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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4호]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포럼을 시작하며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포럼을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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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0월 한국에서 처음으로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가 열렸다. 2년 뒤인 2008년에는 국제주의 원칙과 코뮤니스트혁명을 전망하는 노동자/활동가들이 독자적인 「좌익공산주의자 그룹」(Left Communist Group, 이하 LCG)을 결성하여 한국 최초로 코뮤니스트 좌파 운동을 시작한다. LCG는 2000년대 초 과거 운동(1987~2002)에 대한 근본적 반성 속에서 새로운 운동을 시도한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 그룹 「사회주의 정치연합」과 평의회 운동을 독자적으로 전망하던 「노동자민중회의-노동자평의회를 향한 모임」 성원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 사회와 계급운동에 ‘코뮤니스트 정치’를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LCG는 국제적 수준의 코뮤니스트 강령 채택 이전부터 코뮤니스트 규약(LCG)을 기반으로 선전 활동, 계급투쟁 개입, 조직 활동을 시작했고, 이는 세계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의 일원으로 분파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의 해방과 투쟁을 위해 활동하며,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과 인터내셔널 건설을 목적으로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활동한다. 노동자평의회의 국제적 권력을 향한 운동, 인터내셔널 건설을 향한 혁명세력의 재조직화, 자본주의 사회 관계 폐지(임금노동, 상품생산, 화폐)” (LCG 규약)

 

이후 LCG는 사노련-사노위-노혁추에 참여하면서 사회주의자/코뮤니스트 세력의 재편을 위해 노력했으며, 그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기본 원칙을 견지해왔다.

 

“혁명적 사회주의와 혁명당 건설을 공개적으로, 대중적으로 선언하고 계급투쟁을 통해 실현하겠다는 이 흐름은 새로운 시도로 한국의 코뮤니스트 운동사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물론 국가보안법상의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재판 투쟁을 통한 사상 투쟁과 줄기찬 혁명주의 선전·선동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은 서클연합으로 출범했기 때문에, 결합하지 못한 서클과 혁명주의자, 그리고 중도주의 세력 속의 혁명 인자들이 다시 한번 공동실천을 통해 한 걸음 전진하자는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공동실천위원회」 결성 제안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으며, 1년 반 동안의 공동실천은 결국 강령, 조직, 전술의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며 종지부를 찍는다.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공동실천위원회」와 분화된 세력이 「노동자혁명당추진모임」과 「노동해방」으로 각개약진하고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의 잔존그룹은 「혁명적노동자당건설현장투쟁위원회」로 각각 실천하게 된 것은 혁명 세력의 분열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적인 실천을 하면서 계급으로부터 검증받는 과정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12년 총선 선거 전술 문제로, 「노동자혁명당추진모임」에서 코뮤니스트 좌파 세력이 분화한 것은, ‘종파적 철수’가 아니라‘정치적 차이’의 결과였다. 그 차이는 혁명당 건설을 둘러싼 정치 활동의 전망에 있었다.

 

우리는 혁명주의 세력의 노선 투쟁을 통한 경쟁과 연대·단결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동안 혁명 세력이 반(反)혁명적 스탈린주의 세력이나 민족주의 세력, 각종 기회주의 세력과 대적 전선을 공고히 하는 데 주력해 온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독자적인 사상노선으로 논쟁하고 계급으로부터 검증을 통해 신뢰를 획득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러한 노선투쟁의 역사가 이미 유럽과 러시아 등지에서 100년 전부터 있었음을 상기하고 있다. 세계 혁명당 건설을 목표로 노동자 국제주의를 실현하려는 현 단계 한국의 혁명적 맑스주의(사회주의) 세력은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맑스주의 사상과 실천의 원칙을 분명하게 내세우고 노선투쟁을 해야 하고, 진정한 의미의 정치 원칙·강령의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는 코뮤니스트 운동의 역사에서 「코뮤니스트 좌파」의 원칙과 투쟁을 계승· 복원하고, 다른 혁명주의자들과 논쟁하고 토론하며 다시 연대하고 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바로 여기가 로두스다.” (「코뮤니스트 정치조직을 출범하면서」, 2012년 10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2011년 노혁추 철수를 마지막으로 LCG는 독자적 코뮤니스트 좌파 운동의 길로 접어들고 2012년에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을 설립한다. 즉, 그동안의 연합운동과 공동실천을 통한 당 건설 운동 실패를 겪으며 혁명적 사회주의/코뮤니스트 운동 재편의 과제를 더욱더 무겁게 떠안은 한국의 코뮤니스트 좌파 세력이 코뮤니스트 정치 원칙(강령)을 기반으로 세계혁명과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목표로 하는 혁명조직을 건설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문제의식은 현재의 코뮤니스트 운동을 독자적이고 전면적으로 수행하게 만든 조건이었다.

 

“계급투쟁의 무기력함에서 오는 비관주의와 조급성, 여러 차례 패배의 자책감 등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미래를 내다보고 활동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자본주의 위기가 눈앞에 진행되고 있으며,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부흥을 보고 있다. 파업과 거리투쟁을 통해서 동지를 찾아내고,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투쟁을 통해서 새롭게 올라오는 대중의 잠재적 힘을 주목해야 한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다시금 혁명운동의 정치원칙을 강인하게 사고해야 할 때다.” (「코뮤니스트 정치조직을 출범하면서」, 2012년 10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국제코뮤니스트전망은 출범 이전부터 세계적인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단체와 긴밀히 교류하면서 출발했고, 그동안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의 강령에 대한 소개와 토론, 세계 계급투쟁 상황 공유와 개입, 국제주의 원칙과 국제연대 실현을 위한 실천을 해왔다. 최근에는 ‘자본주의 쇠퇴’, ‘역사의 경로’, ‘새로운 인터내셔널(세계혁명당) 건설’ 등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내부논쟁에 대한 평가와 전망을 제시해왔다.

 

"팬데믹 위기가 자본주의 위기, 제국주의 전쟁의 가능성,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전망, 맑스주의와 코뮤니즘 원칙에 굳건히 서 있는 젊은 코뮤니스트들의 성장과 발전, 계급 정체성을 회복하는 혁명적 노동계급의 복원은 적어도 앞으로 10년은 그 과정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와 코뮤니스트들의 연대, 단결, 통일을 위한 자기반성, 상호비판이 계속될 것이다." (「코뮤니스트」 12호,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3)’, 오세철, 2020년 11월)

 

우리의 국제주의 원칙과 국제 연대, 세계혁명당 건설 기초를 위한 실천은 1915년 찜머발트 좌파의 교훈에서 시작하여, 1977년 혁명적 코뮤니스트 국제대회의 경험과 연결되어 있다.

 

“1930년대 이후 기나긴 반혁명의 암흑기에도 살아남은 세계의 혁명운동 세력은 68혁명 이후 분출한 계급투쟁의 물결과 함께 유럽을 중심으로 남미, 북미, 아시아 일부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 새롭게 부활하게 된다. 그리고 각개 약진하던 이들은 1970년대 초부터 일련의 국제대회를 개최하여 국제그룹을 형성하고, 1977년에는 전 세계의 혁명적 코뮤니스트 그룹에 국제대회를 제안하여 이탈리아에서 제1차 대회를 하게 된다. 국제대회 참가 그룹들은 이미 내부강령을 갖고 있거나 여러 가지 쟁점들을 토론한 결과 국제적인 수준의 강령을 정립하게 된다. 국제대회와 이후 과정에서 10년 넘는 지난한 강령토론과 사상투쟁의 과정이 없었다면 지금과 같은 국제적 수준의 행동 통일과 혁명적 코뮤니스트 세력의 국제적 재조직화 가능성, 그리고 세계혁명당(인터내셔널) 건설의 전망은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코뮤니스트」 5호,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반성과 코뮤니스트 운동의 전망’, 이형로, 2017년 4월)

 

15년 전 한국에서의 ‘혁명적 맑스주의자 국제대회’도 위와 같은 역사적 흐름에 따른 새로운 시도였으며, 앞으로 세계혁명당 건설을 위한 과정에서 작은 밑거름이 되길 원했다. 우리는 2023~2024년 한국에서 다시 한번 국제대회 개최를 계획하고 있다.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포럼」은 그 준비과정의 일환이다. 포럼에서는 국제적 토론 주제뿐만 아니라 한국 노동자들이 직면한 현안(대선, 당 건설 등)에 대한 토론도 예정되어 있다. 토론 주제는 계속 추가될 예정이다.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포럼」 토론 주제

 

1. 코뮤니스트 좌파와 세계혁명 :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논쟁, 자본주의 쇠퇴-해체 문제 등)

2. 코뮤니스트 강령과 당 건설 : 코뮤니스트 정치원칙, 선거강령과 계급의식, 혁명당 건설)

3.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투쟁과 국제주의: 쿠바, 미얀마 투쟁 등 최근 쟁점, 민족문제와 국제주의 원칙)

4. 혁명과 반혁명, 프롤레타리아트 운동의 역사적 교훈 : 파리코뮨 150주년, 크론슈타트 봉기 100주년 교훈 등)

5. 팬데믹과 자본주의, 계급투쟁 전망 <종합토론> : 팬데믹-자본주의 위기와 계급투쟁 전망

 

 

지난 10월 8일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최근 내부 논쟁’을 주제로 제1차 포럼을 개최했다. 포럼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에서 우선 위에서 언급한 ‘한국 코뮤니스트 좌파 운동 역사’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고, 앞으로의 포럼 진행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다음 포럼은 코뮤니스트 정치 원칙과 국제정세를 주제로 본격적인 토론이 진행될 것이다. 비록 지금은 작게 시작하지만, 근본적인 토론과 혁명적 실천을 준비할 것이다. 이러한 혁명적 포럼에 계급투쟁의 부활과 새로운 운동 주체 형성에 기여할 투쟁하는 노동자,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원칙을 실천하는 노동자/활동가들이 함께할 것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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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포럼」을 미래의 세계혁명당을 위한 정치적, 조직적 준비의 일부로 생각한다. 또한, 혁명적 실천을 통해 꾸준히 계급에 뿌리내리고 혁명운동의 불씨를 되살릴 것이다. 아래의 전망은 세계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조건이자 국제 코뮤니스트 좌파 진영 공통의 과제이다.

 

"시간은 더는 노동계급의 편이 아니다. 그러나 그 그림자를 뛰어넘을 수도 없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1917년 이후뿐만 아니라 1968년~89년의 투쟁에서 잃어버렸던 많은 것을 되찾아야만 한다. 이 작업은 혁명가들에게 계급의 실제 운동과 자본주의 생산 양식의 위기로 드러난 전망을 분석하고, 이러한 이론적 노력의 바탕 위에 코뮤니스트로서의 입장의 첨단에 설 사람들에 의해 제기된 문제에 대답을 제공하는 데에는 매우 오랜 시간의 끈질긴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작업의 가장 중요한 측면은, 혁명의 문제를 제기할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조건이 다시 한번 갖춰질 때, 미래 당을 위한 정치적, 조직적 준비의 일부로 여겨져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오늘날 혁명적 조직의 책무는, 1930년대 코뮤니스트 좌파인 이탈리아 분파가 가장 명쾌하게 정교화한, 코뮤니스트 분파의 책무와 유사하다." (「코뮤니스트」 7호, ‘국제 계급투쟁에 대한 결의’, 2017년 4월, 국제코뮤니스트흐름)

 

“코뮤니스트의 과제는 코뮤니즘을 위한 사례를 주장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조직의 기반을 확장하고, 다른 노동자들과 학습하기 위하여 계급의 모든 투쟁에 참여하는 것을 포함해야 하는데, 그럼으로써 우리는 역사의 새로운 국면, 아직 쓰이지 않은 역사 속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혁명적 이론 없는 혁명적 실천도 없지만, 혁명적 실천 없는 이론의 타당성에 대한 검증도 없다. 과도한 행동주의를 피하는 한편, 이러저러한 요구를 내세우지 않고 즉각적인 투쟁을 미래의 코뮤니스트 사회로 연결하기 위해 코뮤니스트들은 계급투쟁에 참여한다. 우리의 목표는 그 일을 더 넓히고 프롤레타리아 해방의 핵심 도구로서 미래의 국제적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을 우리의 대열에 합류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코뮤니스트」 13호, ‘코로나19 위기 속 코뮤니스트 활동의 틀’, 2020년 12월, 국제코뮤니스트경향)

 

몇 개월 후 문재인 정권이 저물고 누가 집권해도 전혀 새롭지 않은 더 악화된 부르주아 정권이 들어설 것이다, 팬데믹 재앙 이후 세계자본주의 위기는 더욱 심화할 것이고, 노동자의 삶과 인류의 미래는 더욱 위태로워 질 것이다.

 

문재인 정권 5년과 팬데믹의 경험은, 야만의 자본주의 체제 위기와 고통을 넘어서는 길이 부르주아 정치(선거) 참여와 정권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적이고 집단적인 행동을 통한 코뮤니스트혁명에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문재인 정권 내내 촛불 정권 환상에서 팬데믹 대응까지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노동계급의 현실이 암울하다고 자본주의 전복과 코뮤니스트혁명으로 향하는 길에 우회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지금이야말로 계급투쟁의 최종 목표를 분명히, 공개적으로, 공세적으로 주장하며 혁명적인 실천을 해 나가야 할 때이다.

 

계급투쟁의 부활과 계급의식의 발전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더 근본적으로! 더 급진적으로! 더 장기적 전망으로! 자신의 '계급적' 자리를 찾아갈 때 가능하다. 그 길에는 발본적인 토론과 혁명적 실천을 꾸준히 결합하며 전망을 제시하는 동지들이 필요하다. 그 길에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포럼」이 동지들과 함께 할 것이다.

 

2021년 11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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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해방운동가 윤웅태 동지 6주기 추모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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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민해방운동가 윤웅태 동지 6주기 추모제

 

○ 박일수 열사 18주기 추모제와 합동으로 진행
○ 일시|2022년 2월 13일(일) 오전 11시
○ 장소|솥발산열사묘역(하북면 삼덕로 288)
○ 문의|010-5135-7957         
○ 참가신청| bit.ly/윤웅태6주기
○ 직접 참석 못하셔도 위 링크에서 윤웅태 동지를 기억하는 메시지를 남겨 주세요!

 

윤웅태동지정신계승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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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 문제] 거주자에게 살 집을 : 오두막에 평화를, 궁전에 전쟁을!

 거주자에게 살 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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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재산보다 생존권이 중요하다!” (러시아혁명의 벽 슬로건)

 

독일 헌법재판소가 베를린 임대료 상한제를 번복함에 따라, 부동산 로비는 의미심장한 승리를 자축했다. 만장일치의 판결에 의하면, 베를린의 임대료 상한제는 “헌법과 양립할 수 없으며, 따라서 무효다.” 이에 증시는 “독일 주택(Deutsche Wohnen)”의 주가는 6.8%, “아들러 그룹(Adler group)”은 7.6%, “보노비아(Vonovia)”는 2.9%로 상승했다. 현재 수천의 임차인들이 대유행 시기 엄청난 임대료 급등 및 체납으로 위협받고 있다. 만약 갚을 수 없다면, 그들은 집을 몰수당할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 정의는 부자들의 재산만을 보호하지, 생존권은 보호하지 않는다! 는 점을 다시 한번 확실히 알 수 있다.

 

물론 임대료 상한제는 임대료의 급격한 상승을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도구가 절대 아니었다. 그것은 언제나 일시적이었으며, 허점으로 가득했고, 집주인과 사기꾼 부동산 업자들은 임대료를 둘러싼 그들의 방식을 습관적으로 기만했다. 상한제에도 불구하고, 임대료는 5% 증가했다. 그러한 개념으로 볼 때, 그것은 언제나 2018/19년 임대인들의 항의에 대한 상원의 진정제였다. 물론 상원이 SPD(독일사회민주당)와 Linkspartei(좌파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편리하게 잊어버리기 위한 바람에서였다. 그들은 2002년과 2011년 사이 자산기업들에 수십만 채의 집을 헐값에 넘겼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지난 10년간 임대료의 106% 증가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 또한 최근의 “상한제”가 사라졌으니, 이러한 경향이 지속할 확률이 높다...

 

주택 부족 및 임대료의 급상승은 결코 베를린만의 현상이 아니다. 전 세계적으로 임대료가 급격히 올랐다. 현재 뮌헨의 평균 임대료는 평방 미터당 18.48유로, 프랑크푸르트는 15.75유로, 슈투트가르트는 14.74유로를 보인다. 유일하게 13.68유로인 베를린은 그 배경에 “흔적”이 있다. 교외 및 도시 외곽도 이러한 개발로부터 보호되지는 못한다. 한편, 순이익의 거의 40%가 임대료로 쓰인다. 당신 머리 위 지붕의 미심쩍은 사치를 위해, 임차인들은 더욱 열심히 노동하고, 음식과 옷을 줄이고/줄이거나 가장 독특한 생활 공동체를 형성하도록 강요받는다. 여성 임차인과 저소득자들이 특히 많다. 퇴거 발생률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이로써 수많은 이들이 즉각적으로 주택 비상사태와 노숙의 위협에 처해있다.

 

주택 부족 : 자본주의의 비극

 

물론 시장경제 논리 안에서라면 이러한 개발을 시도하고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논리에 따르면, 대도심에 주택은 턱없이 부족한 것에 비해 인구는 너무나 많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건설사와 부동산회사에 더욱더 많은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건데, 공급과 수요의 균형을 다시 한번 맞추기 위해서다. 그러나 자본주의 주택 시장에 있어서, 그토록 수익성 있는 자원이란 바로 충당할만한 주택의 부족이라는 점이다. 저렴한 주택을 구하기가 어려워지는 만큼, 더 높은 임대료를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직면하는 다른 문제 모두와 함께, 꾸준히 증가하는 주택 부족을 겪는 것은, 실재하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분명 진정한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방향이 아니기 때문이며, 오히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의무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기대이윤이 비용을 현저히 능가하는 지역에만 주택 시장의 투자가 이루어진다. 이는 값싼 사회적 주택을 지어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초호화 주택과 콘도의 건설뿐만 아니라, 값비싼 새로운 임대의 “현대화” 및 “개/보수”를 통해서는 더욱 요원할 뿐이다. 결과적으로 사회적 주택의 양은 곤두박질쳤다. 매년 4만 3천의 가구가 사회적 소유권에서 박탈되는 한편, 가입자 수는 더욱 적다.

 

위기와 “콘크리트 황금으로의 탈출”

 

이러한 환경에서, 글로벌 자본주의 위기의 타격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다. 전후 호황이 끝난 1970년대 초, 이전의 모든 호황을 능가했던 축적 또한 끝났다. 이윤율을 보상하기 위해 세계 자본은 생산 과정의 구조조정 및 폭발적인 착취율 증가에 의지했다. 변칙적이며 불안정한 고용 조건을 확대함으로써, 자본주의는 자신을 “서비스 경제”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임금노동을 통해 이룩한 부는 최근 10여 년간 금융 분야로 옮겨졌다. 이곳에서 화폐는 경이로운 방식으로 “작동”하고(하지만 진정으로 어떠한 새로운 창출하지 못한 채), 투기가 성행한다. 2008년 금융 위기의 충격이 이런 개발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세계 경제가 붕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앙은행은 통화량을 늘렸다. 수익성이 좋은 투자 기회를 찾아, 특히 이윤율이 0 혹은 0에 근접하면, 막대한 양의 자본이 이른바 “콘크리트 황금”으로 불리는 곳으로 흘러가 부동산과 토지 가격을 천문학적으로 상승시킨다. 주택 부족에 근거한 주택 투기가 성행하는 것이다. 특히 대도시는 투자 자금, 상장 기업, 부유한 개인, 그리고 기타 장사꾼들을 위한 장으로 변모한다. 그들의 사업 모델인 주택은 투자 자산이 되고, 유지 비용이 최소화되며, 임대로 증대를 위한 기회들이 최대화된다. 이에 따른 결과를 거의 모든 이웃에서 발견할 수 있다.

 

기존 거짓 속의 사회화?

 

이러한 개발은 더는 중산층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현재 목소리들이 점차 증가해 부르주아 진영에까지 닿고 있는데, 민간 주택 시장 개발에 제재를 가해야 한다는 규제 능력을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도이체보넨 주식회사 국유화 캠페인”과 더불어, 최대 부동산회사의 국유화에 대한 국민투표(1)를 요구하는 (연합) 단체가 베를린에서 결성되었다. 이 단체의 대변인들은 동시에 부르주아 법칙에 확고히 바탕을 두고 “사회화”에 대한 논쟁을 부활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들 모두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모든 의미의 “사회화”라는 용어를 훔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사회주의로 퇴보할 것”이라고 경고하는 부동산 로비와 부르주아 정당의 넋두리 덕분에, 제기된 “사회화”는 초기에는 외견상으로는 급진적 수용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2000년대에 상원에 의해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에 팔린 주택 약 20만 채에 대한 “재자치화 철회”에 대한 문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들은 베를린 운송 회사의 모델에 따라 "공법 기관"의 소유로 이관될 예정이다. 이 모든 것은 부동산 기업에 비례 보상 지급으로, 첫 매매가의 최소 10배에 달할 것이다. 그렇다면 상당한 액수가 “공정한 임대료”와 이자에서 상환되어야 한다. 즉 임대업자의 수중으로 내던져져야 한다. 결국, 개혁주의는 필연적으로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된다. 기이한 숫자 게임과 실현 가능성의 계산에는 개별 주택단지에 대한 “재자치화”, “국유화”, 혹은 “사회화”(이들 용어는 의도에 따라 다양하다.)로 주택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도심 지역의 임대 계약과 퇴거를 중단시키거나 혹은 부분적으로는 자본주의로 밀어낼 수 있으리라는 헛된 환상을 동반한다. 하지만 여러 운동 전략가들에게는 너무도 유감스럽게도, 합법적 재산이라는 명칭으로는 주택 소유에 대한 자본주의적 본성을 전혀 변화시키지 못한다. 위기는 주택 부족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국가도, 지역공영도, 협동조합 소유의 건설회사도, 자본주의 착취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이른바 “도시에 대한 권리”를 위해 좌파 국가주의자들이 외쳤던 구호를 고려할 때, 우리는 일찍이 1872년에 이 주제에 관하여 훌륭한 동지가 했던 말을 다시금 기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계속 존재하는 한, 주택 문제나 노동자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다른 사회적 문제의 고립된 해결책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해결책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철폐하고 노동계급 자신에 의한 모든 생활수단과 노동의 전유에 있다.” (엥겔스, 「주택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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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에 평화를, 궁전에 전쟁을!

 

임차인들의 항의에서 자주 제기되는 주택은 상품이 아니어야 한다는 요구는 정확하고 중요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사회의 권력 관계와 지배 관계에 문제를 제시하지 않는 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노동계급의 이익을 위한 주택의 진정한 사회화는 의회에서 통과된 법률은 말할 것도 없고, 국민투표를 통해서도 거의 시행될 수 없다. 이 문제는 “은행 통제”, “부자들에 대한 강력한 세금 부과”, 혹은 “주택 회사의 국유화”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국가 통제의 자본주의는 어떤 대안도 제시할 수 없다. 소련의 스탈린주의와 그 외의 경험들이 이를 충분히 입증해 왔다. 자본주의 이윤의 논리로부터의 분명한 분리, 지배계급의 무력화, 근본적으로 완전히 다른 생산양식을 통해서만이 인간의 착취를 종식할 새로운 사회가 가능해질 수 있다. 착취의 증가와 마찬가지로 주택 위기에서 명백히 드러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인간의 경멸은, 처음에는 이 체제의 즉각적인 영향에 대항하여 점점 더 저항을 불러일으킨다. 임대료 인상과 임금 삭감에 저항하는 투쟁은 지배계급이 좁은 경계를 긋는 곳에서 연대를 유지하는 중요한 기반이다. 그러나 그들이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희망이 없다. 우리는 코뮤니스트다! 우리는 우리의 견해와 입장을 숨기지 않는다! 우리는 인간에 대한 “전술적” 도구적 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모든 대리주의 정치를 거부한다! 우리는 노동계급 전체의 이해관계에 중심을 두고 계급투쟁을 지원하며, 그러한 투쟁의 한계를 비판하고, 임금 노동자의 자기능력을 강화하는 것을 우리의 임무라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 조직적 체계, 계급투쟁 개입을 위한 정치적 도구, 즉 국제적 구조와 기반을 둔 국제주의자 조직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것이 길고 어려운 과정이 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배계급의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필요하다.

 

 

2021년 6월 10일

국제주의코뮤니스트그룹(GIK)

 

 

<편집자 주>

2019년 독일에서는 거대 부동산기업들의 임대주택 몰수와 국유화를 요구하는 ‘도이체보넨 몰수’ 운동이 일어났다. 지난 9월 26일에는 베를린에서 주민투표가 성사되었고, 56.4%의 찬성으로 임대주택 국유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결의안'만으로 국유화를 이루어낼 수 없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국유화(국가 통제의 자본주의)는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다. 주택 문제는 코뮤니스트혁명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고 착취를 종식해야만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관련 글>

모든 부르주아 정치 세력의 부동산정책은 가격상승 대책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0231

코뮤니즘 세상에서... 도시와 주택은 어떤 모습일까?
http://communistleft.jinbo.net/xe/index.php?mid=cl_bd_04&document_srl=340247
 

 

<출처>  국제코뮤니스트경향(ICT)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1-06-10/homes-to-those-who-live-in-them

http://www.leftcom.org/de/articles/2021-05-21/die-wohnungen-denen-die-drin-wohn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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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4호] 우리가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

우리가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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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르주아지는 생산 수단을 소유하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권력(경제, 정치, 군사적)을 갖는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현재의 정치 체제를 이른바 부르주아 민주주의라고 부르는데, 그 뿌리는 '부르주아지의 독재'에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거는 단지 부르주아지의 손에 있는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의 꼭두각시 인형극에 불과하다. 그들은 부르주아 독재 체제를 주권자(국민)의 명령으로 포장하고, 동시에 그것을 ‘민주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선거는 부르주아지의 (의회/대통령제) 민주주의가 착취당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주인을 선출할 자유를 양보하는 순간이다. 그들이 우파든 좌파든 기껏해야 부르주아계급의 이해관계를 방어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해줄 세력/사람 중에서 선출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선거에 참여하는 것은 이러한 민주적 신비화를 지지하고, 부르주아지가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독재를 돕는 것을 의미한다.

 

노동계급은 4년, 5년마다 주기적으로 벌어지는 부르주아지 의회/대통령 선거의 사기극에 맞서 계급적 입장에서 선거 거부를 다시 제기해야 한다. 이것은 분명히 무관심과 정치적 개인주의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 현장과 거리에서 계급투쟁을 재개하고 혁명당 건설에 참여하기 위해서이다.

 

대통령 선출이나 의회 다수파 장악을 통한 정권장악의 길은 결코 임금노동의 착취를 폐지하지 못하며, 지속가능할 것이라 생각하는 “권리”마저도 쟁취-유지 못할 것이다. 오직 계급투쟁의 확산만이 자본이 잠시나마 노동자에게 일부를 양보할 수 있게 한다. 프롤레타리아혁명만이 착취 없는 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 수 있다.

 

(「코뮤니스트 정치 원칙에 대한 질문」,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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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로 세상을 바꿀 수 없습니다!

 

 

반(反)노동자 악법을 만든 주역들이 규칙을 정한 자본주의 선거에서

노동자는 승리할 수도, 권력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노동자는 선거에서 차악이냐 차선이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를 죽이고 위기를 전가하는 세력에 권력을 바치는 "선거냐"

 

노동자를 살리고 스스로 권력을 갖는 "투쟁이냐"를 선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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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하고 불온한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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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하고 불온한 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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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4호] 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

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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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가 다가올수록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진보/보수 프레임, 공정과 능력, 반공, 지역주의, 민족주의 등) 이슈의 용광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물론 부르주아 선거는 노동계급의 투쟁과 이슈를 잠재우는 블랙홀 역할이 기본이다. 게다가 부르주아 정당/정치인 사이의 진흙탕 싸움(비리 의혹 공방)으로 정치 무관심이라는 효과까지 누리고 있다. 정치에 대한 무관심은 계급 착취와 각종 비리의 토대를 제공한다. 결국 부르주아 선거판은 철저히 노동계급의 현실을 수면 아래로 가라앉히었다. 국제코뮤니스트전망에서는 그동안 이러한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입장을 수차례 밝혔다.1) 따라서 이 글에서는 선거를 통한 부르주아민주주의 작동 기제와 이를 통한 노동계급에 대한 지배방식에 대해 언급하겠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

 

①능력주의

 

대의제 방식인 부르주아민주주의는 4∽5년을 주기로 대통령, 국회의원, 지자체장/지방의원을 선출한다. 대의제에서 후보로 등록하거나 뽑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대부분 부르주아거나 쁘띠부르주아 혹은 그들의 이익에 복무하는 이데올로그들이 대부분이다. 즉, 자유민주주의라는 포장물의 내용은 부르주아민주주의(부르주아 독재)이다. 부르주아정당을 통해 그들은 선거 후보들에게 특별한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그 특별한 능력이란 돈, 권력, 학벌 중 최소한 한 가지 이상을 가지는 것이다. 선거를 바탕으로 한 부르주아의 화려한 능력의 배경은 자원과 부의 사회구조적 독점이다. 부의 독점이 선거를 통해 능력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은 자유민주주의라는 명목으로 진행된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자본주의 역사를 통해 지금까지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능력은 오롯이 개인적 부분만이 아닌 개인이 소속된 계급의 영향과 사회적 배경이 절대적이다. 능력주의는 자본에 의한 노동계급 착취에 대한 정당성 부여와 차별을 합리화 시킨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대장동 게이트는 자본, 법조계, 정치권을 포함한 지배계급 게이트이다. 대장동 게이트는 능력주의를 내세워 어떻게 착취하고 합리화시키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해결책으로 등장한 민간개발 이익 환수 역시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 민간개발 이익 환수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적 방식과 엘리트주의/능력주의가 결합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국민의 위임을 받은 능력 있는 권력자만이 할 수 있다는 전제를 두고 있다.2)

 

지배계급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이 설정한 기준으로 형식적 경쟁을 한다. 처음부터 승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것이 능력주의의 핵심이다. 능력주의는 지배계급에 의한 경제적 지배를 넘어 자본주의 사회전체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정치적 지배 역시 능력주의를 배경으로 한다. 능력주의의 가장 큰 폐해는 피지배계급의 고통이다. 무능력자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차별과 억압이 일상화된다. 그러면서 노동계급이 처한 현실은 은폐되고 미화된다.

 

②진보 대 보수

 

진보 대 보수의 프레임은 자유주의자들이 설계하고 만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되면서 민주 대 반민주의 구도는 진보 대 보수의 구도로 바뀌었다. 민주 대 반민주도 마찬가지이지만, 진보 대 보수의 구도는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적 대립과 계급역량을 왜곡, 은폐시켰다.

 

부르주아 정당들은 겉으로는 국민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진보다 보수다 딱지를 붙이고 정쟁을 한다. 운동세력 역시 이러한 구도에 갇혀 계급 대립을 무시하거나 망각하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편승하고 있다. 하지만 내막을 들여다보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며 지배계급 세력사이에 이익 쟁취를 위한 이전투구에 불과하다. 더 정확히는 자본을 위한 정책이다. 문재인 정권의 부동산 정책이 가장 대표적 사례이다. 2020년 이전까지 문재인 정부의 부동산정책은 일관되게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책이었다. 한마디로 집값 억제가 아니라 집값 폭락을 막는 것이 핵심이었다. 말로는 집값 상승 억제를 주장했지만, 20여 차례에 걸친 부동산 대책은 주거 안정을 원하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오히려 부동산 가격을 끝없이 수직으로 상승시켰다.

 

이처럼 지배계급은 진보 대 보수라는 구도를 이용해 자본에 의한 노동착취와 계급대립을 은폐시킨다. 또한 진보와 보수정권의 주기적인 교체를 통해 이상적 정치제도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조장한다.

 

“의회 제도는 자본주의 국가의 폭력적 통치를 은폐하여 상대적으로 덜 야만적인 폭력을 사용하고, 주기적인 선거제도를 통해 지배계급의 분파 사이에서 정권을 교체할 수 있게 한다. 선거와 의회제도는 노동자계급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합법적인 지배를 보장해주는 장치가 되었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에게 자신을 다스릴 사람을 직접 선출하고 자신이 정치권력에 참여하고 있다는 환상에 빠지게 한다.” (「코뮤니스트 정치 원칙」, “반의회주의 혁명전략”,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이러한 환상은 노동계급의 계급의식을 마비시키고 계급투쟁을 무력화시켜 순종이 피지배 계급의 도덕인양 찬양하게 만든다. 결과적으로 부르주아 지배의 철옹성이 세워지는 것이다.

 

선거환상 ;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동화

 

선거에 대한 환상을 갖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과 지배이데올로기에 동화된 것도 그 중 하나다. 노동조합을 비롯한 운동세력 내부에 팽배한 관료주의, 권위주의, 노동계급에 대한 피상적 인식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인 능력주의의 토양이 된다. 또한 코뮤니즘에 대한 전망 부재는 야권연대, 자유주의 정치인에 대한 비판적 지지의 토양이 되면서 진보 대 보수의 구도에 스스로 갇혀버렸다. 급기야 선거환상에 빠지면서 선거를 통해 어떤 체제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체제전환을 주장하고 있다.

 

①능력주의, 관료주의, 권위주의

 

부르주아 선거전술에서 노동자후보는 계급의 역량과 분리된 채 대부분 명망가 위주이다. 이것은 노동민주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고 노동계급의 수동성을 강화하고 관료제를 강화시킨다.

 

“노동계급 안에 혁명적 부분(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위가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혁명당(조직)은 적대하는 계급과의 투쟁이 있는 곳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계급 안에서 모든 투쟁에 함께하면서 혁명강령을 방어하는 집단으로 존재해야 한다. … 그런데 여전히 노동계급 주위에서 전위 역할을 한다는 세력들은, 계급투쟁 개입을 노동자 투쟁을 대리하거나 자신들이 투쟁의 배후 역할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들은 ‘공동전선’이라는 외피를 쓰고 상층중심의 공동전선(투쟁), 입당 전술, 노동자 후보/선거연합, 계급연합, 노동자정부 등의 혼란스러운 전술을 남발하고 있다. 이러한 공동전선은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기는커녕 공동전선의 상대에 따라 강령의 수준을 낮추고 전술의 원칙을 바꿔가면서 계급의식을 혼란에 빠트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아직 노동자의 절대다수가 부르주아의 책략에 눈을 감고 있는 상태에서, 혁명조직의 책무는 혁명의 최종목표를 보다 명료하고 직접적으로 노동자들에게 알려서 행동을 촉진하는 일이지, 자신의 정치를 부르주아 대중 정치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아니다.“ (‘공동전선 비판과 혁명조직의 역할’, 「코뮤니스트」 12호, 2020년,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이형로)

 

②자본의 좌파의 실패한 선거전술의 반복 – 코뮤니즘에 대한 전망 부재

 

내년 대통령선거, 지방선거에서도 여러 운동세력은 실패한 선거전술을 되풀이하고 있다. 사회주의(?)좌파 공투본, 민중경선, 자유주의 정치인 지지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낡은 선거전술은 이미 수차례 실패로 끝났다.

 

“그동안 선거에 개입했던 노동자정당, 진보정당들은 완전한 의회주의 정당으로 자리 잡았고, 이들을 지지했던 민주노총의 정치는 파산상태에 이르렀다. 이 과정에서 노동계급에 대한 수많은 배신과 운동권 출세주의를 양산했다.” (「2012 부르주아 대선에 맞선 코뮤니스트노동자의 입장」, 2012년, 국제코뮤니스트전망)

 

그럼에도 사회변혁노동자당을 비롯한 이른바 좌파단위에서는 내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직접 대선후보 공약을 만들고 후보를 선출하는 등 선거 대응 취지로 한국 사회 체제 전환을 위한 ‘사회주의·좌파 대통령 선거·지방 선거 공동투쟁본부’를 제안했다. 그러면서 “소수 재벌과 자산 불로소득자를 위한 경제를 모든 사회구성원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경제로 체제를 바꾸지 않는 한 경제위기와 노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더 많은 이윤·더 많은 소비를 하며 더 많은 노동·더 많은 자연 수탈로 지탱되는 자본주의를 필요한 만큼 계획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하며 더 적은 노동으로 자연과 공존하는 생태사회”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3)

 

마치 체제 전환이 사회주의 정치인 양 주장하면서도 자본주의를 필요한 만큼 계획적으로 생산하고 소비하자고 주장한다. 10년 전 국제코뮤니스트전망에서는 부르주아 정치 공간에서 벌이는 선거 개입이야말로 코뮤니스트운동을 급격하게 퇴보시키는 정치적 타락행위라고 비판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후 그들은 사회주의 정치는 자본주의 개혁이라는 점을 스스로 시인했다.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선거에서의 공약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와 인류의 미래가 걸린 계급투쟁의 최종 목표와 코뮤니스트혁명의 전망을 가질 때만 노동계급의 무기가 된다. 사회주의 간판으로 후보를 내고 ‘자본주의 전복-노동자 자기 권력’의 과정이 빠진 채 체제 전환을 주장하는 것은 기회주의자들의 오래된 습성인 사회주의 희화화일 뿐이다.

 

민주노총 일부에서는 노동자민중의 대선 단일후보 선출을 위한 노동자민중경선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민족주의 계열과 일부에서는 자유주의 정치인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주장한다. 이 역시 선거 때마다 되풀이되는 낡은 전술이다.

 

”대대적인 촛불 투쟁에서 노동자들의 요구는 현 위기와 모순의 근본 원인인 자본주의 체제 문제로 나아가지 못했다. 방어적인 노동자 기본권 요구에 머물렀던 노동자 운동 진영은 대선에서도 자신들의 현안과 쟁점을 계급투쟁-권력 투쟁으로 모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극우 친자본 세력의 ‘강성노조’ 공격이 쟁점이 되었을 때, 자본과의 전면전을 선언하지 못하고 억울함과 노동 존중을 호소하는 데 그쳤다. 촛불투쟁의 주역이었다는 민주노총과 이른바 좌파 세력은 대선에서 공세적이지 못했다. 노조 할 권리,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문제 해결 등 최소한의 방어적 요구도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지 투쟁으로 쟁취하겠다.'는 계급적 요구가 아니라 '투쟁과 정책협약'을 병행하는 애매모호한 시민적 요구에 그쳤다.“ (「계급과 권력투쟁 없는 촛불광장과 선거 그리고 이후」, 2017년 6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이형로)

 

2022년 대선을 앞두고 벌어지는 노동자 운동 내 모든 선거참여 시도는 실패한 선거전술의 반복이 분명하다. 그들 중 이른바 좌파는 말로만 사회주의를 주장했지만, 코뮤니즘에 대한 이해 부족과 전망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선거운동을 투쟁으로 둔갑시키고 있다. 자칭 사회주의 세력은 코뮤니즘이 아닌 자본의 좌파 입장에서 선거 때마다 실패한 전술을 반복했다.

 

“노동자계급을 위한 어떠한 성과물도 선거를 통해 얻을 수 없다. 선거제도 자체가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정치제도와 통치기구를 유지하고, 노동자들에게 ‘투표 기계’로서 수동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정치에서는 대중 투쟁의 성과조차도 전문 정치인들이 위임받아 정파적으로 이용한다. 우리는 그동안 부르주아 정치에 의탁한 투쟁이 어떠한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투쟁으로 지켜내지 못한 권리가 어떻게 한순간에 무너지는지를 수없이 경험해왔다.” (「부르주아 선거를 넘어 코뮤니즘을 노동자계급의 미래로」, 2020년, 국제코뮤니스트전망)

 

부르주아 선거가 아닌 계급투쟁으로

 

“또한, 부르주아 선거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지배질서를 강화하거나 재편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이를 넘어서 자본주의 지배질서 자체를 바꾸거나 착취와 억압제도를 폐지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는다. 부르주아 선거라는 무대에서는 원래 무대의 주인인 ‘대중’이 아니라 무대의 설치 관리자인 ‘국가권력’이 이를 주도하기 때문에, 그들이 정한 시간과 장소, 그들이 정한 순서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으며, 대중들도 무대를 벗어날 수 없다.” (“6·4 지방선거에 부쳐 - 선거 환상을 넘어서자”, 「코뮤니스트」 4호, 2014년,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부르주아 선거를 통해 노동계급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이미 명확해졌다. 그럼에도 자본의 좌파가 부르주아 민주주의 규칙과 선거제도에 복종하고 놀아나는 한, 그들은 자본주의를 결코 넘어설 수 없다. 오히려 부르주아 잔치판의 들러리로서 노동계급 투쟁에 혼란만 가중시키는 기회주의 역할로만 기여할 뿐이다. 노동계급의 미래는 다른 계급이 대리해 주거나 다른 계급과의 뒤섞임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다. 노동계급 스스로 투쟁하고 개척해야한다.

 

“사람들의 대대적인 변화는 반드시 코뮤니스트 의식의 이러한 대대적인 공조 속에서 확인되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변화는 단지 하나의 실천적인 운동, 즉 혁명 속에서만 실행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혁명이 필요한 까닭은 혁명이 단지 지배 계급을 전복할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다른 계급을 전복한 계급이 오직 혁명 속에서만 스스로 낡은 체제의 모든 썩은 것들을 쓸어 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이데올로기」, 맑스)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국가를 강화시켜주는 부르주아 정치 참여가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기구의 파괴로만 지배계급을 전복시키고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따라서 선거 시기 부르주아 서커스 쇼에 노동자들을 대상화하는 선거전술이 아니라 모든 부르주아 정치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자 투쟁과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계급투쟁 속에서 자신들이 자본으로부터 착취당하는 하나의 계급임을 깨닫는다. 물론 투쟁만으로는 계급의식이 발전하지 않는다. 그것은 작업장을 넘어, 부문과 지역을 넘어, 민족과 국가를 넘어 연대하고 투쟁하는 국제주의 원칙이 노동자 의식에 자리 잡아야 가능하기 때문에, 일상에서의 꾸준한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정치의 실천이 필요하다. 자본주의 위기,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계급투쟁의 새로운 조건은 여전히 노동계급이 자신의 운동 속에서 그동안 투쟁을 패배로 이끈 낡은 것들과 단절하고 새로운 운동을 창출해 내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는 선거주의라는 고질병과 같은 낡은 운동과 철저히 단절하고, 코뮤니스트 정치와 노동자 투쟁이 직접 만나 자본주의의 혁명적 전복이라는 목표를 분명히 세워야 한다.

 

노동자 투쟁을 교란하고 계급의식을 갉아먹는 선거주의와 단절하자!

부르주아 정치/선거참여는 노동계급에 대한 배신이자 사기극이다!

노동계급의 의식적인 투쟁과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정치만이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넘어설 수 있다!

 

 

2021년 11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윤태상

 

 

<주> 

 

1) 부르주아 선거에 대한 우리의 입장

- ‘2012 부르주아 대선에 맞선 코뮤니스트노동자의 입장’ (2012년 12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사회주의 정치의 실종’ (2012년 10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오세철)

- ‘어제 우리를 속인 낡은 정치가 오늘도 여전히 노동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 (2013년 4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 ‘촛불광장과 부르주아 대선’ (2017년 6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 이형로)

- 「코뮤니스트 정치 원칙」, “반의회주의 혁명전략”, 국제코뮤니스트전망

“코뮤니스트 혁명의 의제와 혁명의 가능성을 직접 내걸어야 하는 자본주의 쇠퇴기인 현재에서는 선전 및 선동수단으로서 선거와 의회의 활용이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의회와 선거개입에 대한 전술이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정치적 장치를 유지하고, 노동자들의 수동성을 조장하는 경향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르주아 선거와 의회에 대한 개입, 그것과 관련된 각종 선거 연합은 그들이 내거는 급진적이거나 혁명적인 강령들, 연합의 명칭과 관계없이 노동계급의 자립성과 자기조직화를 저해하는 요소일 뿐이다.”

 

2) 개발이익 환수는 자본주의에 토대를 둔 방식으로 시세차익과 이윤을 목적으로 한 투기와 생산에서 비롯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도 못하고 자본주의적 방식에 토대를 두고 진행된다. (‘모든 부르주아 정치 세력의 부동산정책은 가격상승 대책’, 「코뮤니스트」 13호 참고)

 

3) ‘사회주의·좌파 대통령·지방 선거 공동투쟁본부 함께하자’, 참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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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을 내면서

「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을 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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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가까워졌다. 선거 이야기에 앞서 기회주의자들이 그토록 고려한다는 현실에 대해 살펴보자.

 

현실의 청년들은 갈수록 악화하는 삶의 조건(취업 경쟁, 열악한 주거, 부채, 높은 실업률 및 저임금/과로/위험/불안정노동 등)에 수없이 좌절하며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어항 속 물고기의 삶을 살고 있다. 이러한 고단한 삶은 가진 것 없는 중⦁노년의 현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연간 2억을 써도 백화점 VIP 회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기사가 뉴스 사이트에 올라온다. 기사에 따르면 "올해는 지난해보다 약 4,000만~5,000만 원을 더 소비해야 안정적으로 최상위 등급에 속할 전망이다.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보복 소비’로 명품이 불티나게 팔리면서 백화점마다 사상 최대 실적을 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이처럼 코로나19 이후 빈부격차는 더욱 심해졌고, 계급 사이의 신분 이동은 몇 세대를 지나도 거의 불가능한 사회가 되었다. 이러한 체제의 근본적 문제를 선거를 통해 해결할 수 있을까? 설령 급진적 공약을 내건 후보가 당선된다 해도, 청와대와 국회 밖에 있는 더 큰 권력을 제압하고 공약 그대로 실현할 수 있을까?

 

기성 정치인의 민생 공약조차 그대로 믿고 투표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이른바 사회주의 후보가 선거를 통해 ‘체제’를 바꾸겠다고 내건 공약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오히려 대중은 선거를 통해 얻은 수많은 경험이 있어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선거가 아니라 혁명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득표가 아닌 사회주의 선전을 위해 선거에 뛰어들었을 때 겪게 될 현실이다.

 

이번에는 1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더는 ‘통합진보당’, ‘진보정치’, ‘좌파정치’ 운운하면서 고리타분한 대립을 논하지 말자. 가까이에서 보든, 멀리에서 보든, 우리 주변에 펼쳐진 ‘노동자 투쟁 정치’와 미디어에 비친 ‘진보정치’는 그 어느 것도 공통점이 없다. 정확히 말해, 96~7년 노동자 총파업 투쟁 이후, ‘민주노총 정치방침’으로 형성된 ‘진보정당(정치)’시대는 끝이 났다. 그러나 여전히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말하면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진보정치가 노동계급의 발목을 잡고 있다. 낡은 것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물론 지금 필요한 것은, 진보정당에 제물을 올리고 축문을 읽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렇다고 야권연대 진보정당을 비판하면서, 이른바 ‘지도력’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공동전선(통일전선)을 통한 ‘노동자 독자정당’이 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정치노선적으로 실체도 불분명한 민족해방 좌파, 중앙파, 현장파를 포함한 공동전선 당은 무엇보다, 한국 프롤레타리아 정치운동의 위기를 ‘계급정치의 부활’이 아닌 ‘지도력의 정치’에서 찾는 점에서 노동계급에 치명적이다. 또한, 통일전선 당은 그간에 진행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당 건설 공동 활동 경험과 노력을 폐기한다. 대선 정국과 맞물려 진행되는 공동전선 당 전략은 기껏해야 ‘계급성과 혁명성도 애매한 진보좌파연합’으로 수렴될 것이다.

 

계급투쟁의 무기력함에서 오는 비관주의와 조급성, 여러 차례 패배의 자책감 등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미래를 내다보고 활동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 파업과 거리투쟁을 통해서 동지를 찾아내고, 자본과 노동의 적대적 투쟁을 통해서 새롭게 올라오는 대중의 잠재적 힘을 주목해야 한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다시금 혁명운동의 정치원칙을 강인하게 사고해야 할 때다." 

(「코뮤니스트 정치조직을 출범하면서」, 2012년, 국제코뮤니스트전망)

 

10년이 지난 지금 무엇이 달라졌는가? 정당 이름과 문구 몇 개만 바꾸면 현재 상황과 거의 같을 정도로 변한 게 없다. 통합진보당 대신 정의당과 진보당, 노동자 독자정당 대신 부르주아 진영으로 넘어간 진보정당과의 후보 단일화 실패, 강령 통일과 실천에 따른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 대신 의회주의 좌파 정당에 흡수된 이른바 사회주의 대중정당, 그리고 노동자 운동 내부의 선거주의 고착화가 변화의 전부이다. 이렇게 후퇴와 타락을 거듭한 운동 속에서 선거주의자들은 어떠한 반성과 성찰도 없이, 또다시 '혼돈' 또는 '최악'이라는 부르주아 선거판에 뛰어들어 과거의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현실 선거는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부르주아 선거판은 온갖 거짓과 비방, 혐오, 음모론으로 가득 찬 하수 처리장이 된 지 오래다. 부르주아 정치는 이러한 악취 나는 권력투쟁이 본질이지만, 민주적 선거를 통해 위기관리와 계급투쟁 완화 역할을 한다. 부르주아지의 민주적 통치에는 오염된 정치를 정화하겠다는 급진적 부르주아 분파도 필요하고, 이른바 노동/진보/좌파의 참여도 필요하다. 그들을 부르주아 정치로 흡수해 계급 간 대립을 체제 내에서 관리하고, 선거 시기에는 노동자 대중이 정치혐오와 정치 참여 사이를 오가면서 선거 환상 속에 머물게 하기 때문이다.

 

최근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노동/진보/좌파 진영의 단일후보 선출(민중 경선)이 무산되었다. 이번 후보 단일화 무산을 통해 다시 한번 확인한 것은, 민주노총에 일부 기반을 두었지만, 부르주아 진영에 속하거나 민족주의/계급협조 세력에 포함되는 이른바 진보정당과의 후보 단일화(선거연합)는 계급적 원칙과 방법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과, 어떠한 명분으로도 노동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나 사회주의 정치와는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만약 계급적 원칙이 우선이었다면, 그동안 계급을 배신하고 투쟁을 교란한 과거에 대한 반성과 부르주아 정치와의 단절을 전제조건으로 선거를 넘어 공동투쟁에 나섰어야 했다. 여기서 우리는 ‘노동자 권력’이라는 목표와 ‘노동자민주주의’라는 계급의 원칙을 명확히 하지 않는 선거-정치 연합은 부르주아 정치를 넘어서는 대안이 될 수 없고, 자본주의 체제와 싸울 무기도 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암울한 현실에서 우리는 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에 관한 코뮤니스트 원칙을 근본적으로 밝히고 현실 투쟁에 복무하기 위해 사상투쟁을 시작하려 한다.

 

우리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된 선거홍보물 비판이나 선거에 대한 강령(전략적) 원칙을 반복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우리 비판의 핵심은 사회주의자를 자임하는 세력의 운동적 퇴보와 그들이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낡은 후보 전술이 계급의식에 미치는 악영향이다.

 

공공연한 선거주의자들은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교주주의라 왜곡해서 비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의회주의-부르주아 선거의 본질을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선거 참여는 전술일 뿐이라며 선거 자체를 거부하는 우리를 ‘초좌익’으로 몰아가며 깎아내린다. 후자의 논리는 대부분 레닌 저서(「좌익 공산주의, 유아적 무질서」)와 트로츠키 입당 전술(「1934년, 프랑스 전환」)의 무비판적 수용에 기인한다. 역사 학습에 게으르거나 한쪽만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인 운동가들은 여전히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고 러시아에서는 적합할 수 있으나 서유럽에는 맞지 않고 오히려 기회주의자들에게 문을 열어 준) 낡은 문구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며 운동의 원칙을 훼손하고 계급의식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그러나 지난 몇 번의 선거 전술 실패 사례만 살펴보아도 선거주의자들의 거짓은 쉽게 드러난다. 우리는 지난 10년간 그들의 선거 참여가 계급의식 발전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일관되게 반대해 왔다. 퇴보하는 운동의 역사는 오류를 반성하지 않는 세력에게 면죄부를 주지만, 혁명적인 운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근본적으로 밝혀내 바로잡는 것으로 운동을 발전시킨다. 혁명운동의 걸림돌은 좌익의 급진적인 행동으로 타격을 받는 것보다 기회주의자들이 계급 운동에 들어와 계급의식을 후퇴시키고 투쟁을 교란하는 것이 결정적이었다. "기어서라도 국회에 가겠다."라는 선거주의 폐해를 노동자 운동에 끌어들이는 것이야말로 타락한 운동의 상징일 것이다.

 

부르주아 선거에 임하는 코뮤니스트 원칙은 ‘자본주의 체제의 혁명적 전복과 노동자 평의회 국제 권력 수립’이라는 목표를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 그동안 노동자 운동 내부에서 당연시했던 것과는 전제 자체가 다르다.

 

「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은 위와 같은 문제의식으로 발간했고, 코뮤니스트 좌파의 의회/선거 강령에서부터 지난 10년간의 한국 선거 평가, 반(反)의회주의 투쟁 역사까지 전반적으로 다루었다. 우리는 이번 대선만이 아니라 앞으로 노동계급이 주기적으로 치르게 될 모든 부르주아 선거에서 계급적 입장과 노동자 정치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이 책을 발간한다.

 

마지막으로 계급의 대변자를 자임했던 자들이 가장 많이 배신하는 경우는 탄압받을 때가 아니라 선거 기간이며, 노동자들이 희망을 갖는 것은 선거가 아니라 투쟁에 나섰을 때라는 것을 강조한다.

 

"해방을 위한 투쟁 속에서 당연히 온갖 오류를 다 범하게 돼 있다.

그러나 자신 한 몸의 영달을 위해 사는 것보다 더 무서운 오류는 없으니 그래도 투쟁하는 게 더 낫다."

(「한 혁명가의 회고록」, 빅토르 세르주)

 

“폭력의 힘에 맞서는 수단이 희망이라면

그 희망의 전부가 오로지 비폭력적 희망으로 존재한다면

희망이라는 힘이여!

우리에게도 격렬한 희망을 다오

격렬을 뛰어넘어, 망각과 평화와 저항마저도 뛰어넘어

희망에게도 폭력적인 희망이 존재할 수 있게 해다오

(...)

희망을 빼앗고 절망조차 넘겨받은 힘없는 희망들이

이제 곧 격렬한 희망으로 길바닥 나뒹구는 돌맹이가 되리니...”

(「격렬한 희망」, 임성용)

 

 

2022년 1월

국제코뮤니스트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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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이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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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
-빵과 서커스-
 
 
차례
 
 
「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을 내면서
 
 
□ 코뮤니스트 좌파의 의회/선거 강령
 
▸반(反)의회주의 혁명전략  
▸우리가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
▸의회와 선거의 신비화 
▸의회 
 
 
□ 2012~2022년 한국 선거
 
▸2022년 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 
▸2020년 공동전선 비판과 혁명조직의 역할 
▸2020년 부르주아 선거를 넘어 코뮤니즘을 노동계급의 미래로 
▸2020년 4월 총선 엎어버리자! 
▸2012년 부르주아 대선에 맞선 코뮤니스트노동자의 입장 
▸2012년 사회주의 정치의 실종 
▸2012년 개량주의자들에 대한 첫 번째 포고 
▸2013년 어제 우리를 속인 낡은 정치가 오늘도 여전히 노동자의 발목을 잡고 있다. 
▸2014년 6·4 지방선거에 부쳐 : ‘선거 환상’을 넘어서자 
▸2017년 정권교체를 넘어 선거를 넘어 자본주의 체제와의 전면적 투쟁으로!!! 
▸2017년 촛불광장과 부르주아 대선 
 
 
□ 의회주의/기회주의에 맞선 코뮤니스트 좌파의 투쟁
 
▸레닌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헤르만 호르터) 
▸세계혁명과 코뮤니스트 전술 (안톤 판네쿡) 
▸의회주의에 대한 테제 (아마데오 보르디가) 
▸여성 의원 (실비아 팽크허스트)
▸1934년, 프랑스 전환 
▸투표하지 말자 : 1948년 이탈리아 선거 
▸부르주아 선거(주의)에 반대하는 프롤레타리아 정치 
▸노동자민주주의만이 진정한 민주주의이다. 
 
 
“부르주아 선거에 임하는 코뮤니스트 원칙은 ‘자본주의 체제의 혁명적 전복과 노동자 평의회 국제 권력 수립’이라는 목표를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 그동안 노동자 운동 내부에서 당연시했던 것과는 전제 자체가 다르다.
 
「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은 위와 같은 문제의식으로 발간했고, 코뮤니스트 좌파의 의회/선거 강령에서부터 지난 10년간의 한국 선거 평가, 반(反)의회주의 투쟁 역사까지 전반적으로 다루었다. 우리는 이번 대선만이 아니라 앞으로 노동계급이 주기적으로 치르게 될 모든 부르주아 선거에서 계급적 입장과 노동자 정치를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이 책을 발간한다. 
 
마지막으로 계급의 대변자를 자임했던 자들이 가장 많이 배신하는 경우는 탄압받을 때가 아니라 선거 기간이며, 노동자들이 희망을 갖는 것은 선거가 아니라 투쟁에 나섰을 때라는 것을 강조한다.”
 
 
펴낸곳 : 국제코뮤니스트전망
발행일 : 2022년 1월 25일
 
 
□ 가격 :  10,000원
□ 구입문의 : communistleft@gmail.com  
 
 
「부르주아 선거와 노동계급」은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포럼>에서도 판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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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4호] 열사의 시대가 죽음의 시대 산 자에게

열사의 시대가 죽음의 시대 산 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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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는 하늘

- 한진중공업 김주익

 

 

가을엔 외롭다고 하지 말자

외로움마저 끊어버린 사람에게

너무 쉽게 외로움을 말하는 건

외로움이 싸움이란 걸 모르는 소리

 

저 나무는 생선가시처럼,

 

파랗게 떨며 혼자 가슴 태워도

끝내 피우지 못한 외로움의 연기

허공의 문을 닫고 꺼지지 않는 불붙여

죽어가는 하늘 끝 겨우 매달린 가을에

 

시 ┃ 임성용

 

 

 

 

지옥에서 핀 꽃

- 세원테크 이해남, 이현중

 

 

노동자가 한 인간으로 살기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나라

이런 나라인 줄 알았으면

정말로 이 나라에 태어나지 말 걸

 

너희가 정녕 내 숨통을

끊어놓기를 원한다면

오냐, 죽어주마!

이번에는 내 차례다

 

나는 지옥에서 핀 꽃이었다

비바람 몰아치면 비바람이 되고

폭설이 내리면 폭설이 되어

나는 기필코 이 세상의 끝을 보리라

 

시 ┃ 임성용

 

 

 

 

2013년 1월 28일

-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윤주형

 

 

아무도 내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으면

혹여 어울리지 않는 열사의 칭호를 던지지 마세요

 

버티는 일조차 힘이 들더라

조직도 노조도 친구도 동지도 차갑더라

 

세상에 나온 건 누구나 평등해도 사는 일은 그렇지 않았는데

나에게 참 다행인 것은 내 죽음을 나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네

 

주지 못한 뜨거운 마음 남기지 않고 조용히 사라졌으면

그럴 수 있다면 가난한 내 살과 영혼을 주고 싶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형제들은 출근의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게 벨 것이며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어두운 강가에서 저녁 노을 바라보며

나는 꺼져가는 눈물을 흘리겠지요

 

시 ┃ 임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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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는 땅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1.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고운 때는 이미 지나갔다

너무 잘 먹은 것이 죄다 독이다

 

독에 중독된 몸은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이다

고통조차 두려워 모르핀 쇼크로 죽어갈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촘촘하게 삥 뜯기며 죽어갈 것이다

 

이제 몸은 이윤의 새로운 세계시장이 되었다

화해할 수 없는 계급투쟁의 전장이 되었다

 

식탐을 이기지 못하는 곳에 이윤이 있고

증상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 이윤이 있다

한 줌의 알약으로 완치를 꿈꾸었으나

스스로 몸에 뿌린 제초제였다

몸의 면역체계는 이윤이 되지 못했다

 

약을 팔아먹기 위해

질병을 기획하고

아픈 몸을 대량 생산했다

약을 팔아먹기 위해

새로운 세균과 바이러스를 대서특필하고

공포와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생명이 아닌 것이 자본주의였다.

 

독극물 : 백신이라고 쓰고 몸에 대한 배신행위라고 읽는다

 

곧 백신 접종 여부가 출입증이 되고 여권이 되며

국민의 새로운 신분증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 난 국가 밖에서 출입증 없이, 여권 없이, 신분증 없이 난민으로 살 것이다

 

2.

 

내 의지는 혁명을 꿈꾸었으나

내 혀는 자본주의에 길들여 있었다

매일 매일 자본주의에 길든 혀들이 돋아났다

먹음직하고 자극적인 것들 뒤에서 질병이 오고

이윤이, 사적소유가, 명령과 위계가,

감시와 통제가 부활했다

; 이것은 모든 혁명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정치적 기형에 대한 이야기다

 

비어 있으라

비어 있는 것만으로도 큰 싸움이다

 

비워 내고 비어 있는 몸에 땅을 들여야 한다

 

GMO도, 제초제도, 농약도, 화학비료도, 다량의 질소도

착취다

이윤이다

땅에 어떤 짓도 하지 마라

몸에 어떤 짓도 하지 마라

“모든 치유는 자연치유, 스스로 치유하는 것이다”1)

 

아픈 몸은 사유하는 몸이다

때에 맞춰 살아갈 뿐

“불치도 완치도 없는 것이 삶이다”2)

전문가에게 의탁하지 마라

누구나 아무나 배워 자신을 치유할 수 있다

내 몸에 하는 침뜸은

몸에서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를 성찰하는 일이고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 통제권을 갖는 일이다

 

치유는 땅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서로를 꿈꾸고

풀 한 포기까지 이름을 얻는 것이다

바람에 몸을 내맡기는 풀꽃처럼 춤을 추는 것이다

 

꼼지락

꼼지락

미생물처럼 땅에 깃들어

“간신히 살아간”3) 이의

혁명론을 읽는 저녁이 있다

 

시 ┃ 조성웅

 

<주>

 

1) 돌쑥, 「내 몸에 침뜸하기」 강의 중에서 인용

2) 돌쑥, 「내 몸에 침뜸하기」 강의 중에서 인용

3) “간신히 살아간다” 권정생 선생의 말씀

 

 

 

<편집자 주> 위의 시는 본지의 요청으로 싣게 된 작품으로 「국제코뮤니스전망」의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기고 글/작품에 대한 반론과 토론은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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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14호] 호주의 봉쇄 반대 시위와 노동계급 행동

호주의 봉쇄 반대 시위와 노동계급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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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명서를 작성하는 동안 현재 호주의 확진된 코비드19 환자 수는 23,000명을 약간 넘어서고 있으며, 뉴사우스웨일스(New South Wales)와 빅토리아(Victoria)가 그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두 주 사이에, 하루 평균 약 2,000명의 확진자가 발생하고 있다. 팬데믹이 시작된 이래로 현재까지 거의 1,400명이 죽었다. 그리고 거의 300명이 중환자실에 있다. 뉴사우스웨일스는 6월 말부터 그리고 빅토리아는 8월 초부터 봉쇄되었다. 전국적으로, 16세 이상 인구의 58%가 약간 넘는 사람들이 현재 2차 백신접종을 했다.

 

7월 이후, 호주의 주요 도시와 일부 소도시에서 정기적인 시위와 폭동(“자유 집회”로 알려진)이 발생했으며, 그중 가장 큰 도시는 멜버른(Melbourne), 시드니(Sydney), 애들레이드(Adelaide), 퍼스(Perth), 브리스번(Brisbane)이다. 이 행사 참석자들은 의무적인 예방접종에 반대하고 국가가 시행하는 사이비 봉쇄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대체로 노동자들이 집에 머무르거나, 우리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돈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같은 대중은 또한 일반적으로 마스크와 백신을 거부한다. 실제로,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일으키는 위협을 최소화하거나 심지어 그것이 존재한다는 모든 경험적 증거에 반하여 부인한다.

 

이 집회는 노동자의 복지에 대해서는 거의 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소부르주아 요소가 지배해왔으며, 대신 봉쇄 기간 그들이 더 적은 이윤을 얻게 되는 기업의 강제 폐쇄에 반대하는 행동을 했다. 건설업과 같은 영향을 받는 업종 내의 소규모 자영업자들이 그 중 우세하다. 반(反)유대주의 음모론을 여러 차례 퍼뜨리고 극우파에서 가장 악랄하게 외국인을 혐오하는 인물들을 열렬하게 포용해 온 것도 바로 이러한 사회적 요소이다.

 

비록 노동자들이 이러한 행사에 참여해왔지만, 그들 중 일부는 공공보건 제한에 대한 개별적인 저항의 시위로 소규모 연좌시위나 고속도로 봉쇄에 참여했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어떤 종류의 진정한 계급적 대응도 대변하지 않는다. 이는 오히려 노동계급의 한 부분이 한 그룹의 사장들, 즉 소자본가들이 다른 거대 자본가들과 국가 관료주의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동원되도록 허용한 또 다른 비극적인 사례이다. 통상적으로, 이러한 사건들은 특히 건설과 운송과 같은 산업 내에서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왔다. 착취에 맞서 공동의 이해관계를 위한 투쟁에 노동자들을 하나로 모으기보다는 그들은 이러한 전망을 상당히 축소해왔다.

 

이러한 시위를 통해 조직화된 프롤레타리아의 대응은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운동의 기반을 고려할 때, 그것의 구체적인 요구로부터 가장 많은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노동자가 아니라, 오히려 팬데믹 기간 동안 사업이 엉망이 된 것을 본 소부르주아들이다. 한 가지 프롤레타리아트의 반응은, 그 대신 이러한 시위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비필수 사업 폐쇄, 재택 및 검사, 예방 접종에 찬성하는 목소리를 낸 것은 다수의 의료 및 건설노동자들이었다.

 

진정한 노동계급 행동

 

구성뿐만 아니라 요구, 조직, 전투 전술이 모두 소부르주아의 특징인 이들 시위와는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 호주 내 공중보건과 경제위기에 대한 진정한 계급적 대응이 비록 노동자 자신들의 노력에도 이 투쟁을 특정 부문과 작업장에 국한시키려는 노조의 틀 내에서 일어났지만, 올해 9월과 10월에 실질적인 파업행동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반면에, 팬데믹으로 인한 대응으로 정부가 발표한 봉쇄 조치로 인해 사람들은 온라인 쇼핑과 "긱 경제", 즉 21세기 단편적인 일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우체국과 배달 노동자들은 물론 그들이 운영하고 의존하는 물류 인프라도 완전히 압도당했고, 팬데믹 기간 가장 많은 이윤을 얻고 가장 큰 성장을 보인 회사들은 총수요 증가를 보상하기 위해 신규채용인원을 늘리지 않았다. 그 결과 이러한 산업 노동자들은 같은 임금으로 더 많은 일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분명히, 그들은 자신의 상황과 사측에 대한 향상된 교섭력 모두에 주목했다. 9월 마지막 주 내내, 수천 명의 스타트랙(Startrack)과 페덱스(FedEx)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가하여 두 번의 개별 24시간 행사 동안 전국에서 작업을 중단했는데, 고용안정 보장과 정규직과 동일한 조건 및 복리후생을 요구했다.(1)

 

멜버른에서는 수백 명의 캐드베리(Cadbury) 초콜릿 공장 노동자들이 하루 동안 파업을 벌였다.(2) 이곳의 노동자들은 고용 안정을 확대하지 않고 임시 계약에 의존하는 회사의 정책에 항의해 왔다. 실제로, 그 공장의 일부 노동자들은 지난 10년 동안 임시계약직으로 일을 해 왔다. 남반구에서 가장 큰 와일너리인 베리 에스테이트(Berri Estates)의 노동자 280명 중 약 170명이 현재의 노동조건 악화를 막기 위해서 파업에 돌입했다.(3) 사장이 수개월 동안 협상을 거부하자, 뉴사우스웨일스의 철도 기관사들은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4시간 동안 파업을 했다. 그들 사이에서 추가적인 파업 조치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4)

 

노동계급의 실질적인 반격의 필요성

 

이러한 봉쇄반대 집회는 이윤 추구를 위한 공공질서를 유지하려는 경찰뿐만 아니라 거리의 무고한 구경꾼에 대해서도 폭력적으로 변질되었다.(5)

 

코뮤니스트가 노동계급의 정치적 입장을 내세우는 이러한 사건들에 개입하려는 시도는 시위 참가자에게 실질적 영향을 미칠 기회 없이, 단지 개인(시위대 자신, 경찰 또는 바이러스 노출 여부에 관계없이)에게 해를 입힐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전염병과 계급이 견뎌야 하는 조건에 대한 노동계급의 실질적인 투쟁이 필요하다. 여느 때와 같이 위기가 발생하면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결국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노동계급에 대해서 고용 불안정, 임금 동결 및 감소, 지급유예 해제, 임대료 및 공과금 인상, 복지 혜택 삭감 등의 형태로 지속적이고 새롭게 공격하는 것은 모두 프롤레타리아트 반격에 필요한 기반의 일부가 된다. 소부르주아지와 나란히 줄을 서는 것보다 코뮤니스트이자 노동자로서 우리는 현재의 코로나바이러스 발병을 부채질하는 데 도움이 된 백신 출시에 허둥대고, 봉쇄, 재택 명령 및 재정적 보상을 시행하는 데 있어서 국가의 무능함을 규탄한다. 그러나 냉소적으로 불리는 이러한 "자유 집회"는 진정한 대안이 아니라 이른바 이러한 재앙적인 정책에 대해 "두 배를 걸겠다(도박)"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2021년 10월 6일

국제주의 코뮤니스트 오세아니아

 

 

<주>

 

(1) 호주 스타트랙 파업 
    https://thenewdaily.com.au/news/national/2021/09/23/star-track-strike-australia/

 

(2) 캐드베리 노동자들이 더 나은 협상을 위한 파업

https://thenewdaily.com.au/news/national/2021/09/23/star-track-strike-australia/

 

(3) 베리 와이너리 파업 

https://www.abc.net.au/news/2021-09-23/winery-strike/100485944

 

(4) NSW 열차 운행 중단을 위한 파업
    https://www.sheppnews.com.au/national-news/2021/09/27/5274779/strike-to-cause-disruptions-to-nsw-trains

 

(5) 멜버른에서 폐쇄 반대 시위대가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
    https://www.theguardian.com/australia-news/2021/aug/21/australia-anti-lockdown-rallies-protesters-violently-clash-with-police-in-melbourne

 

 

<출처>

http://www.leftcom.org/en/articles/2021-10-08/anti-lockdown-protests-and-working-class-activity-in-austra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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