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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역사 뒤엔 항상 책이 있었다 / 책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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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24402.html
혁명의 역사 뒤엔 항상 책이 있었다 (한겨레, 허미경 기자, 2014.02.16 20:25)
한 주를 여는 생각
책의 탄생
뤼시앵 페브르·앙리장 마르탱 지음
강주헌·배영란 옮김, 돌베개 펴냄

오늘날엔 지은이가 책을 팔아 수익을 얻는 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서양에서 ‘인쇄된 책’이 처음 세상에 등장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책을 쓰고 돈을 받는다는 것은 “정말이지 천박한 소행”이었다.
구텐베르크가 15세기 중반 인쇄술을 발명하고 책이 유럽 각지로 퍼져나가던 16세기에도 저자들은 원고를 주고 돈을 받는 행위를 스스로 용납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책이 나오면 몇권 요청해 부유한 귀족들에게 신속히 보냈고 이들이 책에 대한 찬사와 함께 소정의 금액을 보내줬다. 원고를 파는 관행은 17세기에야 차츰 시작됐는데, 그러고 나면 작가는 책과 아무 상관 없는 존재로 전락했다. 18세기 유럽에서 출판사 혹은 서적상은 한번 산 원고에 독점 출판권을 누렸다.
프랑스 아날학파의 창시자 뤼시앵 페브르가 제자 앙리장 마르탱과 함께 작업한 기념비적 저작이자 문헌사학의 고전인 <책의 탄생>(1958)이 한국어로 처음 번역됐다. 페브르는 어떻게 책이 15~16세기 르네상스·종교개혁기에 지식 혁명을 이끌고 어떻게 사상을 전파하여 결과적으로 사회 변혁에 일조했는지 다각도로 드러낸다. “책은 위대한 영혼들이 남긴 사상을 되살리는 동시에 그 사상들에 미증유의 힘을 주었다.”
 
인쇄술은 대중을 구원한, 새로운 명약이었다
프랑스 사학자 페브르는 반세기 전 ‘책의 탄생’에서 이렇게 질문한다. “책은 15세기에 탄생했지만, 20세기 중반인 지금 완전히 다른 원리에서 나온 새 발명품들에 위협받고 있다. 지금껏 책은 어떤 구실을 해왔을까? 누구에게 도움을 주고 누구에게 눈엣가시였을까?”
<책의 탄생>의 주인공이 되는 책은 금속 활자본, 곧 인쇄본이다. 물론 필사본과 목판본도, 1450년대 유럽에서 최신 기술의 합작품으로 탄생한 이 신예의 엄청난 활약상을 드러내는 조역으로 등장하긴 한다.
이 책을 구상할 적에 프랑스 역사학계의 거목 뤼시앵 페브르(1878~1956)는 제목을 ‘역사의 주체이자 요인으로서의 책’으로 할 작정이었다. 그는 책의 구실을 변화의 원동력 혹은 변화의 효모라고 보았다. 1958년 이 책이 발간되기 이태 전에 숨진 페브르는 그 3년 전인 1953년에 공동 저자인 제자 앙리장 마르탱(1924~2007)에게 넘긴 책 서문에 이렇게 썼다.
“책을 만드는 방식의 변화는 인쇄술이 처음 발명된 땅을 넘어서 곧 다른 세상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의 목적은 이런 변화의 원인과 결과를 살펴보고 인쇄된 책이 필사본은 꿈도 꿀 수 없었던 위치까지 어떻게 신속하게 올라갔는지 되짚어보는 것이다.”
<책의 탄생>(강주헌·배영란 옮김, 돌베개 펴냄)은 15~16세기 인쇄본 책과 관련한 총체적인 역사 기술을 지향하는 책이다. 이런 목표 아래 책에 대한, 책을 만든 사람 혹은 책이 빚어낸 거의 모든 사회, 문화, 경제 변화를 다룬다. 종이와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 활자제작·조판을 거쳐 표지·본문·판형·장정, 출판길드, 책의 지리적 확산, 책 매매의 모든 것, 곧 윤허권(출판·인쇄 독점권)과 무단복제, 검열의 양상을 써내려가면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직업군, 곧 장인, 직인(인쇄공) 간의 계급투쟁까지를 760여쪽 방대한 분량에 담았다. 넓게는 13세기부터 18세기 산업혁명기까지를 아우르지만, 주무대는 15~16세기다. 그 세기는 바로 르네상스(인문주의)와 종교개혁의 시기였다. 책의 역사상 중대한 전환기는 서양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였던 것이다.
초창기에 그것은 업자들 사이에서 “인공 필기법”으로 불렸다. 활자와 인쇄기를 이용해서 종이에 책을 찍는 신기술, 곧 인쇄기술은 마르틴 루터와 장 칼뱅 같은 종교개혁 세력에게 “대중에게 구원의 명약을 나눠줄 수 있는” 새로운 힘이었다. 유럽에서 한 금속전문가(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15세기 중반, 그러니까 1450년대에 인쇄술을 발명했던 것은 필연이었다고 이 책은 본다. 필사본의 한계 속에서 책을 빠르게 대량복제할 필요성은 도처에서 생겨나고 있었고, 값비싼데다 표면이 오톨도톨한 양피지와 독피지(송아지가죽)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었다. 인쇄술은 꼭 필요한 1차 원료, 곧 종이의 절대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이 종이가 12세기 중국에서 아랍을 거쳐 이탈리아로 전파된 뒤 14세기 말엔 유럽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4세기 후반 제지산업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고, 15세기 초엔 종이라는 새 매체에 “선입관을 가진 사람들이 (극소수 필경사들을 빼면) 완전히 사라졌”다. 이렇게 “종이는 세상을 장악했다.”
필사·목판본에서 인쇄본으로 책 만드는 방식의 변화는 
르네상스, 종교개혁 확산시킨 15세기 또다른 주인공이었다
유럽 휩쓴 루터 저서들과 함께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문학 장르가 처음 구축됐다

<책의 탄생>의 기본 관심사 중 하나는, 근본적으로 엘리트(귀족, 부자, 권력자, 지적인 명망가) 중심이던 유럽 사회에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새 수단이 등장하여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것이다. 유럽 사회에서 일부 사회집단만이 누리던 문화와 학습이 ‘인쇄된 책’을 통하여 다수의 사람들(대중)에게로 퍼져나갔다. 인문주의라는 새 사상을 확산시킨 매체도 책이었다. 책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기에 지식 전파와 사회 변혁의 또다른 주인공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마르틴 루터의 책들이다. 그 이전에도 구교 사회, 가톨릭교회는 여러 다른 종교(이교)와 싸워왔고 그 싸움에서 언제나 승리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루터가 구교 가톨릭에 맞서 종교개혁의 포문을 연 것도 신기술인 인쇄 매체를 통해서였다. 1517년 그는 독일 비텐베르크 아우구스티누스 성당 정문에다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반박문을 벽보로 붙였고, 그 내용은 독일어로 요약돼 벽보 형태로 인쇄된 뒤 불과 2주 만에 그 내용이 방방곡곡에 알려졌다. “이렇게 쏘아올려진 신호탄을 전국으로 확산시켜주는 역할을 맡은 게 바로 인쇄술로 제작된 책이었다.” 루터는 자신을 공격하는 신학자들에게 라틴어로 응하면서도 <독일의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1520) 같은 글은 독일어로 기술해 더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했다. 그의 설교집·교화집·논쟁집 또한 독일어로 대거 제작돼 곳곳에 인쇄되어 뿌려졌고, 그렇게 독일 전역에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올랐다.
1518~35년에 판매된 독일어 책 가운데 3분의 1 이상은 루터의 책이었다. 설교집 <면죄부와 신의 은총>은 1518~20년에 20여차례 재인쇄됐고, <신학서>와 <주기도문 해설>은 “책을 사갔다는 표현보다 너나 할 것 없이 집어갔다고 말하는 게 더 나을 정도”였다. 유명한 공개서한인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은 1520년 8월18일 발표되어 그달 25일에 이미 재인쇄에 들어갔다. 불과 3주 만에 4000부가 뿌려지고 2년 동안 13차례 재출간되었다. 반면 루터 반대파가 쓴 <미치광이 루터교도> 같은 책은 반응이 신통찮았다.
루터의 책은 프랑크푸르트박람회의 ‘은밀한 거래’를 통해서 프랑스, 영국, 스페인, 이탈리아 등지로도 퍼져나갔다. 1520년 파리의 대학에서도 루터 책을 읽는 일이 생겨나자 교황은 1520년 6월 칙서를 통해 대학을 처벌했고, 이듬해 파리 고등법원은 인쇄업자와 서적상들에게 신학대학 신학자들이 검토하지 않은 성서 관련 저서는 인쇄도 판매도 금한다는 법령을 발표했다. 사전 검열의 시작이었다. 소르본 대학과 신학 대학, 고등법원이 이런 출판 탄압, 신교 탄압 정책을 주도했다. 그러나 금서목록에 맞서 프랑스 서적상들은 ‘간단한 꼼수’로 불온서적을 확산시켰다. 대표적 구교 인사의 이름을 써서 신교의 반론 글을 출간하거나, 정통 교리서를 표방하면서 은근슬쩍 과감한 신교 사상을 집어넣은 책을 내는 식이었다.
루터의 성서 번역본은 16세기 초반에만 100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번역본 성서 외에 설교집이나 간편히 들고 다닐 수 있는 교리문답서들은 더 인기가 높았다. <책의 탄생>은 “루터의 저서들과 함께,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여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문학 장르가 처음으로 구축되었다”고 적는다. 그리하여 책은 라틴어를 소멸시키고, 15~16세기 유럽에서 여러 민족 언어의 발달을 촉진하기에 이른다.
이 책과 함께, 2003년 번역됐다 2008년 절판된 미국 역사가 로버트 단턴의 <책과 혁명-프랑스혁명 이전의 금서와 베스트셀러>(주명철 옮김, 알마 펴냄)도 재출간되어 새로운 독자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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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6 04:52 2014/03/16 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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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혁명 | 요스타 에스핑안데르센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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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좌파 사상가들의 집단 초상화 <좌파로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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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처럼 살고 싶은데, 쉽지 않구나.
암튼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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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26460.html
20세기 좌파 사상가들의 집단 초상화 (한겨레, 허미경 기자, 2014.03.02 20:27)
<좌파로 살다> 뉴레프트리뷰·프랜시스 멀헌 엮음, 유강은 옮김/사계절·3만5000원

그는 단절을 이야기했다. 블라디미르 레닌의 손을 들면서, 이오시프 스탈린과의 “철저한 단절”을 말했다.
죄르지 루카치(1885~1971)가 이 말을 한 것은 그의 나이 여든셋, 소련이 프라하의 봄을 진압하고자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한 직후인 1968년 말,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마르크스주의 잡지 <뉴레프트리뷰>와 한 인터뷰에서다. 12년 전인 1956년 헝가리 인민봉기(헝가리혁명)가 났을 때 그는 봉기 편에 섰다가 소련의 침공으로 루마니아로 추방됐고, 겨우 처형을 모면하여 고향 부다페스트로 돌아와 저술에 전념하고 있었다.
“레닌은 변화와 새 출발을 결코 이전 경향의 지속과 개선으로 제시하지 않았어요. 신경제정책(1921~27)을 발표했을 때 이것이 전시공산주의의 ‘발전’이나 ‘완성’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레닌은 신경제정책은 전시공산주의의 오류를 바로잡는 시도이자 총체적인 방향 전환이라고 솔직히 말했습니다. 그런데 스탈린주의는 언제나 정책 변화를 과거 노선의 논리적인 결과이자 개선으로 제시하려 기를 썼어요. 불연속성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어요.” 루카치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고 했다. 이 인터뷰는 당시 그가 처한 상황 탓에 곧바로 게재되지 못하고 그가 숨진 1971년 발표됐다.
1956년 헝가리혁명에 대한 소련의 무력 진압은 서구 좌파 세력에 일대 충격파를 일으켰다. 현실 사회주의(소련식 사회주의)와 그 교의에 찬동하는 기존 공산당 세력에 비판적인 이른바 신좌파 그룹이 각국에서 생겨난다. 미국에 맞선 베트남혁명의 반향 속에 프랑스에선 1968년 5월봉기(68혁명)가 터져나온다. 영국에서 1960년 신좌파를 표방한 격월간 <뉴레프트리뷰>가 창간된 것도 이런 흐름 속에서였다.
<좌파로 살다>(Lives on the Left>는 <뉴레프트리뷰>가 창간 이후 실었던 100여명의 인터뷰 가운데 다섯 대륙 20여 나라 16명을 골라 묶어 2011년 펴낸 책이다. 부제목은 ‘집단 초상화’다. 1968년 루카치부터 2010년 아돌포 힐리까지 50년에 걸친 인터뷰 모음이지만, 그 인물들이 들려주는 삶의 궤적과 사상적, 실천적 고민이 포괄하는 것은 근 100년이다. 이 책은 지난 ‘20세기’와, 그 세기를 살았던 좌파 사상가·운동가들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초상화랄 수 있다.
‘뉴레프트리뷰’ 50년 걸친 인터뷰 
루카치·아리기·힐리 등 16인 육성 
위험의 순간 섬광처럼 번득인 삶

1부에 등장하는 루카치와 카를 코르쉬 부부가 “10월혁명의 이상으로 떨쳐 일어난 세대”로서 각기 헝가리와 독일에서 공산당을 창건했으나 이미 1920~30년대부터 이른바 코민테른 정통파와 충돌했다면, 2부에 묶인 그 다음 세대인 이르지 펠리칸, 도로시 톰슨 등은 1939~1950년에 각기 자국 공산당에 들어가 활동했다. 영국의 도로시 톰슨은 소련이 헝가리혁명을 진압하자 공산당을 탈당했고, 이탈리아의 루치아나 카스텔리나는 소련의 체코 침공을 비판하다 공산당에 쫓겨나 월간 <선언>을 창간하고 안토니오 그람시의 사상을 “공산당의 해석에서 해방시켜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 필요한 혁명전략으로 발전시키고자 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서 일하던 이르지 펠리칸은 1968년 당을 비판하며 프라하의 봄 주역으로 변신했고 소련 침략으로 망명한 뒤 그 봄에 대한 기억을 회고한다.
장폴 사르트르는 이 신좌파 대열에 1968년 5월봉기를 지지하면서 합류했다. 그는 5월봉기의 기원이 베트남혁명에 있다고 말한다. 베트남의 미국에 대한 승리가 프랑스 학생들의 시야를, 가능한 것의 영역을 확대했다고 본다.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혁명투사로 라틴아메리카 전역을 누볐으며 멕시코 감옥에서 멕시코혁명 분석서인 <중단된 혁명>을 쓴 아돌포 힐리는 중남미 트로츠키주의 자장 안에서 성장한 한 사상가가 현지 농민과 원주민의 처지에서 변혁의 목소리를 내는 쪽으로 나아가는 궤적을 보여준다. 그는 미국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휩쓴 2010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발터 베냐민은 과거를 표현한다는 것은 ‘위험의 순간에 섬광처럼 스치는 어떤 기억을 붙잡는 것을 뜻한다’고 했어요. … (전쟁과 혁명으로 점철된) 20세기는 그렇게 번쩍이는 섬광의 세기였고, 지금 눈앞에 닥친 위험의 순간을 비추려면 그 세기의 기억과 경험을 되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책 마지막은 이탈리아 신좌파에서 출발해 말년에 세계 자본주의 헤게모니가 미국에서 중국으로 옮아가는 국면을 탐색한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 <장기 20세기>의 저자 조반니 아리기(1937~2009)다. 마르크스주의 지리학자 데이비드 하비가 2008년 그를 만났다. 그는 <베이징의 애덤 스미스>의 ‘여러 문명이 동등한 조건에서 살아가면서 지구와 천연자원을 함께 존중하는 연방’에 관한 기대를 거론하며 이 전망을 사회주의란 말로 표현할 거냐고 묻는 하비에게 이렇게 답한다. “사회주의라 불러도 반대할 뜻은 없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용어는 국가의 경제 통제와 지나치게 동일시됐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그 용어의 대체물을 만들어서 역사적으로 국가와 동일시된 관계를 끊고 더 많은 평등과 상호 존중이라는 생각에 근접시키는 일은 이제 당신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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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10 13:21 2014/03/10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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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승수, “탈성장 ‘녹색’ 필요한 때…지방선거 통해 ‘녹색정치’ 거점 만들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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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의 인터뷰글. 자신이 어떻게 녹색당 활동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녹색당의 비전은 무엇인지, 왜 지금 녹색정치인지가 인터뷰 안에 잘 녹아 있다.
 
다만, 진보정당으로서 녹색당이 노동의 가치와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지,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판단하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는다. 조직적인 기반을 가지지 않은 채 정당으로 살아남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녹색당이 서구의 일부 국가에서만 자립하고 있을 뿐 대부분의 국가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거나 아예 존속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 또한 눈여겨 봐야 한다. 우리는 다르다는 기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다.
 
녹색당 내에도 기존 진보정당운동을 했던 이들이 있겠지만, 아직은 많이 깨지지 않은 탓에 정치의 현실에 둔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패기와 열정만으로도 당이 움직이는 시기가 있다. 하지만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계속 유지되고 성장하려면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녹색당은 그걸 준비하고 있을까. 또한 제도정치를 하는데 요구되는 수많은 고민지점들을 녹색당이 어떻게 분석하고 이에 어떠한 대안을 제시할지 궁금하다.
 
아직 녹색당 깃발을 제대로 흔들어보지도 않았는데, 좀 심했나? 어차피 제대로 된 정당이 되려면 넘어야 할 것들이다. 녹색당이 아무쪼록 초심을 잃지 않고 지속가능한 진보정당으로 꿋꿋하게 남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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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성장 ‘녹색’ 필요한 때…지방선거 통해 ‘녹색정치’ 거점 만들것” (한겨레, 인터뷰/ 조혜정 이승준 기자, 2014.03.03 19:07)
[한겨레가 만난 사람] 하승수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
후쿠시마 원전 사고 계기로 성장 위주 흐름 바꾸자 결심 
녹색당 만들어 정당판에 입성
현장서 탈핵운동 등 펼쳤지만 의석 없는 원외 정당으로 
문제 해결하는 데 한계 부딪혀
6·4지방선거 10여명 후보 낼 것, 지역상황 맞는 야권연대도 고민중 
2년뒤엔 국회진출 기반 만들 계획

 
참여연대 활동가에서 회계사, 변호사, 정보공개 청구 전문가, 교수, 풀뿌리 운동가 등으로 ‘변신’을 거듭해온 그에게 ‘녹색당 공동운영위원장’이라는 직함이 하나 더 붙었다. 하승수 위원장 얘기다.
오랫동안 풀뿌리 운동을 해온 그가 직접 창당을 주도하며 ‘정당판’에 뛰어든 계기는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다. 원전 사고는 경제성장론의 파멸성을 극명하게 상징하는 일이었고, 풀뿌리 정치를 넘어 국가정치 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의 파멸을 막을 수 없다는 ‘사고의 대전환’을 하게 해줬다. 그런 생각을 공유하는 이들이 모여 2012년 녹색당을 만들었다.
국회엔 없는 녹색당이지만 송전탑 갈등을 겪는 밀양에서, 방사능안전급식조례를 추진하는 동네 골목에서, 무분별한 댐 건설과 공장식 축산을 그만두자는 현장에선 녹색이 흘렀다. 그 결과 현재 당원은 7000여명으로 늘었고, 오는 6·4 지방선거에는 10여명의 후보가 출사표를 던질 예정이다. 하승수 위원장은 동지이자 벗인 서형원 과천시의원과 함께 이런 지난 2년의 경험과 성찰을 담아 최근 <행복하려면, 녹색>이라는 책을 냈다. 지난 26일 한겨레신문사 8층에서 만난 하 위원장은 “당원이 1만명만 돼도 활동하기가 훨씬 수월하겠다”고 웃으며 “녹색은 경제성장 자체에 대한 성찰”이라고 말했다.
 
“공동체, 지속가능한 사회, 인권, 평화는 우리 사회의 행복과 연결된 문제다. 그래서 ‘행복’을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의 모습을 설명하는 단어로 써봐야겠다고 생각했고, 행복이 무엇인지 공부도 많이 했다.”
“민영화 정책, 원전 확대 정책, 군사적 긴장 조장, 환경 파괴는 근본적으로 경제성장 논리와 맞닿아 있다. 그런데도 공공성을 이야기하면서 경제성장론을 받아들이는 건 모순이다. 뿌리를 건드리지 않고 가지만 건드려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 녹색은 경제성장 자체에 대한 성찰이다.”
 
“당장의 생활 전체를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만 바꾸더라도 삶에서 소박한 행복을 느낄 수 있지 않겠나. 개인의 실천은 행복을 느끼려고 하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고 가령 베란다에서 상추를 키운다거나, 전기 스위치를 열심히 내리거나, 일주일에 하루만이라도 고기를 안 먹는 실천 하나만 해도 괜찮다. 더 중요한 건 사회구조와 국가정책의 흐름을 바꾸는 거다. 개인의 실천만으로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다.”
 
-풀뿌리운동을 오래 하면서 정당 자체엔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후쿠시마 사고가 상징적인 계기였다. 아무리 지역에서 풀뿌리를 다져도, 국가정치, 지구정치의 큰 흐름이 잘못되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풀뿌리 시민후보’로 지방선거를 치러온 과정에 대한 평가와 반성도 있다. 정치에서 중요한 건 지속성인데, 풀뿌리운동은 선거가 끝나면 모두 다 흩어져서 (고민의 결과물과 역량이) 축적이 안 됐다. 그래서 지역분권적인 정당 구조를 지향하지만, 정당이라는 틀로 지속적인 정치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한국처럼 후쿠시마 사고 이후 원전을 공격적으로 늘리고, 재생 에너지를 푸대접하는 나라는 세계적으로도 예외적이다. 이렇게 가면 우리 사회의 전망이 어둡다. 녹색당은 ‘듣보잡’이 아니라, 기존의 풀뿌리운동, 인권운동, 시민운동의 경험 속에서 나왔고, 우리 사회의 흐름을 바꾸자는 것이다. 사회 흐름을 바꾸려면 정치가 가장 중요하고, 새로운 세력이 나와야 정치가 바뀌지 않겠나. 민주당, 정의당, 통합진보당도 탈원전에 동의하지만, 녹색당처럼 절박하지는 않다. 밀양 할머니들의 몸부림에 잠깐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 탈원전을 국가 정책 수준으로 올리려면 녹색당이 힘을 얻어야 한다. 각 정당에 ‘탈핵정치연대’를 제안해보려고 한다. 각 정당에 탈핵을 지향하는 의원들을 엮어내 녹색당이 구심점이나 사무국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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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4 21:41 2014/03/04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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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태원,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 이론과 실천의 괴리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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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문화 봄호를 읽어봐야겠네. 이번 황해문화에 실린 글들 중에 볼 게 많다고 하던데...
 
그건 그거고, 진태원 교수의 글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 유럽의 비판적 사유인데, 미국을 거쳐서 들어오면서 문제가 된다는 것이 글의 논지인 듯하다. 그런데 미국에서 유럽의 비판적 사유가 어느 정도 세를 이룬 적이 있던가? 물론 이건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나아가 미국화보다는 외국 사상에 기대어 자신의 이론적 권위를 확보하려는 한국 학계의 풍토가 문제라면 문제다. 이렇게 해석해야 유럽의 비판적 사유뿐만 아니라 행정학, 정치학 분야에서 미국의 사유를 가져오는 게 설명이 된다.
 
게다가 진태원 교수는 한겨레에 '다시, 변혁을 꿈꾸다-정치적인 것의 사상사'를 연재하고 있으며, 몇 해 전에도 비슷한 기획연재글을 쓴 바 있다. 이러한 연재글이 진태원 교수가 말하는 '포스트-포스트 담론'의 소개와 무슨 차이가 있을까. 진태원 교수는 사회적인 실천, 특히 조직적인 실천과의 연계를 맺고 글쓰기를 하고 있는가? 나야 진태원 교수만큼 그 이론들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런 궁금증이 이는 걸 참을 수가 없다. 아마 많은 이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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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사유의 미국화, 이론과 실천의 괴리 불러” (한겨레, 안선희 기자, 2014.03.02 19:40)
진태원 교수, 지제크 등 열풍 비판
국내에서 슬라보이 지제크(왼쪽), 알랭 바디우(오른쪽), 조르조 아감벤(가운데) 등 일련의 유럽의 좌파 사상가들이 큰 인기를 누리는 현상에 대해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라는 문제제기가 나왔다.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인문한국(HK) 연구교수는 최근 발간된 계간 <황해문화> 봄호에 실은 ‘좌파 메시아주의라는 이름의 욕망’이라는 글에서 이런 담론들이 유행하는 원인 중 하나는 국내 연구자들이 미국을 통해 비판적 사상들을 수입하기 때문이고, 이런 담론들이 이론적으로는 혁명적이지만, 실천적으로는 공허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진 교수는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중 하나는 1990년대 이후, 특히 2000년대 들어 국내에 크게 유행하고 있는 현대사상의 국내 수용에서 나타나는 이상한 현상에 관한 의문 때문”이라고 글을 시작했다.
그는 먼저 199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포스트구조주의’ 등과 같이 ‘포스트’라는 접두어가 붙은 문화적·사상적 흐름이 수용된 현상을 지적했다.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질 들뢰즈, 자크 라캉 등이 대표적 사상가들이다. 2000년대 들어서는 지제크, 아감벤, 바디우, 자크 랑시에르, 안토니오 네그리 등과 같은 이론가들이 반향을 일으켰다고 진 교수는 말하고, 이들을 ‘포스트-포스트 담론’이라고 이름 붙였다.
진 교수는 “이들은 대부분 급진적인 정치적 주장을 제시한다”며 “특히 지제크, 바디우, 아감벤 등은 현대 사상가들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인 정치, 반자본주의적이며 반자유주의적인 정치를 제창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들은 ‘교양대중’을 포함해 주로 문학이나 영화, 기타 대중예술 관련 연구자들에게 열광적으로 수용되고 인용되고 있는데, 이 지지자들이 아마 보수적인 사람들은 아닐 것이지만, 그렇다고 정치적인 의미에서 급진적인 것도 아니다”며 “이들은 이 사상가들의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주장에 열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선거 때가 되면 (특히 대선 같은 중요한 선거일수록) 늘 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하러 투표소로 간다”고 말했다.
진 교수는 이러한 ‘괴리’의 원인을 찾기 위해 이런 담론들, 특히 지제크, 바디우, 아감벤의 이론적 성격을 분석한다. 진 교수는 “해방의 정치를 제도정치 바깥에서 찾고 있는 점”과 함께 ‘좌파 메시아주의’를 이들의 특징으로 규정한다. 이는 “이들이 자본주의 및 자유민주주의 체제와의 급진적이고 전면적인 단절을 주장할 뿐 아니라, 이를 기독교 전통에 대한 재독해에 기반해 혁명적 사건성의 관점에서 해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진 교수는 “이러한 메시아주의 정치는 매우 사변적인 정치철학”이라며 “이들 중에서 누구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나 국가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제시하지 않으며, 그것에 맞설 수 있는 대안적인 운동이나 조직에 관한 구체적 성찰도 보여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사변성’이 바디우의 ‘대상 없는 주체’, 지제크의 ‘신적 폭력’, 아감벤의 ‘계급 없는 사회’ 등의 개념에서 나타난다고 분석한다.
진 교수는 이런 담론들이 국내에 차례로 소개되고 유행하는 이유를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 즉 “오늘날 한국 인문학에서 회자되는 많은 담론들이 미국을 통해 가공되고 변형되고 수입된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진 교수는 “오늘날 한국에서 비판적 사유의 전거로 작용하는 여러 사상가들은 그가 프랑스 사상가든, 이탈리아 사상가든, 독일 사상가든 간에, 미국이라는 생산과 유통의 회로를 거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영향력을 미치기 어렵게 됐다”며 “이들이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탁월한 사상가들’이기 때문에 논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포스트 담론이나 포스트-포스트 담론이 1990년대 이후 영문학자, 문화이론가 등을 중심으로 미국을 통해 수입된 현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진 교수는 “비판적 사유의 미국화는 미국 학계의 특정한 일부분이 생산해낸 담론, ‘미국제 담론’을 세계적인 담론으로, 서구 담론 전체로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경향은 인문학을 고립하는 효과를 가져온다고 지적했다. “우선, 인문학이 다른 학문분과, 특히 사회과학들과의 연계를 점점 더 상실해가고 있고, 둘째 비판적 인문학을 자처하는 경우에도 사회적 실천, 특히 조직적인 실천과의 연계를 맺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는 것이다. 그는 “1990년대 실천적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고 어떤 의미에서 자유주의 헤게모니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했던 포스트 담론들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을 포스트-포스트 담론들이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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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04 17:57 2014/03/04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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