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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운동사 최초의 고공농성, 1인시위자 강주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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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매일노동뉴스에 실린 '1931년 강주룡과 2011년 김진숙'이라는 글을 보고 그렇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철탑 고공농성 이후 더 이상 그런 고공농성이 없기를 바랬었다. 그런데 올해도 어김없이 여성노동자의 고공농성은 이어지고... 여성노동자의 고공농성이 80년이 지난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다니...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 것인지... 김진숙 동지의 고공농성을 보면서 안타깝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6년 전에 네이버블로그에 강주룡에 관한 글을 모아놓은 적이 있어 이를 담아왔다. (이 중에서 박준성의 글은 링크를 찾지 못하겠고, 퍼슨웹의 가상인터뷰글은 링크를 해놓았는데, 링크된 페이지가 사라졌다. 그래서 대신 동광에 실렸던 다른 글을 넣어놓는다. 이것이 가상인터뷰글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이런 고공농성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와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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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강주룡과 2011년 김진숙 (매노, 구은회 기자, 2011-03-04 오전 9:17:11)
저임금·해고에 맞서 싸우는 여성노동자들
 
우리나라 최초의 고공농성자는 여성이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였던 강주룡은 1931년 5월29일 새벽 평양 을미대 지붕에 올라 회사의 임금삭감 계획에 저항했다. 당시 조선인 남성의 임금은 일본인 남성의 절반, 조선인 여성의 임금은 조선인 남성의 절반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평양 선교리 평원고무공장은 임금을 깎겠다고 발표했고, 조선인 여성노동자들은 굶어 죽기로 싸우겠다며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그러자 회사는 노동자 49명 전원을 해고했다. 일본 경찰을 투입해 한밤중에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몰아냈다. 자신들의 정당한 싸움을 세상에 알리겠다며 을밀대 지붕에 오른 강주룡은 “(평원고무공장의 임금삭감이) 결국은 평양의 2천300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 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려는 것입니다”라고 외쳤다.
 
80년 전 강주룡의 외침은 2011년 부산 한진중공업 85호기 지브크레인 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고용과 노동조건을 둘러싼 노동자들의 저항은 계속되고 있다. 김 지도위원은 한진중의 정리해고 철회를 촉구하며 지난 1월6일 농성을 시작했다. 그는 81년 한진중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해 용접공으로 일하다 86년 7월 해고됐다. 누구보다 해고의 아픔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조선소 아저씨들이 잘리는 것을 마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며 홀로 크레인에 올랐다. 하지만 한진중은 지난달 15일 생산직 172명을 정리해고했다.
 
지난해 회사로부터 복직합의를 받아 내고 일터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는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도 기록에 남을 만한 고공농성을 벌였다. 중소 제조업체 불법파견 문제를 상징하는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2005년 7월 해고된 뒤 무려 1천895일 동안 복직투쟁을 벌였다. 2008년 5월에는 35미터 높이의 철탑에서 18일간 고공농성을 벌였고, 지난해에도 포클레인 위에 올라 농성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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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고무공장 여성노동자 강주룡 2005/04/15 01:00

 

카테고리를 별도로 하나 만들어 한국과 세계의 진보민중운동, 특히 진보정당사와 노동운동사에 관한 글들을 퍼오기로 하였다. 이와 관련된 글들이 많은데, 약간 정리되지 않았다는 느낌도 들었고, 또한 이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를 하면서 정리하는 것도 의미있을 듯하여 별도의 카테고리를 만든 것이다. 갈수록 블로그가 무슨 데이터베이스 비스무리한 것이 된다.

 

이를 저지르게 된 이유는 우선 가깝게는 서핑을 하다가 민주노총의 기관지 [노동과 세계]에 연재되고 있는 [사진 속의 노동역사]에서 박준성 님의 전태일평전에 관한 글을 발견했는데, 다른 연재글들도 담아놓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는 것이고(원래의 글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둘째로 이번에 진보정당운동사와 민주노동당 강령에 대해 교육을 하면서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먼 이유이다. 

 

처음으로 올리는 것은 평원고무공장 여성노동자 강주룡에 관한 글이다. 강주룡은 예전에 한겨레신문에 한번 소개되었는데, 그것이 기억나는 이유는 사진 때문이다. 사진에 나오는 것처럼 한국 노동운동사 최초의 고공농성, 1인시위를 그가 해내었던 것이다. 그는 한국 여성노동운동가 1호로 알려져 있다.

 

당시 평양의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로서 파업을 이끌던 강주룡은 단식동맹을 조직하여 공장을 점령했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로 내몰린 후 대성통곡하는 동무들을 보면서 이들의 용기를 다시 북돋워줄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평원고무공장의 횡포를 하루라도 빨리 알려야 한다고 보았다. 이 파업투쟁의 패배는 평양지역 고무공장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인하로 귀결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죽을 각오를 하고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갔다가 어차피 죽을 바에는 평원공장의 만행을 알리고 죽자고 하여 그 사정을 외쳤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하여 죽는 것이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그는 일제의 노동착취와 수탈을 고발하며 9시간 30분 동안 규탄 연설을 한 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이에 그치지 않고 5월 29일 저녁부터 6월1일 새벽 2시 검속 기간이 끝나 풀려날 때까지 57시간을 “승리를 못하면 차라리 죽고 만다”며 한끼 밥도 먹지 않으면서 완강히 버텼다고 한다. 이런 투쟁 때문인지 그녀는 이듬해 8월 숨을 거두었다.

 

평원고무공장 여성노동자 강주룡이라고 제목을 달긴 했지만, 퍼슨웹의 인터뷰처럼 여류투사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당시에는 체공녀라고 불렀다던가? 일제 시대에도 운동 흉내를 내다가 맛이간 여성지식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강주룡처럼 견결하게 투쟁했던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래 글은 박준성님의 글과 퍼슨웹의 가상인터뷰 글, 그리고 한겨레신문의 기사이다. 어쩌면 가상인터뷰 글이 훨씬 더 와닿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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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평원고무공장 여성노동자 강주룡 (노동과 세계, 박준성 역사학연구소 연구원·노동자교육센터(준) 공동대표, 2003년01월23일 14:02:23)

 
최초의 '고공농성' 선뵌 치열한 삶
노동자 투쟁의 역사를 살피는 일은 과거라는 무덤 속에서 살아나오는 선배 노동자들의 처절한 외침과 거대한 함성을 듣는 것이다.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연대하지 않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우리들 다하지 못한 꿈을 함께 싸워 이루어라"는 날카로운 꾸짖음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1931년 5월29일 아침 평양 을밀대 지붕위에서 한 여성노동자가 우리 노동운동사 최초의 고공농성, 1인시위를 벌였다. 평양 평원고무공장노조 지도자 강주룡이었다.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 앞에서 외친 내용을 강주룡은 뒤에 잡지사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 이렇게 전했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천3백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천3백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해서는 (중략)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나는 평원고무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중략)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태여 나를 여기(지붕)서 강제로 끌어낼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 뿐입니다."
 
목매 자살하려다 을밀대 지붕에 올라  

1931년 5월16일 평양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공장은 제멋대로 임금을 깎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때 조선인 남성노동자들의 임금은 일본인 남성노동자들의 절반 수준이었고,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은 조선인 남성노동자들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런 임금을 더 깎겠다는 것이다. 여성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강주룡이 앞장섰다. 평양의 다른 12개 고무공장에서도 평원고무공장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임금을 깎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평원공장의 결과는 다른 고무공장에서 일하는 2천3백여 노동자의 임금에도 영향을 미칠 문제였다.
  

노동자들이 12일 동안 죽자사자 싸웠지만 회사는 요구를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5월28일, 평원노동자들은 굶어 죽기로 싸우겠다고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회사는 노동자 49명 전원해고를 선언하고 한 밤중에 일본경찰을 끌어들여 공장 밖으로 쫓아냈다.
  

선배이자 간부였던 강주룡은 죽음으로 평원공장의 횡포와 자신들의 싸움을 세상에 알리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밤중에 광목 한 필을 사서 을밀대 근처로 올라갔다. 벚나무 가지에 광목을 걸어놓고 목을 매려다 '이대로 죽는다면 사람들이 저 여자가 왜 죽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죽더라도 우리의 싸움을 알려야 할텐데...'하며 궁리를 했다. 어둠 저편으로 을밀대가 어슴푸레 눈에 들어왔다. 광목 한 끝에 묵직한 돌을 묶어서 지붕 건너편으로 던져 넘겼다. 한쪽을 기둥에 묶고 밧줄처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죽을 수는 있어도 결코 물러서지는 않겠다고 마음을 다지면서 강주룡은 빼앗긴 나라의 노동자들의 처지와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이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면서 외치고 외쳤다.
  

평양서로 끌려간 강주룡은 29일 저녁부터 6월1일 새벽 2시 검속기간이 끝나 풀려날 때까지 한끼 밥도 먹지 않으면서 완강히 버텼다. 쉴 틈도 없이 바로 선교리 파업본부로 돌아가 동료들을 격려하고 파업을 지도하였다.
 
감옥서 얻은 병으로 31년 꽃다운 삶 마감

그 즈음 강주룡은 평양에 있는 다른 노조간부, 노동운동 활동가들과 함께 노동자 정치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적색노조'라고 불렀던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었다. 6월9일, 노동자 출신 강주룡은 '평양 최초 최고의 적색노동조합사건'에 연루되어 또 다시 체포되었다.

    
평양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1년 동안 감옥에서 비타협의 옥중투쟁을 벌이던 강주룡은 극심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을 얻었다. 1932년 6월7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잠시 나아지는 듯했으나 병은 다시 점점 깊어갔다. 그러나 병원에 입원하여 안정되게 치료를 받을 형편이 못되었다. 동료들의 처지도 어렵고 가난하긴 마찬가지였다. 두 달 동안 앓아 누웠던 강주룡은 1932년 8월13일 오후 3시반, 평양 서성리 빈민굴 68-28호에서 한 많은 세상, 그러나 치열하게 살았던 31년 삶을 마감했다. 8월15일 남녀 동지 1백명이 모여 장례를 치르고 평양 서성대 묘지에 묻었다.

    
강주룡의 삶과 투쟁은 대중들 속에서 앞장서 죽기로 싸우겠다는 지도자의 꿋꿋한 모습과 명예롭고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그의 외침은 지금도 노동자들의 투쟁이 자신의 이익과 요구를 해결하려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지지와 연대가 왜 필요한지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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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기억되지만 망각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삐딱한 자들에게 역사는 가혹하다.
여기, 망각된 과거로부터 하나의 목소리를 불러낸다.
때는 1931년 5월 28일. 평양의 을밀대에 한 여자가 올라갔다.
을밀대는 평양 금수산 마루에 있는 대와 그 위에 세워진 정자인데,
지붕까지 높이는 40척, 즉 12미터이다.
그 지붕 위에서 장장 9시간 반 동안 농성을 해서 화제가 된
그녀의 이름은 강주룡!
그녀는 지붕 위에서 머물렀다고 공중에 체류한 여자,
'체공녀'라는 별명이 붙었다. 지금으로 치면 남대문 지붕 위에 올라간 격.
여자라는 이유로, 노동자라는 이유로 이중의 굴레를
쓰고 있던 여성노동자를 만나본다.

 
[을밀대(乙密臺)의 체공녀(滯空女)-여류 투사 강주룡(姜周龍) 회견기](<동광(東光)>, 1931. 7.에서)
<동광> 1931년 7월호 기사
 
평양 명승 을밀대 옥상에 체공녀가 돌현하엿다.
평원(平元) 고무직공의 동맹파업이 이래서 더 유명하여젓거니와 작년 노동쟁의의 신전술을 보여준 일본 연돌남(煙突男)과 비하야 좋은 대조를 이루는 에피소드라 할  것이다.(중략)
 
「우리는 사십구 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이천삼백 명 고무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것임으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랴는 것입니다. 이천삼백 명 우리동무의 살이 깍기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덩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와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하야서는(중략)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집웅우에 올라 왓습니다. 나는 평원고무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겟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자본가의 (중략)하는 노동대중을 대표하야 죽음을 명예로 알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타야 나를 여기서(집웅) 강제로 끄러내릴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집웅우에 사닥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곳 떠러져 죽을 뿐입니다.」
 
이것은 강주룡이 5월 28일 밤 12시 을밀대 집웅우에서 밤을 밝히고 이튿날 새벽 산보왔다가 이 희한한 광경을 보고 뫃여든 백여명 산보객 앞에서 한 일장 연설이다. 이 연설을 보아서 체공녀 강주룡의 계급의식의 수준을 엿볼 수 잇다. 이 여자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생애를 하며 어떠한 환경의 지배를 받앗나? 이것이 편집자로부터 내게 발한 명령이다.
 
6월 7일. 부외(府外) 선교리(船橋里) 평원 고무직공 파업단 본부로 강주룡여사를 방문하엿다. 유달리 안광을 발하는 작은 눈, 매섭게 생긴 코, 그리고 상상이상의 달변은 첫 인상으로 수월치않은 여자라는 것이엇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의 과거 생애가 듣는 나를 놀라게 하엿다. 오늘 그의 가진 의식과 남자이상의 활발한 성격이 우연한 바가 아님을 알수잇다. 이제 잠간 나는 붓을 돌리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대로의 그의 과거 생의 독백을 속기한다.
 
고단했던 간도길 - 결혼에서 사별, 노동자가 되기까지
나의 고향은 평북 강계(江界)입니다. 열네살까지는 집안이 걱정없이 지냇으나 아버지의 실패로 가산을 탕진하야 내나히 열네살쩍예 서간도로 갓습니다. 거긔서 농사하면서 칠년동안 살앗는데 스므살 나든 해에 통화현에 잇는 최전빈(崔全斌)이라는 이에게 시집갓습니다. 남편은 그때 겨우 15세의 귀여운 도련님이엇습니다. 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았다기보다도 남편을 사랑하엿습니다. 첫눈에 아조 귀여운 사람 사랑스런 사람이라는 인상을 얻엇습니다. 부부의 의도 퍽 좋앗습니다. 동리가 다 부러워 하엿답니다.
 
시집간 지 1년후부터 우리 부부의 생애에는 큰 변동이 생겻습니다. 그것은 남편이 00단 수령 白狂雲(지금은 그이도 죽엇습니다)씨의 제이중대에 편입된 것입니다. 물론 나도 남편과 같이 풍찬노숙하며 00단을 따라다녓습니다.
 
6,7개월 00단을 따라다녓는데 나종에는 「거치정거려서 귀찮으니 집에가잇으라」는 남편의 명령을 받고 나는 본가에 도라와 잇엇습니다.
 
남편이 백광운씨의 제2중대에 편입된지 1년만이엇습니다. 그 때는 내가 본가에 도라온지 5~6개월후이엇는데 우리 본가에서 백여리나 되는 부락에서 남편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갓슬때는 벌서 틀렷습디다.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먹엿더니 좀 정신을차렷섯으나 그날밤으로 죽엇습니다. 밤에는 단지 나혼자 그를 간호하고 잇엇는데 잠간새에 숨이 끈허젓습니다. 죽엇는지 살앗는지 몰라서 바늘로 살을 찔너보고야 아조 죽은줄 알앗스나 기위(이미) 죽은 사람이라 시신옆에서 한잠 자고 이튿날 아츰 병문안왓든 사람들의 손으로 무첫습니다.
 
그리고 나는 시집으로 도라갓섯습니다. 좀 창피한 이야기지만은 시집에서는 나를 의심하야 남편 죽인년이라고 고생햇습니다. 하도 원통하고 또 돌봐주는 이도 없서서 1주일을 꼽박굴멋습니다.(그런데 이번 사흘쯤 단식이야 쉽지않아요?)
 
서간도서 귀국한 것은 내가 스물네살 되든 해엿습니다. 처음에는 사리원서 1년쯤 지냇는데 부모와 어린동생을 다리고 내가 밥버리를 하면서 아들노릇을 하엿습니다. 그러다가 평양온 것이 벌서 오년째 됩니다. 처음부터 고무직공으로 밥버리를 햇지요. 고무직공조합에는 작년파업이 이러나기 바로전에 입회햇습니다.
 
을밀대에서
을밀대에 올나갓든 얘기요? 그야 다 아시지 않아요? 5월 29일밤 우리는 전술을 고치어 단식동맹을 조직하고서 공장을 사수하기로 하고 공장을 점령하엿습니다.
 
그러나 밤 한시나 되니까 공장주는 경관에 의뢰하야 우리들을 공장밖으로 내몰앗습니다. 동무들이 대성통곡하면서 쫓겨나올때 나는 차라리 이 목숨을 끊어서 세상사람에게 평원공장의 횡포를 호소할 맘을 먹엇습니다. 그래서 나는 공장에서 쫓겨나오는대로 거리에서 일목(日木) 한 필을 사가지고 을밀대로 올라갓습니다. 그러나 「사구라」 나무가지에다 일목을 거러놓고새각하니 내가 이대로 죽으면 젊은 과부년이 또 무슨짓을 하다가 세상이 부끄러워 죽엇나하는 오해를 받을뜻하여 기왕이면 을밀대 집웅우에 올나갓다가 아츰에 사람이 모이면 실컨 평원공장의 푕포나 호소하고 시원히 죽자고 맘을 돌렷습니다.
 
그러나 을밀대 집웅우에 올라갈 길이 망연하엿습니다. 궁리끝에 일목 한끝을 올가미를 지어서 집웅마루에 걸어보랴고 애썻으나 실패하엿습니다. 마즈막의 묘책에 나는 성공하엿습니다. 일목 한끝에 무거운 돌을 달아서 지붕 건너편으로 넘겨놓고 줄을 다려보앗더니 괜찮앗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줄에 매달녀 「그네」를 뛰어서 안전함을 시험한 후에 이 줄을 타고 집웅으로 올라갓습니다.
 
그때가 아마 새벽 두시는 되여슬 것입니다. 사면이 고요한데 기생을 끼고 산보하는 잡놈을 두개나 보앗습니다. 아즉 날이 밝기는 멀었는지라 일목을 걷어 올려몸을 가리고 한잠 잣습니다.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내가 요란한 소리에 놀라 깬 때는 벌서(중략)
 
그는 벌서 한개 로동자가 아니라 사십구명의 로동자를 거느리고 투쟁의 선두에 나선 「리-더」의 한사람이다.(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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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노동운동가 1호 ‘강주룡’ (인터넷 한겨레 편집 2002.01.14(월) 18:23, 박정애/여성사연구모임 길밖세상)
    

1931년 5월29일, 아침부터 평양 을밀대 아래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을밀대 지붕 위에는 한 여자가 무언가 열심히 호소를 하고 있었다. 바로 평원고무공장의 노동자 강주룡, 임금인하를 반대하며 파업을 벌였다가 강제로 쫓겨난 참이였다. 이대로 지고 만다면 전염병이 퍼지듯 전체 고무직공의 임금인하가 시작될 것이 뻔하다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또 외쳤다.
 
1901년 평북 강계에서 태어난 강주룡은 서간도에 가서 살다가 20살 되던 해에 5살 연하의 최전빈과 결혼했다. “남편에게 사랑 받았다기보다는 남편을 사랑했다”고 유쾌하게 회상하는 모습은 그의 열정적인 성품을 보여준다. 함께 독립단에 들어가 활동하던 남편이 병을 얻어 죽자, 시집에서 강주룡을 살인자라고 고발하는 바람에 유치장에 갇히는 수모도 겪는다. 24살 때 귀국, 평양에서 고무직공을 하면서 부모와 어린 동생을 먹여 살렸다고 한다.

  

당시 고무공장은 방직공장과 더불어 식민지 공업화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발달하게 된 분야였다. 이들 공장의 눈부신 성장은 여성 노동력에 기반한 것이었는데, 자본가들은 `값싸고 순종적인' 여공들을 통해 최대한 이윤을 확보하려 했다. 턱없이 낮은 임금에 장시간 노동은 기본이었고, 남자 감독관의 욕설과 구타, 성희롱은 끝이 없었다. 1929년 공황이 닥쳐오자 상황은 더 나빠졌다. 공장주들은 `산업합리화'를 내세워 노동자에 대한 임금인하, 정리해고, 노동시간 연장 따위를 감행하였다. 참다 못한 평양의 노동자들은 1930년 대대적인 총파업을 벌였고, 그 여파가 가라앉기도 전에 평원고무공장 공장주는 다시 한번 임금인하를 시도했다.

  

강주룡의 고공농성으로 파업단은 새로운 힘을 얻는다. 사람들은 강주룡을 `여류투사 강여사', `평양의 히로인'이라고 부르면서 뜨거운 관심과 호응을 보냈고, 파업단은 전열을 가다듬어 끝내 임금인하를 막아냈다. 그 과정에서 강주룡 등 20명은 해고를 당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다음해 8월, `극심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으로 고통받던 강주룡은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숨을 거둔다.

    

역사는 강주룡을 한국 최초의 여성 노동운동가로 기록한다. 그러나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가 여공들의 파업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의 발견은 좀 늦은 듯 하다. 이미 1923년 경성고무공장 여공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식민지시대 노동운동의 물꼬를 튼 여성 노동자들은 때마다 파업 현장을 지키면서 전체 노동운동의 지평을 넓혀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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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4 14:28 2011/03/04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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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민일보] 사퇴한 금속노조 경남지부 최은석 부지부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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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은석 동지가 금속노조 경남지부 부지부장을 그만 둔 것을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그는 노조 활동도 접었다고 합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고 해왔던 노동운동인데... 노동운동의 큰 자산을 잃어버린 듯하여 많이 안타깝습니다.
 
최은석 동지는 작년 6월 논현동 관세청 앞에서 열렸던 최저임금현실화 생활임금쟁취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마지막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경남 금속노조 동지들과 함께 올라왔었고, 제게도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던 걸 잊지 못하고 있지요.
 
그는 언제 대공장 노조 위원장을 했냐는 듯이 어떤 자리에서건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얘기를 했고, 현장 활동 또한 열심이었습니다. 이러저러한 자리에서 토론하다 보면 어쩌다가 그와 의견일치가 안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가 하는 말에는 항상 귀를 기울었습니다. 거기에는 열정과 진심이 우러나오고 있었거든요. 노동운동을 하는 이들을 오랫동안 자주 알게 되고, 인간적인 면까지 보게 되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지만, 거기에서 예외였던 이가 바로 최은석 동지였습니다.
  
그래서 너무 아쉽습니다. 아내의 병환과 생활고 때문에 활동을 중단하였지만, 나중에 다시 현장에서 볼 수 있게되기를 바랍니다. 아마 그는 이 글을 볼 수 없을 테지만, 힘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창원에 내려가서 술이라도 한잔 했으면 하네요.
 
아래 기사는 경남도민일보에 실린 것인데, 로그인을 하지 않으면 전문을 볼 수 없기에 여기에 기사 전문을 퍼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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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건 노동운동 그러나… 떠납니다 (경남도민일보, 2011.02.25  05:01:16  김훤주 기자)
사퇴한 금속노조 경남지부 최은석 부지부장 이야기
 
경남의 대표적인 노동운동가 가운데 한 사람이 활동을 접었다. 전국금속노동조합 경남지부 부지부장을 맡고 있던 최은석(55·동명모트롤지회 소속) 씨가 지난 14일 금속노조 홈페이지 게시판에 '사퇴' 사실을 알렸다. 그의 사퇴와 활동 중단이 아내의 병환과 생활고 때문임이 알려지면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최씨는 "2009년 12월 부지부장에 당선돼 파견나왔는데 단협이 해지된 상황이라 무급휴직으로 수행해 왔다"며 "최근 아내의 병고로 더 이상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게 됐다"고 밝혔다.
 
최씨는 고교 중퇴 학력으로 마산수출자유지역 삼양광학에 입해 노조 결성에 나섰다가 1980년 해고된 뒤 같이 마산 양덕성당에 다니던 김명숙(54) 씨와 1981년 11월 25일 결혼했고 1982년 5월 거제 대우조선에 들어갔다.
  
대우조선서도 최씨는 6월 항쟁과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 터지기 전인 1987년 4월 노조 결성에 나섰다 해고됐다. 그해 8월 11일 결성된 노조는 89년 해고자 문제에 대해 김우중 대우 회장과 직접 교섭했다. 최씨는 "거제는 떠날 수 없다"고 했고 김 회장은 "대우조선 비서실에 있으면 되겠네" 했다. 최씨는 90년 9월부터 1년간 김 회장의 비서를 지냈다.
 
최씨는 변하지 않았다. 1992년 11월 13일 대우조선 노조 제5대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앞서 아내 김명숙씨는 도저히 거제서는 못 산다며 창원에 갔다. 최씨는 노동운동은 해야한다며 남아 3년 가까이 주말 부부로 지냈다.
 
아내의 거제 탈출에는 최씨가 당한 고초가 작용했다. 최씨는 1987년 여러 차례 납치를 당했다. 1989년 임금투쟁 때는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다. "쇠파이프에 맞고 여관에 끌려갔는데 (나를) 찾으러 나온 조합원들한테 당한 깡패들이 회칼을 들고 와서 죽이려 했으나 마침 경찰이 들이닥쳤다." 최씨는 구속도 여러 차례 됐다. 1987년 두 차례, 1991년 한 차례.
 
최씨가 두산모트롤의 전신 동명중공업으로 옮긴 때는 1995년 4월. "(아내가 있는) 창원에 가도 노동운동을 할 수 있겠다 싶어 자영업이라도 하려고 사표를 냈다. 그런데 회사측이 그동안 괴롭힌 데 대한 '일말의 무엇'이라도 있는지 취업을 알선해 당시 대우조선에 51% 지분이 있던 동명중공업 사무직으로 오게 됐다."
 
최씨는 오자마자 또 노조에 가입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최씨가 가입하자 동명중 노조가 민주노총 가입을 하고 96년 노동법 재개정 투쟁에 나섰다. 97년에는 조합원 자격이 없는 과장으로 최씨를 진급시키는 일이 생겼다. 노조는 1998년 과장도 노조 가입을 할 수 있도록 규약을 바꿨다. 노사간 적지 않은 일이 일어났음이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최씨는 1999년 교육선전부장을 했다. 집행부를 맡지 않았을 때는 대의원을 했다. 대우조선이라는 대규모 노조 위원장을 했던 이로서는 보기 드문 행보다. "대기업 등에서 뭔가 했다 해도 그 경험을 실무나 현장에서 쓰지 않으면 배신이다. 위원장을 했다면 하면서 얻은 모든 것을 돌려야 한다. 운동은 전체의 자산이다. 위원장 하려고 운동하느냐."
 
그러던 최씨가 3월 2일자로 공장에 들어간다. 동명모트롤 노조 활동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노조 활동을 하면 해당 시간 급여가 나오지 않는다. 사용자가 단체협약 해지를 사유로 2009년 4월부터 노조 활동을 거의 인정 않기 때문이다. 아내 김명숙씨가 남편의 노동운동으로 스트레스를 크게 받았다고 여기는 것도 중요한 이유다. "2010년 12월 25일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병원에서 검사를 했는데도 여태 병명이 나오지 않았다. 2월 14일 부산백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뇌에 있는 주먹 반 개 크기 염증에서 고름을 덜어냈다. 일단 안정이 된 것 같기는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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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3 16:55 2011/03/03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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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시봉과 김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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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쎄시봉과 관련하여 김선주 씨가 쓴 칼럼에 대해 말들이 많았기에 나도 트윗에 한 마디했다.

 

‘세시봉’ 바깥세상 이야기 http://bit.ly/f1gJfD 김선주가 세시봉을 들먹이며 암울했던 70년대를 얘기하는 칼럼을 쓴건 세시봉을 가지고 당시를 미화하며 지금 활용하는 이들이 있기때문일 터이다. 우리는 과거를 항상 되새길줄 알아야 한다

 

지금 진보블로그 대문에 EM님 글이 올려져 있어서 거기에 나도 댓글을 달려다가 마침 홍성일 씨의 글이 내 맘을 전달하는 듯하여 퍼다놓는다.

 

나는 쎄시봉 공연을 연이틀 모두 봤다. 원래는 나보다 이에 더 열광하시는 엄니와 함께 보려했던 것인데, 엄니는 프로그램하는 와중에 주무시고 결국 나만 양일 모두 끝까지 보았다. 그들이 만들어 부른 노래는 쓸만했지만, 번안가요나 팝송은 짙은 '미국+기독교 냄새'가 나서 별로였다. 물론 익숙하지 않은 노래여서일 수도 있겠지만, 나만 그런 느낌을 받았던 것은 아닐 터이다.

 

하지만 이걸 보고서도 그리 편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 이유가 뭘까 궁금했는데, 김진숙 지도위원이 그에 대한 답을 주었다. "노래에도 계급이 있다는 것!" 물론 대중의 감성과 함께해야 한다는 가식도 없지 않았으나, 이렇게 편하게 즐기는 게 타당할까 망설이던 차에 김선주 씨의 글에 대한 뜨악한 반응에 열받았던 거다.

 

김선주 씨처럼 굳이 신문 칼럼으로 쎄시봉에 대한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낼 필요가 있었을까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쎄시봉을 보면서 1970년대의 시기가 그렇게 낭만적으로 그려지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데 공감이 가고, 특히나 쎄시봉을 언급하면서 그 암울했던 상황을 지워버리고 여유로움과 자유, 평온함으로 그 시기를 미화하고 이를 현실정치의 공간에서 활용하는 넘들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이건, 90년대에는 그리 열광을 받았다고 할 수 없는 박진영이 공중파방송사의 연말 특집프로에 자기 밑의 아이돌들과 함께 등장하여 자신이 마치 90년대의 댄스신화인 양, 그리고 가수왕이었던 것처럼 자신의 곡들을 불러제낄 때 느껴지는 감정과 비슷하다. '그녀는 예뻤다'라는 곡을 90년대보다 요즘에 더 자주 들으면서 이 곡이 처음 발표되었을 때 그렇게 인기있었나 의아해지는 것, 나만 그런가. 기억은 그렇게 왜곡될 수 있을 듯하다. 쎄시봉이 활동했던 시기가 유신 독재 치하였다는 걸 감안하면, 그 왜곡의 정도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으리라. .

 

홍성일의 글만 펌질하려 했는데, 말이 많았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식읍을 전폐하고 트위터를 멈추더니 드디어 트위터를 탈퇴했다. 현실은 그리 말랑말랑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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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시봉과 한진 크레인 위의 김진숙 (미디어스, 2011년 02월 10일 (목) 10:27:48  홍성일 /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
[홍성일의 치열한 미디어]
  
“며칠 전 한국의 재즈 1세대 공연 <브라보! 재즈 라이프>가 성황리에 공연을 마쳤고 쎄시봉 역시 열풍 수준이다. 갑자기 찾아온 베테랑의 귀환, 베테랑의 봄이다. 외환위기 이후 명퇴가 상시화된 사회를 거스르는/불편해하는 문화적 결/욕망으로 읽고 싶다.”
 
경험이란 말이 “경험치”로 수치화되며 가상 세계의 게임 용어가 될수록, 실제 세계의 경험은 세월의 깊이가 아닌, 넓으나 얇디얇은 스펙이 되었다. 그나마 쎄시봉 4인방은 연주하고 노래하는 숙련 노동자이기에 경험의 깊이를 드러낼 수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연주와 노래가 공산품이 되어버린 실제 세계에서 숙련 노동자의 귀환은 신선했다. 시청자가 받은 감동의 출처를 구시대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무자비한 속도에 대한 저항으로 읽고 싶었다. 상품 교환의 속도로부터 명퇴당한 인간의 속도에 대한 재발견 말이다. 경험이 쌓여 관록이 되고, 관록이 인격이 되는 속도는 삶의 속도와 일치한다. 반면 상품 세계의 속도는 경험을 박피하여 박리다매한다. 삶의 속도를 어그러뜨려 사람을 돈의 수단으로 삼는다. <전태일 평전>에서 조영래 씨가 쓴 표현을 빌자면 “인간 비료화”다.
     
멘션을 올린 몇 분 후, 타임 라인에 김진숙 씨(@JINSUK0607)가 나타났다. 김진숙 씨가 누구던가. 공식적 직함은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고 대중적으로는 <소금꽃나무>의 저자이자 트위터 상에 소개한 프로필에 따르면 “대한민국 가장 오래된 조선소의 용접공, 대한민국 가장 오랜 시간 복직을 포기 못 한 노동자, 정리해고 반대위해 크레인 위에서 군고매(군고구마)와 여생 보내는 중”인 이다. 그와 같은 프로필을 남긴 것은 현재 그녀가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에 맞서 지난 1월 6일부터 크레인을 점거하고 시위 중에 있기 때문이다. 겨우 바람만 막아주는 좁디좁은 크레인을 집으로 삼아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거대자본과의 힘겨운 싸움에 투신했다. 그녀가 여생을 보낼 곳으로 삼은 85호 크레인은 2003년 한진중공업 노조 김주익 지회장이 129일 동안 농성하다 목을 맨 곳이다. 그런 그녀의 트윗은 지저귐이라기보다는 한 서린 독설에 가까웠다.
 
“쎄시봉인가가 꽤 감동적이었나 보다. 난 못 봤다. 국민학교땐 남진이었다가 중딩 때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어니언스……. 그들의 감미로운 노래 소리, 막연히 답답하던 공기 속에서 그들에게서 미풍처럼 실려 나오던 자유의 바람이 나도 참 좋았다. 18살 객지 나와 하루 13시간씩 일하며 타이밍으로 버티던 벌겋게 충혈된 눈에도 그들은 여전히 감미롭고 편안해보였고 나는 그게 서러웠다. 해고되고 경찰서 대공분실 징역을 자리만 바꿔가며 몸과 영혼에 가해지는 학대가 일상이 된 시절에도 그들은 참 편안해보였고 그땐 화가 좀 났던 거 같다. 노래에도 계급이 있다. 지금 아이들이 좋아했던 노래를 세월이 흘러서 들었을 때 서럽거나 화가 나는 세상은 아니었음 좋겠다는 마음으로 크레인 침입사건 30일차 아침을 맞는다.”
 
나의 멘션에 이어진 그녀의 멘션에서 충격을 받았다. 쎄시봉에서 느꼈던 낭만적 감성이 빠르게 식어갔다. “노래에도 계급이 있다”는 그녀의 일갈 앞에서 잠시 멈추어서 성찰했다. 70년대 대학문화, 청년문화가 실은 한 줌의 유한계급의 문화였으며, 쎄시봉은 그 한 줌의 문화를 마치 전체 세대의 문화인 양 호도하는 것은 아닌가란 생각을 해 보았다. 쎄시봉에 대한 김진숙 씨의 냉소는 동일한 70년대를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고, 지금도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노동자 계급의 현실을 일깨웠다. 쎄시봉이라는 당의정에 가려진 쓰디쓴 진실의 한 조각은 70년대가 그리 말랑한 시대가 아니었으며, 그들이 귀환한 오늘 이 순간도 달콤한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허나, 이러한 김진숙 씨의 날카로운 현실 인식에 더해 “노래에는 계급도 있다”란 말을 덧붙이고 싶다. 간판장이였던 나의 노동자 아버지는 송창식의 팬이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집에는 송창식의 레코드판과 카세트테이프가 있었다. 총각시절 아버지의 빛바랜 흑백 사진을 보면 청바지와 통기타가 등장한다. 물론 쎄시봉의 음악에는 노동자가 없다. 그러나 쎄시봉에 환호하는 이들 속에 노동자가 있다. 최종학력 국졸의 아버지가 가졌을 청년문화, 대학문화에 대한 동경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잠시나마 쎄시봉을 듣거나 쎄시봉의 노래를 부르며 대학생이 되어버린 듯한 해방의 순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허나, 그 해방의 순간은 단지 현실도피만이 아니다. 해방의 체험은 해방의 꿈을 낳는다. 해방의 꿈은 현실을 변형하는 자양분이 된다. 
 
아버지가 쎄시봉을 듣거나 그들의 노래를 부를 때의 체험이 남을 착취하는 자본가가 되려는 욕망은 아니었을 게다. 노동하면서도 즐거울 수 있는 사회에 대한 꿈, 모두가 흥에 겨워 신명나는 사회에 대한 꿈, 제 자식은 대학생이 되어 저들처럼 멋졌으면 좋겠다는 꿈이었을는지 모른다. 그러한 신명이 노래로 구전되고, 자식에게 전수되며, 오늘의 우리 가정을 일구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본질적으로 노동자의 노래, 본질적으로 자본가의 노래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노래 속에서 노동자의 꿈을 발굴하는 작업이고 그 꿈을 현실화하는 작업이다. 이번 설 연휴의 쎄시봉 특집에서 베테랑의 귀환, 베테랑의 봄에 주목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의 노래는 여전히 감미롭고 편안하며 세상의 변화와 무관하게 남아있지만, 이 시점에서 그들의 음악은 어쩌면 명퇴되지 않고 살아남은 숙련노동자들이 갖는 지적, 경험적 가치의 소중함일 수 있다. 쎄시봉의 즐거움을 죄스러운 쾌락으로 버리는 게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바꿀 수 있도록 잠재태로 재구성하는 작업이 보다 생산적일 것이다.
 
글을 쓰던 도중 김진숙 씨가 며칠 전부터 식음을 전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활기차게 투쟁 소식을 전하던 그녀의 트위터도 멈추었다. 한진중공업이 정리해고를 곧 단행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상황은 급변했다. 어제부터 농성장에 전기도 끊기고 노사 간의 물리적 충돌도 빈번하다고 한다. 다시금 상품의 속도가 사람의 속도를 압도할 기세다. 해고는 살인임을 우리는 쌍용자동차 사태로부터 뼈아프게 확인했고, 어쩌면 그와 같은 비극을 다시금 반복할는지도 모른다.
 
이 와중에 쎄시봉에 주목하는 진지전은 어쩌면 한진중공업의 속도전에 무력해 보일 수도 있겠다. 쎄시봉에 열광하는 우리들의 감미로움과 편안함에 김진숙 씨가 또 다른 서러움을 느낄 수도 있겠다. 허나, 진지전 없는 기동전 없고, 기동전 없는 진지전 없다. 불과 며칠 전 쎄시봉에 열광했던 우리네 감수성이 한진중공업의 현장과 본질적으로 분리 가능한 것은 아니다. 기실 정리해고 대상자 하나하나가 모두 쎄시봉이다. 긴 세월 부산 영도의 바닷바람을 맞으며 경험이 쌓여 관록이 되고, 관록이 인격이 되어버린 쎄시봉들. 이들을 한 순간 내쳐 자본의 비료로 삼을 상품의 논리를 꺾어내는 것은 인간성의 회복이자 사람의 구원, 삶의 회복이다. 쎄시봉에서 느꼈던 감동은 그리하여 한진중공업의 투쟁의 현장뿐만이 아니라 비인간이 되길 강요받는 이 땅의 모든 삶 속으로 접속한다. 우선은 부산 영도의 한진중공업부터 관심을 기울이자. 그리고 이 땅의 모든 비인간적 대우를 강요받는 소수자에게로도 관심을 확장하자. 비장하지 않게, 그러나 가볍지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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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11 04:56 2011/02/11 0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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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우선한다: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셰리 버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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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먼, 셰리. 김유진 옮김. 2010. 『정치가 우선한다: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 서울: 후마니타스.

 

여기저기 격찬이 이어지길래, 그리고 미국에 있는 후배가 아직 번역되지 않았던 이 책을 반드시 읽어보라고 추천했길래, 어쩔 수 없이 읽어봤다. 하지만 기대에 영 미치지 못했다. 물론 사민주의를 자신의 정치적 신념으로 확고하게 굳힌 이들에게는 경전으로 여겨질 만하지만, 20세기 유럽의 형성을 이런 식으로 정리해도 되는지 의문이다.

 

이 책의 핵심은 스웨덴 사민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서술한 대목한 1장밖에 되지 않고,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나찌즘)의 등장배경, 논리 등에 대한 내용도 상당부분 차지한다.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결과이다.

 

참고문헌에는 많은 문헌들이 나열되어 있지만, 편향된 독서의 후과라고 해야 하나. 우리들이 접하기 어려운 다양한 문헌들이 언급되어 있으나,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원전은 정작 발췌선집을 읽는데 그쳤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역사유물론과 계급투쟁으로 정리하고 있지만, 그야말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조야한 요약이라고 할 만하다. 처음 시작부터 의심하게 되니 영 미덥지가 않다.

 

이러한 의심의 결정판은 아래 양솔규의 서평이다. 버먼의 이 책에 대한 다양한 서평이 있지만, 양솔규의 서평이 제일 신랄하면서도 이 책이 가진 약점을 제대로 짚고 있다고 본다. 버먼은 왜 이런 부분을 간과했을까. 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버먼은 책 제목처럼 정치가 경제에 우선한다고 하였지만,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핵심이 정치와 경제를 분리할 수 없다는 점임을 놓치고 있다는 거다.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맨 앞에 나오는 Thing 1('자유 시장이라는 것은 없다')에서도 언급되어 있는 그 부분이다. 장하준조차 "정치 논리, 경제 논리를 분리해서 얘기하려는 사람들은 경제를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막으려는 숨은 의도가 있는 사람이다. 정치가 곧 경제고, 경제가 곧 정치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아는 게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시장이 정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정치가 우선한다고 하면 타당하지만, 그렇다고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을 모두 읽어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제1장 서론과 제9장 결론(이것도 1장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을 읽으면 충분하다. 추가적으로 스웨덴 사민주의에 대해서 서술한 제7장 스웨덴에서만 가능했던 이유을 읽으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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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우선한다: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
The Primacy of Politics by Shari Berman. 2006. Cambridge University Press.
셰리 버먼 지음 | 김유진 옮김 | 2010. 12 | 후마니타스.
 
| 옮긴이 후기 |
사회민주주의는 버먼이 보기에 단순한 기계적 중립을 지향하는 중도파들의 허구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과 철학을 지닌 새로운 정치사상이다. 버먼이 지적하는 사회민주주의의 주된 특징은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과 더불어 정치적 가능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있다.
스웨덴 사민당은 이미 낡아 버린 이론에 매달리는 대신 새로운 현실에 맞게 자신들만의 새로운 방식을 실천해 나갔다. 그들은 마르크스와는 달리 국가와 정치를 초월해서가 아닌, 그것들을 통해서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길을 개척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현실에 걸맞은 비전과 정책들을 만들어 냈고, 이는 스웨덴 사민당을 이후 수십 년 동안 유지된 강력한 패권 정당으로 만들어 주었다. 즉 버먼에게 사회민주주의란, 국가와 정치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 위에서 탄생한 적극적인 민주주의자들의 비전이다. (327쪽)
급진주의자들의 주장 속에서 그 중요성이 쉽게 망각되곤 하는 국가와 정치의 역할을 두고 책임감 있는 좌파들이 얼마나 치열한 논쟁을 벌여 왔는지, 그리고 그런 논쟁 속에서 탄생한 사회민주주의가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328-9쪽)
버먼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주의자들의 문제점은 개혁 그 자체를 거부한다는 점이 아니라, 그런 개혁조치들을 자신들의 좀 더 큰 비전과 연계시키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조안 바르칸(Joanne Barkan)은 마이클 해링턴(Michael Harrington)의 모호하고 추상적인 비전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실제적인 개혁 작업에도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바로 그런 이론과 실천의 분리야말로 진정한 문제라는 것이다. 카우츠키와는 달리 베른슈타인과 같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개혁을 단순히 자본주의의 최종적인 붕괴가 이루어지기 전가지 고통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개량적 조치로 보기보다는 그것 자체를 사회주의적 비전의 일부분으로, 즉 현재의 세계를 변혁시키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스웨덴 사민당은 자본주의를 초월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통해서 사회주의적 미래에 도달할 수 있으며, 좌파의 임무는 어떻게 하면 시장의 혜택을 최대화하는 동시에 부작용을 억제할 수 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들은 대공황의 위기가 닥쳤을 때 이미 이에 대처할 수 있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와 정책들을 갖추고 있었고 이후 선거를 통해서도 오랫동안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331-2쪽)
바르칸의 주장과는 달리 현실적이고 일관성 있으며 자신만의 분명한 색깔을 보여 주는 이런 큰 전략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하나의 운동을 희망적이고 역동적으로 만들어주는 반면, 다른 운동은 수세적이고 쇠약해지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비전이기 때문이다. (332쪽)
 

제1장 서론
20세기 초반을 거치면서 실제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은 기존의 시장과 국가, 사회의 관계를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정치적 권력에 의해 조절되고 제한되며 사회적 필요에 종속되는 자본주의가 창조되었음을 의미했다. ‘역사의 종언론’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2-세기의 승리자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였다. (12-13쪽)
 
자본주의
전자본주의사회들에서는 시장이 좀 더 넓은 사회적 관계 속에 뿌리 내리고 있었으며 정치에 종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전통적 공동체들의 제도·규범·선호가 시장의 범위와 작동을 통제했다. (13쪽)
근대 자본주의 시대 이전의 시장은 경제생활의 액세서리 이상이었던 적이 결코 없었다. 경제체제는 일반적으로 사회체제 속에 흡수되어 있었으며……중상주의 체제와 같이 시장이 가장 고도로 발전되어 있던 곳에서도 그것은 중앙집권화된 정부의 통제 아래 번성했다. ... 규제와 시장은 사실상 함께 자라난 것이다. 자기 조절적(self-regulating) 시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기조절이라는 개념의 탄생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흐름에 완전히 역행하는 것이었다(Polanyi, 1957: 68).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시장의 요구사항들이 공동체의 삶과 정치권력의 한계를 결정하게 되면서 국가-시장-사회 간의 전통적 관계가 뒤집힌 것이다. (14쪽)
자본주의는 개인들에게 자신의 지위와 생활이 주로 특정 집단 혹은 공동체에 의해 규정되던 세상의 종말을 의미했고, 개개인의 정체성과 생계를 시장에서의 지위에 의존하는 체제로 이행하게 되었음을 뜻했다. ... 전통적 관계들이 박살나면서 초래한 중요한 결과의 하나는, 전자본주의사회에서는 개인의 기본적 생계가 “인간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자체의 도덕적 권리”에 의해 보장될 수 있었던 반면,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아사의 위협(‘굶주림이라는 경제적 채찍’)이 사회적 제도들의 필요물이자, 심지어 바람직한 일부분으로 자리 잡았고 게임의 법칙이 이끄는 궁극적 유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14-15쪽)
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사적 이익이 공적 이익보다 우선시되었고, 시민들 간의 유대 관계는 일시적이고 변하기 쉬운 교환 관계로 대체되었다. (15쪽)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는 국가를 통해 시장을 제자리에 복귀시키고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근대성이 만들어 낸 원자화, 뿌리 뽑힘(dislocation), 사회적 불화와 싸워 나가겠다는 새로운 사회의 비전이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시장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에 대한 ‘실질적인, 그러나 야만적인 해결책’을 의미했다(Polanyi, 1957: 132; Block & Somers, 1984: 61). 전간기와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겪고 난 이후의 유럽인들은 시장의 영향력과 지나침을 통제할 수 있고 사회적 연대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충족될 수 있는 세상을 창조해야 했다. 전후 들불처럼 퍼져 나갔던 체제는 사실 자유주의의 업데이트판이 아니라, 무언가 분명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였다. ... 자유주의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제 중심주의(economism)와 수동성을 거부하면서, 그리고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의 폭력성을 회피하면서, 사회민주주의는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에 대한 믿음(경제적 힘이 아닌 정치적 힘이 역사의 동력이 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확신, 그리고 사회의 ‘욕구’와 ‘행복’은 보호되고 배양되어야 한다는 확신) 위에 세워졌으며, 사회주의의 비마르크스주의적 비전을 나타냈다. (17-8쪽)
20세기 역사에서 사회민주주의가 담당했던 핵심적인 역할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는, 전후 체제에 대해 우리가 전체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민주주의를 그 역할에 걸맞게 존중하거나 이데올로기 분석을 면밀하게 진행한 학자 혹은 논평자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19쪽)
사회민주주의는 특정한 정치적 강령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타협 또한 아니며, 막연한 좌파적 정서와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어떤 개인이나 정당에 적용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민주주의는, 적어도 출발 자체가, 그 핵심에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에 대한 특유의 믿음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둘 모두에 대한 뚜렷한 대안인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진정한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는 그것이 탄생한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20-21쪽)
 
이데올로기
실제와는 다르게 진행될 수도 있었던 사건들의 전개 방향을 결정하는 데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연결되지 않았을 법한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며, 추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정치적 목표들을 추구하도록 그들에게 동기를 제공한다. (22쪽)
정당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서는 20세기 정치 발전을 이해할 수 없다. ... 정당은 대중에게 이데올로기를 홍보하고 전파했으며, 진정한 신봉자들이 특정 정치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분투하는 데 사용할 정치적 수단을 제공했다. ... 특정 정당을 규정하는 조직, 정치 전략, 선거 연합 모두가 그들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적 기획에 의해 결정적으로 형성된다. (24-5쪽)
 
사회민주주의 이야기
19세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몇몇 사회주의자들은, 만약 자신들이 바라던 정치적 결과가 단지 그것이 필연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그것은 인간 행위의 귀결로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이단아들 가운데 레닌 같은 이들은 그것이 위로부터 부과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혁명 전위대의 정치·군사적 노력을 통해 역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이들은 사회주의적 목표를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으며, 따라서 좀 더 고결한 선(good)에 대한 믿음이 인간들의 집단적 노력을 촉발해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후자와 같은 ‘수정주의’ 진영에서는 조르주 소렐(Georges Sorel)의 작업으로 대표되는 혁명적 수정주의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작업으로 대표되는 민주적 수정주의가 나타났다. (28-29쪽)
베른슈타인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두 기둥, 즉 역사 유물론과 계급투쟁을 공격했다. 그리고 정치의 우선성과 계급 교차적 협력에 기반을 둔 대안을 주장했다.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자본주의에서는 부의 집중과 사회적 궁핍화가 점점 더 심화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 복잡해지고 적응력도 커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현존하는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쪽을 선호했다. 그가 보기에 사회주의의 앞날은 “부의 감소가 아닌 증가”에 달려 있으며, 또한 “개혁을 위한 긍정적 제안”―근본적인 변화를 자극할 수 있는―을 내놓을 사회주의자들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Bernstein, 1898).
(제1차) 세계대전이 촉발한 광범위한 변화로, 수많은 서유럽 좌파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두 기둥(계급투쟁과 역사 유물론)을 분명히 거부하고, 그 반대테제들(공동체주의와 정치의 우선성)을 공개적으로 받아들였다. 혁명적 수정주의자들은 노동자들만으로는 효과적인 혁명적 전위를 구성할 수 없다는 점과, 민족주의가 엄청난 동원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서, 마침내 계급투쟁을 거부했다. 민주적 수정주의자들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는데, 이는 노동자들만으로는 결코 선거에서 다수파가 될 수 없다는 점과, 정치적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비프롤레타리아 집단들과 협력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 한편 두 진영 모두, 자본주의의 붕괴를 선동하는 것보다는 국가를 통해 시장의 파괴적이고 무정부적인 잠재력을 규제하면서 그것의 전례 없는 물질적 생산 능력을 끌어내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그 결과 역사 유물론과도 멀어졌다. (31쪽)
민주적 수정주의자들은 공산주의적 좌파뿐만 아니라 파시즘적·민족 사회주의적 우파에 대한 두려움을 표하면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매달린다면 주류 좌파들은 정치적 망각의 운명에 처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혼란에 빠지고 불만에 찬 유럽 대중의 욕구와 주장에 부응하는 민주주의적 좌파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런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그들은 한 세대 전에 베른슈타인과 그 밖의 다른 이들이 제시한 주제들과 비판으로 돌아갔다. 즉 정치의 우선성과 계급 교차적 협력의 필요성이었다. (32쪽)
비록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간에는 분명 결정적 차이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요한 유사점이 있다. 이들 모두는 정치의 우선성을 받아들였으며, 정치권력을 사용해 사회와 경제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열망을 강하게 드러냈다. 또한 공동체적 연대와 집단적 선에 호소했으며, 현대적 대중 정치조직을 만들었고, 자신들을 ‘국민정당’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자본주의와 관련해 중도적 입장을 택했다. ... 그들은 국가가 시장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통제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제3의 길’을 추구했다. (33쪽)
1945년 이후 유럽이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주의보다) 사회민주주의와 훨씬 관련이 깊다. 전후의 합의는 국가-시장-사회 간 관계의 극적인 변화를 기반으로 한다. 규제되지 않는 시장은 이제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회적 이익은 이제 사적 특권보다 당연히 우선시되었다. 그리고 국가는 ‘공동의’ 또는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경제와 사회에 간섭할 권력(아니, 의무)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달리 말해 1945년 이후 사람들은 국가를 사회의 보호자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경제적 우선순위는 종종 사회적 우선순위보다 뒷자리로 밀려났다. 그 결과 오랫동안 공존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것들, 즉 잘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안정성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졌다. (35쪽)
이 책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젊은 세대들에게 전후의 안정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었는지, 왜 그것이 필요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실행되었는지를 상기시켜 주려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 위에 세워졌으며,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고유한 이데올로기와 운동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데올로기와 운동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그것의 원칙과 정책들은 유럽 역사상 가장 번성하고 조화로웠던 시기를 지탱했던 것이다. ... 이 책은 사회민주주의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현재의 정치적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 어떻게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줄 것이다. 현재의 과제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점에서 한 세기 전의 문제들과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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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사미로 끝나버린 20세기 유럽 사회민주주의 분석, 고민은 지금부터! 우리에게! (<좌파저널> 창간준비1호. 2011. 1. 4., 양솔규 진보신당 경남도당 정책국장)
『정치가 우선한다 :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 셰리 버먼 (후마니타스, 2010)
셰리 버먼의 『정치가 우선한다』는 아주 흥미로운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바로 20세기 정치의 최종적 승자는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수정’ 자유주의 또는 ‘내장된 자유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공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였던 여러 가지 요소들, 예컨대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적 안정을 결합시키는 것에 성공하면서 20세기에 가장 성공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사회민주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어중간한 중도도 아니고, 복지국가 등의 특정한 정책을 도입하는 시도로 환원해서도 안된다. 저자에 의하면 사회민주주의는 특정한 정치적 강령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며,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에 대한 특유의 믿음’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둘 모두에 대한 뚜렷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은 파시즘 등도 공유하고 있는 바, 따라서 파시즘과 구별되는 사회민주주의의 특성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셰리 버먼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는 필연적인 요구였다. 이에 세 가지 해답이 제시되었다. 자유주의적 해법, 마르크스주의적 해법, 파시즘적?민족사회주의적 해법이었다. 저자가 보기에 자유주의적 해법과 마르크스주의적 해법은 모두 ‘경제 우선적’ 해법이었다. 자유방임주의는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보았으며, 마르크스주의적 해법은 그 특유의 경제결정론에 입각해 대기론을 부추겼다. 요컨대 정치가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혁명을 만든다는 것은...요인들을 준비하는 것’을 의미하며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혁명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게 되었다.(세라티) 하지만 자본주의는 대중들에게 파국을 선사했고 해결책이 필요했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 두 가지 입장이 제시되었다. 민주적 수정주의의 입장(베른슈타인)과 혁명적 수정주의의 입장(소렐)이었다. 민주적 수정주의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사회주의에 배타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사회주의를 자유주의의 정신적·현실적 후계자로 보았고, 민주주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자 근본적 구성 요소로 보았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우선론을 기각하고 역사 유물론과 계급투쟁을 공격했다. 이러한 민주적 수정주의는 전간기를 거치면서 사회민주주의로 등장하게 된다.
반면 혁명적 수정주의는 자유주의를 혐오했고 민주주의를 파괴적이고 퇴보적인 영향을 일으키는 사상으로 보았다. 따라서 현존 자유주의 체제는 폭력적 방식을 통해 혁명적으로 뒤엎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흐름은 나중에 민족주의, 사회주의적 요소들과 결합해 파시즘과 나치즘으로 나타나게 된다.
(민주적 수정주의에서 진화한) 사회민주주의, 파시스트, 민족사회주의자들(나치)들은 공통적으로 유사한 원리와 정책을 발전시키면서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했다. 자유주의와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사회적 변화와 요구에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반면 이러한 운동들은 대중들에게 하나의 선택지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열망을 제공했다. 하지만 독일 사민당, 이탈리아 사회당, 프랑스 사회당 등은 모두 전간기에 제시된 여러 가지 쟁점들에 대해 무기력하게 대응했다. 다수의 의석 획득으로 인해 대두된 정부 참여 문제를 거부하는가 하면(책임성 결여), 민족주의의 위력에 대한 평가 절하,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고집과 이로 인한 실천의 부재가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러한 나라들에서는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 내에서 거절됨으로서 ‘정치의 우선성’의 필요는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몫이 되고 말았다.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계급교차적 이해를 주장하고(국민정당화), 민족주의를 동원했으며,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 공격을 가했다. 비록 탐욕스러운 자본과 창조적인 자본을 구분하여 기업계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동시에 반자본주의적 자세를 유지했지만 말이다.
오로지 한 나라에서만 사회민주주의적 실천이 당 내에 안착하였다. 바로 스웨덴이다. 스웨덴에서만 가능했던 이유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 주변적 위치에 있었고, 브란팅을 비롯한 민주적 수정주의자들의 지도력이 유지되었으며, 정치적 후진성(보통선거권의 배제)이 민주주의를 사회주의를 위한 중요한 요소로 제시하게 했다. 요즘의 용어로 말하자면 (사회주의 운동에 있어서의) ‘후발주자의 이점’ 이랄까?
어쨌든 이러한 19-20세기 초반의 이데올로기 필요성에 대한 수요와 이에 대한 각 이데올로기의 공급, 서로간의 투쟁의 과정을 거치고, 또한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친 후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사회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셰리 버먼은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와 사회민주주의(민주적 수정주의) 간의 쟁점들을 역사적 이데올로기 투쟁 과정을 통해 매우 역동적이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정치적 우선성’이 당시에 요구될 수밖에 없었던 20세기 초반의 상황 속에서, 그러나 사회주의 진영이 이를 실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마르크스주의의 책임으로 돌린다. 예를 들어 국가를 부르주아의 집행위원회로 보는 시각은 국가 참여주의를 기각하게 만듬으로써 국민들이 사회주의 정당에 원하는 책임감을 거부하게 했다는 것이다. 또한 민족주의에 대한 거부와 국제주의 고수는 민족주의의 거대한 잠재적 힘을 퇴행적 사회세력에게 넘겨주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말하자면 정통적인 경제결정론과 원칙에 얽매임으로서 현실의 변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정당들이 불가피하게 어정쩡한 모습으로 핑계를 대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몇몇 개혁 조치들 또한 이론과 실천의 분리 속에서 전체 사회개조를 위한 장기적 목표 속에 위치 짓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셰리 버먼의 책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고민 지점을 던져주고 있다. 과거 민주노동당의 강령에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언급이 들어있다. 이 ‘민주적 사회주의’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논쟁도 진행된 바 있다. 사회민주주의와 유사한 어떤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고, 이를 뛰어넘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끊임없이 재구성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보기도 했다. 말하자면 현실 사민주의의 극복과 +미래 α 요소의 결합? 사실 진보신당 내 좌파들이 전후 유럽 사민주의 정당들의 그들보다 더 급진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사회민주주의가 제기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 등은 타당하며, 여타 쟁점들에 대해서도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내에서 논쟁과 검토 과정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공백지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러한 과감한 생략 덕분에 가능했던 이데올로기 경합 과정에 대한 정치한 분석과 분명한 주장들은 셰리 버먼의 책을 읽어볼 필요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리 버먼의 책에 대해 몇 가지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불충분한 논증의 문제이다.
셰리 버먼의 ‘정치의 우선성’의 강조가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책 속에서 논리적으로 충분하게 설명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의 실패 이후 사회민주주의가 안착하는 과정에서의 ‘정치의 우선성’의 실제 모습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스웨덴에서의 2차세계대전 이전의 경험들이 거의 유일한 설명이고, 이는 전체 9장 중에 1개의 장 밖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는 자연스럽게 이 책의 부제인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에도 의문을 갖게 한다. 사실상 이 책의 거의 모든 내용은 20세기의 초반, 또는 30년대까지로 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유럽의 형성을 다 설명하는 듯한 부제는 적절하지 않다. 설사 이데올로기의 기초는 그 당시 30년대에 이미 마무리되었다고 하더라도, 사회민주주의가 20세기의 ‘성공적인 이데올로기’였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설명되어져야 납득이 가능한 부분이다. 
둘째 ‘정치의 우선성’이 사회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성격 구분에서는 유용했을지 몰라도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의 문제는 충분한 논증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장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회민주주의가 자신의 힘으로 ‘승리’한 것인지, 아니면 경쟁자들의 소멸로 인해 ‘잔존’한 것인지 책 속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자본주의가 ‘경제적 필요’에 의해 선택된 ‘정치적 동력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사회민주주의’ 또는 ‘수정 자유주의’가 아닌지 하는 의문이다. 말하자면 20세기가 과연 정말로 ‘정치의 우선성’을 특징으로 하는 사민주의의 승리를 증명했는지 저자의 책 속에서는 분명하지 않으며, 오히려 ‘경제의 우선성’이 사민주의 세력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셋째, 사회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본다면, 그 승리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단지 잔존? 아니면 지배적 정치주체로 등장하는 것? 아니면 애초 자신의 이론적 목표가 달성되는 것?
쉐보르스키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서 선거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의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서술하고 있다. 다수파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적 목표를 훼손할 수밖에 없고 노동계급 외 다른 계급들의 이해에 호소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사회주의 정당(노동계급 정당)이 아니게 되고(노동자 정당일 수는 있어도) 이는 노동자들을 동원해 낼 수 있는 능력은 절감된다는 것이다. 사민주의에게 대의제 민주주의, 선거는 수단이자 목적이고 사회주의로 인도하는 매개자이자 미래의 정치형태이지만, 이것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아닌 것이다. 셰리 버먼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특정 정책을(개량을) 그저 그 자체 목적인 것이 아닌 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가는 발걸음이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 사민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 구조를 바꾸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바꾸려는 의지 자체도 점차 희박해졌다. 이런 점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자신의 목표 설정과 관련해 무엇을 성공했는지 의심스럽다. 즉, 성공의 외피 속에 실패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이 대기론에 빠져 행동의 열정을 봉쇄한다면,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성공에 기댈 수밖에 없는 딜레마와 민주주의에 내제한 온건화 속에서 사회주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만다고나 할까?
넷째, 사회민주주의가 중요하게 다루는 ‘민주주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20세기 내내 사회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소위 복지국가 내에서도 민주주의 의제와 요소는 확장되었고, 이에 대해 국가와 또는 국가 내부에서 치열한 투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제도화에는 기여했을지 몰라도 새로운 확장에 무엇을 기여했는지 분명치 않다. 
다섯째, 셰리 버먼의 논증 과정은 매우 한정적이다. 나라로 보면, 영국과 미국은 검토에서 제외되었고, 시기로 봐도 20세기 초반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셰리 버먼의 논증 과정에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현상이었던 ‘냉전’ 상황과 현실 사회주의의 존재가 미친 영향은 아예 언급되지 않고 있다.
에릭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에서 주장하듯이 전후 질서의 형성 과정에서 ‘냉전의 역할’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민주주의가 전후 지배적 정치이데올로기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쟁으로 인해 국가사회주의와 파시즘, 일본 군국주의 등이 소련에 맞서는 ‘자유세계’의 행위자로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냉전기 서구정부들의 정치적 기반은 전쟁 전의 사회민주주의계 좌파에서부터...걸쳐 있었다.”
“미국은 유럽에서 공산주의적 위협을 인지”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핵심은, “노동자 계급의 상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대중 투쟁이 불가피하게 폭발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공산주의적 위협”은 현실적이었다.(필립 암스트롱 외)
설사 셰리 버먼의 주장처럼 사회민주주의의 정치가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냉전 또는 미국 중심의 질서가 부과하는 힘을 상회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또한 사회민주주의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었는지도 의문이다. 전후 중도우파 또는 보수파들도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책들을 펼쳤다는 것은 이에 대한 반증이 될 수도 있다. 
여섯째, 역자와 저자의 몇 가지 언급에서는 21세기 현재의 세계적 과제 역시 사회민주주의를 통해 돌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한 근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기껏해야 ‘좌파 스스로의 지적 오류나 의지 상실을 극복’하고 ‘낙관주의와 비전을 회복’해야 한다고 본다. 옳게 지적하는 것 한 가지! 저자는 오늘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가장 큰 실패는 운동의 기반이었던 이상주의를 상실했다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주의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상관관계 속에서 고유하게 존재하는 딜레마와 연관된다. 더군다나 21세기 자본주의의 변화 속에서 이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는 저자 역시 충분하게 제시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민주주의가 정치적 가능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기반했다면 현재의 사회민주주의는 이러한 믿음을 상실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얼마 전에 얘기했듯이 ‘급진적 정치에서 온건한 중도로 끊임없이 변화’한 사회민주주의가 어떻게 이러한 이상주의를 21세기적 조건 속에서 다시 되살릴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이 없다면 저자의 사회민주주의의 현재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공허한 희망사항에 불과할 것이다. 
일곱 번째, 저자는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사회민주주의가 충분히 훌륭하게 버티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2010년 9월 스웨덴은 선거에서 1914년 이후 최저의 지지율을 기록했고 중도우파 정당이 승리했으며 극우반이민 정당이 의회에 진입했다.
저자는 미래의 전략을 논하면서 현 좌파들의 다문화주의를 비판하고 사회민주주의는 이민자들을 사회적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포퓰리즘적 우파들에게 공동체라는 주제를 뺏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스웨덴의) 정책이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주의를 향한 모색이며 퇴보가 아닌 진보의 징후로 보았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사민주의자들은 이민자들이나 다른 소수자의 권리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했었다. 저자도 살폈듯이 민족주의에 사민주의는 편승했고 주류 정당으로 남기 위해 공동체를 호명했다. 그러다가 최근의 더 큰 이주노동의 물결이라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현실에서 이러한 통합 정책은 실패했고 포퓰리즘적 우파의 등장을 막지도 못했다
여덟 번째, 경제 중심론 또는 경제결정론에서 벗어나는 방식이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전환 역시 단순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실제 저자의 논의들은 매우 주의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단순한 치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의 이면에는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문제가 놓여 있고 국가이론이 주로 이러한 문제를 다뤄왔다. 밥 제솝이 얘기했듯이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은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론을 기각해야 가능한 것이다. 상부구조의 변화 없이 토대의 변화는 없기 때문이다. 즉 자율성은 상대적일 수 없다. 역으로도 가능하다. 따라서 ‘상대적 자율성’을 폐기하는 대신에 ‘상호작용적’ 심급에서의 결정만이 존재한다고 본다. 어찌되었든 저자의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실패한 이데올로기의 공통점을 ‘경제 우선성’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여러 이데올로기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에는 탁월하지만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상황과 전망에 대한 인식을 연결시키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정치의 우선성’의 장점들을 역으로 가리게 되는 것 같다. 
아홉 번째, 저자는 마르크스주의를 경제결정론으로 못박는다. 또한 사회민주주의는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의 개념을 기각함으로써 비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못박는다. 둘 사이의 연관성은 이제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것 역시 과도한 비약과 단절을 가져온다. 결과적으로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만 기능하게 되며 이상주의의 씨앗은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스웨덴을 제외하고) 사회민주주의는 경제정책에 있어서 매우 협소한 수단들만을 사용하고 상상력은 고갈되고 만다. 이것은 사회주의와의 단절 속에서 사민주의가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길은 아니었을까? 
열 번째, 이 책은 20세기 유럽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형성과 관련한 책이다. 따라서 유럽 중심주의적인 논의일 수밖에 없다. 20세기 사회주의는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또다른 수정주의인 레닌주의 또는 마오주의는) 유럽 바깥의 광대한 제3세계, 그리고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그렇다면 21세기 사회민주주의는 유럽 바깥과 어떤 모습으로 결합될 수 있는지에 대해 저자는 아무런 편린을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다
사실 사회민주주의와 관련해 저자의 많은 논의들은 충분히 수용 가능한 부분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나, 당시 카우츠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이나 독일사민당 등의 무능력에 대한 설명, 직면한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베른슈타인 등의 용기 등도 익히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사실 내가 생각하는 사회주의의 많은 특징들은 사회민주주의의 주장과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거의 모든 실패의 원인을 마르크스주의에게만 돌리고 있다. 결론을 향해 질주하는 기차 같다고나 할까? 이미 내려진 결론과 짜맞추어지는 논리들.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알리바이를 제공해 줌으로써 사민주의를 갓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사명감은 심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근거는 허약하다. 이데올로기 분석에만 치중한 나머지 20세기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의 공과 실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사회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논증은 없고 장밋빛 전망만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아담 쉐보르스키나 요스타 에스핑 엔더슨 같은 정치학자들의 논의보다 정치하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옹호한다고 볼 수도 없다.
물론 21세기의 방향과 관련한 저자의 논증 공백을 메우는 것은 저자만의 책임은 아니며 이론적 검토와 더불어 실천적 모색이 병행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저자의 희망대로 아직 사회민주주의에게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민주주의가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회복하는 것을 최소 필요조건으로 할 것이다. 민주적 사회주의는 소련의 국가사회주의와는 다른 어떤 것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소련의 국가사회주의가 사라진 지금, 민주적 사회주의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자신의 대립물로 설정하고 자신의 존재 이유와 형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직면했던 한 세기 전의 사람들의 고민을 이 책을 통해 다시한번 확인해 보는 것도 충분치는 않겠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시의 고민들은 매우 진솔했으며 현재의 고민들의 많은 부분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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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 승자는 ‘사민주의’ (레디앙, 2010년 12월 04일 (토) 10:52:14 정상근 기자)
[새책]『정치가 우선한다』…근대 이데올리기의 투쟁의 역사

 

20세기의 진정한 승자는 사민주의였다 (한겨레, 고명섭 기자, 2010-12-03 오후 08:30:26)
자유주의 지배력 정면으로 부정
‘정치 우선’ 이념·역사 서술 눈길
“좌파의 오류·의지 상실이 걸림돌”

 

자유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다 (한겨레21 2010.12.10 제839호, 신소윤 기자)
[출판]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계 정치의 대안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제시한 셰린 버먼의 <정치가 우선한다>

 

“경제체제보다 정치 방임이 문제” (서울, 조태성기자, 2010-12-15  23면)
버먼 교수 ‘정치가 우선한다’

 

장하준에 열광한 당신이 지지할 정당은 바로… (프레시안, 최병천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2010-12-17 오후 7:41:39)
[프레시안 books] 셰리 버먼의 <정치가 우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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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6 12:53 2011/02/06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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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유화를 멈춰라: 민영화, 그 재앙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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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균 교수가 이런 책을 번역할 줄은 몰랐다. 이 책은 민영화(사유화)의 폐해를 잘 보여주는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PSI에서 나온 공공부문 사유화에 관한 보고서 외에 이렇게 사유화에 대해 잘 정리해놓은 책은 없는 듯하다. 특히 사례가 풍부하다.
물론 민영화(사유화) 자체에 대한 이론적인 비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례 소개만으로도 충분하다. 굳이 필요하다면 정리하는 장인 ‘제10장 자유 시장의 한계: 보이지 않는 손이 실패하는 이유’를 읽으면 된다. 사유화의 폐해에 대해 이렇게 평이하게 서술하기도 힘들다.
아래 정리한 제10장 발췌(거의 그대로 옮겨왔다) 부분과 함께 이정환, 정승일의 서평을 읽으면 될 것이다.

 
『미친 사유화를 멈춰라: 민영화, 그 재앙의 기록』.
Schwarzbuch Privatisierung by Michel Reimon and Christian Felber. 2003. Verlag Carl Ueberreuter, Vienna.
미헬 라이몬, 크리스티안 펠버 지음 | 김호균 옮김 | 2010 | 시대의창.
 
제10장 자유 시장의 한계: 보이지 않는 손이 실패하는 이유
필수 공공서비스 분야에서 민영화 재앙들은 언제나 서로 흡사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시장 실패는 나름의 체계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가장 중요한 이유 몇 가지를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283쪽)
 
1. 소비자는 이익을 보지 못한다.
시장을 신봉하는 정치인들은 민영화와 자유화가 소비자에게 이익이 된다고 즐겨 주장한다. 자유 시장에서의 경쟁이 공급자들 사이에 가격 인하와 품질 향상을 둘러싼 경합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20년에 걸친 신자유주의 정치는 필수 공공서비스 분야에서 그와 정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시장이 작동할 수 없는 분야가 있다. 고객의 복지를 위해 작동할 수 없는, 하물며 전 국민의 복지를 위해서는 전혀 작동할 수 없는 분야가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민감한 분야에서는 시장경제의 근본적 토대가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필수 공공서비스 분야에서는 수요와 공급의 자유로운 상호작용이 재앙과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한 가지 중요한 이유로 물과 에너지 공급, 보건·의료 체계, 교육제도, 연금보험, 교통망, 전화망, 인터넷 망은 자연독점이다. 이들은 하나의 공급자가 공급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며, 그것이 경영학적 목표를 최우선으로 하는 조직이어서도 안 된다.
공공 독점기업들이 분해된 채 민영화되면 시장은 몇 년 동안 불안정해지다가 “건전화” 국면에 이르게 된다. 즉 공공 독점기업이 소수의 공급자가 있는 민간 과점 체제로 전환되는 것이다. 시장이 일단 분할되고 나면 동업자들끼리는 서로 돕게 된다. 결국 가격은 다시 상승하는데 이런 과정은 “자유화 성공 사례”라던 전기와 통신에서조차 마찬가지였다.
자유화가 사회 기반 시설에 미치는 전형적인 영향은 기반 시설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다―비용 때문에. 그 결과 품질은 떨어지고 소비자를 위한 안정적 공급도 위협받는다. (284-85쪽)
 
2. 납세자도 이익을 보지 못한다
민영화 찬성자들의 또 다른 주요 논거는 제2차 세계대전 때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서유럽 국영기업들이 대부분 비효율적으로 운영되었고 손실을 초래했으며 정부 예산에서 보조금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영화가 되면 납세자가 이익을 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영기업이 경영에서 비효율적인 것은 사실 정치적 결정의 결과였다. 정치인들은 국영기업이 실업을 피하도록 강제한다. 또한 그들은 저소득층을 위한 사회복지적 성격의 요금 체계와 외딴 지역―수익이 결코 발생할 수 없는―에 대한 무난한 공급을 강제한다. 공기업의 재정적 손실은 그들의 위임받은 사회적 과업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민영화되고 나면 이 과업은 달성될 수 없게 되고 그 과업에 필요한 비용은 결국 실업 수당 증가, 복지 지출 증가, 낙후 지역 지원 및 환경보호를 위한 지출 등의 형태로 납세자가 부담하게 된다. 기업 수지는 좋아 보이지만 국가 예산은 그렇지 않다.
공기업은 민영화되기 전에 대부분 경영학적으로 정비된다. 다시 말하면 이들 기업에 부과되었던 부담이 경감된다. 그러면 그들이 아직 국가 소유인 동안에도 이윤을 달성하는 것이 가능하다.
가령 오스트리아에서는 쉬셀(Schüssel) 총리 시절 정부가 모든 국영기업을 매각하고자 했다. 그 이유는 순전히 이데올로기적인 것이었지 상황에 의해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다. 국가는 기업을 경영할 수 없다는 상투어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동안에도 국영 기업인 오스트리아 산업 지주회사(Österreichische Industrieholding AG, Austrian industry-holding stock corporation, ÖIAG)의 지분 참여는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우편 사업은 철강 회사 푀스트(Voest)만큼 이윤을 내고 있었다. 반대로 민영화된 많은 기업은 보조금이나 세제 지원을 계속 받거나(예컨대 브리티시 에너지) 또는 수십억 규모의 채무가 면제되었기(레일트랙) 때문에 겨우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요컨대 기업가로서 민주국가가 그다지 나쁜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 기업이 매각되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이윤을 실현해서 조세 부담을 장기적으로 완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에 민영화를 통해 국가가 거두어들이는 수입은 일회적일 뿐 아니라 그것이 기업 가치 미만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종종 있다. 정치인들은 혹시 이들 기업을 “비효율적으로” 만들었을 과업을 언젠가는 다시 이들 기업에 부여하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납세자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단지 예산 항목의 이동일 뿐이기 쉽다. 그리고 노련한 정치인이라면 그로부터 가능한 한 많은 이익을 거둘 수도 있을 것이다. 대신 그렇게 되면 국민이 비용을 부담하는 동안에 이윤은 결국 소수의 소유자에게 돌아가게 된다. (285-87쪽)
 
3. 강자는 이익을 본다
공기업은 사회적 책임을 진다. 영리가 목적인 다국적 기업은 그렇지 않다. 필수 공공서비스 분야를 담당하는 순간부터 이들은 양극화 사회를 만들어내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할 것이다.
다양한 생활필수품으로부터 단절될 위험을 국민 전체가 공평하게 나누어 지지는 않을 것이다. 의료보험 없이 사는 사람들은 물, 전기, 전화가 차단되거나 비참한 학교에 자녀들을 보내야 하는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대중교통에 의존하므로 그것을 어쩌다 한 번씩 이용하는 부유한 승객보다 승차 요금 인상을 피부로 훨씬 많이 느낀다. 게다가 대부분 중심가 대신 수익성 좋은 간선의 반대편, 즉 민영 버스가 길을 잃을지도 모르는 채산성 없는 지역에 거주한다. 극빈 계층은 신자유주의 민영화 환상 때문에 단계적으로 공공서비스의 모든 영역에서 배제되고 있다.
이는 민간 공급 업자들의 통상적인 비용 구조 때문에 더욱 심각해진다. 높은 접근 수수료와 기본요금, 낮은 경상 비용, 사용량이 많은 고객을 위한 할인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비용 구조는 “자유화 성공 사례”로 주장되는 전력과 전화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뿐 아니라 민간 연금에서도 국가의 보조 프리미엄은 민간 보험에 가입할 수 있는 자에게만 혜택을 준다. 이 프리미엄은 결국 납세자가 부담하는 것이다. 의료보험에서도 또한 건강한 자들이 이익을 보는데 통계적으로 볼 때 이들이 부유한 계층이다. 임신 위험이 없다는 이유로 남성들도 보험료 할증이 적어서 이익을 본다―낮은 기대 수명 때문에 연금보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결과 일반 소비자, 여성, 환자들이 대형 소비자, 부자, 남성들에게 유리한 교차 재원 조달에 기여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민영화의 첫 번째 희생자는 농촌 주민이다. 상업 집중으로 인근 공급자들이 사라진 것으로도 모자라 우체국, 철도 지선, 공중전화, 버스 노선도 없어지고 있다. 망으로 연결된 모든 시설에 대한 접근은 민영화 이후 거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만 확장되고 있다. 지금까지 공적인 망의 확장이 크게 부족했는데도 유럽연합(EU)보다 더 일찍 민영화된 가난한 나라들에서 특히 그러하다.
사회적 약자가 차별받는 가장 전형적인 사례는 대중교통이 없어지면서 자가용을 이용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자가용은 아무나 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차 없는 사람이 이동 서비스 공급의 민영화에 따른 삶의 질 저하의 뒤치다꺼리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개인에 의한 이동 서비스를 대신하는 대중교통 체계는 생태적으로 필요할 뿐 아니라 결정적인 사회정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위한 전국적인 대중교통 체계를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은 개인이 승용차를 구입하는 것으로 비이동성에 대응한 보험을 드는 것보다 비교도 안 되게 낮을 것이다. (288-90쪽)
 
4. 국가는 주식회사가 아니다
국가는 사회복지적, 생태학적, 지역 경제적, 개발 경제적으로 효율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만큼 경영학적으로는 효율성을 잃는다. 그러나 국가는 주식회사와는 다른 이유로 존재하며 경영학도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민영화된 기업은 그 소유주와 많은 주주 가치에 책임을 지고 공기업은 여론에 바로 책임을 진다. 그러므로 이들은 아주 다른 목표를 추구하며 종종 정반대되는 길을 가게 된다.
민간 의료보험 회사들은 중환자를 돕는 데 전혀 관심이 없다. 이러한 영리 기업은 오히려 그들을 떨쳐버리려는 성향을 가진다. 민간 전력 공급자는 관리 비용만 많이 들고 매출은 적은 소규모 고객에게 관심이 없다. 이윤을 줄이는 에너지 절감 조치는 이들의 가장 큰 적이다. 열 발전소와 핵 발전소가 초래하는 환경오염의 장기 비용은 사회가 부담해야 하며 대차대조표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민간 상수도 공급자는 수질이 가능한 한 좋아야 한다는 데 관심이 없다. 고객들이 대안적 공급 방식의 하나로 상수도관을 스스로 설치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다음부터는 수질이 이론적으로도 시장을 통해 조정되지 않는다. 물 공급보다 더 자연독점이어야 할 것은 없다.
민간 하수처리 공급자는 청결도를 법정 최저치 이상으로 올리는 데 관심이 없다. RWE/템스 워터 사례가 극명하게 보여주는 바와 같이 종종 그들은 이마저도 준수하지 않는다.
민간 폐기물 처리 사업자들은 가능한 한 안전한 폐기물 저장이 아니라 저렴한 저장에 관심을 가진다.
민간 연금보험업자들은 안정적인 연금을 제공하는 데 관심이 없고 이윤 폭을 가능한 한 확장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이 모든 문제가 잘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한 민영화 찬성자들의 반론은 언제나 똑같다. 아무 것도 잘못되지 않도록 잘 규제해서 예방해야 한다고. 그러나 자유화된 시장은 합리적으로 규제될 수 없다. 누구에게 자유를 부여했으나 다시 안전을 위해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것은 그 자체가 모순이고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없다. 그러한 해결책은 잘해야 미숙한 결과를 낳을 뿐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위험하다. 식수 공급이나 아동 교육과 같은 부문은 매우 민감하므로 정치인들이 자유 시장에 맡겨놓을 용기를 갖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290-92쪽)
 
5. 결국 책임은 국가가 진다
민영화가 초래하고 있고 공기업이 회피해온 저 모든 “부작용”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는 것은 결국 사회 전체이다. 실업자 증가, 복지 수혜자 증가, 환경 사고 증가는 명백한 비용 요소이며, 여기에 수치로 표현되지 않는 은폐된 비용 요소도 있다. 민영 교도소가 재소자 훈련 비용을 적게 투자하고 그리하여 수감 생활 이후의 전망이 없다면 그 비용은 얼마나 될 것인가? 금전적으로뿐 아니라 사회가 지불하는 대가는 얼마나 될 것인가?
공중은 또한 민간 사업자의 “곶감 빼먹기”에 대한 비용도 부담한다. 즉 민간 기업들이 공기업 중에서 가장 수익성이 좋은 부문만을 사들이고 손실을 초래하는 부문은 매입하지 않는 것이다. 민영화된 회사들은 다시 ‘합리화’되어 가령 지선 철도처럼 수익성이 없는 개별 서비스는 폐기된다. 그렇게 되면 정부로서는 이들 과업을 조세로 해결하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포기하는 길밖에 없다.
민영화가 잘못되고 공익과의 충돌이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면 국민이 다시 한번 부담을 지게 된다. 레일트랙의 값비싼 재매입이든, 포츠담, 애틀랜타, 코차밤바의 물 공급 계약 해지든, 조세를 동원한 파산한 연금보험업자의 구제든, 정부는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놓치는 모든 것을 잡아 끌어올려야 한다.
보수 작업은 때로 국가가 민영화를 통해 얻었던 단기적 이익보다 더 많은 비용을 요구한다. 가령 완전히 황폐화된 영국 철도망을 정비하는 작업을 수년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보수했더라면 소요되었을 비용보다 더 많은 비용을 향후 수년 동안 집어삼킬 것이다.
 
6. 민영화와 부패는 함께 간다
공적 자금이 있는 곳에는 부패, 연고주의, 횡령도 있다. 민주사회는 이들 폐해를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눈에 띄게 제한할 수는 있다.
FBI 발표에 따르면 “전염병 수준”에 이른 메디케어의 사기 행각, 프랑스 그르노블에서 필리핀 마닐라에 이르기까지 물 공급 업자들의 부패의 늪, 영국 민간 연금에서 벌어진 ‘불완전 판매’ 사기……. 민영화 찬성자들은 이러한 사태를 단지 산발적인 사례인 것처럼 다룬다. 그들의 주장은 국가가 공적 임무에서 멀리 떠날수록 부패로 오염될 영역은 좁아진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주장은 첫눈에만 논리적인 것처럼 들린다. 바로 필수 공공서비스 분야에서는 국가가 완전히 물러날 수 없기 때문이다. 정반대로 값비싼 표준을 준수하는지를 감독하는 규제 당국이 부패의 빛나는 표적이 되고 있다. 민영화의 공표와 실행 업무를 담당했던 정치인과 공무원들도 계속해서 유혹을 받고 있다. 이는 개별적인 사례가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이다. 민영화와 부패는 함께 간다. 프랑스에서는 물 시장에서 이를 한 차례 경험한 후 독자적인 반부패법을 제정했다. 이에 책임이 있는 기업들이 서비스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S)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추진 세력에 속한다는 사실은 우려스러운 일이다.
유감스럽게도 이 문제는 이미 “수출”되기도 했다. 1980년대와 90년대 내내 정치적 축하 무대에서는 자유로운 세계무역이 민주주의를 확산한다고 주장되었지만 서방의 다국적 기업들은 피노체트, 수하르토, 밀로셰비치(Milosevic)와 같은 독재자들을 후원했다. 세르비아 독재자 밀로셰비치의 경우에는 1997년에 세르비아 통신사의 절반을 이탈리아와 그리스 기업에 매각했다. 텔레콤 이탈리아는 5억 유로를 주고 그중 29% 지분을 매입했다. 이 사업 덕분에 밀로셰비치는 야당의 격렬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1997년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294-96쪽)
 
7. 대안은 있다
민주주의에는 언제나 대안이 있다―그리고 전면적 시장에 대해서도 당연히 대안이 있다. 서유럽은 이들 대안 중에서 가장 극명한 대안에서 살고 있다. 사회국가가 그것이다.
필수 공공서비스 분야를 보다 민주적으로 조직하는 것도 불가피한 과제일 것이다. 공기업에서도 폐단이 계속 나타났고 이는 특히 사용자와 노동자에 의한 공동 결정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화 연결을 몇 주씩이나 기다리도록 하는 것은 지자체들이 공공 버스와 철도의 운행 계획표를 작성하는 데 참여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부당한 일이다. 공공 병원에서 환자를 냉정하고 비인간적으로 대우하는 것도, 유감스럽지만 주민을―확실한 전문가일 경우에조차―배제하고 있는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민주화와 주민의 욕구에 맞춘 필수 공공서비스의 구성은 신자유주의 이후 국가가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의 하나이다.
경제적 세계화가 사회국가에 가하는 압력은 결코 자연법칙이 아니며 정치적 결정의 결과이다. WTO의 GATS 협상은 그것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 협상이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공공서비스 공급자에게 가해지는 압력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피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민영화에 대한 저항은 전 세계적으로 남·북반구 모두에서 증가하고 있다. 민영화 저지나 상황 개선을 위한 협상에 성공하거나 영리 다국적 기업들을 도로 쫓아내는 과정에서 현실적인 대안들이 성장하고 있다. (296-9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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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유화를 멈춰라. (이정환닷컴, February 5, 2011 4:44 AM)

 

한미 FTA? '사유화의 덫'에 걸린 대한민국! (프레시안, 정승일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2011-01-07 오후 8:05:21)
[프레시안 books] 라이몬·펠버의 <미친 사유화를 멈춰라>

 

무분별한 민영화, 그 재앙의 기록 (레디앙, 2010년 12월 04일 (토) 10:49:30 손기영 기자)
[새책] 『미친 사유화를 멈춰라』…피해현장 기록, 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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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5 16:58 2011/02/05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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