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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 - 어제의 오늘 / 임화 2009.08.06

[어제의 오늘]1953년 시인 임화 북한에서 처형

 

ㆍ남·북서 배척당한 비극의 시인

1953년 오늘 시인 임화가 북한에서 처형당했다. 45세. 그는 휴전 직후 남침 실패의 책임을 물어 박헌영 등 남로당계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진행되면서 ‘미제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총살형에 처해졌다.

본명이 임인식인 임화는 시인인 동시에 혁명가였다. 29년 ‘우리 오빠와 화로’ ‘네거리의 순이’ 같은 단편 서사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의 샛별로 떠올랐다. 21세 때였다. 그는 또 26년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가입한 이래 조직의 중추로 활동했다. 24세 때인 32년 카프의 서기장이 됐다. 임화는 ‘모던 보이’이기도 했다. 보성고 재학시절 이웃한 숙명여고 학생들로부터 ‘연애박사’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미소년이었다. 영화 <유랑> <혼가>에 주연으로 출연했고 전위예술인 다다이즘에 심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의 군국주의가 강화되면서 그의 입지는 좁아졌다. 일제의 탄압으로 35년 카프가 해산되면서 정치 투쟁의 길이 봉쇄되자 그의 평론 활동은 문학 내적인 방향으로 회귀하게 된다. 세태소설론·본격소설론 등의 평론과 <개설 신문학사> 등을 발표했다. 그러나 일제말 결국 전향하면서 친일문인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에 가입하기도 했다.

8·15 광복 이후 임화는 ‘조선문학건설본부’와 그 후신인 ‘조선문학가동맹’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다가 47년 10월 월북했다. 황해도 해주에서 문화부장으로 활동하면서 빨치산과 인민군 군가로 사용된 ‘인민항쟁가’의 노랫말을 짓기도 했다.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서울에 온 임화는 ‘조선문화총동맹’을 조직하고 부위원장 자리를 맡다가 인민군의 퇴각과 함께 다시 북으로 돌아갔다.

박헌영 등 남로당계를 지지하는 노선을 견지하던 임화는 김일성 쪽으로 노선을 전환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친일 경력과 남로당계라는 꼬리표는 그를 족쇄처럼 따라다녔고 결국 숙청의 비극을 맞이하게 됐다.

문학과 사상과 정치의 전위에 나섰던 임화의 비극적 종말은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사후에도 임화라는 이름은 남북 양쪽에서 금기어였다. 북한에서는 모든 문학기록이 삭제되면서 반동작가, 미제 간첩이라는 평가만 남았다. 남한에서도 월북작가로 접근 자체가 금지되다 88년 해금조치로 빛을 보게 됐다.

<김진우기자 jw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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