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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른 도발"

* 이 글은 해미님의 [술을 빌미로 노동자를 통제하라!?] 에 관련된 글입니다.

후배가 올린 글을 보고, 이전에 썼던 글을 올린다는 것을 까먹었음을 깨닫다. 이목희 의원의 깜찍한(^^) 주장에 대한 반론을 노건연에 있는 * 선생님이 쓰셨는데, 거기에 대해 반론을 제기해옴에 따라 재반론에 나서게 된 것이었다. 원래 글이 좀 길어서 노건연의 전** 동지가 편집을 해서 매일노동뉴스에 보냈었다. 사실 나는 재반론이라는 성격 때문에 가급적 꼬치꼬치, 좀 폼나는 학술 용어도 사용하면서, 그리고 아주 매너있게(!!!) 썼는데.. 나중에 수정된 걸 보니 원래 글에 사족이 너무 많았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원문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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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과 과학 사이

 


 이 의원은 다양한 통계자료를 제시하며 산재와 음주의 관련성, 음주규제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정책 자료집에 인용된 외국 자료에 의하면 전체 산업재해의 25%가 음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국내 현황에 대해서는 간접적인 자료를 통해 추정할 수밖에 없었는데, 주요한 근거가 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제조/건설업종이 산재의 총 66.7%, 산재사망의 50.9%를 차지한다. 그런데, 이 두 업종 노동자들의 스트레스가 월등히 높고, 음주량과 음주빈도가 높다. 둘째, 연간 주류 출하량과 산재 사망자 수 사이에 밀접한 상관관계가 관찰된다.

 

 음주는 작업장에서의 재해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다. 그런데, 위험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것과 실제로 위험을 “증가시켰다”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한다.

 그동안의 통계자료를 살펴보면, 산업재해는 소규모 사업장, 특히 1-49인 규모의 사업장에 집중되었다. 이를테면 2002년에 전체 산재의 71.2%가 50인 미만의 소규모 사업장에서 발생했으며, 사업장 규모에 따른 재해발생의 격차는 점차 벌어지고 있다(표 1 참조).  또한 소규모 사업장 중에서도 건설업이나 운수창고 통신업보다는 제조업에서의 재해율이 두드러졌다(표 2). 이러한 상황을 소규모 사업장의, 특히 제조업 사업장의 해이한 음주 문화 때문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 달리 말하자면, 대규모 사업장, 혹은 소규모 사업장 중에서도 제조업 이외 다른 업종의 사업장들이 소규모 제조업 사업장보다 적극적인 음주규제를 했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를 낳았다고 해석할 수 있을까?

 

참고 표1 . 연도별 규모에 따른 재해자 수 및 재해율 (인권위원회 보고서)
참고 표2 . 연도별 1인에서 49인 규모의 사업장의 재해자 및 재해율(인권위원회 보고서)

또한, 정책자료집에 제시된 그림에 의하면 주류 출하량과 산재 사망자 수는 일정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그림 1). 그러나, 사망자 수가 아닌 사망률을 적용하면, 주류 출하량이 급격히 증가한 98-2001년도에는 사망률이 감소하고 2001년 이후 증가하기 시작한다. 더구나 음주와 관련성이 높을 것으로 짐작되는 사고에 의한 사망률은 더욱 크게 감소하며,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그림 2). 특히 이 기간 중 뇌심혈관 질환과 근골격계 질환이 가장 많이 늘어났는데 전자의 경우 과로, 스트레스 및 노동강도의 증가가 직접적 원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후자는 작업 요인(반복성, 신체부담 자세, 힘, 진동 등)과 장시간 근무 및 노동강도의 증가가 원인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 그림1.  주류 출하량과 산재 사망자와의 상관관계(이목희 의원 정책 자료집)
참고 그림2.  연도별 산재 사망(사고+질병) 만인률 (인권위원회 보고서)

 

결론적으로, 음주가 작업장에서의 사고 위험을 높일 것 같다는 직관은 가능하지만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산업재해의 양상을 설명하는 주요 요인이 음주라는 것을 입증할 과학적 근거는 없다. 이 정책 자료집에서 채택한 분석 방법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은 생태학적 오류라 할 수 있다.  “생태학적 오류”는 집합적 수준의 관계로부터 개인 수준의 관계를 추론할 때 나타나는 오류를 말한다 (신영전 등 『사회역학』2003). 예를 들면, 산재 사망자 수가 증가한 시기 동안 출산률은 급격히 감소했다. 하지만, 출산률 감소가 산재 사망과 관련 있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는 것처럼, 주류 출하량이 늘어났다고 해서 이것을 바로 산재 사망에 연계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문제의 본질

 

 비록 음주가 산업재해 발생에 결정적인 기여는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충분한 개연성은 존재하며 따라서 음주규제 프로그램을 마련하는 것이 노동자 건강에 해로울 이유는 전혀 없다. 산업재해 때문이 아니더라도, 노동자 건강증진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가.
 이 의원은 정책자료집 발간사에서 이러한 정책제안을 하게 된 배경을 밝혔다.  “선진국의 경험에서 알 수 있듯이 하드웨어적인 안전조치는 분명 한계가 있다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산재로부터 작업자를 지켜주는 것은 안전모나 낙하방지물이 아니라 결국 그들 자신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묻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 사회의 노동안전보건 관리가 과연 그 “어느 수준”에 도달했을까?

 “세계화”를 지상과제로 삼았던 김영삼 정부 이래 기업 활동에 관한 각종 규제들이 완화되면서 산업안전보건에 관한 각종 규제들도 함께 철폐되거나 완화되어왔다. 이를테면 97년의 기업규제완화법 개정으로 2년 또는 1년 주기로 시행되던 프레스,리프트에 대한 정기검사가 면제되었고, 30-49인 사업장 중 유해위험업종에 대해서 안전 관리자를 선임토록 한 규정도 철폐되었다. 또한 광범위한 구조조정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급속한 비정규직 확대를 가져왔다. Qulian 등(2000)은 선진국에서 발표된 90여 편 이상의 논문을 검토한 후, 불완전 고용 형태는 전반적인 안전보건의 퇴조와 관련이 있으며, 특히 외주, 구조조정/기구 축소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결론 내렸다. 또한 이러한 구조 조정은 필연적으로 노동 강도의 강화를 야기했으며, 이는 뇌심혈관 질환, 근골격계 질환의 가장 중요한 위험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이제 가능한 안전 조치들이 다 이루어졌고, 노동자 자신의 생활습관만 바꾸면 될 차례인가? 노동 강도와 직무스트레스가 점증하는 현실은 그냥 둔 채, 스트레스 대처기술과 음주 습관을 바꾸는 대증요법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규제 때문에 기업 운영이 어렵다며 정기 검사도, 안전관리자도 없애는 마당에 EAP 도입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선의가 항상 좋은 결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 의원의 노동자들에 대한 애정은 각별해 보인다. “우리사회가 조속히 그들의 위험천만한 관행을 멈추게 하는 사회적 시스템을 만들어 내고 그들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 그들의 고민이 무엇인지 상담하고 진정으로 그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어 하루하루 술을 위안삼아 술독에 빠져 지내는 그들을 도와주고 치료해내야 된다.”
 우리도 노동자들이 좀더 건전한(!) 음주문화를 가짐으로써 자신들의 건강을 지킬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휴식 시간에 운동도 할 수 있으면 좋겠고, 사내 급식을 통해 권장량의 야채와 과일도 충분히 섭취하면 좋겠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들의 작업장이 좀더 안전했으면, 일이 덜 힘들었으면, 스트레스가 더 적었으면, 그리고 특히 안정된 일자리였으면 좋겠다. 
 선의가 항상 좋은 결과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의 건강을 염려하여 제기한 “도발”은 아직 때 이른 것이었고, “몸통”은 놔둔 채 “깃털”만 건드린 꼴이 되고 말았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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