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서평기사]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View Comments

현대경제연구원에서  폴 크루그먼의 책이 번역되어 나왔다. 이 정도는 자본도 허용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의미일까? 아직까지는 이에 대한 서평도 머니투데이나 매일경제와 같은 경제신문에서 나왔다.
 
프레시안에 실린 윤효원의 서평은 예외이다. 윤효원은 자신의 칼럼에서 장문의 글을 통해 폴 크루그먼의 눈으로 정리된 미국 경제사와 미국 자유주의 진영에 주는 충고를 요령있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이 나온 배경 또한 배리 골드워터에 대응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며칠 전 서점에 갔다가 크루그먼의 이 책이 있길래 앞부분을 읽어보고 나중에 차분하게 읽어보리라 맘을 먹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리려 했더니 이미 대출중이던가.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온 것과 함께 신자유주의에 비판적이면서도 폴 크루그먼과는 또 다른 시각을 보여주는 장하준 교수의 책 [다시 발전을 요구한다]도 번역되어 나왔다. 이 양자를 비교해서 보는 독서도 흥미로울 것이다.
 
참고로, 이 책에서는 자유주의를 진보주의로 번역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용어의 용례상 진보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적당하다는 것이다. 나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급진적인 대안이라고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틀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자유주의가 좌파를 밀어내고 진보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니지 싶다. 아무튼 읽어봐야지.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의 서평 뒤에 미국에서 부의 불균형이 커져서 1988년 이후 19년 사이에 상위 1% 부자들의 소득비중이 최고에 달한하며, 그 결과인지 모르겠지만 경제혼란 속에서 미국이 규제시대로 돌아가고 있다는 WSJ의 기사를 정리한 경향신문, 연합뉴스의 기사를 덧붙인다.

 

-------------------------------------
경제 양극화, 극복 해법은 뭔가 (머니투데이, 백경숙 리브로MD | 07/02 12:27)
[머니위크]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세계지성 49위에 빛나는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 교수는 미국의 과거와 현재를 분석하며 경제위기에 빠진 미국이 풀어가야 할 미래에 대한 해결책에 대해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를 통해 의견을 밝혔다. 극심한 빈부차의 해결방안으로 미국 내 '국민의료보험 제도의 완성'을 지목한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국민의료보험이 미국의 경제 양극화문제를 전부 해결할 수는 없다. 다만 국민의료보험이 성공한다면 앞으로 진보주의자들이 미국의 불평등을 고치는 더 광범위하고 어려운 임무에 눈을 돌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무엇보다 경제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로 '정치'를 주목하고 있다. 부의 재분배를 거부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사회보장제도의 기반을 흔들자 2004년 이후 미국 경제의 양극화는 더욱 심화됐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수백만의 중산층 가정들은 사치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녀에게 기회를 마련해 주려고 어쩔 수 없이 빚을 지고 있다. 결국 보수주의운동이 소수의 부유한 엘리트집단에게 이익이 되는 근본적으로 반민주주의적인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는 현 시점에서 1920~1950년대 부유층과 노동자 계급의 차이가 급격히 줄어들었던 이른바 뉴딜정책기의 '대압착' 시대를 주목했다. 부자에 대한 세금을 강화하고 노동조합이 부활한 결과 하층계급으로의 소득과 부의 재분배는 물론이고 미국 역사상 가장 큰 호황을 가져왔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사회 안전망 확충, 국민의료보험제도 도입 등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개입을 강조했던 존 메이너스 케인스의 방법론만이 경제 양극화의 늪에 빠진 미국을 구해줄 것이라고 이 책은 말한다.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민영의료보험 확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지는 요즘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는 오늘날 한국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이 책은 미국을 선진국으로 만들어 준 독립전쟁과 남북전쟁, 그리고 20세기 중반에 일어났던 미국경제체제 개혁을 통해 선진사회는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의도적인 노력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임을 깨닫게 해준다.
 
---------------------------------
정치 양극화가 소득 불균형 키워 (매일경제, 성철환 매일경제신문 논설위원, 2008.07.16 09:54:26)
[서평] 미래를 말하다  
 
진보와 보수의 싸움은 어느 시대나 있게 마련이다. 평등을 지향하는 진보는 경제성장을 희생시키는 비용을 초래하기 십상이다. 자유시장경제의 효율성을 중시하는 보수는 불평등과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부작용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국가가 어떤 정책 노선을 추구하는 것이 국민의 삶의 질 측면에서 바람직한 것일까.
 
폴 크루그먼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쓴 ‘미래를 말하다’는 미국 경제 사례를 통해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중산층 중심의 사회였다.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소득이 늘어난 미국인들은 도시 빈민가와 농촌의 가난에서 벗어나 자신의 집을 소유하고 전에 없이 안락한 삶을 누렸다. 경제적 공동체 의식이 두드러진 시대였다. 두꺼운 중산층이 뒷받침하는 상대적으로 평등하고 평온한 상태가 지속된 때이기도 하다.
 
이런 전후시대의 평등은 점진적으로 이뤄진 게 아니다. 1930년대와 40년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같은 진보주의자들이 미국 경제 전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면서 소득 불평등을 현저히 개선시킨 덕분이다. 경제 사학자인 클라우디아 골딘과 로버트 마고는 이를 ‘대압축(Great Compression)’이라 불렀다. 요즘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양극화와 대조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보장제도와 실업보험을 근간으로 한 뉴딜정책이 그 근저에 있었다. 대압축 시대는 소득분배 결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대비되는 사회적 제도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생생한 예다. 
 
현재 미국 경제는 전후 경기호황의 종지부를 찍었던 1973년보다 분명히 발전했다. 그러나 전반적인 미국 경제성장의 혜택이 보통 사람들에게까지 돌아갔는지는 의문이다. 생산성 향상이 노동인구에게 똑같이 분배됐다면 현재 일반 노동자의 소득은 70년대 초에 비해 35% 정도 향상돼 지금보다 훨씬 높아졌을 것이다. 극심한 소득 불균형은 심각한 사회 불균형으로 이어진다. 중산층의 빚이 늘어난 것은 결코 사치스런 생활 탓이라고 볼 수 없다. 점점 더 불평등해지는 사회에서 자신의 자녀들에게 좀 더 나은 기회를 마련해주려 좋은 학군에 무리해서 집을 사려는 현상이야말로 중산층의 살림을 쪼들리게 만든 근본 요인이다.
 
크루그먼이 국민의료보험제도 도입을 역설한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미국은 주요 선진국 중 유일하게 기본적인 의료 서비스 제공을 국민들에게 보장하지 않는 국가다. 보험회사, 의료법인, 제약회사 등이 막강한 로비력으로 국민의료보험제도 도입을 막아서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1인당 의료비 지출이 주요 선진국 중 가장 큼에도 기대수명은 가장 짧은 것이 바로 이런 상황 탓이라고 볼 수 있다. 건보공단 민영화설에 우리 국민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게 무리가 아니다.
 
크루그먼의 주장에 무조건 동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진보냐 보수냐의 싸움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최선책을 찾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는 점은 누구든 반대할 명분이 없다. 특히 정치적인 양극화가 경제적 불평등을 키우고 국민의 삶의 질을 떨어트렸다는 크루그먼의 지적은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
"미국, 망하지 않으려면 이 두 가지가 필요해" (프레시안, 윤효원/ICEM 코디네이터, 2008-07-27 오후 3:51:00)
[노동과 세계]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말하는 '미래' 
 
  미국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이 쓴 <미래를 말하다>를 읽었다. 원래 제목은 <진보주의자의 양심(The Conscience of a Liberal)>인데, 현대경제연구원의 연구원인 번역자가 <미래를 말하다>로 의역했다. 영문판 <진보주의자의 양심>이란 제목은 애리조나 출신의 5선 상원의원이자 급진 보수주의의 대표적 지도자였던 배리 골드워터가 1960년 낸 <보수주의자의 양심>을 빗댄 것이다. 보수주의 활동가 레오 브렌트 보젤이 대필했던 <보수주의자의 양심>은 교육, 노조, 시민권, 농업 보조금, 사회복지, 소득세에 걸쳐 보수주의 입장을 피력한 것으로 미국 보수주의 운동의 주요 문건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제목을 둘러싼 곡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래를 말한다>는 노조, 시민권, 사회복지, 소득세에 대한 미국 진보주의 진영의 입장을 담고 있다. 크루그먼 자신은 경제학자지만 이 책은 역사책에 가깝다. 20세기 미국의 정치사, 경제사, 사회복지사, 건강보험사, 노조운동사에 관심 있는 이라면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미국 황금 시대의 동력: 공화당의 좌경화 
  이 책에서 크루그먼은 1930년대 말 뉴딜 정책에서 태동해 1950년~60년대에 전성기를 누린 미국의 황금시대를 가능케 한 원인을 파고든다.  
  "경제적으로 균등했던 미국은 정치적으로도 중도 노선을 지켰다. (…) 공화당은 뉴딜정책의 성과를 되돌리려 더 이상 애쓰지 않았으며, 꽤 많은 공화당 의원이 메디케어(연방정부가 운영하는 65세 이상 고령자용 건강보험)를 지지하기도 했다. 초당적 제휴가 정말로 의미 있던 시절이었다."
 
  크루그먼이 주목하는 '초당적 제휴'의 역사적 실체는 민주당의 우경화가 아니라 공화당의 좌경화였다.  
  "(90년대 들어)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경제적인 이슈에서부터 복지와 세금에 이르기까지 분명 지미 카터뿐 아니라 리처드 닉슨보다 더 보수적인 정책을 펼쳤다. 반면에 공화당은 확실히 더 우파적인 성향을 보였다. (…그 결과), 미국의 소득분배 격차가 심해지면서 극소수 엘리트 집단이 나머지 집단과 분리되었다."
 
  그는 정치학자 놀러 매카티, 키스 풀, 하워드 로젠탈의 연구 결과(Polarized America: The Dance of Ideology and Unequal Rights, MIT Press, 2006)를 인용한다.  
  "공화당이 진보적이 되어 민주당과의 의견 차를 좁히면 소득 격차가 줄고, 1950~60년대에 보았던 것과 같은 초당적 제휴가 이뤄진다. 그러나 공화당의 우파 성향이 강해지면 오늘날과 같이 양당의 양극화가 깊어지고 소득 격차도 확대된다."
 
  뉴딜 정책 : 부자에게 뺏어 노동자에게 나눠주기 
  미국의 부자들에게는 악몽기였지만 보통 사람들에게는 황금시대였던 50~60년대에 이뤄졌던 평등화에 주목하면서 크루그먼이 강조하는 것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다.  
  "뜻밖에도 평등화에 대한 연구가 상세히 이루어질수록, 객관적인 시장의 힘에 대한 점진적인 반응이 아니라 정치적인 힘의 균형이 달라지면서 급작스런 변화가 온 것처럼 보인다."
 
  크루그먼은 1940년대와 50년대에 최고 부자들의 소득이 급감했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경제적 엘리트 집단이 상대적으로 가난해진 현상은 천천히 진행된 것이 아니라 아주 갑자기 일어났다. 부자들의 소득이 급감한 이유는 바로 '세금' 때문이었다."
 
  기업 이익에 대한 연방정부의 세금이 1929년에는 14%도 안 됐지만, 1955년에는 45%까지 올랐다. 상속세의 상한율은 20%에서 45%로, 그리고 60%, 70%, 결국 77%까지 올랐다.  
  "1920년대에는 부자들에게 세금이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미미한 세율로) 부자들은 자신들의 왕국을 유지하는 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 하지만 뉴딜 정책은 실제로 그들의 소득을 상당부분, 어쩌면 거의 전부를 세금으로 거두어갔다. 상류층이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배신자라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정치권은 기업과 부자에 대한 세금을 올리는 법률적 조치를 취했고, 그 결과 미국 역사상 가장 평등한 번영 시대가 열렸다. 우리에게 익숙한 논리로 설명하면, '선성장 후분배'라는 경제 논리를 배격하고 정치적 결단에 의해 '선분배' 정책을 추진하니 '후성장'이 경제적으로 가능했다는 것이다.
 
  육체 노동자와 노조의 전성기 
  크루그먼은 1950~60년대의 황금시대를 1920~30년대의 '대공황(the Great Depression)'에 빗대어 '대압착(the Great Compression)'이라고 부른다. 19세기 후반과 20세 초반에 이뤄진 엄청난 빈부격차가 이 시기에 "압착"되어 미국 역사상 가장 평등한 사회가 되었다. 이 시대의 최대 희생자는 부자였고, 최대 수혜자는 육체 노동자였다.
 
  "대압착 이후 1940년대 중반에서 1970년대 중반에 이르는 30년은 육체 노동자의 황금기였다. (…) 그들의 지위도 물론 상대적으로 높았다. 아주 좋은 직장을 가진 육체 노동자들은 대졸학력 전문직 종사자와 거의 같거나 더 높은 보수를 받았다."
 
  진보적인 정부 정책이 노동조합운동의 부활에 큰 힘이 되었다. 1935년 루즈벨트 정부와 민주당이 지배하던 연방의회는 일명 '와그너 법(Wagner Act)'으로 불리는 전국노동관계법을 통과시킨다. 루즈벨트 정부의 개혁입법에 사사건건 위헌판결을 내리며 노사 갈등과 분배 문제에서 기업과 부자의 입장을 대변해오던 연방대법원도 1930년대 후반 들어 대법관 구성이 변하면서 와그너법을 비롯한 개혁입법을 합헌으로 판결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민간부문 노동자들에게 노조결성, 단체교섭, 파업 같은 노동권이 보장되었다. 또한 전국노동관계위원회가 설립되어 고용주의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조사와 처벌이 가능해졌다.
 
  "(그 결과) 노조가 노조원들의 평균임금을 인상하면서 간접적으로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비슷한 처지의 노동자 임금도 소폭이지만 인상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노조가 없는 회사의 고용주들이 노동자들의 노조 가입을 막으려고 임금인상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산별) 노조는 최고임금을 받는 노동자들보다는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더 많이 올리기 위한 협상에 중점을 둠으로써 육체 노동자 간의 소득격차도 줄이는 역할을 했다."
 
  여기에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외부 요인이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이어 국가전시노동위원회가 부활했고, 정부가 노사 간의 분쟁 중재뿐만 아니라 민간기업의 임금인상률까지 감독하게 되었다. 위원회는 직종별 급여수준을 정해놓았고, 기업 간 임금 격차를 줄이는 조치를 취했다. 그 결과 위원회의 임금 기준이 산업간, 그리고 산업 내부의 임금을 "압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와그너법의 진보적인 내용은 1947년 만들어진 노사관계법, 일명, 태프트-하틀리 법(Taft-Hartley Act) 때문에 타격을 입게 되고, 이후 노조운동 역시 약해진다.
 
  "(어쨌거나) 중산층 중심의 미국사회는 천천히 발달한 것이 아니라 뉴딜 정책의 입법화, 노조 활성화,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임금 통제를 통해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세워진 것이다."
 
  미국의 노조운동이 놓친 것들 
  1950년대의 미국은 노동조합운동이 왕성한 나라였다. 비농업 노동자의 30%가 노조원이었다. 하지만, 두 가지 점에서 미국 노조운동은 쇠퇴의 징후를 갖고 있었다. 크루그먼은 국민건강보험의 부재와 노조 조직률의 지역 간 편차로 설명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 국가들은 사회복지국가로 변모했고, 특히 의료제도의 국영화나 공영화는 시대의 대세였다. 영국의 무상의료제도인 국민건강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가 가장 대표적이다.
 
  하지만, 미국 노조운동은 사회복지가 아닌 기업복지에 집중했다. 거대 산별노조들은 민간기업에 의료보험을 제공하라고 요구했다. 그 대표적인 계기가 1949년 전미자동차노조와 GM이 체결한 이른바 "디트로이트 협약"이었고, 이것이 50~60년대 거대노조와 거대기업 간의 협약을 기반으로 하는 미국 단체협상의 모델이 되었다.
 
  "(그 결과) 1960년대 미국인 대부분은 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었고, 다수는 장애보험, 실업수당과 퇴직수당을 보장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보장은 정부가 아니라 고용주인 민간 기업이 제공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복지제도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다른 서유럽 국가들만큼이나 컸지만, 상대적으로 정부보다 민간기업의 지출에 의존하는 부문이 훨씬 높았다."
 
  기업복지의 한계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추진하던 서유럽에서는 국가가 사회복지로 제공하던 교육비, 병원비, 연금 따위가 미국에서는 기업복지로 제공되었다. 기업복지는 종업원을 위한 비용으로 인정되어 노사 모두 세금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었다.
 
  문제는 정치와 경제의 황금기가 지난 다음에 일어났다. 기업의 상황이 나빠지면서 규모가 작은 기업들부터 종업원과 그 가족 (심지어는 퇴직자와 그 가족을 위한) 기업복지제도에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경제 상황의 악화와 노조운동의 약화가 맞물리면서 기업복지에 기반을 둔 미국의 의료보험제도는 위기상황으로 치달았다. 기업과의 고용관계 단절은 노동자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러한 위기는 1970년대 미국 보수주의 정치운동의 부활과 맞물렸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공화당이 다시금 부유층에 대한 과세에 반대하고, 중산층과 빈곤층을 위한 복지에 반대하는 정당으로 거듭나면서 이를 실현시키려고 무슨 짓이든 할 태세를 갖추었다."
 
  급진적 보수주의, 즉 시장근본주의(market fundamentalism)가 득세하면서, 사회보장제도를 민영화하고 최저임금제를 폐지하며 노동부와 교육부 같은 연방정부기관도 없애야 한다는 극단주의가 공화당을 비롯한 정치권에 영향을 미쳤다. 이 무렵 미국기업연구소(AEI), 헤리티지재단, 맨해튼연구소, 케이토연구소, 허드슨연구소 같은 보수주의 운동의 싱크탱크들이 활약하며 극단주의를 선도했다.
 
  빈익빈 부익부의 심화 
  오늘날의 미국은 선진국 가운데 국민적인 공공의료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소득세 최고한계세율도 1970년대 초 70%에서 지금은 35%로 줄어들었다. 1930년대 CEO와 정규직 노동자들의 연봉은 40배 차이가 났는데, 2000년대 초에는 367배가 넘었다. 저임금을 받는 서비스 부문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30년 전에 비해 하락했다. 경제적 이득을 전 국민이 공유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미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부가 넘쳐나지만, 그 혜택은 극소수가 누릴 뿐 대다수의 삶은 힘들다.
 
  "미국인의 평균소득도 상당히 높아졌다. 그러나 평균소득이 실제로 사람들이 얼마나 버는 지를 알려주는 것은 아니다. 만약 빌 게이츠가 어떤 술집에 들어가면 그 술집 고객의 평균재산은 급상승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 술집에 이미 앉아 있던 고객들이 실제로 더 부자가 된 것은 아니다."
 
  비효율과 낭비의 극치인 민간의료보험 
  크루그먼이 진보주의 운동의 재구성을 위해 제안하는 의제는 전국민건강보험의 도입이다. 미국인의 4분의 1이 의료보험에서 소외되고 있다. 그러고도 2004년 미국 정부의 1인당 의료비 지출은 6102달러로 무상의료를 제공하는 영국의 2508달러의 두 배를 훨씬 넘었다. 그만큼 비효율적이라는 말이다. 보험적용을 받더라도 안심하진 못한다. 민영보험사의 수지타산에 도움이 안 되는 환자는 솎아지거나 의료비 지불을 거절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현재 의료체계에서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보험을 거부당하거나 터무니없는 보험료를 부담해야 한다. (…) 2006년 한 가족당 연평균 의료보험료는 1만1천 달러(1100만 원) 이상이었다."
 
  민간보험사는 이윤을 창출하는 회사이지 시민들의 의료비를 지원하는 조직이 아니다. 따라서 보험회사의 이익은 의료비는 되도록 지불하지 않고 보험료만 거두어야 커질 수 있다. 실제로 보험사들은 환자에게 들어가는 치료비를 '의료손실'로 표기한다.  
  "(65세 이상 노인을 위한 연방정부의 공공건강보험인) 메디케어는 재원의 2%만을 관리비 명목으로 지출한다. 민간보험사의 경우에는 관리비용이 15%에 이른다. (…) 이 비용은 민간보험사의 행정비용을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 (…) 여기에는 의료비 지급을 담당하는 많은 인력을 고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추가적인 비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보험사가 환자와 병원에 의료비 지불을 거부할 명목을 찾기 위해 고용한 인력(이들은 환자의 병력을 뒤져 보험사에 미리 밝히지 않은 병력이 있는지 찾는다), 그리고 보험사의 치료비 지불 거부에 맞서기 위해 병원이 고용한 인력, 관련한 법정 분쟁에 들어가는 비용은 미국 정부가 국민의료보험제도를 운영한다면 발생할 리 없는 비용들이다.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고 '시장 법칙'에 의해 날로 올라가는 의료비는 보험료 인상을 부추겼고, 보험료 부담에 허덕이는 기업이 의료보험을 제공하지 않는 경우가 늘었다.  
  "그 결과 2001년 직장에서 운영하는 민간의료보험에 가입되어 있는 미국 노동자는 65%였던데 반해, 2006년에는 그 수치가 59%로 떨어졌다."
 
  진보주의의 최종 목표, 노조운동을 되살리는 것 
  크루그먼의 전략은 사회보장제도가 뉴딜을 대표한 것처럼 국민의료보험제도가 성공하게 된다면, 사회는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개념을 확산시킬 수 있고, 그렇게 된다면 미국의 불평등을 고치는 더 광범위하고 어려운 임무로 눈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에 미국인 대부분은 '거의 모든 사람들은 믿을 만하다'라는 명제에 동의했다. 지금은 대부분 이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다. 1960년대 미국인 대부분은 정부가 '모두의 이익을 위해' 국정을 운영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부분 '소수의 거대 이익집단을 위해' 국정을 운영한다고 믿는다. 불평등의 확대가 우리 사회에 냉소주의가 만연해진 이유라고 믿을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사회 불안을 악화시키는 불평등을 제거하기 위해 크루그먼은 부자를 위한 세금 감면 제도를 폐지할 것, 누진세를 강화할 것, 탈세를 막을 것, 최저 임금 제도를 강화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더불어 그는 노조운동을 되살리는 것이 진보주의자의 최종 목표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캐나다의 경제는 미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임금 불평등의 증가폭이 상당히 작게 나타났는데, 강력한 노동운동이 지속된 것이 주효한 것 같다. 노조는 임금 분포에서 중간을 차지하는 조합원들의 임금을 올린다. 또한 조합원들 간의 임금을 평준화하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노조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경영진에 대항하여 조합원이 아니더라도 너무 높거나 너무 낮은 보수를 제한하는 사회규범을 준수하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노조는 진보적인 정책이 시행되도록 노조원들의 투표를 유도한다. (…) 노조의 부활을 촉진하는 것이 진보적인 정책의 주요 목표여야 한다."
 
  또 다른 재미, 공화당 온건파의 역사 
  레이건이나 조지 부시류의 공화당 급진파에 가려진 공화당 온건파의 역사도 곁가지로 알게 해준다는 게 이 책의 또다른 재미인 듯하다. 워터게이트로 좇겨난 리처드 닉슨이 세금을 올리고 환경규제를 늘렸으며, 국민의료보험을 도입하려고까지 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하기야 외교에서도 실용주의 노선을 채택해 적성국이었던 중국과의 관계를 튼 것도 닉슨이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아니었다면, 닉슨 행정부 시절 미국에 국민건강보험이 도입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52년 공화당이 백악관을 다시 차지하게 만든 주역이었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4년 자신의 형 에드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어떤 정당이든 사회보장이나 실업보험제도를 폐지하려 한다거나 노동법과 농업지원 프로그램을 없애려 든다면, 미국 역사에서 다시는 그 정당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시도가 가능하다고 믿는 소규모 분파도 물론 있습니다. 헌트(H. I. Hunt)와 몇몇 텍사스 석유재벌 그리고 정치를 취미로 하는 다른 지역 출신의 기업인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어리석답니다."
 
  수적으로 열세인데다 어리석었던 "그들"이 어떻게 미국의 정치사회 풍토를 바꾸고 세계의 흐름을 바꾸었는지가 궁금한 독자라면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
[경향포럼]‘미래를 말하다’ (경향, 김민아 | 국제부 차장, 2008년 07월 27일 17:46:20)
  
며칠 전 경향신문 국제면에 ‘1% 부자의, 1% 부자를 위한 미국’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미국의 전체 소득에서 상위 1% 부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높아지는 반면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감세 조치로 이들이 부담하는 세율은 낮아져 부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다’는 내용이다. 미국 월스트리트 저널 보도를 인용한 이 기사는 큰 호응을 얻었다. 한 포털 사이트에서는 댓글이 320개(27일 오후 현재)나 달렸다. 댓글들을 보면 이명박 정부가 미국의 실책을 답습하는 것 아닐까, 하여 그러잖아도 심각한 우리 사회의 양극화가 최악으로 치닫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배어있다.
 
우려는 이미 현실화하고 있다. 정부와 한나라당이 감세 정책을 줄줄이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이 종합부동산세다. 한나라당 이종구 의원(서울 강남갑)은 최근 종부세(주택분) 과세 기준을 공시가격 6억원 초과에서 9억원 초과로 완화하는 내용의 종부세법 개정안을 국회에 냈다. 이 의원은 “9억원까지는 중산층으로 봐도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종부세를 낸 가구는 전체 가구의 2%(37만9000가구)에 불과하다. 이들 중 상당수가 중산층으로 분류되면 종부세를 ‘못 내는’ 98%는 무슨 계층인가. 한나라당은 “종부세 완화가 당론은 아니다”라고 손사래 치면서도 ‘종부세 유지’ 방침은 밝히지 않고 있다. 당정은 또 재산세 세부담 상한선을 조정하되 6억원 초과 주택에 대해서만 50%에서 25%로 낮추기로 했다. 서민·중산층 주택은 ‘해당사항’이 없다.
 
세계적 경제학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의 책 ‘미래를 말하다’(원제 The Conscience of a Liberal)는 이 같은 ‘묻지마’ 감세가 낳을 미래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크루그먼에 따르면 현재의 미국은 경제적 불평등이 가장 심했던 1929년 대공황 직전 상황과 닮은꼴이다. 대공황을 야기한 미국의 ‘천민 자본주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추진하면서 대대적인 변화를 겪었다. 루스벨트는 정부의 시장 개입을 통해 자유방임주의 경제를 수정하고, 노동자 보호 및 사회보장 정책의 주춧돌을 놓았다. 그 결과 1950년대 미국 사회는 빈부 격차가 크게 줄어든 중산층 중심 사회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70년대 이후 평등을 장려하던 제도가 공격받고, 급진적 우익세력이 공화당에 이어 백악관까지 장악하면서 불평등이 되살아났다는 게 크루그먼의 주장이다. 이 글 머리에서 언급한 월스트리트 저널 기사도, 현재 미국의 상위 1% 부자들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29년 당시와 비슷할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전방위적 감세안이 시행되면 한 해 13조~16조원의 세수(稅收)가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재정적자로 가지 않으려면 이명박 정부는 이만큼의 씀씀이를 줄여야 한다. 그러면 어디서? 힘없는 이들을 위한 예산부터 희생될 가능성이 높다. 지난 9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09년 정부 예산 요구안’에 따르면 사회복지·보건 분야 지출 요구액은 올해보다 한 자릿수(9.6%) 늘어나는 데 그쳤다. 최근 5년 동안 연평균 두 자릿수 증가한 데 비하면 상당히 낮다. 감세까지 본격화하면 서민들의 삶은 더 팍팍해질 것이다.
 
크루그먼은 “미국의 불평등을 줄이려면 감세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조세 제도의 누진적 특성을 강화해 세수를 늘림으로써,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확충할 것을 촉구한다.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이명박의 길인가, 크루그먼의 길인가.
 

 

美 커지는 富의 불균형..상위 1% 부자 소득비중 19년래 최고 (뉴욕=연합뉴스, 김현준 특파원, 2008/07/23 23:56)
 
1%부자의, 1%부자를 위한 미국 (경향, 도재기기자, 2008년 07월 24일 18:03:21)
국민 총소득 22%차지 18년만에 최고
세율은 되레 5년째 하락 富불균형 심화

 
미국의 전체 소득에서 소수 부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높아지는 반면, 정부의 감세 조치로 인해 이들이 부담하는 세율은 낮아져 부의 불균형이 극도로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의 경제적 양극화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시행하기 전, 극소수에게 부가 집중됐던 1920년대 상황으로 사실상 후퇴한 것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온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006년 미국의 상위 1% 부자들이 경비 등을 공제한 ‘조정된 국민총소득’(AGI)에서 차지하는 소득 비중이 22%로 1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23일 보도했다. 미 국세청(IRS)이 최근 공개한 2006년 통계자료를 분석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2006년 상위 1% 부자들의 소득 비중 22%는 88년 이래 수치 비교가 가능한 지난 19년 사이에 최고치이며, 2005년의 21.2%보다 오른 것이다. 88년의 비중은 15.2%였다. WSJ는 “이 같은 수치는 수치 산정 방식의 변화로 88년 이전과 구체적인 비교는 힘들지만, IRS의 과거 자료들과 비교하면 1929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일 것으로 분석된다”고 덧붙였다.
 
부자들의 소득은 늘어나고 있으나 세율은 오히려 낮아지는 추세다. 상위 1% 부자들의 2006년 평균 세율은 22.8%로 5년 연속 하락세를 보이면서 18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들의 평균 세율은 88년에는 24%, 96년에는 28.9%였다. 물론 상위 1% 부자들의 소득이 늘어나면서 이들이 전체 소득세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높아지고 있다. 소득세에서 상위 1% 부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88년 27.6%에서 2006년에는 39.9%로 나타나 크게 높아졌다.
 
그러나 최근 5년 간을 보면 이들의 소득 비중이 높아지는 속도가 소득세에서 차지하는 비중의 증가를 앞서고 있어 소득 증가분에 비해서는 세금을 덜 내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전문가들은 부자들의 세율이 낮아진 것에는 2003년에 자본이득 및 배당금에 대한 세율을 낮추는 등 조지 부시 대통령의 몇몇 감세 조치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따라서 세금 문제가 이번 대선의 주요 이슈로 부각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신문은 대선 기간에 후보들 간에 세금 문제에 대한 논의가 벌어지고 의회와 차기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의 감세 조치를 연장할지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면서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는 장기적인 자본이득과 배당금에 대해 지금보다 더 낮은 15%의 세율을 주장하며 감세 조치를 연장하겠다는 입장인 반면,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후보는 2003년 이전의 수준에 맞춰 적어도 세율을 20%대로 올릴 것이라고 밝혔다고 전했다.
  
----------------------------------
美 경제혼란속 '규제시대'로 선회 (뉴욕=연합뉴스, 김현준 특파원, 2008-07-26 00:41) 
 
미국 정부가 주택과 금융 위기로 인한 혼란 속에 1980년대부터 지속돼 온 규제완화의 흐름에서 벗어나 규제를 강화하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이 25일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미 연방 정부와 주 정부들은 동시에 경기 악화와 주택가격 하락, 모기지 부실, 에너지가격 급등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갈수록 강화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1980년대 초 도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 시절부터 4반세기 넘게 미 정부를 규정해온 규제완화를 향한 행보를 거스르는 셈이 되고 있다.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의 크리스토퍼 콕스 위원장은 24일 하원 금융서비스위원회에 출석해 투자은행의 모기업까지 규제하는 권한을 SEC에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티모시 가이스너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도 "모든 것을 들여다 볼 준비가 돼있어야 한다"며 규제 시스템의 재정비를 촉구했다.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이미 금융권에 수백억달러의 긴급 대출에 나서는 비상 조치에 나선 이후 월가 투자은행의 자본 건전성 문제 등을 점검하고 있고 양대 국책 모기지업체인 패니메이와 프레디맥에 대해서도 대출을 해주기로 합의해 이들에 대한 감독도 더 강화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미 교육부도 어려운 금융시장 환경 속에 민간 대출업체들이 학자금 대출 사업을 포기하자 이를 정부가 떠맡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제약업계나 식품업계 등 산업계도 생산품의 안전성 우려로 인해 거의 한 세대 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규제 강화의 압력에 직면해 있다.
 
경제를 어떻게 다룰 것이냐는 문제는 미 대선에서도 핵심 현안이 되고 있다. 미국의 여론도 문제 해결에 정부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주문하고 있다. WSJ와 NBC가 23일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정부가 문제 해결을 위해 보다 더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53%로, 이에 반대하는 응답 42%보다 많았다. 12년전의 여론 조사때에는 정부의 역할을 강화하는 것에 반대하는 의견이 배로 많았던 것과 비교하면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여론도 달라진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미 정부는 지난 230년의 역사에서 규제 완화와 강화를 수시로 오갔다. 대표적으로 1933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대공황의 혼란 속에서 뉴딜 정책을 추진하면서 강력한 규제 기관을 만들었었고, 레이건 대통령은 1981년 규제완화와 작은 정부의 혁명을 시작했다.
 
현재 미 정부의 규제 강화로의 선회 움직임은 한시적일 가능성도 있다. 미 기업연구소(AEI)의 케빈 해셋은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시대가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다가 그렇지 않았던 경우들이 있다"면서 "1980년대 저축.대부조합 부실 사태 당시 정부는 1천250억달러를 투입하면서 개입에 나섰지만 이것이 큰 정부로의 회귀로 이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신문은 정부의 역할이 최근 강화되고 있지만 이것이 수십년간 지속된 산업에 대한 규제완화가 역전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면서 변화의 정도는 민주당의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과 공화당의 존 매케인 상원의원 중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고 전했다.

 

-----------------------------------------------------------------
생전의 그에게 ‘진보 교과서’를 쓰고 싶게 만든 책, <미래를 말하다> (시사IN [98호] 2009년 07월 25일 (토) 00:11:37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
진보 관점에서 본 미국 현대사라 할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단어는 ‘불평등’이다.  
 
지난해 12월 중순, 대통령이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책 집필을 보좌하기 위해 봉하마을을 방문했을 때였다.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근본 프레임을 바꾸는 진보와 민주주의를 위한 교과서를 꼭 쓰고 싶다’면서 “바로 이 책에서 그 작업의 필요성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였다. 꼬박 이틀 동안 진행된 토론에서 이미 이 책에 대해 치밀하게 분석하고 공부한 흔적이 역력했다.
 
구체적인 작업은 올해 들어 시작됐다. 대통령은 치열하게 책을 읽고 자료를 섭렵해나갔다. 마지막 유서에서 ‘읽고 쓸 수도 없다’고 했을 만큼 책을 읽고 쓰는 일은 당시 대통령에게 절박하고도 긴요한 일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이 책은 필자가 방문할 때마다 대통령 서재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지난 2월2일 목차 구성을 위해 1박2일 동안 진행한 토론에서 대통령은 많은 구상을 쏟아냈다.
 
“그 핵심은 국가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성장·복지 논쟁에서 복지의 방향이 옳으며 그것이 바로 국가의 역할이라는 점을 설득하고 알리는 것이 필요하다. 진보의 시대를 준비하고 보수주의 시대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미래 담론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50년간 이어온 선투자 후복지, 성장 중심의 틀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싶다”라는 말로 대통령의 생각을 정리했다. 대통령의 문제의식은 바로 이 책과 직접 맞닿아 있었다. ‘이 시대의 진보 정치는 무엇이며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오래된 대통령의 문제의식은 이 책을 통해 전 세계 진보 정치가 지닌 문제로 연결, 확장된 셈이다.
 
<미래를 말하다>는 진보 관점에서 본 미국 현대사라 할 수 있다. 미국 현대사를 진보 시대, 보수 시대라는 틀로 나누어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명확한 지표와 일관된 논리 그리고 단순한 개념으로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이자 뉴욕 타임스의 고정 칼럼니스트이기도 한 저자는 이 책에서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가장 잘 결합한 글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단어는 바로 ‘불평등’이다. 출발은 부자를 위한 세금정책을 비롯해, 소수가 지배하는 과두정치가 횡행했던 이른바 ‘도금 시대(Gilded Age:마크 트웨인의 소설 제목에서 인용된 것으로, 겉으로만 번듯한 사회라는 뜻)’에 관한 것이다. 이어 이 도금 시대가 대공황으로 귀결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뉴딜 정책, 그리고 이어지는 진보 시대가 어떻게 전개되는지에 대해 ‘불평등’이라는 단어로 정리했다.
 
1970년대부터 등장한 보수주의 시대에 대한 설명은 기사 스크랩을 보듯 사실적이다. 반전과 히피, 흑인 폭동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1960년대를 거치면서 보수주의자들이 백인들의 분노와 두려움, 이 책은 나아가 그것을 바탕으로  ‘법과 질서’라는 어젠다로 결집하는 과정이 그렇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과거 도금 시대와 같은 심각한 불평등과 사회적 위기를 가져오는 과정을 명쾌하게 설명한다.
 
이 책에 제시된 사례들은 꼭 미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도금 시대의 세금 감면과 금권정치, 보수 정당인 공화당 의원보다 훨씬 더 보수적인 ‘버번 민주당 의원’들의 존재, 특히 1980년대 이후 법인세 및 상속세 인하 등은 시차와 공간의 차이만 있을 뿐, 우리 정치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저자는 철저히 케인스주의 관점에 서 있다. 이 책이 주는 현재의 정치적 함의는, 오늘날 미국의 위기는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으로 나타난 케인스주의 정책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결론에는 많은 논의가 수반될 수밖에 없다. 국가의 실패를 시장이 교정할 수 없음은 최근 역사가 보여줬다. 그렇다고 시장의 실패를 정부가 교정할 수 있다는 것도 험난한 논증을 요구한다. 국가-시장이라는 틀로 오늘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가 지식사회에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토론 중에 대통령이 이 책과 관련해 자주 던진 질문 중 하나가 ‘과연 국민의정부, 참여정부는 진보 정권이었나?’라는 물음이었고, 이 질문은 대통령이 집필하기 위해 직접 작성한 목차에도 한 항목으로 포함되었다. 물론 이 물음에는 복지정책, 청년실업, 양극화에 대한 회한이 깔려 있기도 하다. 그러나 ‘진보의 시대, 혹은 보수의 시대’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특정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포함된 질문이기도 했다.
 
이 책에 따르면 공화당 소속 보수 대통령인 닉슨은 오히려 진보 정책을 추진했다. 사회보장 지급액을 인플레이션에 연동시켰고, 저소득층 생활보조금 제도를 마련했으며, 심지어 국민의료보험까지 도입하려 했다. 반면, 미국의 클린턴이나 영국의 토니 블레어처럼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그렇다면 이들은 진보 정부인가, 보수 정부인가. 같은 맥락에서 대통령은 토니 블레어의 ‘제3의 길’이 ‘시장에 굴복한 불가피한 선택인가, 아니면 갱신을 위한 자율적 선택인가’라고 자주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다른 이론서와 달리 정치적으로 선택 가능한 논의를 하는 점이 이 책의 특징이다. 일반적으로 학자라면 미국 자본주의 전개 과정에 대한 분석을 통해 사회변화 과정을 설명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정치적 선택을 통한 한 사회의 변화에 주목한다. 대통령이 이 책에 주목했던 것은 바로 정치가 우리 사회를 진보시키는 데 어떤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는지, 그 물음에 일정한 대답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8/07/28 05:01 2008/07/28 05:01

댓글0 Comments (+add yours?)

트랙백0 Tracbacks (+view to the desc.)

괜히 노명박이 아니다 - “‘MB 정부’ 하다보니 노무현 정부네”

View Comments

아래 한겨레의 기사는 위기상황센터의 확대신설, 청와대 홍보기획관의 신설, 총리실의 정책조정 및 사정 기능의 부활을 들어 이명박 정부가 하다보니 노무현 정부가 되었다고 얘기한다. 틀린 지적이 아니다.
 
이명박 정권은 무조건 노무현 정권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그와 반대로, 또는 그와는 다르게 하려고 했지만, 문제는 이들이 준비된 정권인수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뚜렷한 국정이념도 없고, 있다고 해도 앙상한 시장중심, 작은 정부, 규제완화 등 뿐이었는데, 이 또한 스스로 고소영, 강부자 인사, 낙하산 인사를 거치면서 앙상하게 만들고 말았다. 남은 것은 이제 악과 깡 뿐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노무현 정부의 것을 뒤따라한다고 할 때 이 기사에 나오는 것처럼 단지 국정운영시스템 상의 몇 개의 기구변화를 가지고 얘기해서는 안된다. 국정이념이나 정책등도 따져봐야 한다. 내가 보기엔 공기업 민영화 또한 그렇게 될 것 같고, 최근에 나온 인터넷 정보보호종합대책이나 상생도약을 위한 지역발전정책 기본구상 또한 노무현 정부의 것을 계승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하루아침에 만든 것이 아니라 바로 노무현 정부의 정책 토대 위에서 조금 변형시켰을 뿐이라는 것이다. 경찰의 촛불집회에 대한 폭력진압도 마찬가지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집회, 시위 중에 사망한 사람이 몇 명인가. 게다가 노무현 정부는 청와대 앞 거리는 물론 광화문에조차 시위대가 진입하는 것을 허용한 적이 없다.
 
노명박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양태뿐만 아니라 본질까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는 다른 대치선보다 상식 대 비상식의 구도가 정확하다고 본다. 이 정권은 도대체 상식이 없는 것 같다.
 



---------------------------------
“‘MB 정부’ 하다보니 노무현 정부네” (한겨레, 황준범 기자, 2008-07-23 오후 07:18:48)
국가위기상황센터 신설·홍보수석도 부활
“없애놓고 보니 그게 다 필요한 거였구나”

 
“하다보니 노무현 정부네.” 
 
최근 이명박 정부의 잇따른 국정운영 시스템 수정·보완을 두고 청와대 안팎에서 나오는 얘기다. 노무현 정부 것은 뭐든지 부정한다는 이른바 ‘ABR(Anything But Roh)’ 기조로 달려왔으나, 4개월여 시행착오를 거치며 전임 정부 시스템과 비슷하게 되돌아가는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는 지난 22일 청와대에 국가위기상황센터를 설치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과 함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를 폐지하고, 2급 행정관이 이끄는 위기정보상황팀을 임시조직으로 운영해왔다. 그러나 금강산 사건으로 허점이 드러나자 외교안보수석이 수장을 겸하는 국가위기상황센터를 신설했다. 국가안전보장회의가 위기대응 사령탑으로서 대통령에 직보하던 참여정부 시절과 유사하다.
 
홍보 기능에서도, 이명박 정부는 국정홍보처와 청와대 홍보수석을 폐지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쇠고기 촛불’을 겪으면서 지난달 수석급인 홍보기획관을 신설했다. 사실상 과거 정부의 홍보수석을 부활시킨 셈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홍보기능과 관련해 “없애놓고 보니 ‘그게 다 필요한 거였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국무총리의 권한과 위상을 되살린 것도 마찬가지다. 이명박 정부는 대통령과 청와대에 국정 사령탑 권한을 집중시키면서, 총리실은 국무조정실과 비서실을 통폐합하고 인원도 634명에서 300명으로 확 줄였다. 이 대통령이 총리에 부여한 역할은 ‘자원외교’였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은 곧 대통령의 업무 피로도를 높이고, 모든 책임과 비판을 대통령이 직접 떠안게 하는 문제를 낳았다. 정부는 결국 지난 16일, 총리 주재 국가정책조정회의를 매주 정례화했으며, 총리실 산하 ‘정부합동점검반’도 ‘공직윤리지원관’이라는 이름으로 부활시켰다.
 
어쨌든 청와대 사람들은 ‘노무현 시절로 돌아가는 것 아니냐’는 지적에 극도로 거부감을 보인다. 청와대는 국가위기상황센터 신설을 발표하면서도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처 체제로 회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몇차례 강조했다. 이 대통령의 한 측근은 “국무총리 권한이나 홍보기능 문제는 노무현 정부 이전에도 있던 체제로 가는 것이니까 꼭 ‘노무현 시절로 간다’고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 핵심 참모는 23일 “처음에 노무현 정부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너무 강했던 것 같다”면서, “하지만 잘못된 점이 있으면 고쳐야 하고, 모든 것이 정반합의 과정을 거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8/07/24 17:26 2008/07/24 17:26

댓글0 Comments (+add yours?)

트랙백0 Tracbacks (+view to the desc.)

교육감 직선제는 '盧명박'의 독사과 - 교육 분권화에 놀아날 때가 아니다 (하재근, 08-07-22)

View Comments

아래 글은 교육자치에 관한 글이다. 교육자치와 지방자치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읽어봐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 전 서울시 교육감이었던 공정택은 스스로 리틀 이명박이 아니라 리틀 노무현이라고 봐달라고 얘기한다. 자신이 노무현 정권 하에서 교육감이 되었고, 그의 정책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고 보니 민주당이 주경복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나섰지만, 일부 호남 인맥이 공정택 선거운동을 한다는데, 역시 지연의 끈은 어쩔 수 없나 보다.
 
그렇다고 주경복 후보가 내 구미에 딱 들어맞는 후보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소위 진보진영의 대부분이 그의 선거를 돕고 있지만, 주경복 선본은 민주당의 지원을 많이 기대한다고 한다. 또한 당선되었을 때 과연 진보적인 정책기조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지도 조금은 불안하고... 당선시켜 놓았다가 후회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얘기다. 하지만 현재 상황에서는 그를 넘어서는 후보가 없기 때문에 그를 지지할 수밖에는 없는데, 하재근씨는 근본적으로 교육감 직선제 자체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실제 조금만 생각해봐도 진보적인 교육감이 당선되어 할 수 있는 것은 설겆이가 아닌가 싶다. 제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또한 자칫 허물을 다 뒤집어쓸 수도 있다. 지금이야 촛불에 기대어 1년 반짜리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 기대를 걸고 희망을 갖고 있지만, 이 다음의 선거에서 과연 제대로 된 교육감을 낼 수 있을까. 직선 교육감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해볼 때이다. 하긴 이전에도 전교조와 교육운동단체들도 교육포퓰리즘을 우려하여 교육감 및 교육위원 직선제에 대해 그리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하재근 님이 지적한 바대로 교육 및 부동산에 나타나는 한국적인 특수성도 감안해야 한다.
 
직선제가 민주주의인 것은 아니다. 직선제 또한 대의민주주의의 일종일 뿐이며, 그 한계가 명백하다. 그 한계를 우리는 이명박대통령에게서 확인하고 있다.           
 
 
----------------------------------
교육감 직선제는 '盧명박'의 독사과 (프레시안, 하재근/사회문화평론가, 2008-07-22 오후 12:26:14)
[기고] 교육 분권화에 놀아날 때가 아니다  
  
  오는 30일, 주민 직선에 의한 첫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치러진다. 이번 선거는 이전까지 교육위원, 학교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치러졌던 선거 과정에서 각종 부정 의혹 등이 불거지면서 주민 직선제로 바뀐 뒤 최초로 치러지는 선거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받고 있다.
  
  그러나 교육계에서는 여전히 직선제에 대한 논란이 진행 중이다. 각 지역에서 주민 손으로 직접 교육의 책임자를 선출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제 자식 이기주의'로 대표되는 한국의 교육 풍토 속에서 직선제가 교육 포퓰리즘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지적이다. 사회문화평론가 하재근 씨가 "한국상황에서 각 지역별 교육 자치는 곧 교육의 종말이 될 것"이라며 "지방 분권이 지방 토호의 득세로 귀결된 상황을 기억하라"고 주장하며, 교육 분권화와 주민 직선제를 반대하는 글을 보내왔다. 최근 서울시 의회 의장 선거 과정에서 드러났듯 분권화가 주민들의 참여를 확대하기보다는 악성적 권위를 만들어내고 부정부패의 빌미가 되는 한국 특유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프레시안>은 교육감 주민직선제, 나아가 교육분권화의 또 다른 면을 생각해 보게 하는 논쟁적인 글이라고 판단해 이 글을 싣는다. 독자 여러분의 활발한 토론을 기대한다. <편집자>  



  지금은 교육분권화를 저지할 때지 놀아날 때가 아니다. 교육감 직선제는 교육분권화라는 몸통의 한 부분이다. 좋은 후보를 위해 운동하건 나쁜 후보를 위해 운동하건 부처님 손바닥 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손오공처럼, 분권화 개미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이미 15년간 분권화 정부를 경험했고 이명박 정부의 등장으로 분권화의 '끝장'을 보려는 중이다. 노무현 정부가 남겨 놓고 간 유산이 교육감 직선제다. 이명박 정부는 그것을 받아 국가의 권한을 교육감에게 넘기는 방안, 즉 학교자율화를 추진하고 있다. 이 두 가지가 조합되면 각 지역별 직선에 의한 교육자치가 완성된다. 그것은 교육의 종말이 될 것이다.
  
  대통령과 싸우는 것이 가장 유리하다  
  먼저 정치적인 차원에서 보자. 자, 교육감 선거를 했다. 좋은 사람을 교육감으로 뽑았다. 우리 교육에 대한 국민의 불만족, 불신이 사라질까?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초중등학교에서 영어몰입교육 안 하고, 0교시 안 하고, 야자 안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잘 사는 집 아이들이 일류대를 '슴풍 슴풍' 들어갈 때 나머지 국민들이 소외되는 한 한국인의 교육불만족은 영원하다. 잘 사는 집 애들이 공부 잘 하는 건 학교 때문이 아니라 사교육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육감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설사 못 사는 집 애들이 일류대를 간다 해도 그렇다. 대학서열체제 승자독식구조에서 승자는 언제나 소수다. 그러므로 다수는 언제나 불만족스럽다. 이것이 바로 한국 교육이 영원히 동네북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교육감에겐 이 구조를 해체할 권한이 없다.
  
  노무현-이명박식 분권화 구조에서 교육감에겐 초중등교육을 말살할 권한은 있지만 살릴 권한은 없다. 왜냐하면 이미 설명했듯이 한국 초중등교육은 대학입시에 종속된 신세이고, 입시경쟁을 초래하는 대학서열체제는 교육감의 권한 밖에 있기 때문이다. 교육감이 아무리 잘 해 봐야 현상유지다. 교육파탄엔 변함이 없다는 소리다.
  
  이 상황에서 직선 교육감이 생기면 국민 입장에선 누굴 원망해야 하는지 헷갈린다. 교육불만족의 원흉이 대통령인가, 교육감인가? 행여 전교조가 미는 '좋은 후보'가 당선되기라도 하면, 그때부턴 전교조가 불만족의 표적이 될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 이와 비슷한 일을 이미 당했었다. 민생파탄에 대한 국민의 불만족이 좌파 빨갱이 때문이라는 황당한 선동이 먹힌 것은, 국민이 보기에 좌파가 민 사람이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었다.
  
  더 중대한 함정은 권리를 찢어놓으면 최종 책임주체가 사라진다는 데 있다. 숭례문이 불탔을 때 도대체 어디에 책임이 있는 건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교육이 불탔을 때도 비슷한 양상이 된다. 일부는 교육감을 원망하고 일부는 대통령을 원망하고 일부는 전교조를 원망하다 결국 불탄 잔해만 남는다.
  
  한국인이 관심 갖는 선거는 대선이 유일하다. 국회의원 선거에도 일정 정도 관심을 갖는다. 광역지자체장? 여기서부터 조금 애매해지기 시작한다. 그 외 선거들에는 관심도 없고 관심 가질 시간도 없다. 자기 동네 구의원, 시의원이 누군지 아는 사람 못 봤다. 나도 모른다.
  
  대선은 전 국민이 관심을 갖기 때문에 공공적 민주적 이해가 결집된 바람선거가 가능하다. 잘게 쪼개진 선거는 누가 누군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기 때문에 조직선거로 결판나기 쉽다. 즉 한국에선 대선이 가장 민주적이고 세부단위 선거일 수록 봉건적이다. 교육감이 아닌 대통령과 끝장을 봐야 한다.
  
  각 지역별로 직선 교육감이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중구난방으로 당선돼 국가적 책임주체가 사라지면 '콩가루 판세'가 된다.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을 때는 촛불집회라도 할 수 있지만 각 지역 교육감과 줄다리기할 때는 일부 운동권만 쓸쓸히 기자회견하게 된다.
  
  모든 불만족의 책임을 대통령에게 덮어씌우고 국민적 바람몰이로 결판내는 것이 가장 유리한 방법이다. 분권화는 이 바람을 잘게 쪼개 미풍으로 만든다. 교육감들과의 싸움으로 솔솔 바람 빼는 방식이 아닌, 불만의 에너지를 증폭시켜 청와대에 터뜨려야 한다. 그래야 국민들이 광장에 모일 수 있다.
  
  지역간 경쟁 초래하는 수요자요구를 분쇄해야  
  이젠 본질적인 차원에서 보자. 우리나라에 절대로 지역주민의 손을 타선 안 되는 분야가 두 개 있다. 바로 부동산정책과 교육정책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지역주민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분야가 두 개 있다. 바로 부동산정책과 교육정책이다.
  
  지역민심은 이 두 가지 이슈에 '환장'한다. 지난 총선 때 모든 후보들이 저마다 자기 동네 부동산, 교육 발전시키겠다며 환장한 민초들에 영합했다. 오죽했으면 진보신당마저도 교육특구라는 말을 써야만 했을까? 범국민적으로 미쳐 있는 상황이다.
  
  교육분권화는 미친 상황을 미치고 환장할 상황으로 만든다. 직선제는 주민들의 '광기'가 지역 교육에 압력으로 작용할 통로가 된다. 이때의 주민은 공화국의 시민이 아닌 소비자로서의 교육수요자다. 이들이 원하는 건 자신들 지역의 학교가 다른 지역보다 성적이 잘 나오는 우수학교가 되는 것이다. 각 지역이 부동산 정책을 결정하면 난개발경쟁이 일어나는 것처럼, 이런 수요자들의 요구가 교육정책에 반영되면 성적경쟁이 가중된다.
  
  지역 단위 교육수요자들의 요구를 '분쇄'하는 것이 한국에서 교육을 살리는 첫걸음이다. 노무현-이명박 대통령은 다르게 생각한다. 노명박 정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수요자 중심주의'다. 그것은 수요자의 선택권 확대로 나타난다. 교육감 직선제는 수요자의 선택권을 극대화하는 방편중의 하나다. 선택권 극대화를 다른 말로 하면 '시장화'가 된다. 즉, 교육감 직선제는 교육 시장화 패키지의 한 구성품이다.
  
  소외지역, 소외서민 죽이는 독사과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자율 뒤엔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사실이다. 교육감 직선제는 필연적으로 교육감과 교육청의 자율성을 확대한다. 그에 따라 지역별 책무성이 커지면 결국 각 지역의 교육은 완전히 독립적으로 운영되게 될 것이다. 이런 사태를 보고 민주주의의 확대라고 좋아한다면 노무현식 신선놀음이다.
  
  이건 지역 죽이기에 다름 아니다. 각 지역이 독립하게 되면 잘 사는 지역 부자들이 다른 지역 교육비를 보조해줄 이유가 없어진다. 있는 지역의 교육은 유복하게 되고, 없는 동네는 가난한 교육을 하게 된다. 서울-수도권-영남대도시 지역 아이들만 OECD 회원국다운 교육을 받고 나머지 지역은 소외될 것이다.
  
  분권화가 세분화되면 결국엔 서울 강남, 목동, 경기도 분당, 과천 등 중상층 밀집지역의 학교들만 승천하게 된다. 이런 지역의 학부모들은 대체로 일반적인 농어민-노동자-영세자영업자들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므로 교육감 직선제-교육분권화는 계층 차원에서 보면 서민차별정책이 된다.
  
  잘 사는 지역은 잘 사는 지역대로 자기 교육감 뽑고, 없는 동네는 없는 대로 자기 교육감 뽑아서 각자 자율적으로 잘해보는 나라의 공교육 붕괴는 필연이다. 마치 민주주의의 진전인 것 같은 외피의 교육감 직선제는 노무현의 독사과다. 달콤한 듯하나 그 안엔 독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은 이명박이 추진하는 학교자율화의 짝일 뿐이다. 노무현이 토스하고 이명박이 받았다.
  
  직선제에 현혹돼선 안 된다. 국가에 교육에 대한 책임을 요구하고, 국가와 싸워야 한다. 교육감들과의 싸움으론 대중적인 전선을 형성할 수 없다. 지금은 촛불집회라는 특수한 국면이라 서울시 교육감 선거가 바람선거의 특성을 조금 보이고 있지만, 교육감 선거는 근본적으로 조직선거일 수밖에 없다. 수요자들의 이기심과 조직의 힘. 딱 토호들이 활약할 수 있는 토양이다. 이런 구조에 교육을 맡길 수 없다.
  
  선거운동이 아니라 교육분권화 반대 싸움을 해야 한다. 국가의 차원에서 광장에 모여 전 국민이 단일한 대상을 향해 촛불이든, 무엇이든 드는 방식으로만 미친 교육을 끝장낼 수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8/07/22 23:44 2008/07/22 23:44

댓글0 Comments (+add yours?)

트랙백1 Tracbacks (+view to the desc.)

장하준ㆍ정승일. 2005. 『쾌도난마 한국경제: 장하준ㆍ정승일의 격정대화』. 서울: 부키. 발췌정리

View Comments

책을 읽은 후에 짧게나마 그 때 그 때 정리를 해놓지 않으면 나중에 그 책을 읽었는지조차 애매하게 된다. 장하준 교수의 『사다리 걷어차기』는 2년 여 전에 읽었는데, 간략하게나마 정리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된다. 물론 이 책의 주요한 내용은 『개혁의 덫』이나 『나쁜 사마리아인들』 등의 일련의 저술 속에서 요약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풍부한 예들을 정리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쾌도난마 한국경제: 장하준ㆍ정승일의 격정대화』는 『개혁의 덫』과 함께 읽어보면 좋은 책이다. 이것도 산 것은 꽤 되었는데, 한달 전 쯤에 읽었다. 사실 읽는데 그리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제는 장하준 교수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대충 파악할 수 있을 듯하고, 그의 논리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동의할 수 없는 지점들이 많다. 그는 여전히 조선일보에 글을 쓰고 있고, 경제 분야 외의 다른 영역들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부족한 면이 보인다.
 
『쾌도난마 한국경제: 장하준ㆍ정승일의 격정대화』에서는 각 장의 끝에 이종태 기자가 장하준, 정승일의 대화 내용을 정리한 것이 나온다. 이를 읽다보면 그의 정리능력이 탁월한 것에 새삼 놀라게 된다. 



--------------------------------------
장하준ㆍ정승일. 2005. 『쾌도난마 한국경제: 장하준ㆍ정승일의 격정대화』. 서울: 부키.
  
아래 글은 이정환 기자가 발췌 정리한 것에 덧붙였다.
 
○ 오늘날 이른바 경제 개혁을 추진한 결과 한국의 경제 종속은 더 심화되고 말았다. 그 원인은 신자유주의적 구조를 맹목적으로 도입한 데에 있다. 노무현 정부의 얼치기 개혁이 신자유주의를 가속화하고 경제의 역동성과 성장 잠재력을 갉아먹고 있다.
 
우리는 성장을 위해 신자유주의를 도입했지만, 신자유주의적 경제 체제는 금융 자본을 위한 시스템으로 저성장을 지향하기 때문에, 선진국으로 도약하고자 열망하는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맞지 않는 제도이다. 신자유주의는 기업의 설비 투자를 막고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 성장은 정체되는데 금융자본의 이익은 늘어난다. 그게 바로 신자유주의의 본질이다.
 
과거의 잘못된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 불가피하다 내지는 필수적이라는 주장은 별로 근거가 없다. 재벌의 과잉 투자가 문제라고들 한다. 그러나 사실 지난 50년 동안 우리는 과잉 투자 때문에 성장해왔다. 포항제철도 그렇고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도 그렇다. 과잉인가 아닌가는 지나봐야 알 수 있다. 오히려 그런 과잉 투자 때문에 금리도 높았고 저축도 계속 늘어났다. 그래서 저축과 투자, 성장의 선순환이 가능했다. 신자유주의는 그런 선순환 구조를 무너뜨렸다. 이제는 기업의 이익이 설비 투자에 들어가지 않고 주주들에게 빠져나가고 있다. 일자리는 계속 줄어든다. 
 
IMF 직전에는 분명히 과잉 투자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과잉 투자는 금융시장 개방을 타고 흘러들어온 외국 자본이 조장한 것이었다. IMF 사태 직전 몇 년 동안의 과잉 투자는 우리나라 경제 체제의 문제가 아니라 금융 자유화의 결과였다. IMF의 진짜 원인은 재벌의 과잉 투자가 아니라 금융 자유화에 있었다. 게다가 외국 자본이 우리나라 기업들의 질적 수준을 높여 준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남미의 경우 외국 자본을 도입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산업 공동화만 초래하였을 뿐이다(장하준ㆍ정승일, 2005: 42-43).
 
○ 두 사람이 말하는 종속은 1980년대의 종속이론과는 조금 다르다. 그때 우리는 엄청난 빚에 시달렸지만 결국 모두 갚아버렸다. 그게 다른 주변부 나라들,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멕시코와 달랐다. 우리에게는 반도체와 자동차, 조선 등 수출 산업이 있었다. 기술 종속은 불가피했지만 결국 자립에 성공했고 종속을 벗어났다. 정작 문제는 지금부터다. 자본 시장이 개방되면서 외국 자본이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고 지배권을 내주는 상황이 됐다. 주주 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본격적인 종속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보면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다. 1961년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였다. 아프리카의 가나는 179달러, 아르헨티나는 400달러였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가난한 나라였다. 1960년대 우리나라 경제 성장률은 평균 6%에 이르렀다. 6%면 12년만에 두배가 된다는 이야기다. 
 
○ 경제 발전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들이 희생당하고 착취당한다고 해서 반드시 경제가 발전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박정희 시대에 국가와 자본은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착취했다. 그러나 자본주의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노동자를 착취해야 성립할 수 있는 체제임을 명심해야 한다.
 
박정희의 자립적 자본주의 시스템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박정희는 자본주의적 경제성장, 세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비교적 자립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노동자를 착취했지만 자본주의적 경제 발전엔 성공했다.
경제 발전에 성공한 나라의 지배층과 실패한 나라의 지배층 간에는 착취로 빨아들인 부를 어디에 사용했느냐에서 차이가 있다. 박정희 시대의 국가는 이승만 체제나 남미의 경우와 같이 민중들로부터 수탈한 부를 흥청망청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인 방향으로 투자하도록 강요하는 역할을 했다. 즉 한국의 경제 발전은 착취 때문에 성공했다기보다는 착취한 부를 효율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성공했다(장하준ㆍ정승일, 2005: 52-54).
 
○ 토지 개혁이라는 특수한 조건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경제 개발을 지휘했던 간에 현재의 수준 혹은 그 이상으로 한국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그런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동일한 조건이 존재한다고 해도 누가 어떤 정책을 운용하고 어떤 행동을 취했는가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박정희 식의 경제 정책을 포함하여 대만ㆍ싱가포르ㆍ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제정책에는 맑스주의의 영향력도 상당하다. 박정희는 한때나마 공산주의자였으며, 그의 정책은 신고전파 경제학적인 시장 경제 노선과는 너무 다르다. 성장을 추구했지만 전통적인 시장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시장주의는커녕 오히려 과도하게 시장에 개입하고 침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1972년 사채를 동결한 8ㆍ3 조치와 같은 경우 시장주의는커녕 사유재산 제도까지 폭력적으로 침해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박정희의 노선은 자본주의라면 몰라도 시장주의는 아니었다(장하준ㆍ정승일, 2005: 56-59).
 
○ 박정희는 자본가들의 ‘투자ㆍ소비ㆍ자본의 유출’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자본을 통제하는 것이다(장하준ㆍ정승일, 2005: 62-63).
 
○ 박정희 체제는 민주주의가 아니었고 자유주의도 아니었다. 박정희가 성공한 이유는 민주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주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경제 개발에 성공한 것은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가혹한 억압과 수탈의 결과이겠지만, 고도성장이 이루어진 30년 동안 실질임금은 꾸준히 상승했다. 한국의 실질임금 상승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으며, 노동자ㆍ농민을 억압하지 않고 경제를 발전시키는 데 성공한 나라는 없다.
 
박정희의 경제개발과 같은 적극적이고 목표 지향적인 방식의 경제 개발이 필요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 과정에서 착취와 저임금 구조를 피하는 것이 가능한지는 의문이다. 착취와 저임금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산업화가 가능한지 검토할 필요도 있다(장하준ㆍ정승일, 2005: 68-71).
 
→ 두 사람의 박정희 옹호는 재벌 옹호로 이어진다.
○ 자원도, 자본도 없는 우리나라 상황에서 재벌 시스템은 산업의 고도화와 세계 시장 진출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중소 기업 위주의 개발 방식은, 대만의 예에서 볼 수 있듯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벌 개혁은 경제 민주화와는 무관하다. 재벌이 박정희의 개발 독재 하에서 성장하여 발전해 온 것이기는 하지만, 재벌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무모할 정도로 과감한 투자를 해나갈 수 있었다. 재벌은 경제 성장을 위한 시스템이었고, 그런 경제 성장 자체는 경제 민주화와 어긋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재벌들을 어떻게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견인하느냐는 점인데, 현재의 무조건 백안시하는 태도나 소액주주 운동으로 상징되는 영미식 주주 자본주의의 도입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서로 간에 대립과 갈등만 커질 뿐 국민 경제에는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자본을 통제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이미 자본 시장 개방이 이뤄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재벌을 깨면 노동자들이 아니라 외국인 투자자들과 금융 자본만 이익을 보게 된다. 스웨덴은 발렌베리 같은 재벌을 인정해 주는 대신 세금도 많이 걷고 사회적 책임도 부담시켜 결과적으로 엄청난 재벌이 없는 영국 같은 나라들보다 훨씬 더 평등하고 부유한 사회를 만들었다.
 
유럽의 경우 재벌 가문이 그룹을 지배할 때 노동자들이 경영에 참여할 수 있었으며, 사회적 타협은 재벌이 지배할 때만 가능하다. 하지만 초국적 금융자본은 이익을 챙겨서 떠나면 그만이며, 기업의 미래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들이 노동자들과 타협할 이유가 없다.
 
현재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은 유럽식으로 재벌 시스템을 일정 부분 인정해 주는 대신, 재벌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역할을 끌어내는 대타협을 이루는 것이다.
 
외환 위기 이래 발생한 일련의 경제적 문제들이 박정희의 경제 개발 노선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국 시민 사회는 박정희 식 경제 정책의 모든 것을 부정한 결과, 독재자인 박정희가 시장주의와 거리를 뒀기 때문에 시장주의를 민주주의로 착각하고 고집하고 있는 것 같다(장하준ㆍ정승일, 2005: 84-89).
 
○ 신자유주의 혹은 주주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저투자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시장이 너무 잘 작동하기 때문이다.
 
한국은 요소 투입형 성장을 거듭했기 때문에 내실 있는 성장의 원천인 기술 발전 혹은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결과 1997년 외환 위기를 맞게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이렇게 외형적 성장을 비판하면서 내실 있는 성장을 주장하는 것은 시설 투자와 고용을 예전보다 줄여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내실 있는 성장론의 관점에서 보면, 투자와 고용이 줄어드는 현재의 경제 상황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저투자 저고용에 따른 저성장 시스템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가 아프리카형의 저투자 저성장 체제로 바뀌고 있는데도, 노무현 대통령은 ‘성공적인 시장 개혁의 결과 이제는 요소 투입형에서 총요소 생산성 증대형으로 경제 구조가 바뀌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1997년 이전에도 외국에서 설비와 기술을 수입해 학습하면서 기술 혁신과 내실 있는 성장을 해 왔다. 내실 있는 성장을 해 왔기 때문에 삼성도 있고 현대도 있다. 최근 한국 경제에서 분배와 성장의 선순환이 끊어진 이유는 시설 투자를 안 하기 때문이다. 결국 소위 ‘내실 있는 성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고용 창출이 안되는 것이다(장하준ㆍ정승일, 2005: 102-105).
 
○ 한국 정부가 시장을 왜곡시켰기 때문에 국민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다. 한국은 식민지 경험을 가진 나라이며, 지금도 세계 최강의 열강들에게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분배와 환경만으로 강조하다가 경제 성장에서 뒤처지고 만다면, 20년쯤 뒤엔 중국이 국권을 위협하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우리나라는 아직 충분히 성장한 게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분배를 잘하면 그 결과로 경제 성장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추상적인 믿음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그래서 구체적 성장 정책이 없다.
 
한국의 소득 분배가 1997년 이후 급격히 악화된 이유는 한국의 금융, 노동, 무역 시장과 기업(재벌) 시스템들이 서로 맞물리면서 신자유주의에 포섭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조세, 복지 등 국가의 재분배 정책만 개선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진보 좌파도 성장과 소득 분배가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을 정치적으로 철저히 인식해야 한다.
 
현재 자본 시장 개방과 주주 자본주의 때문에 투자가 줄면서 일자리가 만들어지지 않고 있으며, 노동 시장 유연화의 압력은 계속 거세지고 있다. 아무리 재벌이 밉더라도 시장 근본주의를 용인해서는 안된다. 진보 좌파라면 시장주의를 비판해야 한다(장하준ㆍ정승일, 2005: 114-119). 
 
→ 이 일련의 논의에서 시장주의와 성장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장하준과 정승일은 시장주의가 성장을 막고 있다는 논리를 펴면서, 분배를 하려면 성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성장을 하려면 시장주의 또는 신자유주의와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 투자가 불균등하게 이루어지는 바람에 소득 격차가 커지고 있다.
현재는 설비 투자 자금 중 20-30% 정도만 외부 자금이고, 70-80%는 내부 자금이다. 이것은 금융 부문에서 떠돌고 있는 돈이 기업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기업 간의 설비 투자에서, 그리고 R&D 투자에서 심각한 양극화가 일어나고 있다.
 
경제 발전 초기엔 기업들이 내부에 쌓아둔 자금이 없기 때문에 외부에서 돈을 많이 빌리게 된다. 그래서 부채비율이 높아지는 것인데, 이러한 현상은 경제가 성공적으로 발전하여 기업들이 수익을 내고 내부 자금이 쌓이면 개선된다.
 
우리나라 기업들은 외환 위기 직후 400%에 이르던 부채비율을 하루아침에 200%로 낮추라고 강요당했다. 이에 따라 은행들도 기업에 돈을 빌려 주지 않게 되고, 기업들도 부채비율을 높이느니 차라리 투자를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결국 IMF 이후에 우리 기업과 은행들이 앞다투어 부채비율 줄이기에 나선 결과 공격적으로 투자에 나서지 않게 되었고, 그만큼 기업의 성장성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놀라운 현상은 정부의 예측과는 정반대로 한국 기업들이 현재 자본시장(주식 시장과 회사채 시장)에서 공급 받는 자금의 규모가 외환위기 이전보다 적다는 것이다. 기업들이 경영권 방어 등의 목적 때문에 자사주 매입 같은 것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결국 주식 시장이 기업에 돈을 공급하기는커녕 기업의 자금을 삼키고 있다.
 
부채비율이 줄여서 보는 이익은 결국 주주들의 몫이다. 주주들은 부채를 늘려서 새로운 사업에 나서기 보다는 그냥 현금을 쌓아두기를 바란다. 주식시장은 기업의 이익을 수탈하는 합법적 창구가 됐다. 주주들은 돈을 벌겠지만 그 이익은 결국 기업과 나라의 미래를 희생한 대가다.
 
주식 시장을 중심으로 금융 시스템의 틀을 짜겠다는 것이 김대중 정부의 금융 개혁이었는데, 문제는 한국의 경우 은행 시스템 전체가 주주 자본주의에 포획되어 버렸기 때문에 이미 은행에서도 기업에 효율적인 자금 공급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다. 은행들도 (외국인) 주주들의 눈치를 보면서 리스크가 큰 기업대출을 피하고 가계 대출, 주택 담보 대출에 전력하게 되고, 그 결과 부동산 시장에서 거대한 투기적 거품이 창출되었다. 지금 한국 경제의 문제점들은 경제 개혁이 잘못 실행되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잘 실현된 결과라고 봐야 한다.
 
노동 시장 유연화를 가장 강력하게 요구하는 것은 최고경영자가 아니라 주주들이다. 노동자들을 해고하면 주식 가치가 올라가기 때문이다.
주주 자본주의 하에서는 적대적 M&A가 이루어지면 최고경영자가 교체되는 게 보통인데, 이 경우 단체협상도 무효화될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주주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처럼 최고경영자가 3년마다 갈린다든가, 심지어 3개월마다 분기별 보고의 결과에 따라 해임될 수 있는 국가와 일본같이 장기간의 임기가 보장되는 나라의 고용 관계는 다를 수밖에 없다(장하준ㆍ정승일, 2005:  126-134).
 
○ 은행들은 (외국인) 주주들의 눈치를 보면서 단기 수익을 창출하는 데만 급급하고 있다. 해외 투기자본인 뉴브리지는 제일은행을 인수해서 사람 자르고, 지점 줄이고, 서비스 질을 낮추었다. 이런 식으로 경영하기 때문에 회임 기간이 길고, 리스크가 큰 기업 대출은 기피하고 안전한 가계 대출에만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리딩 뱅크가 된 국민은행은 주주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단기적으로 수익성이 높게 나오는 주택담보 대출이나 소호(SOHO) 대출에 주력하면서 전체 금융시장의 안정을 위한 정부 개입에 대해서는 ‘관치 금융’이라며 거부하고, 학자금 융자처럼 단기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대출은 포기하고 있다. 그 결과 돈이 몰리면서 부동산은 폭등하고 중소기업에는 돈이 마른다. 은행과 대기업이 돈을 벌지만 그 돈은 주주들에게 빠져 나간다. 미래는 암담하지만 주주들은 먼 미래를 신경쓰지 않는다. 언제든지 떠나면 그만이니까. 그것이 신자유주의이고 주주 자본주의이다(장하준ㆍ정승일, 2005: 139-141).
 
○ 노동시장에서 ‘수량적 유연성’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기능적 유연성’이다. 일본 기업들은 내부 교육 시스템을 통해 노동자들이 여러 가지 기능(다기능)을 갖출 수 있도록 해준다. 때문에 시장의 수요가 변화하여 현재와 다르거나 더욱 개량된 제품을 생산해야 할 때 기존의 노동자들을 생산 라인만 바꿔서 그대로 재배치하는 방식으로 발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고, 노동자들을 자를 필요도 없었다.
노동시장의 기능적 유연성이 일본에서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수량적 유연성이 없었기 때문에, 즉 일자리가 불안하지 않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는 노동자에게 투자할 인센티브가 생기고, 노동자도 그 기업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가지 기술을 배우려는 인센티브를 가지게 된 것이다(장하준ㆍ정승일, 2005: 146-147).
 
○ 신자유주의의 천국, 영국의 경우를 살펴볼 필요도 있다. 영국병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금융자본의 경제 지배에 있다. 영국 산업 자본(제조업) 입장에서는 파운드화가 약세인 것이 유리하지만, 금융자본이 경제를 쥐고 흔들면서 파운드화가 강세를 유지하게 되고, 영국 제조업들은 국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기업들은 주주에게 맹목적으로 충성하다 보니 계속 단기적 이익만을 추구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장기적 투자나 기업 운영은 포기하였다.
 
영국의 노동조합 구조에도 문제가 많았던 것은 사실이나, 강성노조가 생길 수밖에 없는 요인을 살펴야 한다. 영국은 복지 시스템이 부실하기 때문에 노동시장에서 한번 떨어져 나가면 인생이 끝장난다는 인식이 노동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고, 노동자들은 물러설 데가 없었기 때문에 신기술 도입에도 목숨 걸고 파업에 나섰다.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안전망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는 노동자들은 필사적으로 저항에 나설 수밖에 없다.
 
기업에 들어가 월급을 받으면서 평생 먹고 살 수 있다는 믿음이 사라진 상황에서는, 회사 경영 상태가 안좋아지면 잘릴 수 있으니 근무하는 동안에 파업 많이 해서 노후 보장 대책을 마련해 놓자는 선택을 하게 된다. 노조는 회사가 어려워지거나 노동시장이 더 불안해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조합원들의 이익을 쟁취하려 하고, 이를 위해 열심히 파업해서 임금 올리고 신기술 도입을 저지하게 된다.
 
금융 중심의 경제 시스템으로 인해 기업들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지속적인 투자에 실패하면서 장기적인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는 저임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중요한 것은 ‘노조가 강성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떻게 노사관계를 조절하면 노사 평화를 정착시키고, 사회적인 화합을 이루어내며, 그것을 통해 우리 경제의 생산성을 장기적으로 향상시키면서 업그레이드시킬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얻어야 할 교훈은, 공기업 민영화를 했더니 단기적으로 큰 수익을 얻으려 할 뿐 설비 투자는 기피하는 경향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공기업 활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공공성인데, 공기업들이 민영화되어 주주 이익 극대화라는 주주 자본주의 원리에 매몰되면서 공공성이 무너질 수밖에 없게 되었다.
 
탈규제의 양지가 복제양 돌리라면, 음지는 광우병이다. 광우병의 원인은 축산업 규제가 약화되면서 동물의 뼈를 초식 동물인 소에게 먹이는 것이 허용되었기 때문이었다. 철도 산업을 민영화한 다음에 투자를 안하고 수익률 높인 결과 열차 사고가 빈발하였다. 영국에 고속철도가 없는 이유는 철도 산업이 민영화되어 버린 탓에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기수익을 올리려고 노조를 탄압하고 해외에서 저임금 노동자를 수입해 왔지만, 장기적으로 기업은 경쟁력을 잃고 줄줄이 망했다. 대처가 망국병을 치유했다고 떠들었지만 그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장하준ㆍ정승일, 2005: 149-171).
 
○ 한국 노동운동의 가장 큰 착각 중의 하나는 반재벌 투쟁과 반신자유주의 투쟁이 함께 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민영화된 포스코는 재벌의 지배 하에 있는 기업이 아닌데도 제대로 된 노조가 없다. 포스코는 ‘주주 가치에 따른 경영’, 즉 주주 자본주의적인 경영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있다.
 
재벌은 일정 정도 사회적 통제의 범위에 들어가 있지만 금융자본, 특히 외국 투기자본은 그렇지 못하다. 론스타 같은 투기 자본은 한국 사회에 대해 아무런 사회적 윤리적 책임도 없는, 익명의 인간들이다.
 
재벌을 적으로 삼지 말라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의 상황은 노동운동의 주적이 재벌은 아니다. 이른바 전문 경영인이 더욱 주주의 이익에 복무한다는 사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전문 경영인이 등장했다는 것은 기업에 대한 주주의 압력이 훨씬 더 강해진다는 의미이고, 이 주주들은 재벌 기업이든 독립 기업이든 상관없이 정리 해고를 하고, 비정규직 채용을 기뻐할 수밖에 없는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다.
 
노동운동이 국민 경제 전체를 보는 시각에서 아직 약하다. 노조 조직률이 상당히 낮고 그나마 재벌계 대기업 노조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유주의 개혁의 가장 큰 피해자인 미조직 노동자들의 이해까지 반영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노조 쪽은 주적을 잘못 설정한 듯하다. 노동운동이 재벌과 맞서 싸운다면 자칫 발등을 찍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재벌은 손쉬운 상대이지만, 그보다 심각한 적은 신자유주의의 물결을 타고 들어오는 외국 자본이다. 노조 쪽은 국민 경제 전체의 시각에서 문제를 볼 필요가 있다. 노동운동의 주적은 결국 초국적 금융자본과 시장 근본주의다(장하준ㆍ정승일, 2005: 174-183).
 
○ ‘국가에 대한 냉소’의 대안이 시장일 수는 없다.
‘관치 금융’이라는 용어가 ‘욕’ 비슷하게 통용되고 있다. 우리은행 그룹은 78.5%의 지분이 정부 소유이기 때문에 주주 자본주의 논리로 따져 봐도 우리은행은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절대 다수 주주인 국가(정부)가, 국민 경제적 필요에 따라 은행에 개입하는 것을 ‘관치 금융’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국가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왜곡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관치와 관치 금융은 장군 출신의 제왕적 대통령들의 무소불위적 권력을 배경으로 자의적으로 권한을 행사하던 경제 관료들의 권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관료주의와 관치 금융을 비판한다는 명분하에 행정부의 경제적 역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시장과 기업의 자유, 즉 자율적 권력화를 주장하는 것이 자유주의인데, 제대로 된 민주주의자라면 차라리 행정 및 관료 조직을 올바르게 통제하는 방식을 모색하는 것이 낫다.
 
우리 경제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정부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 ‘正道’이고 ‘개혁의 길’로 인식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미국식 시스템은 ‘돈 많고 배운 것 많은 사람들에게 유리한 원리’나 다름 없는데, 그게 ‘정정당당하게 같은 조건에서 한번 경쟁해 보자’는 식의 애매한 경제적 비전과 민주주의, 자유, 투명성 등의 애매한 철학적 개념들로 장식되어 있다.
 
보수 인사가 반시장주의로 몰면 오히려 ‘시장이라는 것은 도구에 불과하다. 시장이 필요하면 이용해야겠지만, 필요하지 않으면 부술 수도 있는 거다’ 하는 식으로 치고 나가야 한다(장하준ㆍ정승일, 2005: 186-199).
 
○ '연기금을 민간 기업에 투자할 때 그 의결권의 행사를 인정하느냐‘의 문제.
의결권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공익을 위해 의결권을 사용할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연기금 운용 기관의 정관에 민간 기업에 대한 투자의 목적을 적절히 규정해 놓으면 될 것이다. 예컨대 ‘국민 경제에 대한 공헌, 단기 수익이 아니라 장기 수익이 목적일 때만 투자 가능하다’는 식으로 규정한다.
 
정부를 믿을 수 없다고 해서 그 손발을 묶어 놓으면 정부의 공공기능이 무력화된다. 그렇다고 너무 권한을 주면 관리들의 전횡이나 부패로 귀결될 수 있다.
원칙적으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정부에 힘을 주는 것이 옳다.
 
힘 있는 정부를 불온하게 여기는 것 자체가 박정희에 대한 반사적 거부이다. 박정희가 시장을 억압했기 때문에 우리는 시장을 풀어줘야 한단 말인가. 그게 과연 민주주의인가. 정부의 힘을 뺏는 것이 민주주의는 아니다.
 
유럽이나 미국의 경우 민중들은 오히려 자유주의자들과 투쟁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쟁취해냈다. 민주주의가 자유주의를 눌렀는데, 이제 다시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누르고 있는 상황이다.
 
신자유주의 세력들은 ‘정치로부터 주요 정책 기구의 독립성’을 가장 강조한다. 국가(정부)로부터 ‘중앙은행의 독립성’도 그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심지어 각종 규제 기관도 정부로부터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 점에서 신자유주의는 과거에 민주주의로 인해 빼앗긴 시장의 권력을 되찾자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중앙은행이 국가로부터 독립하면 금융 자본의 이익을 수호하는 방향으로 가게 될 수도 있다. 국가는 그나마 원리적으로라도 전체 국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그래서 노골적으로 특정 세력의 편을 들 수는 없는 조직이다. 그래서 유럽의 경우 좌파들이 오히려 중앙은행의 독립을 반대하고 있다.
 
국가의 역할에 관련된 논의들은 ‘시장이냐 반시장이냐’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는데, 이러한 질문을 ‘민주적인 국가(정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바꿔야 한다.
 
관치 그 자체를 비판하고, 관료주의 그 자체에 욕을 퍼붓는 것은 별로 효용이 없다. 차라리 관료들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방법,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감시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가 조직이 국민 앞에 투명해져야 한다.
 
현재 많이 사용되고 있는 투명성이란 ‘기업의 주주에 대한 투명성’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젠 ‘국민에 대한 국가 조직의 투명성’이 필요하다. 국가가 공공성 수호 차원에서 벌이는 일에 무턱대고 ‘관치’를 부르짖으며 기를 죽이기보다, 국가 조직을 국민 앞에 투명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해야 한다.
 
관료들에 대한 민주적인 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관료주의는 타당하다. ‘관치는 불가피하지만 불완전하기도 하니까 여러 가지 장치를 통해 관료들을 견제해야 한다’는 시각이 훨씬 현실적이다. 국가의 역할과 관료주의를 부인하면 그 대안이 시장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한다(장하준ㆍ정승일, 2005: 201-206).
 
○ 문제는 양심이 아니라 인식이다. 역사와 사회, 경제와 정치에 대한 냉혹한 인식과 지각이 오히려 중요하다. 그런 맥락에서 문제는 변절이 아니라 아이러니, 그것도 지독한 논리적ㆍ역사적 아이러니이다. 개혁세력과 진보 세력 전체, 그리고 보수세력 전체가 아이러니에 빠져 있다.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라는 개념에 대한 오해와 환상, 양자의 상호 관계에 대한 잘못된 관념이 모든 아이러니의 근원으로 보인다.
 
신자유주의가 문제가 아니라, 자유주의(liberal) 그 자체가, 자유주의가 사회적 보호를 기반으로 한 유럽의 민주주의를 해체하고 있다는 점이 비판의 초점이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를 동반하며 양자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믿는 자유민주주의자들의 신조와는 달리, 양자는 서로 분리되며 서로 다른 차원에 있다. 자유주의에 대한 반대가 반드시 민주주의의 옹호는 아니다.
 
박정희 체제가 경제 발전에 성공한 이유는 독재를 했기 때문이 아니라, 비자유주의적 정책을 썼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긍정하는 점은 그 비자유주의적 측면이지, 반민주주의적 측면이 아니다. 김대중ㆍ노무현 정부 비판 역시 경제, 사회, 노동, 복지 등의 개혁 정책에서 나타나는 그 자유주의적 측면을 겨냥한 것일 뿐, 정치, 외교, 국방, 사법 분야에서의 개혁 정책에 나타나는 그 민주주의적 측면이 아니다.
 
우리 사회와 경제가 추구해야 할 국가 전략은 ‘민주주의를 위하여 자유주의를 내던지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장하준ㆍ정승일, 2005: 235-238).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8/07/19 12:46 2008/07/19 12:46

댓글0 Comments (+add yours?)

트랙백0 Tracbacks (+view to the desc.)

앰네스티 조사관의 촛불집회 인권침해 조사

View Comments

사실 국제앰네스티에서 '비정기 조사관'이 파견되었을 때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다. 촛불집회 현장의 인권침해 여부를 조사하는 것 자체가 의미없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이를 지적하더라도 이명박 정부가 별로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노마 강 무이코 조사관이 20여일간 집회 현장에 직접 나가거나 시위참가자 및 경찰 관계자들의 증언을 듣고 밝힌 조사결과는 아마도 내가 생각했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한겨레신문에 보니 "촛불집회는 위대한 민중의 힘"이라고 했단다. 피플파워(people power)를 국민의 힘이라고 번역하는 이도 있겠지만, 그 만큼 민중의 자발성을 높게 평가한 것일 터이다. 사실 수만, 수십만이 운집한 집회가 이렇게 별다른 사고나 폭력 없이 끝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경찰까지도 조사관에게 잘 협조를 했다고 하는데, 유일하게 법무부가 조사관의 구치소 방문 및 접견을 허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만큼 구린 점이 많아서일지도 모르겠지만, 국제앰네스티나 인권을 대하는 이명박 정부의 기본 입장을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최근 일본 홋카이도에서 열렸던 G8 정상회담에 반대하는 집회의 양상을 보니(참고.
애정과 존중의 연대의식으로 뭉친 G8 반대투쟁), 일본에서는 집회와 시위의 자유는 없으며, 경찰의 감시와 탄압이 일상화되어 있고, 그에 따라 공권력의 (부당한) 명령에 불복종하는 저항의 상상력이 메말라버린 것을 알 수 있었는데, 한마디로 경찰국가화되었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국은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지금의 집회와 결사의 자유 보장 수준을 본다면 거의 무력화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이다. 
 
나름대로 앰네스티의 조사결과를 통해 개선의 여지를 도모해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전개양상은 이에 개의치 않을 것임에 틀림 없다. 아마도 편향된 조사를 했다고 항변할지도 모르겠고... 그런 의미에서 이는 현장에서의 세력관계에 의해 규정된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지금은 점차 물러나고 있는 시기이고...
 
어제 사회서비스 공대위 집행위 회의를 마치고 촛불집회에 참여했는데, 항상 그렇듯이 너무 아쉬운 것이 많았다. 조직된 대오가 있고, 대중을 상황에 맞게 이끌어 가는 집단이 있었다면, 그 많은 시민들이 허전함 속에 떨어져나가고, 무기력함을 느끼면서 귀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집회를 통해 참여한 대중들의 의식의 성장이 보이기는 커녕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드니... 
 
계속 약화되고 있지만, 그리고 이제는 서울에서만 타오르고 있지만, 여전히 촛불을 들 수밖에 없다. 바뀐 것이 없는데, 그쳐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프레시안의 기사 중에 누군가 얘기한 것처럼, "행정, 입법, 사법, 언론까지 정권이 통제하려는 판국에 국민이 결국 스스로 나설 수밖에 없다."
  
2008년 한국, 우리는 혁명을 반복할 것인가, 혹은 혁명을 완수할 것인가를 묻는 참세상의 영상물은 영화 알제리 전투에 나오는 대사를 인정하면서 끝을 맺는다. "혁명에서 성공하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더욱 힘겨운 문제는 혁명의 성공 그 이후에 닥쳐올 것이다." (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2008년 촛불집회에서 우리 스스로 깨닫는 것이 존재하고, 과거와는 다른 우리를 발견할 때, 우리는 승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저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저들을 닮아가고, 그들이 강요하는 패러다임에 적응하고 길들여질 때에는 결국 우리가 패배한 것이다. "민중의 적은 거대한 괴물 그것만이 아니라 그것에 익숙해지고 닮아가는 우리들 내부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새길 때다." 
  
국제앰네스티의 촛불집회에서 벌어진 인권침해 조사결과에 관한 글을 퍼오면서 간단하게 코멘트하려다 또 엉뚱하게 결론을 맺는구나. ㅡ.ㅡ;; 



---------------------------------------
앰네스티 "경찰, `촛불' 과도한 진압" (서울=연합뉴스, 이준삼 기자, 2008.07.18 10:16)
 
국제앰네스티의 노마 강 무이코(Norma Kang Muico) 조사관은 18일 "촛불집회는 전반적으로 평화적으로 진행됐지만 경찰이 과도한 무력을 사용해 진압했다"고 밝혔다. 무이코 조사관은 이날 오전 10시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지난 2주 간에 걸친 조사 내용에 대한 결과 발표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밝혔다.
 
무이코 조사관은 "시위는 대체적으로 평화로웠지만 진압경찰이 군중을 향해 진격하거나 일부 시위대가 경찰차량을 파손하는 등의 폭력사태가 발생했다"며 특히 "경찰은 과도한 무력을 행사하면서 물대포나 소화기 같은 비살상 군중통제장치를 남용했다"고 비판했다.
 
지난 4일 국제앰네스티의 `비정기 조사관' 신분으로 방한한 무이코 조사관은 그동안 집회 현장에 직접 나가거나 시위 참가자들 및 경찰 관계자들의 증언을 들으며 면밀한 조사를 벌여왔다.
 
런던에 있는 앰네스티 국제사무국이 연례 정기조사 이외에 특정 사안에 관한 긴급조사를 목적으로 비정기 조사관을 한국에 공식 파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제앰네스티는 조사 내용을 영문 보도자료로 만들어 전세계 국가에 동시 배포할 예정이다. 
 
-----------------------------------------
국제앰네스티 ‘촛불 수감자’ 접견거부 항의 (한겨레, 김성환 길윤형 기자, 2008-07-15 오후 09:13:48)
무이코 조사관, 법무부 방문해 강한 유감 표명
인권단체 “전두환 정권도 양심수 조사에 협조”

 
국제앰네스티는 15일 촛불집회와 관련해 구속된 수감자들의 접견을 거부한 한국 정부의 조처에 정식으로 강한 유감을 표시했다. 국내 인권단체들은 “정부의 접견 거부는 인권 후진국으로 질주하겠다는 뜻”이라고 우려했다.
 
노마 강 무이코(41)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 조사관은 이날 오전 정부과천청사에서 김호철 법무부 인권정책과장을 만나, 서울구치소 쪽의 수감자 접견 거부 조처에 공식 항의했다. 무이코 조사관은 지난 11일 서울구치소를 방문해 안진걸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조직팀장 등 3명의 접견을 요청했으나, 법무부와 구치소 쪽은 “재판 등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며 이를 거부했다. 2004년까지 18년 동안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국장을 지낸 오완호 한국인권행동 사무총장은 “80년대 전두환 정권 때도 감옥 내부까지 공개하며 장기수, 양심수들에 대한 앰네스티 조사에 협조했다”며 “정부의 이번 조처는 전례가 없는 자의적인 법집행”이라고 비판했다.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은 “법무부는 ‘진행 중인 재판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를 대는데, 법원이 국제앰네스티의 조사로 영향을 받을 것이란 판단을 왜 법무부와 구치소에서 하느냐”고 되물었다.
 
법무부는 불과 2년 전 국제앰네스티 조사관의 수감자 접견을 허용한 전례도 있다. 2006년 12월1일 라지브 나라얀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 조사담당관과 김희진 한국지부 사무국장은 당시 평택 미군기지 확장반대 시위를 벌이다 안양교도소에 수감된 김지태 전 대추리 이장을 특별접견했다.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상임활동가는 “국제앰네스티는 지난 민주화 과정을 통해 한국의 인권 상황이 개선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이번 촛불집회 과정에서 이에 역행하는 흐름이 나타나자 이례적으로 특별조사관을 파견한 것”이라며 “그렇게 파견된 조사관의 활동을 정부가 나서서 가로막는다면 국제사회가 어떻게 생각할지 잘 되새겨 봐야 한다”고 말했다.
 
무이코 조사관은 이날 오후에는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임삼진 청와대 시민사회비서관과 면담했다. 그는 면담 뒤 기자들과 만나 “촛불집회와 관련해 앰네스티가 2주 동안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인권침해 우려 등을 담은 제안을 (임 비서관에게) 전달했다”며 “우리도 더 자세하게 정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
앰네스티 조사관 “촛불집회는 위대한 피플파워” (한겨레, 허재현기자, 2008-07-18 오전 10:13:27)
노마 강 무이코 국제 앰네스티 조사관 단독인터뷰
“촛불집회 평화로웠다…참가자들 다양한 것 놀라워”
“시민들, 버스 흔들고 밧줄로 끄는 행위 명확한 불법”
 

 

 
» 한국의 촛불집회에서 벌어진 인권침해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 지난 4일 입국한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 조사관 노마 강 무이코(Norma Kang Muico). 국제앰네스티가 특정 사안에 대한 긴급조사를 목적으로 조사관을 한국에 파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한국의 촛불집회는 평화로웠다. 그것은 위대한 ‘민중의 힘(people power)’이다.”  
 
노마 강 무이코(41) 국제 앰네스티 조사관은 두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한국의 촛불집회를 지켜 본 느낌을 이렇게 평가했다. 무이코 조사관은 촛불집회 조사결과 발표에 앞서 <한겨레>와 가진 인터뷰에서 “촛불집회에 정치단체나 노조 혹은 학생단체 등 전통적인 운동조직으로부터 지도받지 않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며 “참가자들이 아주 다양했다는 것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무이코 조사관은 경찰이 방패와 물대포, 분말 소화기 등으로 시위대를 공격적으로 진압한 것에 대해 심각하게 우려했다. 그는 “경찰이 사용하는 방패와 곤봉은 살상용이 아니라 방어용”이라며 “내가 조사한 많은 사람들은 머리 뒤쪽에 맞은 상처가 있었는데, 이는 시민들이 도망가다가 맞은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아주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한국 경찰은 소화기가 완전히 안전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확신할 수 없다”며 “영국에 돌아가면 더 조사해 보겠다”고 덧붙였다.  
 
무이코 조사관은 “시민들이 버스를 흔들고 밧줄을 매달아 끄는 행위도 명확한 불법”이라고 규정했다. 또한 그는 “시민들이 전경 버스를 흔들 때 경찰 또한 버스 안에 전경들을 남겨 놓는 것을 보고 매우 불편했다”며 “버스 안 전경들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무이코 조사관은 해가 진 뒤 집회를 금지한 한국의 집시법과 관련해 “경찰의 자의적인 판단에 맡기는 것이 문제”라며 “시민들이 표현의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법을 고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무이코 조사관은 “한국은 권위적인 정부에서 민주국가로 이행했지만 공권력에 대한 과거의 불신이 남아 있어 경찰과 시위대가 서로 적대하는 분위기가 있다”며 “대화를 통한 신뢰의 회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난 4일 입국해 촛불집회 현장의 인권침해 여부를 조사했던 무이코 조사관은 18일 조사결과를 발표한 뒤 앰네스티 본부가 있는 영국으로 떠난다. 아래는 인터뷰 전문이다.  
 
-국제사면위원회에서 특정 사안에 대해 조사관을 파견하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언론에서 보도했다. 한국에 조사를 나온 이유는 뭔가?
=나는 조사관으로서 한국에 자주 온다. 적어도 1년에 한번씩 온다. 엠네스티는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번 방문은 미리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점과 특정 사안을 조사하러 왔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엠네스티 사무국이 지난 5월부터 촛불집회에 대해 살펴보고 있었는데,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개서 엠네스티 사무국이 나를 직접 한국에 보냈다. 촛불집회 과정에서 경찰이 행사한 공권력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직접 눈으로 본 한국의 촛불집회를 어떻게 평가하나? 
=나는 아직도 이 촛불집회가 위대한 ‘민중의 힘’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번 촛불집회에 정치단체나 노조 혹은 학생단체 등 전통적인 운동조직으로부터 지도받지 않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놀라웠다. 참가자들이 아주 다양했다는 것에 주목한다. 
나는 ‘한국 촛불집회가 평화적’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나는 70~80년대 한국에서 자랐다. 당시는 최루탄과 화염병이 오가며 경찰과 시민 사이에 더 공격적이고 위험한 갈등이 있었다. 그런데 촛불집회에서 그것을 본 적이 없다. 전반적으로 이번 시위대는 평화로웠고, 대부분의 경찰 역시 전문적으로 행동했다고 생각한다
 
-한국 경찰이 조사에 협조를 잘 해줬나? 
=경찰은 매우 협조적이었다. 경찰 당국은 제가 원하는 모든 곳을 갈 수 있게 해줬다. 경찰병원에 입원한 경찰들도 만났고, 경찰의 작전 중에 폴리스라인 뒤에서 내가 선택한 경찰들과 인터뷰를 허락했다. 또 경찰서에서 연행된 사람들을 인터뷰할 수 있었다. 법무부가 유일하게 나의 구치소 방문 및 접견을 허용하지 않았다.
 
» 촛불집회와 관련한 인권침해 상황을 조사하러 방한한 국제 앰네스티 노마 강 무이코 조사관이 5일 오전 서울 통인동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를 방문, 관계자들을 인터뷰 하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한국 경찰이 시민들을 향해 물대포와 소화기를 사용하는 것을 어떻게 보나? 
=물대포는 위험하다. 마지막 수단으로 써야 한다. 내가 조사해보니 물대포는 심각한 부상을 초래할 수 있었다. 물대포를 사용하더라도 필요한 수칙을 지켜야 한다. 물대포를 맞는 사람과의 거리, 각도 등은 물론 수압 역시 규정에 맞아야 한다.  
소화기는 70년대와 80년대에도 사용됐다. 그러나 그것은 불을 끄려는 용도였다. 지금은 화염병을 쓰지 않기 때문에 소화기를 쓸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경찰은 소화기를 자주 쓰고 있다. 우려스럽다. 경찰이 소화기를 시민들의 얼굴에 직접 뿌려 앞을 볼 수 없게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앞을 볼 수 없게 하는 것은 군중을 관리하는 방법으로써 적절치 않다. 한국 경찰은 소화기가 완전히 안전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은 확신할 수 없다. 영국에 돌아가면 더 조사해 보겠다.  
 
-한국 경찰은 방패로 시민들을 때리기도 했다. 
=(경찰에게) 방패와 곤봉은 방어용이다. 살상용이 아니다. 자기 방어용으로만 써야지 절대 무기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내가 경찰이 사용하는 방패를 들어봤는데 아주 무겁고 튼튼했다. 이것을 눕혀서 수직으로 머리 등을 때리면 극히 위험하다. 내 조사에서 얼굴에 심각한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 많은 사람들은 머리 뒤쪽을 맞은 상처가 선명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시민들이 앞으로 나오다 맞은 것이 아니고, 도망가다 맞은 것을 의미한다. 아주 잘못된 것이다.  
 
-경찰이 버스로 거리 행진 자체를 막거나 광장 진입을 통제하는 것은 어떻게 보나? 
=국가마다 장애물을 설정하는 데에는 서로 다른 방식을 활용한다. 한국에선 버스를 사용하고 있는데 공격적인 이미지를 주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일반적 장애물이 더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경찰이 결정해야 할 일이다. 
시청 광장을 봉쇄하는 것 또한 경찰의 권한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시청 광장을 빼면 모일 공간이 없다는 것을 본다면 시위대와 경찰이 절충점을 찾는 게 필요하다.  
 
-반대로 한국에선 시민들이 경찰 버스를 흔들거나 밧줄을 걸어 잡아당기는 시위를 한다.
=경찰이 보여준 동영상으로 시위대가 경찰 버스에 줄을 매달아 끄는 것을 보았다. 이것은 명확하게 불법이다. 하지만 시민들이 버스를 끌 때, 경찰(전경)이 그 안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여러 번 이런 경우가 있었다. 매우 불편한 느낌을 받았다. 왜냐하면 버스 안의 경찰들의 안전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시위자들이 버스를 흔드는 행위를 알고 있었다면 버스에 경찰을 놔두면 안된다.  
 
-다른 나라의 집회와 촛불집회를 비교한다면? 
=국제사면위원회는 절대로 각국의 인권 상황을 비교하지 않는다. 한국의 촛불집회를 다른 나라와 비교하고 싶지 않다. 모든 나라는 각자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 나라와 다른 나라를 비교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 촛불집회 관련 인권 침해상황을 조사하기 위해 국제앰네스티에서 파견한 노마 강 무이코 조사관이 4일 서울 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국민주권수호 권력참회 발원 시국법회’에서 문정현 신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에서는 해가 진 후 집회를 여는 것을 경찰이 판단해 허락하지 않을 수 있다. 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해가 진 뒤 집회를 여는 것을 경찰의 자의적인 판단에 맡기는 것이 문제다. 어떤 날은 해가 진 뒤에도 한참 동안 집회를 여는 것을 허용한다. 또 어떤 날은 원천봉쇄한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어떤 권리를 가지고 있는 지 혼란스럽다. 
공공질서를 유지하려면 규정과 법은 필요하다. 모든 나라가 집회를 규율하는 법을 갖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해가 진 뒤 집회를 할 수 있도록 법을 고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왜냐하면 시민들은 (해가 진 뒤에도) 표현의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경찰은 시민들이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범위에서 방해받지 않고 집회를 열 수 있도록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당신이 거주하는 영국에선 경찰이 시위 관리를 어떻게 하나? 
=영국 경찰은 시위자들이 시위를 할 수 있게 하고 (시위대의) 안전을 지켜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미리 수집한 정보에 집회가 평화적으로 진행될 것이란 확신이 서면 경찰은 다른 근무복을 입는다.경찰은 평화시위가 가능하도록 시위대를 돕는 것이 주 업무다. 영국 경찰관은 시위에 나가기 전에 브리핑을 받게 된다. 브리핑의 뼈대는 ‘시민들이 정부에 반대하려고 시위를 벌이는 것이지, 경찰에 대항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이다. 따라서 ‘경찰이 불필요하게 무력을 사용하면 안된다’고 교육을 받는다. 모든 경찰 활동은 합법적이고 전문적이며, 적절하면서도 참을성있고 실질적이어야 한다고 교육한다. 
 
-영국에서 연행에 관한 지침은 어떤가? 
=영국 법은 ‘연행이 현실적이어야 한다’고 규정한다. 체포도 꼭 필요할 때만 해야 한다. 경찰관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보호장구를 사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장구의 사용에 앞서 충분한 설명을 해 정당화 되어야 한다. ‘시위자와 대화를 하라’는 내용이 브리핑 내용에 포함돼 있다. 그리고 과잉 대응은 받아들일 수 없다.  
 
-한국에선 인도에서 시위하는 시민도 연행한 사례가 있다. 
=평화적으로 인도에 있던 시민들을 잡아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인터뷰한 사람들은 인도에서 평화롭게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 잡혀갔거나 심지어 집회에 참여하지 않고 단순히 구경하고 있다가 연행되기도 했다. 이들의 죄목이나 기소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지만, 인도에 있는 사람에 대한 자의적 체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찰이 보다 신중했어야 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시민들과 경찰 모두에 조언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한국은 권위적인 정부에서 민주국가로 이행했지만 공권력에 대해선 과거의 불신이 남아 있다. 그래서 경찰과 시위대가 서로 적대하는 분위기가 있다. 앞으로 나아가려면 신뢰가 필요하다. 대화를 통해서 믿음과 이해를 증진시킬 필요가 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8/07/18 12:31 2008/07/18 12:31

댓글0 Comments (+add yours?)

트랙백0 Tracbacks (+view to the desc.)

Newer Entries Older Entries

새벽길

Recent Trackbacks

Calender

«   2026/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