기도 파주 동탄, 인천 송도 등 신도시 사업에서는 유비쿼터스 도시를 추진 중이다.
 
심광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최근 펴낸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문화과학사 펴냄)에서 바로 이런 '환상'과 '욕망'을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다가오는 시대에 대처하는 자세에 따라 유비쿼터스는 '소외와 절망의 공간'이 될 수도, '참여와 희망의 공간'이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역시 SF 소설에 흔히 등장하는 디스토피아가 우리에게 현실이 되어 나타날 수 있다는 경고다.
 
"최근에는 정보통신기술의 급속한 발달에 따라 도시의 삶은 또 다시 대대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그동안 물리적 공간(제1의 공간)과 구별되는 사이버공간(제2의 공간)을 만드는데 집중했던 디지털 기술이 이 두 공간을 새롭게 연결하는 '제2의 정보화' 단계로 발전하면서, 소위 '유비쿼터스' 공간이라는 제3의 공간을 출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심광현 교수는 유비쿼터스 도시를 발달 단계 중 '제3의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도시는 그 기원에서부터 지금까지 사람들의 소통의 중심지 역할을 하면서 역사적으로 발달해왔다"며 "이런 측면에서 교통과 통신은 도시의 규모와 범위, 생산성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철도와 자동차의 보급이 근대도시의 물리적 형태 변화를 야기했다면 전기와 전화는 도시의 외관을 바꾸고, 도시 내부의 소통을 확대해갔다"며 앞서 일어난 도시의 변화를 설명한 뒤 유비쿼터스를 두고 '현재 도시가 겪고 있는 거대한 변화'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신도시 개발 등에서 볼 수 있듯이 2009년 한국의 유비쿼터스는 국가 권력과 자본이 주도하는 전형적인 '톱-다운'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대중들이 유비쿼터스를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몇몇 지방자치단체나 기업에서 세운 '유비쿼터스 체험관' 정도다. 학계에서도 유비쿼터스는 도시개발과 공학 정도에서나 연구될 뿐,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의 비평 대상은 거의 되지 못하고 있다.
 
심 교수는 "톱-다운 방식의 청사진과 다른 하나는 학문간 융복합을 통해 지능화된 공간운동 기술시스템을 구축해가는 '바텀-업' 방식의 흐름"이라며 "그러나 중간 방식의 흐름이 부재한 상황에서 바텀-업의 연구는 톱-다운의 시장적 전략과 계획, 즉 축적전략에 의해 일방적으로 끌려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그는 "이는 수십 년간 작동해온 선진국의 거대과학기술 체제의 역사를 통해 충분히 예측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심광현 교수는 "대개는 이런 변화를 방송, 통신융합 관련 법제와 기구 재편, 언론미디어정책의 변화 정도로 인지하고 있고, 관련 이해당사자들 사이에서만 논란이 가속화되고 있다"며 "하지만 유비쿼터스 기술의 상용화가 미치는 변화는 훨씬 심대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미 우리가 체험한 유비쿼터스의 영향 중 하나로 지난해 촛불 집회의 경험을 예로 들었다. 당시 출현한 진보신당의 '칼라TV'를 비롯한 각종 인터넷 생중계 방송은 촛불 집회를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드는 거대한 흐름으로 만들었다. 컴퓨터를 통해 생중계를 지켜보던 누리꾼들은 경찰에 진압되는 장면을 보다 뛰쳐나와 '시위대'에 합류했으며, 다시 휴대폰이나 촬영 기기를 통해 현장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면서 여론을 확산시켜 나갔다.
 
심광현 교수는 "촛불 집회는 누구도 예기치 못한 방식으로 유비쿼터스 공간의 문화, 정치적 잠재력을 적극 활용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 30년 동안 정보기술의 발전을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금융 세계화를 촉진하고 새로운 산업의 창출과 노동의 유연화 및 구조 조정 등에 적극적으로 활용해 톡톡히 재미를 보았던 자본과 국가는 새로운 유비쿼터스 공간을 자본 축적과 노동 착취를 위한 정치경제적 선택과 집중, 감시와 추적의 메커니즘으로 구축함으로서 새로운 통제와 질서의 공간으로 재전유하려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15년 유비쿼터스 도시의 전면화를 거쳐 2025년 로봇군대의 가동으로, 그리고 2035~40년 인간을 능가하는 사이보그의 출현으로 나아가도록 설계된 자본의 새로운 전략적 로드맵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은 진행 중인 새로운 과학기술혁명의 '비판적 전회'를 포함하는 과학 기술-사회과학-인문학-예술 간의 새로운 통섭 이외에 다른 곳에서는 찾기 어려울 것이다."
 
경고에 이어 심 교수는 '디스토피아'를 피하기 위한 대안을 제시했다. 그것은 학문간 융복합을 의미하는 '통섭'이다. 최근 이른바 '한예종 사태'에서 문화체육관광부의 집중적인 '타격 대상'이 된 통섭 교육 사업의 단장을 맡기도 했던 심광현 교수는 예술과 학문, 사회를 수평적으로 이어주는 통섭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그것이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를 대비하는 능동적인 진보의 자세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새 술을 담기 위해서는 낡은 부대를 수술하고 바꾸는 일부터 시작해야 하듯이 새로운 사회적 진보를 위해서는 그간의 연구와 실천의 방법 자체를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일부터 착수해야 한다"며 "분과학문 체제라는 낡은 부대를 해체해 학문적 제도의 안과 밖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지식과 경험의 수평적 통섭이라는 새 부대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 심 교수는 "그것은 오랫동안 단절돼 있던 이론과 실천, 대학과 사회, 지식인과 대중,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에 선순환적인 연결 구조를 만들기 위한 필수적 전제"라고 설명했다.
 
"21세기의 과학기술혁명과 더불어 다가오는 유비쿼터스 시대. 이 열린 가능성을 오직 인구의 10%에게만 허용하며 자연을 유린하는 반민주적 반생태적 통제사회로 나아가려는 흐름을 거슬러 자연과 인간의 공진화를 촉진하는 민주적 생태적 문화사회로 나아가는 동력으로 어떻게 삼을 것인가의 여부는 오직 사방으로 두 팔을 활짝 벌려 손을 잡고 함께 도약해 나가는 우리의 능동적 노력 여하에 달려 있다."
 
책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 너무 난해하다는 점이다. 물론 이 책이 '이론서'로 분류돼 있긴 하지만 유비쿼터스 시대에 생소한 독자들이 흥미를 가지고 이 테마에 접근해 볼 것을 권하기엔 책의 내용이 너무 낯설다. 유비쿼터스를 대할 때 '매혹적인 환상'은 가깝게, '경계의 필요성'은 멀게 느끼는 대다수를 위한 배려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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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어냄과 어울림 (프레시안, 이철승 중국 형양사범대 객좌교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2010-01-23 오전 9:20:40)
[철학자의 서재] 심광현의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생산과 문화정치>
 
비록 (신)자유주의가 사회계약설에 입각하여 최소도덕률이라고 할 수 있는 법의 제정을 통해 개인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말할지라도, 그 법은 개인의 더 큰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최대도덕률이라고 할 수 있는 윤리 의식을 통한 평등한 공동체 사회 건설의 측면에 미흡한 편이다. 특히 최근에는 첨단 과학기술의 발전에 막대한 자본력이 투입됨으로 인해 고급 정보의 독점 현상인 정보 불평등 문제와 지적 재산권의 강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은 이기심을 근거로 하는 사적 소유 문제가 오늘날도 여전히 사회적 갈등 문제를 발생시키는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공자에 의하면 건강한 공동체 사회를 이루기 위해 배타적 경쟁이나 획일화의 방법보다 서로의 특성을 인정함과 아울러 잘 발휘하여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는 어울림의 태도가 중요하다. 전통 사회에 형성된 이러한 어울림 사상은 다원적인 사유가 확산되고 있는 오늘날 심광현의 <유비쿼터스 시대의 지식 생산과 문화 정치>를 통해 새롭게 복원되고 있다. 저자에 의하면 21세기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편재하는 인터넷과 방송과 통신망 등에 접속할 수 있는 유비쿼터스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유전공학(G)과 나노(N)와 로봇공학(R) 등이 발달하여, 인간과 인간의 관계(P2P)에서 인간과 기계의 관계(P2M)를 거쳐 기계와 기계의 관계(M2M)가 형성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시기는 근대에 형성된 분과 학문들의 따로 따로 연구가 힘을 잃는다. 각 분과 학문의 연구자들이 자기 분야 연구에만 머물러 있거나, 자기 분야 중심주의의 시각으로 다른 분야 학문을 포섭하고자 하는 태도는 닫힌 사고의 반영이다. 그러한 연구 태도는 문자 중심의 선형적인 역사의식을 반영하는 통시적 자세이기에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다양한 모습을 실제적으로 고찰하는 면에 제한적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알튀세르와 맥루언의 견해처럼 사유의 총체성으로서 비선형적인 역사의식과 청각과 촉각을 중심으로 하는 복합감각의 결합에 의한 공시적 사고의 지식사회가 필요하다.
 
이 시대에는 예술, 인문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기술공학 등이 융합되거나 복합되어야 한다. 저자에 의하면 현대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분야는 중심을 가정하는 환원주의적인 수직적 통섭(統攝)이 아니라, 차이들에서 시작하여 차이들로 되돌아옴과 아울러 서로 끌어 주며 함께 도약하는 비환원주의적인 수평적 통섭(通攝)이 필요하다.
 
특히 저자는 예술과 인문학과 과학기술 사이에 통섭이 필요함을 지적하면서 들뢰즈가 지적한 감각(예술)과 개념(철학)과 기능(과학) 등의 의미를 차용하여, "개념이 통속적 견해로 함몰되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 창조적 감각의 견인이 필요하며, 반대로 감각이 카오스로 함몰되는 것을 막아주기 위해서는 창조적 개념의 견인이 필요"하고, "예술과 철학은 감각과 개념의 창조를 통해 카오스/무한을 향해 가속하며, 반대로 과학은 기능의 창조를 통해 코스모스로 감속한다"고 지적한다. 곧 처음부터 강한 결합의 형태인 융합이나 통합을 이루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학제 간 교류와 복합 등의 약한 결합을 포함하는 다층적인 통섭이 중요하다.
 
이 시대에는 두뇌와 몸과 미디어 사회 사이의 관계가 더욱 복잡하여 적응하기가 쉽지 않을지라도, 창작자의 감각과 두뇌와 몸과 행위와 반성적 종합을 하는 회로들의 순환적 연결망을 구성하는 역동적인 자기조직화가 필요하다. 이것은 직관과 상상력과 시각적 패턴 인식 및 패턴 구성 등의 과학적 시각화가 과학적 창조성의 증진에 필요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첨단 과학기술 혁명을 등에 입은 지식기반 사회가 우리에게 항상 밝은 미소만 던져주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회는 커뮤니케이션과 지식 생산의 차원에서 문명의 발전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생산 관계의 내용에 따라 인간을 소외시킬 수도 있다. 특히 지식과 정보를 소유한 소수는 그들의 의지에 따라 다수의 민중을 소외시킬 수도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가 19세기 유럽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당시의 과학기술 수준을 분석하면서 지적한 문제의식과 맥을 같이 한다. 비록 토플러가 <부의 미래>에서 무형 자산인 지식이 무한히 공급됨으로 인해 공급이 유한하다는 자본주의의 전제와 충돌할 수 있음을 지적하며 자본주의의 위기를 말했을지라도, 지식과 정보의 독점과 통제로 인해 발생되는 소외에 대한 염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과학기술 혁명을 토대로 하는 문명의 방향에 대해 인문학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람직한 소망의 현실화는 자연의 변화와 같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의해 가능하다. 곧 과학기술의 발전에 의해 인공 지능이 자연 지능을 능가할 수 있는 시대의 도래가 예측되는 상황에서 소외 문제를 극복하려면 "과학기술적인 집단지성을 자본의 종속으로부터 해방하여 그 힘을 민주적으로 사용하고 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정치적 시스템의 구축"이 필요하다.
 
저자에 의하면 통제사회와 문화사회의 두 얼굴을 함축하고 있는 유비쿼터스 사회에서 기술결정론 아니면 기술거부라는 양자택일의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윌리엄스가 말한 표의체계로서의 문화 개념과 맥루언이 말한 감각의 확장으로서 미디어 개념의 결합이 필요하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적 생산 관계를 의미하는 통시적 표의 체계의 지양과 대안적 생산 관계를 의미하는 공시적 표의 체계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결국 유비쿼터스 시대로 불리는 21세기에 건강한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바람직한 욕망의 방향은 인류의 오랜 역사가 증명하듯, 이기심을 반영하는 사적 소유의 확대를 위한 배타적인 경쟁의 추구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따뜻하게 배려함과 아울러 즐겁게 어울리는 평화로운 관계 형성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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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4 04:30 2010/01/2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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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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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에서 일어난 재난을 어떻게 봐야할까. 아니 신뢰할 만한 구호단체에 기부하는 것 말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종교단체들이 구호선교를 떠난다고 하고, 돈 있는 이들이 엄청난 기부를 한다는 소식에 짜증이 난다. 왜 힘든 이들에게는 어려운 일들이 겹쳐서 일어나는 것일까. 이를 하나님의 천벌이라고 떠드는 넘들에게는 왜 아무런 벌을 내리지 않는 것인지...
 
아이티에 있는 이들은 국가의 존재 자체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다. 그렇다고 시장은 작동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다. 이번 아이티의 재난은 '태초에 시장이 있었다'고 한 하이에크와 그의 똘만이들의 주장이 허구임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외국군대가 국가를 대체하고, 민중들은 정부 대신 외국의 구호단체를 더 신뢰하는 상황. 이런 상황을 사회과학적으로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걸까.
 
아이티의 재난을 보면서 작년에 읽었던 아리스티드의 책을 떠올렸다. 아리스티드 자체에 대해서는 여전히 그 평가가 갈리고 있지만, 적어도 그 책에 쓰인 내용만은 진정성 있게 받아들여도 좋을 성 싶다. 그 책을 읽고 아이티의 민중들을 믿었는데, 각종 언론매체를 통해 전해진 아이티의 현실은 여기에서 비켜난다. 『가난한 휴머니즘』도 어느 정도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가능하다는 건가. 아니, 그 만큼 이번 재난이 엄청나다는 반증일지도 모르겠다.
 
답답하기만 하다. 이제는 아이티 관련기사를 보기도 두렵고... 빨리 수습이 되었으면....
  

“정부 어디갔나” 성난 아이티… 약탈극·맨손 구조에 분노 (경향, 구정은 기자, 2010-01-15 18:10:09)
ㆍ시신으로 길 막고 항의
 
“전 대통령 돌아오라”… 정권마저 흔들 (경향, 김향미 기자, 2010-01-15 18:00:25)
ㆍ사흘만에 나타난 대통령조차 나몰라라
ㆍ미, 구호 앞세워 본격 개입… 정국 변수

 
아이티 정부는 피해 상황 파악은 물론 체계적인 구호작업에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구호작업을 진두지휘해야 할 르네 프레발 아이티 대통령은 지진 발생 이틀째까지 행방이 묘연해 논란이 됐다. 14일 포르토프랭스 국제공항에 레오넬 페르난데스 도미니카공화국 대통령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프레발 대통령은 “이미 집단 매장지에 7000명의 시신을 묻었다”고 말했을 뿐 구호활동 계획 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지진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구조 활동을 이끌어야 할 정부 관리들 역시 지진 피해 현장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2004년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추방된 장 베르트랑-아리스티드 전 대통령(56)의 조속 귀환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아이티인들은 여전히 아리스티드의 귀환을 촉구하고 있다고 아이티 언론들을 인용해 AFP통신이 전했다. 전문가들도 아리스티드는 여전히 빈민층에게 희망의 상징으로 인식되고 있어 그의 귀환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아리스티드는 15일 자신이 고국의 재건을 돕기 위해 귀국할 준비가 됐다고 밝혔다. 그는 “조국의 재건을 위해 오늘 떠날 준비를 하고 있으며, 내일쯤 아이티인들과 함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어딨나”…성난 민심 폭동 직전 (한겨레, 포르토프랭스/권태호 특파원, 2010-01-19 오전 08:20:12)
[아이티 지진참사] 권태호 특파원, 포르토프랭스를 가다
구호품 실은 차량마다 주민들 몰려 통제불능
대통령궁 앞서 총격도…아이티 비상사태 선포
 
 
이날 봉사회는 직접 나눠주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이 물품을 아동병원과 채리티 고아원에 나눠줬다. 별도로 병원에는 링거 1만3000병 등 3만달러어치의 의약품을 전달했다. 구호단체들이 가급적 직접 전달하려는 이유는 아이티 정부가 무정부상태여서 ‘당국자’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도대체 어디에 있나.” 지난주 이후 외신과 인터뷰를 하거나 국제사회에 호소를 하고 있는 르네 프레발 아이티 대통령은 주말에도 아이티를 찾은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과 반기문 유엔사무총장 등을 직접 만났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는 한번도 재난현장을 직접 방문하거나, 국민들을 상대로 성명조차 내지 않았다고 사람들은 전했다.
 
1월말까지 정부가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했지만, 포르토프랭스 중심부에선 물과 음식 등 생필품 부족에 지친 아이티인들이 폭동 조짐까지 보이고 있다. 대통령궁 앞에서는 헬기로 구호물자를 나눠주다 물품을 서로 차지하려는 이들이 싸우면서 총기와 칼이 난무하는 준폭동 상태까지 일어났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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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를 읽고 2009/08/14 21:47:16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이부두 옮김. 2007. 『가난한 휴머니즘 - 존엄한 가난에 부치는 아홉 통의 편지』. 이후. Jean-Bertrand Aristide. 2001. Eyes of Heart: Seeking a Path for the Poor in the Age of Globalization. Common Courage Press c/o James Bier, Tucson.
   
YES24의 책소개
젊은 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했던 가톨릭 신부였던 아리스티드는 아이티 사람들을 짓누르던 뒤발리에 부자의 30년 독재를 끝내면서 아이티의 대통령이 되었다. 네 번이나 대통령이 되었으나 네 번 모두 임기를 마치지 못한 불운한 정치가였다. 하지만 아이티 국민들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가장 사랑받는 지도자다. 세계 어떤 나라보다 문맹률이 높은 아이티에서 그이가 날마다 받는 편지는 엄청나다. 아리스티드는 사람들의 편지 속에 담겨 있는 열망과 소망에 대한 대답을 『가난한 휴머니즘』에 아홉 통의 편지로 갈무리했다.
 
아리스티드는 이 책이 “쓸 줄 모르는 아이티의 형제자매들 대신 쓴 편지”라고 말하며, 전 세계 사람들이 이 짤막한 아홉 통의 글을 마음으로 읽어 줄 것을 부탁한다. 이 책은 점점 암울한 빈곤의 늪으로 빠져드는 가난한 나라들과 엄청난 부를 쌓으면서 뒤돌아볼 줄 모르는 부유한 나라들의 현실을 설명하려 한다. 단순하면서도 쉽고 직설적인 화법으로, 누구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간결하면서도 선언적으로, 암울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다음으로 나아가자고 한다. 아리스티드의 설득력 있는 글은 「퍼블리셔스 위클리」의 표현 그대로, ‘가장 차가운 심장도 녹일 정도로 감동적’이다.
 
어떻게 이 책을 읽게 되었을까. 어디선가 추천하는 글을 읽고 도서관에서 빌려본 것이다. 읽기 전에는 전직 아이티의 대통령이었던 가톨릭 신부의 책을 읽는다는 게 별로였다. 하지만 143쪽밖에 되지 않는 짧은 분량의 글이 나를 사로잡았고, 읽은 후부터는 쉽고 짧게 세계화의 문제에 대해 설명하면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차분하게 얘기하는 아리스티드의 말에 공감을 하게 되었다.
 
당연히 이를 통해 전해지는 지식 같은 것은 없다. 그러나 감동은 있다. 물론 이 책이 얘기하는 ‘존엄한 가난’, ‘자발적 가난’에 대해서는 전부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단지 가난을 선택할 수 있는 배부른 자의 얘기는 아님을 알 수 있다. 어찌 보면 상식적이고 평범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뜬구름 잡는 것으로 여겨진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때와 지금의 아이티를 보면 세계화의 배후에 미국이 있음을 알 수 있으며, 이쯤되면 반미ㆍ반제국주의 슬로건이 당연한 것으로 다가온다. 분명 아이티와 한국의 현실은 다르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서 앞으로의 삶에 대해 반추할 수 있지 않을까. 아래에 인상 깊었던 글귀를 옮겨오기는 하지만, 가능하면 책 전체를 읽어보길 권하고 싶다.

 

책머리에 : 가난한 벗들에게 보내는 희망의 편지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
 
저렇게 적게 가지고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곳에서 도대체 어떻게 희망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아무런 길이 없는 곳에서 그들은 어떻게 길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  아무런 길도 없는 곳에서 이 가난한 민중들이 만들어 내고 있는 이 길이 바로 ‘제3의 길’입니다. (14쪽)
 
첫 번째 편지 - 부자는 더 부유하게,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하게
 
경제적 위기의 이면에는 인간의 위기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 사이에는 헤아릴 수 없는 인간적 고통이 있고, 권력자나 정책 입안자 같은 사람들에게는 시장과 ‘보이지 않는 손’을 하나의 종교로 만들어 버린 영혼의 결핍이 있습니다. 상상력의 위기가 너무나 깊은 탓에 이윤만이 유일한 가치의 척도가 되어 버렸고, 경제적 성장만이 인류의 진보를 측정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는 아직 먹는다는 것이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라는 사회적 합의에조차 도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윤리적인 위기입니다. 믿음의 위기입니다. (20쪽)
 
두 번째 편지 - 누가 크리올 돼지를 죽였는가?
 
우리의 두려움은 지구적 시장이 예전의 우리 시장을 모조리 없애고야 말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이것이 더 효율적이다.” “당신네들의 시장, 당신들의 삶의 방식은 효율적이지 않다.” 경제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묻습니다. “모든 거래를 숫자로 환원시킬 때, 당신들이 인간적인 것을 모두 사라지게 했을 때, 과연 무엇이 남겠는가?” (26-27쪽)
 
가난한 나라들에게 자유무역은 그렇게 자유롭지도, 그렇게 공정하지도 않습니다. 미국은 국제 금융 기구의 강력한 비호 아래 쌀 농업에 대한 정부 보조금을 증가할 수 있었으나 아이티는 자국 농업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안 그래도 배고프던 나라가 더욱 허기지게 된 것입니다. (28-29쪽)
 
1995년 미국 ‘원조처’의 처장은 의회에서, “모든 개발도상국에 원조하는 달러의 84%는 다시 미국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데 쓰임으로써 미국 경제에 되돌아온다”고 증언하여 원조국을 변호할 수 있었습니다. … 1995년 부채가 극심한 저소득 국가들은 빌린 돈보다 많은 10억 달러 이상을 IMF에 원금과 이자로 지불했습니다.
이익이 늘어나고 있다고, 경제가 성장하고 있다고, 수백만 달러의 원조금을 너희 나라에 쏟아 붓고 있다고 엄지손가락(선진국)이 새끼손가락(후진국)에게 말하는 내내, 새끼손가락은 날마다 더 깊은 비참함 속으로 가라앉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구의 이익이란 말입니까? 도대체 누구의 경제가 성장한단 말입니까? 과연 누구를 위한 원조란 말입니까? 지구적 자본주의의 논리는 새끼손가락에게는 논리적이지 않습니다. (30쪽)

1980년대 아이티 토종 돼지가 전멸했던 역사는 지구화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많은 농민들에게는 크리올 돼지의 전멸이 그들이 겪은 최초의 지구화였습니다. 오늘날 아이티 농민들은 ‘경제개혁’이나 민영화가 그들을 이롭게 하리라는 얘기를 들을 때면 이해할 만하기는 하지만 아주 조심스럽다는 반응을 보입니다. (31-33쪽)
 
세 번째 편지 - 나는 주스가 더 좋아요
 
아이티 사람들의 풍요로움을 보기 위해서는 문화적 요인을 고찰해야만 합니다. 풍부한 유머, 온화한 성격, 곧잘 터져 나오는 웃음, 품위, 연대감 따위들 말입니다. … 대부분의 아이티 사람들은 방대한 비공식적 경제권에서 살아가고 있으며, 아직도 도시 노동인구의 70%가 그런 곳에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미소 짓고 있으며, 웃음을 잃지 않습니다. 아이티에서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부자입니다. 아이티에는 영혼의 부유함이 있고, 그곳에서 제3의 길이라는 에너지가 발원합니다. (44-45쪽)
 
우리가 사람들을 결집시키려면 소요를 일으켰다고, 폭력을 조장했다고, 시위를 벌였다고 고발당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감수해야 할 위험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우리들이 분노와 좌절, 자포자기를 폭력으로 분출하는 것보다 평화를 위해 집단적으로 결집하도록 해 주십시오. 체념하면서 죽는 방법과 폭력적 폭발을 통해 죽는 방법, 이 두 가지 죽음 사이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집단적 결집이 바로 제3의 길입니다. 이것은 인간 에너지의 어쩔 수 없는 집중입니다. 우리에게 돈은 충분하지 않지만, 사람만은 충분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결집시킬 수 있는 풍부한 경험과 지식, 기술과 에너지, 그리고 힘이 존재합니다. 바로 이런 창조성에서 우리는 배울 수 있습니다. (49-50쪽)
 
네 번째 편지 - "기브 미 초콜릿"
 
어느 날은 두 미국인이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미국인은 아이들에게 간단한 구문인 “기브 미 워터”를 반복하게 했습니다. 잘 따라 하는 아이들에게는 초콜릿을 주었습니다. 베르토니를 시키자, 그 아이는 “기브 미 초콜릿”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왜 너는 ‘기브 및 워터’라고 하지 않니?” 하고 미국인들이 묻자 베르토니는, “누가 내가 목마르다고 하던가요?”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58쪽)
 
다섯 번째 편지 - 뱃속 평화와 머릿속 평화
 
열세 살 먹은 세 명의 소녀가 쓴 민주주의에 관한 논평을 보면, “민주주의란 음식과 학교, 보건을 누구나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라 정의해 놓았습니다. 아이티 어린이들에게 민주주의란, 사람들이 먹고살 수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인간의 필요와 권리를 우리들 노력의 중심에 놓도록 요구합니다. 이것은 사람에 투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에 투자한다는 것은 먼저 음식과 깨끗한 물, 보건에 투자한다는 뜻입니다. 이것들은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들입니다. 어떤 실질적 민주주의도 이 모든 것을 보장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오늘날 급속히 진행되는 경제 세계화는 민주주의의 위험을 빠르게 앞지르고 있습니다. 이론은 좋지만 당면한 세계적 경제 관계에는 부적절한 민주주의가 부유한 나라에서나 가난한 나라에서나 서로 갚은 것이라면, 우리 민주주의의 개념과 실제는 크게 도약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민주화해야만 합니다.
민주주의를 사 년 혹은 오 년마다 치르는 선거와 혼동하지 맙시다. 선거란 우리 체계의 건강을 측정해 보는 하나의 시험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학교는 날마다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정치의 모든 수준에 대한 국민들의 일상적인 참여만이 민주주의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고 국가와 사회를 자신들이 원하는 형태대로 만들 수 있는 의미 있는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여할 수 있습니다. (69-71쪽)
 
민주주의를 민주화하는 방법은 각 나라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균형과 견제, 이 둘 모두를 얻고자 하는 각 공동체는 평화를 유지하면서 선출된 지도자의 잠재적 배신으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해야 합니다.
피통치자들은 통치자들과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야만 합니다. 국민을 위해 어떤 결정을 내린다고 할 때, 그러나 정작 그 과정에 국민은 배제된다면, 그 결정은 종종 국민의 이익에 맞서기 마련입니다. (72쪽)
 
“뱃속에 평화가 없다면, 머릿속에도 평화는 없다.” 아이티 같은 나라의 경우, 말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배고픈 사람에게 음식만 주고 그들을 말하지 못하게 놓아둔다면, 그것은 위선적인 일입니다. 같은 이유로 그들에게 단지 말만 들려준다면, 그것은 선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경제적 참여가 없는 정치적 참여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73쪽)
 
여성, 어린이,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역사의 객체가 아니라 역사의 주체가 되어야만 합니다. 반드시 의사결정 테이블에 앉아야만 하고 권력의 전당을 가득 채워야만 합니다. 그들이 뽑은 지도자와 이야기할 수 있고 해명을 촉구할 수 있는 라디오와 전파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참여가 민주주의를 민주화할 것이고, 민주주의라는 말을 원래 그 충만한 의미로 되돌릴 것입니다. (77쪽)
 
여섯 번째 편지 - 우리는 존엄한 가난을 원한다
 
경제적으로 힘 있는 사람들은 땅과 나무와 흙, 땅에서 수세대에 걸쳐 살아온 사람들을 보호하지 않습니다. 원조 프로그램이 우리의 자연 환경을, 땅에 의존해 살아온 사람들을 도울 것이라 기대할 수 있나요? 1달러당 84센트가 원조를 제공한 나라에 다시 돌아간다면, 이 나라의 농민과 물을 위해 쓸 돈은 도대체 몇 푼이 남는 셈입니까? 물과 흙을 붙잡아 둘 나무에 쓸 돈은 또 몇 푼입니까? (91-92쪽)
 
아이티 정부가 국제기구의 지시를 계속 따른다면 우리는 전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프로그램에 따라 그저 여기에서 저기로 맴돌 뿐, 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반면 민중들에게 전략을 구하는 시민사회 사이에서 아이티의 조직들을 본다는 것은 한밤중에 촛불을 만나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절망의 암흑에서 만난 희망! 우리는 대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대안이 우리를 부자로 만들어 주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우리를 굶주림에서 꺼내어 '존엄한 가난'으로 이끌 것이라 봅니다.
이것은 자존을 위한, 생존은 위한 전략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이 한 번도 자신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거시 경제 현실에 맞서 항상 취해 왔던 전략입니다.
신자유주의적 전략은 민간 분야가 공공의 역할을 대신하게 하기 위해 국가를 허약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협동조합을 통해 공공 서비스에서 나오는 어느 정도의 이익을 보전할 수도 있습니다. 인적 자원을 국가적으로 운용하지 않는다면 ‘경제의 힘’과 ‘사람의 힘’ 사이의 균형을 결코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이 나라 아이티에서 ‘사람의 힘’이란 곧 거대한 빈민층을 말합니다. (92-93쪽)
 
1991년의 쿠테타는 1%의 특권층이 빈민층의 국가적 운용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를 잘 보여 주었습니다. 그 1퍼센트의 사람들은 테이블 아래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두려워합니다. 테이블 위에 올라서 있는 그들을 보게 될까 두려워합니다. 시테솔레이유(아이티 빈민구역)에 사는 그들을 두려워하며,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비참함을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될까봐 두려워합니다. 농민들을 두려워하며, 그들이 더 이상 변두리 아웃사이더인 ‘무앙 앙데요’가 되기를 거부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지금까지 글을 모르던 사람들이 읽고 쓰는 법을 배우게 될까 봐 두려워합니다. 크리올어를 쓰던 사람들이 프랑스어를 배우게 되어 더 이상 열등감을 갖게 될 이유가 사라질까 봐 두려워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대통령 관저에 발을 들여 놓을까봐, 거리의 아이들이 수영장에서 헤엄치고 놀까봐 두려워합니다. 하지만 그 1%의 사람들은 저를 두려워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 말이 가난한 사람들의 눈을 뜨게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합니다. (94쪽)
 
일곱 번째 편지 - 나는 소망한다, 우리 영혼에 한 줌의 소금을!
 
젊은이들이 나이 든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이 바로 제3의 길입니다. 대학생, 아니 고등학생만 돼도, 또 그들이 가난한 학생들이라 해도 이 나라 아이티에서 그들은 이미 특권계층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받는 교육은 교묘하면서도 교묘하지 않게 그들 스스로를 문맹자들이나 그들 부모와 분리시키게 만듭니다. 이 문맹퇴치 프로그램의 체험은 그 자체로 이러한 ‘분리’를 넘어서도록 도와줍니다. (103쪽)
 
“지식은 상품이 아니다.” 지식은 사고파는 것이 아니라 공유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교육적 체험을 제공할 수 있는 의사소통 수단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여러 사명 가운데 아주 핵심적인 사항인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107쪽)
 
여덟 번째 편지 - 배고픈 영혼을 치유하는 길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일련의 싸움들은 바로 초월적인 존재와 접속할 필요가 있습니다. 뭐라 부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이미 ‘그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맞서 싸우기 위해 우리는 단단한 바위 위에 올라가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 기계는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 자본과 언어와 논리의 병기고가 뿜어내는 위세는 멈춰 세울 수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가 신념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다면 그 기계에 압도당하고 말지도 모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면 이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신념이 없었다면 그들은 살아남지 못했을 겁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우리에게 위대한 힘을 가져다줍니다. (114-115쪽)
 
저에게는 아이티 민중들의 채워지지 않는 기대를 마주하는 것이 새로운 도전입니다. 먹을 것과 일자리를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나라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더구나 자신이 그것을 짧은 시간에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무거운 짐을 지는 것과 같습니다. … 그런 상황에서는 오직 진리만이 그들의 신념을 먹여 살릴 것입니다. (118쪽)
 
우리는 방문객들의 연대를 환영하며, 그 연대에서 힘을 얻습니다. 그들이 다른 외국인들과 달리 아이티를 바로 본다는 데서 용기를 얻습니다. 방문객들은 비참한 현실과 열악한 도로, 벌거벗은 숲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 나라 민중의 힘과 존엄, 이 땅의 아름다움, 그리고 풍부한 문화까지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124-125쪽)
 
아홉 번째 편지 - 당신에게 보내는 아이티의 특별한 초대장
 
“더 인간답고, 더 안정적이고, 더 정의로운 세계를 창조할 시간이 왔다. 모든 곳에서 빈곤을 없애는 것은 인류연대의 참여나 도덕적 책임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이것은 실제로도 가능하다. 빈곤을 없애는 데 드는 비용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크지 않다. 세계 경제 전체 수입의 1퍼센트 정도면 충분하다. 많다고 해도 최빈국들을 제외한 나라들의 수입의 2, 3퍼센트를 넘지 않는다.”
빈곤을 없애는 일은 그렇게 가능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거기에는 우리가 감수해야만 할 위험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위험을 떠안아야만 합니다. 위험을 떠안기 위해서는 신념이 필요합니다. 미지의 세계에 이르기 위해 지금 보이는 것들을 가로질러 갈 수 없다면, 당신의 회의, 비관주의와 패배주의에 봉착하고 말 것입니다. 신념은 당신이 믿음을 가지고 위험을 떠안을 수 있도록 당신을 무장시켜 줄 것입니다.
당신께 우리가 바라는 점이 있다면 바로 지금도 우리는 아이티의 새로운 도전을 위해 땀 흘려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념 덕에 도전이 이루어지는 그날이 올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 신념, 이 확신이야말로 우리가 전 세계에 드릴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수출품이 아닐까 합니다. 이 신념을 나눠 가지도록 당신께도 초대장을 보냅니다. 저와 당신은 함께, 같은 손의 손가락처럼 이 새로운 세기에 더 인간다운 세계를 만들라는 요청을 받고 있습니다. (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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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2 15:07 2010/01/22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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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가는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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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가는 물 
                                                도종환
 
어떤 강물이든 처음엔 맑은 마음
가벼운 걸음으로 산골짝을 나선다.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해 가는 물줄기는
그러나 세상 속을 지나면서
흐린 손으로 옆에 서는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미 더럽혀진 물이나
썩을 대로 썩은 물과도 만나야 한다.
이 세상 그런 물과 만나며
그만 거기 멈추어버리는 물은 얼마나 많은가
제 몸도 버리고 마음도 삭은 채
길을 잃은 물들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다시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물을 보라
흐린 것들까지 흐리지 않게 만들어 데리고 가는
물을 보라. 결국 다시 맑아지며
먼 길을 가지 않는가.
 
때 묻은 많은 것들과 함께 섞여 흐르지만
본래의 제 심성을 다 이지러뜨리지 않으며
제 얼굴 제 마음을 잃지 않으며
멀리 가는 물이 있지 않는가.

 

가시나무님이 도종환 시인의 '멀리 가는 물'이라는 시를 올린 것을 보고, 전경옥의 노래가 생각났다.

사실 나에게는 도종환 시인의 시보다 전경옥의 노래가 더 가깝다. 도종환 시인의 시를 바탕으로 류형선 님이 곡을 썼는데, 가사는 시와 약간 다르다. 그리고 2000년 열린 전경옥 콘서트 공연 가시집에는 아래와 같이 나와 있는데, 이 또한 시, 노래와도 다른데, 나중에 다시 바뀐 것인가. 

 

누구나 시작할때는
맑은 마음으로 산골짝을 나서지
누구나 처음에는 그렇게 여린 물줄기였지
 
시간이 흐르고
다른 물줄기들을 만나고
더 큰 물줄기로 나아가기위해
흐린 손으로 합류된 물줄기와 뒤섞이고
이미 더럽혀진 물을 만나 또다시 뒤섞이고
그러다
그만
거기 멈추어 버린 물
길을 잃은 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멀리가는 물을 보라
멀리가는 물을 보라
흐린것들과 부대끼고
더러운 것들과 뒤엉켜
때묻은 손
촛점 잃은 눈
길을 잃은 어깨들을 일으키며
본래의 제 모습을 간직하며 유유히
멀리가는 물
끝내 멀리가는 물이 있지 않은가

 

아래 노래는 전경옥 2집 [가슴앓이]에 실린 것이다. 사실 '멀리 가는 물'보다 '힘내라 맑은 물'을 더 좋아하지만, 이 노래도 듣기 편하다. 노래와 함께 나오는 영상은 봐도 좋고, 보지 않아도 좋고...

 

멀리 가는 물
글 도종환 / 곡 류형선 / 노래 전경옥
 
누구나 처음에는 맑은 마음으로
산골짝을 나서는 여린 물줄기였지
세월이 흐르고 먼 길을 가다 보면
흐린 물 줄기 때 묻은 것들과 뒤엉켜 흐르게 되지
그러다 그만 거기 멈춰 버린 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길을 잃고 방황하는 물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멀리 가는 물 있으니 흐린 물줄기를 만나도
때 묻은 물줄기와 뒤엉켜도 다시 맑아지며 멀리 가는 물 있으니
보아라 보아라 저기 멀리 가는 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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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1 21:25 2010/01/21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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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 정상화 과정은 어떠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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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 노동통제에 관한 보고서 중 내가 맡은 부분을 마무리하여 카페에 올려야 하는데, 그 글은 쓰지 않고 소설을 읽었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소설. '클라이머즈 하이'라는 두 권으로 된 소설이다.

 

요코야마 히데오는 내가 블로그에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에 대해 글을 쓴 후에 누군가가 단 댓글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의 소설에는 사건 사고가 등장하여 평소의 내 독서취향과는 일치하지 않지만, 오쿠다 히데오의 것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일단 잡으면 빠져들고...

 

맨 처음 '그늘의 계절'에 이어 '루팡의 소식'을 읽었고, 방금 읽은 건 '클라이머즈 하이'다. 어제는 헌책방에서 우연히 요코야마 히데오의 '사라진 이틀'이라는 소설을 샀고, 앞부분을 조금 읽은 상태다.

 

지금 이럴 정신이 있으면 안되는데, 뭔가 해야할 일이 있으면 꼭 엉뚱한 것을 더 하고 싶거나 읽고 싶어진다. 오늘 보고서 마무리하는 것으로 날을 새야 할까. 아니면 '사라진 이틀'을 마저 볼까나.

 

사실 지금은 기분이 약간 업된 상태다. 올초부터 가슴 한구석에서 계속 신경쓰이게 했던 세탁기 문제가 해결되어서이다. 내가 보고서에 제대로 몰두하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연말에 빨래를 한 후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세탁기에 물이 차올랐다. 그래서 급수되는 수도꼭지를 잠궈놓기는 했지만, 세탁기에 찬 물을 그대로 버리기 아까워 설거지할 때나 세면할 때 등에 사용했다. 그러던 차에 몇십년 만에 폭설이 내렸고, 제대로 된 겨울의 맛을 보여주려는 듯 날씨가 급강하했다. 그 결과 베란다에 있던 세탁기의 물이 얼어버린 것이다. 이런 일은 처음이다. 세탁기에 물이 차있고, 날씨까지 도움을 주는 상황은 미쳐 예견하지 못했다. 세탁기에 빨래를 넣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렇게 얼어버린 세탁기 때문에 빨래를 할 수 없었고, 빨래더미는 계속 쌓여갔다. 성한 양말까지 거의 바닥이 날 상황이 되자, 그리고 다시 추위가 찾아온다고 하자, 세탁기의 해빙을 자연에 맡겨둘 수 없었다. 그래서 세탁기에 뜨거운 물을 부어 녹일 생각을 했는데, 그 얼음의 두께가 만만치 않았다. 그런 어려움이 나의 오기에 불을 붙였고...

 

그제부터 세탁기 정상화 계획에 착수했다. 뜨거운 물을 몇 차례 붓고 녹은 물를 퍼냈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얼음은 요지부동. 10여차례 뜨거운 물을 붓고 충격을 주자 드디어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그 안에 든 얼음물을 퍼내고... 일단 얼음에 구멍을 냈으니 하루 뒤에 조금더 녹으면 나머지를 처리하자고 생각했다.

 

어제 오전 잠결에 안경테를 부러뜨렸다. 눈에 보이는 게 없으니(사실은 어느 정도 형태는 구분한다) 괜시리 투지가 발생하였다. 안경을 쓰지 않은 채 세탁기를 봤더니 속도 얼어 있었다. (왜 안경을 쓰지 않으니까 알게 되었느냐고? 손으로 만져봤으니까...) 그러니까 가운데의 물을 10여센티의 얼음이 삥 둘러싸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 구멍을 뚫을 때 사용했던 망치를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 세탁기에 들어찬 얼음을 망치로 깨는 상황, 이걸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을까.

 

안경을 끼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망치로 얼음을 내리치니 얼음파편이 얼굴로 튀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2시간 여를 얼음과 싸웠다. 물론 온수를 이용한 수공작전도 병행했다. 그 와중에 망치가 세탁기 뒤로 넘어가 이를 빼내느라 고생하기도 했다. 이러면서 살다살다 별 짓 다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얼음을 깨고 밖으로 꺼내놓으니 그 양이 엄청나다.  이게 다 세탁기 안에 있었단 말이냐. 그리고 세탁기 바닥에 있는 얼음파편과 물을 퍼내기 정상화에 성공한 듯 보였다. 우선 탈수기능을 사용해보니 물도 잘 빠지는 것 같고...

 

그래서 당장 빨래를 몽땅 넣고 세탁기능 가동! 어라, 세탁기가 안도네. 몇 차례 해도 안된다. 빨래량이 많아서 그런가 싶어 몇 개만 넣고 해도 마찬가지이고... 혹시 그 추위에 세탁기가 맛이 간 게 아닐까.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AS를 부르자니 차라리 사는 게 나을 듯 싶고...  사더라도 세탁기를 바꾸는 것은 문제가 아닌데, 이를 빼고 다시 넣을 생각을 하면... 그 전에 이 젖은 빨래는 또 어떻게 처리하나? 옆 집에 말을 할까.  가장 가까이에 있는 후배 녀석 집을 찾아갈까, 아니면 빨래방에 갈까.

 

그 온갖 잡생각을 하다가 그냥 나중에 보자 하면서 일단 연구실로 출근. 그 전에 안경테를 바꾸고, 헌책방에서 책을 사다. 다 합쳐서 정가가 6만 5천원 정도 되는 걸 3만원에 샀다면 싸게 산 건가. 

 

한 밤중에 퇴근하여 다시 세탁기 가동 시도. 역시 안된다. 정말 고장난 건가. 그래도 혹시 세탁기 통 말고 그 아래가 여전히 얼어 있어서 돌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빨래는 다 끄집어 내고 뜨거운 물을 세탁기 통안에 부었다. 이번에는 탈수기능 가능, 그러나 역시 안된다. 그렇게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 무렵 세탁기 속에서 요란한 소리가 난다. 세탁기 통 아래의 얼음이 깨지면서 통이 돌아가는 소리였다. 혹시나 그 얼음 때문에 모터가 고장나지 않나 싶어서 우선 작동을 멈추고 뜨거운 물을 다시 들이부었다. 어제의 전투는 거기까지.

 

그리고 오늘 아침부터 세탁기를 돌렸더니 이제는 돌아간다. 통 아래에 있던 얼음도 녹은 모양. 앗싸! 다행히 밤새 그리 춥지 않았던 모양이다. 세탁, 행굼, 탈수를 반복하고 나서 빨래를 널고 나니 점심시간도 훌쩍 지나갔다.

 

오늘은 그렇게 빨래하고 '클라이머즈 하이'를 읽느라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나서도 보고서를 쓸 생각이 들지 않으니... 눈 앞에 이장님, 해연, 경근의 모습이 스쳐지나간다. 이것도 27일에 발표해야 하는데... 물론 지금 상태도 그리 부족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좀더 보완해야 하는 건 사실이다. 하루 정도는 봐주겠지. 최다니엘의 되고송처럼 '오늘 할일 낼로 미루면 되고'가 되어선 안되겠고, 지금부터 해서 내일까지 마음을 다잡고 ...

 

이것도 하나의 보고서로 되려면 각자가 맡은 부분이 유기적으로 연결이 되어야 하는데, 이건 또 어떻게 해야 할지... 일단 공공성 부분이라도 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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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1 19:41 2010/01/21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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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itter is over capa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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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에 접속하려 했더니 아래와 같은화면이 뜨네.

고래와 새의 이 조합은 도대체 뭘까?

지금 트위터를 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건가.

 

아래 화면을 보니 갑자기 바비 킴의 '고래의 꿈' 노래가 생각나는 건....

 

트위터에 접속하려 했던 건 내가 팔로잉하고 있는 이들에게 유시민과 17일 창당한 국민참여당을 비판한 이재영 레디앙 기획위원의 글을 읽어보라고 하려 했던 것. 사실 행인님이 블로그를 닫지 않고 여전히 글을 쓰고 있었다면 분명 이재영보다 더 날카롭고 풍자적인 글을 썼을 텐데 말이지. 행인님은 요새 뭐하시나...

 
“유시민, 변희재도 데려가라” (레디앙, 2010년 01월 20일 (수) 09:22:34 이재영 기획위원)
[Column of Column] 국민참여당 비판 "이제는 버려야 할 ‘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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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비 킴 - 고래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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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0 21:33 2010/01/20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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