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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의 의미와 계급투표

  • 분류
    계급투쟁
  • 등록일
    2010/07/23 13:08
  • 수정일
    2011/10/27 16:58
  • 글쓴이
    자유로운 영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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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의 의미와 계급투표

 

 

 

이형로

 

 

 

<노동계급의 자립화에 대하여>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말은 노동자계급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거나 독자적인 혁명의 수행이 어려웠던 시기 다른 계급과의 연대나 협조가 필요했을 때 적절한 용어였다. 하지만, 현재와 같이 노동자계급이 생산과 역사의 주체임을 자각하고, 사회혁명을 주도할 유일한 계급으로 성장한 이상, 노동자계급은 더 이상 객체로서가 아닌 다른 계급들에 대해 독립성을 획득해야 하며,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자립성, 자기조직화로 표현된다.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일이어야 한다" 는 맑스의 테제는  현실운동에서 미래의 혁명을 위해 무시되거나, 먼 훗날에나 가능한  이상적인 문구가 아니다.  현실운동에서부터  노동자계급은 자립성을 획득하려는 노력들을 해야만 계급의식이 고양되고 계급투쟁이 전면화되었을 때, 반혁명적 괴저와  대리주의의 환상에 빠지지 않고 흔들림없이 자기권력창출과 자기해방으로  나아갈수 있다. 노동자계급은 역사적으로 이러한 자립적인 계급의 조직을 스스로 탄생시켰는데, 그것은 바로 노동자평의회이다.  이러한 노동자평의회의 생성과 권력창출, 자기해방으로 나아가는 전 과정이 바로 노동자계급의 자립화와 지도력 획득의 과정이다.

 

노동자계급의 자립성은 사회 내부의 모든 다른 계급들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독립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립성은 계급의 혁명 활동을 위해 하나의 불가분한 전제조건을 나타내는데, 노동자계급만이 유일한 혁명계급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립성은 계급의 자립적 조직인 노동자평의회와 계급의 정치조직인 혁명당과 강령으로 표현된다. 인민전선과 같이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부르주아의 어느 정파의 이해관계와 혼합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통제하고 잠재워 결국 노동자계급의 자립성을 저해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노동자계급이 체제의 내부에서 개혁들을 얻어낼 수 있었던 시기에는, 의회주의 제도에 노동자계급의 참여를 통해, 생활개선과 개혁들을 위한 압력수단으로서 의회가 이용될 수 있었다. 선거 시기 선거 캠페인을 하는 것도 노동계급의 정강을 위한 선전 및 선동가능성으로서 활용될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부르주아적 정치의 실체와 위선의 폭로를 위한 연단을 의회로부터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했다. 하지만 공산주의 혁명의 의제와 혁명의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내걸어야 하는 자본주의 쇠퇴기인 현재에서는 선전 및 선동수단으로서 선거와 의회의 활용이 결정적인 장애물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의회와 선거참여에 대한 전술들이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정치적 장치들을 유지하고, 노동자들의 수동성을 조장하는 경향이 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선거와 의회에 대한 참여, 그것과 관련된 각종의 선거 연합들은 그들이 내거는 급진적이거나 혁명적인 정강들, 연합의 명칭과 관계없이 노동자계급의 자립성과 자기조직화를 저해하는 요소일 뿐이다.  부르주아선거에 대한 개입전술은 오로지 노동자계급의 자립성에 부응하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어야 할  낡은전술이 되어버렸다.
 


<선거연합에 대하여>

선거 시기 정당들의 연합이란, 자본가 지배계급이 강력하기 때문에, 지배계급에 맞서기 위해 연합하는 것일 뿐, 그것의 결과가 승리이던 패배이던 노동자계급의 자기조직화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일단 선거가 끝나면 누가 이기든 바로 그들을 위해 투표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을 향한 공격을 시작할 것이며, 그것은 한편으로는 체제내로의 포섭을 통해, 다른 한편에서는 부르주아 법, 제도의 정교화를 통해 부르주아에 적대해 자립하려 하는 세력에 대해 공격을 가해서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럽, 북미의 좌파 당(사민주의, 공산당, 사회당을 포함한 세력들)의 역사에서도, 10여년의 짧은 한국 진보정당의 역사에서도 명백히 드러났다.

그래서 우리가 투표를 하거나 누군가를 지지하라고 투표를 하도록 유도한다면 그것이 바로 노동자계급의 정치참여의 한계를 제한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를 ‘민주적으로 선출’ 한다는 것은, 선출된 그들끼리 권력투쟁을 하던 일부가 특정계급을 대표하던 간에,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폐지하려는 세력이 스스로의 물리력을 갖춘 상태에서 선출되지 않는 한, 결국에는 지배계급이 원하는 대로 ‘민주적으로 선출된 합법적인 정권에 복종해야 한다.’ 는 사실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한, 선거연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선(집권) 가능성'인데, 이 당선가능성은 선거에 돌입하면서 정강이던, 정책이던, 계급이던, 그 무엇이던 모든것을 삼키어버린다.  더욱이 당선가능성에서 가장 불리한 노동자계급의 후보(정당)는 그들의 당선을 위해 자신의 고유임무인 계급투쟁을 멈추고 선거에 몰입해야 한다.  당선가능성 마저 노동자계급의 자립화속에서만 높아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의회주의자들과  그들을 이용한다고 생각하는(사실은 이용당하면서) 급진주의자들은 선거시기에도 선거가 끝난후에도  노동자계급의 자립화가 아닌 또다른 당선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 온갖 전술과 환상들을 생산해낸다. 그래서 그들의 비대한 조직에도 불구하고,  선거와 당선가능성을 위한 정책, 조직라인은 보강되는 반면, 노동자계급의 투쟁과 부르주아와의 계급전쟁에 대한 개입전술은 상대적으로 허약하고 반계급적이기까지하다. 여전히 이들에게 노동자계급은 혁명과 권력의 주체가 아닌 계몽과 지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선거의 의미>

부르주아 선거판에서 투표를 하는 행위는 노동자계급을 자신의 주장이나 목소리 없이 정해진 규칙과 객관식 선택지 안에서의 수동적인 개인들로 축소시킨다. 개별의 투표함과 투표소 안에서 노동자계급은 작업장의 동료들과도 투쟁현장의 동지들과도 차단된 채, 부르주아지와 얼굴도 모르는 지역주민들과 섞여 분간하기도 힘든 1개 정당이나 정치인을 자신들의 대표로 뽑아주어야 한다. 즉, 이러한 부르주아 선거판의 투표 속에서는 그 어떠한 계급연대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투표행위를 두고 지배계급은 ‘우리 국민(주민)’들이 이 정부를 위해 투표했다는 것을 임기 내내 홍보하고 협박해 댈 것이다.

게다가 부르주아들은 그들의 투표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계급적이고 삶에 절실한 투표인, 노동자계급의 파업을 위한 투표나 투쟁을 위한 정치적 의사표현 행위에 대해서는 온갖 법 제도의 세부조항과 규칙들을 자신들에게만 유리하게 적용해 인정하지 않거나, 철저히 무시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한다. 분단 상황을 이용하여 지배계급이 반세기 동안 반공이데올로기를 세뇌시켜 왔다면, 80년대 이후 노동자계급의 성장과 함께 대중의 뇌리에 각인 시킨 것은 선거=민주=합법 대 파업=폭력=불법이었음을 상기해보자.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우리가 그들의 민주주의 규칙에 복종하고 놀아나는 한, 결코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자본주의 합법성과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환상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이다.


<계급투표란>

계급투표란 부르주아 선거판에서 노동자후보나 정당을 지지하여 투표함에 넣는 행위가 아니라, 노동자계급이 살아 숨 쉬고 있는 모든 현장과 투쟁의 공간에서 행해지는 정치의식의 표현과 저항을 조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의회주의, 사민주의 정당들이 주장하는 계급투표란 부르주아 선거판과 투표함에 동원되어 노동자계급의 정치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노동자계급의 계급투표란 부르주아 투표함을 거부하고, 투쟁현장과 계급연대의 공간에 정치발언대를 만들어 투쟁을 결의하고 , 광장을 점거하고 노동자 총회를 열어  계급적 연대를 정치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자본의 절체절명의 위기상황, 노동자계급에게 위기를 전가하여 급격한 생활수준의 하락과 생존권 위기에 몰려있는 노동자계급이, 계급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조직 확장과 자기조직화를 통해 자신들의 투쟁을 전 계급적으로 통일시켜 나가야 한다. 이것은 자립적인 총회 조직들과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창출되며 노동자들에 의해 언제나 선출되고 소환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조직들을 통해 가능하다.


진정한 계급투표란 노동계급을 대리하는 정치인을 뽑는 것이 아니라,  위와 같이  언제나 선출되고 소환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투쟁과 그 책임을 유지할 계급의 투사를 뽑고, 투쟁을 결의하는 것이어야 한다. 투표함에 갇힌 대리주의 정치가 아닌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의사표현과 투쟁의지를 제한 없이 표출하는 정치의 장이 되어야 한다. 선거의 공간에서 항상 분리되고 분열되었던 노동자계급이 계급적으로 연대하고 단결하는 장이어야 하고, 그 공간은 부르주아지의 투표소가 아니라,  집합적이고 공개적인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힘이 압도적으로 표출되는 곳이어야 한다.


<기권주의를 넘어 적극적인 보이콧과 광장점거 전술로>

따라서 노동계급의 자립화를 결정적으로 방해하는 진보대연합도, 노동계급의 정치를 선거와 정강내용으로 제한시키는 대리주의 적 비판적 지지노선도 노동자계급의 길이 아니다.  우리가 힘이 없고 기세가 약하더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혁명적 원칙은 노동계급의 자립성과 자기조직화 전망이며, 이는 노동계급이 스스로 일어서는 과정이기 때문에 누가 대리해 주거나 다른 계급과의 뒤섞임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선거기간 선거운동과 선거정책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 동원되거나 힘을 낭비하지 말고, 투표소가 아닌 지역의 투쟁사업장과 투쟁의 현장에 가서 투쟁의 쟁점을 걸고 파업을 위한, 연대를 위한, 저항을 준비하는 계급연대를 조직하고 직접행동하자. 고립되거나 앞선 투쟁, 장기간 투쟁으로 지쳐있거나 새롭게 시작되는 모든 노동자 투쟁에 형식적 연대가 아닌 자기자신의 투쟁으로 계급적으로 연대하자. 선거기간과 무관하게 노동자계급이 투쟁의 현장으로 달려가서 계급적 연대의 표시로 투쟁에 함께하고 거리를 광장을 점거하고 자신들의 총회를 열어 자본과 권력을 규탄하고 항거하는 직접정치행위를 하는 것이야 말로 노동자계급의 자립화로 가는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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