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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를 돕는 이유

첫째 그리고 언제나 그들을 예뻐지게 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사랑하면 되는 일이다. 둘째는 소녀다움을 원해서다. 이것은 가볍다는 말과 같다. 동격 됨과 서로의 같음을 나눔으로 가능하다. 셋째는 명랑함을 바래서다. 이것은 실수와 모자라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줌으로 가능하다. 어른이 되면서 바래는 것은 정숙함이다. 이것은 아무때나 누구에나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함께 낭만같은 욕심을 부려 보는 꿈과 같은 것이다.

나는 젊었을 때 여자에게서 사랑의 편지를 받은 적도 있고 내가 그들을 사랑한다고 한적도 여러 번 있다. 이것은 내가 준비도 되어 있지 않으면서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표현을 쉽게 다른 말로 해 버린 것이었다. 사랑은 좀 더 구체적이어야 한다. 우선 위의 셋째 이유를 채워 줄 수 있는 자질을 갖추어야 원하는 아름다움, 소년 소녀다움, 그리고 낭만이라고도 하는 명랑함을 함께 찾고 가질 수 있다. 그러기에 첫째 이유의 해결책인 사랑함은 자신의 자질 갖추기로 대신할 수 있는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그럼 어떻게 내가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자질을 찾아내고 기를 수 있을까? 그것은 각기 그의 독특한 멋이라고도 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없는 무에서 조금씩 생겨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남의 소위 영적 축복으로는 불가능하다. 우선 부모나 누구의 사랑을 받는 것이 바탕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보답이라든지 찾으면 찾아지는 남을 사랑 할 수 있는 기회에 참여 함으로 사랑하는 경력과 사랑하는 용기가 불어 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함의 보답이요 자질의 더하기다. 나는 미쏘의 대리전쟁 후에 어려웠든 어머니의 고난에 동참하며 속으로 울면서 자랐다. 슬플 때면 뒷산에 올라 크게 노래 부르고 내려오곤 하면서 노래를 멋있게 정력적으로 하곤 했다.

그럼 본론인 정숙함을 찾아보자. 이것은 교육, 재력, 명예, 직업과는 무관하다. 어느 정도는 선천 미라고 할까? 우아함이라고도 하는 이 것은 자신 안에 가두어 두고 못 찾아 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숙 미와는 또 다르다. 성숙 미는 생리 등 여자가 갖는 고통의 반복 기간의 연속으로 오기도 하지만 운동 신경의 발달 등 자연스러운 여유의 미 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숙함은 이보다 더 높은 꿈과 이들의 실천 속에서 자라는 멋이라고 하면 어떨까. 모친의 정숙함을 딸이 조금씩 닮을 수도 있는 것 같다. 이것은 무대에서 몸을 흔들지 않아도 귀 옆으로 살짝 보이는 연모 사모하고 싶게 만드는 그 무엇이다. 이것은 나의 력량 밖의 꿈이다. 나는 이 성숙함보다는 정숙함과 그 외에 위의 세가지 여자를 돕는 이유에서 남자 됨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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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지왕자와 정체성

거지왕자와 정체성

요즘 남한 정치 쇼엔 패를 지어 상대방을 점잖게 무슨 파다 하고 깎아 내리고 올려 주기 바쁘다. 이것은 좀 우습다.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내가 어디 속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다. 방향에는 어디로부터 보느냐에 따라 어느쪽이 결정된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들 같다. 거지왕자(왼쪽에 있다 오른 쪽으로 확 나라가버린 사람)를 나보다 아직 왼쪽이라 우겨댄다. 상당히 부러운가 보다. 훌쩍 뛰어 넘어 다른 쪽으로 가겠다고 하고 있으니 거지왕자도 웃을 것이다.  그것이 그것인 장소에서 왼쪽으로 떨어질지 오른쪽으로 떨어질지 그 뛸 실력이 무엇인지도 모를 것이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좌우가 분명했다. 그러나 오늘 날엔 노동자의 복지가 향상되었고 건강을 포함한 사회복지제도가 좋아졌기에 좌우의 차는 점점 없어지고 있다. 국가의 주체성을 좌우로 평가하기도 곤란하여 졌다. 한 국가의 종주국도 주체성을 문제 삼고 늘어질 수 없는 때가 오고있기  때문이다. 이젠 한탕 공부하여 살아 남는 길 밖에 없는 세계 안으로 가고 있는 듯 하다. 꼭 그럴까? 그렇지 않다. 다른 나라에 있는 풀뿌리운동이 한 국가의 주체성을 찾아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왼쪽 바른쪽을 뛰어넘을 때 가능함을 보았다(예:처음에는 1.5세가 주를 이루든 진보적 단체에서만 시작한 미주내에서의 최근 위안부 결의안 미의회 통과 운동과 이의 발전적 결실을 볼 때).

요즘 거지왕자의 해외 포도청이 한미 엪튀의 미국의회 통과를 위하여 풀뿌리들을 찾아볼까 하고 큰 도시를 찾아 다니고 있다. 이 엪튀가 우리 나라의 좌우의 차이를 넓힐 복지 특히 건강보험제도를 해칠 것은 살짝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말 하지 않으면서다. 언제 진보운동을 중심으로 좌우가 그게 그거지 하면서 한마음으로 서로의 간격을 좁히면서  그동안 좌우 간격으로 인하여 많은 애국자와 풀뿌리들까지 희생시킨 국가보안법 등을 고쳐 나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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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의 허상

한류의 허상

신문은 사진 더하기 말이며, 영상매체는 이것 외에 소리로 된 말을 사용하고 움직이는 사진들을 사용하며 여기에 음악을 더 넣는 것이 보통이다. 대부분 이 두 매체는 한류(한국 사람이나 한국 피가 섞임이 무엇으로 든지 세계에서 인정 됨)로 도배질 하느라 바쁘다. 나도 뭐 하나 만들어 가지고 나가야지 하게끔 한다. 아니면 국내에서 한탕 하여 200만불 주택을 해외에 투자 할 수도 있게 하고 있다. 또 수 많은 여행객들이 해외로 소풍을 나가 한탕 쓰는 것도 한류인가 하는 착각에 빠지게 할 정도로 뻗자 뻗어나가자 한다. 인터넷 매체역시 여기 뻔쩍 저기 뻔쩍 눈 잡기에 바쁘다. 어느 한곳 우리의 순수한 옛 것을 찾고 보수하고 개혁하고 개량하여야 할 제목을 찾기 힘들다. 정말 한류의 핵심이어야 할 문화 교과서 하나도 없지만 꾸밀 내용도 찾지 않고 있다. 민주화와 통일문학, 여성 정치 사회 참여, 환경 운동, 토착종교와 민중 종교의 합작 가능성, 판소리의 현대화 가능성,  풀 굿의 다양성 등이 현대 대중음악에 끼친 점등..모두 풀뿌리들의 참여 몫이 되고 만다,

정부나 국회 역시 한탕 예산을 늘리고 우선 꿔서 쓰면서 궁극적으로 국민의 빚을 늘리기에 바쁘다. 문화 발전의 필수 조건인 사상의 중립을 못 지키는 종교인과 예술인도 한 몫을 하고 있다. 누가 이 거대한 궤도차를 굴리고 있을까?

이번 북한의 수해 복구를 위하여 정부는 강남의 집 한 채 값을 주겠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고수하고 그곳에는 우리나라의 실형 문화재만 해도 엄청나게 많고 무형 문화재도 많다. 이것과 이들의 침수에 의한 복구만 해도 엄청난 지원이 필요 할 것인데도 아양 곳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남)한류는 우리 조상들이 만들고 지켜온 것과 먼 허상을 만들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누가 이것을 끌고 나가고 있을까?

이것은 한탕 공부를 하여 때낸 학벌 군들의 놀고 먹기에도 근거한다. 해외에 나가면 즐비하게 큰 대학마다 한국학이다 뭐다 하며 외국인들을 위에 모셔 놓고 삼성이나 현대등 굴지 회사 등을 다닥거려(어떤 주먹들인지는 몰라도) 수 천만불 씩 받아 쓰면서 현지 운동가들을 불러 논문이다 연구원이다 하면서 종주국의 착취 연구를 하게 하고 있다. 남한의 대통령이나 정객들도 여기에 불러 사상 정검을 시키고 옆에서 씨큐리티(안보) 레코드를 틀어댄다. 옛날에는 평화 봉사단이 한국에 나가서 한국어를 공부한 후에 여기 기웃 저기 기웃하며 하든 일을 이렇게 쉽게 하고 있다. 이들은 한국을 위하는 척 하는 한국계 미국인들이다. 왜정 때는 하더라도 숨어서 했을 일 들이다.

한류는 민족적인 것으로 의미를 축소해야 할 것이다. 외국을 모방하는 것은 제외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류는 통일 지향적이고 과거의 잘못된 오점을 씻어 내는 것이라야 한다. 최근 쌘프란시스코의 한국일보 미주판(8/30/07)에서 한국의 날 퍼레이드 및 민속축제 참관 이웃커뮤니티 사람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한국하면 연상되는 것으로 거의 반이 한국전쟁을 들었고 서울올림픽, 월드컵 등이 나머지 였다. 현정치 대통령으로 김대중(24),김정일(20),김일성(17), 노무현(14) 등으로 분단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통일 행보로 우리나라를 빛냈으면 한다. 이래야 문화도 산 문화가 될 것 아닐까? 이젠 통일 한류로 탈 바꿈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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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나

사랑과 나

나는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서 내가 잘 한데에 대한 칭찬이나 대가를 곧잘 요구하였고 어머니는 그렇게 하려면 아예 좋은 일을 하지 마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가 꽤 빠르게 도망을 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어느날 도망가든 나를 붙잡으시었다. 당신의 머리를 벽 기둥 모서리에다 쾅, 딱딱 박아대고 계셨기 때문이다. 나는 손을 내밀어 나무 모서리를 말아 감으며 울면서 애원했다. 엄마의 사랑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해서 일찍 책임 있는 어른이 되어 버렸다. 중학교 1학년 때에 남녀 혼합 반에서 여자의 부드러움을 무용을 통해 체험하였고 2학년 때에는 방과후 기계체조로 어깨를 단련하였고, 나는 항상 외톨이 였었기에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무수히 여럿과 동시 싸움을 하였다. 그들은 오히려 나를 질투하고 부러워 했다. 왜 그런지 정말 주먹들은 나를 좋아 했다.

나는 내가 좋은 아내를 맞게 된 것을 내가 어머니에게 효한 덕이라고 가끔 생각한다. 이제 나는 무엇인가? 하고 물어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늘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지어져 있음을 인식한다. 특히 나를 돌보아 주는 내 아내 없는 지금 이 순간과 같은 나는 존재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자유로운 홀 몸의 존재는 있을 수 있겠지만 아내 없는 다른 마음의 역량은 재빠르게 없어져 나갈 한계가 있음을 안다. 영 다른 내가 되어버리고 말 수 있다고 무섭다. 나의 어머니가 나에게 하신 것처럼 나도 그렇게 모두에게 잘 해야 아내에게도 잘 하는 것이 되겠지...라고 외워본다.

나는 지난 일년 전 가족 안에서의 새 만남으로 나온 손녀로 인해 다른 내가 되어 가고 있음을 본다. 사랑스러운 손녀가 나를 사랑하며 나로 하여금 그와 그 주변에 대하여 더 강렬한 사랑을 느끼게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은 만나는 사람이나 그가 새로이 접하는 진보적 문화 및 연민과 사랑의 눈빛등에 의하여 변화될 희망이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기가 속하였든 잘못된 과거의 굴레적 악의 틀을 철저하게 반성하여야 한다. 이것은 가짜 눈물 없이 공개적일수록 더 도움이 된다. 비듯이 눈감고 자기 혼자 중얼거리거나 이러한 대표를 만나고 사람 앞에 나와 나도 하겠다 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을 더 속이고 또한 많은 이들을 또 더 속일 겉들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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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눈

빛과 눈

현재의 위치에서 고개와 눈을 상하로 굴려 볼 수 있는 햇빛에는 최대한 세가지가 있다. 햇볕(햇빛이 벽이나 물체의 표면에 반사 됨)과, 흘끗 볼 수 있는 햇살(눈에 직접 들어 옴),햇살 먹음(햇살이 구름 등 어떤 물질을 지나면서 비교적으로 밝아짐) 셋으로 나눌 수 있고 전등불도 햇 자 대신 불 자로 대신하면 똑 같이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 햇볕은 직접적인 것과 이미 한번 이상 반사했든 간접적인 것으로 더 나눌 수 있고, 그림자는 음성적 햇볕이라 할 수 있다. 햇살 먹음도 결정적 나뉨과 점차적으로 나누어 지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햇살 도 햇살 먹음을 한 후의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햇볕이 나오는 벽의 색에 따라 강도가 다르며 이것을 어떻게 집안으로 들여와 경쾌함을 더하느냐에 있다.

유리도 엄격히 하면 햇살 먹음이지만 가리개 낱 사이로 내다 보이는 햇볕은 햇살과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다. 즉 유리 밖으로 보이는 건너편 집 벽의 햇볕이 눈 부시는 정도에 따라서 더 그렇다. 나는 열렸다 닫을 수 있는 가리개 대신 투명한 플라스틱에 그림을 그려 창에 덧붙여 넣고 이 효과를 만끽한다.

내가 사는 샌프란시스코엔 대부분 동 서향의 창을 갖고 있기에 아침 저녁으로 한쪽 햇볕이 유난히 더 밝다. 다행이 뒷집 옆집의 벽이 바로 뒷집보다 더 길게 나오면서 점점 각이 져 길게 나온  벽들이 더 많은 햇볕을 받아 오후에 내 집의 그림자를 안아 어두워진 바로 뒷집과는 대조적으로 밝아 하루 종일 동서의 어느 한편은 눈이 부시다. 그리고 한낮에는 양쪽 모두 밝아 마치 빛 통로에서 사는 것 같다. 여기에 햇볕 천지인 정원의 화초와 나무들을 문 가리개 사이들로 내다 볼 수 있다.

우리는 온 종일 햇살과 이것이 없으면 햇볕과 햇살 먹음을 보면서 산다. 그리고 컴퓨터모니터의 불살을 보든가 많은 불볕과 전등 갓이나 먼지를 조명한 불살 먹음을 보면서 산다. 햇살과 불그레한 노랑 섞인 불살이 너무 적다. 그리고 공기가 혼탁한 나머지 먼지 층이나 안개 층의 지평선 위로 점차적으로 없어지는 햇살 먹음을 보는 것은 별로 눈에 상쾌함을 주지 않고 오히려 우울증과 졸음을 준다. 그리고 실내의 벽과 책장 등 많은 음성 햇볕(그림자)을 본다. 저녁 실내엔 불살 전등이 만드는 양음의 불볕을 보기 보단 TV 색채 불살을 보고 만다.

그러면 컴퓨터의 흰 불살을 어떻게 해야 될까? 다시 말하면 흰 종이의 까만 글씨를 읽을 때 전체적 흰 종이의 불빛이 두 작은 눈동자 안으로 던져져 곧 피곤하여 지는데 어떻게 하나?

어떻게 모니터 위에 햇살을 만들까? 나는 TV 보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

Desktop바로 가기 그림들을 10개 이내로 줄여 왼쪽으로 옮기고 내가 직접 그려 만든 그림들을 다시 사진으로 찍어 만든 wallpaper(배경화면)위에다가 주로 흰 면으로 많이 쓰거나 읽어야 할 Program창 크기를 배경화면 가상자리 1~2인치를 볼 수 있도록 좀 작게 줄인 후에 밑으로 보이는 배경화면의 불(그림)과 위의 흑백 빛 가를 함께 가끔씩 눈치기로 보면서 위에 펼쳐진 흰 종이 글씨를 보면 상쾌하게 눈을 쉬면서 읽을 수 있다. 가끔 창을 아예 밑으로 감추고 좀 더 떨어져서 배경화면을 감상하기도 한다. 독자들을 위해 이 글 아래에  그 그림을 올려 놓는다  이 그림은 사용자들이 개인적이거나 비상업적인 용도로 사용하여야 할 것을 부탁합니다. 이 그림(사진)불의 빛의 저작권은 이 그림의 저작권자인 필명 habia에게 있음을 명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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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한울림, 하늘님, 하느님)이란?

빛의 통로와 같은 것일 겁니다. 연결 고리와도 같은 거죠. 나의 아집이나 고유성을 유보하고 그들 중심에 서서 그들 것을 존중하는 것일 겁니다. 나 만의 얼굴이나 길을 뺀 것입니다. 나만의 길을 천국의 길로 홍보하는 사람은 여기에 결코 속하지 않습니다.  나를 이해하는 빛도 아닙니다.  나만을 보아 주는 어처구니가 아닙니다. 눈 빛들을 연결만 할 수 있으면 됩니다. 한동안 안보면 멀어져 가는 무리들이 아닙니다. 무리들이 양심적으로 되돌아 오도록하는 화해의 장입니다. 나의 불로그는 이런 것으로 발전 되었으면 합니다. 아직 어떻게 댓글을 올리도록 하는지도 모르니 조금 답답합니다. 그동안 저의 글을 읽은 분들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계속 쓰고 더 큰 꿈들을  바래 보겠읍니다. 나의 네이버나 진보의 이 메일 주소로 답을 주셔도 됩니다. 영어로 하비아 라는 이름은 저의 손자가 나를 불러 주는 이름입니다. 여러분들은 나의 창문 들이 되어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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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적 사랑?

중립적

사랑

나는

일고여덟 때에 친구 되어주든 고모에게 잡혀 교회에 나가, 뱀이 인간을 죄악에 빠지게 사탄(악마)이라는 설교를 듣고는 방과후나 주말에 도시락을 가지고 논두렁과 들판을 후비며 뱀을 죽여댔다. 나는 군에 입대하여 전방에 있을 떨리는 공산주의 막는다는 총을 메고 보초 서며 우쭐댄 적이 있다. 내가 제대 한지 얼마 안되어 부대는 월남으로 파병 되어 우쭐대지도 못하든 많은 젊은이들이 쓸어져 갔다. 내가 논두렁과 들판을 너무 사랑하여서 그랬을까? 내가 남한을 사랑하여 우쭐댔을까? 그들은 배고픈 국민들을 사랑하여 월남에 갔었을까? 말과 글엔 말하는 사람의 의도가 있게 마련이고 의도를 모르면, 그것에 끌려 인생의 많은 시간을 버리거나 하는 청중이나 신자가 되게 마련이다. 아니면 자기도 그에 못하지 않는 지식인 척하는 씨름꾼이거나 뿜는 이들도 많이 생겨 난다. 일반적으로 무조건 받아 들이면 의도에 놀아나지 않고 자주적으로 실행하는 사람들과 이들의 언어에 심하게 튕기게 마련이다.

그로부터

6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아직도 뱀은 자신들을 서로 해하지도 인간을 해하지도 않는 자연의 일부이며, 공산주의자는 과거 일본과 제국주의를 싫어하는 순수한 투쟁적 사람들이며, 배고파 하는 사람들은 저렇게 경제적으로 번창을 계속한 남한에도 아직 많이 있다. 이승만과 군사 독재자들은 옳은 하거나 사는 사람들일수록 빨갛게 취급하였다. 병을 주면서 아픈 사람을 치료 사랑하라 하고, 착취하며 가난한 자를 불쌍하다고 내려놓고, 막아 놓고 고립적 이다 열라 하며 도우라 하고, 건너에서 돕는 한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어디까지나 정치적이다. 탈북자가 생기는지? 미국의 경제제재와 호전적 군사적 침략과 점령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결과로 초래 것을 개인의 불행으로만 받아들이면서 이것을 예속된 국가의 이미지 향상을 위해 악용하는 것이 남한 정권이 지원하고 있는 탈북자 정착금 제도이고 비정부 단체들이 하는 봉사 활동이다. 비정부 단체 중에 상당한 부분이 소위 말하는 종교 집단이다. 이들이 말하는 것이 바로 중립적 사랑이란 것이다.

정치적

간섭이나 단체적 원조제도에서 떨어져 소규모 집단이나 개인적으로 다가 선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다. 정치와 상관 없는 중립적 개인이 세상에 어디에 있는가? 사람을 잡아다가 천국에 잡아 가두어 보라. 지옥이라도 자기 고향으로 다시 가고 싶을 것이다. 이것이 자신이며 자신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인연을 끊는 것은 불행이며 죄악이다. 인도주의 이기 이전에 악이다. 천당이기 이전에 생지옥이다. 요즘엔 비정부 조직들이 옛날 국가의 비밀기관이 숨어서 하든 활동들을 신자들이 모르고 선교자금이나 정부의 합법화 예산자금을 받아 그럴듯한 무슨 협회, 또는 재단이란 중립적인 듯한 이름으로 국가나 특별한 이익 단체를 위해 봉사자 순수 믿음과는 관계없는 간첩 노릇을 하며 봉사적 명예를 찾는다.

물리적

힘을 믿는 이들은 항상 힘있는 편에 서서 피해 민족과 시민의 순수 지방 봉사 단체를 우습게 여긴다. 그들의 대상 지역 종교나 제도 철학은 멸시 대상이다. 이것을 바꾸는 것이 우월적 봉사라고 믿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물리적 권력 집단과의 밀월 관계 성립되면 만년 편하기 때문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것을 () () () 유착이라 해보자. 미국을 손안에 넣고 세계를 흔드는 유태 종교인들은 거의 모든 국내의 굴지 회사와 언론과 기타 공공기관이나 봉사기관을 손안에 넣고 있거나 영향 통로를 가지고 있다. 많은 학자들과 진보운동하든 사람들도 흡수 되어버리거나 변두리에 서고 만다. 대리석과 무게 있는 나무 가구 안에서 연구하여, 과자 봉지 속에 선전지가 들어가고 과학 서적들 속에 무슨 재단이름을 새겨넣는다. 무슨 교류다 하면서 개인 스폰서를 구해 저변을 확대해 나간다. 기도 만으로도 도울 있다고 어루만지는 한다. 나는 30여년 남한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을 하면서 많은 종교인 들이 너무 간혹 하고 떨리게 응급한 호소를 뱉는 것을 듣고 본다. 그렇게 까지 굴욕적으로 거짓으로 구걸하며 거두어 들였다고 하면 도움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없는데도 말이다. 포로 탈북자를 이용하여 서북청년, 선교 전도 증인, 친미 깃발부대 등으로 이용하면서도 소외하며 자유를 주지 않는다. 인터넷에 사실 글이 올라오면 쓰레기 홍수로 즉시 밀어 버린다. 가공할 신자유주의 , 정이다. 세계가 그들의 것이 되어 버렸다. 그것에 비하면 남한의 정은 시작에 불과 하지만 세계적 유태교의 정과 손발이 하나가 되면서 이용되기에 문제다. 이들이 미국 정부를 믿으려 하는 것은 이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이들 종교들의 사슬을 끊고 자유로워 있을까를 계속 연구 것이다. 우리의 아들 들이 부모에게 순종, 외로웠던 자기의 , 군중심리를 증오하기 이전에 그들을 중립적 사랑의 탈을 제도적 악에서 구해 내야 한다. 그리고 개인의 선악 관념을 제도적 악이 만든 사실을 알리고, 중립적이 아닌 종교단체가 정치적이거나 세계화 하려는 부분에 세금을 부과 하든가 제도적으로 금지 하여야 것이다. 이것은 북한 해외 교포의 자립성과 민족을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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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립적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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