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최영미의 두번째 산문집

View Comments

최영미(2003).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사회평론.
 
최영미의 두번째 산문집이란다. 산문집은 몇몇 유명한 사회평론가들의 것을 빼놓고는 산 적이 없는데, 이 책은 헌책방에서 싼 맛에 산 것 같다. 물론 시인이나 소설가의 산문집은 별로 사지 않는다. 고종석 - 소설가인가, 기자인가 - 의 산문집은 다르겠지만...
 
그 동안 여기저기 잡지에 발표했던 글을 모아놓은 것이긴 하나, 글의 흐름 속에서 최영미라는 인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 진정성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하는 얘기이다. 대부분은 글을 쓸 때의 최영미가 글을 볼 때의 나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감정이입이 잘 되었다. 물론 나는 훨씬 더 경험도 일천하고, 상황도 더 열악하겠지만 말이다.
  
글 전반에 대해서는 검색해서 나오는 여러 관련 비평글을 살펴보면 될 것이고, 나는 항상 그렇듯이 인상적인 부분으로 접어놓았던 것에 대해서만 얘기하려 한다.
 
최영미가 인용하는 산문이나 시들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시인이라서 그러한지 시에 관한 글들이 많은 것이다. 나도 최영미처럼 좋은 시에 몰입하게 되면 거기에서 무엇인가 의미를 얻을 수 있으려나.


그전까지 돈에 관해 난 나름대로 철학을 갖고 있었다. 인생을 사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즉, 많이 벌어 많이 쓰는 삶과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삶. 많이 버는 것도 많이 소비하는 것도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겐 너무너무 피곤한 일이라서 애초에 포기한 길이었다.
언제 훌훌 떠나도 좋게 짐을 만들지 않고 살자. 이게 그동안 내 삶의 모토였다. 집이니 차니 남편이니 옷장이니... 이런 것들이 없어도 사는 데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굳이 소유하지 않고 버틴 건데, 요즘 들어 부쩍 남들이 다 가진 걸 갖지 못하면 사는 게 무지 피곤하다는 걸 알았다. 살면서 별것 아닌 일로 열받고 깨질 때마다 내가 그게 없어서 이런 수모를 당하나? 싶어 괜한 자격지심이 들었다.
 
한국처럼 획일적인 삶을 강요하는 꽉 막힌 사회에서는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건 하나의 형벌일 수도 있다. 젊은날, 난 그 형벌을 기꺼이 감수했었고 오히려 영광으로 알았다. 그래서 늘 세상과 부딪쳤지만 뭐가 '있나요?'라는 질문들에 자신있게 '없어요'로 대답할 수 있었고, 나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는 한편 가슴 한구석에선 언젠가는 세상이 날 이해해주리라는 은밀한 바람을 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게 달라졌다. 세상과의 승산없는 싸움을 계속할 만큼 내 피는 더이상 뜨겁지 않고 그동안 수차례 깨지고 부서지며 철도 들었다. 지금 난 세상이 나를 이해하기를 감히 바라지 않는다. 세상이 내게 맞출 리가 없으니 대신 세상에 나를 맞춰야겠다, 아니, 맞추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냥 겉으로나마 남들처럼 적당히 살자. 적당히 얼굴도 내밀고 적당히 가벼운 인사말도 나누고 시비도 적당히 가리자. 그 '적당히'가 과연 어디까지인지... (29-30쪽)
  
윗글은 갈수록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하다가 막판 정리를 깔끔하게 한다.
 
깨끗해진 몸과 마음으로 인생을 정리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요즈음 난 옛 일기장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며칠 못 가 손을 들고 말았다. 총십여 권에 이르는 일기들을 컴퓨터로 다 입력시키려면 일 년은 족히 걸릴 것이니 이러다간 내 인생을 정리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나가떨어져 '정리'될 판이다.
게다가 원본을 그대로 살리되 중복, 부연되는 내용을 빼고 편집하는 것도 대단한 인내심이 요구되는 일이다. 컴퓨터 자판을 하염없이 두드리던 어느날, 나도 모르게 내가 일기를 각색해 '소설'을 쓰고 있다는 걸 발견했는데... (36쪽)

  
일기란 것이 항상 각색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블로그에 쓰는 일기는 방문하는 이들의 눈을 의식하게 되기 때문에 더 솔직하기 어렵고...
  
돌이켜보면 한번도 젊은 적이 없었던 것도 같고 또 한편으론 늘 젊었던 것 같다. 온전한 젊음을 누린 적이 없기에 제대로 늙을 수도 없는 것일까?
마흔을 코앞에 둔 지금, 가끔씩 난 내가 아직도 서른 살이라고 느낀다. 서른 살처럼 옷을 입고 서른 살처럼 비틀거리고 서른 살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 흔한, 그 잘난 희망이 아니라 차라리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질긴 절망을 벗삼아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아무것도 붙잡을 것이 없어 오로지 정든 한숨과 환멸의 힘으로 건너가야 했던 서른 살의 강. 그 강물의 도도한 물살에 맞서 시퍼런 오기로 버텼던 그때 그 시절이 오늘밤 사무치게 그립다. (45쪽)
  
가끔씩 내가 대학초년생이었으면, 아니 서른살이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렇다면 더 치열하게 살 수 있을까. 서른 때는 공무원시험 공부하느라 정신 없었는데... 그 시험을 준비한 것은 후회된다.
  
서른 살은, 특히 한국에서 여자 나이 서른 살은 단순한 나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강이다. 아직 젊음의 불꽃이 남아 있을 때 있는 힘을 다해 생을 한번 뒤집어볼 수 있는, 도박을 할 수 있는 나이. 주사위는 던져졌고, 당신은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야 한다.
서른은 결코 한 해가 아니다. 언제든 자기 인생을 철저하게 뒤돌아볼 때 우리는 영원히 서른 살이고, 부러진 뼈들을 추슬러 새로 시작할 수 있으리라. 가차없이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나는 감히 믿는다.
삼십대를 마감하는 지금 나는 문학이 나의 운명이듯이, 실연이 나의 운명이듯이, 서른 또한 나의 숙명임을 엄숙하게 받아들인다. 내가 아무리 싫다고 고개를 저어도 죽을 때까지 내 이름 석자에 '서른'과 '잔치'가 따라다니리라는 걸 나는 안다. (48-49쪽)

   
나도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으면서 '잔치'가 '운동'의 은유라고 오해를 했다. 최영미는 잔치가 끝났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그냥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 되었을 것을...
 
나도 여전히 서른일까. 명인의 'Re: 서른 즈음에'가 생각난다.
  
명인 - Re: 서른즈음에 (命人 글, 김성민 곡)
   
설레임보다는 이별이 익숙해진 어느새 서른 즈음에
이룬 건 하나 없고 잃은 건 많은 나이 빌어먹을 서른 즈음에
  
슬픔을 팔아야 장사가 되는 나이 거지같은 서른 즈음에
더 이상 무엇에도 전부를 걸지 않을 빌어먹을 서른 즈음에
 
지금도 그대는 희망을 노래하는가 또 하루를 애타게 살아가는가
때로는 지나간 추억에 기대서라도 때로는 못다 이룬 꿈에 기대서라도
   
하루를 견딘 만큼 나를 대견해하는 빌어먹을 서른 즈음에
가야할 그 길을 끝까지 걸으려는 눈물겨운 서른 즈음에

  
시를 써서 소위 공인이 된 뒤에 내가 만난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의 하나가 "왜 결혼 안하세요?"였다. 처음 그런 사적인 질문에 접했을 때는 진지한 자세로 뭔가 주섬주섬 더듬거리며 답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같은 레퍼토리가 반복되자 나도 요령이 생겼다. 요즘에도 이런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으면 난 그냥 아무 말도 안하고 웃던가, 혹은 "결혼했는데, 모르세요?" 거짓말이 입에 붙었다. 차라리 그게 편했다. 한국사회에서는 거짓말을 해서 받는 스트레스가, 거짓말을 안하고 진실을 말했을 때 받는 스트레스보다 적기 때문이다. 내 인생과 별 관계가 없는 타인들에게 내가 정말로 혼자 사는 이유를 말한다 해도 그들이 날 이해할까? (55-56쪽)
  
정말로 한국사회에서는 거짓말을 안하고 진실을 말했을 때 받는 스트레스가, 거짓말을 해서 받는 스트레스보다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거짓말을 잘 못하겠다. 상대방이 오해하고, 내가 스트레스를 받을지언정...
 
그저, 어중간한 어정쩡한 전망보다는 괜찮은 부정 하나 하고 싶다. 그리고 시 이전에 삶에 대한 고민이 더 깊고 끈질기다는 것. 어떤 이데올로기도 현재 우리를 구원할 수 없으며, 결국 사랑과 연민만이 나 아닌 너를 더듬고 이해할 힘을 준다는 것,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 년 세월을 보상해줄 수도 있다는 것. 이 정도가 지금 내가 자신있게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이다.
 
유토피아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르고, 어쩌면 그건 동경의 대상일 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우리는 꿈꾸기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꿈만이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견디게 하니까. (71쪽)

 
최영미 - 꿈의 페달을 밟고 (94쪽)
   
내 마음 저 달처럼 차오르는데
네가 쌓은 돌담을 넘지 못하고
새벽마다 유산되는 꿈을 찾아서
잡을 수 없는 손으로 너를 더듬고
말할 수 없는 혀로 너를 부른다
몰래 사랑을 키워온 밤이 깊어가는데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

  
이 시는 최영미의 두번째 시집 제목이다. 이게 무슨 영화 의 이미지를 차용했다고 했던 것일까.
 
정민 교수의 [죽비소리]라는 책을 보면서 그냥 괜찮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영미는 죽비가 '절의 선방에서 시종들을 졸지 말라고 등짝을 내려칠 때 쓰는, 대나무로 만든 회초리'이기에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제적인 발상이라고 한다. 하긴 자신도 이해못할 비난을 죽비소리라고 하면서 들을 때 그런 감정이 들 수도 있겠다.
  
최영미가 김정란 교수를 비판한 대목은 그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를 보여준다. 이 부분이 이 산문집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부분이고...
이 글을 읽으면서 '비평이라는 것도 함부로 해서는 안되겠구나. 그리고 내가 과거에 내뱉었던 말들에 대해서도 책임질 수 있어야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김정란 교수는 그 뒤에 무슨 반박을 했을까.
  
길지 1996년 4월호에 실렸던 이정현 얼굴을 보고 쓴 '광주는 언제 신파를 극복할 것인가'라는 글도 깊은 공감을 주었다.
 
역사를 일 년 혹은 이 년 앞당긴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광주를 다룬 최초의 텔레비전 드라마 <모래시계>, 최초의 영화 <꽃잎>,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처음으로 재판대에 세우는 것. 나는 이 모든 처음, 최초들이 의심스럽다. 언젠가 반드시 제대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일들을 일 년 혹은 몇 년 빨리 해치운다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129쪽)
 
영화 곳곳에 삽입된 그날의 광주에 대한 자료필름과 현장재현장면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본 것은 신파에서 벗어나려는 또 다른 신파, 90년대의 첨단영상기술로 은폐된 신파였다. 내가 본 것은 반포르노(semi-porno)로 짓밟힌 <꽃잎>이었다. (132-133쪽)

  
나도 꽃잎을 보면서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광주를 이렇게밖에 그릴 수 없었나.
곧 영화 <화려한 휴가>가 개봉을 한단다. 그 영화는 광주의 신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제는 제대로 된 광주를 보고 싶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6/05 01:02 2007/06/05 01:02

2 Comments (+add yours?)

트랙백1 Tracbacks (+view to the desc.)

박남준의 시 세 편

View Comments

최영미 시인이 쓴 산문집을 보다가 그가 박남준 시인이 낸 시집의 발문을 쓴 것을 알았다.
박남준의 시가 가끔씩은 와닿을 때가 있다.
누군가는 산으로 가고 싶다면 그의 시집을 읽어보라고 했는데,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만하다.
거기에서 시 세편을 담아온다.    
마지막 시는 고정화된 성별분업에 입각해서 썼다고 말이 나올 수 있겠네.
   
박남준.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창비. 1995.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나 오래 침엽의 숲에 있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감각이 곤두세운 숲의 긴장이 비명을 지르며 전해오고는 했지. 욕망이 다한 폐허를 택해 숲의 입구에 무릎 꿇고 엎드렸던 시절을 생각한다. 한 때 나의 유년을 비상했던 새는 아직 멀리 묻어둘 수 없어서 가슴 어디께의 빈 무덤으로 잊지 않았는데
  
숲을 헤매는 동안 지상의 슬픈 언어들과 함께 잔인한 비밀은 늘어만 갔지. 우울한 시간이 일상을 차지했고 빛으로 나아가던 옛날을 스스로 가두었으므로 이끼들은, 숨어 살아가는 것이라 여겼다.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포자의 눈물 같은 습막을 두르고 숲의 어둠을 떠다니고 있다.
  
  
가슴에 병이 깊으면
  
먼산은 언제나 길 밖의 발길로 떠돌았으므로 상여처럼 돌아가는 길가,
등뼈 깊이 봄날이 사무쳐서 어지러운데, 두 눈에 장막은 일어 몸,
휘청이는데 얼마 만인가 마당 가득 풀들은 어느새 저토록 자라났는지,
나 먼 길 떠나고 사람 손길 닿지 않으면 이내 저 풀들,
어두운 내 방 방구들에도 솟아나겠지.
   
풀을 뽑는다.
한 포기의 풀을 뽑는 일도 마음대로 쉽지 않아서
모질게 다져먹지 않고는 손댈 수 없다.
쇠별꽃 봄맞이꽃 꽃마리 개미자리, 서럽다. 꽃들이 피어난 것들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것은 조금 크고
어떤 것은, 보기에도 안쓰러우리만큼 작고 깨알 같지만
어느 것 하나 눈물나지 않은 것 없어 이 짓이 뭐람, 이 짓이 뭐야,
한 움큼 뽑았던 풀들 놓아 버리고
주저앉아 마음 처연한데, 앞숲인지 들려오는 너 두견,
울부짖느냐 무너져내리는 새소리.
  
 
꿈같은 꿈같은
 
일터에서 돌아오는 낭군을 위해 들녘에 나가 나물을
캐고 봄쑥이며 냉이 씀바귀 나물무침이며 된장을 풀어
보글보글 뚝배기에 된장국을 끓이고 불을 때어 저녁밥
을 짓고 아! 그런 다소곳하고도 아미 고운 조선색시
다시는 없겠지요.
 
가르마 같은 논밭길을 걸어오며 모락모락 멀리 밥짓는
저녁 연기 바라보다 고단한 하루의 일과를 씻은 듯
털어내며 가슴 뿌듯한 행복으로 발걸음 재촉하는 그런
그런 눈매 선한 조선 사내도 다시는 다시는 없겠지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6/04 05:16 2007/06/04 05:16

댓글0 Comments (+add yours?)

트랙백1 Tracbacks (+view to the desc.)

전진 선거강령이 말하고자 하는 건 이렇습니다

View Comments

참이슬님이 제 글에 답글형식으로 전진의 선거강령 전반에 대해 얘기를 해주셨네요. 생각난 김에 그에 대해 답변하고자 합니다. 쓰다보니 상당히 길어졌습니다.
   
관련글: 자율과 연대 홈페이지 우리들이야기/자유게시판에서
   
1. 전진 대선강령을 보고... (현미녹차, 07-05-31 11:35)
    
2. 전진 대선강령에 대한 현미녹차님의 논평에 대해 (새벽길, 07-06-03 05:15)
  
3. 선거강령은 추상적인 원칙의 나열이 될 수 없습니다 (참이슬, 07-06-03 19:52)


1. 현미녹차 님의 의견을 전진 대선강령에 대한 비판이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냥 인상비평 수준의 것이니까요. 다만 너무 나간 듯하여 글을 쓴 것이지요. 전진의 대선강령에 대한 비판이 나오고 있는 이유를 말씀하셨는데, 공개된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인지 공식적인 비판의 글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압니다. 있더라도 과연 서문에 언급된 대로 사회주의 강령이 맞냐는 말이 나오는 경우는 있더군요.
   
2. 참이슬 님은 “‘전진’ 대선 강령은 ‘혁명으로 제헌의회!’,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 두 마디로 요약될 수 있겠구나. 경제 부문에서는 ‘생산 수단의 사회화’를 약방에 감초처럼 해결책으로 제시하고 있구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전진 내부에서 제헌의회, 민중대표자회의(이전에는 평의회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라는 단어를 쓰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었고,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해 논의가 되는 건 당연하지요.
 
하지만 그 요약 부분은 조금 어색하네요. 제헌 수준의 헌법개정은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에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리고 전진의 대선강령에는 '소비에트'라는 용어가 전혀 나오지 않는데,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어떻게 떠올리시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혹시 그에 대한 선입견이 작용하진 않았는지 생각해보셨으면 합니다.   
   
3. 경제 부문에 있어서는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핵심으로 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는 전반적인 공공성 체계를 다르게 말한 것이죠. 선거강령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선거강령에는 주요 생산-재생산 영역의 국가 통제와 공공성 확대를 중심으로 하는 핵심적인 사회주의적 정책 수단이 명시되어야 한다. 모든 경제 운영이 자본주의 사유화 논리, 시장만능주의 경쟁논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21세기 초엽의 상황에서 사회경제 운영원리 자체를 바꾸지 않고서는 무슨 해법이든 그것은 방어적, 지엽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동안 계속 신자유주의 사유화(민영화로 번역되는 privatization)의 공세 속에서 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로서 사회화를 제시한 것입니다.
 
4.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고 하셨는데, 어느 정도의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할까요? 몇 가지만 구체적으로 따져보겠습니다.
  
우선 전진의 대선강령은 10여명으로 꾸려진 대선강령TFT(Task Force Team)에서 10여 차례의 토론을 통해 초안을 잡았습니다. 저 또한 그 대선강령TFT 성원 중의 한 명입니다. 그 과정에서 참이슬님이 말씀하신 경제전문가들의 의견도 청취하여 감안하였지요. 영국 노동당의 선거강령들은 물론 브라질노동자당, 스웨덴 사민당, 독일녹색당 등 각국의 진보정당이 제출한 선거강령들도 참고하였습니다. 사실 경제현실에만 집착해서는 이 사회를 바꿀 급진적인 대안을 제출하기는 어렵지요.
    
전진의 기관지 제6호(2007. 1. 31)에 실린 김종철 대선강령TFT 팀장의 '대선강령 제출 이유'에 보면 왜 약간은 추상적으로 보일 수 있는 대선강령을 제출하였는지 그 이유가 제시되어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대중들의 지지 이유가 당장의 집권가능성이나 국정운영능력 신뢰에 있지는 않다. 우리에게 던져지는 표는 미래에 대한 신뢰인 것이다. 즉각적 실현가능성과 실력과시에 대한 강박관념에 빠지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즉 정책 나열보다는 정치적 지향을 내놓아야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사회주의 선거강령으로 집약될 수 있다.
  
<전진>이 제출하려고 하는 대선강령은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전반적이고 미시적인 정책과 공약은 당 정책위원회 몫이 될 것이다. <전진>은 당내 정치조직으로서 이번 대선에서 집중적으로 제기해야 할 중요한 의제를 중심으로 ‘사회주의적 비전’을 제시함이 타당할 것이다."

  
5. 참이슬 님이 실물경제에 대한 고려나 구체적인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대책 등을 말한 부분은 아마 선거강령과 선거정책/선거공약을 혼동해서 한 언급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전진의 대선강령 중에 핵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예가 제시되기도 했습니다.
  
국공유화의 경우 영국 노동당이 1945년, 1974년 등의 선거에서 주요부문 대기업의 국유화를 제안하였고 이를 실행에 옮기기도 하였습니다. 전진의 대선강령에서도 당장 국유화하고 공기업으로 전환할 부문을 선정하고 이에 대해서는 강력한 국유화 정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대선강령에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초국적 자본의 (이윤추구) 공세에 맞서 인간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고 또한 규모의 경제 등으로 자연적 독점의 성격을 갖는 전력, 수도, 에너지, 통신, 교통 등의 기간산업(네트워크산업)은 빈부에 상관없이 국민들에게 안정적인 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하며 이 목적을 위해 기간산업은 공기업으로 운영한다. 현재 공기업으로 운영 중인 기관들은 당연히 공기업으로서의 성격을 유지하며, KT와 같이 현재는 사유화된 과거 공기업들도 다시 공기업화를 추진한다."
 
그리고 삼성이나 현대 등의 대규모 기업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국공유화 대신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하자는 안을 제출하였습니다. 국유화 강령만으로는 변화하는 현실과 사회주의적 정책의 비전을 온전히 반영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대선강령에 이렇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자산 또는 매출액이 상당한 규모인 대기업은 그 자체로 사회적 성격을 띤다. 그러므로 이러한 대규모 기업에 대해 사회적 성격에 따른 공공성의 운영원리를 요구하고 관철시켜야 한다. 이미 현재의 법률로도 자산 또는 매출 2조원 이상의 대규모 기업에 대해서는 과반수의 사외이사를 의무화하고 있다. 
  
대규모 기업의 사회적 성격을 강화시키기 위해 이들 기업들을 공공성이 관철되는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시켜 나간다. 먼저, 자산 10조원이상 그룹에 속하는 자산 2조원 이상의 대규모 기업부터 1차적으로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시켜 나간다. 또한, 미래적 가치, 공공적 가치가 큰 기업으로서 국민경제의 계획과 조절을 위해 필요한 경우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하며, 정부가 요구하는 ‘투자계획협약’에 응하지 않는 사기업 역시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을 추진한다."
   
특정 기업을 싸잡아서 별 기준 없이 국유화한다는 것이 아니라 '자산 10조원이상 그룹에 속하는 자산 2조원 이상의 대규모 기업'부터 1차적으로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시켜 나간다는 것이죠. 이 기준은 현재 출자총액제한제의 대상이 되는 기업에서 착안한 것입니다.
 
6. 재원조달과 관련된 부분 또한 언급되어 있습니다. 과거 외환위기 시절 재벌들에게 행해졌던 엄청난 특혜를 기억하십니까? 대선강령은 그에 비추어 "중앙정부와 기타 공공부문의 출자를 통해 마련하되 초기 출자자금은 영구채권 형태로 마련할 수 있다"고 표현했고, 저 또한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의지의 문제이겠지요. 
  
공기업의 관료주의에 대해서도 논의가 되었습니다. 대선강령에서는 "공기업의 확대와 유지와 더불어 공기업 내부의 관료적 운영을 타파하고 민주적 운영을 더욱 확대하기 위하여 모든 공기업의 지배구조에 해당 기업 노동자와 일반 시민대표 등을 참여하도록 하여 공기업의 민주성, 공공성을 더욱 확대하도록 한다"고 표현하였지요. 소수 자본의 지배에서 다수 민중의 지배로, 소수 자본가의 참여에서 다수 민중의 참여와 결정으로 경제운용 방식이 바뀌어야 하는 것은 물론 공공성과 민주성에 입각하여 공기업이 운영되어야 한다고 본 것입니다.
 
낙하산 인사의 문제 또한 이를 해결가능하며, 정부가 공기업을 통제하기 위해 설립한 공공기관운영위원회의 문제 또한 경제기획위원회의 설립이라는 문제의식으로 통합하여 논의하였습니다. 더 구체적인 것은 정책/공약의 문제가 아닐까요? 고소득 자영업자의 카드 결제를 의무화한 것에 대한 문제 또한 선거강령에서 제출할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에 대한 정책을 제출하라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만, 이 또한 정책당국의 의지의 문제 아닌지요?
 
7. 헌법을 논의한 부분은 그 만큼 변화의 중요성을 언급하기 위해 제기되었습니다. 이를 테면 한국사회에서 주택, 교육, 의료 영역의 경우 보수세력이 지속적으로 사유재산권 운운하며 조그마한 개혁에도 저항하고 있음에 비추어 이를 헌법 개정을 통해서라도 소유권을 제한하고 공공재로서의 성격을 명확히 하자는 것이죠. 토지공개념, 주택공개념의 헌법 명문화 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전진에서 새롭게 제기한 시민기본소득권의 경우도 헌법으로 규정하자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혁신네트워크에서 논의된 기본소득보장제 도입과 유사한 문제의식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시민기본소득권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내고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계기로 삼기 위해 헌법 명문화를 얘기한 것이죠.
    
그리고 나머지에서 헌법 개정을 논의한 것은 마지막의 정치의제와 관련된 부분 뿐입니다. 사회경제체제 및 정치체제의 전면적 재구성을 위해서 당연히 제기되는 사항이죠. 대선강령에서 얼마나 그렇게 헌법이나 법률을 고치거나 새로 만들자는 내용이 나오는지 모르겠네요. 한번 검색해보시죠. 
 
한편 헌법 이외에 법률 개정과 관련해서는 참이슬 님이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법률의 제,개정과 관련된 모든 것이 정책입니다. 정책의 최종산물이 법의 제,개정으로 나타나는 것이죠.
전진의 활동은 물론, 전진의 대선강령도 법령의 제,개정을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는 활동의 결과물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헌법규정과 관련된 부분을 넣었다고 전진의 대선강령을 한마디로 '헌법이나 법률을 고치거나 새로 만드는 것을 문제 해결의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하는 발상'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단순화라고 하지 않을 수 없네요.
최장집 교수의 대안은 몰라도 그의 한국정치에 대한 분석에 동의하고 있는 저의 입장에서 보면 최장집 교수의 지적을 언급한 것도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전진의 대선강령이 '개헌을 통해 한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입장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8. 대선강령에서는 '소비에트'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민중대표자회의라는 것을 그렇게 받아들인 모양입니다. 이전 글에서도 말했듯이 대의제의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브라질의 참여예산제에 나오는 참여예산평의회(participatory budgeting council)나 베네수엘라의 주민자치위원회(Communal Council)의 장점을 되살려 '민중대표자회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과거 1992년 대통령선거에서 백기완 선본이 제출했던 3대강령 중에 첫번째가 "노동자와 민중이 주도하는 민주정부를 수립한다. 민중주도 민주정부는 노동자와 민중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민중대표자회의를 최고 권력기관으로 한다."라는 대목을 차용한 것인데, 사실 스스로도 그리 내키는 부분은 아니었습니다. 더욱 적합한 용어가 있다면 바꿀 수 있겠지요. 그런 게 제안되면 좋겠습니다.
 
그 성격과 관련해서 보면, 이는 논쟁이 필요한 사항입니다. 참이슬님은 "입법, 행정, 사법 3권이 분립하거나(대통령 중심제), 아니면 최소한 입법-행정과 사법 2권이 분립하는 것(내각책임제)은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통해 민주주의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라고 하셨는데, 전진의 대선강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3권 분립 등의 장치를 넘어선 민중권력, 민중민주주의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3권이 집중된 대의기구를 만들 경우 무소불위의 독재 권력을 행사하며 폭주할 가능성"이 있다고 하셨지만, 권력집중에 의한 폐해의 역사적 사례들은 모든 권력이 민중의 대표기관에 주어지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그 제도와는 무관하게 민중의 대표기관이 아닌 소수 과두지배집단이나 일 개인에게 실질적 권력이 집중되었던 것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행정, 입법, 사법 이외에 감찰, 고시 등을 포함해서 5권 분립 체제가 있는 대만이 더 권력분산적이고 민주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민중의 대표기관이 과두제화되는지 여부는 명확한 인과관계를 발견하기 어렵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제 아무리 기발하고 훌륭한 시스템을 고안한다 해도 권력집중의 위험은 있습니다. 미헬스가 제시한 과두제의 철칙(iron law of oligarchy) 또한 당시 가장 민주주의적이라는 독일사회민주당의 사례를 근거로 든 것이죠. 참이슬님이 언급하신 '옛 소련의 소비에트나 지금 중국의 전국인민대표자회의(전인대),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등과 같은 집단적 대의제가 실패한 역사적 경험도 그중 하나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3권분립이 제대로 되어 있다는 미국이 민주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겁니다.
   
전진 내부에서도 이에 대해 논란이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대선강령TFT팀의 한 동지가 언급했던 내용을 옮깁니다.
    
그렇다 해서 인민의 대표기관, 즉 집단적 대의제에 의해 관료권력을 제압하는 시스템을 위험시한다면 무엇이 대안입니까? 삼권분립과 의회제에 안주하거나, 권력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며 허무주의에 빠져야합니까?
인민의 대표성을 보장할 최적의 시스템을 건설하고, 부단한 계급투쟁에 의해 실질적 민주주의가 관철될 역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대안이며 그러한 과정들이 운동인 것입니다.

 
제왕적 대통령제 수준은 아닐지라도 선출된 국왕이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과, 비정치적 내지는 반정치적 가치를 핵심으로 하면서 엘리트 내지는 전문가 중심의 폐쇄회로식 결정방식을 취하는 효율지상주의적인 기술관료적 경영주의(technocratic managerialism) 체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전진의 대선강령은 이를 '민중대표자회의'라고 명명된 집단적 대의제를 통해 극복하려고 합니다. 그 문제점도 있겠지만, 이는 아래로부터의 소환제와 토의 등을 통해 보완해야 하겠지요. 참여예산제의 실험이 이를 초기적으로나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소비에트나 최고인민회의 등과 비슷한 것이 문제인가요? 그것이 소수의 과두지배체체화하는 것이 문제이지요.
   
9. 삼성생명의 국민기업(또는 공기업)화는 상당히 급진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전진의 대선강령에는 "일정 규모 이상의 금융기관에 대해서는 정부의 황금주 보유를 의무화하여 비상시 금융산업의 공공성, 안정성을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는 정도만 언급되어 있습니다. 삼성생명과 관련된 사항은 최근에 제기된 구체적인 내용이라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삼성공화국, 서울대공화국이라고 하지만, 삼성, 서울대 등 구체적인 명칭을 강령에 집어넣을 필요는 없을 겁니다. 한국사회의 급박한 현안인 한미 FTA에 대해서 언급되지 않은 이유도 비슷합니다. 다시한번 선거강령이 어떠해야 하는지 검토해보시길 권하고 싶네요. 
  
개인적으로는 국민연금의 대체 성격으로 활성화되고 있는 민간 보험들을 공적인 성격으로 바꾸자는 것을 대선강령에 포함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재벌들의 돈줄을 막으면서 사회복지에 대한 개념 자체를 바꿀 수 있는 혁명적인 것이겠지요. 
 
'관료들의 전횡에 대한 민주적 통제'와 관련하여 "법조문을 최대한 추상적으로 만들어 놓은 다음 구체적인 실천 방안은 관료들의 시행령으로 규정하는 현재의 한심한 상황을 적극 문제제기하며 의제로 공론화하고, 앞으로는 원칙적으로 법조문 원문에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담도록 입법 관행을 개선해 나가는 것"을 제안하셨는데, 이에 동의합니다만, 그게 대선강령에 들어갈 내용으로 언급될 것은 아니겠지요. 선거강령은 민주노동당의 대통령 후보가 대통령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정치적 청사진이니까요. 그리고 비정규악법들처럼 법률 자체에 대한 검토가 필요한 부분도 있구요. 이런 것은 결국, 참이슬님이 글의 앞부분에서 언급한 것처럼, 법률 개정이나 제도 마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의 참여와 공공성을 관철시킬 수 있는 역관계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의 문제일 겁니다. 
  
10. 선거강령에 포함될 수 있는 구체적인 통계나 수치, 외국의 입법례 등은 선거강령 TFT의 내부 논의과정에서 검토를 했지요. 당연히 그 구체적인 근거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내용을 대선강령에 다 담을 필요가 없고, 되도록 대선이 '어떠한 방향으로 치루어져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담아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많은 양의 포괄적인 내용이 되었지요. 개인적으로는 이번 대선에서 핵심적으로 제기해야 할 것으로 더 좁혔으면 했는데, 이것도 넣어야 한다, 저것도 넣어야 한다는 식으로 문제제기가 나와서 현재와 같은 모양새가 되었습니다.
 
전진의 대선강령은 민주노동당이 집권한다면(이것은 분명 현실적인 사고는 아니지요) 어떻게 할 것인가에 초점을 두고 작성되었습니다. 선거강령이라는 게 보통 그러하지요. 그래서 현재의 민주노동당 강령의 추상수준을 약간 낮추면서 구체화한 것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여기에 긴급하게 제기되어야 할 사안들에 대한 대책을 보완한 것이고요.
  
하지만 참이슬님이 보기엔 구체성이 많이 부족한 모양입니다. 전진의 대선강령이 3개월여의 토론을 통해 제출되긴 했지만, 그리 쉬운 언어로는 표현되지 못한 것이 사실입니다. 되도록 압축적으로 표현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겁니다. 나중에 민주노동당의 대선강령이 확정되어 나오거나 민주노동당의 대선 공약과 정책에서는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구체화되기를 희망합니다.
  
11. 급진성과 관련하여 본다면, 전진 대선강령의 사회경제적 의제들을 실현하는 것이 현행 정치질서하에서는 불가능할 겁니다. 사학법이나 금산법의 개정조차 보수세력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혀 좌초되고 있는 현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또한 대선강령 뿐만 아니라 민주노동당의 강령에 나온 사회경제적 의제들도 상당부분이 현행헌법상 위헌소지를 안고 있습니다.
 
따라서 헌법을 전면적으로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우리가 쟁취하고자 하는 사회경제적 의제들을 실현할 수 없습니다. 결국 절차상으로 개헌이겠지만, 사실상 제헌의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지요. 제헌의회란 그런 의미에서 사용된 것임이 설명에도 나와 있습니다. 용어에 대한 오해가 없었으면 하네요.
 
"대선은 권력을 먹겠다는 싸움입니다. 그렇다면 당면한 입법과제가 아니라, 우리가 집권하면 이렇게 하겠다는 총체적 기획을 내놓아야합니다. 대중들에게 선택을 요구하면서 당선가능성 없음을 전제로 발언할 수는 없지요. 우리가 만들 세상을 지금의 헌정질서 아래서 이루겠다고 말하는 것이야말로 공상이 아닐까싶습니다."
   
참이슬님의 글 덕분에 전진의 대선강령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6/04 04:44 2007/06/04 04:44

댓글1 Comments (+add yours?)

트랙백0 Tracbacks (+view to the desc.)

<전진> 대선강령 제출 이유

View Comments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준)(이하 '전진')에서 3월말에 제출하였고, 4월 말에 확정한 대선강령, '새로운 세상을 향한 사회주의 기획'이 분량이 많은 탓인지(?) 이에 대한 논의는 그리 많지 않고, 약간은 거친 용어에 대한 오해만이 가끔 제기되곤 하였다.   
   
이에 전진에서 대선강령을 제출한 이유를 담아온다. 이 글은 전진의 기관지 제6호(2007. 1.31)에 김종철 대선강령TFT 팀장이 쓴 것이다. 물론 이 또한 대선강령TFT팀 내의 토론을 통해 제출되었다.
   

------------------------------------------------
<전진> 대선강령 제출 이유
   
왜 대선강령을 제출하는가
  
본격적인 대선 국면이 시작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떨어진 지지도를 만회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정치일정을 진행시키기 위해 개헌논의를 촉발했다. 멀찌감치 앞서가고 있으나 항상 불안한 한나라당의 대선후보들은 일제히 거부의사를 밝혔고, 민주노동당도 정략적 개헌논의를 중단하라고 일성을 질렀다. 자신들의 실패를 전가하려는 거대 보수정치세력의 술수에 맞서 민주노동당은 힘들지만 강력한 대선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노동당은 노무현이나 열린우리당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한국사회의 대안을 선보여야 한다. 당의 대선강령은 이념정당답게 단호하면서도, 대중정당답게 대중의 삶 깊숙한 곳을 울리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논의를 촉발하고자, 당의 공식적인 대선강령과 정책공약이 제출되기 이전에 <전진>은 당원동지들에게, 당 외부의 진보적 활동가 동지들에게, 그리고 당을 기대어린 눈으로 지켜보고 있는 지지자 동지들께 이번 대선에 우리 민주노동당이 어떤 비전으로 민중들에게 다가설 것인가를 설명하는 ‘대선강령’을 제출하기로 하였다.   



한국자본주의의 위기와 민중의 불만
  
1970년대부터 이어진 신자유주의 세계화 국면은 여러모로 보아 19세기 말부터의 제국주의 세계화 국면과 닮아있다. 제국주의 세계화 국면은 결국 전쟁으로 치달았고 그 이후에도 위기는 지속되었다. 비록 현재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결과가 그때와 똑같지는 않겠지만 명약관화한 것은 민중들의 고통이 커지고, 불만이 누적되어, 분노가 쌓여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상은 한국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노무현 정권이 어떤 입장을 취하건 상관없이 한나라당 후보들은 날이면 날마다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한나라당이 쪼개진다 해도 한나라당 출신 후보들이 당선될 가능성도 매우 높다 할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집권한다한들 그들 역시 또 다른 위기를 맞을 것이다. 위기의 원인이 신자유주의이기 때문에 노무현보다 더한 신자유주의 세력인 한나라당 정권은 위기를 가속화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필연적인 위기를 앞두고 민주노동당은 지금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가.
  
위기를 대전환시킬 주체 형성의 계기, 2007년 대선
  
오늘날 남미에서 불어오는 반미와 반세계화, 사회주의적 변혁의 바람은 우리의 미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바람은 무엇에 의해 가능했는가. 그것은 오랜 시간 고통 속에서도 사회변혁의 전망과 민중들에 대한 믿음으로 운동을 일궈온 남미 좌파운동의 산물이라 할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조금은 달콤하고, 당장이라도 실현가능한 상세한 공약이라기보다는 조금은 투박하지만 정합성을 가지며, 민중들의 가슴에 불을 지를 수 있는 사회변혁의 비전이라 할 것이다.
  
그것이 단기간에 이뤄질 수 있다면 좋겠으나, 설사 그렇지 못하고 장기적인 비전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단호히 ‘장기전략’를 준비하고, 그것을 준비할 주체를 형성해야 한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맹종이 만들 수밖에 없는 격렬한 대중적 저항을 예비하고, 5년 후든, 10년 후든 위기국면에서 한국의 민중들이 파시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 대안을 선택하도록 만들 주체들, 바로 그들을 우리는 끊임없이 만들어야 한다.
  
게다가 그 미래는 그다지 장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좀 더 빠르게 다가올 것이다. 한국에서 진정으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이 필요한 시기에 시장만능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우왕좌왕하다 민중의 불만에 깔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무능한 좌파가 아니라, 민중들의 투쟁현장에서, 술자리에서, 수다 속에서 “민주노동당이 제일 시원하더라”, “사회주의 정책이면 좀 어때. 나는 그게 제일 맘에 들어”라는 말을 이끌어낼 수 있는 광범위한 주체를 형성해야 한다.
  
2007년 대선의 핵심 쟁점
  
역대 대선에서는 단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핵심 쟁점이 있었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민주화라는 쟁점이 있었고 중도우파 집권 이후에는 개혁이라는 쟁점이 있었다. 이번 대선에서는 고상한 단어로 추상할만한 핵심 쟁점은 없다. 따라서 열세에 놓인 노무현 정권과 집권당은 의도된 쟁점을 인위적으로 생산하려할 가능성이 크다. 노무현이 던진 개헌카드가 그 일환인 것인데, 효과가 미미할 경우 대통령 진퇴와 관련한 더욱 충격적인 요법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그다지 효과가 있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도탄에 빠진 다수 대중들의 관심사는 오직 먹고사는 문제일 뿐이다. 따라서 굳이 표현하자면 먹고사는 문제 해결이 이번 대선의 핵심 쟁점이라 할 것이다. 대중들은 이제 특정 후보나 정당이 아무리 부패했든 과거 경력이 어떻든 더 이상 관심 갖지 않는다. 오직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할 사람을 찾을 뿐이다. 그럴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대선 승패의 관건이 된다.
  
정책 나열보다는 정치적 지향을 내놓아야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대선의 핵심 쟁점은 먹고사는 문제, 즉 경제문제가 될 것이다. 경제문제에 있어서 현재 지배적 의제는 성장에 놓여있다. 한나라당에 쏠리는 압도적 지지는 바로 성장을 이끌 능력에 대한 막연한 신뢰에 근거한다. 진보진영이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길은 지배적 의제를 성장이 아닌 분배로 바꾸는 일이다. 사회 양극화가 심화하는 현실은 대중의 분배 요구를 추동할 충분한 토양이 된다.  
  
그렇다고 분배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논리로는 신뢰를 얻기 어렵다. 2004년 총선 당시에 민주노동당 원내진출을 추동했던 ‘부유세’,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등으로 상징되는 복지 의제는 효험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분배 이외의 의제가 추가되어야하는데, 성장 의제가 차지하는 자리를 ‘지속 가능한 발전’이라는 의제로 대체해야한다. 그것은 사회경제체제 전반을 재구성하는 청사진 제시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대중들의 지지 이유가 당장의 집권가능성이나 국정운영능력 신뢰에 있지는 않다. 우리에게 던져지는 표는 미래에 대한 신뢰인 것이다. 즉각적 실현가능성과 실력과시에 대한 강박관념에 빠지기보다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즉 정책 나열보다는 정치적 지향을 내놓아야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사회주의 선거강령으로 집약될 수 있다
  
사회주의 선거강령으로 정면 돌파하자
  
이번 대선은 중도우파를 개혁적으로 치장하던 요인들이 제거되고 보수정당간의 현상적 차별성마저 사라진 새로운 구도 아래서 치러질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구도는 민주노동당에 있어서 기회이며 위기이기도 하다. 거추장스런 유사 개혁세력을 걷어치우고 보수-진보 구도를 확연히 그을 수 있다는 점에서 기회이다. 보수진영의 의도된 무관심에서 벗어나 우리의 실력을 드러내고 정면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점에서 위기일수도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엄중한 시험대에 서야 하는 것이다.
  
위기든 기회든 피할 수 없는 길이며 반드시 돌파해야할 길이다. 그 과정에서 일체의 동요나 주저함도 있어서는 안 된다. 보수정치권의 이합집산에 휩쓸리지 말고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치적 명확성을 분명히 세우고 순전히 우리의 힘으로 전진해야할 것이다. 오직 진보정당다움이 최선의 선거전술이다. 사회를 재구성할 미래의 비전과 정치적 지향을 사회주의 선거강령으로 집약하고 이를 대중에게 명확히 제시해야한다. 사회주의 선거강령으로 대선을 정면 돌파해야한다. 
  
그 과정에서 <전진>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전진>은 민주노동당내의 공개적인 단일정파로서는 최대의 정치조직이며,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이라는 당 강령 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표방하는 정치조직이다. 당의 운명을 가름할 대선국면에서 민주노동당이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기여함이 <전진>의 임무가 될 것이다.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이전에, 무엇을 할 것인가가 우선이다
  
이미 시작되었지만 당의 대선 논의의 중심축은 이미 ‘누가 후보가 되느냐’와 ‘어떻게 후보를 뽑느냐’로 옮아가있는 형국이다. 당원들이 모인 장소에서도 화제는 누가 민주노동당의 대선후보로 적합한가이며, 대부분의 당 지지자들의 관심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지금 민주노동당이 맞고 있는 여러 어려움과 위기는 단지 특정 인물이 반전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번 대선에서 진실로 필요한 것은, 한나라당이 조장하기 시작했고, 김대중 정권에 이어 열린우리당 노무현 정권이 더욱 심화시킨 광범위한 빈곤과 극단적인 양극화를 대체할 대안적 청사진이다. 이 청사진이 없거나, 잘못되었을 때 우리의 후보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돼버릴 것이다.
  
<전진>은 내부 토론을 통해 ‘대선강령’의 초안을 <전진>회원은 물론 당원동지들에게 제출하고 진지한 토론과 겸허한 평가를 받을 계획이다. 그 과정에서 <전진>회원들은 물론, 당원동지들, 활동가 동지들, 그리고 지지자 여러분이 찬성, 반대를 막론하고 2007년 대선의 의의와 우리가 민중들에게 제시할 비전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기를 바란다.
  
물론, <전진>이 제출하려고 하는 대선강령은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것은 아니다. 전반적이고 미시적인 정책과 공약은 당 정책위원회 몫이 될 것이다. <전진>은 당내 정치조직으로서 이번 대선에서 집중적으로 제기해야 할 중요한 의제를 중심으로 ‘사회주의적 비전’을 제시함이 타당할 것이다. 당 강령의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에 입각해 제출할 계획인 <전진>의 대선강령 토론안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토론을 부탁드린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6/04 00:51 2007/06/04 00:51

댓글0 Comments (+add yours?)

트랙백0 Tracbacks (+view to the desc.)

왜 '바람의 열두 방향'일까

View Comments

어슐러 K. 르귄, 최용준 역(2004). 바람의 열두 방향. 그리폰북스.
 
SF의 고전이라는 "바람의 열두 방향"을 언젠가는 보리라 맘 먹고 있다가 헌책방에서 이 책을 발견하자 마자 단숨에 샀고, 사자마자 읽어제꼈다. 아마 설 즈음인 듯하다.
 
그 동안 한 켠에 제껴두었다가 동생이 읽고 돌려주고 나서 블로그에 읽었다는 표시를 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슐러 K. 르귄의 책임을 알고 읽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어디 듣도 못한 그리폰북스라는 곳에서 발간되었는데, 시공사의 장르문학 브랜드란다. 전두환 씨 아들이 경영하는 그 회사 말이다.
   
이 책은 어슐러 르귄의 초창기 작품들을 모아놓은 단편소설집이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의 작품들을 읽고 나서 감질맛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이어지는 줄거리를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말이다.
 
여기에는 SF도 있지만 판타지도 있다. (판타지도 SF이던가. 이런 건 잘 모르니까...) 판타지 소설보다는 SF소설이 훨씬 더 댕긴다.
   
소설들 중에서는 '샘레이의 목걸이', '어둠상자', '이름의 법칙', '겨울의 왕', '아홉생명', '제국보다 광대하고 더욱 느리게', '땅속의 별들',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혁명 전날'이 인상 깊었다. 잘 이해가 안되면 몇번씩 되돌아가서 읽어야 했으나, '샘레이의 목걸이'만 그렇게 했을 뿐이다. '샘레이의 목걸이'는 르귄이 1966년에 발표한 <로캐넌의 세계> 첫머리 부분이란다. 그 장편소설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번역이 되었는지 여부이다. 원어로도 나름 쉽게 읽을 수 있을 듯 하지만...
 
그 동안 SF를 별로 읽어보지 못했는데, 다시 한번 SF를 읽어볼 생각을 하게 만든 소설집이다. 초창기 작품이라서 그러한지 모르겠지만, 이러한 상상을 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참 대단한 듯하다.
  
아주 인상적이었던 무슨 SF소설이었던 것 같은데, 여기에는 실려있지 않다. 뭐였지?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그런 모티브의 것이었는데... 한국소설이었나.
 
아무튼, 책 뒷표지에 보면 이런 소개가 나와 있다.
 
'SF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면 1순위'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뛰어난 문학적 소양을 인정받는 장르 작가 르귄의 첫 단편집. 이 책에 실린 17편의 단편은 개인과 사회에 대한 깊은 사색을 유려하고 아름다운 문장과 정통 문학의 기법으로 실현하고 있다. 인류학, 심리학, 철학, 페미니즘 등 다양한 주제를 성공적으로 다루고 있는 이 작품들은 30년 전에 발표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렬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르귄에게 지금의 명성을 안겨 준 세계 3대 판타지 중 하나인 '땅바다' 이야기와 '헤인' 시리즈의 원형이 되는 단편들도 실려 있다.
 
이런 소개를 떠나 나는 아주 재미있었다. 강추!
이 소설들에서 유려한 문장을 찾거나 교훈적인 대목을 찾는 것은 헛수고인 듯하여, 그리고 나중에 다시한번 생각해보려고 접어놓았던 부분도 찾을 수 없어서 이 정도로 그만.


 오멜라스에 남는 사람들 (한겨레21 2007년05월23일 제661호, 태풍클럽 출판사 편집자)
‘희생양’을 테마로 한 어슐러 K. 르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

    
지금으로부터 딱 3년 전 5월에 김선일씨가 피랍되어 처형당하기 전까지의 22일 동안, 사람들은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광화문에 촛불을 켜고 모여든 이들이 소리 높여 정부를 비난했지만 결국 그는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고, 사람들의 가슴 한구석은 서늘해졌다. 한 개인이 국가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사실, 국익이 개인에 우선한다는 사실이 정말 사실임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 한 사람을 포기하고 잊음으로써 우리가 여전히 미국의 우방으로 남을 수 있다는 생각. 희생양을 통해 우리의 세계가 계속 안전하게 유지되어야만 한다는 생각. 누군가는 그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격분하고, 또 다른 이는 누가 그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를 설득한다. 누구도 그에게 그 위험한 곳에 가라고 한 적이 없다고.
  
미국 공상과학(SF) 소설가인 어슐러 K. 르귄은 이와 같은 ‘희생양’ 테마로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바람의 열두 방향>, 시공사)이라는 아주 짧은 단편을 썼다. 이야기는 극히 간단하다. 이성적이고 평화로우며 모든 이들이 사랑과 행복과 자유와 아름다움을 누리는 중용적 유토피아 ‘오멜라스’라는 곳이 있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여름축제가 열리는 오멜라스의 어느 건물에는 어두운 방이 있고, 그곳에는 제 이름도 나이도 알지 못하는 백치 어린아이 하나가 갇혀 있다. 그는 끝없는 굶주림과 질병과 두려움에 영원히 시달려야 한다. 무슨 이유에선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괴로움을 당해야 오멜라스의 행복과 자유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오멜라스의 모든 아이들은 철이 들 무렵, 그 사실을 알게 된다. 그들은 화를 내고 무력감에 빠지며 분노를 느낀다. 하지만 그들이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아이의 불행에 오멜라스 모든 사람들의 행복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은 결국 체념한다. 그리고 설령 아이를 풀어준대도 달라질 게 없다고 믿는다. 어차피 아이는 너무 오랫동안 불행하게 살았기 때문에 인간적인 대우를 해줘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오멜라스가 풍요를 유지하는 것은 ‘아마도’, 이렇게 눈물과 분노 끝에 스스로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마는 오멜라스 사람들의 이성적 치유력 덕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긴 침묵에 잠겨 있다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밝고 유쾌한 도시를 지나 ‘그렇게 서쪽으로 북쪽으로, 산맥으로 향한다. (…) 그 사람들은 오멜라스를 떠나 어둠 속으로 들어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들이 가는 곳은 우리들 대부분이 이 행복한 도시에 대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상상하기 어려운 곳이다.’
  
과연 이곳은 어디일까? 김선일을 포기하지 않고, 결코 우리 중 가장 작은 자를 큰 것을 위해 내어주지 않을 때, 우리가 가게 되는 이곳은 어디일까?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우리 중 누구도 아직까지 그 어둡고 알 수 없는 곳에 가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오직 그곳에 대한 온갖 흉흉한 소문만 가득할 뿐.
  
이런 생각에 잠기게 하는 책이라면 딱히 장르문학이니 순문학이니 딱지를 붙이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이라는 SF소설의 대전제는 허무맹랑한 백일몽으로 끝날 수도 있지만, 우리 사는 세상의 근간을 흔들 정도로 강력한 전복성을 띨 수도 있다. 르귄의 이 짧고도 강렬한 소설은 장르의 미학을 통해 단숨에 우리를 ‘양심의 딜레마’라는 윤리학의 핵심으로 이끈다.
  
혹시 이 모티브로 더 긴 글을 읽고 싶다면,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를 프랑스 극작가 장 아누이가 레지스탕스 버전으로 다시 쓴 <앙티곤느>를 권한다. 우리 삶의 안전한 기반을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아찔함으로 가득하다. 이렇게라도 가끔 존재론적 질문에 대면하여 한두 방울의 눈물을 흘리는 것도 마냥 위선적이거나 나쁘지만은 않을 터이다. 어차피 이 세상에 사는 한, 우리는 결코 오멜라스를 떠날 수 없지 않은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07/06/03 23:18 2007/06/03 23:18

4 Comments (+add yours?)

트랙백0 Tracbacks (+view to the desc.)

Newer Entries Older Entries

새벽길

Recent Trackbacks

Calender

«   2026/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