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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세화 : 한겨레 2006-02-22

자발적 복종


   젊은 벗에게,

   〈자발적 복종〉은 16세기 프랑스인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가 18세 때 쓴 저작의 이름입니다. 그는 몽테뉴의 벗이기도 했는데, 그의 〈자발적 복종〉은 적어도 프랑스에서 만큼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버금갈만한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 저작이 한국에는 재작년에 처음 번역, 소개되었다는 점(박설호 역, 울력출판사 2004)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이 땅에서 누린 것과 비교해볼 때 의미 있는 시사점을 안겨줍니다. 이 책은 16세기 종교전쟁 당시 위그노 교도들의 이념적 지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 자크 루소 등 그의 영향을 받은 사상가들을 통해 프랑스 혁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또 그의 이념이 갖는 근대적 성격으로 지금도 아나키즘과 비폭력 저항 운동 등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가령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반대하는 국제연대운동을 벌이고 있는 농민운동가 조제 보베는 〈한겨레 마주보기〉에서 만났을 때 〈자발적 복종〉을 화두로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자발적 복종〉이 프랑스의 교육, 지식인 사회와 시민사회운동에서 놓칠 수 없는 개념으로 자리 집힌 것은 최근에 〈비자발적 복종〉이라는 저작이 나온 것을 통해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라 보에티는 이렇게 그의 문제의식을 제기합니다.
   “여기서 나는 다만 하나의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이려고 한다. 과연 어째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 그렇게 많은 마을과 도시, 그렇게 많은 국가와 민족이 독재자의 전제 정치를 참고 견디는 일이 항상 일어나고 있는가 라는 점이다.” ...“수백의 지역들, 수천의 도시 그리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한 사람의 지배 체제 속에서 노예와 굴종의 상태를 전혀 죄악시하지 않고, 독재자에게 조금도 저항하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경우를 무엇이라고 명명해야 할 것인가? 이 경우 비겁함이라는 단어는 결코 적당하지 않다.”

   젊은 벗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바라는 것은 ‘자발적 복종’이라는 개념만이라도 품고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나는 “자발적 복종”이 과거보다 오늘날 더 강력히 관철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사회구성원들은 지배세력이 장악한 교육과정과 대중매체를 통해 지배체제, 지배질서에 대한 자발적 복종의식을 내면화하게 됩니다. 일제의 황국신민화가 곧 ‘자발적 복종 의식화’였으며, 분단 이후 반공, 안보 이데올로기가 ‘자발적 복종 의식화’의 일환이었으며, 오늘날의 국익, 국가경쟁력 강조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사회구성원들이 모두 기업가가 아님에도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는 구호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일하기 좋은 나라’를 주장하지 못하고 따르는 것도 자발적 복종의식과 관련됩니다.

   젊은 벗, 그대의 어머니는 그대의 건강을 위해 다양한 식단을 준비합니다. 그것은 그대 몸의 각 부분이 필요로 하는 영양소가 되어 건강한 몸을 이루도록 합니다. 그렇다면, 그대의 의식세계는 어떨까요? 그대의 세계관을 이루는 요소들을 그대는 폭넓은 독서를 통하여 스스로 공급하고 있나요?

   교육과정과 대중매체를 장악한 세력이 그대가 균형 잡힌 세계관을 갖도록 노력할까요? 아니면 그들, 즉 지배세력에 대한 자발적 복종의식을 갖도록 노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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