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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선 방미 시작하는 북의 태권도

환영차 나온 북 태생 할머니와 미국 태생 손녀 사진 몇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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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내는 문화

내가 미국에 오든 1966년 만 해도 흑백 TV가 있긴 했어도 라디오의 드라마가 훨씬 인기 있고 상상력을 키워주든 매 주 마다 기다려 지는 프로그램이었다. 명작 색채 영화 장면 들도 때에 따라 호기심을 갖게 약간 배꼽을 비추이는 옷을 입은 것이 고작 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되었나

이젠 보란 듯이 여기 저기 모두 까발렸고 중간의 그것을 딱 붙는 옷으로 감아 흔들어 대기 위하여 높은 구두 굽을 사용하기 까지 한다. 이것이 누구를 위한 것일까? 어느 한군데도 호기심을 갖게 하기 보다는 전시적 연출처럼 눈을 일단 빼앗아 가려고 한다. 그리고 이 짧은 쑈를 바라보다가는 교통사고나 앞 뒤 사람을 치기 일 수다.

육체의 과시도 중요하지만 조금 잔인한 짓이 아닌가 한다. 우선 이러한 짓은 본인의 허리를 다치게 하며 둘째로는 발의 엄지 발 고락의 관절에 무리한 힘이 전달 되어 후에 뼈가 밖으로 튀어 나오게 한다. 이러면 넓적한 병신 발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나?

나는 우리가 생각할 것이나 자랑스러울 만한 내용 들이 없어져 버린 것이라고 말 한다. 우선 뿌리적이어야 할 대한민국 국기를 생각하여 보자. 일제 하에서 만들어 졌든 국호이긴 하여도 이승만 정권은 조상이 전해 준 조국의 반 토막에다가 유일한 나라 라고 그 무언가를 세우고 그 국호를 먼저 혼자 사용하기로 한 것부터 잘 못 되었다. 이것은 국기를 반으로 쪼갠 것이나 다름 아니다. 아니면 도용 한 것이다. 국기란 나라의 전 영토를 위한 것이라야 하며 전 영토의 문화와 사람들을 상징 하는 것이라야 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나무의 잎새인 사회와 가족을 생각 하여 보자. 우리 사회는 한 마디로 잡탕이 되어 버린 느낌이다. 언어의 혼란이 종교의 난립과 경쟁으로 일어 났고 젊은이 들은 외국으로 쫓겨 나도 살 수 있는 도구로 외국어에 몰두 하고 있다. 기러기 들처럼 나라 가 버린다. 나는 강남의 영어 판 상점들을 보고 외국 사람들을 위하여 그랬나 했고 인터넷 노랑머리 모델들의 광고 역시 우리 젊은 배우 들은 돈 벌기 바빠서 모델은 하지 않나 했다. 

이제 누가 멋있다고 추켜 받기 위하여 자신을 학대하지 말고, 칭찬 받고 흥분을 하다 이용당하지 말고 우리들의 진수 슬픔들을 찾아보자.

각자의 아리랑을 만들어 부르자. 과분하거나 지칠 때를 위하여

그리고 듣고 또 드러내고 입자. 영원한 안전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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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의 진리

요즘 우리 남쪽 나라는 오락의 최신예 첨단기 만들어 팔기에 바쁘다. 대량의 2차원적 또는 상상적 3차원 영상물 제작과 보관을 돕는 소위 애틴가 아이틴가를 하느라 정신 나갔다. 먹고 마시고 한 후에는 너 그것 보았니? 내가 줄게 나도 보고 싶다 그것 너무 큰 것 아니냐 어떻게 볼 수 있지? 하면서 돈 뿌려 공부하여 여기에 줄 서기에 바쁘다.

우리의 말 보존이나 철학의 표현에 적합한 기본 한자의 유래에는 관심이 없고 과학으로 설명 안 되는 진리 탐구는 저리가 이다.

그럼 과학의 본질인 행위로 본 물질에 대하여 알아 보자. 거의 모든 보이는 물체는 시시 각각으로 조금씩 변화하여 간다. 그 주변에 빛과 공기가 있고 이것들이 변화 이동하며 만드는 소리와 불빛속에서 다른 물체들을 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접한다 하면 서로 바라보는 것 외에 서로 닮게 비추어져 하나로 나타나며 서로를 치고 만나고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어느

물체나 반복되는 행위를 하려는 힘과 변화하려는 의지가 있다고 하겠다. 변화 하려는 의지는 다른 어떤 것과 마주쳐 어울려 함께 있을 것과 또는 보지 않으려는 의지로 표현할 수 있겠다. 물체는 이동 중에 어떤 것과 어울려 나타날 때가 종종 있게 마련이다. 이것을 우연한 조화라 하면 다른 물체의 아름다운 외형이나 안의 소리인 마음을 찾다가 아라 채리 며 어우러지는 의지적 조화가 있다.

소리를 못

만들어 전하고 빛이 없는 곳에서 영상물 만을 쳐다보는 것은 어떤 의지를 갖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반복되는 어떤 행위 속에서 또 다른 물체가 되어 가는 것 아닌지. 나의 얼굴을 드려 다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의 인상이 그 무엇을 닮고 있나?

아래 사진은 '꽃속의 얼굴' 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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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운동

사람과 장소는 때에 따라 그 어떤 분위기를 가지게 된다. 우리는 보지 못한 어떤 장소에 가기 전에 육감으로 그 장소 분위기를 색갈로 예감하듯이 그 장소는 어떤 사람 들로 가득 차게 될 것도 짐작 할 수 있다. 그리고 가기도 전에 갑자기 몸이 아파오고 못 가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것은 만날 사람을 만나기도 전에 그를 느끼는 까닭이라고 한다. 내가 나가기 전에 나의 몸을 회복하게 되면 그도 아무 탈이 없었든 것처럼 나를 기쁘게 만나게 되는 것이다. 자기를 소생 시킬 능력이 없을 때에 갑자기 누구를 끌어 드리려는 물 에 빠지어 갈 때 하는 본능적인 행동과 같다. 어쩌면 잔인한 유혹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어떻게 이러한 유혹을 나의 기회로 삼을 수 있을까? 운동과 마싸지는 방법은 틀리지만 같은 목적으로 사용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운동은

어떤 동작을 여러 번 반복하여 짧은 시간 안에 몸의 상쾌함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하겠다. 보통 사람마다 같은 운동을 할 때 천태만상이다. 그러나 크게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관절을 많이 사용하는가 아닌가이고 다른 하나는 가슴을 양 팔로 잘 잡아 주느냐 아니냐 로 나눌 수 있다. 관절을 많이 사용하려면 어느 정도로 율동적이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슴을 양 팔로 잘 잡는 다고 하는 것은 운동을 하는 동안 쉼을 크게 들이킬 수 있느냐로  말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여성들은 다른 나라에 비해 이 위의 두 가지를 골고루 적당히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동남아 여성들은 부드러움이 많아 율동적으로 보이지만 저자 나에겐 팔 어깨가 힘이 없어 보인다. 나는 그 사람이 아니므로 그 팔에 얼마나 골고루 힘이 가지는 지를 알 수 없다. 다시 반복적 동작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자. 이것은 눈을 안정? 시키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한정된 공간에서 효과적으로 땀을 내는데 필수적이다. 운동에 의한 땀은 우리 몸의 오염된 분위기를 씻어 내는데 결정적이다.  땀을 흘릴 때 이왕이면 끝 동작이라도 관절 끝에서 끝의 마디 들을 부드럽게 하여 주는 것과 가슴을 펴고 상하좌우의 눈운동을 하면서 끝을 맺는 습관을 들이는 것이 어떨까. 그리고 어느 장소에 도착하면서 어떤 분위기에 말리기 전에 기본적으로 하는 습관으로 받아 드리면 어떨까.

우리가

인간성을 인품이다 하는 것도 그의 속에 어떤 땀 흘림이 있었기에 나오는 것이라고 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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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르는 가곡

외롭고 괴로웟든 중고교 시절에 홀로 가곡들을 불렀고 대학 시절 가끔 시골 집에 오면 사랑하는 여동생이 불러달라고 해서 부르든 가곡을 이제 다시 불러 봅니다. 부족한데는 가상하여 더 아름답게 들어 주세요. 파일 첨부가 되지 않아서 죄송합니다. http://blog.daum.net/habia 가셔서 mokryunhwa.wav 를 다운로드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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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몇장

최근 찍은 작품입니다. 나는 그동안 딱딱한 글 만 썼지만 어느 누구와도 대화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황혼(황홀), 밤(쉼), 아침(이상) 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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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과 다양성

나는 진리는 단순하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찾아내려고 항상 노력했다. 이것은 누가 가르쳐 준 것인지 내가 알아 낸 것인지는 모르겠다. 내 마음은 꼭 땅 파는 기계처럼 싹 쓸어 버리는 잔악성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쌓아지는 것을 보고 무척 고민해야 할 것이 많다. 왜 쌓아 지나? 무엇이 쌓는가? 중요한 것 같지만 쓰레기와 함께 쌓아 놓는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나 쓸데 없는 것들이 모두 한데 놓아 진다. 조금 더 있다가 한번에 하고 던진다.

그러나 그 후 나는 이곳에

3가지를 놓는다. 하나는 당장 쓰레기로, 하나는 잠시 중요한 서류나 즉시 회답할 것, 그리고 하나는 영구 보존이나 당장 사용할 것으로 나눈다. 여러 개의 종류를 크게 분류 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단순 하여 진다. 그 다음의 효율성 과 분류 방법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백지장 도

맞 들면 낳다 하는 말이 있다. 이것은 둘이나 그 이상의 사람들이 함께 들으면 쉽다 는 말로 바꿀 수 있다. 우리 여럿을 구분 할 때는 물건들 과 좀 다르게 한다. 여기에는 쓰레기가 없다. 한 사람이 코는 냄새를 못 맡아도 요리는 잘 할 줄 알며, 다른 사람은 맛을 볼 줄 몰라도 냄새를 잘 맡든가 귀가 밝다. 진리나 물건 정리는 단순 하면 좋지만 우리가 먹고 가지려는 것은 각각 다양하며 다양하게 먹고 사용하고 싶어 한다. 어떻게 가능한가?

그럼 이것을 위한

지도력은 어떤 것이라야 할까? 지도력이라면 우선 구성원과 목적이 먼저 정해 짐에 따라 각각 다르다. 그리고 환경이나 응급성 그리고 위에 말한 구성원 능력의 다양성에 따라 지도 방법과 구성원 배려와 참여 유도가 달라 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외부 세력의 침입이나 절박한 지경에서는 직 하향식이 빠르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계층 단위가 적고 업무 위주여야 한다. 그리고 맨 밑 계층의 목적이수 도 민주적으로 하도록 소단위로 서로 경쟁함이 부여되거나 아예 각각 다른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게 좋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가능한 한 사람 위주로 개성이나 개인 능력을 살리면서 전체적 다양성을 이룩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에 각 개인의 예술 능력이 발휘 될 때는 전체적 실력발휘의 꿈 이상이 될 듯 도 하다. 이제 학벌 위주나 물갈이 되는 지도자 만 매달릴 때는 지났다.

나는 블로그를 포함한 횡적 연락 통신망이 가장 발달 된 우리 님들을 믿는다.

위가 밑을 위하고 밑이 주인이 되는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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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혼이 돌아 오는 곳

우리의 생각은 무엇을 찾으며 가끔 번뜩여 지고, 외롭게 허공을 헤매듯 흐르고, 깊은 데로 항 정 없이 빠져든다. 그리고 꿈들 같은 것을 보고 찾고 즐긴다. 그리고 이것이 눈물을 흘리게 하거나 잠을 자게 하거나 그리고 잠에서 깨어 나오게 하고 무엇을 계속해서 더 찾거나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게 하며 형상 들을 만들어 낸다.

아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에 끌리거나 놀라 눈을 뜨거나 아! 하고 번뜻 바빠지면 없어 지거나 의지를 갖고 글로 그림으로 조금 번뜩였든 것을 써 놓거나 그려 놓으면 쉽게 많이 나가지 않는 것. 눈을 영 감아 버리면 이것은 나의 몸과 어떤 관계가 있을 것인가? 눈이 있을 때 느껴지는 이러한 꿈과 혼이 돌아 오는 장소(영혼)가  눈 없이도 가능할까? 눈을 영 감으면 혼 자취는 어데로 가며 혼의 작품들은 뒤에 어떻게 남게 되며 이 텅비게 되는 그 장소인 해골과 눈창은 있는 것일까 어디로 가 없어지는 것인가?

우리는 영혼이라는 장소가 있기에 무슨 생각이나 진선미 등을 저축하고 발전 시킬 수 있고 방황하거나 다른 혼들이나 꿈들, 그리고 그들이 깃 들어 있는 데에 나들이 하다가도 돌아 올 수 있다. 이것은 하나의 혼이 되는 장소이며 꿈의 저장소다. 이것을 많은 사람들은 살아 숨 쉬고 있다고 믿고 나의 영혼이 목마르다 또는 아름답다 저 세상에 갈 수 있다고 한다.

즉 혼과 영혼을 혼돈 하는 것이다.

혼이 정렬을 만나 거나 의지의 성냥불을 키거나 하는 것은 영혼이란 장소에서 어떤 혼이 만들어 졌고 이것이 혼불로 탄다 또는 실천한다 고 할 수 있으며, 이 실천 자체는 아름답다 또는 그렇지 못하다 는 말로 표현 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혼이 거의 없는 영혼도 가능하다고 할 수 있기에  영혼(혼 program의 작업장)의 일은 전기와 같이 살아 있을 때 만 작동하는 작업기-관념함(processor-hard-drive)과 같은 것이 아닐까?

혼은

여러 가지의 형태의 말이나 작품으로 전달 되거나 남겨진다. 그럼으로 이것을 잉태 하였든 영혼은 아름답다거나 영원 할 것으로 믿는 것은 어폐가 있어 보인다.

여러 가지의

제 눈과 제 이 제 삼의 눈이 엉킬 수 도 있지만 열심히 정돈 하고 아름다움 들을 쌓아 실천하면 나의 혼은 다른 언어나 실체로 전달 되고 기록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으로 이 혼이란 것도 크게 하나의 (제) 눈(안경:frame of reference)으로 단축할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아무리 어쩌구 저쩌구 지껄이거나 만들어 놔도 보는 눈에 따라 하나로 볼 수 있는 또 다른 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살고 있던 없던 인종이 나의 것이든 아니든 그 어떤 혼과 꿈(눈)은 스스로 양심의 의지를 갖게 되는지 도 모르겠다. '내 영혼' 하고 떠들다 태양열 Solid-state-processor-harddrive-robot 에게 밀려 나는 날이 올까 두렵다.

혼은 쉴 곳이 없어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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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복수

나는 대 여섯의 어릴 때 찍은 나의 사진이 내가 그려 볼 수 있는 가장 어린 나이의 기억 아닌 형상으로부터 읽을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니 그 전후로 내가 얼마나 어떠했나를 물어 볼 사이도 없이 커져 버렸고 지금은 아무에게도 물어 볼 사람이 없다. 하나 기억 나는 것은 늘 무엇이나 밖으로 가지고 나가 누구에게 주어버리곤 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남들보다 늦게 가기를 좋아하였다. 모두를 가질 수 있는 사람처럼

나는 두 딸을

기르는 동안 나의 아내와 함께 너무 지옥같이 힘들게 길렀기에 아이들을 많이 즐기지 도 못하였고 그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는지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는 5년 전에 내가 힘들었든 나 자신의 억울한? 과거에 대한 복수를 하기로 하였다. 딸에게 내가 봐 줄 테니 아이를 가지라고 하였고 그 후에 첫 손자 아기가 나오면서 나는 은퇴할 겸 딸들 곁으로 왔고 지금 둘째 아이인 손녀 딸까지 둘을 기르게 되었다.

나는

나의 자신의 과거에 대한 분노 덕분에 더 큰 사랑의 재미를 얻게 되었는지 아니면 그 아이들이 스스로 나를 그렇게 좋아하게 끔 만드는 지를 구별할 수 없다. 단지 나와 내 아내가 과거를 되 찾은 듯 우리 옛 아이들을 여유 있게 다시 기르는 것 같이 착각 할 정도로 손자 손녀의 얼굴에서 딸의 모습과 나와 아내의 모습을 보고 즐거워 한다.

나는 매일 아침에 두어 시간 막 한 살 넘긴 손녀 딸과 단 둘이서 공원에 나가 논다. 이렇게 하고 돌아오면 할머니가 손녀 딸을 지루하지 않게 나와 똑같이 아이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도 옛 복수와 자신을 단단히 즐기고 있다.

나는 어린 아이가 노는 모습에서 기억할 수 없든 옛 나의 노는 모습을 보는 듯 하다. 나를 되 찾아 가지면서....이것은 내가 복수하여 얻으려든  딸의 덜 지옥 계획 밖의 나의 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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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눈의 안경

우리는 무엇을 볼 때 되도록 많은 면의 큰 시야를 한번에 보기를 좋아한다. 그리고 아무리 급한 지경에 어떤 것을 꼬나(째려)볼 때나 드려 다 보는 것도 잠시적으로 하려고 노력한다. 최소한 다른 면에 눈을 쉬면서 하지 않거나 좌우 상하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빛들을 힐끔 보면서 하지 않으면 고정된 한곳 빛의 강도나 무의식적으로 드리워 지는 상대적 시야 밖 주변의 어두운 그림자에게 압도 되여 눈조리개의 탄력성이 위축된다. 명당도 몇 분 몇 일이면 시들해 진다.

빛이 변하고 생각이 을 변하게 하기 때문이다.

나는 중 고등 학교 시절에 혼자 가노라면 길에서 왜 째려 소리를 듣고 휙 돌아 한번 째려보면 몇 아이들이 서 있는 것을 여러 번 보았고 그럴 때 마다 느슨히 다가 가면서 그러면 어쩔래 하면 다 도망 가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하였다. 이것은 내가 튼튼한 어깨와 그들과 주변을 한꺼번에 보는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력도 없이 미국 대학원 다닐 때는 너무 많은 책을 읽다가 눈의 원리를 다 까먹어 버렸다.

나는 다행인지 몰라도 지금은 안경을 쓴 안경쟁이 이다. 모든 이는 보는 안경을 수시로 바꾸어 가며 사물을 관찰 한다. 이것을 영어로는 frame of reference라고 하며 우리는 제 눈이 안경 또는 보는 눈이란 말로 대신 한다. 지금부터 안경이라고 만 요약하겠다. 사람 마다 이것은 다 각각이며 수시로 바꾸어 갈아 끼워가며 관찰 한다고 하는 말이다. 왜 갈아 끼워야 할까? 우리의 눈은 제 삼자로 가기 위한 도구이거나 수시로 정체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제 삼자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사물을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며 참여함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사물의

변화가 없는 예술성이 떨어지는 화면이나 어둡게 펼쳐지는 앞 장면들, 색의 구도가 없는 시야, 혼동스런 장면들, 윗 천정 전등불 들의 난무, 한 쪽으로는 무척 아름다울 때의 애인의 얼굴, 보이지 않는 마음들, 거짓 얼굴, 어느 하나 정신 없이 보다가는 눈이 어두워 지거나 나를 잃기 십중팔구다.  또한 글을 읽으며, 사람들과 대하면서 나는 그들의 눈 안에 정체되고 그 보이는 것과 사물(생각)은 나의 안경을 조금씩 바꾸어 놓는다. 왜냐하면 내가 비추어진 그들과 그들의 안경 속에서 나 자신을 보면서 나의 안경을 바꾸어 가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아야 할까? 어떻게 눈을 보호하여야 할까?

나는 안경 태(견고함과 편견)가 없는 것 처럼(태 없이 보는 것 처럼) 항상 자신 있는 자세로 크게 떠 보라고 한다. 그리고 위가 사람들이 만든 전등 불로 너무 환하면 큰 나무들의 큰 밑 기둥들이 꺼꾸로 보이는 새벽 언덕의 나무 기둥들 사이로 보라고 한다. 그리고 어둠 침침한 저녁에 앞 차를 바짝 따라갈 때 빨강이 불쑥 퍼져 보일 때는 잎이 별로 없는 높은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얀 하늘로 보라고 한다. 그리고 항상 너무 깊게 오래 보지 말라고..그리고 크게 움직이기 전에 조언을 구하라고..

언젠가 나의 더 비밀스러운 안경들이 올 것입니다. 여러분들 사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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