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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의 전통 I C T (Internationalist Communist Tendency)

Revolutionary Communist Tradition : ICT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의 전통  I C T

by 이형로

 

 

 ICT(공산주의 국제주의자 경향)는 1983년 IBRP(혁명당 국제서기국)로 결성되었다가, 2009년 ICT로 이름을 바꾸었고 현재 6개국(영국,이태리,프랑스,독일,미국,캐나다)에 지부를 두고 있다. IBRP는 1983년 이탈리아의 PCint(국제공산주의자당)와 영국의 CWO(공산주의노동자조직)에 의해 결성되었는데, 이것은 PCint의 제안으로 1977년부터 열린 좌익공산주의 국제대회의 과정에서 얻은 결실이었다.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 전통과 PCint

 

프로메테오와 빌랑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는 1928년 팡탱(Pantin)에서 이탈리아공산당(PCI)의 좌익분파가 결성되면서 시작되는데, 이 대회의 목적은 새로운 당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도주의”를 제거함으로써 인터내셔널에 재결합하는 것이었다. 즉 “이태리분파”로서가 아니라 “코민테른의 좌익분파”로서 자신을 규정하는 대회였다. 이들은 프로메테오(Prometeo)와 빌랑((Bilan)을 발행했는데, 프로메테오는 원래 이탈리아공산당 나폴리 지역의 보르디가 분파의 혁명적 잡지였다. 당시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일국사회주의 건설 노선에 반대했던 국제 좌익반대파에 동의했지만, 그것을 주도한 트로츠키와의 강령적 차이1)에 의해 1930년대부터 선을 긋게 되고, 특정경향의 국제적 분파를 거부하며 1933년 제4인터내셔널을 만들려는 트로츠키의 시도에 반대한다.

한편, 벨지움과 프랑스에서는 이런 흐름이 1930년대에 걸쳐 나타나게 되는데, 1933년 브러셀에서 좌익분파의 이론지인 빌랑을 발간한다. 빌랑 주변의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당시의 임무들을 정확히 정의했는데, 첫째, 전쟁에 직면해서, 국제주의의 기본적인 원칙들을 배신하지 않을 것, 둘째, 러시아 혁명의 실패의 대차 대조표를 작성할 것, 그리고 미래의 계급투쟁 부활시 나타나게 될 새로운 당들에게 이론적인 기초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교훈들을 이끌어낼 것 이었다. 스페인 내전은 당시 혁명가들에게 혹독한 시험대였고, 많은 혁명가들이 반파시즘의 나팔소리에 사로잡혀, 그 전쟁이 제국주의적이며 다가올 세계전쟁의 예행연습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빌랑은 이에 흔들리지 않고 1차대전시에 레닌이 양쪽진영 모두를 비판했듯이, 파시스트들과 부르주아의 공화파들 양자 모두에 대항하는 계급투쟁을 호소했다. 이러한 비타협적 투쟁과 미래의 프롤레타리아 당을 위한 강령적 기초를 세우는 임무를 가장 충실히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파시스트와 공산당의 2중 탄압 속에 고립될 수밖에 없었고, 1943년 전쟁의 시기에 다시 부활하게 된다.

 

 

전쟁중에 창설 된 PCint

 

전쟁 시기 감옥이나 가택연금 상태 속에서도 데이먼(Onorato Damen) 주변의 핵심활동가들은 2년 동안 비밀리에 파시스트 하에 생존하면서 1945년 PCInt를 창설한다. PCInt는 2차 제국주의 학살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던 이탈리아 좌파의 많은 멤버들이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오고, 전후 계급투쟁의 파고 속에서 금 새 수천 명의 당원을 얻게 된다.

이때 망명중인 프랑스 동지들의 대부분이 돌아왔지만,  ICC의 창설자인 Marc Chirik 주변의 프랑스 좌익공산주의자들은 1944년 파리에서 별도의 분파인 GCF를 창설한다. GCF 또한 강령적 기반은 빌랑과 좌익분파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었다. 이들은 PCInt의 창설에 대해 반혁명의 시기에 당을 건설한다는 것과, 당의 성격이 모호하다는 비판을 하면서 당 참여를 거부했는데, 많이 알려지지 않은 실제 이유 중의 하나는 새로운 세계대전이 임박했다고 판단하여 당을 건설하는 것이 시기상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공산당의 주류였던 보르디가는, 스탈린주의를 이탈리아 공산당에 이식한 그람시에 의해 축출된 이래 파시스트 시절과 전쟁기간 동안 집에만 머물러 있었고, 당의 출판물 발행에만 협조를 했을 뿐 결코 당에는 가입하지 않았었다. 단지 1945년 전쟁의 끝 무렵에 이탈리아 남부로부터 보르디가 주위에 모여 있던 수많은 동지들이 당에 가입했을 뿐이다. 1948년 선거 참여를 두고 ‘혁명적 의회주의’에 대한 견해 차이로 데이먼 그룹과 보르디가 그룹은 대립하기 시작했는데, 이후 소련 제국주의의 특징, 공산당의 성격, 노조개입, 당과 계급의 문제 등에서 대립하게 되고, 데이먼 그룹이 다수의 지지를 얻는다. 하지만 1949년 이후 보르디가의 노골적인 개입은 당내 반대 블록을 형성하는데 성공했고 결국, 3년 후에 또 하나의 국제공산주의자당을 분리시키는데 성공한다. 보르디가는 1952년 자신의 조직을 설립2)하고 Il Programma Comunista를 발간한다.

1930~40년대 반혁명과 전쟁의 암흑 속에서도 진정한 이탈리아의 좌익분파들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본질과 공산주의 운동의 전망을 세우는데 공헌했고, 그곳에서 살아남은 PCInt는 단지 양적으로만 성장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국제적인 혁명적 공산주의 운동의 흐름으로 자리 잡게 된다. 트로츠키의 반스탈린주의 대오에 가려지고, 1921년 좌익에 의해 세워진 이탈리아 공산당(PCI)과 그 주류인 보르디가의 명성에 축소되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없었던 PCInt야 말로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로부터 직접 탄생했으며, 자본주의와의 피할 수 없는 결전의 과정을 비타협적 투쟁과 혁명적 전통을 지키면서 이어오고 있다.      

 

 

좌익공산주의 국제대회와 국제서기국(IBRP)의 건설

 

 

고립을 넘어 국제대회로

 

좌익공산주의자들은 19세기말부터 기회주의에 대항해 투쟁해 온 제2인터내셔널의 좌익분파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당시부터 그 투쟁이 분산된 형태로 이루어져왔다. 이러한 좌익공산주의 세력의 분산은 코민테른과 반혁명기를 거쳐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는데, 68년의 파업투쟁과 함께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역사의 무대에 부활하면서, 수많은 그룹들로부터 새로운 사회에 대한 문제제기가 시작된다. 그 중에서도 유일하게 혁명적 일관성을 추구한 좌익공산주의의 전통이 새롭게 조명되었는데, 옛 GCF(프랑스 좌익공산주의 분파)의 공산주의자들은 이탈리아 좌익분파의 옛 그룹들을 고무시켰고, 1975년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6개 그룹이 ICC를 창설한다.

한편, PCInt도 이탈리아에서의 고립으로부터 벗어나 세계의 여러 좌익공산주의 그룹들에게 국제회의를 제안한다. 1차대회는 1977년 밀란에서 열렸는데 이는 단순히“좌익공산주의 세력의 국제 연결망”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 세계 공산주의 혁명운동의 분산을 극복하고 집중화와 재구성을 위한 PCInt의 노력이었다. 대회에서는 1936년 그들의 국제대회에서 채택한 정치조직의 계급적 성격을 판단하는 기준을 토론했다. 2차대회는 6개 조직의 참여와 3개 조직의 동의 속에서 1978년 파리에서 열렸는데, 대회 주제는 자본주의 위기와 자본주의 사멸의 경제적 기초, 당의 역할이었고, 보르디가주의 전통의 많은 그룹에게 걸림돌이었던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3차대회는 1980년 파리에서 있었는데 자본주의의 위기상황과 제국주의 전쟁에 대한 전면적 반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노동자정당과 노조의 영향의 제거를 합의했다. 하지만 당에 대한 논쟁은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대회가 끝나갈 무렵, PCInt와 CWO는“혁명적 계급운동과 혁명적 권력의 전체 지도력이 필수불가결한 조직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당”이라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는데, 이것은 '평의회주의'에 대한 정확한 반대였다. 즉 당 문제에 대한 ICC의 명료하지 못한 입장과 혁명당 건설에 관심이 있는 세력들과 함께 하려는 PCInt의 의도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제4차대회는 1982년 런던에서 열렸고, CWO는 2차대회에서 4차대회까지 참석하면서 PCInt와의 토론을 통해 IBRP(혁명당국제서기국)를 결성하는 계기를 만든다.

 

 

독일과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의 만남, 그리고 혁명당 국제서기국의 건설

 

좌익공산주의 국제대회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서기국의 결성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CWO(공산주의노동자조직)는 1975년 영국에서 만들었고, 륄레, 호르터, 판네쿡 등의 독일 좌익공산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KAPD(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를 계승하여 CWO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을‘공산주의노동자조직’이라는 조직이름이 증명해준다. CWO는 독일 좌익공산주의의 전통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앞서 말한 3차례의 국제대회를 거치면서 PCInt로부터 자신들의 강령에 대한 비판을 받게 된다. 그것은 CWO가 독일 좌익공산주의에 기원을 둔 평의회주의에 강한 영향을 받아서, 프롤레타리아혁명에서 당의 중요한 역할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미래의 단일조직을 위한 길을 열어놓기 위해 CWO는 아주 기나긴 토론의 과정을 거쳐 이 비판에 대해 점진적인 수용을 하게 된다.

1984년에 작성된 IBRP의 강령은 다른 나라의 혁명적공산주의 그룹들이 결합하는데 기본적으로 인정할만한 원칙적인 내용으로 작성되었고, IBRP의 입장을 다른 지역에 이식하기 위한 PCInt나 CWO의 복제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른 그룹들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준역할을 하고자 했다.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화될 때 이러한 그룹들이 지역의 조건들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영역에서 노동자계급의 투쟁 속에서 뿌리를 내리고 생겨나기를 기대한 것이다. 서기국에는 1984년 이후 프랑스와 독일, 미국, 캐나다와 남미의 그룹들이 가입하게 되고, ICC와 함께 현재 최대의 국제적인 좌익공산주의 조직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ICT의 정치입장

 

ICT의 정치입장은 강령에 잘 나타나 있고, 웹사이트(http://www.leftcom.org/ko)에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당 문제에 관련된 주장을 몇 가지 소개하겠다.

먼저 ICT의 정치적 입장은 기본적으로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 전통에 기반 하는데, 이는 독일 좌익공산주의 전통에 기반 한 다른 조직들과 차이점으로 나타난다. 특히 ICT는 이탈리아 좌익의 주류였던 보르디가주의를 극복하고 독자적 좌익분파를 형성한 데이먼주의를 전통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당 문제 등에 있어서 레닌주의와 보르디가주의 모두를 극복했다고 하는 데이먼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경제이론은 폴 매틱의 이론을 일부 수용하고 있다. 정치적 입장에 대한 이런 점들이 ICT를 좌익공산주의 경향 내에서의 레닌주의 경향으로 보이게도 한다. 물론 ICT의 다른 한축인 CWO는 출발이 독일 좌익공산주의 전통이었기 때문에, 양쪽의 장점을 모두 받아들인 것도 사실이다. 특히 좌익공산주의 그룹 중 유일하게 노조문제에 대해 그것의 자본주의적 본질과 자본의 기구화를 인정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노조를 이용(노조자체의 이용이나 노조개조·장악은 반대함)하여 광범위하게 노동자계급을 만나고 그들 안에서 공산주의 그룹을 만들 것을 주장한다.

 

 

당 문제에 대하여

 

첫째, 데이먼은 당은 계급이 아니라 계급의 가장 의식적인 부분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독재는 노동자계급의 평의회나 소비에트를 통해서만 전체 계급을 위해 실현될 수 있기 때문에, 당이 더 이상 그것을 지배할 권리를 갖지 않는다고 했다. 왜냐하면 당은 이미 공산주의의 필요성을 깨달은 가장 의식적인 노동자계급을 재구성하는 계급의 안내자이기 때문에, 당이 권력을 갖는 것이 아니라 단지 평의회 안에서 공산주의 강령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했다. 반면 보르디가는 당이 곧 계급이기 때문에, 당과 계급사이에 구분이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혁명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한 계급에 대해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이것은 계급의식의 조건과 관계없이 공산주의 사상을 외부로부터 계급내부로 들여올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며, 당이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의미 했다.

둘째, 당 조직에 대해 데이먼은 혁명가 조직의 기본원리는 민주집중제 라고 주장했다. 즉, 하부모임에서 상부모임을 선출하고 상부모임은 다수의 구성원에 의해 거부될 때까지 모든 구성원들을 강제해내는 방법으로 이끄는 방식을 주장했다. 반면 보르디가는 이 민주집중제를 "민주주의 제도"일 뿐이라고 비난하면서, 오직 공산주의 강령에 대한 충성만이 혁명가 조직의 성격을 규정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불변의 공산주의 강령이 1848년 이후 여전히 바뀌지 않았음을 의미했고, 노동자계급이 러시아혁명의 경험에서 배웠던 것들이 강령에 포함되지 않았음을 보여준 것이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이 처음에 공산주의강령을 공표했던 국제공산주의자당을 새롭게 건설하기 위해 떠났던 1951년까지 이 논쟁은 3년 가까이 계속되었었다. 그 후 보르디가주의자들은 몇 차례 분리되었고, 오직 자신들만이 진정한 프롤레타리아트당이라고 주장하는 4개의 서로 다른 보르디가주의 그룹들이 현재까지 존재한다.

셋째, 당과 계급의식에 대해 ICT는, 계급의식은 쉽게 깨지고 일시적이며 결국 소멸해버리기 때문에, 계급의식은 노동자계급의 모든 이론적인 성과들을 압축시키는 강령을 가진 조직(혁명정당)의 물질적 토대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때 당은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조직적으로 함께 해야만 유지될 수 있고,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 위해 모든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에 복무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당이 없다면 혁명은 불가능하다면서, 노동자계급의 역사는 계급을 지도하고 이끌어가는 역할을 하는 의식적인 당이 있어야 혁명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판네쿡도 혁명에 있어서 노동자계급이 단지 두개의 무기만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것은 계급의식과 그들의 조직(당)이다. 물론 판네쿡과 그 후예들이 스탈린주의 반혁명의 중압 아래서 조직문제에 대한 한 가지 관점인 당을 버렸지만, 공산주의 혁명의 최후의 승리에 있어 당은 평의회만큼 필수적인 것이라 했다.

마지막으로 ICT는, 러시아에서 소비에트가 몰락하고 볼셰비키당이 권력을 장악한 것은 문제였지만, 러시아혁명의 실패가 볼셰비키당 때문이었다는 주장에는 반대한다. 비록 당이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을 지라도, 당이 평의회와 함께 혁명의 필수적인 도구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고, 단지 당이 프롤레타리아트와 조직적으로 함께 하지 않았을 때 반드시 실패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고 주장한다. ICT의 관점에서는 혁명이 진행되고 있을 때 당과 계급 그리고 평의회 사이의 간격은 매우 좁혀져서 구분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며, 여기서의 계급의식은 당과 혁명 강령에 가까워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과 함께 가야할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이 러시아에서는 "내전"(실제로 러시아 땅에서 벌인 국제 자본주의의 신흥 소비에트국가에 대한 전쟁)이라 불리는 동안에 급감한다. 전쟁으로 인한 견딜 수 없는 경제적 곤궁과 시골로의 많은 프롤레타리아들의 탈출은 평의회를 약화시켰고, 1921년 3월 권력의 실제중심에서 그들은 소멸에 이르게 된다. 이 때 볼셰비키당은 전체 노동자계급의 역할을 하는 일에 착수하지는 않았지만, 국제 자본주의에 대항한 세계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중단된 상태에서, 특히 독일혁명의 실패로 인한 고립 속에서 독자적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실제 상황이자 결과였으며, 그 속에서 볼셰비키는 수많은 오류를 범했고, 결국 반혁명의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만약 세계혁명이 그들을 도와줬다면 그들은 그 반대의 상황을 만들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계혁명당 건설을 위하여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 참담한 결과 속에서 함께 살고 있으며, 그중 하나는 수많은 사회주의자들과 전투적 노동자들이 역사를 왜곡하고 계급을 배신한 세력들의 그늘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혁명의 실패를 가장 최초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반혁명의 암흑 속에서도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며 원칙을 지켜왔던, 이탈리아 좌익공산주의의 전통에서 미래의 혁명을 전망하는 것은 오늘날 혁명가들의 기본임무가 되었다.

그곳에서 직접 탄생하고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ICT는, 자본주의 최대의 위기상황에 직면하여 세계적인 계급투쟁과 세계혁명당을 위한 진전된 행보와 새로운 공헌을 위해 혁명적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혁명적 계급투쟁의 전면에 나서고 있다. 이 시기에 전 세계에 걸쳐 성장해나가는 전투적 노동자계급과 새로운 혁명가들이 좌익공산주의자들과 만나 소통하고 서로 논쟁하면서, 궁극적으로 하나의 대오로 모여 혁명적 공산주의 진영을 공고히 한다면, 세계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세계혁명의 전망을 만나게 해주는 가교역할을 할 것이며, 세계혁명당의 건설에 스스로 공헌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이제 서야 혁명정당을 향한 발걸음을 힘겹게 시작하고 있다. 하지만 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은 아직까지 어느 곳에서도 혁명적 전통을 접하지 못한 채, 심지어 왜곡된 써클주의 운동의 구조 속에서 반혁명적 변종 사상들에 상시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이렇게 척박한 환경에서 자라나고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스스로 노동자계급 속에 뿌리내리고 있는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이야 말로, ICT와 같은 좌익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세계혁명당을 건설하는 씨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 프로메테오는 첫째, 스페인 문제와 민주적 슬로건에 대해 트로츠키가 「스페인 혁명과 공산주의자의 임무」에 “공화국 슬로건은 자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슬로건”이라고 한 것에 대해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트로츠키가 코민테른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체제를 포기했다고 비판하고 제국주의 시대에는 전쟁 아니면 혁명이라는 하나의 구호 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둘째, 독일 문제와 통일전선에 대해 1931년 트로츠키가 독일공산당과 독일사민당의 통일선선을 주장한 것에 대해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중도주의 혁명”은 이루어질 수 없다고 비판한다.

셋째, 분파와 당 문제에 대해 1931-32년에 러시아 국가에 모든 공산당들이 복속한 것에 대해 이탈리아 좌익분파는 모든 나라의 좌익분파의 실질적 발전이 당이며 혁명적 상황에서만 존재할 인터내셔널의 인위적 구성이 당이 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2) 보르디가주의자들은 그 후에 경직된 분파주의를 위한 이론적 정당화를 하면서 스스로를 지구상의 가장 유일한 프롤레타리아트당으로 간주했다. 이러한 분파주의는 분명히 반혁명의 대가중의 하나였다. 한편으로는 어렵게 성취한 정치적 입장 주위에 불변하는 공식의 벽을 쌓음으로써 적대적 환경 속에서 원칙을 고수하는 시도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으로부터 고립되고 소그룹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혁명가들을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진정한 요구로부터 분리시킨 써클 정신을 강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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