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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위기전가에 맞선 세계 노동자 투쟁, 방어에서 공세로 !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0/10/13 11:31
  • 수정일
    2010/10/13 11:31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자본의 위기전가에 맞선 세계 노동자 투쟁, 방어에서 공세로 !

                                                                                                                                     by 이형로


 

 

 2010년 자본의 위기전가에 맞선 세계 노동자들의 투쟁은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저개발 국가들에서 시작하여 아프리카,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 가고 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는 온 세계로 확산되었다. 최근 위기는 단지 일시적인 ‘경기후퇴’나 침체가 아니라 세계자본주의가 매우 깊숙한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각국 자본가와 그 정부들은 잔인한 긴축? 내핍정책과 해고와 임금삭감, 사회서비스 축소 등으로 노동자와 프롤레타리아가 대가를 치르도록 강요하고 있다. 세계 노동자들은 ‘더는 뺏길 수 없다’며 강한 연대감 아래서 자본가와 정부들의 공격에 맞서 투쟁을 확산시켜나가고 있다. 투쟁이 일어나는 수많은 곳에서 경찰과 자본이 개입하여 극단적인 폭력과 잔인한 진압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맞선 노동자들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투쟁을 확산시키면서 강력하게 이어나갔다.

 

 

중국에서 시작된 노동자 투쟁,  동아시아 노동자의 비타협적 투쟁으로 확산되다 !

 

 초국적 자본의 고강도 노동착취와 열악한 노동조건에 처해 있는 중국 노동자들의 최저임금투쟁은, 중국 남부 대만 업체 팍스콘 선전(深玔)공장 노동자들의 연쇄 자살 사건을 계기로 시작되어, 올 상반기 내내 중국전역을 흔들어 놓았다. 국가(기구)노조를 넘어설 수밖에 없었던 노동자들의 절박한 투쟁은 회사, 경찰, 노조의 3중 공격에 맞서 목숨을 건 투쟁으로 이어졌고, 남부 전 지역으로 확산, 급기야 자본과 지방정부에 대한 저항으로 상승하였다. 결국 이 물결은 6개월 동안 전국 31개 성-시-자치구 중 27곳이 최저임금을 올리게 만들었다.

 

 중국남부에서 시작된 투쟁의 물결은 주변 동아시아 노동자들의 비타협적 투쟁으로 확산되었다. 방글라데시의 섬유노동자 5만 여명은 지난 6월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공장 50여 곳을 점거하고 시위를 벌였다. 경찰의 폭력진압에 맞서 수백 명의 부상자가 속출한 가운데도 물러서지 않고 모든 시내를 전투장으로 만들 정도로 강력히 저항한 끝에, 정부로부터 최저임금 2배 인상의 약속을 받아냈다. 이것은 파키스탄, 캄보디아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이어졌다.

 

 베트남에서는 지난 6개월간 총 300회가 넘는 비공인파업을 벌일 정도로 직접행동이 증가했으며, “투쟁해야 얻어낼 수 있다”는 투쟁의식이 확산되어가고 있다. 인도에서는 7월의 전국적 총파업에 이어, 최근 9월7일에도 전국적인 연대 파업을 벌였으며, 몇 개 주의 도시 기능을 마비시킬 정도로 투쟁의 강도가 높아지고 있다.

 이 모든 비타협적 투쟁에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어떠한 탄압과 회유가 있더라도 굴복하지 않고, 처음 세운 투쟁의 목표를 쟁취할 때까지 계속 아래로부터 밀어붙인 결과 승리를 얻어냈다는 사실이다. 노조가 파업을 이끈 것이 아니라 노동자가 노조를 밀어붙인 것이다.

 

 

국가와 노조에 순종하던 중국의 노동자들, 전체 노동자 계급을 위해 투쟁하다 !

 

 불과 몇 개월 전 중국에서는 실질적인 지역적 봉기로까지 이어질 뻔 했었던 상황들이 몇 차례 벌어졌음에도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었다. 처음에 그 지역의 노동자들은 회사와 노조 그리고 경찰의 탄압과 협박, 체포와 해고 속에서 힘든 투쟁을 벌여나갔다. 하지만 극단적인 폭력과 잔인한 탄압은 오히려 공장의 노동자들뿐 아니라 다른 노동자들과 지역주민들의 분노를 사게 되어, 더욱 강한 투쟁을 불러 일으켰고 목숨을 건 전면전으로 번져나가게 되었다. 결국 이 절박한 투쟁들이 주위에 알려지면서 다른 공장으로, 전 지역으로 급속하게 확산되어 나가자 이에 위기를 느낀 자본과 정부는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등을 약속하며 사태를 봉합하기에 바빴다.

 

 최근에 이 저항들은 그동안 많은 기업들이 저렴하게 생산할 수 있는 “세계의 공장”인 중국 남부에서 먼저 발생했다. 그것은 계속적인 하락을 예고한 노동자들의 임금 때문이었다. 대만 전자업체인 팍스콘 중국 선전(深玔)공장 노동자들의 연쇄 자살 사건을 계기로 초국적 기업들의 ‘고강도 노동 착취와 도덕성’ 이 논란이 되어, 현재의 임금 수준과 노동조건의 개선을 요구하는 투쟁이 남부 전 지역을 강타하게 된다.  팍스콘이 급기야 기본급을 900위안에서 2,000위안으로 122% 상향 조정한 데 이어, 일본 혼다 포산(佛山) 공장도 34% 인상안을 타결했다. 이 물결은 6개월 동안 전국 31개 성-시-자치구 중 27곳이 최저임금을 올리게 했고, 투쟁의 진원지인 하이난성은 가장 많은 평균 37%를 인상했고, 마침내 상하이에서는 새로운 최저임금 기준 가운데 가장 높은 월 1120위안(162달러)을 쟁취하게 된다.

 

 이번 투쟁에서 중국의 노동자들은 천성적으로 순종적이라는 오명을 벗고, 중국 공산당과 국가노조에 맞서, 자신의 계급지형 속에서 호전성과 전투적 징후를 보여주었다. 중국의 독점적인 국가노조인 중화전국공청회(ACFTU)는 그동안 노동자를 대변한 것이 아니라 공산당과 경영진을 대변해 왔으며, 회사의 인사담당자(대개 인사과장)가 노조위원장을 맡는 노조는 파업저지가 그들의 중요임무이었다. 중국 노동자들은 이러한 공식적인 공회(工會)밖에서 회사에 맞서 투쟁하면서, 스스로 조직화된 파업을 분출시켰다. 노동자들은 총회에서 자신들의 대표자를 선출했다.(노동자들의 요구 중에 하나는 모든 노동자들이 교대 근무 시간에 총회에 참석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야한다는 것이었다.)

 

 노동자의 파업은 정부의 권위를 공격했다. 또한 국가노조에 대항해 파업이나 저항을 조직하면서 스스로 깨달았다. 그리고 “우리는 1천8백 노동자의 권리뿐만 아니라 전국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투쟁 한다”고 혼다공장의 노동자들은 파업에 나서며 외쳤다. 이것은 중국 국가자본주의체제에서 자신들이 더 이상 인민이 아닌 노동자계급임을 선언한 것이며, 자본가계급에 맞선 계급투쟁을 국가기구인 노조를 넘어 스스로 벌여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제 투쟁을 회피하고 거래와 타협을 일삼는 일부 노조지도부와 개량주의 운동에 대해 아래로부터의 강제와 그것을 넘어서려는 집단적 행동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리고 모든 투쟁은 전체 노동자계급을 향해야 더 크게 확산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하겠다.

 

 

초국적 자본에 맞선 세계 노동자들의 끊이지 않는 투쟁들 !

 

 

 멕시코에서는 지난 6월 캐나다 자본인 Gammon Gold사 광업노동자들의 투쟁이 있었으며, 세네갈에서는 Shell의 철수 결정에 반대하는 강력한 파업이 있었다. 알제리아에서는 지난 6월 아르셀로 미탈(최대의 철강업체)에서 파업이 있었고, 브라질에서는 지난 5월 Parana의 볼보 공장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여나갔다. 기니아에서는 4월에  Bauxite사의 파업이 있었고, 가봉에서는 4월 정유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었다. 이처럼 자본철수, 공장이전 등 초국적 자본의 위기전가에 맞선 세계 노동자들의 투쟁은 세계전역에서 이어지고 있으며, 모든 지역과 국가들에서 투쟁의 중심에 서 있고 아직 승리의 소식이 더 많다. 지금도 끝나지 않은 한국의 쌍차 투쟁을 다시 살려내고 확산시켜야하는 이유이다.

 

 

다시 동력을 얻어 가는 노동자 투쟁, 프랑스와 남아공 노동자들의 총파업투쟁 !

 

 경찰의 물대포와 고무탄 발포로 악명 높은 남아공노동자들의 투쟁은 월드컵 이후에도 꺼지지 않고 더욱 확산되는 추세이며, 파업투쟁에서 나타난 노동자들의 용기와 단호함은 노동자조직의 강화와 민간부문 노동자 투쟁의 확산을 가져왔다.

 

 정부의 연금개악에 반대해 최근 9월에만 두 차례 총파업을 벌인 프랑스 노동자들은 압도적인 대중적 지지와 높은 참여 열기 속에 투쟁 수위를 높여 가고 있다. 작년 초 100만여 명의 참여로 시작된 총파업은 부문별 노조들의 투쟁방향에 대한 이견으로 동력을 상실해 결국 가을에 있었던 6번째 총파업에서는 1만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지만, 올가을 총파업에는 두 차례 모두 200만 명 이상의 참여가 있었고 다른 부문으로 확산과 투쟁의 발전을 가져오고 있다. 노동자들에겐 무엇을 얻기 위해 투쟁할 때 보다 빼앗기지 않고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에서 오는 강한 연대의식이 발휘되었고, 노조들은 불편과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정부와 자본에 실질적인 타격을 주는 파업을 꾸준히 벌여왔기 때문이다.

 

 

 뻥파업을 남발하면서, 자신들의 몫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한국의 노조지도부들이 직시해야할 현실이다. 타임오프 투쟁에 전면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간접고용 철폐 투쟁을 적극적으로 주도해나가지 않는 노조와 노조지도부에게도 아직 기회는 남아있다. 패배하더라도 참가자가 적더라도 올해 싸우지 않으면 내년에는 더욱 힘들어 진다.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 되는 것을 지키기 못하고, 자신들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조직은 이미 수명을 다한 것이며, 스스로 깨지기 전까지 다른 운동까지 가로막는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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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계급은 전세계 노동계급에게 답해야 한다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0/10/13 11:29
  • 수정일
    2010/10/13 11:30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한국 노동계급은 전세계 노동계급에게 답해야 한다

 

by  남궁원

 

 

 

1970년대 이후 세계자본주의를 지배한 신자유주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2007-2008년 세계자본주의 심장인 미국을 강타한 금융위기는 아이슬란드 국가부도를 거쳐, 러시아, 남부 유럽 (그리스,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헝가리 등에서 국가 재정위기로 나타난 바 있다. 오늘날 지구적 규모에서 벌어지는 자본주의 금융위기, 국가 재정 위기는 바로 신자유주의 산물이다.

이런 점에서 자유방임형 경쟁자본주의에서, 국가 주도적 케인즈주의로, 다시 시장 만능을 추구했던 신자유주의 파산은, 자본주의가 역사적 쇠퇴 경향에 서 있음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 붕괴와 G20 정상회담

신자유주의 종주국인 미국을 보자. 2007년 미국에서 서브프라임 경제위기가 발생하자, 부시 대통령은‘황급히’G20 정상회의를 소집한 바 있다. 당시 G20 공동성명은 금융시장 개혁을 위한 5개의 공동원칙에 합의를 한다. (1) 투명성 및 책임성 강화. (2) 금융 규제ㆍ감독 개선. (3) 금융시장의 신뢰성 제고.(4) 국제협력 강화. (5) 국제금융기구 개혁 등이다.

2007년 서브프라임 경제위기 이후, 미국 저소득자에게 떠오른 새로운 부채수단이 신용카드, 자동차 할부금융, 학자금 융자다. 새로운 부채수단들은 지방은행과 직결돼있다. 이것이 부실화되면서 급증하는 것이 바로 지방은행 파산이다. 2009년 한 해 동안 미국 지방은행 파산은 총 120개다. 181개 금융사가 파산한 지난 1992년 이후 최악의 수치다. 더구나 오바마 정부가 구제 금융에 쏟아 부은 재정적자가 1.4조 달러다. 1945년 이후 미국 역사상 최고 재정적자다.
 

2007년 이후 미국의 실업률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출처: 미국 노동부]


오바마 정부는 미국을 경제위기에서 끌어올리기 위해, 2년간 8천500억 달러에 이르는 광범위한 경기부양 프로그램을 추진해왔다. 오바마 행정부의 경기부양책에도 불구하고, 미국노동부는 2010년 실업률이 9.8%대를 돌파하면서 26년 만에 최악이라고 발표했다. 구직 단념자나 파트타임 노동자 등까지 포함한 실질 실업률은 17.5%다. 이 수치는 1930년대 대공황 이후 가장 높다. 특히, 주목할 것은 오바마 등장 이후 340만개의 일자리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미국경제는 70%가 소비구조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노동계급의 궁핍화와 고용위기(대량실업)는 소비 위축과 장기 경제침체로 이어지고 있다.

 

 

자본주의 위기와 전 세계 노동계급 투쟁

한편, 우리는 자본주의가 위기에 직면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취한 긴축재정과 노동법 개악, 정리해고, 임금삭감, 복지축소, 물가폭등에 맞선 전 세계 노동계급 투쟁을 볼 수 있다.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프랑스 노동자 투쟁
 


2008년부터 시작된 아프리카 대륙에서 물가폭등에 항의하는 카메룬 폭동 소요, 볼리비아 대중 투쟁, 이집트 총파업, 유럽에서는 그리스 공공부문 노동자 파업투쟁, 루마니아 공무원 총파업, 스페인 공공부문 총파업이 벌어졌다. 덴마크, 독일, 포르투갈, 이탈리아 등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프랑스 노동자들의 연금 개혁에 반대하는 총파업 투쟁, 노동자 감축에 항의하는 영국 지하철 노조의 24시간 총파업이 있었다. 아시아권은 한국 쌍용 자동차 77일간 공장점거 파업, 방글라데시 섬유산업 노동자를 중심으로 한 비공인 파업 투쟁 3,000건이 발생했으며, 중국 공산당과 국가화된 노조에 맞선 중국 노동계급의 와일드캣(삵쾡이) 파업 투쟁이 전개된 바 있다.

2007년 이후 자본주의 금융위기와 함께 진행된 전 세계 노동계급 투쟁과 무관하게, 오는 11월 달에 열리는 G20 서울 정상회의를 설명할 수 있을까?

G2, G3, G7, G8에 이어 G20은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신흥공업국 국가를 포함해서, 더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지배계급의 통치 위기를 관리하고 논의해야 한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한다. (심지어 지배계급 안에서는 G33도 언급되고 있다!)

2009년 4월 영국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 주요 결론은 IMF 재원을 3배로 늘리는 IMF 강화였으며, 2010년 6월 캐나다 토론토 G20 정상회담은‘성장 친화적인 적자 감축’이라는 애매모호한 결론을 내고,“국가별로 알아서 한다”는 것이다.

11월 ‘G20 서울 정상회의’을 앞두고 벌써부터 ‘환율전쟁’이 붙고 있을 만큼 긴장이 높아지고 있다. 결국 이번 ‘서울 정상회의’도 토론토의 재판으로 끝나거나 더 나아가 대립 양상을 보일 가능성조차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기껏해야 의미 없는 낮은 수준의 합의에 머물고 위기를 미래로 전가시킬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정권은 ‘서울 정상회의’에서 한국이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대대적인 정치선전을 하는 데에만 골몰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은 서울 회의를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강화하고 나아가 노동자 민중을 탄압하는 구실과 수단으로 노골적으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경기 회복은 가능할까?
 

1950년대 이후 자본주의 이윤율 저하 경향


그렇다면 지구적 자본주의 경기회복은 가능할까? 자본주의는 생산의 무정부성과 그 구조적 위기(이윤율 저하 경향), 잉여가치 실현을 위한 시장의 포화문제로 끊임없는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더구나 G20 국가들 자체가 세계시장 쟁탈을 위한 경쟁에 기초하고 있으며 시장의 지속적 확장을 통한 이윤확보에 혈안이 돼있다. 그들 모두가 경쟁자다. 더구나 오늘날 같이 자본주의가 지구 전체를 지배하는 상태에서, 새로운 시장의 출구를 찾지 못한다면 자본주의 자체는 과잉생산의 영원한 위기에 빠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이 말하는 ‘일시적인’ 세계경제의 침체와 불균형은 사기다.

 

 

사람이 우선이다! G20 민중행동, 건강한 자본주의를 만들자고?

한국에서는 G20 대응을 위한 한시적 공동대응 투쟁체 성격을 지닌 <사람이 우선이다! G20민중행동>이 출범했다. 여기서 G20 서울정상회의 대응방안으로 제출되는 한국 시민, 진보, 좌파세력의 대응전략을 보자. 이들의 대안은 사회공공성 강화에 기초한 ‘금융공공성 강화’,‘신자유주의 반대-금융통제’를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소위 오늘날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는 눈을 감은 채, 금융문제에 집중하면서, 부르주아들이 주장하는 ‘금융규제’와 달리 심오한 ‘금융통제 (은행세 도입, 금융거래세, 헤지펀드 규제 등)’를 주장한다. (사실 G7 시절 부르주아들도 토빈세를 검토한 바 있다.) 이들의 주장은 잘 규제된 자본주의가 오늘날의 자본주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특히 이들이 주장하는 은행세, 금융거래세 신설 합의 촉구는 은행의‘본연의 목적’ 운운하는 데서 드러난다.“지난 30여 년간 은행들이 산업 활동의 활성화와 사회적 자금 수요에 대응한다는 본연의 목적을 버리고, 그 자신이 과도한 투기활동의 주체로 변질된 것이 경제위기의 근본 원인 중 하나다.” 마치 은행이 금융자본가가 아니라 공익을 위한 기관인 것처럼! 공공의 선을 실현해야 하는 기관인 것처럼 호도하고 있다.

G20에 대한 대응은 첫째, 금융에 대한 공공성 강화, 규제, 통제를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을 공격하는 전체 부르주아지와의 투쟁이다. 또한 자본주의 전체 경제 메카니즘에 대한 공격적인 투쟁을 사고해야 한다.

둘째,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공성 개념을 논의하는 순간 우리는 정치 경제 이념적 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본주의에서 공공성은 부르주아지가 봉건적 지배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사회체제를 수립하려는 이데올로기로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사회적 질서로서 공적으로 정립시키기 위한 것이다.
공적인 국가 개입의 성격을 갖추게 되면서 부르주아지의 공공성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공공성은 사적소유에 기반 한 시장원리를 보호하기 위한, 국가가 만들어 낸 ‘가상적’ 공공성이며, 자본의 확대재생산이란 관점에서, 사회전체적인 부르주아 독재의 조직적인 이데올로기 장치다.

 

 

대안은 사회주의

2008년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한 이후, 전 세계적인 자본주의위기로 나아가고 있는 지금 시대야말로, 이른바‘현실사회주의 몰락’이후 낡은 고집으로 여기던 혁명의 문제가 다시 떠오른 것이 아닐까? 그래서 혁명의 문제설정은, 자본주의 위기를 단순히 경기순환상의 문제로 보지 않고, 자본주의 체계 자체의 역사적 쇠퇴 경향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투쟁을 제기하는 것이다.

문제의 핵심은 국제 프롤레타리아‘집단적이고 의식적인 계급투쟁’뿐이다. 자본주의 급격한 경제 붕괴는 혁명의 필요성을 낳는다.

90여 년 전 로자 룩셈부르크가 갈파했던 것처럼, “사회주의는 지구전체 차원에서 생산력의 발전을 통한 노동하는 인류 자신의 삶의 욕구의 충족을 지향한다. 따라서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보편적이고 조화로운 세계차원의 경제 형태이다.”

건강한 자본주의를 위한 투쟁이 아닌, 이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에 이제 나서야 한다. (남궁원/ 사노위)
 

 


► 위기를 일으킨 자본과 국가가 위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노동자 민중에 대한 위기 전가를 중단하라.
► 임금삭감, 해고조치, 복지삭감을 중단하고 긴축정책을 철회하라.
► G20을 해체하라.
► IMF, 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구를 해체하라.
► 모든 금융 정보를 공개하고 투기자본을 몰수하고 처벌하라.
► 은행과 금융기관을 노동자 통제 아래 국유화하라.
► 독점자본, 국가기간산업을 노동자 통제 아래 국유화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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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과 당건설 문제에 대하여

당과 당 건설 문제에 대하여  

-로렌골드너, 사노신과의 인터뷰 중에서

 

 

 

골드너 :  로자 룩셈부르크는 수많은 나라들을 연구했고 모든 경우에 탈중앙집권화는 항상 반동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를 자유주의적 반중앙집권주의자로 표현하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로자 룩셈부르크를 만드는 것이다. 1910년 경 독일 사회민주당 내의 당 논쟁에서 그녀가 당규율을 위반했다고 생각하는 특정 인물들에 대해 그녀는 매우 강력하게 제명을 요구했다.


한편, 나는 불행하게도 로자 룩셈부르크가 너무 일찍 죽어서 공산주의 당에 대한 자신의 독자적인 관점을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동지들이 알다시피, 그녀가 죽던 해에, 그녀는 제3인터내셔널의 설립에 매우 회의적이었다. 왜냐하면 서유럽에서 독립적인 공산당의 발전에 앞서 새로운 인터내셔널이 설립되면 불가피하게 러시아 공산당이 운동을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 그렇게 되었다. 그런데 많은 정통 레닌주의자들과 뜨로쯔끼주의자들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사회민주당으로부터 독자적인 그녀 자신의 당을 건설하기 위해 좀 더 일찍 행동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또한 제1차 세계대전 전에 판네쿡(Pannekoek), 호르터(Gorter), 롤란드 홀스트(Roland Holst) 등 네덜란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과 매우 친했는데 그들은 1908년에 네덜란드 사회민주당을 탈당하면서 로자에게 물었다. “왜 동지는 탈당하지 않는가? 독일 사민당이 개량주의에 굴복했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자 로자는 “가장 나쁜 사회민주주의 대중정당이 현실성 없는 외각의 분파보다 낫다”라고 대답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정통 뜨로쯔끼주의자들이나 레닌주의자들과 토론할 때 로자나 그녀와 같은 사람들이 혁명정당을 제때 만들지 못해서 독일 혁명이 실패했다고 그들이 말하면 내가 항상 그들에게 묻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왜 혁명정당이 없었는가? 그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역사의 답은 무엇인가?” 그러면 그들은 머뭇거리기만 하는데 왜냐하면 “그들은 레닌의 말을 들었어야 한다”라는 답만 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문제에 있어 강조해야 할 것은 로자 룩셈부르크가 1910년에 카우츠키와 결별했으며 카우츠키가 제2인터내셔널에 소속된 독일 사회민주당의 보수적인 인자일뿐이라는 것을 그녀가 깨달았다는 점이다. 사실상, 로자 룩셈부르크는 레닌보다 앞서서 독일 사회민주당 중앙이 이미 썩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14년에 레닌이 사회민주당이 전쟁 공채에 찬성표를 던졌다는 성명을 실은 뉴스를 독일로부터 받았을 때, 그는 그것이 실제로는 악선동이며, 모두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레닌이 독일 사회민주당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보다 더 많은 환상을 가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로자 룩셈부르크와 당 좌익이 왜 더 일찍 분리되어 나오지 못했는가에 대한 질문은 레닌주의와 뜨로쯔끼주의의 당물신주의 (당절대주의)로 거슬러 올라가는 다소 비역사적인 질문이다. 내 생각으로는 정당이 만들어지는 조건에 대한 레닌주의와 뜨로쯔끼주의 관점은 일종의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있다는 관점이다.

 

사노 신: 내 생각에는 로자가 좌익과 함께 당에서 분리하지 않은 것은 잘못되었다.

 

골드너 : 그렇다면 동지는 언제 그녀가 분리했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사노 신: 적어도 1차 세계대전 동안에 그렇게 했어야 했다.

 

골드너 :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했다. 좌익은 1915년, 1916년에 독립사민당을 설립했다. 그러나 물론 그것은 불충분했다. 그래서 공산주의 분파가 성장해서 거기에서 나왔다. 내가 생각하기에, 역사는 노동자 정당들, 혁명정당들이, 볼쉐비키 당이 구체적인 상황에서 성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상황에서 성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새로운 정당의 건설이 가능해지는 것은 바로 파열이 일어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과거에도 독일사회민주당에 반대파가 있었다. 1891년, 당의 청년조직이 분리해 나가면서 당이 완전히 부르주아적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작은 분파에 불과했으며 곧 사라지고 말았다. 내 견해로는 사회민주당과 분리하여 독립 정당이 된 좌익의 실패는 사실상, 독일 노동계급내에 존재했던 개량주의의 무게와 1918년 이후에 보여지는 것처럼 소수만이 혁명을 지지하고 있던 상황의 반영이라고 본다.


그러나 나는 1916년, 1917년, 1918년 이전엔 어느 때라도 소수파가 사실상 분파가 아니라 일관된 방식으로 분리해 나올 수 있었을 때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문제를 우리가 앞서서 토론한 문제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면, 러시아와 함께 독일 사회민주당의 혁명적 성격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과대평가가 있었다고 보는데 그래서 내가 볼때는, 당에서 분리하여 독립적인 정당을 건설하기 위한 어떠한 미성숙한 시도도 매우 커다란 부담감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떤 다른 중요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제2 인터내셔널이나 사회민주당과 분리하기 위한 시도가 제1차 세계대전끝나기 전까지는 없었다는 것을 명심하자. 러시아 혁명이 승리하면서, 그리고 볼쉐비끼 모델이 일반적인 모델로 받아들여지면서, 이렇게 무에서 유가 만들어지는 것 같은 레닌주의적 정당에 대한 환상이 생겼다. 그리고 많은 나라에서 이러한 식의 당이 보다 일찍 만들어졌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는데 이는 당이 건설되는 방식에 대한 매우 비역사적인 관점을 만들어냈으며 오늘날까지 정통 뜨로쯔끼주의나 레닌주의로 계속 살아남아 있다. 예를 들어 현대 뜨로쯔끼주의 글들과는 다르게, 파리 꼬뮌에 관한 팸플릿에서, 맑스는 “당만 있었더라면…”하면서 글을 마치지는 않았다고 하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러한 전반적인 사고방식은 레닌과 레닌 이후의 레닌주의자들에 의해서 노동계급에 소개되었고 발전해왔던 것이다. 나는 맑스와 엥겔스에게는 계급이 당을 조직하는 것이지 당이 계급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해가 존재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당은 계급을 조직한다. 그러나 그것은 계급의 산물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여러 나라들에서 당의 약화는 우선 계급의 약화를 반영한다. 그러므로 내 혁명정당에 대한 관점에 대해 보자면…그 답을 지금 이 주제와 함께 이야기해도 되겠는가?

 

사노 신 : 물론이다.

 

골드너 : 좋다. 나는 분명히, 내가 말한 모든 것에서 레닌의 관점보다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관점에 더 동조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가 또한 말한 것처럼, 로자가 1919년에 살해당했기 때문에, 그녀의 저작에는 일관된 당이론이 없으며 단지 실천과 그녀의 볼쉐비즘에 대한 비판에서 볼 수 있는 의견 정도뿐이다. 오늘날 필요로 하는 정말로 근본적인 것은 혁명적인 조직이 사회민주주의와 볼쉐비즘의 실패를 정말로 깊이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나는 또한 독일-네덜란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의 당자체에 대한 거부의 태도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1920년대초에는 독일-네덜란드 평의회 공산주의자들 역시 혁명정당을 주장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1930년에 평의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어느정도 견고해지면서, 당을 주장하는 요소들은 완전 사라져버렸다. 그러므로 오늘날 혁명조직이 사회민주주의와 볼쉐비즘의 실패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고 말할 때, 내가 의미하는 바는 정치조직보다 계급의 경험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명확히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는 전위란 전투적 노동자들과 의식적 혁명가들로 구성된 선진층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적인 혁명가가 혁명과정에 필수적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들은 보통 노동자들이나 심지어 전투적인 노동자들조차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투쟁에 개입하는 것은 공산주의자의 임무가 노동계급의 단결을 촉진하는 것이라는 맑스의 생각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존 사회에 대한 강령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투쟁을 이용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전형적인 전위 그룹이 하듯이, 조직의 새로운 멤버를 모집하는 수단으로 투쟁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혁명가들이 투쟁을,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투쟁 자체를 넘어선, 현존사회를 넘어선, 새로운 사회의 대안을 소개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위란 계급의 선진적 부분에 확고히 응축되어 있는 역사의 경험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하며 그러한 것이 어떤 구체적 조직으로 체화되거나 결정화될 필요는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혁명적 조직은 혁명 몇 달 전에 대중조직으로 성장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혁명의 시기 사이에, 혁명적 조직이 어디에 있는지, 노동계급이 사회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매우 명확한 지도를 그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역사적 경험은, 특히 1968년 이래 역사적 경험은 우리에게 자본주의의 틀 내로 자신을 안주시키는 조직은 강력한 투쟁의 시기가 아닐 때는 자본주의 사회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30~40년 동안 전위그룹들이 추구한 대안이란 역사적 경험을 자신들의 조직안에서 구체화하고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내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폭발적인 투쟁의 순간에 생겨나는 선진적인 계급의식을 자신의 조직을 건설함으로써 구체화시키고 있다고 상상하는 그들의 관점이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계급의 운동과 분리된 인위적인 조직이 되면서 그 다음의 급진화 단계에 있어 걸림돌이 되는 것이다.


예로 들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미 토론해왔던 프랑스의 트로츠키주의 그룹들이다. 그들은 노동조합 조직이나 사회당 혹은 공산당 조직에 침투한다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러한 전략이 성공을 거둔 것은 그들이 헌신적이 투사였기 때문이지 그들의 강령을 사람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은 아니다. 나는 이러한 종류의 인위성이 혁명조직의 발전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위험요소라고 생각한다. 매우 조심스러운 예를 들자면, 나는 지난 30년 동안 어떤 혁명적 전위조직에도 소속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참여할 수 있는 투쟁들에 참여하며 최대한 나의 전망을 도입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나는 글을 써서 그것을 나의 웹사이트에 올리고 또한 그 글들은 세계의 여러 잡지들에 실려서 읽혀지는데 사람들은 동의 하기도 하고 동의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들을 내조직으로 끌여들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 자체에 어떠한 상실감도 느끼지 않는다. 그러한 것들은 운동전반에서 항시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나의 개인적인 경험을 당조직에 대한 관점으로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당이 운동에 공헌해야 하는 것이지 우위적 입장에서 운동을 지도한다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서구에서 일어난 폭발적인 투쟁들중 단 하나도 전위정당에 의해 시작된 것은 없었으며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레닌은 1905년과 그 전시기에 다음과 같은 똑 같은 말을 했다. “그렇다. 대중파업의 물결이 일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어떤 시점에선 정치조직이 중요해진다.” 그러나 내가 잊어버리고 얘기못한 것인데 1905년 이후에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틀렸다. 분명히 <무엇을 할 것인가?> 에서 내가 말했던 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러시아에서의 소비에뜨, 노동자평의회 그리고 이중권력의 구성은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당의 개입없이 노동조합 의식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레닌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의 문제점을 바로 잡기위해 ‘무엇을 하면 안되는가?’ 라고 불릴 팸플릿을 쓰지는 않았다. 현대 볼쉐비키-레닌주의 전통에는 1917년 이전 볼쉐비키당이 어떠했는가에 대한 많은 신화가 있다. 하지만1905년 이후에 또는 1905년 패배 이후에 볼쉐비끼는 커다란 침체에 빠졌고, 아마도 1912년까지는 국내조직력이 매우 약화되어 있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레닌이 1917년 4월 러시아로 돌아왔을 때, 그는 스딸린과 지노비에프, 그리고 모든 주요 지도자들이 케렌스키 정부를 지지하고 있음을 알게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훨씬 더 중요하다. 동지들이 알다시피, 뛰어난 정치전략가였던 레닌은 4월 테제와 그 다음에… 그러니가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레닌과 그 다음엔 뜨로쯔끼가 그 해 안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날수 있는 가능성을 얘기하기 전까지 당기구 자체는 상황에 대해서 완전히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는 것인데 당 기구는 보수적이었지만 이러한 예외적인 상황에서 이들 특별하게 뛰어난 개인들이 존재하여 상황을 바꿀수 있었던 것이다. 귀환 직후 4월 테제를 발표했을 때, 레닌의 태도에 대해 볼쉐비키 당의 대부분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레닌이 말했던 것은 다음과 같았다. “노동계급이 하고 있는 것을 보라. 노동계급이 당보다 백배나 더 급진적이다.” 레닌은 노동자들이 케렌스키 정권에 대립해서 나아가고 있는 러시아 상황의 급진화를 인식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컨데, 나는 동지들이CLR 제임스의 저작들을 읽어보기를 적극 권한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글을 썼는데 그는 러시아 혁명 이후의 혁명가들의 역할은 노동계급의 행동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다시 말하면, 그는 혁명정당에 대한 레닌의 이론을 완전히 부정했던 것이다.


나는 제임스의 의견에 동의하지는 않는데 나의 웹사이트에 보면 제임스와 그의 관점에 대한 논문 2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제임스의 생각에는 중요한 통찰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에게 있어 레닌의 전략적 탁월함이란 그가 노동계급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주목하면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존재로서의 당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하고 있는 일에 반응하는 존재로서 당을 보고 있다는 점이다. 제임스의 중요성은 노동계급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당정책의 가이드가 되며, 당의 역할은 계급투쟁의 역동성을 잘 표현해 내는 것이라고 한 레닌의 발견이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현대 레닌주의자와 뜨로쯔끼주의자들과는 다르게 레닌은 그의 전성기에 있어 당물신주의자는 아니었다는 점이다. 불행하게도 1917년 이후 우리가 거론했던 상황속에서 레닌주의적 당조직의 가장 부정적인 면들을 발생시킨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여러 해가 지난 1930년대에, 빅토르 세르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딸린주의의 바이러스가 레닌주의 안에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레닌주의안에는 다른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많은 다른 바이러스들도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라고 말이다. 다른 질문이 없다면 이문제는 여기서 끝내자.

 

사노신 : 질문이 더 있지만 일단 정리하기로 하고 다음문제로넘어가자. 동지는 볼쉐비끼 당 모델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당의 필요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동지는 당의 역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골드너 : 다시 한번 말하건데 러시아 혁명가들과 인텔리겐차들은 매우 독특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비록 레닌과 러시아 맑스주의자들이 1870~80년대 발전한 인민주의 전통을 거부하긴 했지만, 인텔리겐차의 문화는 여전히 인민주의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이들이 농민이 압도적인 사회에 존재하는 아주 소수집단이라는 사실은 인텔리겐차의 형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


로자 룩셈부르크의 비판은 러시아에서는 합법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서구 유럽의 대중적 노동운동 경험으로부터 나왔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독자적인 당 이론을 발전시킬 기회가 없었는데 그녀는 1차 대전이 발생한 이후까지 독일 사민당에 머물렀으며1909년 독일 사민당과 결별하라고 호소하는 독일 네덜란드 극좌파의 권유를 거절했기때문이다. 내가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동의하는 것은 중앙집권주의(centeralism)에 대한 거부가 결코 아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현명한 중앙 위원회의 가장 훌륭한 지도보다 대중운동의 실수들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1919년 1월 암살당했기 때문에 독일 공산당의 발전에 영향을 끼칠 기회가 없었는데 그녀 자신이 매우 확고한 중앙집권주의자라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는 독일 사민당안에서 규율을 깨는 사람들을 제명시킬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었고 민족문제에 대한 글들을 보면 로자는 레닌보다 훨씬 더 중앙집권적이다. 그녀는 짜르 제국 내의 폴란드, 핀란드, 그루지야 및 기타 다른 나라들에게 독립을 주는 것에 대해 레닌을 비판했다.


문제는 중앙집권주의 자체가 아니라 어떤 식의 중앙집권주의냐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독일-네덜란드의 좌파 공산주의자들, 즉 극좌파들도 혁명정당을 지지했다. 내 생각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하게 강조해야 할 것은 로자와 독일-네덜란드 극좌파, 그리고 보르디가가 러시아 모델의 보편성을 의문시했다는 점이다. 나는 러시아 모델이 러시아 인텔리겐챠의 특별한 역사와 농민이 압도적으로 많은 사회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볼쉐비즘이 서유럽에 적용될 수 있는 모델이 아니라는 초기 서유럽 사람들의 비판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알다시피 로자는 창설당시 제3 인터내셔널 건설을 반대했다. 로자는 그 때 창건하면 제 3 인터내셔널을 러시아가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은 옳았다.

 

사노신 : 그렇다면 동지가 생각하시는 당의 개념은 뭔가?

 

골드너 : 당에 대한 내 자신의 개념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오늘날 혁명정당은 사회민주주의와 볼쉐비즘의 실패에 대해 진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농민문제를 이야기할 때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두 당의 모델은 농민인구가 대다수이고 중요한 농업문제를 가진 사회에 의해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사노신 :과거의 실패에 대한 진지한 이해가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골드너 : 볼쉐비즘의 가장 치명적인 결함 중에 하나는 혁명을 당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그들은 당이 혁명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계급이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계급은 당을 필요로 한다. 나는 사회민주주의와 볼쉐비끼의 경험으로부터 생겨난 오류는 당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형식주의적 이해였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존재하고 있는, 여전히 레닌주의적 당개념을 가지고 있는 그룹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무엇보다 자기 당의 성장을 위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더 넓은 사회적 투쟁에 있어 혁명가들의 적극적인 개입이란 사람들을 자기조직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귀착된다.


내 견해로는 전위란 한편으로는 의식적인 혁명분자이지만 동시에 노동계급의 가장 전투적인 계층이기도 하다. 이 말은 당이 체현하고 있다고 하는 역사적 의식이란 실제로는 전체로서의 계급 속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의 예를 들면, 지난 6개월간 이랜드 투쟁의 경험은 이랜드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다른 사람들도 포함하고 있는데 많은 노동자들이 이랜드 투쟁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지든, 투쟁이 승리하든 패배하든,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이해와 노동자들의 연대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는 남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으로 형식화될 필요는 없다. 역사는 혁명적 상황 밖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틀 내에서 형성된 조직은 그 사회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내 관점에서는 혁명 정당이란 기본적으로 혁명 전 마지막 시기에 대중 정당이 되는 정당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볼쉐비끼-레닌주의적 정당들은 내가 얘기한 것처럼 사람들을 자기 조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투쟁에 개입하고 존재한다. 혁명적 조직과 당의 역할은 주요목적을 자신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와 계급투쟁의 발전에 대한 이해를 일반화시키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혁명적 상황이 아닌 시기에 있어 볼쉐비끼 레닌주의 정당들이 가지고 있는 당의 형식화된(formal) 성격에 대한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많은 소규모 전위조직들은 기본적으로 자신들이 혁명이라고 주장하며 돌아다닌다. 그들은 혁명을 자기들이 성장할 때 성장하는 무언가로 이해한다. 하지만 실제로 역사는 혁명조직이란, 실제로는 조직으로서 형식화된 어떤 것이 아니라 혁명 전 마지막 순간에 노동자의 선진적 층으로부터 형성되는 어떤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또한 전위 정당의 그런 형식성을 지켜본 사람들이 그 경험으로부터 당 자체를 반대하거나 당은 필요없다고 하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 의견은 그렇지 않다. 나는 계급의식이 있는 인자들이라면 이랜드 투쟁 같은 상황에 개입하면서, 맑스가 <공산당 선언> 에서 말한 대로 공산주의자의 임무는 언제나 노동자 계급을 단결시키는 것이라는 방식으로 투쟁을 밀고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맑스가 <공산당 선언> 에서 “노동계급을 공산당으로 단결시켜라”라고 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상기하자. 오늘날의 전형적인 볼쉐비끼-레닌주의자나 뜨로쯔끼주의자들의 글을 보면 어떤 투쟁에 대해 얘기할 때 항상 끝을 이렇게 맺는다. “노동자들에게 혁명적인 전위 정당만 있었더라면, 투쟁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을 텐데…” 여기에서 말하는 혁명적인 전위 정당은 물론 자신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1848년이나 파리꼬뮌에 대해서 쓴 맑스나 엥겔스의 저작들을 보면 그런 식의 의견은 찾아볼 수 없다. 맑스나 엥겔스는 왜 그렇게 썼고, 나중에 20세기에 와서 볼쉐비즘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왜 내가 방금 말한 식으로 썼는지를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당이란 의식적인 혁명적 인자들로서 투쟁에 개입하고 노동자 계급을 단결시키기 위해 투쟁을 확대하려 노력하며 진정한 계급의식은 계급의 가장 전투적인 부위의 경험 속에서 구체화된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다. 혁명적 조직이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적인 로드맵이다. 자신들이 어디에 있는지, 계급투쟁은 어디에 와 있는지, 그리고 계급투쟁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들이 어디에 존재하는지에 대해 아주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로드맵말이다. 로드맵이 없거나 틀리면 당이 곧 혁명의 구현이라거나 혁명 자체라는 관점을 더욱 부풀릴 것이기 때문이다.

 

사노신 :대중적 혁명투쟁 정세하에서만 당이 자라난다고 하는 점에 일반적으로 동의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적인 시기에도 대중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대중 속에 기반을 만드는 노력들은 항상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예를 들어 얼마 전에 우리가 만난 ICC 동지들 같은 경우에 사실상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어났을 때만 거기에 개입한다는 사고 자체가 상당히 수동적으로 보였다.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골드너 : 투쟁이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수동적이지 않은 건지 먼저 묻고 싶다.

 

사노신 : 예를 들어 ICC가 얘기했던 것은 프랑스 CPE 투쟁처럼 아주 큰 투쟁들이 발생할 때그런 데에 확성기를 들고 가서 선전선동하고 신문 팔고 한다는데그것이 활동의 전부인 것 같다. 사실상 일상적으로 공장이라든가 작업장에서 일어나는 투쟁들도 있기 때문에 그런 투쟁들에 개입하는 것들이 필요하지 않은가. CPE같은 대규모의 투쟁이란 몇 년에 한 번씩만 일어나는 건데 그런 투쟁에만 개입한다는 것은 너무 수동적인 것 같다.

 

골드너 : 일단 ICC에 대해서 얘기를 하자면 ICC는 좋은 로드맵을 갖고 있지 않은 조직의 아주 적절한 예이다. 1980년대에 ICC는 혁명적인 계급투쟁의 주기가 오고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들은 1980년대 중반이 격렬한 계급투쟁의 시기라고, 적어도 서구 유럽과 미국에서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동자급이 엄청난 패배를 겪은 시기였다. 이전에 ICC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얘기해주기를, 프랑스나 벨기에의 어느 도시에 신문을 잔뜩 들고 파견되어 현장에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다시 한번 간단한 반대의 경우를 얘기하자면, 나는 약 30년 동안 어떤 혁명적인 조직에도 속해있지 않았다. 하지만 가능한 한 투쟁에 참여하고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글을 쓰며, 또한 동지들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하면서 한 개인으로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무언가가 꼭 조직으로 형식화될 필요는 없다. 모든 것은 이미 운동 안에 있다.


물론 진지한 로드맵을 가지고 있는 조직에 가입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노동자들의 일상생활과 투쟁에 개입할 가능성이 있는 그러한 조직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참여는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큰 투쟁에 비해서 일상적인 상황은 아주 제한적이라는 것을 분명히 이해하는 가운데 이뤄져야한다. 비유를 하자면 오늘날 존재하는 많은 조직들은 마치 큰 파도가 밀려온 뒤 해변에 남은 나뭇가지들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많은 ‘형식화된 조직’들이 그 나뭇가지들이다.


보르디가주의자들이 가장 좋은 예라고 생각하는데 그들은 80년 전에는 중요하고 대중적인 운동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쓰나미가 지나가고 난 후 떠밀려온 나뭇가지들과 같다. 마찬가지로 미래를 바라본다면 일상의 시기는 다음 쓰나미가 덮치기 전의 해변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러한 생각들이 내가 로드맵, 그리고 상황에 맞게 조율해내는 능력을 말할 때 의미하는 것들이다. 최근 한국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상황은 조용한 일상에서 갑자기 거대한 운동으로 변하기도 한다.

 

사노신 : 잘못된 로드맵을 갖고 있으면 다 헛탕이라는 건가.

 

골드너 : 일단은 그런 로드맵은 노동자계급과 실질적인 연관이 없는 투쟁에 자기 조직원들을 소모시킨다. 동시에 큰 투쟁이 있는 곳에 개입하는 것은 내가 봤을 때…그곳에서는 누구나 발언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우리가 잊어버리지 말아야할 것은 1918년 11월 독일 혁명이 일어났을 때 백만 명이 베를린 시내에 모였는데 광장의 한쪽 끝에서는 로자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독일 소비에트 연방을 만들자고 외치고 있었고 다른 쪽 끝에서 사회 민주주의자들이 독일 공화국의 설립을 주장하고 있었으며 광장 양쪽에서 모두에서 관중들은 열렬히 환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의 분위기는 너무 열광적이어서 일반 노동자들은 한쪽 끝에 있는 사회 민주주의자들과 다른 쪽 끝에 있는 공산주의자들 간의 차이를 구별하고 있지 않았다. CPE투쟁 당시 파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그 집회에서 사람들이 ICC에게 갖는 관심은 다른 뜨로쯔끼주의 그룹에서 온 훌륭한 발언자에게 갖는 관심과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조심스럽긴 하지만 그것이 나의 느낌이다.


LO같은 그룹에 대해서 얘기해 보자면 그들은 40여년이상이나 소식지를 발간하는 공장 위원회를 조직하에 두어왔으며 최근에는 지역 위원회를 시도하고 있고 여름에는 이동 버스를 타고 이지역 저지역들을 돌며 선전활동을 하는등 여러가지를 시도하고 있다. 동지들은 어떤 활동들인지 감을 잡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활동은 물론 유용하겠지만 항상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자본주의 하에서 일상이 주는 중압감 때문에 그런 활동의 중요성이 과대평가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사노신 : 동지의 의견 중에서 ‘당의 역할이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키는 것이다’ 라는 점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좀 이해가 안되는 게 당이 그렇다면 혁명적인 시기에만 필요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일상적인 시기에도 당이 필요하다는 것인지. 만약 일상적인 시기에도 필요하다면 그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형식인건지. 얼핏 들으면 혁명적 시기에만 당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들리는 면이 있다.

 

골드너 : 어쩌면 조직이 형성되는 초기에 ‘당’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많은 소규모 그룹들은 좋은 로드맵을 가지고 있으면서 리그룹먼트(regroupment)나 프리파티포메이션(pre-party formation), 혹은 그와 비슷한 것으로 스스로를 칭하고 있다. 그들은 최근 몇 십 년, 그리고 현 시기 자신들의 역할은 때로는 개인적차원에서, 때로는 작은 그룹차원에서 토론을 하고 글을 쓰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는 일, 말하자면 자기의 조직을 설립하는 것보다 토론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가능한 곳에는 투쟁에 개입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

 

사노신 : 한국 사회주의 그룹들의 전형적인 활동중에는 공장에 직접적으로 사람을 투입해서 현장에서 투쟁을 하고 선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활동이 포함되어있다. 그런데 ICC는 이런 활동에 대해서 대리주의(substitutionism)라고 얘기하면서 이해하지못하는 것 같은데 동지는 어떻게 생각는가.

 

골드너 : ICC가 그렇게 말했다니 반갑다. 왜냐하면 실제로 많은 경우에 그러한 대리주의로 되기 때문이다. 내가 잘 알고 있는 미국과 유럽에서의 경험이나 미흡하게나마 조금 알고 있는1980년대 남한의 “학출” 활동가들의 운동을 살펴보면 중산층 사람들이 공장에 들어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무척 중요한 일이지만 노동계급의 발달에 정말 기여할 가능성은 제한적이고 종종 그 성과가 없다. 내 생각에 공장 노동자들을 포함한 노동계급의 관심을 끌지 못하는 혁명적 조직은, 말했다시피 자신의 진정한 위치, 역할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고 본다 . 그리고 이 문제는 사람들을 공장으로 보내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사노신 : 또 다른 질문은 직업적 혁명가에 대한 것인데 예를 들어 ICC 동지들은 자신들 모두가 노동자이므로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지않는다고 한다. 동지는 직업적 혁명가에 대해서 어떻게 생하는가?

 

골드너 : 전반적으로 건강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레닌과 그가 쓴 <무엇을 할 것인가?> 의 잔재 중 하나가 직업적 혁명가를 혁명을 체화하고 있는 혁명적 의식의 담지자라고 보는 것이다. ICC가 거기에서 벗어나려고 한다는 건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사노신 : 그런데 직업적 혁명가라는 개념과 동지가 언급한 의식적 분자와의 차이는 무엇인가?

 

골드너 : 의식적 분자란 우리 같은 사람들, 즉 혁명적인 진전을 위한 준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 가운데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적절한 로드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의식적 분자들은 개인으로든 소규모 그룹으로든 혁명적 상황에서 모아질 재편성(regroupment)의 과정에 관계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가장 잘 싸우는 전투적인 노동자들 역시 포함한다고 말하고 싶다. 나는 미국에 있는 헌신적인 투사들을 몇 명 아는데 그들은 볼쉐비끼-레닌주의의 성향의 아주 진지한 사람들이며, 언젠가 혁명의 일부가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당과 계급의 관계에 대한 질문, 예를 들어 “레닌이 없었다면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까?”와 같은 질문을 그들에게 던지는 것은 흥미롭다. 왜냐하면 아까 말했다시피 그들의 글은 항상 상황이 나아지려면 혁명 정당이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당이 없는 것인지, 왜 역사는 당신들이 주장하는 식의 당이 필요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해왔는지 내가 질문을 하면 그들은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레닌이 없었다면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을까?” 물어보면 그들은 “당연히 안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면 나는 “그건 좀 비참한 것 아닌가. 그 모든 게 한 사람에게 달려있다니 이 거대한 사회적 진보의 약점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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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크론슈타트 : 반혁명의 시작

1921 - Kronstadt: Beginning of the Counter-revolution

 

Today we are the witnesses of a tragedy of a social revolution being contained within national frontiers, as a result of the passivity of the peoples of Europe faced with intelligent and well-armed reactionary forces. It is thus stifled and reduced to playing for time with the enemy within and without. We have seen many mistakes made, many errors revealed and from the libertarian point of view, many precious truths have been confirmed.

 

Thus wrote Victor Serge in June 1921 in the preface to his essay The Anarchists and the Experience of the Russian Revolution. The essay (1) was an appeal to the anarchists to recognise what was proletarian and positive about the October Revolution. Although it was written before the rising at Kronstadt in March 1921 against the Bolsheviks, Serge makes no reference to that tragedy in his introduction written a few months later. Indeed he states that his conclusions are “more true now than they were a year ago”. What the quotation highlights is the fact that the isolation of the “social revolution” to one territory was now becoming an unbearable burden. Not only did Kronstadt throw a “flash of light which illuminated reality” as Lenin said, but the events of the Tenth Party Congress (adoption of the NEP and the banning of factions), the failure of the March Action in Germany and the adoption of the united front policy, in all but name, at the Third Congress of the Comintern, made 1921 a highly significant year in the degeneration of both the Russian and international revolution. This article is aimed at weighing up the significance of that decline eighty-five years ago.

 

135 years ago, the Paris Commune of 1871 gave a glimpse of what the working class could achieve and how it could run society for itself. But after 74 days, the Commune was crushed by the bourgeois government of Thiers backed by the international power of the capitalist class. Confined to a single city it was isolated and defeated with 20,000 Parisian workers massacred in cold blood in a single week in May 1871. In response, the Communards shot their bourgeois hostages. The number of ruling class victims of the Commune was 84. Thus it is always the white terror of the ruling class that exceeds in numbers and horrors the red terror of the working class. As Marx noted, the problem of the Commune was that it was isolated to a single city. The problem of the Russian proletariat was that their revolution was isolated to a single country.

 

The Russian Revolution of October 1917 remains the only occasion in history when a contingent of workers actually overthrew the capitalist state power over an entire territory. For this reason we continue to examine and try to understand it. The fundamental question is to explain how a revolution which began by offering the widest liberation to the working class and thus to humanity, could have become by 1928 one of the greatest tyrannies of the twentieth century. Looking back on the events of eighty-five years ago with the benefit of hindsight, we can understand that 1921 was a significant turning point on the road to defeat for the revolution. At the time it did not appear so to many of the participants. That 1921 was a year of crisis they could plainly see; over one million dead from famine, with many more from typhus and other diseases. The outbreak of strikes against the Council of People’s Commissars (Sovnarkom) and the Kronstadt Revolt brought home the harshness of the situation. And to add to the woe, the international revolution not only failed to occur as the Bolshevik leaders expected but suffered a hammer blow with the defeat of the March Action in Germany.

 

Our task here is not simply to chronicle what went on but to explain what it means for us today. We are aware that there will be no revolution like the Russian experience again. Nor are we using “the condescension of the present” as E.P. Thompson called it. Any revolutionaries who seek simply to slavishly replicate what happened in Russia deserve only ridicule (as do those Trotskyists who consider the question of leadership to be just a question of the right individuals in strategic positions). We need to avoid the trap into which so many so-called Marxists and revolutionaries fall in seeing the past as a blueprint for the future. However, only by learning from what really happened can we arm ourselves for the struggles ahead. And the first step in this learning process is to debate what the significance of the past is.

 

1918-21

Already some “libertarian Marxists” (2) and anarchists will be screaming that the revolution was lost long before 1921. We don’t deny that soviet power in the territory of the Russian Socialist Federated Soviet Republic (the name USSR was not adopted until 1923) was already an empty shell by the end of 1920 (although there were healthy pockets of it in 1919) (3). Nor do we deny the excesses of the Cheka during the Civil War where it became a state within the state. But the Red Terror arose out of the Civil War. In November 1917, the Bolsheviks were letting former tsarist generals go free if they promised not to take up arms against them. A few months later the same Tsarist generals were not only leading invasions of Russia, armed by British and French imperialism but were literally crucifying any workers they suspected of Bolshevik sympathies. Although both sides resorted to terror in this class war it was hardly on the same scale. Here we can point to the evidence of the US Commander in Siberia, General William S. Graves who reported that:

I am well on the side of safety when I say that the anti-Bolsheviks killed one hundred people in Eastern Siberia to every one killed by the Bolsheviks. (4)

 

Nor do we claim that the revolution had abolished capitalist relations of production, except in so far as there had been a total economic collapse as soon as the Bolsheviks came to power. Since at least 60% of industry was devoted to war production, achieving peace meant unemployment. As Edward Acton observed:

In the aftermath of October, the country suffered an economic collapse on the scale of a modern Black Death… The capital lost no less than a million inhabitants in the first six months after October as workers streamed from the capital in search of bread. (5)

 

Even those workers who had jobs still had to spend their time looking for food and demoralisation was compounded by mass absenteeism. Attempts by Bolsheviks on the factory committees at this time to increase labour discipline led to new delegates being elected who were more compliant with the workers’ demands. Eventually though even these factory committees began to be more concerned with labour discipline and output. In the anarchist/libertarian demonology this was, of course because the Bolsheviks had suppressed the workers’ initiative in the factory committees. But this is too simplistic as S.Smith showed in his Red Petrograd.

…one cannot see in this the triumph of the Bolshevik Party over the factory committees. From the first the committees had been committed both to maintaining production and to democratising factory life, but the condition of industry was such that these two objectives now conflicted with one another.

pp.250-1

 

But the Civil War was taking further toll on the revolution. The Bolshevik Party had been a party predominantly of workers in 1917. By 1920, these workers had become officials in the Red Army, the Cheka and the bureaucracy. By 1922, over two thirds of the party membership were administrators of one kind or another. At the same time the fight against imperialist invasion and the Whites had led to a closing of ranks. Inner party discussions declined and increasingly, the local elected posts were filled by the local party secretary simply appointing delegates to higher bodies. The practice of democratic centralism within the Party (where lower bodies elected all higher bodies) had virtually collapsed. What was left was only centralism. It needed only a Stalin to become the Party Secretary in charge of these local secretaries to have in his hands the levers of power. But that was still some time in the future. When Serge arrived back in Petrograd after being deported from France in January 1919 he reported,

We were entering a world frozen to death… At a reception centre we were issued with bread and dried fish. Never until now had any of us known such a horrid diet. Girls with red headbands joined with young bespectacled agitators to give us a summary of the state of affairs: “Famine, typhus and counter-revolution everywhere. But the world revolution is bound to save us”. (6)

 

And it was this belief in the world revolution which lay at the heart of the hopes of the Russian working class even at the beginning of 1921 when they had suffered and were suffering so much. Serge was asked “what is the French proletariat waiting for” by his young hosts but it was the German proletariat that most Bolsheviks had the highest hopes in.

 

The Third (Communist) International

The whole Bolshevik programme cannot be understood without reference to its international character. The insistence on outright opposition to the imperialist war in 1914 distinguished the Bolshevik party as the only major European party to oppose the war with revolutionary demands (7). It was the Bolsheviks who led the split at the Zimmerwald and Kienthal Conferences with the centrist and pacifist socialist majority. And when the Bolsheviks came to power in Russia they shared exactly the sentiment of Rosa Luxemburg that

The question of socialism has been posed in Russia. It cannot be solved in Russia.

 

At the Third Congress of Soviets in January 1918 Lenin stated:

The final victory of socialism in a single country is, of course, impossible. Our contingent of workers and peasants which is upholding Soviet power is one of the contingents of the great world army. (8)

 

And in March, at the time of the acceptance of Brest-Litovsk he repeated this:

It is the absolute truth that without a German revolution we are doomed. (9)

 

In his April Theses of 1917, Lenin had posed the need for a new International to replace the Second which had gone over to imperialism in August 1914. The war itself began to provide the material basis for this international as workers and former social-democrats stepped up their resistance to their own governments. The First World War’s end was hastened by the strikes in Vienna, in Hamburg and Bremen and all across Germany. When news reached Moscow of the Vienna rising, Radek, one of the Bolshevik leaders, recorded the spontaneous demonstration that occurred outside the Kremlin.

I have never seen such a sight. Workers, both men and women, and Red Army soldiers filed past until late evening The world revolution had arrived. The masses of the people were listening to its iron step. Our isolation had ended. (10)

 

This was a bit premature. Although many workers and ex-soldiers around Europe were increasingly supportive of the soviet idea, this had not taken the concrete form of new communist parties in most countries. Even in a place like Germany the revolutionaries had failed to distinguish themselves clearly from the social-chauvinist Socialists. Although Luxemburg and Liebknecht had formed the Spartakus League, they remained inside the German centrist USPD (which included Kautsky and Bernstein) as they feared isolation from the mass of the class. This only confused the workers and isolated the Spartakists from the smaller but politically clearer groups such as the Bremen Left and the International Socialists (IKD). Given too that the social-democrats did not openly oppose soviets but worked behind the scenes to destroy them, it meant that the Spartakists were not seen as the only supporters of workers councils (as had been the case with the Bolsheviks in Russia). If we return to the Victor Serge quote at the top of this text, the greater sophistication of the Western European bourgeoisie which incorporated so-called socialists into their defence, was a major factor in defeating the spread of revolution in Germany and beyond.

 

As it was, the news that the Second International was reforming in January 1919 forced the Bolsheviks to send out feelers for a new international which they intended would meet in Berlin. Before it could meet, Liebknecht had precipitated the Spartakist uprising which was crushed by the Social-Democrats in alliance with the proto-fascist Freikorps. In the reprisals which followed hundreds of workers were shot in cold blood and Liebknecht and Luxemburg were brutally murdered. The planned first meeting of the new International was now moved to Moscow. The move was meant to be temporary until revolution broke out in the West. However this was the first step in the process of intertwining of the fate of the Russian Revolution and the International. And because it was the Russian party which physically and ideologically dominated the International, it very quickly became an organ for defending soviet power in Russia whatever problems it was going through. In the event, the First Congress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did little more than declare its existence. The fifty delegates who assembled in Moscow did not all have formal mandates, a factor which only led to further Bolshevik dominance of the new body. This wasn’t quite how Lenin saw it when he announced in Communist International that:

The new third “International Workingmen’s Association” has already begun to coincide in a certain measure with the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11)

 

By this he meant that the process of unfolding of the world revolution would also be accompanied by the advance of socialism in Russia. Unfortunately for the proletariat the process was to go in the opposite direction. The growing counter-revolution in the USSR would also destroy the revolutionary aim of the Third International.

 

However this could not be seen in 1919, when world revolution and capitalist counter-revolution were locked in deadly embrace and the existence (however feeble) of the Third International was a banner around which workers everywhere could rally. Early in the year, revolution had broken out in Bavaria and Hungary where Soviet Republics were proclaimed. The Allied powers (Britain, France and the USA) were faced with mutinies in their own armies in Russia. Lloyd George, the British Prime Minister announced that the British intervention was not only finished but the revolts on the Clyde and in South Wales were alarming the British state at home.

… if a military enterprise were started against the Bolsheviki, that would make England Bolshevist and there would be a Soviet in London. (12)

 

Lenin was talking about July 1919 as “our last difficult July” since within a year there would be the victory of “the international Soviet republic”. However the heady atmosphere which so threatened capitalism did not last. By the end of May, the Bavarian Soviet Republic, isolated even in Germany, had collapsed. It was followed in August by the Hungarian Soviet Republic which succumbed due to internal squabbles and the invasion of a Romanian Army supplied by the Allies. By the autumn, the Whites in Russia had reached their most threatening. Yudenich was at the gates of Petrograd, Kolchak was moving from Siberia and Denikin from the Ukraine. In October and November…

the continued existence of the regime hung by a thread. (13)

 

To add to the misery the young German Communist Party, which had lost its best leaders in the murders of January to March 1919, was split by Paul Levi at its Heidelberg Congress in October 1919. The Party had adopted the tactics of using existing parliamentary and trades union means to increase its influence but only by the narrowest of votes. Not content with this victory Levi (against the advice of the Bolsheviks) proposed the expulsion of all those who had voted against the majority. The Left wing which constituted half the party and controlled its North German sections (including Berlin) went away to form the German Communist Workers Party (KAPD). Similar difficulties occurred in different forms in other countries. Lenin tried to win all those who rejected social-democratic reformism to the Third International, including anarcho-syndicalists. At this time he also told the British groups negotiating to form a party that he himself was in favour of using trade unions and parliamentary tactics but did not condemn those who called for different tactics.

 

By the end of 1920, the civil war had been won but Russia remained isolated and the price of victory was, as we saw at the start of this article, almost a Pyrrhic one. Industrial production was only a fifth of that of 1913 and agricultural production had declined by a half. The Bolshevik economist, L. Kritsman described the situation as one of economic collapse “unparalleled in the history of humanity”. (14) The policy of sending out military detachments to the countryside during the Civil War to forcibly requisition grain had led to 113 peasant revolts (50,000 followed the ex-SR Antonov in the Tambov region alone). The Bolsheviks had succeeded in retaining state power but as Bukharin (and other leading Bolsheviks, including Lenin] later acknowledged in 1921, they had held on to state power but had lost the proletariat in the process. For Lenin this material fact was the single most important reason for the Kronstadt Revolt of March 1921.

 

The Petrograd Strikes and Kronstadt

There is no more emotive name in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than Kronstadt. It is the litmus test of everyone’s understanding of the way in which the revolution slid to defeat. For most Trotskyists and Stalinists it was either a plot of the White reaction who took advantage of the terrible conditions at the end of the civil war to incite a revolt against the proletariat or it was (in the Socialist Workers’ Party version) (15) because the Kronstadt sailors were now all peasants and this was a revolt of the petty bourgeoisie. For anarchists it was the real “third revolution” against the Bolshevik dictatorship and for the historians of the capitalist class it has been a gleeful episode to demonstrate that any alternative to their system ends in bloodshed. E.H Carr devotes only two one line references to the Kronstadt Revolt in his The Bolshevik Revolution Volume 1. This only underlines that his is a history of the Soviet state and not of the revolutionary proletariat. For revolutionaries today the issue cannot so easily be ducked since it frames how we answer the questions posed by the last revolutionary experience.

 

By 1921, soviet power had become an empty shell. Elections to the soviets were under the watchful eye of the Cheka. Similarly armed guards patrolled the factories as Taylorism and one-man management were imposed on the most revolutionary working class in history. The workers accepted this as long as the Civil War against the Whites created an exceptional situation. At the same time they had also accepted the abandonment of the election of officers in the armed forces as Trotsky brought in members of the old officer class to defeat the Whites. But by the time the last White General had been run out of Russia in December 1920 there were already signs that the emergency regime was to continue. Grain requisitioning carried on, Trotsky had even announced that his Red Army methods should be imposed on the whole workforce (the militarisation of labour debate) and there were no new elections for the Soviets. Everywhere the talk was of “iron discipline” and more dictatorship. Little wonder that the Party, now increasingly a party of functionaries rather than workers was prey to bureaucratisation. This bureaucratisation in turn led to the emergence of opposition from proletarian groups within the Bolshevik Party: groups like the Democratic Centralists led by Ossinsky and Sapronov, the Workers’ Opposition led by Shlyapnikov and Kollontai and Miasnikov’s Workers’ Group. These oppositions, whatever their weaknesses and errors, wanted a return to the revolutionary principles of 1917. No wonder Lenin could say in February 1921,

We must have the courage to look in the face of harsh reality. The Party is sick, the Party is shaken by fever. And unless it succeeds in quickly and radically curing its own illness, a break will occur which will have fatal consequences for the revolution. (16)

 

But before the Party debates could begin at the Tenth Congress of the Russian Communist Party in March the workers of Petrograd and Moscow went on strike. In Petrograd the strikes were mass affairs demanding freedom of the press, release of political prisoners and a return to democracy in the state. Some demanded the opening of local food markets to counter growing shortages (which would eventually become famine in 1921). Counter-revolutionaries also tried to take advantage of the situation by putting forward demands for a return of the Constituent Assembly. The Bolsheviks’ reaction was one of panic. Troops were sent in to break up strike meetings and the leaders arrested. The Cheka put around the lie that the movement was dominated by peasant elements (since only the hardcore proletariat was left in Petrograd by this time). The clinching factor in the ending of strikes was the arrival of new bread supplies since it was the announcement of cuts in the bread ration which had sparked the strikes in the first place.

 

The Kronstadt Revolt that broke out in the naval base was a direct response to the strikes in Petrograd and the repression that followed. On 28th February, delegates from Petrograd reported on the situation and the programme of the sailors of the battleship Petropavlovsk was adopted. It called for new Soviet elections and for freedom for all socialists and anarchists. It is noticeable that the programme did not call for freedom for the bourgeoisie and the sailors overwhelmingly rejected a reactionary proposal to recall the Constituent Assembly. Economically the programme advocated fairer rationing, limited handicraft production and the peasants to produce freely so long as they did not use hired labour. It was in fact far less “capitalist” than the New Economic Policy which Lenin had already begun to float before the revolt broke out.

 

Kalinin, later Stalinist President of the USSR, was sent to Kronstadt where he simply denounced the sailors (who were not yet in open revolt). The response was the production of the Kronstadt Izvestia (Kronstadt News) which declared:

The Communist Party, master of the state, has detached itself from the masses. It has shown itself incapable of getting the country out of its mess. Countless incidents have recently occurred in Petrograd and Moscow which show that the party has lost the confidence of the masses. (17)

 

The response of the Bolshevik Government was to announce that it was “a White Guard plot” led by an ex-tsarist general called Kozlovsky. The fact that émigré papers in Paris had spoken of trouble at Kronstadt earlier helped furnish the proof that was needed, despite the known rejection of the counter-revolution by the Kronstadters. Fundamentally, the Bolsheviks saw counter-revolution as something which could only come from abroad and therefore the Kronstadters must objectively be working for that counter-revolution. There were very important strategic considerations which heightened the panic in government circles. As long as the sea around Kronstadt was frozen it could be reached, but once the ice melted as the spring thaw took hold then Kronstadt would be out of reach and potentially become a base from which a foreign capitalist force could operate. This is why there was no possibility of lengthy negotiations. Trotsky sent the Kronstadters an ultimatum (which incidentally did not include the phrase that the sailors would be “shot like partridges”. This was in fact in a leaflet sent by the Petrograd Defence Committee under Zinoviev). This was rejected on March 7th 1921, when the Kronstadt Izvestia denounced Trotsky as “the dictator of Soviet Russia”. The first attack took place the next day but failed with 500 government troops killed.

 

There now came a hiatus as the Tenth Party Congress of the Russian Communist party (Bolshevik) began on the same day. If further evidence was needed to suggest that 1921 was a significant turning point in the fate of the Soviet revolution then it was duly provided by the Tenth Congress. There were three big issues at this conference. The first was the role of the trades unions in the Soviet system, the second was the policy to be adopted towards the peasantry, given that the emergency system of the Civil War period had reduced agricultural production to half that of 1913 and the third was the banning of factions in the Party.

 

The trade union issue was dominated by the debate with the Workers Opposition led by Alexandra Kollontai and Alexander Shlyapnikov. The Workers Opposition wanted the trade unions to take over the running of production, but as they only had the support of about fifty delegates the final resolution “On the role and tasks of trade unions” rejected this. Instead it was decided that the unions would be “schools of communism”, therefore they could not be part of the state apparatus. In this light it was also agreed that the trade unions “are the one place… where the selection of leaders should be done by the organised masses themselves.” This itself is evidence of the extent of the decline of soviet power since it implies that there is to be no revival of Soviet democracy.

 

On the 15th of March, the Congress also accepted the need for a New Economic Policy so that the grain requisitions would be replaced with a tax in kind. In practice this was even more of a concession to the peasants than the Kronstadters themselves were demanding. Many Bolsheviks opposed it, including Ossinsky of the Democratic Centralist group. Riazanov described it as the “peasant Brest” meaning that it was another concession to a class enemy. Lenin’s reply was that, “only an agreement with the peasantry can save the revolution”.

 

In fact NEP presaged a full-scale attack on the working class since it led to the privatisation of smaller firms. Without state support they laid off workers and this led to a rapid rise in unemployment and a fall in wages. The Bolshevik Party was now both the ruling party of a state which was attempting to hold on until the world revolution and carrying out the peasant counter-revolution at the same time. Despite this, as long as the Bolshevik Party remained true to its traditions of open debate revolutionaries could still preserve some hope for the future. The final resolution of the Tenth Party Congress, however, called for the banning of factions (and the Workers’ Opposition and Democratic Centralists were mentioned by name in the resolution). Whilst it did not have the effect that was perhaps intended (factions continued to re-appear until 1927) it did commit Bolsheviks to defend the Party more strongly than ever. Indeed Lenin seems to have over-reacted to the threat posed by the various tendencies over the trade union debate. He mistakenly thought the Workers Opposition was supporting the idea of the unions against that of the party. Just how far he was mistaken was demonstrated by the fact that whilst Bolsheviks in Kronstadt defended the Kronstadt Naval base, the rest of the Party rallied together to suppress it. This included the oppositions who comprised part of the 300 strong contingent of party delegates which took part in the final storming of Kronstadt and which was ultimately successful on March 18th. Ironically the crushing of the Kronstadt Commune came exactly fifty years after the Paris Commune had been formed. Serge found the celebrations of the Paris Commune a little sickening given that 10,000 of the attackers lost their lives on the ice whilst 1,500 defenders died and a further 2,500 were captured. Some of these were shot by the Cheka. Serge though supported the attack himself. His agonised appraisal of the situation was as good as any contemporary could give us.

After many hesitations, and with unutterable anguish, my Communist friends and I declared ourselves on the side of the Party. This is why. Kronstadt had right on its side. Kronstadt was the beginning of a fresh liberating revolution for popular democracy; “The Third Revolution!” it was called by certain anarchists whose heads were stuffed with infantile illusions. However the country was absolutely exhausted, and production practically at a standstill; there were no reserves of any kind, not even reserves of stamina in the hearts of the masses. The working class elite that had been moulded in the struggle against the old regime was literally decimated. The party, swollen by the influx of power seekers, inspired little confidence. Of the other parties only minute nuclei existed, whose character was highly questionable…
If the Bolshevik dictatorship fell, it was only a short step to chaos, and through chaos to a peasant rising, the massacre of the Communists, the return of the émigrés, and in the end, through sheer force of events, another dictatorship, this time anti-proletarian. (18)

 

Much the same was later said by Bolshevik leaders even if they repeated the Cheka lie that Kronstadt was “a White Guard plot” before it was crushed. Bukharin wrote that it was no such thing but that they had to stamp out the revolt of “our erring proletarian brothers”. Lenin later stated more accurately that the Kronstadters neither wanted the government of the Whites nor of the Bolsheviks but “there is no other”. And this was accepted internationally at the time. Even the KAPD who was already moving into opposition to the Third International accepted in 1921 that the suppression of Kronstadt was necessary.

 

However, it is one thing to say that all internationalists at the time supported the crushing of Kronstadt and another not to draw lessons from it. Whilst Trotsky could still write in his biography of Stalin in August 1940 that the suppression of Kronstadt was “a tragic necessity”, today we can take a rather longer look at its historical lessons. Here we cannot look at Kronstadt in isolation. As it turned out, whichever side won was a victory for the counter-revolution. However, whilst the defeat of the Kronstadt sailors was a defeat for soviet power inside Russia, the prospect of international revolution still lay open and this was the critical factor in the opinions of the revolutionaries of the time.

 

The real problem lay in the fact that the Party was the state. The lesson is that the Party has to be the party of the international proletariat whatever its members do inside the soviets of a particular territory. It may be in the future that there will be occasions where party members clash again in a revolutionary situation due to material privation, as in 1921, but the Party of the future as a body will be international. And this does not just mean in spirit. It will not be physically tied to one territorial entity. If soviet power means what it says then the soviets in each territory may vote for Party delegates and remove them but the Party itself stands only for the programme of international proletarian revolution. It is not the state nor does it wield state power even in the temporary workers’ state of the transition from capitalism to communism. (19) For revolutionaries at the time, the young workers’ state had survived a critical moment. For us, with the benefit of hindsight, we can see that whatever happened at Kronstadt, the counter-revolution was on the march. We are still suffering the consequences of that today.

 

The March Action and the Third Congress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Kronstadt was not the only event in that month that indicated the ebbing of the revolutionary wave. In Germany, as we saw above the Communists had split between the KAPD and the KPD in 1919 and all attempts to re-unite them fell on deaf ears on both sides. For its part the KPD oscillated from its birth between putschism and passivity. Its participation in the so-called March Action was a disaster which not only cost it two thirds of its membership (falling from 450,000 to 180,000 in three months) but really sapped the morale and revolutionary will of the working class. Partly the KPD responded to a provocation of the Army (which tried to disarm workers), partly to the encouragement of Radek and Bela Kun to help break the isolation of soviet Russia and partly to be seen to act more decisively than it had done during the Kapp Putsch where it had let the SPD organise the strikes which overthrew that right wing attempt at a coup. At the end of the Action the KPD leader Eberlein tried to stimulate the workers to carry on fighting by blowing up KPD buildings — a tactic which backfired when it was exposed by the ruling class. The final fiasco came when workers in Hamburg who wanted to carry on ended up fighting workers who saw the Action was over.

Long before the defeat of the March Action in Germany, Soviet Russia was negotiating its survival in the post-war imperialist set up. This did not mean the automatic abandonment of the world revolution, simply a recognition of the weakness of the soviet economy and the need to re-establish foreign trade. On March 16th 1921, two days before the final suppression of Kronstadt, the British Government signed the Anglo-Soviet Trade agreement which involved de facto recognition of the Bolshevik government in return for the suspension of all propaganda against the British in Afghanistan and India. However, secret negotiations had being going on longer with the German Army and Government so that even though the March Action was taking place a German trade mission under Rathenau came to Moscow. Krasin, the Soviet Commissar for Foreign Trade even warned German workers at this critical point that striking would impede deliveries to the Soviet Union!

 

Further evidence that the revolutionary wave was dying out came at the Third Congress of the Third (Communist) International in June — July of 1921. Here Trotsky told the delegates that in 1919 they had expected world revolution in a matter of months. Now they were talking about “a question of years”. The debacle of the March Action and the Kronstadt Revolt lay heavy on the minds of the Bolshevik leaders who organised the main debates. No longer was the framework one of intransigent defence of revolutionary positions in the 21 Conditions adopted by the Second Congress. At this point the main concern was how to achieve a mass basis for Communist parties. Given that the revolutionary wave was ebbing this meant seeking alliance with the very Social Democrats who had joined the imperialist camp in 1914 and had connived at the murder of hundreds of communist by the crypto-fascists. The Third Congress of the International was thus another watershed in the counter-revolutionary turn of 1921. It also indicated how the fate of the International would remain bound up with the course of the counter-revolution in Russia. This first became clear in the debate on what had previously been called “the national and colonial question”. Previously, the International had had an exaggerated policy of seeing national struggles against imperialism as linked to the struggle for communism. Now (only nine months after the Baku Congerence) it did not even refer to “national and colonial struggles” but to the “eastern question”. A Russian trade treaty with the British Empire plus treaties with Persia (Iran) and Turkey meant that these governments were not to be offended. Small wonder that the Indian Communist, M.N. Roy delivered the only really heavyweight verdict on the debate by denouncing Comintern policy as “pure opportunism” “more suitable for a congress of the Second International” (20).

 

The same thing was also true of the shift in policy towards social democracy in general. The united front with the butchers of the working class would have been proclaimed at the Third Congress if it had not already been associated with the disgraced German KPD leader Paul Levi who had been expelled at the beginning of the year. Instead the exhortation of the Bolshevik leaders in the Third Congress was “to the masses”. But the Communists had already been using this idea even when trying to split the social democratic parties. So what could the new slogan mean? Nothing other than a rapprochement with social democracy at all levels. Whilst our political ancestors who then led the Italian Communist Party had no trouble with the slogan, they did choose to apply it differently. To them going “to the masses” meant joining in strikes and other actions with workers in the social democratic parties but continuing to oppose the class collaborationism of their leaders. By December when the Russian Party adopted the slogan of the “united front” for the first time, it was clear that the idea was not about working with the rank and file but with the leaders — this was the first step in abandoning the revolutionary path on an international scale. It was not announced as such but de facto it was already that. If 1921 showed that the revolution inside Russia had now swung against the working class, it was also the beginning of the process that led to abandoning the proletarian principles of internationalism. In the verdict of our comrades in the Internationalist Communist Party the Third Congress was the turning point in the history of the Communist International:

The contradictions which loomed on a global scale continued to grip the first revolutionary experience. To have made the revolution in any country, to have momentarily defeated in armed conflict its own bourgeoisie did not mean socialism was being built but only the establishment of the necessary political conditions for it. It is absolutely essential to destroy the political instrument through which the bourgeoisie exercises its class domination and to replace it with another, proletarian one, organised on the basis of an iron class dictatorship but this, in itself, is not enough.
In order to have gone on effectively towards socialism, the revolution needed a sufficiently developed political structure and an economy which was totally autonomous from the world market, conditions which Russia in those years lacked. Which is why the only salvation from Russia’s backwardness lay in revolutionary victory in some western, or better still, some industrially advanced country. It followed from this that the Communist International and the Bolshevik Party which, like it or not, was the backbone of the Comintern, had to make every effort to accelerate or at least promote, uncompromising revolutionary solutions on the basis of the first two Congresses.
However it was dressed up, abandoning the political autonomy of the class party and the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served neither to convince the leaders of social democracy nor to re-unite the masses around a programme of revolutionary compromise but only to confuse the international proletariat, blunt its political weapon of struggle and obscure its goals. The legitimate doubt arises that behind the official analysis of the Bolshevik leaders, and the Comintern itself, there was the idea that the situation was less favourable than previously foreseen. It was thus deemed worthwhile assisting the still-precarious Russian situation by an international alliance with social democracy to give it a firmer guarantee of safety than extend the revolution. Only in this way can we understand how the tactical adjustments to the united front and the workers’ government emerged from ambiguity to assume their real shape. (21)

 

On May Day 1922, the slogan of “world revolution” was missed out for the first time from the slogans issued by the Russian Communist Party.

 

To the revolutionaries of the time however the significance of this was not so obvious. Setbacks will always occur in any process and revolutionaries have to maintain a rational optimism that such setbacks can be reversed. Trotsky defended the adoption of “to the masses” as “the strategy of temporary retreat” but how long is “temporary”? By 1922 Bordiga was openly criticising “the danger of seeing the united front degenerate into a communist revisionism” (22). By 1924, he was demanding the abandonment of the “united front” and the “workers’ government” slogans as total confusions. By this time however, further degeneration had set in with all the Communist Parties affiliated to the International subject to “bolshevisation” i.e. their leaders were chosen for their compliance to Moscow and to the interests of the Soviet state’s foreign policy. Gramsci replaced Bordiga on Moscow’s insistence and he used various organisational means to destroy the hold that the Italian Communist Left held over the Communist Party of Italy (even if it did take until the Lyons Congress of 1926) (23). By this time our political ancestors in the Communist Left had formed the Committee of Intesa (alliance) whose Platform summed up their verdict on the whole fiasco of the Comintern’s policy.

 

It is mistaken to think that in every situation expedients and tactical manoeuvres can widen the Party base since relations between the party and the masses depend in large part on the objective situation (24).

 

Revolution is an Affair of the Masses

To conclude then, 1921 was not just a chain of disconnected setbacks but represented the real end of the revolutionary wave and the definitive beginning of the reversal of the process which had put world proletarian revolution on the historical agenda. To the revolutionaries of the time it was obvious that a massive retreat on an international scale was taking place. The Bolsheviks took the view that they had to hold the original proletarian bastion together until the world revolution arrived. But the weakness of the Russian proletariat meant that increasingly the Bolshevik Party transformed itself not simply into the director of the state but into the state itself. And this state was increasingly one of nascent Soviet capitalism against the working class. Thus we have one of the most confusing counter-revolutions in history where the party that had been the highest expression of working class consciousness in 1917 was transformed by the historical circumstance of the Russian proletariat’s isolated war against imperialism into the agent of proletarian defeat. None of this went unremarked by the oppositions inside the Bolshevik Party and even by Lenin himself. At the Eleventh Congress of the Russian Communist Party in March 1922 he told delegates:

[…] and if we take that huge bureaucratic machine, that gigantic heap, we must ask: who is directing whom? I doubt very much whether it can be truthfully said that the Communists are directing that heap. To tell the truth they are not directing, they are being directed. (25)

 

However, only with the enormous benefit of hindsight can we see that 1921 was the year in which the revolution was lost and this has to be part of our balance sheet of the Russian experience. What we draw from that experience is not the councilist one that all parties are bourgeois (as Otto Ruhle concluded, before running off to work for the Mexican Government of the Party of the Institutionalised Revolution!). Because the working class has no property to defend, its consciousness (encapsulated in its programme) can only take form as a collective body. And because some workers, by virtue of their experience, will come to revolutionary ideas before others they have to take the lead in organising themselves. This means a political body which is not based on compromise with the capitalist class but is its constant adversary. This to us can only imply a revolutionary party. What 1921 and the decline of the revolution demonstrate, however, is the need for that party to be international and centralised prior to the revolutionary outbreak. That same party remains outside all governmental or statist functions as a body whatever its local membership have to do. At a local level, power is wielded by the armed workers’ councils. They are the only state bodies until the bourgeoisie is suppressed world wide. The Party is a political vanguard which defends the programme of communism rather than any territory claiming to be en route to communism. There may be those who would argue that this is as utopian as it is idealist but we have to remember that in 1921 itself, at the Tenth Party Congress:

For a brief moment Lenin flirted with the idea of effecting a separation between Party and state. He briefly urged a clear specification and demarcation of the respective spheres of each and proposed that the organs of the state be given much greater autonomy and freedom from Party interference. (26)

 

Harding later tells us that Lenin recognised “almost instantly” that his proposal would not work. But this was because the situation in 1921 made it impossible to re-write the past. The Bolsheviks could not abandon state power because the soviets were already empty shells. Had this proposal been made in November 1917 and had the soviets retained political life, then it would have been possible. In 1921, the Bolsheviks were reduced to the Micawber position of holding on to state power in the hope that “something would turn up” in the shape of world revolution.

 

All this is simply utopian if the working class is not moving en masse and breathing life into the international party and the workers’ councils. Ultimately the only guarantee of victory is the relatively rapid extension of the revolution to at least the major imperialist countries, for, until they are paralysed they have the capacity to destroy any revolutionary initiative. By imposing an international civil war on an already exhausted soviet republic they were able to destroy it materially. Whilst the Bolsheviks won militarily on Russian territory the failure of the world revolution elsewhere meant that the class struggle was lost politically. The adoption of NEP and the united front in 1921 were the epitaphs of that political defeat. The working class is still living with the consequences.

IBRP
 
 

(1) See Victor Serge, The Revolution in Danger [translated by Ian Birchall] (Redwords,1997)

(2) We don’t accept the term “libertarian Marxist” as for real Marxists, Marxism is libertarian or it is nothing. Stalinism etc. is not Marxism. For our wider views on the Russian Revolution see our pamphlet 1917 [£2 from the Sheffield address]. A new version which has been extended to take in the counter-revolution is in preparation.

(3) See the contrast between Arthur Ransome’s, Six Weeks in Russia 1919 and The Crisis in Russia 1920 [both published by Redwords,1992]

(4) Quoted in W.P. and Z. K. Coates, Armed Intervention in Russia 1918-22 [London 1935] p.229.

(5) Rethinking the Russian Revolution [Edward Arnold,1990] p.204.

(6) Victor Serge, Memoirs of a Revolutionary (Oxford,1963) pp.70-1.

(7) Although the heroic opposition of the smaller Balkan Socialist parties in Serbia and Bulgaria should also be recorded.

(8) Lenin, Selected Works, Vol.2 p.505.

(9) Lenin, Collected Works, Vol.33 p.98.

(10) Quoted in The German Revolution and the Debate on Soviet Power (ed. John Riddell, Pathfinder Press, New York 1986 p.33).

(11) Quoted in E.H.Carr, The Bolshevik Revolution Vol.3 (Pelican edition,1966) p.133.

(12) Carr, ibid. British troops were not withdrawn for another six months and not before London dockers had refused to load the Jolly George supply ship bound for Archangel and Murmansk.

(13) Carr, op. cit. p.138.

(14) L. Kritsman, The Heroic Period in the Great October Revolution (1926) p.166.

(15) See P. Binns, T. Cliff and C. Harman, Russia: From Workers’ State to State Capitalism, (Bookmarks 1987) p.20. They are doing no more than repeating Trotsky’s own false accusations in his 1938 article, Hue and Cry over Kronstadt.

(16) Quoted in Kronstadt 1921 Analysis of Popular Uprising in the time of Lenin in Revolutionary Perspectives 23 p.22.

(17) Ida Mett, The Kronstadt Commune.

(18) Serge, op.cit. pp.128-9

(19) We also reject the idealism of the International Communist Current which thinks that it is enough to say that “all actions of violence within the proletariat are to be outlawed” (see International Review 100, p.21) as if this solves the problem. Not only is this simply a pious resolution with which anyone can agree but it does also pose another question. The decision of who is proletarian and who is not, still has to be made, and we certainly would be nervous of passing any test imposed by the ICC!

(20) See E.H.Carr, The Bolshevik Revolution Vol.3 p.386.

(21) I nodi irrisolti dello stalinismo alla base della perestrojka (Edizioni Prometeo 1989) pp.20-21 [Lit. 18,000 from our Milano address — see page 2].

(22) See G. Williams, Proletarian Order, p.213

(23) See our phamplet Platform of the Committee of Intesa 1925, [2 pounds from CWO address — see page 2].

(24) ibid. p.18.

(25) Lenin, Collected Works,Volume 33.

(26) N. Harding, Lenin’s Political Thought [MacMillian 1977]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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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 트로츠키의 사망 70년을 맞아 -공산주의투사(Battaglia Comunista)

 레온 트로츠키의 사망  70년을 맞아

At 70 years after the murder of Leon Trotsky

 

사용자 삽입 이미지위대한 혁명의 기억속에서, 미래의 혁명의 관점에서 트로츠키가 저질렀던 실수로 부터  배워야 한다

In memory of great revolutionary, to learn from his mistakes done in view of future revolutionary

 

On August 20, 1940 a gunman penetrated the deception of Stalin in Mexico in the house where Trotsky had taken refuge after his expulsion from the USSR in January 1929, and a long flight across Turkey, France and Norway. Taking advantage of an unguarded moment, pull out an ice ax dall'impermeabile, launched a violent blow to the head, killing one of the last survivors of the protagonists for Red October Stalinist terror at home.

 

1905. Trotsky we remember the role as chairman of the first Soviet (proletarian mass assemblies created to organize the political struggle of class against the bourgeoisie and tsarism) in Petrograd, a tireless organizer and promoter organization of workers' councils nerve center of the insurrection of 1905, its capacity - even before Lenin - to identify what organizational form the source of future organs of bourgeois power of the proletariat and the means of reorganization of the new world.

 

 1917. Trotsky is still in the course of 1917, to accede unconditionally to the April Theses Lenin and the draft according to which the revolution was possible even in semi-feudal Russia for two fundamental reasons:

 

it was the weak link of the Exchequer imperialist world, the difficulties of the Tsarist regime that could be exploited to open a gap in the international capitalist camp, the prospect of world revolution;

 Although Russia was still at a very backward (despite the "islands" of strong industrialization), his working class had proven to fulfill the revolutionary tasks by virtue of his ability to lead an open class struggle, giving life during it, their future bodies of power, the soviets.

 

 1918-20. In the aftermath of the war, Trotsky still plays a major role in both the peace deal with the Germans, is enormous work of organizing the defense of Soviet power against the assaults of whites. For three years he lived on an armored train from which he organized and directed the Red Army on several fronts in the war against encirclement by the reactionaries.

 

1921. Defeats the armies of white, but without the essential contribution of the international revolution that came to the rescue of the Russian proletariat, the Bolsheviks found themselves in front of an isolated situation unexpected in its size. The revolution, isolated, made a slow retreat and political organization.  Almost all of his players fell victim to events which could not decipher, immense. The sad curtain of the counter during the '20s fell on Russia gradually assuming the face of Stalinism. Revolutionaries should have had a penalty and a firmness such as to understand what was happening and, at least, do not let the thread breaks, thus preserving the communist program and the possibility of new revolutions.  As we have argued, among others, in "1921, the beginning of the counter and in the book" The counterrevolution - The unresolved Stalinism, "it was when the revolution was defeated external enemies who became factual account of its isolation, and from there the trouble began to get serious.

 

 The International. From the third congress of the (June-July 1921), in a desperate attempt to artificially extend the influence of foreign communist parties, the international will give the password "to the masses!" Before, dangerous opportunism in the opening world party of the proletariat. Then give an indication of the united front with the social democracies and, finally, again in the vain hope of winning workers with tactical expedients instead due to the coherence and strength of its program, will launch the fourth congress of the slogan "workers' government . Trotsky support and interpreter will turn this incredible tactics which, denying the constitutional principles of revolutionary (that is, bourgeois state machine must be broken by force, there was intermediate between the political dictatorship of the bourgeoisie and dictatorship of the proletariat, Social Democracy is the left bank of storage class), it undermined the coherence and anchoring to Marxism as delivering the masses, to which, while it was going to absolutely heel, would also deny the only means by affiliated parties which could withstand the retreat and prepare for future assaults: policy coherence, adherence to the Marxist method and program communities were gradually made meatballs, many failed attempts at revolution, and finally, the opposition was dispersed. The same interpreter and advocate of Trotsky held tactic again in 1938 by founding the Fourth International and giving a program - the transition program - will resume and expand all compromises, and opportunism in the openings were pregnant in the third and fourth congress of 'International.

 

 Russia. Thus, while the Italian communist left, from 1921-23, denounced the danger of turning in the International opportunist and as loudly demanded that the question of "where is going to Russia?" Was tabled by day of the International and was not treated as a purely internal Russian party (on the other hand, if the revolution had won in Russia, this was possible because it was framed in a strategic global) short, while the revolution already had started to go downhill, Trotsky instead of seizing the opportunity and develop a long battle to return to the communist program, was completely absorbed by the sterile internal clashes between his faction, which favored heavy industrialization, and that of Stalin and Bukharin, pro-free enterprise for the farmers. Defeated on this ground (and not on what the fate of the world revolution!), Folded silently suffering for party discipline, a defeat which he could not make out the huge real contours.  Fell once more to the field again in 1927 in defense planning and industrialization accelerated (!),  The first Russian opposition had failed politically, the Communist program came out totally transformed, the exploited were completely deprived of the only tool that could make their victorious struggle the party and the revolutionary program, now Stalin had his hands free for go to physical extermination.

 

The end. After the defeat, went into exile, while in Russia began the massacre of the entire Bolshevik old guard. This happened just when Stalin, a sudden and drastic change, closing the period of freedom to the peasants and gave off the first five-year plan of heavy industrialization and the "collectivization" forced in the countryside. Stalinism, once defeat the opposition, they implemented the program for the triumph of the counterrevolution, demonstrating the strength of the irrefutable facts that even the program that had adopted the Trotskyist opposition in 1923 was in fact a program harmony with the interests of world revolution.

 

 The tragedy in the tragedy. Trotsky was never able to rework to the core experience of the Russian Revolution, so intensely intertwined with his life at times identify with. Come per  As Bordiga and other revolutionaries who survived those years, to draw a comprehensive and fruitful balance immense experience will prove very difficult, and the attempt to somehow justify Russia (Trotsky, until his death deny that Stalin had restored capitalism) will result in the complex series of theoretical and political aberrations that are called the Fourth International and Trotskyism. The main feature of which over decades has been faithfully to the transition program, the search for every possible tactical apparently necessary to implement a communist, but, in fact has become very vague and indistinct. That, unfortunately, the political legacy of Trotsky - Trotskyism - of which he was convinced and conscious creator, can not be ascribed as products of the counterrevolution and, as such fought.

 

Lotus Lot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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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의 이행기 강령 비판

 

트로츠키의 이행기 강령 비판

공산주의노동자조직(CWO)

 

 

 

 

 

이행기 강령과 제4인터내셔널

 

 

 순수한 정치혁명 이후의 러시아를 사회주의가 될 수 있는 노동자 국가로 파악하는 트로츠키 개념은 그가 단지 자본주의의 본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뿐 만 아니라, 맑스주의적 시각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개념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1938년, 그의 제4인터내셔널의 강령인 「자본주의 죽음의 고뇌와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 좀 더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로는 「이행기 강령」 (Transtional Programme)에서 명확해진다. 우리는 이 강령을 다루면서 방법에 대한 질문부터 시작해야 한다. 현재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도이처(Deutscher)의 피상적인 이해를 기초로 트로츠키가 레닌의 정치적 후계자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레닌과는 달리 트로츠키는 역사적 상황과 자본주의를, 그가 문제제기하지 않았던 범주에서 분석하려 했다. 새로운 사례들이 그의 분석과 모순되자, 그는 맑스주의적 원칙을 토대로 철저히 재분석하고 그에 따라 범주를 수정하는 대신, 그것들을 왜곡하여 이미 내린 결론에 맞춰버렸다.  우린 이미 러시아 경제에 관한 그의 분석에서 이러한 방법을 보았다. 그가 처음에는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쥐고 있으므로 노동자 국가라고 논쟁하다가, 이 주장이 유지하기에 너무 당혹스런 것이 되어서야 비로소 사회주의적 소유관계에 대한 경제적 주장을 뒤섞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2차세계대전 이후 러시아 제국주의가 동유럽 국가들을 그 지배 아래에 두었을 때, 제4인터내셔널의 트로츠키의 열등한 후계자들 (파블로 Michel Pablo, 만델 Ernest Mandel, 그란트 Ted Grant, 캐넌 James Cannon)은 그들의 교사의 가장 훌륭한 전통에 따라, 이들 국가들은 마찬가지로 노동자 국가가 틀림없다고 결정했다. 비록 노동자 계급이 권력을 쥐고 있지 않았으며, 그 체제가 순수한 스탈린주의 관료주의의 산물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반동적 자본주의 원형의 관료주의도 진보적이며 노동자 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므로 러시아가 노동자 국가라는 허구를 유지하기 위해, 맑스주의와 진실은 끊임없이 희화화되고 왜곡되었다. 영구혁명, 즉 후진국 노동자와 농민은 부르주아지가 힘이 없고 의존적이기 때문에 국민 부르주아지의 역할을 수행해야만 한다는 주장 역시 영구위기 이론과 마찬가지로 방어되었다. 이 이론들은 트로츠키의 분석적 틀의 대들보를 형성했으며, 매우 유용하게 여겨졌다. 이 이론들을 자기모순에 의해 붕괴되도록 두는 대신, 트로츠키는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영역을 포기하는 희생을 무릅쓰고, 방법론적으로 이 이론을 버팀목으로 버텼다.

 

 대신 트로츠키가 우리에게 준 것은 손쉬운 슬로건, 즉 근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사회관계와 새로운 시기의 정치적 의무를 파악하는 그의 무능력을 감추는 데 실패한 슬로건이 된 영구위기와 영구혁명에 대한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이행기 강령에 있었던 자본주의의 역사적 임무는 이미 완수되었다는 정확한 인식은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 강령으로 퇴보하게 만든 그 전망에 대한 경제적 무지와 정치적 즉시성에 의해 무색하게 되었다. 이 무지의 가장 눈에 띄는 예는 경제적 영역에 있었다. 트로츠키는 인류의 생산력이 정체되었으므로 자본주의는 혁명에 무르익었다고 한다. (이행기 강령 11쪽, WRP 팸플릿) 이것은 1930년대에는 옳았을 수도 있었으나 오늘날 단순한 통계치 하나로 진실이 아닐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을 쓴 서구 자본주의 전체는 말할 것도 없이 미국의 GNP가 몇 배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 실증적 증거는 그 진술의 유효성을 무효화하기에도 충분하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실제 자본의 운동을 이해하는 그의 방법상의 실패이다. 자본주의는 맑스가 많은 경우에 썼듯이, 생산도구의 지속적 혁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공산주의자 선언)

 

 제국주의 시대, 자본주의의 쇠퇴시기도 그 근본요소를 바꾸지는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의 축적 사이클은 상업적 위기로 잠시 정기적으로 멈칫거렸을 뿐 끝나지도 않는다. 제국주의 시대의 다른 점은 이런 위기들의 부르주아 해결방식이 단순한 새로운 사이클을 시작하게 하는 몇몇 파산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부흥은 오직 세계적 토대 위의 자본의 대량 파괴를 거쳐서 오는 제국주의 전쟁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19세기 사이클은 지금 시대에 호경기-불경기-전쟁-재건-호경기로 계속되는 하나의 순환이 되었다. 이것은 맑스주의자들에게는 현재 시스템의 쇠퇴를 설명하는 것이 생산력의 정체가 아니라 생산은 증가하지만 남반구의 영속적 기아, 결핍, 전 지구적 주기적 전쟁의 대가로 인류의 이해에는 어떤 의미로도 봉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생산력이 인류 전체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기 전에, 생산관계에 대한 부르주아지의 속박과 그들의 가치법칙은 분쇄되어야 한다.

 

 제국주의와, 국가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주의의 본질을 자세히 설명하는데 실패한 것은 사실 사회주의 투쟁의 토대로서  「이행기 강령」을 완전히 파기시켰음을 의미한다. 자본주의를 임노동의 잉여가치 추출을 통해서만 오직 존재할 수 있는 가치법칙에 기초한 체제로서가 아니라 죽음의 고뇌속의 시스템으로 간단히 정의함으로써 트로츠키의  「이행기 강령」은 자본주의 순환의 단 한 가지 측면(불황기)의 즉각적 틀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러나 1938년 자본주의가 죽음의 고뇌에 빠져있다고 판단하면서, 트로츠키는 이를 파괴하지 못한 프롤레타리아의 실패를 설명해야 했으며, 이 실패를 극복할 처방을 내놓아야 했다. 바로 여기서 트로츠키가 사회민주주의로 돌아선 것이다.

 

 

 

 

이행기 강령과 당

 

자본주의 내부의 역동성을 이해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이행기 강령」은 프롤레타리아적 조직문제에 순수하게 주의주의적 해결책만 내놓는다. 정확히  「이행기 강령」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경제적 선결조건은, 자본주의 하에서 성취될 수 있는 최고의 성과를 이미 보편적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1938년 이것은 여전히 진실이었으나 왜 객관적 조건이 존재한다면 프롤레타리아는 여전히 멍에를 지고 자본주의에 종속되었나? 트로츠키는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왜냐하면, 세계의 정치적 상황 전체가 프롤레타리아트의 리더쉽의 역사적 위기에 의해 주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적 지도력이 부족했다는 의미에서 이것은 사실이지만, 트로츠키는 이런 의미가 아니었다. 지난 4반세기 동안 노동자 계급은 그들의 조직이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원을 받아 왔음을 보아왔다.  먼저 제2인터내셔널 정당들은 그들의 대중조직(노동조합)과 함께 그들의 정부의 도움을 받아 출범했고, 모든 각각의 제국주의 전쟁을 지원했다. 1차세계대전 이후, 이 정당들은 그들이 대량학살을 지원하거나, 독일에서처럼 계급의식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대량학살을 조직했을 때, 노동자들의 대의로부터 스스로 분리했다.

 1914년 제국주의 질서의 가장 확실한 적은 레닌의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라는 슬로건으로 이론적으로 무장된 볼셰비키 당이었고, 이들은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1919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창설했을 때, 이것은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전위였다. 그러나 이전에 설명했듯이 쇠퇴의 과정은 시작되었고, 그 과정은 사회민주주의의 갑작스런 배신보다도 더 음흉한 과정이었다. 1922년 공산주의인터내셔널의 통일전선론 채택은 이 쇠퇴의 중요한 결정적 순간이었다. 1926년까지의 반대파의 축출, 1927년 중국에의 재앙스런   정책들도 이와 같았다. 1938년까지 트로츠키조차도 부르주아지 편에 선 코민테른의 변질이 일어났음을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트로츠키의 보증으로 남아있는 그 별난 논리의 꼬임으로 인해, 그는 제2, 제3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을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보수적 관료주의적 기관으로 보았다.

 다른 말로, 대량 학살과 배신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 조직들은 지도력이 바뀔 수만 있었더라면 혁명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1935년 그 지도력을 획득하기 위해 통일전선과 사회민주주의로의 개입에 대한 지원과 전적으로 일치한다. 정통 트로츠키주의는 혁명적 조직의 물리적 패배와 함께 일어난 이데올로기적 패배를 아직도 인식하지 못한다. 오늘날 이 사회민주주의적 실체들(사회주의당, 노동자당, 그리고 그들의 노동조합)은 비록 가끔 많은 노동자들을 동원하고 수백만의 지원으로 선거에 이겨도, 사실은 부르주아지와 그들의 계급 체제의 일원에 다름 아니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노동자 투쟁을 선거라는 안전지대로, 혹은 한 산업이나 공장의 고립된 경제투쟁으로 돌림으로써 자본주의를 방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930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약점에 대한 트로츠키 분석의 극단적으로 간단한 본질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지도력의 위기가 그들이 그들 계급의 독립과 혁명적 열망을 지켜줄만한 정당의 부재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했다. 이를 이해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제국주의 시대에 자본주의 관계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제4인터내셔널은 그 구성에 이르기까지 부르주아 영역에서 지나치게 작동하여, 스스로 그 창설에서부터 계급정당이 되기에는 부족하게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진정한 구성에 장애물이 되었다. 필요한 것은 구 사회주의 정당과 공산주의 정당의 사회적 보존에 반대하는 가차 없는 투쟁이었다.

 오늘날 트로츠키주의는 여전히 이 노동조합과 정당에 의한 배신만을 이야기하며, 그러므로 그들이 노동자 계급 내에서 할 진정한 역할을 드러내지 못한다.

 국제 공산주의 좌파(이탈리아 좌파)가 그 당시 문제제기 했을 때, 제4인터내셔널은 1920년대 혁명적 파고의 패배에 따른 정치적 해명이라는 필수적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의 정당이라고 주장 할 수 없었다. 트로츠키가 조심스럽게 피했던 그런 명확화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정당의 부활과 역사적 교훈을 고려한 공산주의 강령의 재구성에 필수적인 단계였다. 독립적 계급운동이 없어서 1938년에는 계급정당이 없을 수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프롤레타리아트 전체는 여전히 그들 조직의 프롤레타리아적 본질을 믿었다는 사실이었다. 트로츠키는 오직 제4인터내셔널의 선언만이 그 단순한 의지의 노력에 의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계급정당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가 단지 의지의 부족은 아니다. 당의 중앙집권주의자로서, 지도자로서, 행동하는 계급의 안내자로서, 당의 필수불가결한 역할에 대한 문제제기 없이, 제4인터내셔널의 설립은 혁명과 반혁명의 경험에 대한 신중한 검토를 수행했던 트로츠키의 추종자들 없이 이루어졌다.

 

 정당이란 무에서, 시간과 공간의 고려 없이 스스로 창조할 수 없다. 계급정당의 부재는 비록 독일에서 1918-1919년에 있었던 것처럼, 혁명적 리더쉽의 위기가 역사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운명이 역전되는 객관적 요소였을 지라도, 단순히 그 리더쉽 위기의 결과는 아니다. 트로츠키의 정당에 대한 개념에 따르면, 정당은 계급투쟁의 필수적 부분이 되는 대신, 그 성원들의 결정에 의해 인류의 역사적 반란을 극복할 수 있고, 극복해야 하는 구원자(deus ex machina)의 관념적 형태를 가정한다. 이것은 강령의 이행 요구들을 분석할 때 훨씬 뚜렷해진다.

 

 

 

이행기 강령 요구

 

 「고타강령비판」에서 맑스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본을 파괴하는 것을 체계적으로 수행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행기 강령」, 「자본주의 죽음의 고뇌와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 - 권력 쟁취를 위한 준비로서 이행의 요구를 둘러싼 대중의 동원」 은 제목이 이야기 해 주듯, 맑스의 이행 개념과는 거의 아무런 관계가 없다.

 트로츠키에게는, 30년대에 아무런 혁명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죽음의 고뇌 속에 있었고, 때문에 이미 이행의 시기는 도래했다는 것이 명백했다. 맑스에게는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부르주아 국가를 파괴하고 나서야 시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1871년 파리꼬뮨의 교훈이다)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향한 근본적 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트로츠키는 전반적으로 사회주의에 대한 맑스주의의 개념과 관계없이 움직였다. 사실 트로츠키는 최소의 요구를 함으로써 제2인터내셔널의 개혁주의로 되돌아갔고, 이는 그런 최소의 요구조차 부패하는 자본주의 내에서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믿었다는 단순한 차이밖에 없었다.

 

현재 시대는 혁명정당이 일상적 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 일이 혁명의 실질적 과업과 분리될 수 없이 수행되도록 되었기 때문에 구분된다.

 요약하면, 이전 사회민주주의의 최소강령은 이제,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는 최대강령이 되었다. 자본가 계급의 혁명적 타파 없이는 가장 기본적인 요구조차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C.Slaughter, 이행기 강령의 WRP 편집판의 서문」

 

 이 명백한 난센스는 「이행기 강령」 의 요구를 가장 피상적으로 관찰만 해도 없어진다.

  트로츠키가 우리에게 준 것은 프롤레타리트에 의한 권력 쟁취에 선행하는 은행의 국유화, 산업의 노동자 통제, 공공근로, 임금의 물가연동제와 같은 것을 요구함으로써 자본주의를 개혁할 거대한 계획이다. 명확히, 그런 발본적 요구들은 트로츠키의 동시대 인물인 케인즈에 의해 자본주의를 구원할 명백한 계획으로써 이미 주창되었고, 사실 모든 수단들은 자본주의 질서의 보존을 위해 부르주아 국가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동유럽에서 은행의 국유화, 유고슬라비아의 노동자 통제, 이 둘은 근대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것으로 환영받았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스칼라 모바일(scala mobile)같은 임금의 물가연동제 공공노동 등은 실제로는 선진 자본주의 세계에서 자본을 파괴하는 것이 아닌 떠받치기 위한 단계이다.

 

 그러므로 트로츠키가 러시아에서 국가 역할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실패한 것은  「이행기 강령」 이 가진 당연한 결과였다. 국가를 자본가 집합으로 보지 못했다는 것은, 트로츠키는 여전히 국유화를 사회화와 동일시 여기며, 사회주의의 주 과업을 임노동의 철폐가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타파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행기 강령」은 1890년의 에르푸르트 강령보다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심지어 최대의 혁명적 부분조차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겨우 한 번 언급되었으며, 그것도 우연히 그러했고, 사회주의의 본질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다. 이것이 바로 다음의 「이행기 강령」의 목적에 대한 언급을 어처구니없게 만드는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 강령과 대중의 현재 요구 사이의 가교를 찾기 위하여 일상적 혁명적 투쟁의 과정에 있는 그들을 돕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현재의 요구란 잠재적으로 혁명적이라고 이미 지적했다. 부족한 것은 사회주의 혁명 강령에 따라 대중과 함께 투쟁할 당뿐이었다. 트로츠키의 끝없는 실패는 이 강령을 현시대 자본주의에 맞춰 정교화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혁명가들은 요구들의 중요성을 인식하지만, 이것들은 추상적 명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진행되는 투쟁의 산물이다.  「이행기 강령」의 요구와 같이, 그 요구들은 쉽사리 자본주의에 의해 복구된다. 1848년 혁명 이후,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공식화된 각 요구들은 존재하는 계급투쟁의 상황에 대한 직접적 대응이어야 한다는 것을 명백히 했다.

 

 운동의 초기에는, 노동자들은 어떤 직접적 공산주의적 수단들을 제안할 수 없다. 그러나 ... 만약 소부르주아지가 철도와 공장을 매점매석할 것을 계획한다면, 노동자들은 반드시 그것들이 국가에 의해 무상으로 몰수되어야 한다고 요구해야 한다. 만약 요구가 비례세를 제안하면, 그들은 누진세를 요구해야 한다. ...  그 비율은 매우 가팔아서, 결과적으로 자본은 곧 박살날 ... 만약 민주주의자들이 국가부채의 조정을 요구한다면, 노동자들은 그 지불거부를 요구해야할 것이다. (공산주의자 연맹 중앙위원회에 보내는 연설)

 

 이 변증법적 개념은, 변질되고 있던 코민테른, 특히 3차 대회의 해묵은 창고에서 트로츠키가 집어낸 사상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코민테른에서는 대중들이 아직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의식적으로 대표하여 투쟁하지 않을 때, 투쟁의 단계를 구성하는 정밀한 요구들이 있다고 언급되었다. (Frank, 앞의 책 61쪽에서 재인용)

 

 이것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단지 노동자 대표라고 불리는 이들의 의회 투쟁을 단순히 이곳저곳에서 정치적 시위로 도와줘야한다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요구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생각 없는 대중으로 밖에 보지 않는 카우츠키의 특징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 투쟁은, 그 단결을 이뤄내는 요구뿐만 아니라 투쟁의 진정한 목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에 대한 요구를 정의함으로써, 그 속에서 함께 있음으로서 그 투쟁을 더 큰 단결로 이끌고 그럼으로써 더 큰 목적으로 이끌 수 있었던 혁명가들의 상이한 요구를 만든다. 이것은 「이행기 강령」 이 회피해오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시작점이 역시 마지막 점인 대중의식의 즉각적 수준이기 때문이었다.

 트로츠키는 그러므로 그가 제2, 그리고 제3인터내셔널의 약점을 극복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 약점은 대중과 함께 싸웠던 그들의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와 부르주아 국가 전복의 필수성에 대한 명백한 개념을 가진 리더쉽을 제공하지 못한 무능력에 있었다. 이러한 약점을 비판하는 대신, 트로츠키는 이를 미덕으로 삼았다. 프롤레타리아 패배 시기의 대중의 획득은 그의 주의주의의 중심이었고,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 모든 (실패한)전략은 통일전선에서 최소강령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프로그램은 대중적 기반을 획득하기 위한 헛된 노력을 하는 트로츠키에 의해 계속되었다. 이 논리에 따르면, 그는 그의 프랑스 지지자들에게 SFIO(제2인터내셔널의 프랑스 섹션)에 가입하여 “그들의 요새에 가서 개량주의에 도전하라” 그리고 “대중에게 혁명적 프로그램을 전하라”고 말했다. 그는 코민테른의 1935년 인민전선 정책의 채택을 비판하는 위치에 있었던 적은 거의 없었고,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이 사회민주주의 편에 옮아가는 것에 대한 공공연한 비판은 지속적이지 않았다. 특정한 반혁명 논리 -코민테른의 정책(프랑스, 영국, 제국주의와 동맹하여 중유럽의 파시스트 정책에 저항한) - 가 있는 동안, 트로츠키의 사회민주주의로의 입당주의는 전혀 의미가 닿지 않았는데, 특히 그가 예견했듯이 혁명이 코앞에 다가왔다면, 더욱 그러했다.

 

 우리는 선언한다. 코민테른의 처방은 전적으로 거짓이다. 노동계급정당의 비혁명적 정책을 인정하더라도 상황은 혁명적인 것만큼 혁명적이다. 이 상황을 극도의 성숙한 혁명으로 몰고 가기 위해, 즉각적이고 정력적이며 쉴 새 없는 대중의 동원이 있어야 하며, 이는 권력 쟁취의 슬로건 아래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혁명 이전 상황이 혁명적으로 바뀌는 유일한 방법이다.

 

 1920년대의 노동자 계급의 패배를 깨닫지 않았기에 1938년 트로츠키는 부르주아지가 수행한 제국주의 전쟁에 무방비로 있었다. 그러므로  「이행기 강령」이 레닌의 제1차세계대전 당시의 혁명이론인 혁명적 패배주의의 핵심지점에 대한 명백한 거부와 함께 끝났어야 한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이것이 트로츠키주의가 2차 제국주의 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주의와 서구 제국주의 양 편에 모두 가담하도록 했다.

 

 

 

제2차 제국주의 전쟁

 

 「이행기 강령」은 분명히 다음 시기에 혁명정당은 주로 전쟁 문제에 대한 정책의 성공에 달려있다고 말하고 있다. (31쪽)

 

 그것은 심지어 공산주의 원칙의 기본인 제국주의 전쟁에서 주요한 적은 그 자신의 국가에 있다는 것을 반복한다. 그러나 동시에, 트로츠키는 곧 소련의 본질 분석 실패와 구 코민테른의 통일전선 정책에 대한 재검토의 실패가 그로 하여금 공산주의 원칙을 포기하도록 했음을 밝힌다.  「이행기 강령」의 같은 페이지에서, 그는 제국주의가 아닌 다른 억압받는 나라뿐만 아니라 소련이건 다른 노동자 정부이건 간에 그들을 지원하고 방어하는 똑같은 의무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트로츠키의 소련의 생산관계 분석 실패는 러시아가 제국주의 동맹의 네트워크에 참가하는 것에 직면하여 그를 무방비 상태로 만들었다. 독일에 맞서 영국, 프랑스와 연합하여 이기려 했던 스탈린의 정책이 있었던 1930년대의 증거에도 불구하고 : 스페인과 중국에서의 이 정책의 결과에도 불구하고 : 1939년 폴란드를 공격하기 위해 히틀러와 맺은 스탈린 조약에도 불구하고 : 필란드에 대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 트로츠키는 그가 죽는 날까지 러시아가 자본주의도 제국주의도 아니라는 허구에 집착했다. 사실, 1939년에 쓰인 그의 글,   「소련과 전쟁」에서 트로츠키는 모스크바의 정치 전체를 반동적 성격으로 비판했지만, 노동자 국가가 보나파르트주의 엘리트에 의해 강탈당했다는 사소한 논쟁을 제외하고는, 왜 소련이 반동적 정책을 취했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었다. 같은 글에서 트로츠키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이해와는 반대로 소련에서의 사회주의를 방어하기 위해 스탈린을 탈스탈린 화시켰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소비에트 관료주의의 문제제기가 우리에게 있어서 소련의 생산수단의 국가소유를 보존하는 문제에 종속되며 (그리고)...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문제에 종속된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놓쳐서는 안 된다.

 

 이것이 제임스 (CLR James), 버냄 (Burnham), 샤흐트만 (Schachtman) 등 러시아의 본질에 대한 다른 분석을 했던 이들과 제4 인터내셔널을 분열로 이끌었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이 논쟁에서의 트로츠키의 글은 「맑스주의 방어」라는 제목으로 잘 수집되어 출간되었다. 부적절한 제목이었음에도 그의 글은 지금 그를 패배하게 한 일관성의 위기임을 보여준다. 이 책에서의 그의 논쟁, 즉 만약 전쟁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귀결되지 않는다면 맑스주의는 반박될 것이며 사회주의의 가능성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논쟁은 그가 1939년 쓴   「소련과 사회주의」에서 이미 썼던 것의 좀 더 확고한 변형에 불과하다.

 

 모든 가능성과 반대로 만일, 10월 혁명 (소련을 의미함 -편집자)이 지금 전쟁의 과정에서, 혹은 그 직후의 과정에서 어떤 선진국에서 지속하는데 실패한다면, 그리고 만약,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가 모든 전선으로 되돌려 보내진다면, 우리는 의심 없이 현재 시대와 그 추동력에 대한 우리의 개념을 교정해야 하는 문제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맑스주의의 방어가 아니라 맑스주의의 범주에 기초하지 않은 분석의 논리다. 1920년대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를 이해하지 못하여, 그는 그 약점을 1938년에 맑스주의가 아닌 관념론에 무게를 둔 의지의 노력으로 극복하려 했다. 이것은 트로츠키의 오류의 끝이 아니었다.

 「맑스주의 방어」에서 그는 소련의 방어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늪의 방어를 요구하며 제국주의를 지원하는 길을 따라 훨씬 더 나아갔다. 이것은 소련, 영국, 미국 사이에서 편의에 따라 결성된 제국주의 동맹을 야기한 1941년 히틀러의 러시아 공격전이었다. 미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이 러시아 분석으로 분열되었다면, 프랑스 트로츠키주의자들 또한 독일과, 제국주의 동맹에 대한 방어문제로 분열되었다!  <민족 혁명 운동의 혁명 프랑스>가 억압 없이 히틀러와의 협력을 요구하는 동안, 베리떼(Verite)의 제4인터내셔널 위원회는 몇 세대의 프랑스 노동자들과 농민들이 축적한 부의 보호를 요구했다. (1940년 9월)

 

 트로츠키주의의 기원에 대한 우리의 개관은 이 안타까운 이야기와 함께 끝난다. 이 시기의 원칙적이지 못한, 많은 분열의 첫 번째 문제는, 여기서 보았듯이, 현재 시대와 추동력의 개념을 명확히 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트로츠키의 실패에 대한 비판은, 공산주의 강령과 국제 공산주의당을 위한 투쟁의 역사를 파괴할 만큼에 이르지는 않는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는 어디서든 우리의 시각을 바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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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기구

노동자평의회(workers council)가 권력을 갖고 있지 않는 한,

그곳이 어느 곳이든

자본주의 국가이든,  가짜 사회주의 국가이든, 복지국가이든,  현존하는 최고의 민주주의 국가이든...

 

경찰(police)은   권력과 자본의 상설화된 폭력기구일 뿐이다.

특별히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겐 일상화 된 폭력의 가해자이며,  당장 물리쳐야 할 (enemy)의 대리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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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의 의미와 계급투표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0/07/23 13:08
  • 수정일
    2011/10/27 16:58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부르주아 선거의 의미와 계급투표

 

 

 

이형로

 

 

 

<노동계급의 자립화에 대하여>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말은 노동자계급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거나 독자적인 혁명의 수행이 어려웠던 시기 다른 계급과의 연대나 협조가 필요했을 때 적절한 용어였다. 하지만, 현재와 같이 노동자계급이 생산과 역사의 주체임을 자각하고, 사회혁명을 주도할 유일한 계급으로 성장한 이상, 노동자계급은 더 이상 객체로서가 아닌 다른 계급들에 대해 독립성을 획득해야 하며,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자립성, 자기조직화로 표현된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일이어야 한다" 는 맑스의 테제는  현실운동에서 미래의 혁명을 위해 무시되거나, 먼 훗날에나 가능한  이상적인 문구가 아니다.  현실운동에서부터  노동자계급은 자립성을 획득하려는 노력들을 해야만 계급의식이 고양되고 계급투쟁이 전면화되었을 때, 반혁명적 괴저와  대리주의의 환상에 빠지지 않고 흔들림없이 자기권력창출과 자기해방으로  나아갈수 있다. 노동자계급은 역사적으로 이러한 자립적인 계급의 조직을 스스로 탄생시켰는데, 그것은 바로 노동자평의회이다.  이러한 노동자평의회의 생성과 권력창출, 자기해방으로 나아가는 전 과정이 바로 노동자계급의 자립화와 지도력 획득의 과정이다.

 

노동자계급의 자립성은 사회 내부의 모든 다른 계급들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립성은 계급의 혁명 활동을 위해 하나의 불가분한 전제조건을 나타내는데, 노동자계급만이 유일한 혁명계급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립성은 계급의 자립적 조직인 노동자평의회와 계급의 정치조직인 혁명당과 강령으로 표현된다. 인민전선과 같이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부르주아의 어느 정파의 이해관계와 혼합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통제하고 잠재워 결국 노동자계급의 자립성을 저해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노동자계급이 체제의 내부에서 개혁들을 얻어낼 수 있었던 시기에는, 의회주의 제도에 노동자계급의 참여를 통해, 생활개선과 개혁들을 위한 압력수단으로서 의회가 이용될 수 있었다. 선거 시기 선거 캠페인을 하는 것도 노동계급의 정강을 위한 선전 및 선동가능성으로서 활용될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적 정치의 실체와 위선의 폭로를 위한 연단을 의회로부터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공산주의 혁명의 의제와 혁명의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내걸어야 하는 자본주의 쇠퇴기인 현재에서는 선전 및 선동수단으로서 선거와 의회의 활용이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의회와 선거참여에 대한 전술들이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정치적 장치들을 유지하고, 노동자들의 수동성을 조장하는 경향이 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선거와 의회에 대한 참여, 그것과 관련된 각종의 선거 연합들은 그들이 내거는 급진적이거나 혁명적인 정강들, 연합의 명칭과 관계없이 노동자계급의 자립성과 자기조직화를 저해하는 요소일 뿐이다.  부르주아선거에 대한 개입전술은 오로지 노동자계급의 자립성에 부응하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낡은전술이 되어버렸다.
 


<선거연합에 대하여>

선거 시기 정당들의 연합이란, 자본가 지배계급이 강력하기 때문에, 지배계급에 맞서기 위해 연합하는 것일 뿐, 그것의 결과가 승리이던 패배이던 노동자계급의 자기조직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일단 선거가 끝나면 누가 이기든 바로 그들을 위해 투표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을 향한 공격을 시작할 것이며, 그것은 한편으로는 체제내로의 포섭을 통해, 다른 한편에서는 부르주아 법, 제도의 정교화를 통해 부르주아에 적대해 자립하려 하는 세력에 대해 공격을 가해서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럽, 북미의 좌파 당(사민주의, 공산당, 사회당을 포함한 세력들)의 역사에서도, 10여년의 짧은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에서도 명백히 드러났다.

그래서 우리가 투표를 하거나 누군가를 지지하라고 투표를 하도록 유도한다면 그것이 바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참여의 한계를 제한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민주적으로 선출’ 한다는 것은, 선출된 그들끼리 권력투쟁을 하던 일부가 특정계급을 대표하던 간에,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폐지하려는 세력이 스스로의 물리력을 갖춘 상태에서 선출되지 않는 한, 결국에는 지배계급이 원하는 대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합법적인 정권에 복종해야 한다.’ 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선거연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선(집권) 가능성'인데, 이 당선가능성은 선거에 돌입하면서 정강이던, 정책이던, 계급이던, 그 무엇이던 모든것을 삼키어버린다.  더욱이 당선가능성에서 가장 불리한 노동자계급의 후보(정당)는 그들의 당선을 위해 자신의 고유임무인 계급투쟁을 멈추고 선거에 몰입해야 한다.  당선가능성 마저 노동자계급의 자립화속에서만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의회주의자들과  그들을 이용한다고 생각하는(사실은 이용당하면서) 급진주의자들은 선거시기에도 선거가 끝난후에도  노동자계급의 자립화가 아닌 또다른 당선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온갖 전술과 환상들을 생산해낸다. 그래서 그들의 비대한 조직에도 불구하고,  선거와 당선가능성을 위한 정책, 조직라인은 보강되는 반면,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부르주아와의 계급전쟁에 대한 개입전술은 상대적으로 허약하고 반계급적이기까지하다. 여전히 이들에게 노동자계급은 혁명과 권력의 주체가 아닌 계몽과 지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선거의 의미>

부르주아 선거판에서 투표를 하는 행위는 노동자계급을 자신의 주장이나 목소리 없이 정해진 규칙과 객관식 선택지 안에서의 수동적인 개인들로 축소시킨다. 개별의 투표함과 투표소 안에서 노동자계급은 작업장의 동료들과도 투쟁현장의 동지들과도 차단된 채, 부르주아지와 얼굴도 모르는 지역주민들과 섞여 분간하기도 힘든 1개 정당이나 정치인을 자신들의 대표로 뽑아주어야 한다. 즉, 이러한 부르주아 선거판의 투표 속에서는 그 어떠한 계급연대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투표행위를 두고 지배계급은 ‘우리 국민(주민)’들이 이 정부를 위해 투표했다는 것을 임기 내내 홍보하고 협박해 댈 것이다.

게다가 부르주아들은 그들의 투표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계급적이고 삶에 절실한 투표인, 노동자계급의 파업을 위한 투표나 투쟁을 위한 정치적 의사표현 행위에 대해서는 온갖 법 제도의 세부조항과 규칙들을 자신들에게만 유리하게 적용해 인정하지 않거나, 철저히 무시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한다. 분단 상황을 이용하여 지배계급이 반세기 동안 반공이데올로기를 세뇌시켜 왔다면, 80년대 이후 노동자계급의 성장과 함께 대중의 뇌리에 각인 시킨 것은 선거=민주=합법 대 파업=폭력=불법이었음을 상기해보자.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우리가 그들의 민주주의 규칙에 복종하고 놀아나는 한, 결코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본주의 합법성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환상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이다.


<계급투표란>

계급투표란 부르주아 선거판에서 노동자후보나 정당을 지지하여 투표함에 넣는 행위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모든 현장과 투쟁의 공간에서 행해지는 정치의식의 표현과 저항을 조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회주의, 사민주의 정당들이 주장하는 계급투표란 부르주아 선거판과 투표함에 동원되어 노동자계급의 정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노동자계급의 계급투표란 부르주아 투표함을 거부하고, 투쟁현장과 계급연대의 공간에 정치발언대를 만들어 투쟁을 결의하고 , 광장을 점거하고 노동자 총회를 열어  계급적 연대를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자본의 절체절명의 위기상황, 노동자계급에게 위기를 전가하여 급격한 생활수준의 하락과 생존권 위기에 몰려있는 노동자계급이, 계급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조직 확장과 자기조직화를 통해 자신들의 투쟁을 전 계급적으로 통일시켜 나가야 한다. 이것은 자립적인 총회 조직들과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창출되며 노동자들에 의해 언제나 선출되고 소환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조직들을 통해 가능하다.


진정한 계급투표란 노동계급을 대리하는 정치인을 뽑는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이  언제나 선출되고 소환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투쟁과 그 책임을 유지할 계급의 투사를 뽑고, 투쟁을 결의하는 것이어야 한다. 투표함에 갇힌 대리주의 정치가 아닌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의사표현과 투쟁의지를 제한 없이 표출하는 정치의 장이 되어야 한다. 선거의 공간에서 항상 분리되고 분열되었던 노동자계급이 계급적으로 연대하고 단결하는 장이어야 하고, 그 공간은 부르주아지의 투표소가 아니라,  집합적이고 공개적인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힘이 압도적으로 표출되는 곳이어야 한다.


<기권주의를 넘어 적극적인 보이콧과 광장점거 전술로>

따라서 노동계급의 자립화를 결정적으로 방해하는 진보대연합도, 노동계급의 정치를 선거와 정강내용으로 제한시키는 대리주의 적 비판적 지지노선도 노동자계급의 길이 아니다.  우리가 힘이 없고 기세가 약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혁명적 원칙은 노동계급의 자립성과 자기조직화 전망이며, 이는 노동계급이 스스로 일어서는 과정이기 때문에 누가 대리해 주거나 다른 계급과의 뒤섞임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선거기간 선거운동과 선거정책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동원되거나 힘을 낭비하지 말고, 투표소가 아닌 지역의 투쟁사업장과 투쟁의 현장에 가서 투쟁의 쟁점을 걸고 파업을 위한, 연대를 위한, 저항을 준비하는 계급연대를 조직하고 직접행동하자. 고립되거나 앞선 투쟁, 장기간 투쟁으로 지쳐있거나 새롭게 시작되는 모든 노동자 투쟁에 형식적 연대가 아닌 자기자신의 투쟁으로 계급적으로 연대하자. 선거기간과 무관하게 노동자계급이 투쟁의 현장으로 달려가서 계급적 연대의 표시로 투쟁에 함께하고 거리를 광장을 점거하고 자신들의 총회를 열어 자본과 권력을 규탄하고 항거하는 직접정치행위를 하는 것이야 말로 노동자계급의 자립화로 가는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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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사태를 바라보는 계급적 시각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0/07/01 09:29
  • 수정일
    2010/07/01 09:29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천안함 사태를 바라보는 계급적 시각


< 전쟁과 평화에 대한 계급적 관점에 대하여>

                                                                                                                                                                                                                          by lee





1. '평화'에 대한 사회주의적 관점은 '평화'를 단순한 ‘전쟁반대’나 ‘긴장완화 요구’가 아니라 전쟁의 본질인  '노동계급이 일방적으로 희생당하는 자본주의적 전쟁반대', '전쟁의 원인인 모든 제국주의 반대', '자본주의 타도를 통한 노동계급의 항구적 평화쟁취'로 연결 시켜야 한다. 그리고 자본주의 자체가 전쟁을 잉태한 체제이고, 경쟁과 경쟁의 극단적 표현인 전쟁 없이는 유지 불가능한 것이 현재 인류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을 노동계급에게 알려 내는 것, 즉 전쟁의 계급적 본질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차원에서 한반도에서 '분단 상황·긴장상황'을 이용한 자본가계급의 노동계급에 대한 모든 억압과 위협에 대항해 투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노동계급과 사회주의자들의 기본임무이다. 하지만 , 자본주의적 분단해소(통일)와 남북 지배권력 간의 협조(협정)를 노동계급의 평화체제인 양, 민족(자주)적 권력을 세우는 것이 제국주의 반대 투쟁인 양 호도하는 관점은 계급 협조적 민족주의적 관점의 전형이다.



남북한 권력과 제국주의 체제


2. 남한 정권이 노골적인 친 제국주의적, 친 자본가적, 친 냉전(적에 대한 규정이 분명한)적 부르주아 정권이라면, 북한은 노동계급이나 공산주의와는 전혀 무관한 군사적인 야만주의로 향한 경향의 가장 극단적이자 괴기한 체제일 뿐이라는 사실과, 이들은 공통적으로 노동계급을 착취하고 군사적 긴장을 이용해 자국의 프롤레타리아계급을 야만과 파시즘적으로 통치하며 미국이건 중국이건 그들을 비호하는(자본의 이해관계에 봉사하는) 제국주의 세력과 노골적으로 동맹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천안함 사태와 북 핵 위기 문제를 야기 시킨 장본인이며, 좀 더 호전적이지 않은 좋은 정부-민족(자주)적 정부가 들어선다고 이 체제의 본질이 바뀌지는 않을 것이다.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던 오바마가 여전히 아프간 전쟁을 확대시키고 동북아시아의 긴장을 통해 자본의 이해(군수산업 자본과 중국 러시아 제국주의에 대한 견제)를 대변해주듯이, 자본주의하에서의 전쟁과 평화는 전쟁을 통해 이익을 얻거나 평화를 통해 이익을 얻는 각각의 자본을 대변해주는 동전의 양면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자본주의 일반의 법칙들이 자본의 치명적 위기상황에 직면하면, 자본과 권력을 지배하는 핵심자본들이 국가를 앞세워 전쟁을 전면전이나 국제전쟁으로 확대시켜 위기를 일시적으로 비껴가거나 자본과 시장의 재편을 통해 새로운 지배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 쇠퇴기인 현재에 와서는 전쟁의 성격도 자본주의 위기를 지연시키거나 완화하는 역할에서 스스로를 파멸로 이끄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고 있다. 즉, 지금이야말로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시대가 도래 한 것이다. 2차 대전 이전 제국주의 국가가 세계의 어느 부분(비자본주의/반자본주의 영역)에서 자본주의를 정착(확장)시키는 역할을 했을 때 자본주의는 풍부해졌고 넓어졌다. 이때의 군사력은 어느 경우 세계자본주의에 있어서 생산력 발전의 요소로 작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세계는 경쟁하는 열강들 사이에서 분할되었고, 전쟁은 전리품의 재분배를 가져올 뿐, 새로운 정복은 불가능해졌다. 그 시기부터 한 자본주의 강대국은 다른 국가를 희생시킴으로써만 군사적 영향력을 얻을 수 있었다. 이제 세계 자본에게 전쟁은 내부적 분열과 재난 낭비만을 나타낼 뿐이었다. 이와 같은 군사지출을 통한 출구는 각 나라 경제에 무거운 짐을 지운다. 군사지출은 자본에게 그리고 생산력 발전에 있어서 엄청난 낭비다. 지난 몇 십년간 미국은 평균적으로 매년 잉여의 1/3을 군수품으로 전환시켰다. 이 지출이 생산적 상품에 사용되었다면 미국 경제성장은 33% 가속되었을 것이다.


이제 군사적 자극제가 자본주의의 영원한 확장을 결코 보장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왜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러한 비생산적 유형에 그렇게 거대한 부분을 바치는 것일까? 그것은 군수산업의 발전이 제국주의간 적대의 격화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쟁하는 열강들 사이에서 전적으로 분열된 그리고 모든 경쟁자들이 나누어 갖기에는 너무 작은 조각들로 이뤄진 세계에서 각국의 군사적 힘은 그 나라의 경제적 생존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국주의간 적대의 첨예한 표출이 상시적으로 분출되는 곳이 바로 한반도 주변이며, 남북의 군사력은 각자의 경제적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도구이고,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불해야할 대가인 것이다. 비생산적 영역인 군사력은 결국엔 자본에게 짐이 되고 낭비일 뿐이지만, 제국주의 간 적대체제, 세계 자본주의 경쟁체제에서 상품을 수출하고 이윤을 추구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한국의 자본가들은 군사비용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제한(물론 노동계급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을 기꺼이 감내할 자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북의 지배계급 또한  미·일을 겨냥한 군사적 방어선을 사수하고 미국에 대한 적대의 표출을 대리하면서 중국·러시아에 도움을 받으며 내부적으로는 자국의 인민들을 초과 착취하고 군사화로 동원하며 생존을 연장해가고 있지만, 결국 이러한 낭비들의 악순환은 지배 권력과 자본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이러한 상황이 정권의 변화- 특정 자본분파의 이해관계 -에 따라 ‘전쟁 없는 긴장상태’, ‘평화 없는 경제교류’를 오가며 두 착취체제를 유지해 온 것이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의 남북 지배 권력 간의 평화협정이라는 것은 제국주의 세력이 강제하는 군사적 영역을 침해할 수 없고 극도로 제한적으로 개선시킬 수 있을 뿐이고, 언제든지 제국주의 세력과 자본의 이해관계에 따라 후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 평화는 이러한 제국주의 세력과 단절하고 군사력을 배경으로 유지되는 착취와 이윤추구의 자본주의 경쟁관계 ,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폐절시켜야만 가능한 일일 것이다. 




천안함 사태의 진실과 자본의 이해관계


3. 천안함 침몰의 원인을 두고 의혹이 큰 만큼 공방도 치열하고, 국제적인 진실게임의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하지만, 노동계급에게 천안함 사태의 진실은 없다. 천안함 사태 때문에 계급투쟁이 유보되었거나 영향을 받을 거라는 사고도 글로벌화 된 자본의 다양한 이해관계를 분석하지 못한 과도한 표현이고, 더욱이 곧 전쟁이라도 일어날듯이 무조건적인 한반도 평화체제를 주장하는 과대망상가들 이야말로 노동계급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반공세대-정신적 피해자들일 뿐이다.


천안함 사태를 북의 소행으로 발표하던 날, 자본은 전쟁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수조원이 증발된 주식시장과 환율폭등을 대비했고, 해외의 자본시장과 상품시장에 전쟁위기가 없을 것임을 설득했다. 또한 천안함 사태의 장기화가 상품수출과 이윤추구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자본들은 적당한 선에서의 정리를 원하고 있고, 자본의 또 다른 축에서는 천안함을 접고 경제위기를 피해나가는 일에 강력하게 북, 중을 이용하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세력들이 자본분파들 간의 투쟁에서 승리할 때 평화협정, 자유 왕래 등은 기본카드일 뿐이다. 그들이 이윤추구의 근거지를 날려버릴지도 모르는 전쟁을 '위기상황 - 위기의식 조장' 이상의 실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 현재의 평화와 냉전이 공존하는 상황이며, 더욱 완전한 평화 속에서 북을 이윤추구의 장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평화체제의 완성이다. 따라서 천안함 사태를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할 수 있는 지배계급 일부의 권한은 제한되어 있으며, 자본의 일부분파가 한국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국내외 핵심자본과 국내자본 전체의 이익을 일방적으로도 장기적으로도 침해할 수 없는 것이 체제로서의 한국자본주의이며 현재적 자본의 구성인 것이다.


그래서 전쟁위기와 더불어 사회주의자들이 반드시 고려해야 할 측면은, 평화체제 유지가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는 자본의 분파들이 북을 자본주의 체제에 온전히 편입시켜, 민족적·경제적 공동체를 추구하면서 북의 노동계급을 잉여가치 창출을 위한 착취와 잉여가치의 실현을 위한 시장 확대로 이용하고, 그것의 한축으로 한국노동계급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고용과 임금의 상대적 안정을 일부에게 보장해주는 보호 장치를 마련하는 역할을 한다면, 자본이 주도하는 한반도의 평화체제는 남북의 노동계급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노동계급이 주도해야하는 이유 중의 하나인 것이다.


또한 그런 측면에서 소위 '자본의 위기전가' 내용이 '부문적'이거나 '일국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것은 전투적이고 잘 조직된 계급일부(부문, 국가)의 계급투쟁의 지엽적인 성과물들이 자본이 착취해간 것들을 다시 되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취약한 부분의 초과착취-희생으로 보장되는 것이라면 자본의 이해관계와 부합하는 것이지 노동계급의 이해관계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의 위기전가에 맞선 투쟁도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투쟁으로 진전시킬 전망을 갖지 못하는 한, 전 지구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의 무차별 공격과 발 빠른 행보를 막아내지 못할 것이며, 자본은 본연의 임무인 이윤추구를 위해 노동계급을 분할 통치하면서 정규직과 비정규직, 관리직과 생산직, 대기업 노동과 중소영세 노동, 선진국 노동과 후진국 노동으로 분리시키고 한쪽을 희생시키면서 혁명적 분출을 막기 위한 온갖 방책과 환상들을 생산해 낼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자본의 덫으로부터 노동계급을 빼내오기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분할과 분열을 고착화시키는 노동조합주의와 민족주의 그리고 법과 제도의 개선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환상도 반드시 버려야한다.


 

‘평화’와 노동자국제주의


4.노동계급은 천안함을 누가 가라앉혔는지,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남북의 통일이 언제 어느 때 어떻게 될 건지, 아무런 계급적 이해관계가 없다. 그런 의제들은 자본가 분파들의 이해관계일 뿐이다. 노동계급의 이해관계란 오직 군사적 긴장상황을 이용한 부르주아계급의 온갖 명분의 공격으로부터 노동계급을 방어하는 것과 제국주의적-자본주의적 모든 전쟁과 전쟁책동에 조건 없이 반대하고 대항하는 것이다.


전쟁에 반대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은 '평화'그룹들과 시민단체들, 민족주의-사민주의자들, 좌파 평화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되고 있는 '전쟁(책동)중지·평화협정 체결'을 향한 다양한 연합들이 말하는 ‘평화주의’와 아무런 공통점도 갖지 않는다. 평화주의자들은 유엔에 그리고 국제 법에, 부르주아 권력 간의 협정에 호소하는 반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은 그 법의 장벽들을 파괴할 때에만 확장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한미 간, 북중 간 제국주의적 군사동맹과 연관된 모든 조약(협정)을 파기하고 실질적 연결 관계를 끊는 것이 남북 평화협정의 전제조건인 것이다. 


사회주의자라면, 자본의 서커스 판에 메뉴로 올려 진 천안함 사태에 부화뇌동하여, 자본의 체제적 위기상황에 직면해 야만적인 상태로 몰리고 있는 노동계급에게 정신적 피로를 가중시키지 말자.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진실이 가려질 거라는 유아적 상상도 이제 그만하자. 진실은 훗날의 혁명만이 밝혀줄 것이며,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진실을 접근해야 한다.


혁명을 위해서 지금 필요한 것은 패배의 누적과 보이지 않는 전망으로 극도의 정신적 피로에 쌓여 계급의식이 하강되어가는 노동계급에게 혁명적 분출구를 제시하거나 함께 뚫고 나가자고 앞선 결의를 보여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은 북조선에 있는 노동계급도 중국에 있는 프롤레타리아 계급도 미국에 있는 영어 잘하는 workers도 모두가 함께 해야만 가능한 일이다. 전쟁을 막는 일도 자본의 위기전가에 맞선 노동계급의 투쟁도 궁극적으로는 국제적인 차원에서 일어나야만 실질적으로 자본가를 타격하고 노동계급을 방어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전망과 흐름들만이 노동자국제주의와 세계혁명의 기본임을 노동자계급 스스로 인식하도록 역할을 하는 것이 사회주의자들의 임무인 것이다.

 

 

결론


5.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전쟁은, 오직 방어 할 어떤 국가적인 이해관계도 가지지 않은 운동에 의해서만 - 노동계급의 국제적인 운동에 의해서만 - 저지될 수 있다. 노동계급을 착취하는 자본가 계급간의 어떠한 연대도 평화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이들의 기만적 연대에 대항하여 노동계급의 국제적인 연대를 이루어내려는 시도들이야 말로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평화를 지켜내기 위한 첫걸음이다.


평화주의자들 말하는 '전쟁반대 - 이명박 반대'는 '양심'과 '이성'에 호소하며 전쟁에 반대하는 모든 계급들의 연합을 주장하고 결코 민족적 이해관계를 반대하지 않는다. 이것이야 말로 부르주아의 군사적 연합에 필수불가결한 부수물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쟁의 의미에 관한 진정한 계급의식을 파괴하고 교란시키는 방법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한반도 안에서의 '평화'와 관련된 계급투쟁이 나가야할 길은 '계급평화-계급연합-체제간의 평화'가 아닌 남북한 부르주아 지배 권력과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한 계급적 연대와 국제적인 투쟁을 통해 전쟁을 실질적으로 억제해내는 투쟁이어야 한다.


끝으로 천안함 사태를 굳이 정세의 중심에 두고 사고하거나 그것과 관련된 현실투쟁에 개입하고자 한다면, 시민단체 혹은 민족주의세력과 큰 차별성을 보이지 않는 좌파 내 평화주의세력들 수준에서 주장하는 비 계급적 관점에서 벗어나 사회주의적/노동자 국제주의적 전망을 제시해야 하겠다.


-자본가권력과 제국주의세력이 주도하는 그 어떠한 조사내용도 남북을 포함한 세계의 노동계급은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른 그 어떠한 사후조치나 제재조치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


-천안함의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차원의 노동계급의 독립적인 조사단에 의해 정보가 철저히 공개되고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절차에 따라 규명되어야 할 것


-과학적 혹은 객관적 물증을 인정하는 차원에서 주요원인이 밝혀진다 해도 그것을 근거로 한 제재조치가 해당국가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피해를 주거나 고통을 전가하는 것에 사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영향을 주는 그 어떠한 제재조치(경제봉쇄, 군사적 제재 등)도 조건 없이 반대한다는 것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일방적 희생만을 초래하는 어떠한 명분의 전쟁과 전쟁위협, 전쟁책동도 거부하고, 그것으로부터 노동계급을 국제적인 차원에서의 연대투쟁으로 방어해낼 것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항구적 평화를 위해서는 전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갈 전쟁을 잉태한 체제인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폐지시킬 것


-이모든 요구사항을 알려내고 관철시키기 위한 남북 노동자계급과 세계노동자계급의 연대와 투쟁을 호소하고 조직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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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응 - 계급투쟁을 최우선으로!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0/06/04 16:13
  • 수정일
    2010/06/04 16:13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 응답 RSS

G20: 자본주의의 위기에 대한 대응 - 계급투쟁을 최우선으로!


 


다가오는 G20 회담을 둘러싼 환경은 역사적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되었다. 경제 위기는 전 세계적으로 경제와 인류의 삶을 파괴하고 있고, 부르주아지는 궁지에 몰려있다. 금융 시장에 주입된 거대한 대출금, 비슷한 규모의 거대한 예산 적자 정책, 그리고 최근의 ‘양적 완화’(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시중에 뿌리는 정책) 회의로 부르주아지는 주요 국가들에서 금융 시스템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가까스로 막았다. 그러나 이것은 근원적인 위기를 해결하지 못했다.


국제적으로 부르주아지는 세계가 1930년대 대공황 이래 가장 참혹한 침체의 늪에 직면하고 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일본이나 독일 같은 나라들은 수출과 산업 생산에서 숨 막히는 붕괴로 고통 받고 있다. 동유럽의 많은 지역들도 아이슬란드 이어 그리스 정도 규모의 엄청난 재앙에 위협받고 있다. 아일랜드, 포르투갈, 이탈리아와 스페인도 곧 그렇게 될 것이다. ‘신흥 시장들’도 긴장하고 있다. 중국만 해도 구조조정 인원이 무려 천만 명을 넘어서고 있다. 이러한 경제 부문들도 세계 경제의 나머지 부문과 똑같은 쓰나미를 맞고 있다. OECD와 IMF는 이제 세계 경제 전체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경험하지 못한 위기를 마주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전후 벼락 경기가 끝나고 40년, 부르주아지가 위기를 조절하기 위해 썼던 모든 정책들은 실패의 벼랑 끝에 몰려 있다. 국가 개입(다른 말로 국가자본주의)의 몇 십 년은 부르주아지를 낭떠러지 위에 세웠다. 대규모 과잉생산에 직면해 수요를 유지하는 주요 메커니즘 - 신용의 양을 크게 늘려버리는 등의 - 은 경제가 항생제를 과다 복용한 환자의 상태가 되도록 만들어버렸다. 그러한 대응책의 효과가 실제로 바닥났다는 이야기이다. 더욱 나쁜 것은 신용이 문제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전체는 이제 말 그대로 파산했다.


 이러한 결과가 노동자 계급에게 미치는 영향은 명백하다. 40년 동안 번영의 오아시스처럼 보였던 일자리, 임금, 그리고 삶의 조건에 대한 잔인하고 야만적인 공격이 그것이다.

 

 

 

민중을 최우선으로?


 사람들이 충격을 받아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이 사회의 국가에 대해 같은 것을 느끼는 사람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지금까지 세계가 달려온 방식에 대해 분노를 터뜨리는 것, 이 모든 것은 건강하다. 오늘날 시위의 문제는 그들 조직이 제공한 대안, ‘민중을 최우선으로’에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와 그 국가기구의 기반에 도전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들은 정부와 국가의 현존하는 체제에 대해 압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이 사회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국제적 금융 시스템을 개혁할 투명하고 그럴 듯한 과정”으로써 “모든 정부, 의회, 노동조합과 시민사회와 핵심 역할을 할 UN의 협의”를 요구한다. 그들은 “이러한 충고들은 세계적 지도자들이 경기침체를 벗어날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완전한 종합 정책을 제공”하며, “인간과 지구를 위한 경제를 추구하는 새로운 체제”, 또는 “경제에 대한 민주적 지배”, “모두를 위한 번듯한 일자리와 공공 서비스”, “녹색 경제” 등등의 길을 열 것이라고 주장한다.



국가의 환상을 퍼뜨리다


이러한 운동들은 자본주의나 국가가 절대로 개혁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실패하고 있다. 그들은 언제나 우리를 지배하는 자들,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들의 이해를 표현해왔다. 좌우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대공황 이후 80년 동안 서투르게 자본주의 체제에 국가 개입이라는 방법을 써왔다. 40년 동안의 국가 개입은 이 체제 내부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했다. 이것이 현재 위기의 가장 명백한 교훈이다. 전쟁, 대량실업, 가난과 환경 파괴는 ‘나쁜 정부’의 탓이 아니다. 그것들은 이 노쇠한 체제, 인류에게 쓸모없어지고도 목숨을 부지해온 사회적 규칙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자본주의가 국가로 인해 더욱 민주적이고 친환경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지는 대신, 우리는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들이 그 뼛속까지 반인간적이라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들은 이윤을 축적하는 동력과 떼어놓을 수 없으며, 그 동력은 인간의 우선순위를 가장 뒤로 둘 것이다. 이것이 왜 현존하는 생산 관계들 - 임금노동과 시장을 위한 생산 - 을 완전히 뒤집고 진정으로 새로운 사회 - 국가도 없고 자본도 없이 모든 생산이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이뤄지는 공동체, 전 세계적인 공산주의 - 로 대체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한 이유이다.


 UN을 포함한 자본주의 국가들의 전 지구적 정치 기구들은 자본주의의 사회적 관계들을 보호하고 방어하려 한다. 만약 현재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면, 이런 기구들은 지구상의 모든 곳에서 혁명에 의해 해체될 필요가 있다.

 


 

진정한 대안은 있다 - 계급투쟁


혁명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그것은 현존하는 계급투쟁에만 가능성으로, 그리고 필연성으로 포함되어 있다. ‘민중을 최우선으로’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미묘한 환상과 싸우는 동안, 진정한 계급투쟁이 우리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다. 세계적으로 2003년 이후 노동자 계급이 계급투쟁의 무대로 돌아왔다. 뉴욕에서 난징까지, 노동자들이 나이, 종교, 국가의 분리를 넘어선 연대를 다시 발견하고 있다. 그들 자신의 이해를 방어하기 위해 그들은 집합적인 힘을 움직이고 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학생들의 시위와 집회, 그리스를 휩쓴 총궐기와 폭동, 이집트와 방글라데시의 대중파업, 영국 정유공장 노동자들의 실업에 맞선 싸움, 한국의 쌍용차 공장점거투쟁, 터키의 테켈 노동자 투쟁. 오직 소수밖에 그것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이러한 사건들은 자본주의의 위기에 직면한 모든 나라들의 노동자들의 공통된 이해를 보여주는 국제적인 운동의 일부다.


 이러한 투쟁들은 오직 이 사회를 정말로 바꿔야 하겠다는 전망을 가진 개별적 투쟁들, 우리가 ‘최우선으로’ 해야 할 투쟁들이다. 이를 위해 노동자들은 이 투쟁들을 그들 눈앞의 목표에만 머물지 말고 그것을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자본주의에 도전할 수 있는 운동을 건설해야만 한다. ‘민중을 최우선으로’와 같은 캠페인은 계급의식의 심화에 장애물 이 될 뿐이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의 야만에 대한 진정한 대안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 캠페인이 유포하는 환상을 극복해야만 한다.


글로벌 자본주의의 위기! 세계적 규모에서의 계급투쟁-저항을 준비 하는 것- 만이 노동계급의 유일한 대안이다.  < World Revolution >


 

 -번역  left communist group   (http://cafe.daum.net/leftcommun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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