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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혁신자치체, 그 성과와 한계 (홍성태, 이론과 실천 2002년 신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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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태 교수가 <이론과 실천> 2002년 신년호에 쓴 일본의 혁신자치체에 관한 글도 담아옵니다. 혁신자치체의 내용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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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혁신자치체, 그 성과와 한계


1. 일본의 지방자치 : 전전과 전후

  일본의 지방자치는 메이지 21년, 즉 1889년에 시작되어 이미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메이지 시대의 지방자치제는 ‘지방명망가의 지방자치이며, 그것을 다시 천황과 지방관료가 지배하는 구조’였다. 일본의 지방자치는 주민의 자치에 기반하여 아래로부터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제도적 장치가 아니라, 위로부터의 지배와 통치를 관철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메이지 유신은 위로부터의 개혁을 통해 일본 사회를 근대화하려는 기획이었으며, 이 기획은 군국주의의 지배와 제국주의 전쟁으로 끝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일본의 지방자치는 이러한 중앙집권구조와 군국주의의 지배를 관철시키는 도구로서 기능하였다.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일본의 근대는 전후의 민주개혁기를 거치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일본의 근대사에서 전전과 전후라는 구분은 단순한 시기구분 이상의 커다란 사회적 변화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지방자치의 경우에도 이 같은 구분은 확실히 유효하다. 전전의 지방자치가 명백히 중앙의 지방통치방식에 불과했다면, 전후의 지방자치는 확실히 새로운 민주적 역량을 육성하고 제도를 개선하는 학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전후 일본의 지방자치는 대략 세 번의 전환점을 거쳐 변모한 것으로 평가된다.

    
  첫 번째, 1953년을 전후하여 시작된 지방재정의 위기. 이 위기는 전쟁으로 말미암은 국토의 황폐와 전후 개혁에 대한 일본의 재정제도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이 위기에 대한 대응과정에서 일본의 자치단체는 사실상 자치권을 정지당하는 사태에 처하게 되었다. 요컨대 ‘적자의 자주적 해결을 강요당한 자치체는 이 무렵부터 지역개발에 광분하게 되었다. 이것은 중앙의 정계와 재계의 힘이 자치체로 침투하도록 만들어 지방자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번째,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말까지. 이 시기는 일본이 전후의 경제적 피폐를 딛고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룩한 ‘고도성장기’이다. 일본은 이 시기 동안에 전전의 경제능력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과 같은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을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쟁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엄청난 파괴를 대가로 이룬 것이었다. 이 같은 파괴를 배경으로 새로운 형태와 내용의 사회운동이 일본 전역에서 전개되었다. 이 새로운 사회운동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공해반대 주민운동’이었다. 그리고 혁신자치체는 이 운동에 기반하여 나타났다. 곧 주민운동은 혁신자치체를 낳은 원동력이었으며, 혁신자치체는 주민운동의 가장 커다란 제도적 성과물이었다.

    
  세 번째, 1980년대 이후. 혁신자치체는 고도성장 과정에서 발생한 폐해들에 대한 시정을 직접적인 정책과제로 내걸고 나타났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 석유위기가 계속되면서 일본은 저성장시대, 또는 안정성장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혁신자치체는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고 기업사회형의 지역사회형성론이 지방자치를 주도하게 된다. 호소카와와 이와쿠니로 대표되는 ‘지방경영론’이나 ‘지방의 시대론’과 같은 논의들이 그 좋은 예이다.
  
2. 혁신자치체의 등장과 소멸
  
  혁신자치체라는 개념은 우리에게 사실 생소한 개념이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 땅에서는 혁신 정치세력이 제도화되었던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혁신자치체라는 개념은 혁신 정치세력의 존재를 기반으로 해서 형성된 개념이다. 우선 개념적으로 보자면 혁신자치체는 보통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첫째, 자치단체의 장이 사회당과 공산당 또는 그 어느 한쪽을 포함한 복수 야당의 지지 하에 당선되었고 그 지지를 계속 얻고 있는 경우.
  둘째, 자치단체의 장이 사회당이나 공산당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고 그 지지를 계속적으로 얻고 있는 경우.
  
  이처럼 혁신자치체는 어느 경우나 이념적으로 보자면 명확히 혁신 계열에 속하는 인물이 자치단체장인 자치단체를 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혁신자치체를 혁신 정치세력의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에 혁신자치체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 즉 혁신계 인사의 당선을 그의 이념에 대한 지역주민의 찬동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파괴를 가져오는 자민당에 대한 거부가 생활문제에 좀더 큰 관심을 보인 혁신계 인사에 대한 지지로 나타났던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이러한 생활문제에 대한 관심보다는 혁신계 정당을 더욱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혁신자치체라는 명칭은 그렇게 정확한 명칭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환경파괴, 도시의 교통난, 주택난과 같은 이른바 ‘현대적 빈곤’에서 벗어나서 더 나은 생활을 영위하려는 대중들의 욕구가 혁신자치체를 낳은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일본 전역에서 생활환경을 개선하고자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왔던 주민운동이야말로 혁신자치체의 진정한 산모였다.

    
  혁신자치체는 자치체의 행정방식과 내용에서 변화를 추구했다는 점 외에 지역 내의 사회운동세력과 혁신적 정치세력의 결집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이것은 패전 이후 일관되게 강행된 성장제일주의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거둔 커다란 제도적 성과였으며, 이에 따라 삶의 질을 무시한 성장제일주의의 횡행에 어느 정도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혁신자치체의 역량은 혁신자치단체장 간의 수평적 연합이 이루어지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또한 혁신자치단체의 단체장연합이 처음 결성된 것은 1964년이었으며 당시의 참가자는 약 10명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10년 뒤인 1974년경이 되자 참가 단체장의 수가 약 140명으로 늘어나서 도쿄, 오오사카, 쿄토, 나고야, 요코하마, 가와사키, 고베 등의 대도시가 모두 혁신자치체가 되었다. 성장제일주의로 인한 폐해가 가장 심각했던 대도시는 모두 혁신자치체가 성립되어 도시 행정에 일대 전환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현대 일본 사회의 변화에서 큰 역할을 수행한 혁신자치체는 1978년에 몰아닥친 제2차 석유위기에 따른 변화와 함께 종말을 고했다. 석유위기에 대응하여 대기업은 합리화와 감량경영을 통해 석유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으며, 대기업의 노동조합들은 ‘기업방위’를 위해 기업의 합리화와 인원삭감에 협력했다. 이 때문에 대기업 노동조합은 투쟁력을 상실했고 오히려 어용조합화하였다. 이같은 노동운동의 우경화와 함께, 혁신자치체의 중요한 정치적 기반이었던 공명·민사 양당의 우경화가 진행되어 양당은 결국 혁신세력에서 이탈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모든 야당의 공동협력으로 실현되고 있던 혁신자치체의 붕괴가 진행되었던 것이다.

     
  혁신자치체 붕괴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혁신자치체의 재정위기였다. 석유위기 이후의 경제침체로 세수입이 줄어들면서 지자체의 재정도 적자에 직면했다. 복지정책에 힘을 쏟았던 도시지역의 혁신자치체의 재정적자는 특히 심했다. 1978년부터 1979년에 걸쳐 혁신자치 단체장들은 보수파에게 그 자리를 넘겨주게 되었다. 전후 전투적 노동운동과 결합되어 거센 투쟁을 전개했던 자치체가 한국전쟁과 함께 찾아온 재정위기로 단기간 내에 보수화되고 말았던 것처럼, 고도성장의 폐해에 맞서 성립된 혁신자치체는 석유위기와 함께 찾아온 재정위기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이다. 혁신자치체는 고도성장의 폐해를 시정하려는 노력의 소산이었으나, 동시에 그 같은 노력은 결국 고도성장이 이룩한 경제력에 기반하고 있었던 것이다.

3. 혁신자치체와 일본의 정치

  일본의 지방자치는 흔히 ‘1/3 자치’라고 불린다. 이것은 지방정부의 재정자립도가 1/3에 불과하여 중앙정부의 지원에 항상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지방정부의 처지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이처럼 일본의 지방자치는 제도적으로 중앙의존적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근원적인 한계를 가진다. 이와 연관된 것이지만, 일본의 지방자치가 가지는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풀뿌리 보수주의의 정치구조’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메이지 시대의 유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지방 유지의 정치구조’로도 불린다. 즉 주민은 지방의 유력자에게 청원을 하고, 지방의 유력자는 지역 출신 의원에게 청원을 하고, 지역 출신 의원은 당의 힘을 빌려 지역문제를 해결하는 구조가 성립되어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이 구조는 여당이 이익을 주는 대신에 주민의 지지를 받게 되는 정치구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혁신자치체의 등장은 오랜 기간 합의된 상태로 폐쇄되어 있던 이 같은 정치구조에 어느 정도 파열구를 내는 효과를 가져왔다. 혁신자치체는 새로운 정치·행정 스타일을 도입했다. 예컨대 주민과의 대화 창구를 개방함으로써 자치단체장이 주민의 민원사항을 직접 접수하고 처리한다는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졌다. 자치체가 중앙정부의 말단 행정기관이 아니라 주민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체일 수 있다는 사실이 일본에서는 혁신자치체를 통해 처음으로 확인되었던 것이다. 이 점은 혁신자치체로서도 중요한 정치적 사안이었다. 혁신자치체는 중앙과의 직결을 단절하고 중앙의 지배에서 독립함으로써 발생하는 정치적 손실을 주민과의 직결을 통해 주민의 강력한 정치적 지원을 받음으로써 보완하려 했던 것이다. 이 같은 참여정치, 생활정치에 기반함으로써 혁신자치체는 공해나 복지 등과 관련된 새로운 방침을 일본의 정치과정에 도입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주민운동의 성과를 지방자치의 혁신으로 이끌고 간 혁신자치체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례는 1967년의 지사선거에서 도쿄지사로 선출된 미노베 료키치이다. 그는 본래 도쿄교육대학의 경제학 교수로서 1967년의 지사 선거에 사회당과 공산당의 합동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의 당선은 당시에 생활환경이 급격히 악화된 상황이었던 거대도시 도쿄의 문제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 반영된 결과였다. 공간적으로 보았을 때, 일본의 고도성장은 도쿄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도쿄도를 정점으로 하는 이른바 ‘일극 중심의 공간구조’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 결과 도쿄도는 극심한 ‘과밀의 문제’로 시달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문제에 자민당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여기서 도쿄도가 혁신자치체로 바뀔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더 많은 돈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찾는 시민들이 혁신지사 미노베 료키치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도쿄도 혁신지사 미노베가 이룬 정치적 성과는 여러 가지이다. 크게 보아 그것은 복지의 확충과 환경의 개선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1969년에 제정된 공해관련 조례로서, 이 조례는 일본의 환경정책사에 그야말로 획기적 전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조례는 공해가 없는 환경에서 살아갈 권리가 주민에게 있다는 것과 기업은 최대한 공해를 방지할 의무를 지닌다는 것을 법적으로 밝히는 ‘무과실책임론’에 입각한 것이었다. 이 조례의 제정으로 말미암아 도쿄도는 중앙정부와 분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 조례는 1967년에 제정된 상위법인 ‘공해대책기본법’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므로 자민당이 지배하던 중앙정부는 위법이라고 주장하여 폐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약 1년간에 걸친 도쿄도와 중앙정부의 정쟁은 중앙정부의 완전한 패배로 끝났다. 환경문제의 개선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그 결과 법을 개정하기 위한 임시국회가 1970년 11월에 열리게 되었다. 이 국회는 공해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뒤에 ‘공해국회’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이 국회에서 공해대책기본법이 전면 개정되어 14개의 법률로 이루어진 새로운 공해법의 체계가 만들어졌다. 이어서 1971년에는 환경문제를 전담하는 정부기구로서 환경청이 신설되었으며, 1973년 가을에는 ‘공해재판’의 진전에 따라 세계 최초로 공해관련 건강피해보상법이 제정되었다. 혁신지사 미노베 료키치의 도쿄도에서 시작된 변화가 일본의 환경법과 환경정책 전체를 크게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이 같은 정책변화의 최대 수혜자는 바로 최대의 가해자였던 자본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 이후 세계를 제패한 일본의 자동차산업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일본의 자동차산업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데에는 자동차의 오염물을 규제하는 법률이 세계 최초로 실행되어 일본의 자동차산업이 일찍부터 기술혁신에 주력했으며, 이 때문에 마침 서구 선진국에 몰아닥친 환경보호의 움직임에 일본의 자동차산업이 가장 발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놓여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일본의 혁신자치체는 정치적으로 전통적인 중앙집권의 정치구조에 파열구를 내어 실질적인 지방자치의 길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 시대적 조류에 맞추어 산업구조와 생산방식의 조정을 강제하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던 것이다. 주민의 여망에 부응한 지방자치의 변화가 시대의 변화를 선취하는 결과를 빚었다는 이 사실에 우리는 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4. 혁신자치체의 성과와 한계
  
  일본의 1960년대는 격동기였다. 안보투쟁의 종식과 함께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이념지향적 운동들이 빠르게 개량화되어 더 이상 사회운동세력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고도성장과 함께 나타난 허다한 문제들을 정면에서 해결하고자 나타난 자연발생적 대중운동이 바로 주민운동이었다. 그리고 이 주민운동의 제도적 성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혁신자치체였다.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일본의 새로운 사회운동의 황금기에 혁신자치체운동은 ‘하나의 새롭고도 공정한 공적 생활’을 창조하는 운동으로, ‘전통적 민주주의의 본성 자체를 변혁’시킨 운동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일본의 낡은 정치를 갈아엎고 ‘신정치’를 가져온 운동으로 평가되었다.

    
  혁신자치체가 거둔 구체적인 정책적 성과로는 환경의 개선, 복지의 확립, 자치의 확립을 들 수 있다. 도쿄도를 포함하여 모든 혁신자치체가 1960년대에 들어와 일본 열도 전역에서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왔던 공해반대 주민운동의 성장에 기반하여 성립되었다고 해도 사실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고도성장기 동안에 자행된 환경파괴의 문제는 자심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세계적으로 공해병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미나마따병’이나 ‘이따이이따이병’이 모두 그 시기 일본에서 발생한 것이라는 점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런 만큼 공해문제를 해결하고 생활환경을 개선하여 삶의 질을 향상하는 것은 혁신자치체가 수행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또한 혁신자치체는 현대적 복지제도의 확립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관련하여 혁신자치체가 수행한 중요한 성과를 노인복지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일본은 세계 제일의 고령화사회로서 노인복지에 많은 재정을 투입하고 있는 데, 노인복지의 문제도 혁신자치체의 주도로 비로소 실시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치의 확립은 두 차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종래 중앙정부의 말단 행정기관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자치체가 독자적인 정치단위로 확립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다음에 지적해야 할 것은 풀뿌리 보수주의의 근간으로 여겨졌던 자치체가 주민의 참여를 통해 민주주의의 학교로 변모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 한계를 보면, 정치적으로는 혁신정당이 혁신력을 잃고 말았다는 점과 정책상으로는 ‘시빌 미니멈론’의 한계를 들 수 있다. 먼저 혁신력을 잃었다는 것은 혁신자치체의 정책이 주민의 강력한 지지 하에 중앙의 정책을 변경시킬 수 있을 정도가 되자, 자민당으로서도 새로운 정책을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그 결과 자민당에서도 유사한 정책들을 제시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혁신자치체의 고유한 혁신성은 점차 그 빛을 잃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고도성장의 성과를 복지의 증진으로 돌려야 한다는 시빌 미니멈론에는 산업정책과 재정정책이 결여되어 있었으며, 이러한 결함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 석유위기가 잇따르고 저성장 시대와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금방 드러났다. 1/3자치라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지방정부의 취약한 재정상태는 경제가 악화되면서 금방 위기에 몰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혁신자치체는 다시금 중앙정부의 개입을 용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혁신자치체의 쇠퇴와 관련해서는 그 내재적 한계와 함께 자민당의 대응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자민당의 대응책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1968년에 발표된 도시정책대강으로, 그 핵심내용은 공공사업의 대부분을 자치체에서 민간으로 넘긴다는 것이다. 이로써 대도시에 성립한 혁신자치체는 재정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으며, 지방의 보수적인 현들은 집중적인 재정지원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고도성장이 야기한 심각한 폐해들은 이미 어느 정도 개선된 상황이기도 했다. 예컨대 1977년에 발표된 OECD의 보고서는 불과 10년 사이에 일본의 환경이 극적으로 개선되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처럼 혁신자치체의 성립을 가져온 문제들이 해결된 이면에서 새롭게 등장한 경제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혁신자치체는 충분히 가지고 있지 못했다. 시대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성립된 혁신자치체가 이번에는 시대의 변화를 적극적으로 좇아갈 수 없는 한계를 드러냈던 것이다. 그 결과 1970년대 후반에는 혁신자치체가 모두 보수자치체로 바뀌었으며, 이제 자치체의 정책은 도시경영론으로 변해갔다. 당시의 오오히라 내각 하에서 ‘지방의 시대’라는 구호가 새롭게 외쳐졌으며, 자민당의 지휘 아래 보수주의가 재편되고 혁신자치체는 사라져갔다.
  
5.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일본에서 고도성장은 이념이 아니라 생활과 여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이른바 ‘무당파 대중’을 낳았다. 이것은 가치의 변화를 포함하는 커다란 시대적 변화의 결과였다. 혁신자치체운동은 극심한 공해로 말미암은 수많은 피해대중의 자발적인 주민운동에서 비롯되었지만, 결국에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새로운 사회적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형성된 새로운 사회운동이고 정치적 조류였다. 이런 점에서 혁신자치체운동은 일상이 영위되는 삶의 자리에서 삶과 사회의 변화를 추구한 서구의 신사회운동과 같은 궤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혁신자치체는 자치단체의 개혁단계를 넘어서 일본의 정치구조 자체를 개혁하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으며, 중앙정부와 지방의회에서는 보수세력이 여전히 지배력을 행사하였다. 이런 점에서 혁신자치체의 성과를 정치제도의 차원에서만 찾는 것은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어쩌면 혁신자치체가 거둔 더 중요한 성과는 이른바 ‘신민’에서 ‘시민’으로의 변화라고 불리는 전후 일본 사회에서 전개된 시민적 주체의 형성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물론 이 점에 대한 평가 역시 일본 사회가 여전히 전근대적 보수주의와 근대적 팽창주의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과 분리될 수는 없을 것이다.

     
  혁신자치체운동은 다양한 ‘공해’에 대응해서 새롭게 ‘공익’을 추구했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지방자치의 발전을 위한 자치노, 즉 자치체 노조의 헌신적이고 활발한 연구 및 실천이 이러한 혁신자치체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도 유념해 두어야 할 중요사항이다.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공해’와 ‘공익’의 내용도 변한다. 혁신자치체운동이 빠르게 퇴조한 이유는, 한편에서 보수지배의 정치구조를 혁파하지 못하고, 다른 한편에서 시대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데서 찾을 수 있다. 둘 다 대단히 어려운 과제이다. 아마도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은, 생활의 혁신이라는 새로운 ‘공익’의 실현을 바라는 주민의 요구에 부응했을 때, 강고한 보수지배의 정치구조 속에서도 혁신자치체가 나타날 수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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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6 02:43 2006/04/26 0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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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사회주의’의 실험과 좌절 (장석준, 이론과실천 2002 신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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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는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라고 하여 김종철 민주노동당 서울시장 후보의 인터뷰 기사가 떴습니다. 나중에 경기도 등의 다른 도로 다룰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서울시장 후보만을 인터뷰하는 것은 서울시장 선거가 여론의 초미의 관심사이긴 하나,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서울중심주의를 부추기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가 들었습니다.

 

"켄 리빙스턴은 34세에 런던 시장이 됐는데..." (프레시안 2006-04-25 오후 12:08:12)

[박인규의 집중 인터뷰] 민주노동당 김종철 서울시장 후보 

 

그 인터뷰에서 서울시장을 하기엔 너무 젊은 것 아닌가 하는 지적이 있다고 하자, 김종철 후보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켄 리빙스턴이 34세에 런던 시장이 된 것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인터뷰를 보고 김종철 후보 블로그의 메모로그에 한 관악당원이 "켄 리빙스턴은 80년대에 런던시 의회 의장이었고, 시장이라는 직책이 만들어진 것은 2000년 이후입니다. 즉, 리빙스턴은 2000년에 초대 런던시장에 당선된 것"이라는 관련글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해 민주노동당 기관지인 <이론과 실천> 2002년 신년호에 실린 장석준 동지의 글을 참고하여 아래와 같이 덧글을 달았습니다.

 

켄 리빙스턴은 2000년 초대 민선 런던시장이라고 하면 맞습니다.
각 구 자치체를 포괄하는 광역자치체인 ‘런던광역시의회(Greater London Council. GLC)’는 1973년도에 설립되었고, 의원내각제를 고수하는 영국의 상황에서 런던광역시 행정부도 GLC 내의 다수당이 구성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81년 대처정부하의 지방자치선거에서 노동당 내의 좌파는 선전을 하여 런던광역시의회(GLC)의 다수파가 되었지요. 그리고 당시 런던시당 지도자, 즉 런던시의회 의장이었던 켄 리빙스턴은 자연스럽게 런던시정부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굳이 따지자면 관선시장인 셈이죠. 따라서 2000년에 두번째로 시장을 하게 되었다고 해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켄 리빙스턴이 시장으로 있던 1981년부터 1986년까지의 런던은 ‘붉은’ GLC라고 불리울 정도로 좌파적인 정책을 폈습니다. 대중교통체제의 추진, 런던광역시기업위원회의 건설, 민중계획국의 설치, 그리고 런던시의 총체적 변혁 전망을 담은 『런던산업전략』의 발간 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가시처럼 여기던 대처정부가 1986년 런던 광역자치체의 폐지를 통과시킨 후 최후를 맞았지요.

 

자세한 내용은 이론과 실천 2002년 신년호에 실린 장석준 동지의 글 '도시 사회주의’의 실험과 좌절 - 1981년∼1986년 영국 런던광역시정부의 경험을 참고하십시오.

 

아래 이론과 실천에 실린 원글을 담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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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사회주의’의 실험과 좌절
- 1981년∼1986년 영국 런던광역시정부의 경험

장석준


  현재 유럽의 주요 대도시 시장들 중 상당수는 좌파 정치인이다. 파리 시장은 사회당 출신이고, 베를린 시장은 사회민주당 출신이다. 여기에는 런던 시장도 포함된다. 그런데, 런던 시장 켄 리빙스턴은 좌파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영국의 주류 좌파정당 노동당 소속이 아니다. 원래는 노동당 하원의원이었지만, 2000년에 실시된 런던광역시장 선거에서 런던 시민이 가장 원하는 시장 후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당 지도부가 갖은 방법으로 그의 출마를 막으려 하자 결국 항명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고 그래서 당에서 제명되었던 것이다. 시장으로 당선된 지금도 리빙스턴 자신은 복당(復黨)을 원하고 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블레어 정부의 런던지하철 사유화안에 반대하는 데 앞장서고 있기 때문에 노동당 지도부와의 관계는 더욱 나빠지고만 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것은 몇 십 년 간 몸담았던 당에서 제명된 한 외로운 정치인이 런던시민의 압도적인 지지로 시장에 당선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마침 시장 선거가 한창일 때 런던에 체류하고 있던 필자의 한 친구는 하숙집 주인이 리빙스턴을 ‘우리의 켄’이라고 부르며 마치 잘 아는 동무처럼 여기는 것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다고 한다. 한 쪽에서는 위험한 극좌파들과 어울려 다니는 ‘붉은 켄’이라는 험담들이 끊이지 않고, 다른 한 쪽에서는 ‘우리의 켄’이라고 부르는 인물, 그가 바로 지금 런던광역시장이다. 여기에는 켄 리빙스턴이라는 한 명의 대중 정치인의 개인적 매력 이상의 뭔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지금부터 우리가 살펴볼 1980년대 초·중반 노동당 런던광역시정부의 역사적 실험, 그리고 이에 대한 런던 시민들의 기억이다.  

  
1. 노동당 좌파가 런던광역시정부를 장악하다

  노동당은 1974년에 노동당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선거강령과 함께 권좌에 복귀했다. 당시 노동당 강령의 핵심은 ‘국민기업위원회(National Enterprise Board, NEB)’라는 국가지주회사를 만들어 주요 대기업의 주식을 장악하고 그래서 독점자본의 상당 부분을 국공유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노동당 우파는 이 급진적인 공약을 실행할 의사가 없었고 그래서 집권 이후 NEB의 설립 자체를 계속 미뤘을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원안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유명무실한 기구로 만들어버렸다.

  
  이 경험은 노동당 좌파를 각성시키고 단결하게 만들었다. NEB안의 가장 적극적인 옹호자였던 전 산업부장관 토니 벤을 중심으로 해서 각양각색의 당내 좌파 분파들이 결집했다(‘벤 좌파’라고 불림). 이들은 당 강령이 실행되지 못한 이유를 우파 주도의 의원단이 지배하는 당 구조에서 찾고 당내 민주주의의 쟁취를 핵심 요구로 내세웠다.

  
  사실 이 벤 좌파 운동 자체는 1981년을 정점으로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이 글의 주제는 이것이 아니다. 굳이 이야기를 벤 좌파 운동에서부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 노동당의 지역정치가 급진화한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벤 좌파 운동의 주요 기반은 주로 급진적인 직장위원들(영국의 산별노동조합에서 개별 사업장의 투쟁과 단체협상을 주도하는 활동가들)이거나 지구당 활동가들이었다. 특히 과거부터 노동당의 주요 지지 기반이었던 북부 산업지역의 도시들(셰필드 등), 그리고 런던광역시의 지구당들이 주무대가 됐다.

   
  그럼, 우리의 관심 대상인 런던광역시를 보자. 런던‘광역시’가 처음 생긴 것은 1973년이었다. 이 때 처음으로 각 구 자치체를 포괄하는 광역자치체인 ‘런던광역시의회(Greater London Council. GLC)’가 설립됐다. 의원내각제를 고수하는 영국의 전통을 따라 런던광역시 행정부도 GLC 내 다수당이 구성하도록 되어 있었다. GLC가 처음 설립됐을 때부터 다수당은 노동당이었다. 그러나, 노동당 중앙정부가 자신의 강령을 저버리고 오히려 공공부문의 긴축을 추진하여 공공부문 노동조합과 대결을 벌이던 1970년대 말에 시정부의 다수파 자리는 보수당에게로 넘어가고 말았다. 런던시 노동당 역시 중앙정부의 방침대로 공공임대주택에 대한 보조금을 삭감하고 그 임대료를 올려 런던 시민들의 불만을 샀던 것이 가장 커다란 이유였다.


  이 때부터 전당적인 당내 민주화운동에 발 맞추어 런던시당에서도 좌파의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특히 긴축재정정책에 반대하는 공공부문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공부문 노동자들이나 노동당 지구당 활동가들 중에는 1960년대 급진좌파 학생운동의 세례를 받은 이들이 많았다. 이들은 1977년에 드디어 런던시당 집행부를 장악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런던 노동당 소식지>라는 매체를 매개로 런던시의 노동당 좌파 활동가들과 선진 노동자들을 잇는 활동가 네트워크를 따로 만들었다. 이 활동가 네트워크는 1981년의 지방자치선거에서 노동당이 선전(善戰)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서슬 퍼런 대처가 중앙정부를 장악하고 있던 그 때에 런던시에서는 노동당이, 그것도 노동당 내의 좌파가 GLC의 다수파가 됐다. 켄 리빙스턴은 바로 이 때 런던시당 지도자였고, 의원내각제의 관례에 따라 런던시정부를 이끌게 됐던 것이다.

2. ‘붉은’ GLC는 어떠한 실천들을 벌였나?
 
1) 대중교통체제의 추진
 
  1981년 선거에서 노동당 런던시지부의 핵심 강령들 중 하나는 교통문제의 해결이었다. 자가용 승용차의 증가로 악화일로를 걷고 있던 런던의 교통문제에 대해 이들은 대중교통의 활성화를 공약했다. 버스와 지하철 요금을 대폭 낮춰 대중교통 이용을 장려하고, 자가용 승용차 중심의 도로 교통을 되도록 억제해, 런던을 ‘걷고 싶은 도시’, ‘무공해 도시’로 만들어나간다는 것이었다.

   
  노동당이 집권하자마자 GLC는 곧 버스와 지하철 요금을 확 내렸다. 시민들은 이를 열렬히 환영했고, 실제로 대중교통 이용률이 획기적으로 증대했다. 하지만, 이 조치는 보수세력의 반격으로 인해 시끄러운 법정 분쟁의 대상이 됐다. 보수적인 법원은 요금의 재인상을 명령했다. 그러나, GLC는 지속적인 캠페인을 통해 여론을 조성하여, 비록 처음의 인하폭보다는 적지만, 결국 요금 인하를 관철시켰다.

   
  당시 GLC의 교통정책이 참으로 인상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은 2000년 켄 리빙스턴의 선거공약에서 핵심이 20년 전의 대중교통정책을 다시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요금인하문제를 둘러싼 보수세력과의 대결은 좌파 지자체에 대한 대처 정부의 경계와 긴장을 자극한 결정적 계기가 되기도 했다.
  
2) 노동자가 경제의 주인이 된다 - 런던광역시기업위원회

  노동당 런던시지부의 선거강령 중에서 또 다른 중요한 내용은 런던시 차원에서 NEB를 제대로 실천해보겠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런던시의 고용문제를 해결하고 지역 경제의 진보적인 구조조정을 이루기 위해 ‘런던광역시기업위원회(Greater London Enterprise Board, GLEB)’를 건설하겠다고 공약했다.

   
  GLEB는 런던시에서 재정을 출자하는 지주회사이고, 그 이사회는 GLC, 기업계, 노동조합의 대표들로 구성된다. GLEB는 출자나 주식 매입을 통해 사기업을 지방공기업으로 만들거나 혹은 대주주로서 지배력을 행사하며, 이러한 소유·지배를 통해 기업들로 하여금 ‘기업 계획’을 추진하게 한다. 기업 계획의 주된 주체는 해당 기업의 산별노조 지부다. 즉,  GLEB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금융 지원을 받은 기업에서 해당 기업의 노조 지부는 GLEB의 엄호 아래 강력한 단체협상력으로 경영진에게 친노동자적인 기업 계획을 관철시킨다. 기업 계획의 주목표는 고용의 양적 수준의 유지 혹은 증대, 고용의 질적 수준의 향상(즉 산업민주주의의 달성), 여성 노동자나 유색인 노동자를 위한 기회균등정책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약을 실제 추진하는 과정은 만만치 않았다. 좌파 경제학자들의 주도로 2년간 준비 작업이 계속되다가, 1983년에야 드디어 출범했다. GLC가 유일한 출자자였고, 모든 투자 재원은 GLC로부터 나왔다. 이사진은 주로 노동조합 대표들, 협동조합부문의 경영자들, 그리고 경영·기술 전문가들로 구성됐다. 이사 선임 기준은 GLEB의 정책 목표, 즉 고용 창출과 진보적인 산업투자활동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동의하는지가 우선이었다. 첫 두 해에 걸쳐 GLC는 4천만 파운드를 GLEB에 할애했고, 이는 다시 대부나 주식 매입의 형태로 사기업에 투자되었다. GLEB가 지배 주주가 아닌 경우에도, GLEB가 주식을 매입한 사기업의 평균 지분은 25%를 넘었다. GLC의 공적 자금 투입분에 대해 환수는 요구되지 않았으며, 다만 GLC가 표명한 목표를 충족시키고 있는지 여부만이 모니터링됐다. 첫 2년 동안 GLEB가 새로 설립하거나 투자한 기업은 백 개 이상이었고, 이를 통해 직접적으로 창출된 새로운 일자리는 삼천 개 정도였다. GLEB가 새로 설립한 대표적인 벤처기업 중에는 노동조합운동을 위한 주간지 발행 사업도 있었다.

        
  처음 설립됐을 때 GLEB는 7개의 부서로 이뤄졌다. 자산부, 금융부, 기술부, 투자부, 산업부문별전략부, 정보부, 그리고 구조조정투자부가 그것이었다. 이 중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구조조정투자부와 기술부였다. 구조조정투자부는 진보적 산업구조조정을 기획·집행·감사하는 역할을 맡았다. 구조조정투자부는 다시 협동조합과, 기회균등과, 기업계획과로 나눠졌다. GLEB 활동 3년차부터는 모든 투자 계획이 반드시 구조조정투자부의 심사를 거쳐야만 하게 됐다. 구조조정투자부는 GLEB로부터 금융 지원을 받은 사기업들이 GLEB의 ‘사회적’ 목표를 제대로 살리고 있는지를 철저히 감사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해당 기업 내의 노동자 세력을 지원하여 효과적인 경영 개입을 추진하게 했다.

       
  또 하나의 핵심 부서인 기술부는 마이클 쿨리라는 노동운동가·과학기술운동가가 담당했다. 그는 70년대 말의 유명한 루카스항공사 실험의 주역 중 한 명이었다. 당시 루카스항공사는 전투기 제조업의 불황을 이유로 인원감축을 추진했는데, 쿨리를 비롯한 기술직 노동자들이 단협에서 대안제품 생산계획을 제출하여 정리해고를 막았었다. 그 후부터 영국에서는 기술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노동자들의 숙련과 건강을 중요시하는 인간 중심 기술의 개발, 이윤보다는 민중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대안적 생산기술의 개발을 추진하는 운동이 불붙었다. 쿨리의 기술부는 이 운동을 지원하는 무기고 역할을 했다. 기술부는 노동조합과 주민 집단의 기술개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3개의 기술 네트워크, 즉 런던에너지환경네트워크, 런던운송네트워크, 런던혁신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이들 네트워크는 인근의 기능대학을 거점으로 삼아 과학·기술 지식을 지원 받았고, 이렇게 해서 얻어진 기술개발의 성과는 GLEB가 지원하는 협동조합 기업이나 GLEB 소유 기업으로 이전되었다.

    
  GLEB는 소규모의 기업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협동조합화를 추진했다. GLEB 협동조합부의 모토는 “‘기업 계획’은 협동조합으로 가기 위한 대장정일 뿐”이라는 것이었다. GLEB는 특별히 소규모 기업의 협동조합화를 지원하기 위해 ‘런던협동조합기업위원회(London Cooperative Enterprise Board, LCEB)’라는 자회사를 설립했다. LCEB에는 2만5천 파운드가 출자됐고, 그 이사진은 소매협동조합협회, TUC(영국 노총), 주요 협동조합들, 그리고 협동조합운동단체인 런던산업공동소유운동, 협동조합 지원기구인 협동조합개발국의 대표들로 구성됐다.

    
  GLC의 대안경제정책의 핵심은 소수의 경제 관료가 아니라 각 기업의 노동자들 자신, 그리고 다양한 노동운동 조직들이 그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이는 이사진 구성에서 드러날 뿐만 아니라 GLEB의 경영 개입이 항상 해당 기업 노동자들의 노조 조직화와 단체협상력, 일상적 경영참여활동을 북돋는 데서 출발했다는 데서도 잘 드러난다.
 
3) 민중이 도시 계획의 주인이 된다 - 민중계획

  80년대 GLC 내의 또 다른 중요한 기관은 저명한 여성주의자·사회주의자인 힐라리 웨인라이트가 주도하던 ‘민중계획국’이었다. 이 조직은 런던시의 개발·재개발 문제를 다루기 위해 다양한 주민집단과 접촉을 시도했다. 그런데, 이들은 과거의 노동당 시정부들이 했던 것처럼 도시 계획의 ‘구상’과 ‘집행’ 과정은 엘리트들에게 맡기고 민중들에게는 형식적인 ‘심의’만 요구하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민중들이 도시계획의 설계과정에 참여하는 방안이 모색됐다. 이것이 바로 ‘민중계획’이었다.

   
  예를 들어, 민중계획국 요원들은 보수당 정부의 공항 건설 계획에 반대해 투쟁하는 로얄 독스랜드 지역의 주민운동 단체인 ‘공항건설 반대운동(Campaign Against the Airport, CAA)’의 모임에 참석해 주민들의 의견을 청취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주민들이 단순히 반대만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 나름의 대안적인 지역개발계획의 실마리들을 갖고 있음을 발견했다. 국원들은 대안적인 개발계획을 다듬기 위해 주민들이 GLC로부터 어떤 도움을 필요로 하는지 물었다. CAA 활동가들은 GLC로부터 재정 원조를 받아 ‘민중계획센터(People’s Planning Centre, PCC)’를 건설하기를 원했다. 그 결과, PCC가 실제 세워졌다. PCC에는 독스랜드 주민들 누구나 자신의 개발 구상을 가져와 논의할 수 있었다. PCC에 채용된 상근자는 두 명의 젊은 주부, 대학생, 은퇴한 항만 노동자, 그리고 블랙리스트에 오른 노동조합 활동가, 이렇게 4명이었다.

    
  결과만을 이야기하면, PCC가 민중계획국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대안적 지역개발계획인 ‘로얄 독스랜드 지역을 위한 민중계획’은 실제 관철되지는 못했다. 공항건설계획은 보수당 중앙정부의 확고한 방침이었고, 지자체인 GLC가 이를 무효화시킬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을 통해 민중계획국에 모인 좌파 활동가들은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것은 민중들로 하여금 말하고 행동하게 하면 사기업이나 관료기구의 전문 지식보다 훨씬 창조적인 상상력과 생활 속의 지혜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과거와 같은 관료주의적인 중앙집중 방식의 계획이 아니라, 초기 구상 단계에서부터 다양한 민중 집단이 참여하는 참여계획 방식이 필요하다.
  비슷한 사례는 코인 스트리트에서도 있었다. 여기서는 예술가 집단이 재개발 작업에 참여하여 낡은 거리를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시켰다.

4) 『런던산업전략』 - 지방자치 사회주의?

  몇 년간의 GLEB 및 민중계획 경험은 런던시의 총체적 변혁 전망으로 종합되었다. 그 결과가 바로 1985년에 발간된 『런던산업전략』이라는 책자였다. 이 책에는 런던시의 지역경제를 이루는 25개의 부문에 대해 상세한 미시적 계획이 제시되어 있다. 이는 영국 노동당으로서는 최초로 경제활동에 대해 공공당국의 적극적인 계획 지침을 제시한 것이었다. 더구나, 이는 몇몇 전문가들의 손에서 나온 흔한 관료적 청사진이 아니라 런던시의 노동자·민중의 목소리가 집약된 참여민주주의의 소산이었다. 비록 그 다음해에 GLC가 해체되어버림으로써 이 책은 사문서로 끝났지만, 이것이 보여준 ‘민주적 계획’의 가능성은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당시 많은 평자들은 이러한 GLC의 활약을 ‘지방자치 사회주의’ 혹은 ‘도시 사회주의’라는 말로 요약했다.

3. ‘붉은’ GLC의 최후 - 지방자치 사회주의의 한계

  “한 나라에서 사회주의를 이루는 것(일국 사회주의)도 불가능한데, 하물며 한 도시에서 사회주의를 이룰 수 있겠는가?” 프랑스의 맑스주의자 미셸 뢰비는,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브라질 노동자당이 펼쳐 보인 참여예산제의 성과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도, 이와 같이 반문한 바 있다. 이러한 한계는 런던과 같은 세계적 대도시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더구나 세계 역사상 가장 우경한 정부 중 하나인 대처의 보수당 내각이 지배하고 있었던 상황 아래서라면 말이다.

   
  노동당 좌파가 주도하는 지자체의 활약이 드높아질수록 중앙정부의 탄압도 본격화되었다. 첫 나팔은 IRA(아일랜드공화군, 북아일랜드의 독립을 주장하는 무장단체)를 지지하고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어울리는 리빙스턴에 대한 언론의 ‘빨갱이’ 공세였다. 대처 정부는 런던 광역자치체를 해체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지자체에 대한 정부 보조금을 삭감했으며, 지자체가 지방세를 증대하거나 신설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는 1984∼1985년 광산노동자들의 총파업 투쟁을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과정과 동시에 벌어졌다.

    
  처음에 리빙스턴을 비롯한 노동당 좌파 자치단체장들은 전국적 연대를 통해 중앙정부의 지방예산 축소 계획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였으나, 광산노동자 파업이 패배로 끝나는 가운데 이 운동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GLC에 참여한 활동가들은 노동당이 다음 총선에서 집권하는 것만을 유일한 희망으로 삼았다. 이 때부터 GLC의 활동은 마치 종말의 그날을 알면서 최후의 안간힘을 다하는 ‘백조의 노래’ 같은 음조를 띠었다. 1986년 대처 정부는 끝내 런던 광역자치체의 폐지를 통과시켰다. 겉으로는 중앙정부와 기초자치단체가 직접 교류하는 2단계 행정 모델을 통해 행정의 효율화를 달성한다는 것이었으나 그 정치적 의도는 너무나 뻔했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2000년에야 런던 광역자치체는 다시 부활했다. 15년 전의 그 리빙스턴을 첫 직선 시장으로 해서.
 
4. GLC의 실험들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
 
  비록 한 도시에서의 사회주의 실험의 한계가 너무나 분명하다고는 해도, GLC가 열어제친 새로운 실천의 전망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다. 물론 지자체 사회주의라는 전통은 영국에서 그리 낯선 것은 아니다. 영국식 사회민주주의의 원류인 ‘페이비언 협회’의 주된 실천 방안이 바로 지자체를 장악하고 이를 통해 공공서비스를 확대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의 사회주의는 ‘수도관과 가스관의 사회주의’라고까지 불렸다.

   
  그러나, GLC를 비롯한 80년대 초·중반 노동당 좌파 지자체의 실천은 이러한 전통과 커다란 단절을 긋는 것이었다. 우선, 이들은 단순히 도시의 사회간접자본을 확충하고 공공재를 확대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사기업을 사회화하고 생산 활동의 계획화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GLEB의 활동이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이들은 과거 페이비언 사회주의자들처럼 대중들에게 뭔가를 ‘선사’한다는 입장에서 시정(市政)을 펼쳐나간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광범한 영역에서 대중의 ‘참여’를 전례 없이 고양시켰다. 81년부터 5년간 GLC는 관료기구라기보다는 다양한 사회운동들의 마당과도 같았다. 노동당 좌파와 노동조합 활동가들, 맑스주의 학자들, 여성주의 운동가들, 유색인종 공동체의 지도자들, 대안적 생산계획 운동가들이, 시청 관료들, 노동당 우파 정치인들과 ‘불편한 동맹’을 맺으면서 시정부를 창의와 토론, 실험의 난장(亂場)으로 만들었다. 적어도 자치단체 수준에서, ‘국가의 민주화’라는 것이 실제 가능하며 또한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 것인지를 잘 보여주었던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GLC 사례는 진보세력에게 참으로 값진 교훈을 던져준다. 지방자치 영역에서 진보세력의 과제는 단순히 노동운동·민중운동 출신의 지방정치인을 배출하는 것만도 아니고, 지역주민들에게 보다 나은 행정서비스를 ‘베푸는’ 것만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지방자치 영역을 대중운동들에 열어주고 사회적 투쟁과 변혁의 장(場)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지방 국가관료기구를 안으로부터 요동시키고 지역 사회를 아래로부터 뒤흔드는 것이다. 한 마디로, 진보세력에게 지방자치체 진출은 국회의원을 배출하기 위한 준비 혹은 “우리가 보다 나은 시장, 구청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기회가 아니라 노동자·민중이 주도하는 경제를 만들고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열어가는 ‘운동’의 한 부분, 바로 그것이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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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6 02:11 2006/04/26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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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관이 되지 않아서 다행이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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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O 추가제소와 한국 노동자 탄압실태 보고를 위한 민주노총 대표단’이 어제 파리로 출국했다는 기사와 관련되어 공무원노조에 대한 행정자치부의 탄압 기사도 모아서 네이버 블로그에 올렸다. (참고. ILO 추가제소, 공무원노조와 공공부문은?)

원래는 파리로 떠나는 동생의 이름이 박혀 있길래 옮겨올 생각을 했던 것인데, 그게 이상한 곳으로 흐른 것이다. 이창근, 김 석이면 최선의 카드이다.

 

그런데 코멘트로 행정자치부의 악랄한 탄압을 언급하다가 예전에 행정고시 공부를 했던 것이 생각났고, 내가 고시로 사무관이 되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까지 했다. 물론 지금이 시간도 더 널널한 편이고...

 

한편 오세훈이 한나라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2004년 총선 시기 그가 국회의원으로 출마를 하지 않을 때 아마 서울시장에 뜻이 있어서 그럴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이 생각나서 예전 홈페이지를 뒤지는데, 게시판이 열리지 않아 엉뚱하게 홈페이지의 여기저기를 클릭했고, 그러다가 예전에 활동했던 '하이텔 국가고시동호회 F1 행시팸들'의 모임방이 눈에 뜨였다.

 

원래 모임방을 개설했던 곳은 프리첼이었지만, 유료화의 와중에 활동이 중지되고 새롭게 싸이월드의 카페로 옮겼던 모양이다. 물론 나는 가입할 생각도 못했지만 일단 찾았으니 호기심이 생기고...

 

그렇게 가본 싸이월드의 카페는 역시나 내가 예상했던 것과 비슷했다. 10여명이서 친목모임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각종 경조사 - 주로 결혼이다 - 를 알리는 제목이 보였다. 그런데 그 대부분의 카페성원들은 내가 알 수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특징이 고시를 합격한 이들이라는 것. 퍽이나 자신들이 사무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듯했다.  

 

물론 카페 초기에는 여전히 시험공부를 하는 여러 사람이 보였지만, 합격생 위주로 모임이 진행되다가 거기에서 소외된 이들이 탈락하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지 않는 이들만 남게 된 것이다.

 

거기에서 학벌의 문제에서 연장된, 사회자본, 연결망의 위력을 본다. 함께 고시공부를 했다는 인연도 나름대로 자신의 연결망으로 이해되지만, 거기에서 소외된 이들에 대한 관심은 옅어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반가운 마음에 가입을 하려다 씁쓸한 마음에 가입 대신 이런 글을 쓰고 있다.

 

1년차에서 10년차 사이 사무관들의 정치사회의식이랄까, 이런 것들을 한번 살펴보면 좋겠다. 그리고 이와 함께 서울대와 비서울대 사이의 부처이동 또한 검토하면 좋겠고...

 

얼마전 통계청에서 일하고 있는 후배와 오랜만에 전화통화를 하게 되어, 통화 도중 "서울대 출신들은 처음 임용시기에는 성적에 따라서 대전의 청으로 발령나는 경우가 있지만, 이후에 자신의 연줄(?)내지 역량(?), 또는 간판(?)을 근거로 서울의 부처로 옮기게 된다는 것이 통계적으로 확인되는데, 왜 너는 아직 청이냐"라고 농담을 한 바 있다. 물론 그 친구는 자신이 통계에 관심이 있어서 그리 갔다고 하였고, 그래서 "너 때문에 내 분석에 통계적 오류가 발생하니까 빨리 옮기라"고 대꾸해 주었다.

 

어쩌면 그 친구는 학부를 서울대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청에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한국사회에서 학벌은 학부를 기준으로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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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5 23:05 2006/04/25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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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 로고송 1 - 민주노동당 손을 잡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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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서 노래에 관한 글이네요.

 

아래 노래는 "목장길 따라"라는 노래를 편곡한 것으로, 민주노동당의 지방선거 로고송 첫번째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번주에 두 개가 더 나온다고 하는데, 지켜봐야 할 듯 합니다.

 


민주노동당 손을 잡아요

  

힘있는 정당 많고 많지만
희망은 없고 비리만 넘쳐
이제는 안돼 더는 못믿어
민주노동당 손을 잡아요
우리 모두 손을 들어 기호4번 외쳐요(4번)
기호4번 기호4번 4번 민주노동당

  

차별도 없고 아픔도 없는
일하는 사람 행복한 세상
민주노동당 손을 잡아요
행복한 나라 만들어가요
우리 모두 손을 들어 기호4번 외쳐요(4번)
기호4번 기호4번 4번 민주노동당

  

평등한 나라 만들어가요
당당한 나라 만들어가요
민주노동당 손을 잡아요
행복한 나라 만들어가요
우리 모두 손을 들어 기호4번 외쳐요(4번)
기호4번 기호4번 4번 민주노동당

  

우리모두 손을 들어 기호4번 외쳐요(4번)
기호4번 기호4번 4번 민주노동당


제가 자주 가는 모 사이트에 올라온 이 노래에 대한 반응이 더 재미있습니다.

 

ㅇㅇㅇ  (2006-04-20 18:06:22)
노래가 정신 없이 빠르네요.
따라 잡다가 한곡 끝나 버리네.   
    
ㅁㅁ  (2006-04-20 18:26:40)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으흐, 제가 2004년 지방자치의원 보궐 선거 로고송을 부른 사람 중 한명이랍니다. 마이너 선거 취급때문에 별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하였지만 나름 최선을 다했었는데..흑

위의 곡(곡명 : 민주노동당 손을 잡아요)을 듣는 사람들의 평이 대략 부정적입니다. "엽기가 테마라면 딱이다.", "정말 엉망이다." 등등..
   
###  (2006-04-21 00:45:23)

허접한 것만 문제가 아니라 이런 노래도 지역에서 쓰려면 중앙당에 돈을 주고 사야 한다는 겁니다. 참 대화가 안통합니다. 상식적이라면 기조실에서 컨셉을 잡고 미디어 홍보팀에서 진행을 해야 하지만 이미 해체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정체불명의 <문예위원회>에서 소리소문없이(이게 중요합니다)...쿨럭;
    
&&&  (2006-04-21 11:42:36)

국회의원글이 직접부른 노래 로구성하면좋으ㅡ듯 싶은데
다른정당들은 다끝나가는판에
지금 이런 로고송 정말 정신 하나없고...
그렇타구 신니지도않고..
어떡해 해야하나..
답답합니다
      
**  (2006-04-21 13:36:46)

영광, 영광, 영광.
다 함께 찬송하세!

저는 꼭 이 찬송가를 듣는 것 같습니다.
    
@@@ @@  (2006-04-21 16:42:56)

이 멜로디는 제가 덤프 집회할 때 들었습니다. 원곡이 어디 민요였던거 같은데, 하여튼 충남지부 사무차장은 이 멜로디에 맞춰 노래를 부르며 율동을 했습니다. 여러분~ 노래를 부르다가 이건희~ 가 나오면 오른발을 들고 개새끼~ 가 나오면 왼발을 드세요.

개새끼 사~ 러 장에 갔는데, 개새끼 없~ 어 이건희 샀네 어쩌구 저쩌구~ 저쩌꾸~
이건희 개새끼 이건희 개새끼 이건희 개새끼 X새끼
이건희 개새끼 이건희 개새끼 이건희 개새끼 X새끼~

하체 운동이 됩디다.
      
$$  (2006-04-22 22:00:31)

죄송하지만, 흐음... 쫌 아닌거 같아용
      
oo  (2006-04-23 22:19:33)

머 이런걸 꼭 평가를 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한마디 하라시면....
노동문화 운동가의 한사람으로서 쥐구멍이라도 찾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네요....
정말 쪽팔리고로 가사는 전혀 선동적이지도 그렇다고 특별한 이슈가 있지도 않고
더욱 기가찰 노릇은 멜로디를 이딴 전혀 어울리지도 않는 곡을 붙여다가.....
이거 너무 당의 실력을 제대로 보여주는거 아녀?
궁금한것은 장난기 가득하게 녹음한 가수의 정체는 뉘신지......
    

이런 로고송을 들으면 정말 돌아버리겠습니다.

원곡도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다가, 편곡을 뭣같이 해서리 전혀 와닿지도 않고,

단지 기호4번만 반복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인지도를 위해 기호4번을 강조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전혀 선동적이지 않은 허접한 가사에, 진보정당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편곡은 또 무엇이며...

 

목소리로 들어보건대, 이 곡을 편곡하고 노래를 부른 이들은 아마 노래집단 '우리나라'의 가수 중의 한 사람일 겁니다. 이들은 지난 총선 때도 되지도 않는 노래 몇 곡을 작곡해서 민주노동당을 말아먹은 바 있습니다.

이런 식의 로고송은 그쪽의 전문이라고 할 수 있죠.

그래놓고는 스스로 대중적인 노래를 만들었다고 자랑할 겁니다.

그래서 또 나온다는 2곡도 정말 걱정됩니다.

  
민주노동당 손을 잡아요?

흠... 손을 잡는 것이 아니라 발목을 잡지나 않을지...

써먹고 나서 오히려 표떨어질 노래는 제발 만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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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4 22:41 2006/04/24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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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상의 해빙기 / 너를 태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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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주제곡 중에

<너를 태우고(Carrying You)>라고 <천공의 성 Laputa(Laputa: Castle in the Sky)>의 엔딩곡이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는 심심하면 흥얼거리고 다녔지요. (참고. 흥얼거리는 만화 주제곡?

  

이지상 님의 블로그에 갔다가 이 노래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를 발견했습니다.

<이지상 4집 기억과 상상중>에 실린 <해빙기>라는 노래가 그것입니다. 

이지상 님은 이를 난곡송이라고 하더군요. 

 

이지상 님도 난곡에 자주 오셨나 봐요. 

이지상님의 블로그에서 담아옵니다.

블로그 원글에 있던 사진은 뺐습니다.

로딩이 너무 길어서요. ㅡ.ㅡ;;

 

이지상님의 글에 나오는 <해빙기>와 <너를 태우고>를 한번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몇년전인지 기억도 가물가물 합니다만

가장 깨끗하고 좋은 건물이 동회에서 지어준 화장실이었던 동네

신림동 난곡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해 겨울엔 서울시와 건설업자가 세입자 가구당 650만원(?)쯤 주고 나가라고 했고

생존의 위기에 몰린 사람들은 저마다 살길을 찾아 그 아랫동네의 지하방으로 떠나거나

갈 곳 없는 이들은 담이라고도 할 것 없는 시멘트 벽에 각종 구호를 써붙이고 생존권 투쟁을

외치기도 했고 선잠 깬 새벽 느닷없는 철거반의 포크레인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아이를 달래며 기어코 포크레인의 바퀴밑에서 "나를 밝고 지나가라"고 절규하기도 했습니다.

 

그 해 겨울 서울에서 가장 높은데서 사는 가장 낮은 사람들의 마지막 성탄예배 광경은

또렷이 기억합니다.

난곡 언덕 중턱의 주차장에서 몇개의 드럼통 난로로는 도저히 데울수없는 찬 바람을 맞으며

발아래동네 세상의 허황된 희망에 맞서 뜨거운 절망을 눈물로 기도했던 그 성탄을 잊을 수는

없습니다.

거기서 민주노동당 대표를 지내셨던 김혜경님의 따뜻한 손도 잡았고 30년 빈민활동을 하신

벽안의 수녀님의  기도도 들었습니다. 그날 이후 눈이 내리고 다시 녹을때까지

서너번 그 언덕을 드나들며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낯선 비둘기 한 마리 먹이를 쫓다 비행기 날으는 곳으로 떠나고

 굳게 잠긴 철문안의 작은 방에선 또 어떤아이들이 성냥불 장난할까

 돌 계단 틈으로 바람이 불어오면 어느새 묵었던 잔설이 녹고

 무너진 예배당 십자가 위엔 또다른 햇살이 비칠테지

 이렇듯 날은 저물고 어둠이 내리고 피곤에 지친 사람들 돌아오고

가장 높은 곳에 사는 가장 낮은 이들 그 가난한 마음에도 봄꽃은 피어날까 "

 

이 곡은 저의 피아노 연주 레파토리가 되어서 어디서든 피아노를 칠 때면

제일 먼저 두드리는 곡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4년전쯤 이곡을 듣던 후배가 다시 한번 연주를 청했는데 자기가 가장 좋아하

는 곡이라고 했습니다. "천공의 성 라퓨타" 아니냐고.........

저는 애니매니아가 아니어서 이름만 알고 있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영화는

어린시절의 코난 외에는 본 적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역시 이름만 알고있었던 작곡가 히사이시 조의 음악도 모르는 상태였구요.

- 그 이후에 그분들의 작품 대부분을 봤고 들어서 지금은 매니아 수준입니다만^^ -

천공의 성 라퓨타 음악을 찾아 들어보고..........

 

이럴수도 있구나. 전혀 다른 상황속을 헤메는 상상 속의 길이, 작가의 감성이

똑같이 움직일 수 있구나 싶었습니다.

주요 동기가 된 서두 2마디가 딱 음표 하나 틀리고 리듬과 선율이 똑같은 거였습니다.

작곡가  히사이시 조의 음악 발매년도가 84년.....누가봐도 표절인 셈입니다.

 

그래서 이번 음반에서 제외시킬까 고민했습니다만 지금은 완전히 자취를 감춘 그 높은 언덕의

달동네 난곡의 마지막 성탄예배에 대한 기억을 포기하는것 같아서  포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제겐 표절에 대한 비난보다 그 기억이 더 소중한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대 작곡가 히사이시 조 선생님께는 무척 죄송한 일입니다.

 

이 곡이 그분의 귀에 들릴리도 만무하지만 혹 들리셨다면

어쨋든 뻔히 알고도 발매를 해야 하는 저의 마음도 헤아려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이지상 - 해빙기 < 이지상 4집 기억과 상상중 >


Inoue Azumi - 너를 태우고(Carrying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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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20 22:54 2006/04/20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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