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매우 전투적인 가족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핵을 반대합니다] "아이들에게 생명을" 노래

"아이들에게 생명을" 노래 / 3월10일 부산역에서 아이들과 함께 불러요 ~~

 

우창수 글.곡 / 개똥이 어린이예술단 노래

 

물론 카피 레프트 입니다  마음껏 부르고 나눠 쓰세요 ~~

 

 

좀더 좋은 음질을 원하시면 다음카페 "우창수의 노래나무 심기" 로 와서 받아가세요 ~~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4월 총선 깽판치자!

‎4월 총선 깽판치자!

 

임성용 

 

 

 

‎4월 총선 깽판치자!

거부와 배척으로 4월 총선 깽판치자!

국회의원 후보로 나선 모든 대갈망이들 낙선시키자!

노동계급들아, 이리저리 휩쓸리지 말고

오로지 투쟁으로 선거를 깽판치자!

이산저산 꽃이 피고 저산 이산 새 운다고

진정코 봄이더냐?

이당 저당 진보라고 이놈 저놈 잘났다고

한 사람 더 뽑히면 그래, 뭐가 얼마나 달라지더냐?

복지, 복지, 하자는데

전부 '복지'에서 'ㄱ'자 빼라! 이 씨부랄 밥통들아!

우리들이 할 일은 거부의 연대

우리들의 전략은 배척의 동맹

거부와 배척의 동맹을 강화하는 일

부르조아계급이 총선을 하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총파업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거투쟁 아닌가?

너도 나도 선거에 기웃거리지 말고

선거운동 발벗고 나서지 말고

후보자 꼴랑지 따라다니지 말고

아까워라, 공탁금 5천만원 쏟아붓지 말고

차라리 그 돈이면 투쟁사업장 해고노동자에게나 전달해주고

선거비용 긁어모아 나중에 빚쟁이로 쫓겨다니지 말고

진짜로 닭쫓던 개새끼는 되지 말고

서로들 지잘났다 야권연대 박수치지 말고

여기도 통합 저기도 통합, 여기도 진보 저기도 진보

그 일은 그 일을 잘하겠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에게 맡기고

투표용지는 그저 화장실 갈 때 밑씻개로나 쓰자!

한 가지 분명하게 알아야할 것은

비슷한 것은 모두 가짜라는 사실이다!

비슷한 것은 종국엔 계급의 적, 혁명의 적이라는 사실이다!

선거라는 민주주의 비슷한 환상

노동과 진보라는 계급정당 비슷한 환상

그것들의 본질은 내 몸의 살이 아니고 옷일 뿐이다!

우리들의 근육이거나 피가 아니고 그럴듯하게 입혀주는

선물용 외투일 뿐이다! 내 몸에 맞지 않는....

그 모든 것 벗어던지고, 차라리 알몸으로 발가벗고

4월 총선 깽판치자!

거리를 미친 년놈이 되어 스트레칭 하자!

제발, 우리 말 좀 들어달라고

우리들의 아픔, 우리들의 슬픔, 우리들의 억울함을 이야기하자!

너희들이 후보를 공천하고 선거용 정치이슈를 만들듯

우리도 우리들의 투쟁을 선동하고 사회적 이슈를 생산하자!

선거에 눈이 팔린 모든 청맹과니들아,

북 치고 장구 치고 노래하고 춤추며

4월 총선 어얼씨구, 깽판 치러 가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소련에서의 계급의식과 붉은 파시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연재 3>

소련에서의 계급의식과 붉은 파시즘

 

 

- 오세철

 

 

  이 연재 글을 꿰뚫는 문제의식은 세계혁명의 실패가 자본주의의 객관적 모순의 불충분한 축적뿐만 아니라 혁명지도자들과 혁명주체인 프롤레타리아트의 주체적 조건의 불충분성에도 있음을 강조하는 데 있다. 다시 말해 계급의식의 형성을 가로막는 객관적 조건이 자본주의의 가치법칙 때문만이 아니라 자본주의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억압의 역사적 구조로서의 계급무의식에도 그 근본적 원인이 있다는 점이다. <연재1>은 이를 뒷받침하는 맑스주의 이론의 총체적 점검을 통하여 압축적으로 정리하였고, <연재2>는 독일 파시즘의 분석을 통해 노동자 대중의 억압 구조와 그 결과물로서 반동적 파시즘의 위험성을 지적하였다.
   <연재3>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러시아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어떻게 세계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반혁명인 스탈린주의로 나아가게 되었는가를 분석하는 데 있다. 이를 나는 「붉은 파시즘」으로 부르기로 한다. <연재4>는 마오주의를, <연재5>는 제3세계 민중주의를, <연재6>은 김일성주의를 다루고자 한다.
  그리고 <연재7>이후는 198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계급의식과 파시즘의 반혁명 구조를 더 구체적으로 분석할 것이다.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물질적 필요성으로서의 공산주의 운동이 실패하고 반혁명으로 전복된 역사를 올바로 규명하지 않고서는 세계혁명의 미래는 암담하기 때문이다.

 

 

1. 볼셰비즘과 계급의식, 그리고 붉은 파시즘


러시아 혁명이 프롤레타리아혁명이었다는 데는 혁명적 맑스주의 진영 내에 큰 이견이 없다. 물론 평의회공산주의 내에서는 부르주아 혁명으로 이해하는 경향들이 있기는 하다. 소련은 무엇이었는가의 객관적 분석에서는 자본주의로 보는 입장이 타락한 노동자 국가론이나 관료적 집산주의론보다는 우세하다. 그러나 스탈린주의로의 반혁명이 왜 형성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볼셰비즘과 레닌주의와의 연속성을 파헤치는 논거는 적다. 이는 뜨거운 감자, 아킬레스 힘줄이기 때문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 후 1년을 깊은 애정을 가지고 기록한 빅토르 세르쥬는 “모든 스탈린주의 세균은 처음부터 볼셰비즘에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소비에트 정권의 노동계급 기반이 약해지는 과정을 솔직하게 설명했다. 그러나 노동계급 속에서 소비에트 정부의 인기가 떨어지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는 소비에트 정부의 생존을 위해 헌신했고, 그 정부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계속 옹호했다. 그것이 러시아 노동계급 다수의 능동적 지지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새로운 국가를 이룬 수천 명의 볼셰비키 핵심활동가들이 보여준 맑스주의 시각과 혁명적 단호함이라는 점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붉은 파시즘」이라는 말은 오토 륄레가 나치를 「갈색 파시즘」이라 칭한 것을 대칭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개념은 라이히도 사용했고 특히 스탈린주의와 동의어가 되었다. 여기서 문제는 대중의 심리구조 문제가 아니라 혁명 이후 몇 년 사이의 역사적 과정에서 반혁명적 사건을 어떻게 볼 것인가 문제였다. 보기를 들면 크론슈타트 반란에 대한 볼셰비키 당-국가의 폭력, 제국주의 국가와의 조약(라팔로 조약), 사적자본과 해외자본에의 러시아 경제 개방, 적색 테러 등이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반혁명적 사건을 언급하기 전에 혁명 이후 몇 달 안에 이루어진 소비에트의 제도적 성과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 1917년 11월 10일 신분제 폐지, 12월 11일 철도노동자 노동시간 1일 8시간 실시, 12월 16일 군대 계급 폐지, 12월 17일 1,886개 전략회사 몰수, 12월 18일 종교의식을 하지 않는 결혼제도 실시, 12월 19일 낙태법 제정, 12월 21일 러시아어 철자 간소화, 12월 29일 이자 지급과 채권 배당 지급 중단, 12월 31일 모자보호 연구소 개소, 1918년 1월 3일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공화국 선포, 사회주의 적군의 창설을 위한 법령 선포 등이 그것이다.
  위와 같은 법적, 제도적인 혁명적 조치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노동계급은 소비에트 생산의 주체, 권력의 주체였는가? 제국주의에의 포위, 독일 혁명의 실패 같은 외적 조건이나 내전과 같은 내부적 조건 때문이었다는 불가피론이 아닌 노동계급의 소외에 대한 진지한 분석과 성찰이 있었는가에 대해 레닌을 포함한 볼셰비키 지도자들 누구도 그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사무엘 파버는 레닌과 볼셰비키당 주류 누구도 사회주의 성취전략을 위해 소비에트, 공장위원회, 그리고 노동조합 사이의 관계와 그들 각각의 이론 정립에 대해 시도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이는 레닌의 유사 쟈코뱅주의에 기인한 것으로 규정한다. 다시 말해 혼란과 경제의 관료화를 피하기 위해 노동계급의 자발적 주도권에 대한 초기의 강조점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레닌과 대다수 볼셰비키가 사회주의의 본질과 그 가능한 내적 모순과 문제에 대해 고도의 도식적 견해를 가졌다고 평가하면서 노동자가 “그들 자신의 국가에 반대하여 그들 자신을 방어하는 독립 노조를 가질 필요가 없다고 결론짓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따라서 노동이 모든 시민의 사회적 의무라는 초기 개념과는 반대로 강제 노동이 벌어졌다. 이를 볼셰비키 좌파인 오신스키는 생산성 증진에 대해 레닌의 견해에 동조했지만, 레닌이 노동생산성과 노동강도를 혼동하는 것을 비판했는데, 이는 노동의 군사화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러면 당과 노동계급의 관계는 무엇이었나? 당과 노동계급은 한편으로는 혁명에 대한 열정과 대외적 군사투쟁, 사유재산 몰수운동 및 과거 유산자층에 대한 계급적인 배척운동에서는 일치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주의 이념에 대한 해석과 권력 집중, 노동 군사화 정책, 강제 노동, 임금차별, 식량 문제, 지역 간의 차이 문제에 대해서는 상호불신과 불편한 관계를 드러냈다. 헝가리 역사학자 자무엘리(Szamuely)는 전시공산주의의 대원칙이 전쟁의 승리뿐만 아니라 국유화, 노동의 의무, 중앙집권적 생산관계, 계급간의 평등 분배의 원칙, 화폐와 시장경제의 소멸 등 사회주의 이념을 추구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문제는 시장경제를 폐지하고 국유화를 시행하려는 노력이 피상적인 결과, 즉 소유와 분배 면에서의 불평등을 형식적으로 없앴으나 생산에서의 경쟁과 물신숭배의 원리를 고수했다고 보았다.
  노동조합에 대해 온건하게 동조하거나 중립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비율이 노동조합에 반대하는 볼셰비키에 동조하는 비율보다 훨씬 컸다. 1917년 36.4%에서 1920년 4월 3차 노동자대회 때 84%로 늘어났다. 노동계급과 그들의 조직인 노동조합의 자율성에 대한 볼셰비키의 태도에 영합하는 당 간부들은 중앙의 지시를 기다리거나 할당된 물자의 징발이나 생산에 관한 명령을 수행하는 데에 몰두하는 요원들로서 매우 출세지향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고, 더 이상 노동자들의 생산 개입을 옹호하거나 노조의 선거제를 주장하던 과거의 지하운동가나 투사들처럼 저항적이거나 반항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더구나 강제노동은 내전에서 불리한 시기에 실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승리가 확실시 되는 순간에 더욱 강화되었다. 볼셰비키의 투쟁 대상이 반혁명 세력이 아니라 노동이탈자나 소극적인 노동대중에게로 옮겨졌다. 노동 군사화 정책이 시행된 후 노동자들 사이에 혁명의식은 더욱 퇴조하고 당원수도 격감하였다. 이에 볼셰비키 정부는 불안해져서 인위적으로 백군의 위협을 더욱 과장하거나 혁명을 사수해야 한다고 강조하게 되었다.
  한 마디로 전시 공산주의 정책은 사기업의 몰수와 강제적 국유화, 일반 노동자・농민층의 희생, 배급제와 교환경제의 혼용, ‘노동자 통제’의 억압과 중앙집권적 국가관리의 채택, 곡물의 강제적 징수와 차등 임금제의 시행, 그리고 기계화와 기술자 우대 등 복합적 양상을 띠었다. 이 때문에 말레는 전시 공산주의 정책들은 사회주의 이념보다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유산에 근거한 억압적인 국가주의적 정책이라고 보았다.
 

  혁명 이후 격동적 이행기에서 권력의 주체가 되어야 할 노동계급은 점점 배제되었고 대상화되었으며, 생산과 권력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은 소멸되어 갔다. 노동자 반대파의 쉴라쁘니고프는 1919년 당 계획의 기초에 따라 ‘노동자 통제’의 회복을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노동자 반대파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조직의 모든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가장 진보적인 자들이다. 노동조합내의 인물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혁명의 선봉대로서 아직도 소비에트 국가 기구 속으로 통합되지 않은 노동자들이다. 또 이들은 아직도 인민과 긴밀한 유대를 유지하고 있는 가장 의식적이고 진보적인 인물이다. ・・・ 당은 예전에는 대중이 원하는 바를 지도하고 반성하였으나 이제는 대중을 불신하고 있으며, 복종과 권위, 차별의식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적 의식에 젖어있는 쁘띠 부르주아 출신의 기술자들을 기용함으로써 경영과 조직 면에서 노동자들의 참여를 차단하고 있다. 이는 맑스주의적 실천이 아니다.”


  소비에트 권력의 두 가지 기반은 노동자의 능동적이고 대대적인 참여와 토론하고, 결정하고, 실행하는 노동자 대중이다. 1917년 10월부터 1918년 4월까지가 소비에트가 부상하는 시기였다면, 1918년 4월부터 12월까지는 소비에트 권력이 위기를 맞고 쇠퇴하는 시기였다. 1918년 5월 소비에트 정책에 대한 비판이 모스크바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 사이에 널리 퍼졌으며 1918년 공장위원회가 사라졌으며 소비에트 조직의 끊임없는 재생도 자취를 감추었다. 1918년 4월 페트로그라드에 기반한 799개 주요 기업 중 265개가 사라지고 노동자 절반의 일자리가 없어졌으며 많은 노동자들이 일자리와 식량을 구하고자 도시에서 농촌으로 빠져 나갔다.
 

  물론 노동자평의회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활력소는 세계혁명이었지만 내전과 기근, 그리고 경제적 혼란이 가중되었고, 볼셰비키의 노동 정책이 더욱 숨통을 틀어막았다. 러시아 부르주아지와 영・불・미・일 등 제국주의 열강과 동맹을 맺은 백군은 러시아를 초토화시키면서 6백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소비에트를 억압하면서 그 구성원을 학살하였다. 이에 맞서기 위해 적군과 첵카가 창설되었으나 소비에트 집행위의 토론 없이 결정되었다. 적군은 지원제였고 주로 노동자였기 때문에 노동자평의회가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적군과 첵카가 소비에트를 통제함으로써 노동자계급에게는 양날의 칼이 되었다.
 

  따라서 1921년 초 크론슈타트 반란은 광범위하게 벌어진 노동자들의 파업만큼 중요하다. 페트로그라드 20마일 서쪽에 있는 크론슈타트는 5만 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반은 시민, 반은 군인이었다. 당 고위 지도부의 선전과 달리 지역부대는 공산주의자가 다수였고 크론슈타트 강령에 찬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권력이 당이 아닌 소비에트로 가야 한다는 원칙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들 강령의 몇 가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1. 현재의 소비에트는 노동자와 농민 요구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던 비밀 투표에 의한 선거와 모든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선언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2. 노조와 농민조직에게 집회의 자유를 허용할 것
 

  7. 지역별로 공산주의적 첵카를 설치하는 규정을 취소할 것
 

  9. 모든 노동자들에게 동등한 식량 배급권을 줄 것
 

  혁명과 혁명 후 사회 건설의 주체로서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억압, 대상화, 그리고 그들의 소외를 조금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기로 하자. 이는 적색 테러와 관련된 문제이다. 백색 테러는 죄악시하면서 적색 테러는 정당화되는가? 그것은 부르주아지나 반혁명 세력에 한정된 것인가, 노동자계급에도 해당되는 것인가? 이 문제 역시 볼셰비즘과 레닌주의와 분리될 수 있는가? 왜 스탈린주의만 문제되는가? 소련 붕괴 이후 비공개 문서고가 열리면서 수많은 문건들이 연구 자료가 되고 그것에 근거한 연구 결과가 계속 나오고 있다. 그 중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책은『공산주의 흑서: 범죄, 테러, 억압』(1999년)이다.
 

  서론에서 이 책은 이른바 공산주의 국가에서의 사망 인원을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소련(2천만), 중국(6천5백만), 베트남(100만), 북한(200만), 동유럽(110만), 라틴아메리카(150만), 아프리카(170만), 아프가니스탄(150만) 등이다. 그리고 소련에서는 ① 1918-1922년: 재판 없이 수만 명의 포로와 죄수의 처형, ② 1922년의 기근: 5백만 명의 죽음, ③ 1920년: 코사크족의 몰살과 추방, ④ 1918-1930년: 수용소에서 9만 명 살해, ⑤ 1937-38년: 대숙청에서 69만 명 처형, ⑥ 1930-32년: 쿨락 2백만 명 추방, ⑦ 1932-33년: 인위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속된 기근으로 우크라이나인 400만 명과 기타 2백만 명의 죽음 ⑧ 1939-41년과 1944-45년: 수만 명의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발트인, 몰도비아인, 베사라비아인의 추방, ⑨ 1941년: 볼가 지역 독일인 추방, ⑩ 1943년: 타타르인의 대대적 추방, ⑪ 1944년: 체첸인의 대대적 추방, ⑫ 1944년: 잉구시(Ingush) (러시아 지방에 거주하는 이슬람교 수니파의 민족) 대대적 추방 등이다.
 

  소련을 분석한 Werth는 볼셰비키 당과 모든 자발적 사회구조(공장위원회, 노조, 사회주의 정당, 주민조직, 적위대, 소비에트) 사이에 갈등이 존재했으며 몇 주 사이에 이러한 자발적 사회조직은 볼셰비키 당에 종속되었거나 억압당했다고 보면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는 소비에트 위에 있는 볼셰비키 당의 권력을 숨기는 용어였으며, “노동자 통제”는 기업과 작업장 위에 있는 노동자의 이름이 국가통제의 목적으로 옆으로 밀려났기 때문에 몇 주 사이에 볼셰비키는 1917년 동안 노동자로부터 조심스럽게 형성시켜온 신뢰를 대부분 상실했다고 평가한다.


  1918년 9월 3일 공식적인 적색 테러 시기가 시작되기 전인 8월에 볼셰비키 지도자들, 특히 레닌과 제르진스키(Dzerzhinsky)는 어떠한 봉기 기도도 막기 위해 “예비 조치”를 취할 것을 지시하면서 지역 첵카와 당 지도자들에게 엄청난 양의 전보를 보냈다. 이러한 조치 중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부르주아지에게 부과된 예외적 세금에 대해 만든 리스트에 근거하여 부르주아지 중에서 볼모를 잡는 것이다. ・・・그리고 집단수용소에 모든 볼모와 혐의자를 체포하고 감금하는 것이다” 등이 있다. 그리고 8월 23일 제르진스키의 협력자인 마틴 라트시스는 “내전에는 성문법이 없다 ・・・내전에서는 적에 대해 법정이 있어서는 안 된다. 죽을 때까지 투쟁이다. 당신이 죽이지 않으면 당신이 죽을 것이다. 죽기 싫으면 죽여라”라고 『이즈베스티야』(Izvestiya)지에 썼다. 노동수용소와 집단수용소에 수감된 인원은 1919년 5월 1만 6천명에서 1921년 9월 7만 명까지 늘었다.
 

  스탈린 체제가 들어선 뒤 강제 집산화 과정에서 2백만 이상의 농민이 추방되었고, 6백만이 굶어죽었다. 스탈린 시대 테러의 결정적 단계는 농민에 대한 폭력이었다. 1929년 12월 27일 스탈린은 “모든 쿨락 경향의 박멸과 계급으로서의 쿨락의 제거”였다. 1936년-38년 사이의 대테러 시기는 이른바 ‘예조프 치하’(The Reign of Ezhov) 시기로서 억압이 당 서기국으로부터, 거리에서 체포된 단순한 시민에 이르기까지 소련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수십 년간 대테러의 비극은 침묵 속에 흘러갔다. 서방은 세 번의 공개재판 (1936년 8월, 1937년 1월, 1938년 3월)만 알고 있었다. 레닌의 동지들이었던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니콜라이 크레틴스키, 리코프, 피야타코프, 라데크, 부하린이 트로츠키와 함께 소련 정부 전복을 기도하는 테러 중심부를 조직한 것을 인정하고 숙청됨으로써 스탈린주의 테미도르 관료층 대 혁명적 약속에 충실했던 레닌주의 고참 사이의 권력투쟁이 막을 내린다. 지금 접근 가능한 모든 문서에 의하면 스탈린이 예조프의 모든 움직임을 통제하고 지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책은 소련에서의 폭력과 억압의 싸이클을 네 가지로 본다. 첫 번째는 1917년부터 1922년 말까지로 레닌이 권력 장악과 함께 폭력과 억압을 내전의 필요한 부분으로 본 시기이다. 자발적 사회폭력이 공식적 구조를 가지면서 농민에 대한 정교한 공격이 1918년 봄에 일어났는데 이는 적군과 백군 사이의 군사적 충돌보다 더욱 수십 년의 테러의 모델이 되었다고 본다. 크론슈타트 반란은 앞으로 올 사건의 명백한 신호였고 이 첫 번째 싸이클은 백군의 패배나 NEP의 시작으로 끝나지 않았고 마지막 농민 저항을 진압한 1922년 기근으로 끝났다. 1923년부터 1927년까지의 짧은 유지기를 지나 두 번째 싸이클에서는 농민에 대한 스탈린주의의 집단적 공격이 일어나고 폭력은 일상화된다. 집산화는 농민에 대한 군사적, 봉건적 착취이며 1933년 대기근에서는 스탈린 체제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기록한다.
 

  대테러(1936-38년)시기인 세 번째 싸이클에서는 스탈린 시대 사형선고의 85% 이상이 이루어졌고 1941년 이후 네 번째 싸이클에서는 새로운 지역에서의 소비에트화를 통한 “위대한 애국전쟁”의 시기로 조선인 추방 같은 새로운 희생자가 생겨난다.
 맑스가 ‘역사에서의 폭력의 역할’을 강조하고 방어했지만,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폭력의 체계적 계획보다는 일반적 전제로서 보았다. 물론 맑스의 저작에도 모호함이 있다. 그러나 맑스는 2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죽은 파리 코뮨과 유혈억압의 결과에 대한 재앙적 경험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러시아 무정부주의자 바쿠닌에 반대하는 제1차 인터내셔널의 논쟁 동안 맑스가 우위에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제1차 세계대전 전야에 사회주의와 노동자운동 내의 테러적 폭력에 대한 논쟁은 거의 중단된 것처럼 보였다. 1872년 맑스는 혁명이 미국, 영국, 네덜란드에서 평화적 형태를 띨 것이라고 바랐다. 이러한 견해는 1895년 출간된 맑스의『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2판에 엥겔스가 쓴「서문」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그런데 볼셰비키는 유럽의 맑스주의 전통을 계승했지만 러시아의 혁명적 토지 운동에 강한 뿌리를 두고 있다. 19세기 동안 이러한 혁명 운동의 한 부분이 폭력 활동과 연결되어 있다. 이 운동에서 폭력의 가장 급진적인 주창자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악령』에서 혁명가의 모델로 삼은 세르게이 네카에프였다. 1887년 3월 1일 알렉산더 3세 암살에 실패했지만 체포된 사람 가운데 레닌의 형 일리치 울리아노프가 있었다. 체제에 대한 레닌의 증오는 당 서기국의 인지 없이 1918년 로마노프 일가의 살해를 결정하고 조직하게 하는 데 깊은 뿌리가 되었다. 이는 1789년부터 1871년까지의 서구의 혁명적 전통이 제공한 초기의 폭력의 정당화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정치적 폭력을 정당화하는 러시아 볼셰비즘의 특성을 만든다. 다시 말해 아래로부터의 대중봉기라는 민중주의적 전략과 위로부터의 엘리트 테러와의 결합이 러시아에서 일어나게 된 배경이다.
 

  레닌과 볼셰비키가 이러한 결합으로 네카에프 모델을 채택하고 발전시킨 구체적 배경을 쿠르토아는 『공산주의 흑서』의 결론에서 몇 가지 덧붙이고 있다.
 

  볼셰비키 지도부 누구도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 레닌, 트로츠키, 지노비예프는 망명 중이었고 스탈린, 카메네프는 시베리아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관료제 내에서 일하거나 대중 집회에서 연설을 했다. 대부분 군대 경험이 없었고 전쟁을 보거나 전사자를 본 적도 없다. 권력을 잡을 때까지 그들이 안 것은 이데올로기적이고 정치적인 말의 전쟁이었다. 그들의 것은 죽음, 학살, 인간 재앙에 대한 순수한 추상적 전망이었다.
  또한 20세기 초 러시아 경제는 엄청난 성장의 시기였고, 사회는 점차 자율적이 되었다. 그러나 전쟁에 의한 민중과 생산수단에 부과된 예외적인 제약은 정치체제에 제약을 주어 상황을 헤쳐 나갈 에너지와 전망을 소진시켰다. 1917년 2월 혁명은 이러한 재앙적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고, 고전적 경로, 즉 노동자, 농민의 사회혁명과 함께하는 제헌의회의 선거를 통한 “부르주아” 민주혁명의 길이었다.
 

  세계대전과 러시아에서의 폭력 전통이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의 맥락을 이해하게 하지만 볼셰비키의 극단적 폭력 경향성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이 폭력은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2월 혁명과 비교하면 처음부터 분명했고, 이는 당과 레닌에 의해 부과되었다.
 

  1914년 전의 맑스주의가 1917년 이후 레닌주의로 변화되었다. 레닌은 맑스주의 원칙인 계급투쟁, 역사에서 폭력의 필요성,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중요성을 알았지만 1902년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군사 규율의 지하조직과 연관된 직업혁명가로 구성된 혁명당의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고, 이 목적을 위해 독일, 영국, 프랑스의 위대한 사회주의 조직과 다른 네카에프 모델을 채택하고 발전시켰다.
 

  제11차 당 대회에서 쉴리야프니코프는 직접 레닌에게 말한다. “일리치는 어제 맑스주의 의미에서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는 러시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인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계급에 대해 독재를 행사하도록 하는 동지에게 축하하게 해주게.” 이러한 프롤레타리아트 상징 조작은 유럽과 제3세계뿐만 아니라 중국, 쿠바에서 공통적이다.
 

  1937-38년의 대숙청으로 나타난 광범위한 테러는 1953년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는 전체로서의 사회뿐만 아니라 국가와 당 기구까지 목표로 하는 제거 대상을 발견한다. 히틀러는 억압에서 개인적인 역할을 거의 하지 않았고, 히믈러 같은 부하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반대로 스탈린은 스스로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37-38년 사이 14개월 동안 180만 명이 42회에 걸친 거대하고 세세한 준비된 작전으로 체포되었다. 그 중에서 69만 명이 살해되었다. “계급투쟁” 대신 “계급전쟁”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사실은 특정 반대자가 적 계급이 아니라 전체 사회였다. 스탈린 아래에서 처형자는 희생자가 되었다.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처형한 부하린은 공개적으로 “그들이 개처럼 총살되어 매우 행복하다”고 했다. 그런 그가 개처럼 총살되었다.
 

  대체로 이런 내용으로 되어 있는『흑서』의 저자들은 프랑스의 연구자들이고, 특히 소련 연구의 경우 스탈린 시대보다는 러시아 혁명 후 5년 정도의 시기(내전) 동안의 폭력과 테러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스탈린주의보다는 그 원형으로서의 볼셰비즘과 레닌주의의 본질과 맑스주의에 대비되는 러시아 혁명운동의 특성에 착목하고 있다. 이 연구에 대한 혁명적 맑스주의 진영의 반응과 평가는 폭넓게 진행되고 있지는 않지만 좌익공산주의 계열의『국제주의자 전망』이 내놓은 간략한 문제의식을 전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이 책의 몇 가지 쟁점을 지적하는데, 첫째는 볼셰비키를 위한 모델로서 프랑스 혁명의 역할이다. 프랑스 혁명에서의 쟈코뱅(당통, 로베스피에르)이 1917년 볼셰비키의 모델이 된 것은 분명하다고 보면서, 당시 프랑스에서 쟈코뱅을 노동계급의 모델로 보는 것을 거부한 혁명적 생디칼리스트 소렐을 언급하고 있다. 소렐은 쟈코뱅과 테러가 구체제의 가장 순수한 전통이라고 보았고, 폭력의 본질, 그것의 계급적 기원, 그리고 국가와 법체계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했다고 본다. 두 번째는 볼셰비키 당내의 프락치키(Praktiki)의 역할로서 그들에게는 맑스주의의 이론과 실천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오직 권력만이 문제였고, 첵카의 지도부 같은 인자는 맑스주의 실천가로서의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았다고 본다. 또한 내전기간 동안 혁명가, 노동자, 농민에 대한 폭력에 레닌과 직접 연관되어 있다고 보면서 이는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4월 테제에 보인 레닌의 입장과는 다르며 레닌의 지지와 주도권 없이 프락치키가 책카에서 권력 기반을 가질 수 없었다는 데 동의한다. 세 번째는 당 지도자로서의 레닌의 역할인데, 여기서 볼셰비키가 규정한 적 개념에 혁명가, 굶는 농민, 파업하는 노동자까지 포함시키는 문제를 제기한다. 굶는 농민은 쿨락이 되고, 파업하는 노동자는 기생충이 되며, 무정부주의자와 사회혁명당 좌파는 벌레가 된다면, 이미 10월 혁명의 자궁 속에 붉은 파시즘이 자라고 있지 않았는가를 자문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소련 연구자인 Werth가 붉은 파시즘에로의 길이 스탈린 집권 10년 전인가, 크론슈타트 반란 전인가, NEP 전인가, 라팔로 조약 전인가를 따지는 것이 불편한 진실이 아닌가라고 반문한다.

 

 

2. 대중, 지도자, 그리고 붉은 파시즘
 

 

   <연재1>에서 나는 맑스주의와 정신분석학의 올바른 결합이 혁명 이론의 정립과 실천에 열쇠임을 밝힌바 있다. 왜 정신분석이 사회주의에서만 미래를 가지는가? 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데올로기적 부르주아지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지배계급이 자신의 고유한 생활과 이윤을 추구하는 사회정책적인 조치들을 취하고 “복지”를 실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경제는 지성과 성생활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바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라이히는 말한다.


 “소련에서 정신분석은 발전할 수 없었다. ・・・이것은 아마도 소련 지도자들이 성혁명과 문화혁명이 처해있는 모순을 인식하지 못했거나 어쨌든 아직은 인식하지 못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내가 들은 것처럼 스탈린이 경제 계획과는 반대로 소련에서 인간 계획이 성공적이라고 묘사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면, 이것은 우리의 모든 자료들과 발견들에 따르면 성적 재구조화가 없는 탓이라고 해야 한다”


  정신분석의 역할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지녔던 공산주의자들은 흔히 레닌과 클라라 체트킨 사이의 대담을 인용하는데 이 대담에서 레닌은 노동자 모임과 청년집단에서 일어나는 성에 대한 논의와 논쟁을 예리하게 비판하면서 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말했다. 라이히는 레닌의 관점에 동의하는데 이는 ‘성 논의’가 일반적으로 성 활동에 대한 대체물, 가장 흔한 지적 자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그러나 동시에 레닌이 클라라 제트킨과 나눈 같은 대담 과정에서 우리가 두 번째 지적을 따온다면 그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즉각 이해할 것이다. ‘공산주의는 금욕주의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며, 삶의 즐거움, 삶의 힘, 만족스러운 애정 생활은 공산주의를 실현하도록 도울 것이다’. 공산주의가 성생활의 즐거움을 가져올 수 있다면 확실히 이것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


  라이히는 1917년 이후 소련의 대중심리학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1917년 러시아의 사회적 격변으로부터 출발한 문화가 타도된 차르 치하의 권위주의적 사회질서와는 근본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다른 인간 공동체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 러시아 사회의 새로운 사회-경제 질서가 인간의 성격구조에 재생산될 것인가? 새로운 ‘소련인’은 자유롭고 권위주의적이 아니며 합리적이며 스스로를 규제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구조 속에 이러한 방식으로 발전된 자유는 모든 형태의 권위주의적인 사회적 지도력을 불필요한 것으로 혹은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국가가 소멸되는 것만큼 그로부터 자유로운 조직이 생겨나는 것에 대해 맑스가 가정하였듯이 그 조직에서는 ‘각 개인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든 이의 자유로운 발전’의 기본조건이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소련에서는 매우 중요한 두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첫째, ‘자유로운 자기 관리적 공동체에 있어서 자유로운 세대의 조직’은 창조될 수 없었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로부터 발생해야 하며, 이와 같은 과도기 상태에서 발전과 성숙의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 이것이 1930년과 1934년 사이에 일어났는가? 그렇다면 ‘국가 소멸’의 본질은 무엇이었으며 또한 새로운 시대의 발전을 시사해주는 구체적이며, 눈에 보이고, 길잡이가 될 만한 징후는 무엇이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국가는 소멸하지 않았는가?
 

  이러한 목표를 위한 전제조건은 자연스러운 일-조직, 일-민주주의를 위한 생물학적, 사회학적 전제조건에 관한 지식인데, 사회주의의 창시자들은 생물학적 전제조건을 인식하지 못했다고 라이히는 말한다. 사회적 전제조건은 자본주의적 사기업과 임금노동자 대중만이 존재했던 시기(1840년부터 1920년까지)와 연관되어 있는데, 그 때까지 정치지향적인 중간계급이 존재하지 않았고, 국가자본주의의 발전이 없었으며 국가사회주의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 반동적으로 함께 뭉친 대중들도 없었다는 것이다.
 

  레닌은 거짓된 형식적인 민주주의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인민들이 생산, 생산물의 분배, 사회적 규제, 인구 증가, 교육, 성 등을 활기차게 구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의회가 아닌 소비에트가 무엇을 어떻게 대표하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소비에트가 혁명적 기능을 수행하는가 아니면 형식주의적 국가행정조직으로 전락하는가는 다음과 같은 기준에 달려있다.
 

 

  첫째,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이 점진적으로 스스로를 제거하는 기능에 충실한지의 여부, 둘째, 소비에트가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의 협력자이며 집행기관으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감독자로서 그리고 사회적 리더십의 기능을 점차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으로부터 사회 전체로 전환시키는 제도로서 스스로를 간주하는지의 여부, 셋째, 소비에트가 대중들의 대표자인 이상, 대중들 각 개개인이 소비에트의 기능뿐만 아니라 아직까지 운용 중인 국가기구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인수해야할 자신의 과업에 들어맞게 되는지의 여부이다.
 

  그런데 레닌은 ‘관료주의의 폐지’가 왜 유토피아적 열망이 아닌지에 관해, 그리고 어떻게 관료주의가 없는 또한 위로부터의 리더쉽이 없는 생활이 가능하고 필요할 뿐만 아니라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즉각적 과업인지에 관해서는 논의하지 않았다. 파시즘의 관점에서 보면 ‘자기 관리’, ‘자치’, ‘비권위주의적 훈련’ 등과 같은 새로운 개념은 단지 경멸에 가득한 너그러운 웃음만을 자아낼 뿐이며, 무정부주의자의 꿈이며 유토피아적 공상일 뿐이다. 이는 국가의 폐지는 불가능하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국가권력은 강화되고 확장되어야 한다는 스탈린의 주장을 지지하게 만든다. 1937년 이후의 소비에트 문헌들을 보면 다른 모든 노력보다 우선성을 갖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기구 권력의 약화가 아닌 강화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문헌들 속에는 프롤레타리아 국가기구가 궁극적으로 자치행정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언급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새로운 질서’는 고안해내거나 생각해내거나 혹은 계획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인간이라는 동물의 생활에 대한 실천적이며 이론적인 사실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유기적으로 생성된다. 대중들을 정치적으로 휘어잡으려는 그리고 그들에게 혁명적 사상을 부여하려는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단지 시끄럽고 해로운 야단법석만을 만들어 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련의 붉은 파시즘은 스탈린 시대의 애국주의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몇 가지 보기를 들자.


 “우리 모두의 사랑, 우리의 충성심, 우리의 힘, 우리의 심장, 우리의 영웅심, 우리의 생활 – 이 모든 것이 당신을 위하여 있습니다. 모두 가져가십시오. 오 위대한 스탈린이여, 모든 것은 당신의 것입니다. 오 위대한 조국의 지도자시여, 당신의 아들들에게 명령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공기 속에서, 땅 밑에서, 물위에서, 성층권에서도 걸을 수 있습니다. ・・・ 나의 사랑하는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내가 그에게 가르쳐 줄 첫 단어는 바로 ‘스탈린’이 될 것입니다.”(레닌그라드 레드타임즈, 1935, 2월 4일 기사)


 “소비에트 애국심 – 끝없는 사랑의 불타오르는 감정이며, 조국에 대한 조건 없는 헌신이며, 조국의 운명과 조국 방위에 대한 심원한 책임감인 – 은 우리 인민의 깊은 심원으로부터 용솟음쳐 나온다. ・・・레닌과 스탈린에 의해 탄생하고 키워진 소비에트 러시아여! (프라우다, 1935, 3월 19일자)


   이에 대해 라이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정치의 정서적 전염병이다. 이것은 사람들의 조국에 대한 자연스런 사랑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소비에트 애국심’은 혁명적 열정이 사라져 버릴 것을 예상하여 나중에 「보오탄(Wotan) 애국심」(고대 독일 신화의 최고신, 북유럽 신화의 주신 오딘을 말함. 파시스트 애국심)에 대한 투쟁을 위해 필요한 준비였으리라.”


  국가의 소멸 그리고 국가의 기능을 인간에게로 옮기는 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았음은 다음과 같은 국가주의를 표현한 시에 잘 나타나 있다.


  콜호즈와 수많은 강철 같은
  선동자를 위하여 국가가 필요하다
  태평양에서 민스트까지, 아프리카에서 크리마아까지
  비옥한 땅이 트랙터를 기다리고 있다.
  국가가 너희들을 부른다.
  앞으로! 앞으로 모두 함께!
  대오를 갖추어 나가자!


  스타하노프주의로의 퇴보는 소련에서 인간의 성격구조 형성에 비참한 영향을 미쳤다. 지나치게 야심적이며 무지막지한 사람들만이 경쟁적인 성과급제도 아래에서 우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아주 뒤떨어지거나 탈락하게 된다. 이러한 격차는 약한 노동자들에게는 질투와 야심을, 강한 노동자들에게는 무례함과 오만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함께 소속되어 일한다는 집단의식은 생겨날 수 없고 정서적 전염병의 특징인 고발과 반발이 유행하게 된다. 소비에트 정신에 대한 파시스트적인 칭찬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도 드러난다. “어떤 공장이 형편없는 기계를 생산한다면 그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죄악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투쟁하는 우리 모두에 대해 죄악을 저지르는 것이 된다.”
 

  훈련 받은 소수의 “에토스”는 항상 대다수 국민을 무능하게 만든다. 신화와 에토스는 영웅적일 수 있지만 항상 위험하고 비민주주의적이며 반동적인 방법이다.
  라이히는 그 당시 소련의 객관적 상황과 전쟁 이데올로기의 결합이 파괴적 효과를 낳았다고 결론짓고 있다.

  첫째, 1억 6천만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한 나라가 수 년 동안 계속해서 전쟁의 상태에 놓여있고, 또한 군국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고취되어있다면 전쟁 이데올로기의 목적이 달성된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인간구조의 형성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대중들에 대한 교육에 있어서 삶의 이상으로 추켜세워진 사심 없는 헌신은 숙청, 처형, 모든 종류의 강압적 조치와 같은 독재적 과정의 수행을 가능하게 만드는 대중심리를 점진적으로 형성했다. 둘째, 호전적인 세력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고 생각하는 정부가 수년 동안 계속해서 대중들에게 군국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어려운 현안과업을 해결하는 와중에 자신의 과업을 잊어버린다면, 목적이 충족되어 이러한 분위기가 쓸모없게 된 이후에도 이러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강화하게 된다. 따라서 대중들은 소외되고, 분리되고, 무기력해지거나 자신의 욕구를 넘어서서 비합리적인 애국주의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

 

후주)

 

1)  마르셀 반 데르 린덴, (황동하 옮김), 「종합:서구 마르크스주의와 소련」, 『실천』, 2011년 6월(통권55호)를 보면 1917년부터 2005년까지 소련을 분석한 입장들을 종합하고 있는데, 특히 1985년부터 지금까지 자본주의(또는 국가 자본주의)로 보는 입장이 절대다수임을 알 수 있다.
2)  피터 세지윅, 「해설」, 빅토르 세르쥬 (황동하 옮김), 『러시아혁명의 진실』, 책갈피, 2011, 539쪽.
3)  Samuel Farber, Before Stalinism: The Rise and Fall of Soviet Democracy, Polity Press, 1990, 72쪽.
4) 윗 글, 75쪽.
5) 윗 글, 76쪽
6) 이정희, 「볼셰비키 사회주의와 ‘노동자 관리’(Workers’ Control) 운동, 1917-1921」, 서울대 박사논문, 1998, 8.
7) T. F. Remington, “Instintution Building in Bolshevik Russia: The case of State Control”, Slavic Review, 41, (Spring 1982), 99-101쪽.
8) Malle, S. The Economic Organization of War Communism, 1918-21, Cambridge, 1985, 495-505쪽.
9) A. Kollontai, The Workers’ Opposition in Russia, New York, 1921, 3-12쪽.
10) “What are Workers’ Councils?(iv)”, International Review, ICC, 4thQuarter, 2010,143호, 10-14쪽.
11) Avrich, P., Kronstadt in 1921, New York, 1970, 72-4쪽.
12) Stephane Courtois, Nicolas Werth et al., (translated by J. Murphy and M. Kramer) The Black Book of Communism: Crime, Terror, Repression, Harvard Univ. Press, 1999, 858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은 소련, 유럽, 아시아, 제3세계에서의 이른바 “공산주의 국가들”에서의 범죄, 테러, 억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13) 윗 책, 9-10쪽
14) 윗 책, 제1부 인민에 맞선 국가: 소련에서의 폭력, 억압 그리고 테러(N. Werth), 52쪽
15) 윗 책, 73쪽.
16) 윗 책, 262-264쪽.
17) 윗 책, 731쪽.
18) 윗 책, 734-745쪽.
19) Mac Intosh, “The Bolsheviks, The Civil War, and Red Fascism”, Internationalist Perspective, 2003 (Spring/Summer), no.41, 18-20쪽.
20) 빌헬름 라이히, (윤수종 옮김), 『성정치』, 중원문화, 2011, “변증법적 유물론과 정신분석”, 99쪽.
21) 빌헬름 라이히, (오세철 옮김), 『파시즘의 대중심리』, 현상과 인식, 1986, 246쪽.
22) 윗 책, 264쪽.
23) 윗 책, 286쪽.
24) 윗 책, 323쪽.
25) 윗 책, 326쪽.
26) 윗 책 321-2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재능농성장 거리특강] 세계대공황과 자본주의의 미래- 김수행교수

[거리특강] 재능농성장에서 세상을 말한다!





 

 

출처 : 한국인권뉴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쇠퇴하는 자본주의, 노동자계급의 길은 무엇인가?

쇠퇴하는 자본주의, 노동자계급의 길은 무엇인가?

                                                                      이형로

 

 

 

올해 여름 극단적으로 첨예화된 경제위기는 자본주의 체제가 그 한계에 도달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금융위기’라고 불리는 현 위기의 본질적 성격은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이다. 왜 체제 위기인가? 산업순환 위기(주기적 과잉생산 공황)를 넘어 역사적으로 1973년 이래 계속되어 온 구조적인 과잉축적 모순이 더 이상 봉합되지 못하여 마침내 폭발한 위기이기 때문이다.

 

 

1. 현 위기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 구조적 위기

 

최근 30여 년 동안만 보더라도 7년~10년에 한 번 씩 터져 나오는 순환적 공황들이 3-4 차례 있었지만, 자본가계급이 대대적인 경기부양과 거품경제를 일으켜 한 두 해만에 공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2007년 하반기부터 시작한 현재의 공황은 “1930년대 세계대공황 이래 최대의 공황”, 또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악의 경제위기”라고 저들도 이야기하는 것처럼 천문학적인 구제 금융과 경기부양책(두 차례에 걸친 양적완화)으로도 틀어막지 못한 채 지금까지 4년째 계속되고 있고, 나아가 심화되고 있다. (2009년 하반기에서2010년 중반 동안 일시적으로 회복의 기미들이 미약하게 나타났었는데, 이것이 자본가들로 하여금 ‘세계경제 위기는 끝났다’라고 잠시 착각하도록 만들었다.) 

 

정확히 말해서 현 위기는 순환적 위기에 자본주의 체제의 역사적인 위기가 중첩된 것이다. ‘역사적’이라 함은 7~10년의 산업적 주기(‘경기변동’ 주기)보다 훨씬 더 긴 기간을 통해 역사적으로(자본축적의 경제적 추세에 영향을 미치는 계급투쟁, 제국주의 국제관계 등의 정치 · 사회적 추세들을 포함한 구체 역사적 조건들을 매개하여) 누적되어 온 구조적 성격의 위기라는 뜻이다.

 

1973년부터 1982년까지의 대위기 동안 주식, 부동산 등의 자산 가치 폭락, 기업도산, 실업급증 등 과잉자본 파괴 과정이 진행되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만큼 철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따라서 이윤율도 충분히 회복되지 못했다. 이 두 번째 대위기는 첫 번째 대위기에 비해 과잉자본 파괴 면에서 훨씬 덜 폭력적인 공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가 1930년대와 같은 계급투쟁 격화와 파시즘 · 세계대전 같은 양상으로 전개되지 않았던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이와 같이 과잉축적 자본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상태에서 1980년대에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로 상징되는 신자유주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1990년대에 와서는 동구권과 중국이 세계자본주의 체제로 통합되면서 미국 주도의 본격적인 세계화(또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국면에 들어갔다. 이 1980년대 초부터 2007년까지 약 30년간의 이른바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기의 성격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착취 강화와 금융투기 거품을 통해 이윤율 하락 및 과잉축적 위기(1973년-82년의 공황으로 충분히 해소되지 못한 과잉축적 위기)를 돌파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그 위기를 누적적으로 가중시킨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누적되고 가중된 구조적 과잉축적 위기가 이번 2007년-2008년에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2. 해결할 수 없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위기

 

현재의 위기는 단순히 팽창된 금융자본의 투기와 다양한 경제주체, 즉 정부, 가계 그리고 기업의 부채 미상환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금융시장의 엄청난 팽창과 투기화로 인한 자본의 가치증식, 즉 투하된 화폐보다 더 큰 화폐를 획득하여야 하는 자본의 가치증식과정의 심오한 위기가 그 원인이다. 현재의 금융위기는 1960년대 후반의 생산자본의 이윤율 저하로 인한 가치증식과정의 위기가 세계적 차원의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나타난 자본의 급속한 금융화가 그 원인이다. 이렇게 팽창된 금융자본은 새로운 생산자본 투자 지역을 찾아야 했고, 동시에 금융시장 자체의 성장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했다. 이러한 금융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운동의 지구적 차원의 공간 확대는 단일한 세계시장의 형성을 가속화하였다.

 

이러한 자본의 가치증식논리는 본질적이고 해결할 수 없는 내재적 자기모순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자본은 증식과정을 작동시키기 위하여 점점 더 많은 노동력을 상품의 생산과정에서 소비해야 한다. 노동력의 소비를 통한 화폐증식의 목적은 양적차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자체의 한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일상적으로 계속되는 경쟁은 생산의 합리화를 통하여 지속적인 생산력의 향상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과정은 결국 시간당 생산물의 양을 증가시키고, 따라서 필수노동시간을 축소하여, 과잉 노동력을 창출한다.

 

이러한 모순에 내재하는 잠재적 위기는 2차 대전 후-70년대 초반기의 성장속도의 가속화(생산력의 발전과 임금상승의 조응)로 인하여 계속적으로 미래로 연기되었다. 전 지구적 차원의 가치증식과정의 확대와 새로운 생산영역으로의 진출은 노동력에 대한 수요를 엄청나게 증가시켰으며, 이는 합리화의 효력을 상쇄시켰다. 하지만 IT 기술을 토대로 하는 새로운 생산력의 급속한 향상은 이러한 상쇄메커니즘을 폐기하게 만들었다. IT 기술은 거의 모든 산업분야에서 노동력을 축출하였다. 생산의 지구적 차원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지구적 차원에서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자본의 가치증식과정에서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가치증식과정의 위기는 우선 자본이 실물경제에서 더 이상 충분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생산된 잉여가치가 수용의 부족으로 인해 다시 현금으로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본은 금융자본에서 새로운 도피처를 찾았는데, 이의 결과는 “의제자본”(투기와 신용)의 팽창을 가져왔다. 이러한 금융자본으로의 도피는 단지 위기의 연기에 불과하다. 과잉자본은 새로운 투자가능성을 찾았으며, 임박한 가치의 감소를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진 위기연기의 대가는 점점 더 심화된 잠재적 위기의 축적이며, 금융시장에의 극단적인 종속을 가속화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금융자본의 축적은 계속 진행되어야 했다. 어느 곳에서인가 거품이 꺼지면 정부와 중앙은행은 시중은행들과 투자가들을 구제하여 무담보 유동자산을 시장으로 쏟아 넣어 새로운 거품을 만드는 이외의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정치권에서 투기의 포괄적인 억제정치를 논하는 것 자체가 속임수이며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일시적인 규제조치들은 가능하지만 종합적으로 보면 투기와 신용은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이러한 의제자본을 토대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실정치가 이러한 현실에 부합되게 행하여지는 것도 그리고 금융시장의 역동성이 다시 회복되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현재의 위기는 그 붕괴를 단지 국가채무의 엄청난 확대를 통하여만 일시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질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위기는 국가의 재정위기로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긴축재정을 통하여 사회의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전가되고 있다. 점점 더 적은 노동이 더 많은 물질적 부를 창출할 수 있다면, 이는 그 자체로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한 삶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자본주의 생산관계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가치생산의 축소를 가져온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사회에서 “긴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내며, 이는 가치생산이 종속되어 있는 소비의 축소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이 거대한 부채는 자본주의에 의하여 창출된 생산 잠재력이 이미 자본주의적 사회의 논리로는 해결될 수 없으며, 자본주의적 부의 생산은 단지 폭력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위와 같이 현재의 자본주의 대위기는 전 세계적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이기도 하다. 지난 몇 년간 드러난 거대한 부채더미는 1970년대 초에 이미 나타난 경제위기를 자본주의가 은폐하거나 늦추려했던 시도들의 결과였을 뿐이다. 또한 우리는 오늘날의 “경기침체”가 진정한 불황으로서의 본 모습을 드러내면서, 이것은 사실상, 1930년대의 대공황과 당시 세계를 제국주의전쟁으로 몰아갔던 위기와 같은 심각한 위기임을 인식해야 한다. 이 위기는 자본주의 체제가 역사적으로 쇠퇴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으며, 더욱이 오늘날의 불황과 1930년대의 불황사이의 차이는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위기에서 벗어날 어떤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는데 있다.

 

 

3.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전야,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현재 우리는 이 세 번째 대위기의 초반을 통과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계급은 정리해고, 임금 연금 삭감, 노동조건의 후퇴, 비정규직화, 청년실업 만연 등 생활수준의 하락과 생존권 위협을 직접 받으며, 자본의 위기를 온통 전가 당하고 있다. 이러한 위기 전가에 맞서 전 세계적으로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터져 나오고 있지만, 아직은 전체적으로 방어적 성격의 투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자본주의 체제는 아무리 깊은 위기라 하더라도 저절로 붕괴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의 ‘최종 위기’ 같은 것은 없다. 자본주의는 내재적인 붕괴 ‘경향’을 가지고 있지만, 저절로 사멸한다는 의미의 ‘자동붕괴’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노동자계급이 앉아서 위기 전가를 당하길 거부하고 저항에 나서서 이 저항을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도전으로 끌어올려 자본가계급의 국가권력을 타도할 때만이 자본주의를 폐절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는 한 자본주의는 노동자계급을 희생시킨 폐허 위에서 언제든 다시 위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현 위기는 첫 번째 대위기 못지않게 ‘사회주의냐 야만이냐’의 문제를 제기한다. 첫 번째 세계대공황 시기에는 사민주의와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의 타락 등 암흑의 반혁명과 침체의 시기, 노동자계급 지도력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자본주의의 숨통을 끊는 사회주의혁명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계급투쟁에 패배하여 파시즘과 전쟁 같은 야만을 불러들이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는 다시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다. 이 시기에 자본주의가 아직 충분한 생명력과 역동적인 활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은 것이 아니다. 이미 쇠퇴하는 자본주의, 제국주의 단계의 사멸하는 자본주의로서, “프롤레타리아 사회혁명의 전야”에 있는 자본주의였다. 다만 문제는 1917~1921년대 세계혁명의 패배이후 노동자계급의 지도력을 다시 세워내 혁명의 가능성을 살려내는 일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4. 자본주의 쇠퇴기, 노동자계급이 직면한 위험과 계급투쟁의 부활

 

노동자계급의 혁명은 결코 자동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데, 이 혁명은 과거의 그 어떤 혁명보다도 더 높은 의식수준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 위기의 시기가 시작된 이래, 전 세계적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의 혁명적인 계급투쟁들이 있었다. 비록 이 투쟁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는 것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분명한 계급투쟁의 부활을 알렸다.

 

하지만, 40여 년간의 위기 이후, 현재의 주요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자계급은 1960년대 말과 같은 모습을 더 이상 띠지 않는다. 거대한 산업기지들과 강력한 계급투쟁의 집중 거점들은 사방으로 분산되었으며, 분업화된 시스템 속에서 노동자계급은 분열되고 위계화 되었다. 쇠퇴하는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자계급의 모든 세대는 지속적인 불안정 상태와 실업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더욱이 노동자계급의 가장 절망적인 층들은 범죄와 허무주의 또는 종교적 근본주의에 빠져들 위험에 처해있다. 자본주의 체제의 길고도 점점 더 첨예해지는 쇠퇴의 과정으로 인해, 노동자계급은 계급의 정체성을 다시 획득하고 사회의 지도력을 복원하여, 낡고 쇠퇴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을 형성하는데  매우 심각하고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착취에 대항하여 혁명적으로 투쟁하는 노동자계급의 모범이 없이는, 자본주의체제의 불평등하고 억압적이며 부패한 본질에 대항한 무수한 분노의 반응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자체만으로는 그 어떤 출구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나 그 반대로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들은 경제적 붕괴, 제국주의적 충돌, 환경파괴라는 자본주의의 암울한 미래에 대해, 아무 저항도 없이 수동적으로 이용당할 의사가 전혀 없다는 것을 그들의 직접행동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새로운 투쟁과 직접행동은 자본주의 위기 상황에서 생활수준의 급격한 하락과 생존의 위협을 받는 수많은 프롤레타리아들과 노동자계급의 오래된 세대들을 자신의 주변으로 끌어 모을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쇠퇴하는 자본주의 현재의 위기는 자본주의 주요 국가들에서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 대다수에게 이 썩어가는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투쟁하고 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설득하고 동원해 낼 수 있는 지배이데올로기가 더 이상 존재하기 않는다는 점을 스스로 실토하게 만들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고양되고 있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은 전 세계로 확산되어 1960년대 말의 계급투쟁의 부활과 같은 양상으로 전개될 충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 스페인, 아일랜드, 이탈리아 등의 긴축반대 투쟁, 북아프리카 중동의 민주화 투쟁, 칠레의 공공교육 투쟁, 미국의 월가점령 투쟁, 중국, 인도, 방글라데시의 노동자 투쟁, 그리고 한국의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등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미 우리에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물질적이고 객관적인 조건은 충분히 주어져 있으며, 공산주의는 인류의 단순한 희망과 꿈이 아니라 역사발전의 물질적 필요성이며, 우리가 실현해야 할 역사적 과제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5. 자본주의에 저항하는 새로운 계급투쟁만이 노동자계급에게 답을 제공한다.

 

시위에서 광장점거로, 점거에서 대중파업으로 진화하는 유럽과 북미의 대중투쟁과 다르게, 한국의 계급투쟁은 여전히 사민주의와 조합주의 덫에 걸려있다. 특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진보대통합은 총선/ 대선 선거대응을 위한 개편이며, 서구에서 실패한 노동자 투쟁을 배신한 인민전선의 되풀이 일뿐이며, 노동자계급에 대한 배신행위이다. 그동안 이들의 대리주의 정치는 노동자계급의 자발적 투쟁분출과 계급투쟁의 혁명적 확산에 장애물이 되어왔다.

 

이러한 대리주의 정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 스스로 정치와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자립적인 조직과 운동이 필요하다. 이러한 자립성은 계급의 자립적 조직인 노동자평의회와 계급의 정치조직인 혁명당과 강령으로 표현된다. 인민전선과 같이 노동자계급의 이해관계를 부르주아의 어느 정파의 이해관계와 혼합하고자 하는 시도들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을 통제하고 잠재워 결국 노동자계급의 자립성을 저해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자본주의 쇠퇴시기 계급투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은 스스로의 조직 확장과 자기조직화를 통해 자신들의 투쟁을 전 계급적으로 통일시켜 나가야 한다. 이것은 자립적인 총회 조직들과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창출되며 노동자들에 의해 언제나 선출되고 소환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조직들을 통해 가능하다.

 

그렇다면, 끝 모를 자본주의의 위기상황이 더욱 깊어지는 현 정세에서 반자본주의 투쟁전선 구축과 혁명적 계급투쟁의 부활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첫째, 계급투쟁의 역사적 성과물인 혁명 강령이라는 무기를 들고 혁명당을 건설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단련되고 혁명적인 부위들은 혁명당으로 집결하여, 자본과 국가를 효과적으로 압박하고 계급투쟁의 힘을 집중시켜야 한다. 노동자투쟁과 계급의식의 꽁무니를 쫒아 다니는 의회주의 정당들이 아닌 혁명당만이 계급의식을 혁명적으로 발전시키고, 노동자계급이 자신들의 정치적 전망을 설정하고 혁명적 무장을 준비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둘째, 갈수록 관료화, 자본의 기구화 되어가고 있는 조합주의와 노조운동을 넘어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과 노동자민주주의가 철저하게 실현되는 투쟁조직, 총회조직을 건설해야 한다. 현재 유럽과 북미의 계급투쟁에서 빈번히 나타나고 있는 대중총회는 투쟁의 활력소가 되고 있다. 대중총회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투쟁의 주도권을 실제로 가져올 수 있고, 집단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진정한 공간이다. 대중총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으며, 어떠한 조합주의와 계급협조주의에 의해서도 그 결정을 제한받지 않으며, 노동자 계급의 다양한 부문들을 통일시킨다. 노동자계급의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와 직접행동을 기반으로 한 이러한 총회조직들이 바로 노동자계급이 각성하고 단결하여 한 단계 진전된 행동을 준비하고, 집단적 자심감과 자신들의 의지로 투쟁을 확장시킬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이와 같은 대중투쟁조직과 직접행동에 기반 한 계급투쟁의 확산만이, 조직된 노동자들의 계급성과 전투성을 되찾을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할 것이다. 그리하여 대대적인 계급투쟁의 발발과 혁명적 계급의식이 만나 계급투쟁을 이끌 때, 공장의 담벼락과 업종의 울타리를 넘어,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넘어, 전체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수평적 노동자조직들의 출현은 계급투쟁이 혁명적으로 전환하는 시기 노동자평의회를 현실화 시켜줄 것이다.

 

이미 진보정당들과 노동조운동의 상층부는 자본이 편재하고 분할해 놓은 노동자계급의 분리와 분열을 용인하거나 조장한 세력이 되어 버렸다. 이제 이들을 넘어서서 직접행동하고 더 넓게 조직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의 동력을 회복하는 새로운 길이다. 이런 기운들은 투쟁하는 노동자들로부터 자발적으로 생성되고 있으며, 이것들이 커지면 커질수록 타락한 운동들은 더욱 반 노동자적 본색을 강하게 드러낼 것이다. 낡은 형식과 분열을 넘어 직접행동하고 계급의 단결을 만들어나가는 노동자들이 바로 노동자투쟁의 새로운 주체이다.

 

새로운 운동의 형태는 촛불투쟁, 희망버스 운동에서 보이듯이 자본주의 체제가 유지되는 한, 그리고 쇠퇴의 국면이 깊어질수록, 우리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필연적으로,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할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쇠락해 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체제에 조응하며 유지되어 온 낡은 운동형식들은 이제 혁명성, 계급성을 상실한 채 몰락해 가고 있다. 아직 새로운 운동이 낡은 운동을 대체할 만큼 완전하게 소생하거나 전면화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가 인내하며 기다린다고 그냥 와주는 것이 아니라, 대대적인 계급투쟁의 부활 속에서만 온전히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계급투쟁의 부활은 자본주의 쇠퇴가 만들어 놓은 물질적 조건(생존권 위협과 생활수준의 급격한 하락 등)에 의해 언제든 분출될 가능성이 있지만,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자각이며, 혁명조직은 계급적 자각을 촉진시키는 역할을 해야 한다.

 

따라서 새로운 계급운동은 과거운동을 쇄신하거나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것에 국한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낡은 운동과 새로운 운동이 대립하고 있는 현재적 조건 속에서, 새로운 운동의 가능성에 근거를 두고, 끊임없이 계급투쟁의 방향을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도전하도록 밀어붙여야 한다. 계급투쟁의 부활과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만이 새로운 운동의 창출과 혁명적 의식의 생성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광장점거와 대중파업은 다시 한 번 노동자계급에게 혁명의 문제를 현실로 제기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의 타도를 목표로, 운동에 분명한 계급적 방향을 부여함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노동자계급 자신에게 달려있다. 이것은 곧 계급투쟁과 혁명적 계급의식이 만나 의식적으로 수행하는 운동이며, 공산주의 강령과 이행요구에 입각한 정치투쟁을 의미한다.

 

현재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수많은 계급투쟁들 속에는 이미 “세계 혁명”을 요구하며 국경을 넘는 운동의 “확대”를 주장하는 슬로건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많은 집회들에서 노동자국제주의를 위한 “국제”위원회가 만들어졌으며, 새로운 투쟁의 형식과 내용들은 국제적으로 전파되어가고 있다. 이제 한국의 노동자들도 낡은 사민주의와 조합주의의 덫을 걷어내고, 지금 당장의 직접행동과 노동자민주주의에 기반 한 대중투쟁으로, 자본주의 지배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길에 거침없이 나서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혁명당과 자발성에 대한 문제의식 1

 

혁명당과 자발성에 대한 문제의식

-레닌을 넘어 다시 맑스의 이해로 돌아와야 한다.

 

 

이란 노동자계급 스스로는 공산주의 의식과 조직을 창출할 수 없기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외부에서 도입해야 하는 그 어떤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은 계급의 표현이자, 공산주의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공산주의를 위해 행동하려 하는 사람들의 공산주의 의식의 생산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공산주의자당은 계급투쟁의 역사 속에서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창출되는 공산주의 의식의 표현이다.  공산주의 의식으로 무장한 공산주의자들은 항상 프롤레타리아 전체의 이해관계와 프롤레타리아 운동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기 때문에, 실천적으로 가장 단호하고 늘 앞서있는 부분이며, 이론적으로도 운동을 총체적으로 바라보며 대중보다 앞서 통찰한다.  따라서 당 건설 초기에는 어떠한 강요나 엄격한 규율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공산주의자로서의 신념과 실천을 담지한 혁명가들에 의해 당 조직이 창출된다,

 

이러한 명제는 혁명당을 건설하는 실제적인 전제 조건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대중의 자발적 투쟁과, 당 강령의 생산과 명확화에 대한 필요를 제기한다.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부활 없이, 강령으로 표현되는 공산주의 의식의 명확화 없이 당 건설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자발성과 의식성의 문제를 늘 적대시하면서 충돌시키는 레닌주의적 전위당 노선은 자본주의 쇠퇴의 시기(자본의 총체적 지배시기-이데올로기를 포함한) 대중행동의 자발성을 억누르거나 조직노동자 위주(자본주의 체제와 타협하면서 살아남은)의 퇴보하는 당 조직의 위험성이 있다. 반대로 계급정당, 대중정당 노선은 계급의 혁명적 의식을 방어하지 못해 계급의식이 혁명적으로 진전되는 것을 철저히 차단하거나 계급의식을 갉아먹는다.

 

혁명당을 건설하려는 동지들!  100년 전 러시아 볼셰비끼의 영광을 동일하게 재현하려는 무모한 시도도, 진보정당/노동자당을 흔들거나 눈치 보면서 떡고물이라도 얻어먹으려는 기생적 시도도 당장 집어치워야 한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은 혁명의 주체는 노동자계급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노동자계급의 주체성(자립성)과 계급의식의 문제에 집중하라!!

 

 

*이에 대한 문제의식은 (카마트, 1961, 「당 형식의 기원과 역할」)을 참고할 것

  원문은  http://cafe.daum.net/leftcommunist/QerV/1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스테판 헤셀의 두 책 「분노하라!」,「참여하라!」에 대하여

스테판 헤셀의 두 책  「분노하라!」,「참여하라!」에 대하여

 

 

 

  분노하기, 그래  자본주의 착취에 대해서!

 

   작가이자 서정시인 그리고 프랑스외교관인 스테판 헤셀의 글들, 「분노하라!」,「참여하라!」는 진정한 베스트셀러들이다.  지금 벌써 이 글들은 세계의 불의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사람들의 참조점이 되었다. 최근에 스페인전역으로 멀리 퍼져나간 (그리고 그정도는 아니라도 다른 유럽나라들에서 볼 수 있었던) 사회적 분노의 운동은 심지어 스스로를 분노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며 헤셀의 첫번째 책과 분명하게 관련지었다[1]

 

「분노하라!」는 대략 30쪽분량의 글이다. 여러 언어들로 번역되었고 되도록이면 많은 보급을 위한 터무니없이 싼 값으로 전세계적으로 수백만부가 팔려나갔다. 그 책의 출판은 처음부터 매우 성공적이었다. 아주 당연한 이유로, 왜냐하면 책제목 자체가 이미 이 세계의 야만성에 대항한 절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억압당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점점 더 확산되는, 그리고 점점 더 참을 수 없고 적대적으로 보여지는 세계 전역에서의 가난과 전쟁이 초래하는 공포가 촉발한 그러한 감정에 딱 들어맞는다. 튀니지와 이집트에서의 아랍의 봄과 분노한 사람들운동이 이를 증명한다.

 

 

  스테판 헤셀은 어떤 사회를 꿈꾸는가?

 

   현재 93살인 스페판 헤셀은 이 부정의한 세상에 대한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만한 정력을 여전히 갖고 있다.  이렇게 볼때는 오직 경의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시각으로 볼 때 우리는 어떤 사회를 위해 투쟁해야 할것인가라는 문제가 논의될 필요가 있다.

 

   그의 책 초입부터 이미 스테판 헤셀은 2차 세계대전 종결시 국민저항의회(CNR)[2]의 경제강령작성의 계기가 된 그 원칙과 가치들을 옹호한다. 이 방침들이 아직도 여전히 현실성을 갖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헤셀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당연히 지난 65년동안 사정이 달라졌다. 오늘날 우리는 레지스탕스 시대의 도전들과 똑같은 도전들 앞에 서있지 않다. 그당시 우리들이 제안한 강령은 오늘날 그 형태로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이점을 눈 감아버려서도 안된다. 그러나 우리가 그당시 따랐던 가치들은 동일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계속 존중해야한다. 그것은 바로 공화국과 민주주의의 가치이다. 각각의 정부들은 이러한 가치를 놓고 평가될 수 있다. 국민저항의회의 강령에서 특정한 비젼이 제시되었고 이 비젼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윤의 독재와 돈의 독재에 맞서는 것, 한편에는 극도의 가난과 다른 한편에는 오만한 부가 나란히 존재하는 것에 분노하는 것, 경제적으로 봉건적 상태를 탈피하는 것,  진정으로 독립적인 언론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 모든 형태의 사회적 안전을 보장하는 것  우리가 그당시 지향했던 일련의 가치들와 성취들, 이 모두가 오늘날 위협당하고 있다. 최근에 결정된 많은 대책들이 레지스탕스시대의 내 동지들을 경악시키는데, 그것들은 우리의 기본적인 가치들을 겨냥하기 때문이다.  내생각에,  사람들은 특히 젊은이들이 분노해야 한다. 그리고 저항해야 한다!"[3].     그러나 누가 이러한 상황에 책임이 있는가? "이는 오직, 레지스탕스가 맞서 싸웠던 금권력이 지금 그 어느때보다 막대하고 불손하며 이기적이고 국가 최고위층까지 스며들어 자체의 이익옹호자들을 갖고 있기에 가능해 보인다. 그 사이 사유화된 은행들은 그들의 배당금과 매니저들의 넘쳐나는 수입만 생각하지 공익에는 관심이 없다. 빈부의 차이는 갈수록 커져가고 돈과 영향력을 향한 노력은 점점 더 많은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4] 헤셀에 따르면, 민주주의가 지도자들의 행동을 이끌어야 한다는데,  금융계나 은행가들의 이기주의와는 반대로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이익을 더 염려하기 때문이란다: "우리는 그들에게 말한다: '그것을 포착하고 분노하라!'라고. 정치, 경제의 책임자들, 지식인들 그리고 사회 전체는 양보해서는 안되며, 평호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현재 금융시장의 국제적 독재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된다."[5]  그러니까 이것이 공중의 극도로 성스러운 이해라는 것이다. 정치가, 경제지도자와 노동자, 실업자, 학생, 퇴직자, 비정규직을 결합하는 것이... 바꿔 말하자면, 스테판 헤셀의 민주주의는 하나의 신화이다. 그것은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마치 기적처럼 같은 눈높이로 만나는 상태를 그럴듯하게 그려낸다, 그들이 소위 동일한 권리와 의무를 가지며 금융시장의 독재에 대항해 국민들로서 동일한 민주주의적 이해를 옹호하는 그런 상태를.  그러면 그 모든 것은 어디로 이끄는가?

 

   "오늘날 고민하고, 글을 쓰고 민주적으로 정부들의 선거에 참가함으로써 우리는 사정을 현명하게 ...간단히 말해서 장기적인 시야를 가지고 이끌어가길 바랄 수 있다."[6] 그러면 그의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어느 쪽을 지지해야 하는가?  "나는 나자신을 여전히 사회주의자로, 즉 내가 이 개념을 파악하는 바대로, 사회적 불평등을 의식하고 있는 사회주의자로  본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자극들을 받아야 한다. 용감한, 필요하다면 '건방진' 좌파가 나타나서 비중을 가지면서 국민의 자유라는 비젼을 주장하기를 나는 바란다. 녹색당이 의회에 진출해서 환경보호 사상이 진전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7] 결국 헤셀의 견해로 볼때 우리의 분노는 우리 모두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구호, 즉 우리는 투표하러 가야 한다를 받아들이는 것을 초래한다. 우리는 국민저항의회(CNR)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그리고, 극좌파, 반국제화주의자, 노동조합주의자들 등등, 즉 자본의 전반적인 이해를 충심으로 옹호하는 당과 조직등 각양각색의 모든 사람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대안적인 강령(또 다른 저작으로서 곧 간행될)에 찬성해야 한단다. 다행히도, 헤셀이 특히 대상으로 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수많은 젊은이들은 이 모든 좌파성향의 언설에 귀기울이지 않았고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사회주의적 정부들이 하는 짓을 볼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가졌었다. 그들은 사회주의 정당들이 어떤 혹심한 긴축정책들을 펼수 있는지를, 게다가 이 정책들이 완전히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결정되는 것을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이는 그리스에도 해당된다). 그리고 그들은 민주주의적 사회주의 사파테로정부의 민주적 경찰의 곤봉도 경험해보았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헤셀은 계속해서 이 정당들을 지지할 것을 주장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그로부터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 어떤 임무들이 생겨나는가? 우리는 그들이 지배자들을 신임하거나 불신함에 있어서 기반하고 있는 그 가치들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가치들이다. 이러한 가치들의 도움으로 결정권자들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있다."[8]  어떤 영향력을 이 젊은 세대가 그들에게 그렇게 많은 비참을 강요하는 민주적 국가들에 행사할 수있는가?  아마 눈밖에 난 장관 한명쯤을 대체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다음은? 그것을 통해 진정으로 무엇이 바뀌겠는가? 아무것도 아니다! 모든 나라에서 상황은 마찬가지이다.  집권하고 있는 것이 우파정부든 좌파정부든 (아니면 남아메리카에서처럼 극좌파정부든) 상관없이, 생존조건의 전반적 인 악화에 직면한 국민 대다수와 경제의 파산을 모면하기 위해 엄격한 긴축정책을 펴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국가기구사이의 골은 점점 더 깊어만 가고 있다. 어떤 다른 길도 없다. 국가의 민주주의적 가면뒤에 자본의 독재가 항상 도사리고 있다.

   

자본주의를 손대지는 말것!

 

   "나의 세대는 세계혁명이라는 생각에 대해 단단한 알레르기를 갖고 있다. 약간은, 우리가 그것과 함께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러시아혁명의 해, 1917년에 태어났고, 그 해는 내 인격의 한 특징이다. 나는 우리가 폭력적 혁명적 행동들을 통해서는 기성제도권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그렇게는 역사를 추진할 수 없다는 느낌을, 부당할지도 모르지만,  갖게 되었다."[9]  약간 나중에 헤셀은 계속해서, „ 모든 사회들 속에는 고삐풀린 채 나타날 수 있는 잠재된 폭력이 존재한다. 식민지해방투쟁때가 그러한 경우이다. 폭동들, 예를 들어 노동자폭동들은 아직도 가능함을 의식해야 한다. 그러나 이는 경제적 국제화의 진전을 놓고 볼 때 가능성이 적다. 제르미날이라는 장르는 약간 낡은 것이 되어버렸다.“[10]

 

   그러니까 헤셀이 젊은 세대에게 하는 호소는 다음과 같다. 세계혁명이니 계급투쟁이니 하는생각을 머리에서 지워버려라! 이 모든 것은 과거사에 속한다. 오히려 체제의 기능방식을 개선하도록 노력하라. 어떻게? 여기서 헤셀은 천재적이고 혁신적인 제안, 모든 좌파정당들이 백년도 더 되는 동안 해온 그 제안을 내놓는다. 즉, 세계의 강대국들이 함께 모인 경제회의 및 사회회의, 일종의 전세계조정위원회의 창립을 제안한다. 세계에서 이 전세계적 조정위원회가, 위기 방지를 위해 그리고 이윤욕과 권력욕에 사로잡힌 모든 거대 금융기관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 경제규제를 목표로 추구할 것이라 한다. UN의 전신인 국가연맹이 1차대전후 공식적으로 거의 동일한 설립이유로 창립되었음을 상기해 보자.  그 설립이유는 상이한 국가들의 이해를 서로 화해시키는 국제기구의 도움으로 전쟁재발을 방지하자는 것이었다. 그 결과는? 2차 세계대전과  1950년이래 전 세계에서 단 14일간의 평화. 사실상 세계는 서로 경쟁하는 국가들로 조각나있고 그들은 서로간에 무자비한 통상전쟁을 끊임없이 그리고 필요시에는 무기를 들고 치르고 있다.  이 모든 조정하는 세계기구들”(세계통상기구, 국제통화기금, UN, NATO등)은  그 안에서 국가들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강탈적인 기구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점을 스테판 헤셀은 결코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하나의 새로운 체제의 필요성, 국제적인 혁명의 필요성을 시인해야만 할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젊은이들이 이러한 착취체제 자체를 과격하게 문제시하게 되도록 이끌 출구를 제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보낸다.  대신에 그는 각국이 새로운 사회- 및 경제안전보장회의 내에서 새로운 정책을 펼치도록 각각의 국가에 압력을 행사하도록 젊은이들을 고무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국가의 결정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시민사회의 대대적인 개입, 국민의 광범위한 동원이면 충분하단다. 이러한 참여는 젊은이들이 NGO들와 이런류의 다른 단체들에 대거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는데,  이는 많은 도전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치뤄야할 많은 투쟁들, 즉 환경, 사회, 반인종차별, 평화 및 연대적인 경제를 위한 투쟁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라 한다.  실제로 헤셀은 우리에게 낡은 똑같은 개량주의적 뒤범벅을 제공한다. 직접 잘 고른 재료들(국민의 시민참여, 지적인 선거참여 등등)을 가지고 자본주의는 자신이기를 즉 착취체제이기를 멈출 수 있고 더 인간적이고 사회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개량이냐 혁명이냐?

 

   "역사는 이러한 도전의 댓가인 일련의 연이은 격렬한 요동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회사는 전진하고 결국에, 인간이 완전한 자유를 획득한 후, 우리는 완성된 민주국가에 도달한다라고 헤셀은 그의 글, „분노하라!"에서 우리에게 말한다. 인류가 큰 도전 앞에 서있다는 것은, 그래서 이 모든 문제들의 해답을 찾아야하고 그렇지 않으면 사라질 것이라는 말은 맞다. 이 문제의 중심에는 사회변혁의 필요성이 놓여있다. 하지만 어떤 변혁? 자본주의는 개량될 수 있는가? 아니면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파괴되어야 하는가?

 

   자본주의를 개량하려 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이를 행하려는 것은 자본주의의 규칙과 법칙들에, 인류를 비참함과 전쟁과 무질서와 야만에 빠져들게 하는 자본주의의 모순들에 굴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주의체제는 착취체제인데, 착취가 인간적으로 구성될 수 있는가? 수백만의 노동자들을 댓가로 이윤을 만들어냄으로써 한 계급에게 가능한한 많은 부의 축적을 가능케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그러한 체제가 인간적으로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자본가들 사이에 경쟁이 첨예화되면 노동자계급이 대대적인 실업,  비정규적고용상황의 확대, 노동현장에서의 무제한적인 착취, 임금인하와 같이 댓가를 치르게 되는 그러한 체제가. 동시에, 인간들이 기본요구를 충족시키고 계급없는, 즉 불평등이 없는, 전쟁의 야만이 없는 사회를 민족국가들과 국경을 폐지함으로써 건설할 수 있을 모든 물질적 수단은 존재한다. 오직 노동자계급만이 그러한 사회의 전망을 실현할 수있다. 이 맹아는 물론 분노한 사람들운동 속에 이미 존재한다. 즉, 서로 돕고, 서로 나누며 연대감과 헌신을 나타내고, 함께함으로써 즐거운 것등등. 스페인에서 관찰될 수 있는 이 인상적인 운동은 짚단의 불같은 일시적 흥분이 아니다. 그것은 전세계 도처에서 앞으로 일어날 투쟁들을 알린다. 노동자계급이 점점 더 대대적으로 나서서 다른 피압박 계층들을 함께 합류시킬 투쟁들을. 이 투쟁들은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체제에 대항해 점점 더 분명하게 나설 것이다. 그러한 투쟁들로부터,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더 커다란 의식이 생겨날 것이다.

 

Antoine. 2011년 7월 2일  (ICC)

 

    

 

 


 

[1]스테판 헤셀은 스페인에서 상당히 유명하다. 적어도 프랑스에서만큼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스페인에 살고 있고 스페인의 작가이자 특히 지금 진정한 민주주의를의 창시자이기도 한 경제학자 호세 루이 삼페드로와 친구로 지낸다. 호세 루이 삼페드로는 헤셀의 캠페인에서 영감을 얻은 팜플렛을 간행했고 또 「분노하라!」의 스페인어판에 서문을 썼다.

[2]CNR은 스테판 헤셀에게 있어서 역사적인 준거점이고 뒤따라야할 모범이다. 우리는 나중에 이점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3]Indignez-Vous!(분노하라!) , 15쪽

[4]같은 책, 11쪽

[5]같은 책, 12쪽

[6]Engagez-Vous(참여하라)!,  16쪽

[7]위과 같은 책 43쪽과 44쪽

[8]Engagez-Vous(참여하라)!, 22쪽

[9]같은 책, 20쪽

[10]같은 책, 21쪽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마르크스주의와 한국 사회주의(전체)운동에 대한 회고

마르크스주의와 한국 사회주의(전체)운동에 대한 회고1)

                                                                                                                          -오세철

 

 

 

                                -1990년대 이후-

 

 

이 글은 필자가 20여 년간 몸담아 왔던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경험에 기초하여 역사를 되돌아보는 글이다. 회고의 역사에 대한 평가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이 요구된다. 마르크스주의는 유사한 공산주의적 사상과 구별되는 과학적 사회주의 또는 코뮤니즘이다. 마르크스주의의 또 하나의 원칙은 지배계급과 소부르주아지로부터 오는 이데올로기, 즉 종파주의, 개인주의, 기회주의, 모험주의와의 투쟁이다.

 

첫째, 1990년대 초반의 사회주의 정치운동을 NL, PD, ND 사이의 논쟁으로 살펴보면 그 당시 우리 사회 이론진영과 실천진영이 국제주의적 마르크스주의와 너무 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 혁명에 배타적으로 의존한 역사해석으로 폭넓은 역사인식이 부족한 점,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본질 분석과 함께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다.

 

둘째, 1990년대 중반의 국제 사회주의운동을 평가하면, 실천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운동이 국제주의 경향과 만났다는 점이다. 이 세력은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김일성주의를 같은 것으로 보았으며 혁명당이 아닌 진보정당 건설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셋째, 2004년 이후 혁명적 사회주의운동을 살펴보면, 이 세력은 1997년 IMF 관리 체제 아래에서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의 경험과 그 위기의 한국 자본주의에의 관철을 통해 보다 근본적인 세계 자본주의 쇠퇴의 과정을 살펴보게 되고 역사유물론과 방법론으로서의 변증유물론의 원칙을 부여잡게 된다.

 

넷째,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미래는 쇠퇴하는 자본주의의 객관적 인식과 더불어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노동계급의 투쟁이라는 주체적 조건에 달려 있다. 이를 위해 세계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단결과 연대를 통한 세계 혁명당의 건설과 소비에트 건설을 향한 노동계급의 자발적 투쟁이 요구된다.

 

 

 

1. 들어가며

 

소련 붕괴 이후 한국의 사회주의(정치)운동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마르크스주의의 역사관으로 다시 정립하는 작업은 마르크스주의 역사 연구자뿐만 아니라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몫이다. 이 글은 그러한 책임 있는 연구 성과물이 아니다. 단지 이 글은 지금까지 내가 몸담아 왔던 사회주의 정치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면서 역사를 거꾸로 뒤돌아보는 회고의 글임을 밝힌다.

 

역사에 대해서 지금 내가 지니고 있는 정치적 입장과 원칙 위에서 나름대로 해석하고 평가한 것이기 때문에 이 글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진다. 1990년, 2004년, 그리고 2006년 내가 쓴 글을 차례로 인용하면서 시작하려 한다.

 

“마르크스가 오래전에 관념론과 교조주의 그리고 모험주의, 기회주의와 끝까지 싸우며 비판했던 것처럼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유물론의 올바른 정립을 이루어야 한다. …… 이른바 ‘개혁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회의의 늪에서 빠져나와 교조주의의 고집과 우경화의 변질을 준엄하게 꾸짖으면서 관념론, 수정주의, 모험주의, 소시민적 혁명주의와 싸워야 한다. ……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원칙인 이론과 실천의 통일, 혁명적 사유와 행동의 통일을 굳건히 견지하면서 과학적 사회주의의 빛나는 전통성을 훼손시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오세철, 1990: 16-19).

 

“20여 년간 사회주의 정치운동에 몸담아 오면서 내가 끊임없이 문제제기 하고 비판했던 것은 사상의 동요와 변질이었다. 이런 사상적 동요가 현장과 대중조직뿐만 아니라 정치조직과 사회운동조직에서도 확산됐고 전체 운동을 합법 개량주의의 늪으로 빠지게 한 요인이 됐다.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체제, 이념, 정책을 모두 포함한)의 위력은 동북아를 포함한 한반도에도 어김없이 전면적으로 관철되고 있으며, 한국의 대중운동과 정치운동 또한 신자유주의에 포섭되고 있는 실정이다. 사회적 합의주의의 틀 속에서 현장에 기반을 둔 대중투쟁을 포기하고 교섭주의로 나아가는 민주노총과 억압받는 현장에 기반을 둔 혁명적 사회주의정치를 포기하고 사회개량적 선거정치로 급속하게 전화된 민주노동당이 혁명적 사회운동 영역을 시민운동으로 재편하면서 신자유주의의 이중대로 나아갈 개연성이 크다. 이는 오랫동안 혁명적 운동의 전통이 뿌리내린 유럽의 경우에도 벌어지고 있는 보편적 경향이며 제3세계의 경우에는 오히려 신자유주의로의 포섭 속도가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오세철, 2004).

 

“우리는 지금까지 세계 여러 곳에서 정기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 대회(모임)가 열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강단의 추상적 논의나 자본주의의 좌파에 속하는 정치적 세력들의 연대를 위한 행사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자본주의 데카당스 시대의 객관적이고 주체적 조건이 야만과 전쟁을 넘어서서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더욱더 깊이 인식하고 있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현장의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고 혁명적 정치세력은 전망을 분명하게 열어젖히지 못하고 있지만 과거 혁명운동이 국제주의의 원칙을 저버리면서 참담한 패배를 경험했던 역사를 뿌리로부터 반성하면서 우리는 하나의 현장,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을 넘어서는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의 단결을 이루어내야만 한다. 이번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국제대회는 한국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세계의 좌익공산주의자들과의 소중한 만남과 토론의 마당이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진영 내의 입장과 노선 차이를 드러내고 소통하는 첫 번째 경험이 될 것이다. 대회의 주제를 이론, 실천, 전망으로 구분하고 이를 꿰뚫는 인식의 지평을 넓혀 나가는 것이 이번 대회의 주요 목표이다. 우리는 이번 국제대회를 시작으로 세계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세력이 연대하고 단결하여 세계혁명을 향한 힘을 축적하고 세계의 프롤레타리아트와 함께 그 역사적 과업을 완수하기를 바란다”(오세철, 2006).

 

그 당시 전술당으로서의 ‘민중당’ 건설에 인텔리가 집단적으로 참여했지만 당내 민주주의에 대한 문제제기와 소련 붕괴로 인한 사상 동요에 항의하여, 인텔리 그룹과 젊은 활동가 그룹이 탈당하게 되고 그 이후 나는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을 견지하면서 사회주의 정치운동을 계속해 오고 있다. 위의 인용문은 그러한 일관성을 표현하는 보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사회주의 운동세력이 지녀왔던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2. 역사적 평가에 필요한 마르크스주의의 원칙

 

1980년대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를 지금의 시점에서 뒤돌아보면 얼마나 단편적이고 피상적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마르크스엥겔스의 전집이 일부 번역된 것도 1990년대에 들어서였고 1987년 이후 레닌전집의 일부가 번역되어 나왔다. 이른바 ‘마르크스-레닌주의’로 통칭되는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와 동일시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그 당시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광주민중항쟁을 겪으면서 민족주의적 볼셰비즘에 대한 친화적 경향이 더욱 커졌으며 군사 파시즘의 한국과 짜르 체제의 러시아 상황을 비교하면서 혁명적 정세를 해석하려는 경향도 정서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일본 번역서를 통한 독해, 주체사상의 도입들이 이러한 척박한 이론풍토에 가세하면서 마르크스주의는 스탈린주의의 교리로 채색된 채로 교조화됐다.

 

‘과학적 사회주의’로 부르는 마르크스주의는 유사한 공산주의적 사상과 구별하기 위해 쓰였다. 초기 기독교, 스팔타쿠스 노예반란, 영국 농민봉기와 같은 초기 공산주의 사상은 돌아갈 수 없는 잃어버린 공동체를 찾으려는 복고적이고 신비주의적 요소를 지닌 사상이었고 16세기 독일 뮌처(Mu¨nzer)가 이끄는 재세례파(Anabaptist) 운동으로부터 영국 내전의 윈스탄리(Winstanley)와 디거스 (Diggers)로 그리고 프랑스 혁명의 바뵈프와 ‘평등인의 음모’(Conspiracy of the Equals) 같이 종교적이고 계시적 관점에서 착취적 사회질서로부터의 인간해방의 능력을 강조하는 운동, 그리고 산업자본주의의 공포를 비판한 오웬, 생시몽, 푸리에의 사상은 자본주의에 의한 역사적 진보와 과학적 세계관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부상에 근거한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구별된다.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의식이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나오고 공산주의 전위는 이 과정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50년 후 카우츠키가 “외부로부터” 노동계급에게 주입되는 공산주의 의식을 가진 사회 인텔리켄챠라는 테제에 대한 반박이었음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다. 또한 『1844년 경제철학수고』는 자유로운 사회에서의 인간 활동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는데 이 글이 헤겔의 철학체계의 주요 개념인 소외를 다루었기 때문에 “마르크스 이전”의 글로 여겨졌지만 마르크스의 초기 저작과 『자본론』같은 후기 저작 사이에는 근본적인 연속성이 있으며 그 후『요강』에서도 이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마르크스가 말한 공산주의를 요약할 필요가 있다.1)

 

첫째 밑으로의 “평등화”라는 의미와는 반대로 “역사의 수수께끼가 풀리는” 인류의 거대한 진보이다. 둘째, 특히 화폐와 자본의 지배하에 있는 생산이 인류를 끊임없이 경쟁하는 원자로 갈라놓는다면 공산주의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을 회복하게 해서 노동의 만족이 타인의 욕구를 위해 이루어지게 한다. 셋째, 분업이 개인 수준에서 극복되는 것은 생산자가 더 이상 단일한 활동형식(육체노동이건 정신노동이건)에 매이게 하지 않고 정신적·육체적·예술적·지적 활동이 결합되는 전인적 인간이 된다. 넷째, 빈곤과 강제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경험, “모든 감각의 해방”의 길을 열어 놓는다. 인간은 더 이상 자연에 반대하는 원자화된 자아가 아니라 자연과 통일된 새로운 의식을 경험한다.

 

마르크스주의 원칙은 1차 인터내셔널에서의 논쟁과 고타강령비판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1차 인터내셔널에서의 논쟁은 첫째, 부르주아 개혁주의자에 대항하는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의 원칙과 부르주아 민족주의자에 대항하는 계급 자율성의 원칙이고 둘째, 반정치적 입장과 무정부주의자의 연방적 편견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 정치와 집권조직의 방어이다. 이 두 가지 원칙은 사회주의 정치운동을 평가하는 기본이 된다. 1875년 ‘독일사회주의노동당’은 라쌀레의 국가숭배주의와 베벨과 리프크네히트 같은 마르크스주의 분파의 타협의 산물인데, 마르크스는 『고타강령비판』에서 혁명과 공산주의 문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첫째, 당면한 개혁과 장기적 공산주의 목표를 혼합시킨 강령을 비판하고, 둘째, 사회민주주의를 민주적 개혁의 계급당으로 만든 경향을 반대하여 당의 계급적 성격을 분명히 했으며, 셋째, 교육받은 엘리트로서의 당의 대체주의적 사고를 반대함으로써 부르주아 편견의 척결을 주장했고, 넷째,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로 이끄는 “인민국가” 개념에 대한 환상에 반대했으며, 다섯째, “공평한 분배”를 요구하는 강령에 반대하면서 교환과 가치법칙의 폐지를 요구했다.

 

마르크스주의의 또 하나의 원칙은 지배계급과 소부르주아지로부터 오는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이다. 그러한 이데올로기는 종파주의, 개인주의, 기회주의 그리고 모험주의 등이다. 종파주의는 조직에 대한 소부르주아 개념의 전형적인 표현으로서 자신을 “세계의 유일한 하나”로 보고 프롤레타리아 조직의 다른 조직을 경쟁자나 적으로 보고 논쟁을 회피하는 경향이다. 개인주의는 역사주체를 개인으로 인식하고 투쟁을 모든 사람에 대한 개인투쟁으로 본다. 소부르주아지거나 프롤레타리아 조직에 새롭게 프롤레타리아화된 요소인 농민, 장인, 인텔리, 학생의 경향이다. 또한 기회주의는 역사적 미래가 없다는 인내심 부족으로부터 나타나며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두 계급 사이의 입장과 이해를 조화시키려는 경향이다. 끝으로 모험주의는 비타협과 급진화라는 이름 아래에서 어느 때나 부르주아지에 대한 공격이 가능하다고 보고 투쟁조건이 존재하지 않더라도 “결정적”인 투쟁에 돌입한다고 하는 경향이다. 따라서 실패할 투쟁으로부터 노동계급을 방어하려는 프롤레타리아트와 마르크스주의의 흐름을 기회주의로, 심지어 반동적이라고 낙인찍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실제로 이러한 경향은 기회주의와 같은 소부르주아 조급성 때문에 기회주의로 수렴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와의 투쟁의 보기는 다음과 같다. ① ‘국제노동자협회’ 내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벌인 바쿠닌에 대한 투쟁, ② 1860년대와 1870년대의 라쌀레의 ‘국가사회주의’에 대한 투쟁, ③ 19세기 말 베른슈타인류의 수정주의와 개량주의에 대한 투쟁, ④ 멘셰비즘에 대한 투쟁, ⑤ 제1차 세계대전 후의 카우츠키와 중도주의에 대한 투쟁, ⑥ 코민테른의 퇴행과 1920년대와 1930년대 공산당(스탈린주의)에 대한 투쟁, 그리고 ⑦ 1930년대 트로츠키주의의 퇴행에 대한 투쟁이 여기에 속한다.

 

 

3. 1990년대 초반의 사회주의(정치)운동에 대한 평가

 

1989년부터 1991년 중반까지 사회구성체를 둘러싼 논쟁은 주로 ≪현실과 과학≫과 ≪우리사상≫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현실과 과학≫은 PD를 대변한 반면 ≪우리사상≫은 ND를 대변했다. ≪현실과 과학≫은 연구자 중심의 집단이었지만 ‘노동계급’ 그룹과 관련이 있었고, 이들 그룹은 ‘인민노련’ 및 ‘삼민’과 통합하고 그 주력인 인민노련은 민중당의 다수파로서 그 이후 합법개량주의의 주도 세력이 된다. ≪우리사상≫은 ‘사노맹’의 기관지 역할을 했다(사노맹도 민중당에 개입했다). ≪현실과 과학≫은 소련공산당 제26차 당대회(1981년)와 제27차 당대회(1986년)의 논쟁을 검토하면서 27차 당대회에서의 종속국독자론의 기각을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역사발전의 보편성으로서의 세계사 또는 그 합법칙적 발전으로서의 현대에 대한 설명에 불과하다. 이제 역사발전의 특수성 또는 그 합법칙적 발전의 차별화, 즉 유형론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우리가 신식국독자론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의 보편성과 특수성의 변증법적 통일을 가리킨다”(윤소영, 1999: 172).

 

그리고 제4집에서는 “그 동안 우리는 한국판 쁘띠부르주아 민족주의인 주체 사상과의 사상·이론을 투쟁을 통해 노동계급의 관점에 입각한 변혁의 과학적 전망을 모색해왔다. 그 결과물로서 우리는 (적어도 2집 이후로는) 신식국독자/반제반독점PDR론의 ‘세계’를 나름대로 제시하기에 이르렀다”(≪현실과 과학≫ 제4호, 1989: 8). 여기서 이 그룹이 비판한 식민지반봉건사회/반제반봉건NLPDR론 은 마르크스주의와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 뒤의 논쟁의 초점이 NDR론 쪽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현실과 과학≫이 ND 그룹을 비판하는 강도는 점점 커진다.

 

“이정로 씨는 불행히도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 제2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자들(카우츠키, 플레하노프, 심지어는 트로츠키)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것 그리고 그러한 말과 실천은 마르크스주의 과학으로부터의 일탈이라는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다”(이창휘, 1989: 11).

 

“우리는 다시 한 번 ‘이론적 청산주의’나 경험주의와 일선을 분명히 그어두지 않으면 안 된다. 소위 ‘계급투쟁적 관점’에 의한 비판이 그 하나이다. 이러한 좌익 비판가들은 우리의 이론적 탐구에 대해 ‘계급투쟁적 관점’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실제로는 진지한 이론적 탐구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을 혁명적 공문구로 덮어두는 것에 다름 아니다”(≪현실과 과학≫ 제6호, 1990: 7).

 

“페레스트로이카를 계기로 준동하고 있는 비당파적 조류의 본질이 민중의 민주주의적 열망을 수단화하고 그 결과로서 민중의 투쟁을 자유주의 세력의 부수물로 전락시키는 데 있음을 최근의 양상에서 확인됐던 터이다”(≪현실과 과학≫ 제9호, 1991: 6).

 

이에 대해 ND 그룹의 본격적 대응은 ≪우리사상≫ 창간호(1991년 5월)에 잘 드러나 있다. 창간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노동해방’ 사상은 본래 물질적 힘과 실질적 투쟁을 지향하는 혁명적 사상으로 태어났다. …… 미약한 사상적 조직적 수준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시작한 남한의 혁명운동은 80년대를 거치며 실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반제투쟁, 반파쇼투쟁, 통일투쟁의 각 영역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이루었으며 무엇보다도 혁명운동의 주체로서 노동자 계급과 근로민중이 자유민주주의 부르주아세력과 구별되는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 그 간의 과정에서 이론 수준은 극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사회구성체론, 혁명론, 국가론, 계급론 등 남한 혁명의 전략과 전술 등 혁명운동의 전반에 이르는 이론적 기초가 폭넓게 형성되고 있다”(≪우리사상≫ 창간호, 1991: 창간사).

 

이들 그룹은 남한을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하면서 자신들의 이론적 기초를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부르고 있다. PDR론을 비판하면서 PD의 독점강화 종속심화 테제의 한계를 비판하고 북한과의 연대를 통한 민족민주혁명을 주장한다.

 

“PD파의 ‘좌’편향적, 경제주의적 변혁이론을 비판하기 위하여 …… 이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남한 당면 변혁은 ‘노동해방변혁 단계’와 질적으로 구분되는 ‘민주주의 변혁단계’라고 규정한다”(≪우리사상≫ 창간호, 1991: 104).

 

이들 그룹의 당시 소련과 북한에 대한 인식은 눈여겨볼 만하다.

 

“신연방안의 국민투표에서의 통과를 통해 고르바초프로 대변되고 있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와의 중립적 세력연합’이 부르주아적 개혁세력으로부터의 승리를 거두면서 가시화됐다”(≪우리사상≫ 창간호, 1991: 104).

 

“중국, 쿠바, 북한은 굳건한 반제 사회주의혁명의 기지이자 프롤레타리아적 개혁의 전형으로서 전 세계 노동자 계급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우리사상≫ 창간호, 1991: 36).

 

“북한이 최근 거두고 있는 ‘통일운동의 진전과 새로운 동북아 질서의 구축’의 측면에서의 중대한 성과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 이러한 성과는 북한이 부르주아적 개혁·개방 압력으로부터 사회주의적 혁명운동을 굳건히 수호하고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앞당길 것임을 입증하는 것이다”(≪우리사상≫ 창간호, 1991: 39-40).

 

이 시기의 논쟁을 돌이켜보면 그 당시 우리 사회 이론진영과 실천진영이 국제주의적 마르크스주의와 너무 떨어져 있었음을 실감할 수 있다. 몇 가지로 정리해 보자.

 

첫째, 세계혁명에 대한 폭넓은 역사인식이 부족하여 러시아 혁명의 영향력이 우리나라 사회주의운동에 깊이 침윤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1930년대부터 코민테른 영향 아래 종속되어 있던 과거로부터 한국 전쟁으로 인한 분단, 자생적 사회주의운동의 고사로부터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축적되지 않은 사회주의운동의 사상과 이론 그리고 올바른 실천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는 PD와 ND의 입론이 여전히 그 당시 소련 공산당의 논쟁이나 아니면 레닌과 스탈린 저술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나 마르크스주의의 전통과 원칙을 지키려했던 유럽 공산주의운동의 역사와 사상가에 대한 인용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혁명이 성공한 러시아를 본보기로 보면서 실패한 유럽 혁명을 뒤돌아보지 않는 배타적 정서도 한몫을 했다고 본다.

 

둘째로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본질 분석과 함께 세계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여전히 분석수준이 일국적 수준에 머물고 있었고 이는 민족주의적 색조와 함께 스탈린주의의 일국사회주의론에 함몰되어 있었다. 자본주의 쇠퇴가 세계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개되면서 전쟁과 파시즘으로 이어지는 세계 역사에 대한 역사 유물론적 해석과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주체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변증 유물론적 해석을 총체적으로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혁명과 반혁명의 소용돌이를 구분할 수 없게 한 것이다.

 

이론적 기반을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부르는 것은 기본적으로 반혁명의 스탈린주의를 교조로 삼은 결과 마르크스주의의 기본원칙과 동떨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양진영 테제도 소련을 사회주의의 중심으로 보고 세계 부르주아지와 투쟁하는 세력으로 규정하여 동맹·연대 세력으로 수용한다. 프롤레타리아트의 잉여노동을 점유하고 국가자본의 축적이라는 특수한 기능을 수행하는 계급으로서의 “사회주의 국가”는 낡은 부르주아지에 불과하다. 국가와 그 관료조직에 의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집중화와 계획화는 소유의 폐지를 향한 진전이 아니라 착취강화를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없었다.

 

ND의 소련과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인식은 이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으며 북한에 대한 인식은 이러한 규정의 극치에 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현실과 과학≫ 역시 소련 등의 국가에 대한 입장을 드러내지 않지만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로서의 신뢰를 보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ND와 차이가 있다면 2단계혁명론을 부정하면서 민중민주혁명론을 주장하고 있을 뿐이다. 어쨌든 이들 세력은 탄압으로 소멸됐거나 스스로 합법개량주의로 전환됐다. 서로 종파주의, 기회주의 또는 모험주의로 비판하여도 이는 원래의 의미와 다른 의도로 사용됐다. 요약하면 이 당시 논쟁은 소련의 몰락이라는 중대한 역사적 경험을 경과하면서도 소련 등 “사회주의” 국가의 본질, 세계 자본주의의 데카당스의 특성에 대한 깊은 이해에 기반을 두지 않은 남한 사회에서의 혁명론, 조직론에 매달리면서 마르크스주의의 국제주의와 분리됐다. 한국사회성격 분석이나 일국혁명론은 여전히 소련과 북한이라는 스탈린주의의 틀 속에 갇힐 수밖에 없었고 마르크스주의와의 올바른 만남을 단절시켰다.

 

 

4. 1990년대 중반 국제 사회주의운동에 대한 평가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미화시킨 스탈린의 영향력으로부터 해방되기는 쉽지 않았다. 소련 같은 국가자본주의의 몰락을 목격하고 그것이 사회주의 모델로 보았던 수많은 활동가들은 푯대를 잃고 방황하거나 좌절했으며 소부르주아의 본성으로 돌아가거나 부르주아지에 투항했다. 일부 연구자들은 마르크스의 원전을 찾아 읽고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으로 돌아가려는 학습을 시작했고 일부는 재빠르게 포스트류의 담론으로 간판을 바꾸었다. 여전히 스탈린주의를 고수하려는 세력은 스스로를 ‘레닌주의자’로 부르고 레닌의 저작에 다시 빠져들었고 그렇지 않은 반스탈린주의의 경향은 급속하게 트로츠키를 읽고 트로츠키주의의 경향들에 다가가기 시작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실천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운동이 국제주의적 경향과 만났다는 사실이다. 국제사회주의자 그룹(IS)의 기관지 ≪사회주의 노동자≫는 제2호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992년 “우리의 입장”에서 그들은 사상적 전통을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그람시로 규정하면서 “≪사회주의 노동자≫와 ≪국제사회주의≫를 만드는 편집부는 마르크스와 레닌과 룩셈부르크의 국제사회주의 사상을 ‘일국사회의론’으로 뒤집어버린 스탈린에 반대해 트로츠키와 그람시가 그것을 옹호했을 뿐 아니라 더욱 발전시켰다고 믿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사회주의 노동자≫ 제2호, 1992: 103)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들은 국제주의적 입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우리는 다른 나라 노동자 계급과의 연대를 지지한다. 우리는 한 나라의 노동자와 다른 나라의 노동자를 분열시키는 민족주의에 반대한다. 우리는 제국주의-동서방 모두의-에 반대한다. 우리는 모든 피억압 민족의 민족자결권을 옹호한다. 우리는 피억압 민족의 반제 민족해방투쟁을 지지한다. …… 사회주의 혁명은 생존하려면 확산되어야 하며 사회주의는 한 나라에서는 건설될 수 없다. 북한,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 국가이다. 우리는 여성의 진정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평등을 지지한다”(≪사회주의 노동자≫ 제2호, 1992: 110).

 

여기서 트로츠키주의의 역사를 거론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소련을 포함한 중국과 북한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한 것이다. 물론 “퇴행한 노동자 국가”로 보는 제4인터내셔널 계열의 입장보다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음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IS의 국가자본주의론을 상세하게 검토할 필요는 없다.2) 특기할 것은 이들이 룩셈부르크를 레닌과 함께 거론한 것, 그람시를 전통의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사실이다.3)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해방투쟁에 대한 적극 지지를 표시함으로써 국제주의의 원칙과의 모순을 드려내고 있다. 그런데 이들 그룹은 2~3년 후에 내부논쟁 끝에 분리된다. 혁명적 진영임을 자임하는 그룹은 나머지 경향을 기회주의적 진영으로 규정하고 남한의 멘셰비키로 부르고 있다. 이들 문건은 1994년 11월 29일 『현 단계 남한 운동에서 국제사회주의의 두 가지 전술과 두 가지 조직노선』(당 창건을 위해 투쟁하는 국제사회주의자들)로 나타난다. 이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남한 국제사회주의는 이제 그 전사(前史)를 마감할 시점을 맞고 있다. …… 전사 시기는 국제사회주의가 남한 운동에서 스탈린주의에 대한 사상적 대안으로 떠오르고 정착된 시기였다. 이 시기에 국제사회주의는 스탈린주의에 반대하여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거머쥐어야 할 유일한 이념적 대안이었다. 이른바 ‘현존 사회주의’가 국가자본주의에 지나지 않음을 밝히면서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사상을 정력적으로 옹호해 낸 것은 무엇보다도 이 시기 국제사회주의자들의 훌륭한 업적이었다. 현 단계 남한 운동에서 노동계급 전위당 건설을 사회주의자의 최우선적 임무로 인식하며, 그것을 위한 당면 실천의 중심 고리로의 전국적 정치선동의 조직화를 핵심적 투쟁방향으로 제기하는 하나의 경향과, 전체 노동계급 운동의 이익과 분리된 별개의 이익을 내세우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모든 이론들을 고안해내면서 오직 종파의 양적 성장을 ‘사회주의자의 임무’로 내세워 추수주의로 기꺼이 나아가고 있는 다른 한 경향, 국제사회주의 내의 이 두 경향이 이제 완전한 형태를 취하면서 각자 자신의 진정한 이름으로 싸울 수 있게 됐다. 그것은 국제사회주 의 내의 투쟁하는 두 진영, 혁명적 진영과 기회주의적 진영이다”.

 

이 두 세력이 분화되기 전 표면적인 공통점은 그 당시 좌익 세력을 스탈린주의 세력으로 규정했다.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그리고 김일성주의를 같이 보았으며 혁명당이 아닌 진보정당 건설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즉 그 당시 좌익들이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을 부정하고 일국사회주의의 신봉자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1990년대 초 벌어진 PD와 ND에 대한 논쟁을 벌인 사노맹과 인민노련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런데 혁명주의 노선을 자임하는 그룹은 1995년 ≪노동해방의 불꽃≫ 창간호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주요 단락을 인용하기로 한다.

 

“현 남한 사회에 미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과 과제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의 과제라고 지목되어 온 것들, 즉 농업문제의 해결-전 자본주의적 착취양식의 제거, 토지 소유의 해체의 의미에서-와 민족해방, 그리고 민주공화정 따위는 더 이상 남한에서 혁명의 과제가 아니다”(≪노동해방의 불꽃≫ 창간호, 1995: 26).

 

“≪사회주의 노동자≫와 ≪사회주의 평론≫을 내고 있는 국제사회주의자들 (IS)은 전형적인 남한의 멘셰비키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강령적 문건 90년대 중반 남한에서 사회주의자들의 행동지침.을 통해 러시아의 멘셰비키가 그랬던 것처럼 ‘과정으로서의 조직(당 건설)’과 ‘과정으로서의 전술’ 이론을 체계화하고 최근에는 자본주의적 통일을 호소하면서 멘셰비키와 똑같은 기회주의적 실천으로 나아갔다”(≪노동해방의 불꽃≫ 창간호, 1995: 27).

 

“국제사회의자들(IS)은 자신들의 기관지 ≪노동자 연대≫와 ≪사회주의 평론≫에서 ≪노동해방의 불꽃≫을 발행하는 ‘당 창건을 위해 투쟁하는 국제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 계급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사회주의자들’(노해투사)을 ‘순수주의’, ‘초좌익주의’로 비난했다. 이유는 두 그룹이 민족통일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문제는 IS가 자신들의 추수주의적 전술관에 바탕을 둔 ‘전술변화’를 통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저버리고 민족주의로 경도되어 노동계급의 이익을 저버리고 있다는 것이다”(≪노동해방의 불꽃≫ 창간호, 1995: 83).

 

“남한에서 사회주의자들이 건설할 당은 선전주의 ‘당’과는 다른 전투조직으로서, 공장세포를 통해 ‘노동자 대중의 일상적 요구 투쟁에서 선두에 섬으로써 대중을 노동자 권력을 위한 투쟁으로 안내하는’ 전략노선을 지향한다. …… 공장위원회, 직장위원회 같은 소비에트형 조직에 기반을 두어 대중의 부분적인 요구 투쟁을 주도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코민테른 초기의 전략노선은 남한 사회주의자들에 의해서도 마땅히 추구되어야 한다”(≪노동해방의 불꽃≫ 창간호, 1995: 73).

 

IS 내부 투쟁이 전술과 조직노선에 맞추어지면서 전개됐지만 핵심적 쟁점은 다시 스탈린주의에 대한 원천적 문제제기가 되어 코민테른 초기의 소비에트 전략노선에 입각한 코민테른 7차의 민중통일전선전략에 대한 비판으로 한 단계 상승했다는 점이다. 이는 결국 북한에 대한 태도와 연결되고 당 건설 투쟁의 현안으로 귀결된다. 위의 논쟁에서 어느 그룹이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에 충실했는가를 평가하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트로츠키주의가 지닌 문제, 보기를 들어 사민주의와 연대한 통일전선전략 그리고 반파시즘 전선, 사민당 내의 입당전술 등이 결국 핵심적 쟁점이 될 수밖에 없다. ‘불꽃’ 그룹이 IS와 분리한 원칙이 올바른 방향임에는 틀림없으나 국제 공산주의운동의 역사를 트로츠키주의로 협소화하고 그에 대한 원칙적인 비판적 평가로 나아가지 않았다는 점은 논쟁의 지점을 역시 일국적 관점으로 끌어내렸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이어서 논쟁은 조직노선으로 이어져 ‘신질서’ 그룹과 ‘불꽃’ 그룹 사이에, 그리고 ‘노동해방의 길’과 ‘선진노동자의 길’(‘노동해방의 불꽃’의 연속성) 사이에서 계속된다. ‘신질서’와의 논쟁은 전위당 노선과 평의회공산주의 노선 사이의 대립으로, ‘노동해방의 길’과의 논쟁은 소비에트 노선과 “집단적 지식인의 결합체로서의 사회주의 조직” 노선으로 대립한다.

 

‘신질서’는 전위당 노선을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과거 전위당 건투운동, 혹은 전위당 노선이 갖고 있는 오류는 분명하게 비판되어야 한다. 특히 물질성 이론에 기초한 ‘밖으로부터의 주입’ 사상은, 엘리트주의를 구조화시켰으며 계급대중과의 결합을 일방적인 관계로 협소화시켰고 정치선동을 정치폭로 정도로 격하시켰다. …… 우리는 과거의 전략노선을 국가주의적 관점에 입각한 단일 당봉기 전략, 그 구체태인 통일전선전략이라고 규정했으며(NDR, NLPDR, AMCPDR 등이 여기에 속한다) 대안으로 소비에트 이행전략을 주장한 바 있다. 소비에트 이행전략은 통일전선보다 계급조직인 공장 세포와 소비에트형 노동자 투쟁조직에 조직적 무게중심을 설정하고 전선운동은 이것을 지지, 엄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토대로 해서만 존립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신질서≫ 2호, 1995: 161).

 

‘신질서’의 반당적 경향을 비판하는 ‘맥박’(노동해방의 불꽃)은 ‘신질서’의 “소비에트형 전략”을 혁명 전략이 아닌 무당파적 지식인들이 벌이는 변혁론 논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응수하고 있다.

 

“‘신질서’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의 구현체 그 자체인 레닌주의/볼셰비즘을 괴이하게도 그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와 대립시키고 있다. 그 때문에 ‘신질서’의 ‘소비에트 전략’은 레닌주의 당에 반대하는 절대 자유주의 종파들의 평의회공산주의 노선과 비슷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위당 건설에 반대하여 일상적 상황에서 평의회를 건설하려는 평의회공산주의는 초좌익적 대리주의 실천을 조장해왔다. …… 실제로 ‘신질서’는 볼셰비즘을 ‘단일당 봉기전략, 단절적 이행전략’으로 오해함으로써 볼셰비즘에 대한 시민운동론자들의 상투적 왜곡에 가세하고 있다”(≪노동해방의 불꽃≫, 1996: 62-63).

 

그런데 ≪노동해방의 길≫은 원칙상의 초좌익과 실천상의 대중추수주의의 기묘한 결합이 트로츠키 진영의 기본특징이라고 비판하면서 ≪불꽃≫ 그룹을 평가하고 있다.

 

“≪불꽃≫ 그룹이 민주노조운동을 소비에트운동, 또는 소비에트의 맹아로 평가하자마자 그것의 필연적 귀결은 그들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 아마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중파업론..일 것이다 ― 소비에트는 혁명적 시기에만 등장할 수 있다는 자명한 진리 때문에 남한의 현 시기를 혁명적 시기로 규정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노동해방의 길≫, 1996: 27).

 

“레닌의 볼셰비키의 유형의 정당의 진정한 위대함은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를 노동자 계급의 규율 잡힌 조직운동과 결합시킬 수 있었다는 데 있다. …… 로자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그람시 같은 혁명적 사회주의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선진 노동자들과 결합된 규율 잡힌 조직운동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점에서 러시아의 레닌과 구별된다”(≪노동해방의 길≫, 1996: 153).

 

“현재 남한의 사회주의운동과 사회주의 조직은 인텔리겐치아 출신과 노동계급 출신의 사회주의자들의 단결된 노력과 상호침투 없이는 결코 발전할 수 없다. 남한 사회주의운동이 수백 명의 인텔리겐치아 출신의 집단적 지식인과 노동계급 출신의 집단적 지식인을 가지게 될 때 남한 사회주의자들은 이렇게 선언할 것이다. ‘이제 남한에서 사회주의 정당은 이미 형성되고 있다’”(≪노동해방의 길≫, 1996: 202).

 

이에 대해 ≪선진노동자의 길≫로 이름을 바꾼 ≪불꽃≫ 그룹은 IMF를 겪고 난 정세에서 계속해서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 노선을 주장한다. “그러나 어떻게 서로 다른 요구들과 서로 다른 형태의 투쟁들이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민주노총 또는 산별노조를 통해? …… 전국연합 또는 IMF 범국민운동본부를 통해 …… 이 문제에 대해 역사는 대답을 내린 지 이미 오래다. 즉, 노동자평의회(소비에트)를 통해서 이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 노동자 계급의 모든 정치적 조류들이 가장 폭넓은 민주주의 기초 위에서 노동자평의 회의 지도력을 놓고 투쟁할 수 있다. 따라서 노동자평의회의 슬로건은 과도기 요구체계의 최정점을 이룬다”(≪선진노동자의 길≫, 1998: 38-39).

 

이들 사이의 논쟁은 마르크스주의 혁명 전략에 대한 핵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볼셰비키 대 멘셰비키, 혁명주의 대 기회주의의 대립구도를 넘어선다. 그것은 소비에트와 당의 관계이다. 혁명적 정세에 대한 인식 그리고 소비에트 혁명 전략을 ‘초좌익’으로 규정하는 것은 상대적 의미로 사용된다.

 

이 문제는 결론과 전망에서 다루어질 문제이지만 당을 부정하는 평의회노선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비판이 중요하다. 좌익공산주의와 평의회공산주의, 그리고 평의회주의 사이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하고 모두 당을 부정한다고 보는 부정확한 규정이 이루어지면서 당과 평의회의 변증법적 통일을 향한 수준 높은 논쟁으로 진전시키지 못함을 볼 수 있다.

 

평의회주의는 평의회공산주의운동에서 1930년대 이론화되기 시작한 오류의 극한적 표현이며 퇴행이다. 평의회주의는 러시아 혁명, 프롤레타리아독재, 당, 집권화에 대해서 부르주아지가 수천 번 주장하고 무정부주의자가 반복해서 주장한 입장에 “마르크스주의적 형식”을 입히려는 공개적인 기회주의적 시도이다. 평의회주의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International Review, 2004: 19-24).

 

첫째, 평의회주의가 일국사회주의라는 스탈린주의적 입장에 반대 하지만 프롤레타리아트가 세계 혁명을 기다리지 않고 임노동과 상품을 폐절하기 시작했다는 주장을 함으로써 무정부주의의 낡은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둘째, 국제주의에 반대하여 1926~1927년에 스탈린주의는 ‘일국사회주의’를 주장하는데 트로츠키와 좌익공산주의의 모든 경향은 이러한 입장을 반역으로 보았으며 이탈리아 좌파잡지 ≪빌란(Bilan)≫은 코민테른의 죽음으로 보았다. 이점에서 무정부주의의 논리는 스탈린주의와 기본적으로 같다. 반집권화가 ‘일국사회주의’의 정식화를 싫어하는 것 같지만 ‘자율’과 ‘자주관리’의 기반 위에 ‘한 마을’과 ‘한 공장’에서의 사회주의를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민주적’ 외양과 ‘대중 주도권의 존중’을 하는 것 같지만 자본주의적 착취와 부르주아국가의 방어라는 스탈린주의와 동일한 방향으로 이끈다.

 

셋째, 평의회주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추진은 공산주의적 경제조치의 채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21세기 초 세계시장을 완성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 기지의 권력 장악은 ‘해방구’를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은 자본주의의 가치법칙에 완전히 종속되어 나갈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적에게 속해 있다. 공산주의를 위한 투쟁의 목적은 새로운 착취의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착취를 폐절하는 것이다.

 

넷째, 평의회주의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대차대조표(≪빌란≫)는 이렇다. 즉 정치의 물신화와 ‘머나먼 혁명’의 희망 대신에 공장에서 노동자통제의 즉각적 조치 그리고 임노동과 상품교환의 폐지를 채택하여 ‘관료주의’를 만들지 않고 혁명이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평의회공산주의를 유혹하고 주물화시킨 주장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면서 무정부주의와 경제주의에 연결된다. 이러한 평의회주의의 정식화는 프루동에 이어 아나코생디칼리즘과 혁명적 생디칼리즘으로 이어졌으며 1917~1923년 오스트로-마르크 스주의로, 그람시의 공장평의회 이름으로, 그리고 오토 륄레와 AAUD(Allgemeine Arbeiter Union Deutschlands, 독일노동자총연맹)의 이론가로 이어졌다. 러시아의 콜론타이, 1936년 스페인에서의 무정부주의도 여기에 속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노동계급을 단순한 경제적 사회적 범주로 보고 역사적 계급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5. 혁명적 맑스주의자(사회주의자) 모임, 사노련, 사노위 

  

2005년 7월「혁명적 맑스주의자 (사회주의자)모임」을 제안하면서 모임의 목적과 사업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이 모임은 세계코뮤니스트 운동의 국제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한국의 혁명적 맑스주의자(사회주의자)의 모임이며 혁명당 건설에 동의하는 활동가들의 모임이다.

 

둘째, 이 모임은 맑스주의 틀 안에서 토론과 논쟁을 위한 모임이며 혁명적 맑스주의(사회주의)이론을 계승 발전시키고 코뮤니즘의 사상, 역사, 전략, 전술을 연구하는 모임이다.

 

셋째, 이 모임은 다음 몇 가지 공동사업을 수행한다.

 

1) 국제 코뮤니스트 세력과의 국제연대 및 교류

2) 혁명적 맑스주의자(사회주의자) 대회 개최 (실천운동으로서)

3) 기관지 발행 (5년 장기 기획을 통한 토론회와 단행본 출간)

4) 월례토론회

 

이 모임의 성과를 바탕으로 사회주의 혁명당 건설을 위한 연합체 건설이 제안되었고 2008년 2월23일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 결성되었다. 준비과정에서 미래의 혁명당 강령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우리의 입장」이 작성되었고, 이행요구를 담아내는 「대중행동강령」이 제출되었다.「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사 사노련)」의 결성이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몇 몇 혁명적 그룹들이 함께 하지 않았지만 30년 한국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서 굳건하게 혁명적 맑스주의 원칙을 지키며 실천해온 서클들이 짧지 않은 토론과 준비를 거쳐 혁명당 건설을 위한 첫걸음 디뎠다는 점이다.

 

둘째,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자본과 국가의 탄압이 상존함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펼쳐나가는 실천을 함으로써 당 건설 운동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만의 과제가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본연의 임무임을 인식시키게 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창립한지 6개월 만에 공안기관의 전면적 탄압을 당하고 재판 투쟁을 하면서 더욱 사회주의 운동과 혁명당 건설의 의미가 공개적이며 대중적으로 선전, 선동된 것도 중요한 성과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의 창립 전에 네 개의 서클은 스스로 해소되었고, 단일 조직으로 구성된 것도 의미 있는 진전이었으며, 끊임없이 「사노련」에 참여하지 않은 혁명그룹에게 운동 강령 연구모임을 제안한 것도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사노련」을 보통명사로서의 운동으로 펼쳐나가려고 하는 적극적 자세였다. 이른바「사노위」의 제안과 공동토론회의 개최는「사노련」의 결성의미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활동이었다.

 

2010년 5월9일 「사노위」의 결성이 지닌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사노련 결성이후 “사회주의노동자 당”이라는 용어가 일반화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중도주의 세력으로 규정했던 「노동자의힘」과「해방연대」가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을 위한 독자적인 행보를 시작한 것은 그 그룹의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노련은 <사회주의노동자 당>이라는 공통의 당명을 배제할 수 없었고, 최소한도의 정치적 원칙으로라도 혁명당 건설을 위한 공동의 실천을 대중적으로 검증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또한 사노련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대중적 제안을 통한 「사노위」 건설은 원래 <사노련>의 단독 제안에 대한 대중적인 책임인 동시에 혁명당 건설을 한걸음 내딛는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

 

둘째, 이 과정에서 이른바 사노련의 다수파는 <현장분회>를 둘러싼 논쟁을 조직 사상으로 확대하면서 「사노위」로의  참여를 「사노련」이라는 형식을 고수하게 되고 「사노위」 건설에 참여한 세력은 이들을 「사노위 이탈파」로 규정하였다. 「사노련」 고수파는 「노건투」로 전환되고, 2011년 2월 「사노련」 1심 재판이후 「사노련」은 해산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별도의 평가가 필요하지만 결국 「사노련」 고수파는 사노련 이전의 서클주의로 되돌아가는 경로를 택함으로써 혁명당 건설 경로에 대한 현장주의적 대기주의 관점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셋째, 강령, 조직, 전술의 통일을 목표로 한 1년 공동실천의 한시적 조직인 사노위는 혁명당 건설을 위해 거쳐야 할 필연적 과정이었고, 그 공동실천에 대한 대중적, 공개적 평가는 사노위 성원들 모두 책임이었다. 사노위 1년 평가에 대해서는 이미 제출된 평가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앞으로의 당 건설 경로와 관련하여 강령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의 문제라는 논리는 언제나 조직 분리의 함정을 안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6. 마무리하며

 

 

세계자본주의 체제와 계급투쟁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총체적 위기가 쇠퇴기의 마지막 단계인 해체단계에 들어섰음은 인류의 파멸이라는 보다 넓은 관점에서 확인될 수 있다. 잉여가치의 생산과 실현에서 이윤율 하락과 시장포화로 임계점에 다다랐음은 이미 자본주의에 대한 맑스주의 분석으로 확인된 것이지만 지금은 야만으로서의 자본주의와 문명으로서의 사회주의(공산주의)의 선택에 기로에 서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첫째, 자본주의 체제는 임금노예도 먹여 살릴 수 없는 체제로 나아가고 있다. 세계에서 매일 굶주림으로 10만 명이 죽어가고 있고 10세 미만 어린이는 매 5초마다 죽는다. 8억 4천 2백만 명이 만성적인 영양실조로 고통 받고 있으며 60억 인구 중 20억이 식품비 인상으로 매일매일 생존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

 

둘째,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는 경제번영의 환상을 유지할 수 없는 체제이다. 인도와 중국의 경제기적은 환상임이 드러났으며 중국에서는 2008년 상반기에 2천만 명이 해고되었고 6만 7천개의 회사가 파산했다.

 

셋째, 생태적 재앙이 예상되고 있다. 지구의 온난화를 보면 지구의 평균온도는 1896년 이래 0.6% 증가했고, 20세기는 북반구에서 지난 천년동안 그 이전보다 가장 심각한 온난화를 보이고 있다. 눈 덮인 지역도 1960년 말 이래 10% 감소했으며, 북극빙하의 두께는 40% 감소했다. 평균해수면은 20세기 동안 10~20% 상승했는데 이러한 해수면 상승은 지난 3천년보다 10배 증가한 것이다. 또한 90년 동안 지구에 대한 약탈은 남벌, 토양침식, 오염(공기, 수질), 화학방사물질의 살포, 동식물의 파괴, 전염병의 폭발 등으로 나타나 생태적 재앙은 종합적이고 지구적 형태로 구성되어 예측할 수 없다.

 

이는 사회주의(공산주의)의 물질적 기초마저도 파괴하고 있는 것이어서 지구와 인간을 회복 불가능한 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한다는 근본적 한계를 안고 있다. 여기에 자본주의적 인간형의 재생산은 사회주의적 인간을 형성시키는데 지속적 장애물로 남아 있어서 객체와 주체를 모두 파괴당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억압과 착취에 맞선 계급투쟁의 역사는 항상적이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제1인터내셔널은 상승기 자본주의의 능력 때문에, 제2인터내셔널은 혁명주의의 포기와 민족주의 때문에 그리고 코민테른은 사회주의 혁명을 포기한 스탈린주의의 반혁명 때문에 실패했다. 특히 1930년대 이후의 반혁명세력은 (국가)자본주의의 본질을 호도하면서 ‘사회주의’를 참칭하였고 결국 세계자본주의체제를 유지시키는 역할을 했으며 양 진영의 대립을 위장하면서 세계의 노동자계급을 억압, 착취해왔다.

 

더구나 1989년 동쪽 블록과 스탈린 체제의 몰락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명백한 승리”, “계급투쟁의 종말” 그리고 심지어 노동계급 자체의 종말이라고 떠드는 부르주아지의 캠페인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그 의식과 전투성 수준에서 심각하게 후퇴하도록 만들었다.

 

 1990년대 동안 노동계급은 투쟁을 전적으로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시기의 투쟁의 기관이었던 노동조합에 대적할 폭이나 의식 그리고 능력을 지니지 못했다. 2003년까지는 그렇지 못했지만 1989년 이래 프롤레타리아트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에서의 연금에 대한 공격에 대한 반대투쟁이 전기가 되었다. 노동자의 투쟁은 대부분 중심국가에 영향을 주었는데 미국(2005년 보잉과 뉴욕교통), 독일(2004년 다임러와 오펠, 2006년 봄 의사, 2007년 봄 독일 텔레콤), 영국(2005년 8월 런던공항), 프랑스(2006년 CPE 반대투쟁)가 있고 주변부 국가들로는 두바이(2006년 봄 건설노동자), 방글라데시 (2006년 봄 방식노동자), 이집트(2007년 봄, 방직노동자), 이집트(2007년 봄, 방직운수 및 기타 노동자)의 투쟁이 있다.

 

 2006년 이후 2008년까지 벌어진 세계의 계급투쟁은 이집트, 두바이, 알제리아, 베네주엘라, 페루, 터키, 그리스, 핀랜드, 불가리아, 헝가리, 러시아, 이태리,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 전 세계로 확대되고 있으며 2009년부터 심화되는 대공황과 자본주의의 위기에 맞선 노동계급의 투쟁은 수세적으로 시작되지만 처절한 공세로 전환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계급투쟁의 새로운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40년의 위기와 노동계급의 생활조건에 대한 공격, 특히 실업과 불안정 노동의 증가는 미래가 좋아질 것이라는 환상을 날려버렸다.

 

둘째, 점점 야만의 형식을 취하는 군사갈등의 영구화뿐만 아니라 환경파괴에 대한 가시적 위협은 사회적 근본변혁의 필요성을 불러일으킨다. ‘반자본 운동’과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는 슬로건은 근본변혁을 빗나가게 하려는 부르주아지가 숨긴 항체다.

 

셋째, 스탈린주의와 20년 전 그 몰락이후의 캠페인이 만든 외상은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지고 있다. 지금 노동의 삶을 시작하는 새로운 세대는 “공산주의의 죽음”에 대한 거대한 캠페인이 벌어졌을 때 어린이였다.

그런데 40년 동안 세계자본주의는 엄청난 부채를 짊어짐으로써 재앙을 피해왔다. 자본주의에서 부채는 마약중독자에게 마약이나 다름없다. 그 마약을 소련 같은 (국가)자본주의가 사용했건 미국 같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사용했건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부채의 결과는 지불 가능한 시장을 찾지 못하고 결국 전 세계 노동자의 피와 땀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것은 또한 전 세계 노동자의 가난, 제국주의 전쟁 그리고 생태적 재앙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자본주의는 끝나가고 있는가? 그렇다. 그것은 갑작스런 파멸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자본주의의 역사에서 서서히 끝나는 마지막 단계, 체계적 몰락의 단계이다. 우리는 150년 전의 ‘전쟁인가 혁명인가’의 화두를 진지하게 꺼내들고 다시 한 번 ‘야만인가 사회주의인가’를 말하는 역사적, 문명적 인식과 과학적 사회주의 이론과 혁명적 실천을 준비해야 한다. 이는 혁명적 맑스주의 원칙에 올바르게 전 사회주의자들의 통일과 단결을 의미한다. 화폐, 상품, 시장, 임노동, 교환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서 자유로운 개인의 연합이 살아 숨 쉬는 노동해방 사회건설을!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세계적 차원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광범위하게 격렬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넘어서서 자본주의 철폐와 사회주의 혁명 그리고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물질적 필요성으로 요구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구체적 특수성을 인정하더라도 세계자본주의의 총체적 위기와 노동계급의 필연적 투쟁은 불가피하다. 투쟁의 지연은 폭발 잠재력의 임계점 차이일 뿐이다. 경쟁과 효율성이라는 가치에 법칙에 예속되어 파편화되었던 예비 노동자 대학생들의 등록금 인하 투쟁은 바로 그 실현이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근본적 물음을 묻고 체제를 송두리째 엎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1, 2년 사이 선거주의, 의회주의, 개량주의가 혁명적 투쟁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동하겠지만 혁명세력은 더더욱 스스로를 무장하여 준비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것을 위한 공산주의자의 유일한 길은 공산주의자 조직인 혁명당을 건설하는 것이다.

 

2005년 이후 혁명당 건설을 위한 과정은 바로 그 과정의 일부이다. 혁명적 맑스주의자 모임, 사노련, 사노위, 그리고 혁명당 추진모임은 이를 위한 구체적 발현태이다.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객관적 정세가 혁명당 건설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계 맑스주의(공산주의)운동의 역사, 계급투쟁의 역사, 자본주의에 대한 과학적 분석 그리고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어제와 오늘에 기반하여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하나, 사노위 해산선언-동의자모임을 중심으로 <공산주의노동자당>건설 추진을 위한 준비모임을 결성한다. 이 모임 밖의 공산주의자들과 소통 망을 구성하기 위한 기획과 공동사업을 제안한다.

 

  둘, 강령은 중요한 무기이다. 가장 근본적인 맑스주의 원칙인 역사유물론에 입각한 현대 자본주의 분석, 러시아 혁명 이후 존재했던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들”에 대한 과학적 분석과 평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이해, 전 세계 계급투쟁의 과거와 현재, 미래에 대한 분석과 이해는 혁명당을 만들어 갈 공산주의자들의 필수적인 조건이다. 이를 위한 연구, 토론, 매체, 교육에 대한 종합적 기획사업이 요구된다.

 

  셋, 노동자평의회로 나아가는 프롤레타리아의 조직화 양식에 대한 구체적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정규직뿐만 아니라 비정규직 형태로 존재하는 노동자 집단에 평의회적 조직 형식의 구축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사회주의자 연대조직 건설 등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넷,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건설하려는 공동의 노력은 세계 혁명주의 그룹과의 소통, 공동대회, 공동실천을 통해 모색하는 <국제연대위원회>를 특화시킨다.

 

다섯, 미래의 공산주의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하는 정치학교 개설을 포함한 사업을 담당할 <청소년 위원회>를 특화시킨다.

 

주)

1)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에 대한 객관적 평가는 보다 체계적인 연구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리고 여전히 글 쓴 사람의 입장이 전제된 주관적 평가나 단상이 오히려 토론을 위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나는 몇 년 전 이런 글을 써서 『다시, 혁명을 말한다』 (빛나는 전망,2009)에 “마르크스주의와 한국 사회주의(정치)운동에 대한 회고”로 실은 바 있다.  이 글 이상의 글을 짧은 시간에 준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기서는 2005년 이후 「혁명적 맑스주의자 모임」이후 현재까지에 대한 평가를 정리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정도로 보완하겠다.

 

 

---------------------------------------------------- 

참고문헌

≪노동자≫, 12호. 1990년 12월. 민중당 노동자위원회

≪현실과 과학≫, 3호(1989. 4), 4호(1989. 9), 6호(1990. 7), 9호(1991. 3).

≪우리사상≫, 창간호(1991. 5).

≪사회주의 노동자≫, 2호(1992. 9).

≪노동해방의 불꽃≫, 창간호(1995).

≪신질서≫, 2(1995. 11).

≪맥박≫, (1996).

≪노동해방의 길≫, (1996. 5).

≪선진노동자의 길≫, (1998. 8).

International Review 1st Quarter 2004, 1st Quarter 2006, ICC

국제대회준비위원회 2006.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국제대회 자료집』, (2006. 10).

사회주의정치연합. 2006.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국제대회를 열며』

오세철. 1990.『개혁사회주의에 대한 환상과 회의와 좌절을 넘어서』≪노동자≫, 12호.

민중당 노동자위원회.

오세철. 2004.『사회주의와 노동자 정치』, 박종철 출판사.

윤소영. 1999.『한국 사회성격논쟁에서도 ‘페레스토로이카’가 임박 했는가?』≪현실과

과학≫, 제3호. 1999. 4.

이창휘. 1989. 『PDR론의 올바른 이해를 위하여』, ≪현실과 과학≫ 4호. 1989. 9.

 

* 각주

 

1) “공산주의는 근사한 사상이 아니라 물질적 필요성이다”(International Review, 2006:

10-19).

2) 여기서는 좌익공산주의 그룹의 국가자본주의론을 소개한다. “국가자본주의로의 경향은 전 세계의 모든 곳에서 나타나고 쇠퇴[자본주의]의 제반작용들이 가장 폭력적으로 나타나는 그러한 곳에서 가속되거나 가장 격렬하게 분출된다. …… 정치적 및 사회적 영역에 있어서 국가자본주의로의 경향은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 같은 극도의 전체주의적 형식들 속에서이든 또는 민주주의 가면 아래 은폐된 형식들 속에서이든, 국가기구와 특히 그 집행력이 사회 생활의 모든 영역들에 현재하며 체계적이고 점점 더 막강해지는 통제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통해 표현된다”(ICC 강령,1976)

3) 그람시도 각국의 공산당들의 볼셰비즘화를 주창한 스탈린주의적 중도주의에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4) 여기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모임’을 제안하는데 ‘다함께’를 제외한 것은 입당전술에 대한 비판적 입장 때문이었고 ‘노동자의 힘’은 활동가 조직론에 머무르고 중도주의적 입장으로 보았기 때문이며, 혁명당 전략을 배제하는 다른 그룹들에게도 제안하지 않았다.

5) 여기서 편의상 A B C 그룹으로 표현되는 그룹은 당건투, 노동해방연대, 울산노동자배움터를 의미하지만 조직연대 모임이 아닌 개인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조직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6)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국제대회 자료집. http://spri.jinbo.net 공개자료실 8번.

7)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국제대회 자료집. “혁명 전략 : 혁명역량의 국제적인 재편이 프롤레타리아 혁명 승리의 전제조건이다.”

8)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 국제대회에 대한 사회주의정치연합의 토론 결과 요약

사회주의정치연합(이하 SPA)은 국제대회가 끝난 후 ICC의 대표단과 IP 대표단과의 토론을 통해 국제대회의 대차대조표를 제시하면서 극동에서 처음 열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특히 좌익공산주의자들)의 만남과 소통 그리고 주요 원칙과 쟁점들에 대한 토론과 공감대 형성을 높이 평가하고 이러한 노력이 계속 이어지기를 희망했다.

자본주의 데카당스에 대하여

1. 우리는 공산주의 좌파 내부에서의 자본주의 데카당스에 관한 논쟁을 자세히 검토했다. 그 구체적 비교분석은 SPA가 발표한 텍스트 『자본주의 데카당스에 관한 논쟁에 대하여』에 잘 나타나 있다.

데카당스 자본주의에서의 프롤레타리아 투쟁 

1. ICC가 1980년에 쓴 텍스트에 대해 우리는 원칙적으로 동의한다. 특히 이 글은 상승기 자본주의와 데카당스 자본주의를 구분하고 민족국가, 자본주의의 새로운 편제 단위들의 발달, 전쟁, 위기, 계급투쟁, 혁명조직의 역할의 기본 특성을 비교하고 있는데 지나치게 도식화하는 시도 같지만 자본주의 보편의 특성을 상승기와 데카당스로 구분하여 근본 변화를 살피는 거시적 틀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지침이 될 수 있다.

세계혁명당 건설에 대하여

1. 미래의 혁명당 본질에 대해 ICC가 서울 ‘국제대회’에서 발표한 텍스트 “혁명 전략-혁명역량의 국제적인 재편이 프롤레타리아 혁명 승리의 전제조건이다”에서 밝힌 원칙에 우리는 동의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사노위 실패와 무기로서의 강령

사노위 실패와 무기로서의 강령

- 이형로

 

 

 

 

사노위는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이라는 시대적, 정세적 과제를 부여안고, 당 건설의 첫 단계라 할 수 있는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 추진위를 목표로, 1년간의 공동정치활동을 통해 ‘강령상의 통일’을 이룰 것을 목표로 하여 공동실천위원회라는 형식을 갖고 출발하였다.

 

이렇게 출발한 사노위는 “공공연한 사회주의 정치운동과 당 건설운동의 전면화”를 출범정신으로 하여, 당 건설 추진위로의 전환조건으로 1)강령, 전술, 조직의 통일과 2)선진노동자에 대한 실천적 권위확보를 내세운다. 그러나 “선진 노동자에 대한 실천적 권위확보” 문제는 객관적인 근거와 기준을 정하기가 어렵고, 계급의식이 아직 낮은 문제 등이 있어 실질적으로 추진위 전환 조건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 사노위 안에서 중요한 과제는 강령통일과 조직 활동 문제였다.

 

그 동안 각자의 써클과 활동 공간(사노준, 사노련, 노투련과 개별 활동가)에서 서로 다른 운동 노선과 문화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1년이라는 특별하고 한시적인 기간을 정해두고 이론과 실천, 운동과 투쟁의 경험 등 모든 면을 사노위라는 그릇에 녹여내면서, 가장 혁명적인 원칙과 실천의 무기를 창출해내기 위해 사노위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러한 시도는 여전히 의미 있는 일이었고, 혁명당 건설 운동의 흐름에서 주체역량의 상황과 객관적 정세를 고려했을 때 적절한 운동노선이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노위는 가장 혁명적인 원칙을 가진 강령으로의 통일도, 자본가 권력에 실질적인 위협이 될 만한 강력한 실천력을 가진 당 조직도 창출을 못한 채, 공동실천 자체의 한계로 인해 당 추진위 단계로 상승하지 못하고 해산을 맞게 된다.

 

그렇다면 왜 사노위는 강령통일에 실패했고, 당 조직구조를 창출하지 못했는가? 공동실천 자체의 한계는 무엇이었나? 

 

이 글은 강령과 조직은 하나의 유기체라는 입장을 분명히 하며, 강령통일 이전에 조직문제로 파열구가 나기 시작한 공동실천 활동이 왜 강령투쟁 과정에서 더 악화되어 결국 해산에 이르렀나를 살펴보고, 무기로서의 강령은 곧 실천의 지침이라는 교훈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자 한다.

 

 

 

1. 강령 건설의 원칙과 혁명당 건설

 

사노위에서 건설하려는 당과 강령은 어떤 것이었나? 

 

노동자계급의 당이라면 기본적으로 다수의 노동자를 기반으로 하는 당이어야 한다. 하지만 당의 정치적 성격은 당이 어느 계급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당이 채택하고 있는 강령으로 판단해야 한다. 즉, 당의 성격은 당의 이름이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당에서 내건 강령과 실천의 내용이 규정해 준다.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당을 이름으로 내걸지만 온전한 노동자계급의 정당이 아니듯이,1) 사회당이 사회주의자 당을 내걸지만 전형적인 사민주의 정당이듯이, 사노위에서 건설할 당은 이름만 사회주의노동자당이 아니라 강령과 조직 모두에서 실제 사회주의 혁명정당, 노동자계급 혁명정당이었다.

 

사노위가 혁명정당을 건설하려 한다면 사노위가 만들려는 강령은 당연히 사회주의 혁명 강령이다. 사회주의 혁명 강령은 역사와 생산과 권력의 주체인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해 자본주의 체제를 근본적으로 철폐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실현시키려는 강령이다. 프롤레타리아계급에 대한 착취체제인 자본주의체제의 본질과 현 쇠퇴기의 본질을 밝혀내고,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도출해내고, 프롤레타리아 독재-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 등 혁명의 전 과정에 대한 혁명적 원칙을 정립하는 강령이다. 그리하여 혁명의 주체인 노동자계급에게 사회주의 혁명, 세계혁명의 전망을 제시하여 현실의 계급투쟁에서 자본가계급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무기로서의 역할을 하는 강령이다.

 

하지만 사노위 1년의 공동실천 과정에서 구성원의 다수는 사회주의 혁명정당이 아닌 이름 그대로 사회주의노동자 정당이라는 사회주의 좌파당 정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점은 3인안 강령에 대부분 반영되었는데, 평화적 이행까지 포함한 수권전략(혁명의 주체인 노동자계급의 물리력을 바탕으로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수립하는 전략이 아닌)과 자본주의 쇠퇴 불인정, 가짜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불분명한 입장, 부문운동의 병렬적 조합으로서 주체형성 전략 등을 내세움으로써 계급투쟁에서의 전략 부재를 드러냈다.

 

3인안은 결과적으로 강령이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 필수적인 무기가 되고, 직접적인 사회주의 정치활동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현실에서는 반자본주의 운동, 반신자유주의 투쟁 정도로 후퇴하고, 조합주의 또는 전투적 조합주의에 안주한 가운데 공허하게 사회주의와 사회주의 현장 활동만을 외치는 것 이상이 아닌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것은 결국 사노위의 성원들이 강령을 실천의 지침으로 생각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동의만하면 되는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사노위의 강령은 누구를 향한 강령이어야 했고, 3인안 강령은 누구를 향했기에 실천의 무기가 되지 못했나?

 

누구를 향한 강령이었나?

 

사노위의 강령은 사회주의 혁명당의 강령이기에, 혁명의 주체인 노동자계급을 위한 강령이어야 하며, 노동자계급에게 공개적으로 제출해야 하는 강령이다. 혁명 강령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인 부위인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건설될 강령이다. 또한 계급투쟁의 역사와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의 성과를 온전히 계승하고, 현실의 계급투쟁과 혁명적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하면서 건설되어야 할 강령이다.

 

그런데, 사노위는 강령토론의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을 향한 공개적이고 외향적인 토론 보다는 내부토론과 내부통일에 우선을 두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과의 상호작용과 검증과정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강령토론 과정에서 나타난 강령적 차이와 쟁점에 대한 첨예한 대립들은 찻잔속의 태풍에 그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조직 활동과 당 건설 경로에서 강령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른 조건들에 강령이 이용당하는 참담한 결과마저 초래했다. 1년간의 공동실천 과정에서 강령통일을 못 이루어 당연하게 조직을 해산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조직봉합과 조직보존 논리가 다수를 점해 사노위를 계속 유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사태는 애초에 강령을 만들 때 노동자계급에게 제출하는 강령을 만든 것이 아니라, 당 건설의 초기 주체들인 사노위 성원들만을 염두 해 둔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것은 현실로 나타났고, 사노위 강령토론의 목적은 노동자계급이 아닌 사노위안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는 것으로 전락하였다.

 

그렇다면 과연 사노위의 다수는 노동자계급의 어느 부위를 표현해주고 대표하고 있었을까? 사회주의 전통의 어느 지점을 계승하고 있었을까?

 

결과적인 이야기이지만, 사노위의 다수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부위를 표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조합주의와 전투적 조합주의를 대표하고 있었다. 그것은 현실운동의 직접적 반영이었다. 또한 정치사상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적대하는 사회주의 혁명전통을 계승하는 것이 아니라 사민주의 정도와 대당 하는 좌파 급진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래서 이것이 예상되었다면 사노위는 강령 조직의 통일2)을 통한 당 추진위 건설이 아니라 처음부터 강령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혁명당 노선과 사회주의 좌파당 노선으로 분화될 것을 상정하고, 내부의 통일이 아닌 노동자계급 지향적이고 외향적인 강령투쟁을 통해 두 개의 당, 또는 강령투쟁에 승리한 세력만이 당 건설을 추진하는 경로를 채택했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노위 과정 자체는 객관적 정세와 주체들의 상황을 반영하여 선택한 역사적 산물이었다. 따라서 주체의 상태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바로 그 주체의 상태를 진전시켜낼 수 있는 역동적 과정을 창출해 내고자 했던 것이다. 최소한 그럴 수 있는 조건은 존재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문제는 시작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시작에서부터 제대로 했는가 하는 것이다.

 

먼저 처음부터 강령통일이라는 조건을 내걸 때, 단순히 사노위 성원 다수가 선호하는 강령을 채택하는 것이 아니라, 강령토론과 공동실천을 통해 혁명적 실천을 담보하는 강령만이 당 추진위의 강령이 될 수 있다는 원칙을 세웠어야 했다. 그랬다면 강령과 조직노선이 분리되지 않고 한 가지로 인식되어 강령투쟁과 함께 실천력을 높이려는 노력들이 동시에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혁명당과 혁명 강령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일이고, 자신들의 연대와 자신들의 의식으로서만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려는 생각은 노동자계급의 의식 중 혁명적 계급의식이다. 혁명적 계급의식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라는 과거의 낡은 사상과 현실의 지배적인 관념들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러한 낡은 사상들을 실질적으로 극복한다는 것은 의식개조나 정신적 깨달음이 아니라 낡은 경제적 모순들을 물질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곧 자본주의 모순을 물질적으로 극복하는 일이며, 노동자계급의 혁명을 통해서만 극복이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혁명적 계급의식은 자본주의를 물질적으로 극복하려는 의식이며, 혁명을 가능케 하는 계급의식이다.

 

그런데 이러한 계급의식은 혁명시기가 아닌 일상시기에는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지배로 인해 쉽게 깨질 수 있고 일시적이며 결국 소멸해버리기 때문에, 혁명적 계급의식은 노동자계급의 모든 역사적·이론적인 성과들을 온전히 담아내는 강령을 가진 조직인 혁명 정당과 같은 물질적 토대를 갖춰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혁명당은 계급의식의 정치적 표현이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노동자계급의 혁명투쟁에 필수불가결하다. 혁명당은 전체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이라는 강령을 방어하면서 조직된, 노동자계급 가운데 정치적으로 가장 앞선 부분을 포함한다. 그래서 혁명당은 늘 프롤레타리아의 소수일 것이지만, 혁명당이 방어하는 공산주의 강령은 전체 노동자계급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

 

따라서 강령은 당을 구성하는 소수의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전체에게 제출되어야 한다. 이 원칙을 지키지 않는 강령은 결국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힘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무기로서의 강령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을 수동화 시키고, 노동자계급에게 명령하고, 노동자계급을 지배하는 강령일 수밖에 없다. 앞서 말했듯이 사노위의 일부 강령은 일차적으로는 사노위 성원들을 위한 강령이었다. 그래서 노동자계급에 의한 검증, 승인과는 무관하게 자신들의 조직통일을 위해 인위적으로 강령통일을 시도하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이러한 강령이 노동자계급을 수동화 시킬 가능성은 불을 보듯 뻔하다.

 

강령이 전체 노동자계급에 의해서 수행되는 강령이 되고, 자본주의를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무기가 되려면 어떤 강령이어야 하는가?

 

혁명 강령은 사회와 노동자계급 투쟁의 궁극적 목적을 이론적으로 진술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들에 선행하여 실제 발생한 것에 대한 세세하고 구체적인 분석이아. 그리고 그 분석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상황을 낳게 한 그 당시의 물질적인 특성들과 반드시 결부시켜 해명되어야 한다. 그래서 혁명 강령에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해방이라는 목적과 사회주의 혁명의 이론을 반드시 담아내야 한다. 또한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과 노동자계급의 정치, 경제, 사회적 상황을 그 물질적 토대로부터 분석하여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전망과 투쟁의 무기들을 제시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해방은 궁극적으로는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 과정에는 반드시 이행기가 필요하다. 이행기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표현된다. 사회주의 혁명이론은 바로 이행기 사회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창출하기 위한 혁명이론이다. 혁명이론은 자본주의의 타도와 노동자계급의 권력 장악으로부터 시작하여, 노동자계급의 직접권력인 노동자평의회가 전 사회를 지배하면서 자본주의 잔재를 일소하고 공산주의 사회로 이행하기까지 견지해야 할 원칙과 과정에 대해 수미일관하게 밝힐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일관된 강령의 목적과 이론이 없이 여러 이론들의 조합을 통해 자신들만의 특별한 혁명이론을 만들려는 시도는 결국 강령을 전체 노동자계급의 것이 아닌 소수 정치세력의 전유물로 만든다. 특히 한국과 같이 혁명운동의 단절과 정치사상적 토대가 빈약한 지역에서 건설 할 혁명이론과 강령은 더더욱 혁명운동의 세계적 흐름 속에서의 보편성과 일반성을 가져야만 한다.

 

그런데 3인안은 한국사회의 특수성에 대부분 기반을 두고 있다. 3인안은 강령건설의 원칙과 자신들이 계승하고 있는 혁명적 전통을 밝히지 않음으로 인해, 현재 세계 사회주의 혁명운동진영에서의 위치와, 자신들의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적 위치를 알 수 없게 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정치사상이 여러 이론들을 인위적으로 조합하여 그들만의 검증되지 않은 독자적 혁명이론을 만들어냈다는 근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혁명이론은 전 세계 노동자계급에게 보편적이어야 하고 국제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국제적 흐름에 조응해야 한다.

 

결국 이런 문제점들이 3인안의 강령 내용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명시’를 생략3)하고, ‘소련의 사회성격 규정을 유보’하고, 노동자평의회 권력이라는 계급투쟁의 위대한 성과물과 구체적 실체를 ‘대체권력이라는 추상으로 후퇴’시키고, 노동자계급의 국가권력 장악을 위한 집단적 계급행동 동력과 무장력 획득이라는 좀 과격하고 불편하지만 필수적인 강령적 요소를 ‘계급의 주체형성’, ‘경제-정치-사회-일상 삶의 전 영역에서 대체권력을 형성하기 위한 투쟁과 도전’이라는 듣기 좋은 공문구로 바꾸어 놓는 결과를 만들었다.

 

혁명가 조직과 사노위

 

혁명가들의 조직인 혁명당은 처음에는 노동자계급 안의 혁명적인 인자들만을 포함시키는데, 계급투쟁이 전면화 되고 계급의식이 혁명 강령에 가까워질수록 당은 소수의 혁명당이 아닌 프롤레타리아 혁명당으로 확장된다. 그런데 혁명적인 인자들의 소속척도는 사회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라서, 당의 강령에 동의하고 그것을 옹호하고 실천할 태세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혁명당에는 사회학적으로 노동자계급에 속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출신계급과의 단절을 통해서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이해관계와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지식인 등의 개인들도 속할 수 있는 것이다.

 

불행히도 사노위에서는 1년이라는 공동실천 기간 동안 강령통일을 이루어내지 못해 강령을 채택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회원들이 강령을 옹호하고 실천할 태세를 갖추었는지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강령 초초안 제출이전에 이미 강령보다 낮은 단계인, 조직의 결정사항과 정치방침 조차도 실천하지 않거나 거부하는 회원들과 운동의 흐름들이 나타났다. 조직문제는 강령이전에 사회주의자로서의 태세 문제를 확인해 주었다. 그래서 이후의 강령토론과 강령투쟁은 조직노선 투쟁의 기반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조직노선 투쟁은 길었으나 강령투쟁은 짧았다. 강령과 실천은 분리되었고, 조직문제는 과잉되어 강령을 뒤로 물러서게 했다. 결국 1년이라는 시한의 문제로 강령은 조직분리의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남은 세력들은 서로 이질적인 강령을 통합하여 조직문제를 덮어버리고 공생의 길을 가고 있다.  

 

위와 같이 사노위의 조직노선 투쟁의 본질은 가입원서 정도의 멤버쉽 확인 문제가 아니라, 혁명당 구성원으로서의 자격 즉, 강령에 동의하는 사회주의자인지 아닌지, 강령을 옹호하고 실천할 태세를 갖춘 사회주의 활동가(혁명가)인지 아닌지를 명확히 하는 투쟁이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는 사노위를 혁명가조직과 당적 조직으로 만들고자 했던 혁명당 건설노선과, 사노위에만 한정된 공동실천을 통해 정치조직 간의 형식적 통합과 낮은 단계의 강령통일로 단일조직 건설을 목표로 했던 노선과의 피할 수 없는 충돌이었다.

 

 

2. 5인안 강령의 탄생과 쟁점

 

정치노선으로 구성된 강령기초위원회

 

사노위는 계급투쟁과 사회주의 운동의 한국적 상황과 사노위 구성원들의 객관적 조건들에 근거하여 공동실천단계-당 추진위 -당 건설이라는 경로를 상정했다. 그리고 사노위안에는 사회주의 혁명당과 거리가 먼, 사민주의, 스탈린주의, 민족주의자들은 배제한 상태에서, 한국 사회주의 운동내의 대부분 경향들이 다양한 정치노선과 써클 구도 속(일부 써클 불 참여)에서 함께 하였다. 즉, 사노위가 써클 구도에서는 다수를 포함하지 못했지만, 정치경향 속에서는 가장 풍부한 다수의 경향을 참여시키며, 당 건설 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강령기초위원회를 처음 구성할 때는 사노위내 양대 정파였던 사노준과 사노련의 정치적 안배가 작용했으나, 강령실무위원까지 포함하는 강령기초위원회 구성을 마무리한 단계에서는 더 이상 사노준 대 사노련의 써클 구도가 아니라, 적어도 4개 이상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갖고 있는 정치 사상적 결집체4)의 내용과 형식을 갖게 된다.

 

강령기초위원회 초기과정에서 강령 초초안 마련을 위해 강령의 체계와 구성, 작성방법 등을 결정했던 당시에는 독자적인 강령제출이 가능한 정치노선이라면 어느 입장이라도 각자의 강령 초초안을 제출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사노위가 더 이상 써클 간의 연합이거나 정치적 노선이 없이 공동실천만을 하는 조직이 아니라, 명확한 정치적 입장을 갖는 조직을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강령 건설 또한 정치사상적 노선을 중심으로 내, 외부 토론과 대중적 검증과정을 거쳐 공개적이고 공식적으로 건설되어야 한다는 것을 공유했다.

 

당시의 이런 상황을 감안할 때 강령 초초안이 적어도 4개 이상으로 제출될 것이 예상되었다. 그리고 여러 개의 초초안이 제출되더라도 토론과정에서 각각의 초초안 내용을 기초로 하여 공통의 지반과 차이점을 확인하고, 쟁점사항은 토론을 심화시켜 공개적인 검증과정을 통한다면 강령통일을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었다. 공통의 지반과 차이점이 명확해질수록 강령통일은 사노위 구성원 전체의 일이 되고, 실천적 검증의 몫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건설할 강령은 조직원 숫자의 다수의 경향이 아닌, 정치 사상적 원칙의 명료함과 실천에서의 무기가 되는 강령만이 당 추진위의 강령으로 채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조직문제로 탄생한 5인안 강령

 

하지만 강령 초초안 작성을 막 시작하려던 시점에 사노위에서는 당 추진위 건설 과정에서 강령만큼이나 중요한 조직문제가 터지고 말았다. 소위 ‘가입원서 사건’이라는 웃지 못 할 사건이었는데, 당시에는 아직 사노위 전체의 문제나 중앙위의 문제로까지 확대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서울지역위원회에서는 가입원서 거부자(정확히 규정하자면 가입원서 작성과 반대에 대한 행동 자체를 거부하고 정치조직의 민주집중제 원리를 공식적으로 부정한 자)에 대한 징계 안이 상정되었다. 물론 가입원서를 둘러싼 여러 문제들 중 가입원서 작성이라는 형식문제와 집행과정에서의 소통부족은 문제를 더욱 부정적인 쪽으로 확산시키는 원인으로 작용 했다. 하지만 처음의 문제는 가입원서 작성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가입원서 거부흐름을 반조직적으로 촉발시킨 중앙상근자의 태도와 그를 비호하는 세력에 있었다. 왜냐하면 그 문제는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정치토론을 통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정치조직으로서는 당연한 멤버쉽 확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을 확산시킨 것은 써클주의 운동에서 나오는 온정주의 흐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않거나 묵인하는 사노준 출신의 3인을 제외한 강령위원 8인은 긴급회합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는 강령문제 이전에 정치조직의 기본이 되는 조직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 어떠한 강령토론이나 강령채택 과정에서도 결국 다수파의 논리와 써클주의 정치가 작용하여, 조직보존을 위한 야합이나 실천적 의미가 없는 강령 채택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그 후 1인은 독자강령 제출을 위해 그 모임에서 빠지고 나머지 7인은 조직문제에 대한 공유, 강령 원칙의 큰 틀에서의 동의를 기반으로 공동의 강령 초초안을 제출하기로 결정한다. 이것이 5인안이 탄생한 일차적 배경이다. 그리고 이러한 써클주의에 대한 우려는 2차, 3차 총회와 서울 지역위 임시총회, 강령토론의 과정에서 그대로 드러났고, 사노위 실패와 분리의 결정적 원인을 제공 하게 된다.

 

5인안 강령의 원칙

 

5인안은 강령 초초안을 작성하면서, 노동자계급에게 제출할 혁명 강령에서 고수해야할 원칙이 무엇인가를 밝히는 것이 중요했고, 이것으로부터 강령 작성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첫째, 혁명 강령에서는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을 명확히 규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서로 연결된 역사적이고 일반화된 모순과 그것에서 파생한 특수한 모순들의 고리를 찾아내어 구분하고 총체적으로 판단하여, 계급투쟁의 동학, 사회주의 혁명의 주체를 올바르게 인식하게 해주어야 한다는 원칙이었다.

 

둘째, 스탈린주의를 포함한 역사적 그리고 현존하는 사회주의를 참칭하는 국가자본주의, 기형적 사회 등 모든 반 노동자계급적 억압·착취체제를 사회주의로 인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노동자계급의 힘으로 타도해야 할 체제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셋째, 공산주의 사회로의 이행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필연성을 인정하며, 사회주의 혁명은 혁명당과 노동자계급의 의식적이고 조직화된 집단행동에 기반 해야 하며, 부르주아 계급의 폭력과 반혁명 책동에 대해 노동자계급의 무장력(계급폭력)으로 맞서야 하며, 부르주아 권력의 타도에서 무장봉기전술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넷째, 단계론을 거부하고, 혁명의 첫 단계에서부터 부르주아 권력의 즉각적 타도와 모든 국가기구의 파괴와 노동자평의회 권력을 확립하는 것을 경로로 명시하는 것이었다.

 

다섯째, 세계혁명과 혁명적 인터내셔널의 건설을 노동자국제주의의 당면 실천목표로 설정하는 것이었다.

 

여섯째, 위의 원칙에 입각한 노동자계급 권력 장악을 위한 이행요구(강령) 실천을 원칙으로 하는 것이었다.

 

위와 같은 강령의 원칙들은 이미 강령 초초안의 내용을 대부분 규정해주고 있었다. 따라서 강령 초초안 작성과 강령토론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강령의 원칙에 대한 동의였다. 강령문구와 전체 내용에 대한 동의는 1년이라는 짧은 기간에는 가능하지도 않고, 강제로 설득해서도 안 되는 문제였기 때문에, 토론과 실천을 통해 검증 받아야 할 앞으로의 과제로 상정했다. 그래서 원칙들에 대한 근거 제시와 세부적인 내용상의 불명료함 해소는 반드시 국제적인 흐름과 한국적 상황을 연계하여 풀어나간다는 원칙하에, 많은 부분을 앞으로의 과제로 남겨둔 채 강령 초초안을 제출하게 된다.

 

3인안 강령과의 사상적 차이

 

앞으로 사노위 잔류파의 통합강령이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3차 총회와 강령초안 토론을 거치면서 최종적으로 확인된 3인안과 5인안 강령초안의 사상적 차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련 사회의 성격 규정문제에서 3인안이 소련, 중국, 북한 등을 가짜 사회주의가 아닌 모종의 사회주의 국가로 규정하는 것은 과거의 역사적 사회주의에 대한 인식의 차이 정도가 아니었다. 이것은 앞으로 건설할 사회주의 국가의 상에 관한 문제이고, 여전히 3인안이 스탈린주의적 잔재와 노동자국가에 대한 환상(당과 관료가 주도하는 국유화, 계획경제에 대한 잘못된 환상)을 버리지 못해 나타나는 사상적 혼란스러움이기 때문에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문제였다. 우리는 소련사회에 대해 국가자본주의라고 규정하면서, 가치법칙과 계급투쟁의 고려를 통해 소련사회를 분석하려 노력하고 있다. 여기에는 맑스주의 혁명적 전통에 따라 이행기 문제를 판단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물론 아직까지 명료하지 못한 측면들은 앞서 말했듯이 앞으로의 과제로 남아 있다. 하지만, 혁명 강령의 정체성을 나타내주는 이행기 문제를 퇴보한 노동자국가론이나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실패한 모종의 노동자국가로 판단하는 사상들은 우리와는 현실 투쟁에서부터 적대적5) 일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적당한 타협이나 강령상의 이견 병기로 넘어가려는 행위는 정치적 야합일 뿐 역사와 노동자계급에게 정직하지 못한 태도이다.

 

소련과 북한, 중국, 그리고 쿠바와 베네수엘라 같은 국가자본주의 착취체제에 대해 명확한 입장이 없거나 그들을 동의해주는 세력들은 결코 노동자국제주의를 온전히 지켜낼 수 없으며, 혁명적 인터내셔널의 건설에서도 당연히 제외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강령에서 가짜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입장을 명확히 하지 않아도 현실의 실천운동에서 큰 문제가 없으니 함께 하자고 하는 것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기만이자, 강령과 실천을 분리하는 작태이다. 카스트로, 차베스를 묵인하면서 쿠바나 베네수엘라에서 활동 중인 혁명적 공산주의 세력과 연대할 수 없으며, 중국의 국유화 된 산업 체제를 보호하자는 입장을 갖고 있는 한 중국노동자들의 정부와 노조의 극악한 탄압을 넘어선 자립적 투쟁에 대해 지지할 수 없다.     

 

둘째, 자본주의 쇠퇴 규정의 문제는 현재 자본주의 체제의 끝 모를 위기의 본질을 밝혀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삶의 문제이고, 계급투쟁의 주체들이 처해있는 객관적 조건과 전망에 대한 문제이다. 이것은 결국 노동자계급 미래의 문제, 혁명의 문제이다. 3인안처럼 자본주의의 상승기/쇠퇴기 개념 없이 단순한 주기적 위기론, 공황론 정도로 자본주의 위기상황을 판단한다면, 쇠락해가는 자본주의의 야만성과 반동성, 기생성과 부후성의 근원을 밝혀낼 수 없다. 더욱이 이것을 혁명적으로 극복할 대안(이행 프로그램)을 그 물적 토대로부터 도출해낼 수 없다. 또한 쇠퇴하는 자본주의 하에서 자본의 위기전가 상황을 맞이하여 생존권의 위협과 급격한 생활수준의 하락에 직면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생존조건이 계급의식과 조직의 상태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분석할 수 없다. 낡아서 소멸하는 운동과 새롭게 창출되는 계급운동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분출되고 꺼져버리는 계급투쟁 속에서 혁명적 전망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 쇠퇴 개념을 무시한 채 이들이 제시한 전망이라는 것은 고작 과거운동의 혁신이나 계급의 재조직화(주체형성)라는 구태의연하고 앙상한 실천적 전망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자본주의 쇠퇴개념에 대한 반정립에 치중한 나머지, 자본주의 쇠퇴의 시작 (1914년, 1979년대, 1998년 이후 등)이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에 대한 문제제기나, 쇠퇴의 여러 근거에 대한 연관성 부족에 대한 비판을 넘어, 자본주의 쇠퇴 개념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최근 경제학자들6)과 자본가들까지 자주 사용하고 있는‘자본주의 쇠퇴’라는 개념을 계속 부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것은 모든 것을 ‘자본주의 위기’라는 말로 치환시키게 되어, 사회주의 혁명의 물적 토대를 스스로 부정한다는 오해를 사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공산주의 혁명은 세계적이어야 하고, 세계적이지 않으면 그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 또한 세계혁명은 새로운 인터내셔널 즉 세계혁명당이 건설되어야 실현 가능하다. 세계혁명과 세계혁명당 건설의 관점에서 강령은 세계적으로 통일된 강령이 필요하며, 이것은 처음에는 맑스주의 전통을 계승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혁명적 계급투쟁을 벌이고 있는 전투적 노동자계급들을 포괄할 수 있는 기준강령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이 기준강령에는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혁명적 원칙들이 담겨있어야 한다. 일국의 특수성을 반영한 국가별 지역별 당이 존재하는 한, 처음에는 각 당의 강령이 별개로 존재하겠지만 세계혁명당의 강령과 조직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국 혁명당의 강령과 조직은 세계혁명당의 기준강령과 통일되어야 하며 세계혁명당의 건설에 복무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원칙에서 벗어나 불분명한 자신들만의 사상과 경험으로 일국의 강령을 독자적으로 만들려는 시도들은 세계혁명의 관점을 가질 수 없으며, 노동자국제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3인안은 강령토론의 과정에서 인터내셔널의 관점이 아닌 일국의 독자적 강령과 당 건설을 상정하고 있음을 드러냈고, 이것은 일국 당들의 연합형태를 인터내셔널로 규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맑스주의를 계승한다고 하면서도 자신들이 계승하는 정치노선을 밝히지 못한 채 정체불명의 혼합된 노선과 다른 노선에 대한 반정립으로 일관해 왔기 때문에 맞이한 당연한 귀결이었다. 이것은 사노위 내에서의 연방주의적 조직관을 인터내셔널 건설에까지 적용한 정체불명의 사상적 표현에 다름 아니었다.

 

강령토론의 원칙과 실천적 강령채택의 실패

 

우리는 강령을 토론하고 비판할 때 원칙과 사상적 근거를 중심으로 토론을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계급투쟁의 위대한 역사와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의 집약인 강령의 문구들은 그 만큼 함축적이고 최선의 원칙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선 강령을 건설하는데 있어 고수한 원칙과 역사적 전통을 밝혀내고, 그것으로부터 작성된 강령의 내용과 현실운동에의 적용 등을 토론하는 것으로 강령토론이 진행되어야 했다.  

 

혁명적 사회주의 원칙과 전통에 동의 한다는 것은 바로 강령의 원칙에 동의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강령토론은 강령의 사상적 근원을 밝히고 현실 적용에서의 원칙을 토론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런데 사노위에서의 강령토론은 원칙의 토론이 아닌 강령의 문구나 주제별 토론이 되고 말았다. 실천의 적용에 대한 토론이 아니라 현재의 운동에 대한 유용성에 대한 토론이었다. 

 

다시 강조하지만 강령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라서 그 원칙의 동의에서부터 시작하여 실천의 무기로 작용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강령의 문구 하나하나는 계급투쟁의 발전과 함께 끊임없이 검증되고 창조되어야 할 과제이지 진리의 담지서가 아니다. 실천을 강제하는 것은 강령의 명료한 원칙과 그에 입각한 풍부한 전술과 지침이지, 강령의 친절함과 좋은 글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노위 강령토론 5개월은 강령의 사상적 원칙에 충실한 토론도, 각 쟁점의 해소를 위한 심화토론도, 현실 운동의 무기가 될 수 있는 실천적 토론도 되지 않은 채, 그저 일정을 채우기 급급하거나 사상적으로 전혀 다른 강령 안을 조직보존을 위한 여러 가지 압력으로 통일시키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당시의 사노위 조직 상태는 단일 강령이 만들어지고 강령이 채택된다하더라도, 회원들의 강령적 실천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강령도 당 건설도 앙상한 형식만이 남을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강령의 채택은 강령의 내용에 대한 동의만이 아니라 강령을 실천적으로 결의하고 강령에 입각해 활동할 진정한 당원의 자격을 부여하는 채택이어야 했다. 강령과 규약을 승인하는 순간, 현재의 사노위보다 2~3배 이상의 정치의식 상승과 활동력이 필요할 것이며 강령적 실천과 규약 준수가 조직의 모든 규율을 담보해주는 것이어야 했다. 왜냐하면 사노위가 8개월을 넘어서면서는 출범초기에 보여준 회원들의 활동력과 결합도는 현저히 떨어져 있었고,  그나마 남아있던 이질적인 조직문화 사이의 건강함 긴장감도 서로에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바뀌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조직을 살리는 길은 오직 강령의 실천적 채택 뿐 이었다.

 

하지만 다수파는 상당한 고통과 출혈이 따르겠지만 당 건설을 위해 감내해야만 하는 강령의 실천적 채택(복수의 안이 나올 경우 각자의 강령 안을 실천적으로 승인하는 것)이라는 정도를 걸은 것이 아니라, 강령의 인위적 통일을 통한 형식적 채택과 조직보존에 중심을 두면서 우리들 자신과 노동자계급에게 약속한 당 건설 경로를 아무렇지 않게 바꾸어 버렸다.

 

다수파는 처음부터 실천적 강령의 채택이나 조직의 질적 전환을 통한 당 추진위 건설은 염두 해 두지 않았거나 중도에 포기한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강령 초초안 작성이전 가입 원서 건을 필두로 하여 연쇄적으로 조직문제가 발생했을 때 적극적으로 문제해결을 위해 나서거나 희생을 감수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책임을 방기한 채 무마하거나 통합하려고만 했던 것이다. 이런 태도는 사상적 불명료함과 부분적 실천의 나열과 조직과 투쟁에서의 연방주의적 사고들로 이루어진 3인안 강령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3. 결론

 

강력한 정치조직은 합력의 정치, 통합지도부의 건설이 아닌 강령적 통일, 강령적 행동일치에 있다. 강령의 수준을 낮추어 통일을 꾀하는 것은 혁명적 전통과 현실의 혁명적 사회주의운동을 져버리는 일이다. 그런데 사노위 다수파는 조직유지를 위해 강령의 원칙, 강령토론의 원칙, 강령채택의 원칙, 혁명당 건설의 원칙 모두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오로지 조직유지와 형식적 당 추진위 전환을 위해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을 배제7)시켰다.

 

결국 그들이 간과한 가장 큰 오류는 당과 강령은 하나이고 유기체와도 같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이다. 이 점을 무시하고 강령의 인위적, 기술적 통합을 시도한 것은 강령과 실천을 분리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존재했던 모든 혁명당 조직에서 강령은 실천의 지침이자, 당원들과 노동자계급에게 무기로 인식되어왔다.

 

강령에 사회주의혁명이 목표로 설정되어있다면 그 강령을 옹호하는 모든 당원들은 현실운동에서 실제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운동을 해야 한다. 조합주의, 관료주의 운동을 넘어서는 운동을 강령에서 제시하고 있다면 반드시 조합주의와 관료주의를 타도하고 새로운 운동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강령에 입각한 활동인 것이다. 이런 태세와 이런 조직구조가 갖추어지지 않은 조직은 사회주의자 조직도, 혁명가조직도 아니며, 더욱이 노동자계급의 당이라는 이름을 절대 붙여서는 안 될 후진적 정치 써클일 뿐이다.

 

혁명당 건설은 바로 이러한 강령과 조직이 하나로 결합하는 조직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자, 강령이 노동자계급과 상호작용하며 계급투쟁의 무기가 되는 과정이다.

 

혁명당 건설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다. 계급의 앞선 부위 ,혁명적 부분이라 자임하는 우리가 먼저 강령을 건설하고 강령에 입각한 활동을 통해 혁명당의 조직체계를 하나하나 튼튼하게 세워나간다면, 그것이 노동자계급에 깊이 뿌리 내린다면, 당은 노동자계급에게 바쳐져 노동자계급의 당이 될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부르주아 계급에게 실질적 위협이 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당이 되는 일은 우리의 명확한 정치적 입장과 전망이 정세의 고양과 결부된 대대적인 계급투쟁과 만날 때이다. 혁명을 향한 모든 행동은 프롤레타리아 혁명당의 강령과 그것을 행동에 옮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적 계급의식에 달려있다.

 

쇠락해가는 자본주의, 야만이냐 혁명이냐의 시대, 노동자계급의 시대적 필요에 부응하는 혁명당 건설에 즉각 착수하자!

 

노동자계급에겐 무기가 되고 자본가계급에겐 실질적 위협이 되는 공산주의 혁명 강령을 건설하자!

 

 

각주)

1) 민주노동당은 최근의 ‘사회주의 가치 삭제’라는 강령개정을 통해 사회주의적인 요소도 제거했지만, 원래부터 사회주의 혁명정당과는 거리가 먼 정치적으로는 좌파민족주의, 사민주의 정당이었다.

2) 사노위는 당 건설 추진위 조건으로 강령, 전술, 조직상의 통일을 내걸었다. 하지만 전술은 강령의 원칙에 복무하는 것이기 때문에 강령통일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공동전술에 불과하다.

3) 초초안 단계에서 생략되어 있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은, 초안단계에서는 내용이 관철된 것이 아니라 형식상의 외삽 형태로 포함되었다.

4) 강령기초위원회는 강령기초위원과 강령실무위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총 11명이었다. 강령위원회 구성은 사노준 출신 3명, 사노련 출신 3명,개별 활동가 5명으로 이루어 졌는데, 두 써클 소속이 아닌 5명은 레닌주의, 좌익공산주의, 트로츠키주의, IBT(트로츠키주의 일부) 등 다양한 정치 노선을 갖는 개인들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다함께(전지윤, 사노위 실패가 좌파에게 보여 주는 것, <마르크스21>, 10호, 2011년 여름)에서 규정한 사노련파 대 사노준파의 구도는 강령기초위원회에서는 이미 존재하지 않은 것이다.

 

5) 사노위 신문에서는 리비아 사태를 두고 이미 두 가지의 적대적 경향이 동등하게 게재되었다. 이것이 자국 상황이라면 둘의 입장은 피할 수 없는 적대적인 입장인데도 같은 조직을 유지한다는 것은 부르주아 정치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여기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혁명과 인터내셔널의 건설이라는 관점에서 서로 적대적인 입장이 자기 일이 아니라서 자국중심으로 아무렇지 않게 동거를 하면서도 인터내셔널을 외친다는 것은 인터내셔널조차 희화화 시키는 일이다.

 

6) 맑스주의 경제학자인 김수행 교수조차도 자본주의 쇠퇴라는 용어를 직설적으로 사용한다. <경향신문> (2011년 5월24일) 김수행 칼럼 -쇠퇴하는 자본주의에서 “이제 자본주의는 빈부격차와 계급대립의 심화, 국제협력의 붕괴, 제국주의에 대한 제3세계 인민의 저항, 민주주의의 약화 등으로 쇠퇴하지 않을 수 없다.” 고 주장했다. "

7)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사노위 내 의견그룹)은 사노위의 해산을 선언했으므로 사노위 출범정신을 지켰고, 잔류파들은 해산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노위를 유지시켰으므로, 사노위의 공과 실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진영을 배제시킨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