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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리프크네히트를 추모하며
야만의 자본주의에 살해당한 노동자 투사들을 추모하며
1919년 1월 15일, 두 명의 프롤레타리아 지도자,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향년 47세로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구스타프 노스케(Gustav Noske)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1918년 11월, 독일 부르주아지는 노동자평의회를 해체하고 노동자와 병사의 투쟁을 피로 물든 진흙발로 짓밟았다. 1918년 12월,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구성원들이 독일 코뮤니스트당을 창설했다. 블러드하운드(집요한 추적자)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노동자 탄압 시기, 유럽 심장부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를 살해했다. 룩셈부르크는 적기(Red Flag) 신문사 사무실에 있었는데,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결국 동지들에 의해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범죄자들이 군중들을 설득하여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가두고 베를린 벽보에 포스터에 그들을 죽이라고 요구했다. 벽보의 주제는 명백했다:
“평화, 일자리, 빵을 원한다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를 죽여라.”
결국, 그들의 은신처는 발각되었다. 1919년 1월 15일 밤, 베를린 부유한 빌머스도르프(Wilmeersdorfin) 거리의 무장한 부르주아 자경단 위원회 구성원 5명은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를 납치했다. 범죄자들은 인질을 경찰에 넘기지 않고, 기병 수비대 소총 사단이 최근 새 본부로 삼은 호화스러운 에덴 호텔(Eden Hotel)로 데려갔다. 범죄자들은 그들을 극도로 두려워했다. 재판이 열릴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자들은 참혹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범죄자들은 리프크네히트가 도망치려는 와중에 총에 맞았다고 했으나, 구타당한 뒤 총살되었다. 그들은 룩셈부르크 또한 총으로 구타하고 머리에 총을 쏜 다음 수로에 시체를 버렸다. 부르주아 언론은 리프크네히트가 도주하던 중 총에 맞아 숨졌으며, 룩셈부르크는 폭도 중 한명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썼다. 노스케(Noske)는 프롤레타리아트 지도자 암살에 연루된 공무원들의 무죄방면에 사적으로 사인했다. 기병대 사단의 우두머리로 살해를 명령한 발데마르 파브스트(Waldemar Pabst)는 후에 나치 정권, 독일연방공화국에 봉사했다. 몇 년 후, 그는 자신이 저지른 독일혁명을 억압한 일의 중요성을 이야기했으며,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구원했다고 이야기했다.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 칼 리프크네히트와 같은 혁명가의 암살은 노동 운동과 세계 혁명의 진전에 회복할 수 없는 일격을 가했다. 독일혁명은 선구자들과 사상가들을 잃었다. 불행히도, 그 결과는 무척 중대했고, 고통스러웠다. 한 편에서는 독일 부르주아지가 러시아혁명의 경험에서 배운 것들을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 써먹었다. 다른 한 편에서 독일 코뮤니스트들은 사회민주주의 사체로부터 탯줄을 끊는데 벌벌 떨었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 정당 건설을 연기했다. 이는 모두 독일혁명 패배로 길을 닦는 것이었다. 이 패배는, 또한 세계 혁명의 패배로 길을 열었다.
*** *** ***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는 위대한 이론가가 아니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달리 그의 이름과 영원히 연결될만한 ‘주장 글’이나 정치 경제에 관한 주요 ‘논문’을 그는 쓰지 않았다.(심지어 노동가치설에 대해 의심하기까지 했다.)(1) 그는 능숙한 정치가도 아니었다. 전쟁 전에는 맑스의 동료이자 독일사회민주당(SPD) 공동창립자의 아들로 유명했는데(2) 전쟁 후 그는 사회민주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를 매우 꺼렸다.
그러나 리프크네히트는 원칙적인 사람이었다. 유명한 자유주의 역사학자 세바스찬 하프너(Sebastian Haffner)는 그를 "독일이 배출한 가장 용감한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묘사했다. 그는 자신이 어느 날 갑작스러운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증명했으며, 그중 일부는 다음의 단편에서 읽을 수 있다. 리프크네히트는 1918년 4월에 루카우(Luckau) 감옥에서 이 글을 썼다. 때로는 장황하고 급하게 쓰기도 했지만, 내부와 외부 변증법, 주제와 대상, 의식과 조건 같은 중요한 주제를 다뤘다. 따라서 그것은 오늘날에도 관련이 있다.
리프크네히트가 여기서 확인하기를 바라는 것은 트로츠키가 몇 년 후 "적절한 순간"으로, 특히 실패한 독일 혁명과 관련하여, 1917년 10월의 교훈을 되새기며 이론화하려고 시도한 것이다.(3) 게오르크 루카치(Georg Lukács)는 이 문제를 아우겐블릭(Augenblick : 순간) 이라는 다소 철학적인 용어로 표현했다. 즉, 계급의식이 있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객관적인 사건 과정에 주관적으로 개입하여 자본주의를 총체적으로 교란할 수 있는 순간 또는 눈 깜박할 사이로 표현했다. 종종 이것은 조건의 "성숙"으로 논의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는 거의 엉망진창으로 죽었다.”고 폴 매틱은 나중에 회상했다. 사실, 그들의 마지막 글에는 이미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것처럼, 불길한 예감이 감돌고 있었다. 오늘날, 스파르타쿠스 반란을 진압하고 지도자들을 살해한 지 100년이 지난 지금, 이 살해당한 혁명가들이 남긴 작품을 다시 읽어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019년 3월
월트 아워(Walt Auerbach)
<주>
(1)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1922년 사후에 출판된 그의 「맑스의 비판의 주요 특징(Grundzüge einer Marxkritik)」을 참조 바란다.
(2) 빌헬름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와 룩셈부르크는 때때로 리프크네히트가 당에서 "태어났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 1914년 8월 이전에 그는 독일사회민주당(SPD)의 청소년 부문을 보강하기 위해 대부분의 노력을 기울였다. 전쟁 채권에 반대표를 던지기로 한 그의 결정은 그를 반대파의 유일한 주창자로 만들었고, 결국 1915년에 재판을 받고 1918년 11월까지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3) 어쨌든, 이것은 보르디가가 가장 좋아하는 트로츠키 팸플릿이었다. (「테러리즘과 코뮤니즘」을 제외하고) “적절한 순간을 잃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반란에 가장 유리한 조건은 분명히 힘의 관계에서 우리에게 유리한 최대 변화가 일어났을 때이다. 우리는 물론 의식 영역에서의 힘의 관계, 즉 정치적 상부 구조의 영역에서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으며, 혁명적인 시대 전체에 걸쳐 다소 변하지 않은 것으로 가정 할 수 있는 경제 토대의 영역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와 같은 경제 토대에서, 사회의 계급 분열과 함께, 힘의 관계는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분위기에 따라 변하는데, 그들의 환상이 깨지고 정치적 경험이 커지는 정도, 국가 권력에서 중간 계급과 집단의 신뢰가 깨지는 정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후자가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잃는 정도에 따라 변화한다. 혁명 기간 이러한 모든 과정은 아주 빠른 속도로 진행된다. 모든 전술상의 기술은 이것으로 이루어진다. : 여러 사정이 우리에게 가장 유리한 순간을 포착하는 것" 레온 트로츠키. 「10월의 교훈」. 나오미 알렌(Naomi Allen) 번역. 「좌익반대파의 도전, 1923-1925」. (Pathfinder Press, New York, NY : 1975). 232쪽
사회주의 외교 정책
국제 사회주의는, 그 사회주의적이고 국제주의적인 특성 때문에(다시 말해서 사회주의이면서 국제주의이므로), 내부 정치와 외부 정치 사이의 모순을 전혀 알 수도 없고, 용인하지도 않는다. 국제 사회주의의 내부 정치와 외부 정치의 동질성과 연속성은 다른 부가적인 조건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것을 위한 선결 조건이다. 내부와 외부 양쪽에서 국제 사회주의는 아주 동일한 사회주의적, 국제주의적, 혁명적 정신을 요구한다.
사회주의 정치의 과업은, 계급의식을 지닌 프롤레타리아트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다음과 같다. 프롤레타리아 계급 운동의 도움을 받아서, 사회주의 체제의 방향으로 사회 발전을 촉진하는 것, 등등. 시민 기동대를 통하여 사태가 급변하는(peripety)(1) 순간에 이 운동은 아주 좁은 의미에서 사회 혁명의 특성을 띤다. 하지만 사회 혁명은 인류의 결정적인 부분이 무르익어 사회주의 체제에 적합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런데 이 무르익어 원숙해진다는 말은 자본주의 체제가 너무 익어 썩어간다는 것, 다시 말해 자본주의가 사회 발전과 관련한 자신의 과업을 완수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간혹 피상적인 도식이 상정하듯이, 사회 혁명에 필요한 전제 조건이 더 빨리 출현하도록 만들기 위하여, 사회주의 정치가 자본주의적 발전을 촉진해야만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가?
[혁명을 위한] 사회의 무르익음은 절대적인 척도가 아니라 상대적인 것으로, 경제적·기술적 측면에서조차 그러하다. 사회가 사회주의 체제에 적합할 정도로 무르익었는지 아닌지는 그것의 경제적 발전 정도에 달려있을 뿐 아니라, 가장 넓은 의미에서 그것의 전반적인 사회적 발전에도 달려있다. 무엇보다도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 통찰력, 의지, 그리고 적극적인 결단력이 [발전한] 정도에 달려있다. 다시 말해서 노동 대중의 정신적, 도덕적, 심리적 수준에 달렸다.
이 심리적 요소가 저 맑고 푸른 하늘에서 임의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중 각각의 생활 여건 전체의 결과로 생기는 것인 한, 그것의 척도는 초인적인 힘이나 초사회적인 힘에 의해 거의 결정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심리적 재능도 어떤 한도 안에서 자기 운동을 할 수 있는 능력, 즉 이러한 한도 안에서 체계적인 행동을 통하여 타고난 재능을 증대시킬 능력을 포함한다. 이것은 개인뿐 아니라 사회에도 적용된다. 교육을 비교해보라.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이러한 능력이 존재하는 한, 그들이 객관적으로 조건 지워지거나 결정될지라도, 인간이 어떤 한도 안에서 그 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 다양한 인간 집단이 자신들이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조사하고 해결하고 행동할 자유가 사회 심리의 관점에서는 가상의 것으로 보이는 것처럼, 개인 심리의 관점에서는 개인의 자유의지 관념도 그렇게 보일 것이다. 인간의 심리적·정신적 특성을 가장 넓은 의미에서 고려할 때, 인간 정신이 지닌 힘의 효과는 개인들과 집단들이 함께 일하고, 서로 대응하고, 상호 작용하면서 객관적으로 서로 뒤엉켜 있다는 것(그들이 서로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자기기만―전체적인 사회 심리와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물질적인 사회적 활동은 이 안에서 완전히 표현된다―이 넘쳐나는 이 대단히 복잡한 과정에서는, 누구나 그들이 스스로 그리고 다른 사람과 관계 속에서 갖출 수 있는 모든 물리력과 추진력을 가지고 행동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사회 전체를 위하여 객관적으로 요구되고 결정된 삶의 과정을 실현하는 데에 자신들의 몫을 기여하게 될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의 가능성을 앞당기기 위하여, 그 심리적 요소를 북돋우는 일은 사회주의 정치의 명확한 임무, 즉 혁명적 과업이다. 이 과업을 수행함으로써, 사회주의 정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특히 정치적·경제적 조건에서, 사회주의 사회의 싹과 조건을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조건을 창조하는 데 기여한다. 그러므로 변증법적으로, 그것은 사회의 무르익는 시점을 가능한 한 가깝게 끌어당기는 효과를 지닌다.
종종 자본주의에 대하여, 그것이 승리하면 할수록 그것은 점점 더 자신의 무덤을 파는 처지가 된다고들 이야기한다. 이 “파국 이론”의 핵심이 올바른 것은 오직 그에 대한 반작용이 그것과 동일한 비율로뿐만 아니라 훨씬 더 높은 비율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파울 렌쉬(Paul Lensch)에 따르면, 그러한 반작용은 자본주의 승리를 옹호하지도 그것의 떠들썩한 부산물도 옹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작용은 우리의 임무, 다시 말해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이다.
자본주의의 전개(자본주의적 본질 안에서)와 관련한 문제에서, 사회주의 정치는 전적으로 비판적이다. 하지만 이 비판은 또한 그것이 [이 전개를] 여전히 제어하고 있는 재능을 개척하고 육성한다는 점에서 창조적인데, 사회주의 운동은 그 재능을 사회주의 운동 발전의 잠재적 요소로써 이용할 수 있다.
사회주의 외교 정책은 단순히 그 내부 정치를 국경―사회주의적 관점에서 이것은 우연적이다―을 넘어서 확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사회 원리보다 더, 그것은 이념과 실천 양쪽 모두에서 사회주의의 내부 정치와 동일하다. 사회주의의 내부 정치뿐 아니라 외부 정치도 똑같이 국제적인 사회적 모순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는 국제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이익을 표현하는바, 여기서 각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는 고립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국제적인 계급투쟁의 맥락에서, 모든 국가에서 일어나는 계급들 사이의 다툼은 의존적인 하위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그것들이 단지, 본질적으로 국제적인 사회주의 원칙을 (계급 적대가 계급투쟁―개별 국가의 내부에서 특별하게 나타나거나 국가의 국경을 넘어 전체적으로 나타난다―의 구체적인 조건에서, 지역적으로든 전반적으로든, 세부적이고 총체적으로 나타나는) 구체적인 형태에 특별하게 적용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국가의 관점보다 국제적 관점이 우위에 있다는 점에서, 원칙상 내부 정치보다 외부 정치가 우위에 있다는 사실이 뒤따른다. 따라서 사회주의의 내부 정치는 외부 정치의 특별한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제국주의가 말해주는 것은, 비록 반대의 의미에서이지만,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에도 적용된다. “내적 승리와 외적 승리는 서로를 필요로 한다.”
사회주의 외교 정책의 목표는 그 수단이 그래야 하는 것처럼 사회주의적이어야 한다. 사회주의는 사회주의 체제의 방향으로 사회 발전을 촉진하려고 하는데, 그것은 [범위에서] 국제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발전을 촉진하는 일은 사회적으로 적합한 모든 재능―노동 계급의 사회주의적 재능은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 위에서도 여전히 자본주의에 대립한다―을 통해서 발생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자본주의 자체의 발전하는 힘의 영향을 통해서도 발생한다. 사회주의적 변형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자본주의 지역들의 무르익음을 가능한 한 동시에 확보하기 위하여, 사회주의 운동이 (그와 대립하는 제국주의적 힘의 세기와 그것의 반사회주의적 위험 정도에 반발하는) 힘의 유형과 에너지를 측정하는 한에서는 말이다. 사회주의 외교 정책의 방식은 혁명적 계급투쟁의 다양한 형태와 방법이다.
계급투쟁 외부에 있을 수 있는 사회주의 외교 정책의 사회주의적 도구가 존재하는데, 그것은 내부 정책의 하나일 뿐이다.
1918년 4월
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주>
(1) Peripeteia 또는 peripety는 운명의 급변(사태의 격변)을 말하며, 문학에서 자주 사용하는 기교이다.
1920년 10월
부끄럽다. 나는 아직껏 당파를 취하지 않고 있다. 아무 당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내가 비겁하기 때문이다. 본래 나는 혁명론자가 아니라 발전론자다. 그런데 사람들이 나를 프롤레타리아와 혁명의 예술가로 간주하고 칭송하면서 내게 그런 일들을 떠맡겨버렸기 때문에 나는 이런 일들을 계속하기가 꺼려진다.
한때는 혁명론자였다. 어린 시절과 소녀 시절에는 혁명과 바리케이드를 꿈꾸었었다. 지금 내가 젊다면 틀림없이 코뮤니스트였을 텐데. 아직도 그 꿈이 완전히 사그라든 것은 아니지만 내 나이가 벌써 50대다. 그리고 전쟁을 겪었고 페터(1차 대전 때 전사한 둘째 아들)와 마찬가지로 수천의 젊은이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다. 세상에 퍼져 있는 증오에 이제는 몸서리가 난다. 사람들이 살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사회주의 사회가 어서 왔으면 좋겠다.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즉, 모든 악마적인 것들에 이제는 질려버렸다. 이 지구상에 세워질 코뮤니즘 사회는 신의 작품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 입장은 소심하기 짝이 없고 마음속으로도 늘 회의한다. 나는 평화주의자임을 한 번도 고백하지 못한 채 그 주변에서 동요하고 있다. 어쩌다가 사람들이 페테르스부르크 거리에 전시된 내 작품을 보고서 나를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다. 젊은 노동자들이 만나자고 하는 것도 거절하기 일쑤다. 그들이 내가 확고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제발 사람들이 나를 좀 조용히 내버려 두었으면 한다. 사람들은 나 같은 예술가가 이 복잡하게 얽힌 상황 속에서 똑바로 제 갈 길을 찾아가길 기대하기는 힘들 것이다.
나는 예술가로서 이 모든 것들을 감각하고 감동을 하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리프크네히트의 정치 노선을 추종하지는 않지만, 리프크네히트를 애도하는 노동자들을 묘사하고 또 그 그림을 노동자들에게 증정할 권리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1920년 10월
케테 콜비츠(Käthe Kollw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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