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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행, 1632일

만행, 1632일

- 재능교육 연대시


... 1632일!

이 숫자는 무엇인가?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노동자복직투쟁으로

기네스북에 오른 기록인가?

1632일!

해와 달이 바뀌고 눈비가 내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스물 두 번 바뀌고

6년이라는 시간이 그저 가뭇없이 지나가는 기억인가?

1600일이고 1700일이고, 6년이고 7년이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어질 끝없는 세월일 뿐인가?

아니, 세월의 만행인가?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르는 학살적 만행인가?


진정 인간으로 살아간다면

인간의 머리로 이 만행을 한 번 생각해보라

1632라는 숫자는 결코 적은 수가 아니다

소리 내어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쁘고

세다가 세다가 잊어버릴 만큼 많은 숫자이다

이것을 입에 올리기는 쉬워도

이것을 천이 넘는 기록으로 또다시 넘어선다는 것은

그만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지난한 일이다

반복하면 반복할수록 당신들의 뇌에는

일천육백서른두번 깊고도 깊은 상처의 고랑이 파이고

간절히! 이루어질 것을 바라는 기도만이

저 무고한 하늘에 구름으로 떠돈다

그런데, 백일 기도 천일 기도가 지나도

여전히 길거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있다

2007년 12월 21일부터,

서울시청앞 재능교육농성장

조그만 천막 한 개를 치고 비닐을 덮어쓰고

철거계고장과 함께, 회유와 협박과 함께

자꾸만 뜯기고 박살당하는 시멘트바닥에서

먹먹하게 나뒹구는 가슴들이 있다

백일을 열여섯번이나 지난 천일 기도면

그 뜻이 하늘에 닿아 하늘을 울리고도 남으련만

도대체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있다

이 몸서리치는 만행의 원흉은

재능교육이다

재능교육은 어떤 곳인가?

교육의 기본은 인권을 가르치는 것인데

재능은 무엇을 가르치는 곳인가?

돈을 벌기 위해 그냥 학습지 장사를 하는 곳인가?

특수고용직이라는 선생님들을 모집해서

한 달 월급으로 560원을 주고 수수료를 챙기는 곳인가?

통조림을 만드는 곳도 아니고 자동차를 생산하는 곳도 아니고

학습지라는 것에는 교사도 있고 노동자도 있고 인권도 있을텐데

부당한 계약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교사들을 단칼에 해고시키는 재능교육

신고필증까지 받은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고

단체교섭마저도 거부하는 재능교육

그러면서도 방송국과 대학까지 거느리고

버젓이 교육이라는 이름을 팔고 있는

반교육, 반인권 자본가는 누구인가?



과연 당신은 얼마나 출중한 재능을 가진 사람인가?

그렇다면, 재능 있는 당신에게 우리들이 묻겠다

당신이 걸어놓은 저 간판, 꿈은 이루어진다를 읽으면서 묻겠다

‘우리는 약속합니다.

전 세계 모든 어린이들이 자신의 꿈을 향해 더 멀리 나아갈 수 있도록

재능교육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겠습니다.’

저 약속에는 사람의 인권은 들어있지 않은가?

저 꿈에는 누구나 지녀야할 사람의 권리는 포함되지 않는가?

약한 사람의 권리부터 지켜주는 것이 인권이고 그것이 교육인데

당신은 조난당한 배에 혼자 올라탄 돈 많은 사장인가?

아홉을 가졌으면서도 나머지 한 개를 채우고자하는 욕심쟁이인가?

교사들을 시켜 아이들의 주머니를 털어내는 힘 센 사람인가?

재능교육, 당신은 우선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해주어야만 한다

적어도 당신은 교육의 탈을 쓰고 이렇게 더러운 짓을 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아!

쓸데없는 재능을 배우려고 노력하지 말아라

사람들아, 이제는 1632일에 귀를 기울이는 재능을 지녀라

단단한 돌맹이 마저 거리에 던져놓으면

추위에 얼어붙고 땡볕에 녹아 바람에 부서지고 말 1632일

그 수많은 날들을 아이들 곁에서 떠나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이 비정한 세상의 재능을 염려하라

그리고, 누구든지 재능선생님들의 신발을 신어보아라

그리고, 누구든지 그 신발을 신고 1632일을 걸어보아라

단 하루라도 거리에 앉아 절규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정말로 재능 있는 교육이 무엇인지를 자본가들에게 알려주어라

참세상이 어떤 것인지를 비열한 자본가들에게 가르쳐주어라.

 

 

-임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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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남용 - 오세철

진보의 남용

 

-오세철

 

 

모든 일이 한꺼번에 벌어져 난마처럼 얽혀 있다. 한편에서 통합진보당 당원명부 압수수색이 방송 매체의 화면을 뒤덮는 동안, 다른 한편에선 ‘노동해방실천연대’ 사회주의자들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긴급체포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이루어졌다. 그런가 하면 22명의 쌍용차 노동자의 죽음을 추모하는 국민대회를 연 대책위를 사법처리하겠다는 검경의 엄포가 쌍용차 노동자들을 두 번 죽이고 있다.

이것이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소리 높여 외쳐대는 이른바 선진자본주의 국가 대한민국의 벌거벗은 모습이다. 그 틈을 비집고 이명박 정권 말기의 공안정국을 향한 발톱이 다시 흉측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보수·진보 언론을 막론하고 시대착오적인 진보재구성 논쟁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있다.

 
 

 

이 모든 사태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은 역사적이고 상대적 의미를 갖는 ‘진보’ 개념을 상투적으로 남용하는 문제이고, 형식으로서의 절차적 민주주의와 내용으로서의 실질적 민주주의를 분리하는 비변증법적 관념론의 문제이다. 마르크스가 160여년 전 <공산주의선언>을 썼을 때, 그는 자본주의를 진보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자유로운 개인이 연합하는 새로운 생산양식의 건설을 인류의 물질적 필연성으로 보았다. 1차 세계대전을 정점으로 쇠퇴하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길목에서 혁명가와 노동계급은 “사회주의냐, 전쟁이냐”를 외쳤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지금 세계자본주의는 그 모순이 극에 달해 ‘야만인가’ ‘사회주의인가’를 선택해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자본주의 쇠퇴라는 객관적 사실과 노동계급의 억압을 뚫고 솟구치는 투쟁을 목도하면서 한가롭게 진보를 외치거나 새로운 진보를 내세우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다.

민족주의는 사회주의와 대립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사회주의세력이 조국의 깃발을 들고 전쟁터에 수많은 노동자들을 몰아넣어 살해했을 때, 그 후 나치즘과 스탈린주의가 ‘사회주의’ 탈을 쓰고 노동계급을 억압·착취했을 때, 민족주의는 노동계급의 국제주의를 가로막는 반혁명적 이데올로기가 됐다. 통합진보당은 강령에서 사회주의를 삭제함으로써 스스로 ‘진보’의 깃발을 내렸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진보라 부르지 않는다. 비당권파가 사회민주주의적 색깔을 일부 지녔다고 해도 그들 역시 진보로 부르기 어렵다. 민족주의와 사회민주주의는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일부 진보논객이 ‘민족해방’과 ‘노동해방’을 말하는 세력을 민주주의를 외면하는 추상적 혁명주의로 매도하는 논거와 태도는 두 가지 점에서 해괴한 논리다. 첫째, 민족주의는 21세기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더 이상 혁명주의가 아니다. 민족주의는 오히려 자본주의를 공고히 해 왔고, 파시즘의 위험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노동자 민주주의는 전혀 다른 개념이고 대립한다는 사실이다. 혁명주의는 형식적 민주절차만 강조하는 부르주아 독재에 반대하고 형식과 내용이 통일되는 노동자 민주주의를 옹호한다. 이번 통진당 사태는 노동자 민주주의를 저버렸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고 혁명주의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음을 밝혀야 한다.

물론 우리는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희대의 악법인 국가보안법의 폐지를 주장한다. 모든 공안 탄압을 반대하고 맞서 싸워야 한다. 그렇다고 선거를 통해 의회에 진출하려는 정치세력의 선거부정을 묵과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밑으로부터의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하며 막바지에 다다른 자본주의를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의 건설로 나아가야 한다. 이른바 ‘진보의 재구성’이란 이름으로 개량주의와 혁명주의를 구분하고 자본주의의 틀 안에 노동계급을 가두는 개량주의를 넘어서는 혁명적 실천을 모색할 때다.


 

 

<경향신문 오피니언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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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글터] 노동자의 삶과 시와 노래

우창수, 조성웅 동지와 해방글터 노동자 시인들의 노고에 많은 관심과 후원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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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라 하찮은 인간들아3 : 사랑이 없는 사람

사랑이 없는 사람

 

당신에게 결혼이라는 법의 족쇄를 채우는 것은 바로 당신의 음란한 마음과 성적 무책임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전혀 깨닫지 못한다. 당신은 자신이 중요하지 않고, 비참하고, 악취를 풍기고, 무력하고, 경직되어 있고, 생기가 없고, 공허하다고 느낀다. 당신에게는 여자가 없다. 있다고 쳐도 자신의 '남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오직 성교만을 원한다. 당신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모른다. 당신은 변비에 걸려 있고 변비약을 복용한다. 당신은 악취를 풍기고 피부는 끈적끈적하다. 당신은 팔에 안겨 있는 자기 아이를 느끼지 못하고, 그래서 아이를 때려도 되는 강아지처럼 다룬다.

 

당신은 평생 성적 무기력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것이 당신의 모든 사고를 점령했으며 당신의 일을 방해했다. 아내는 당신이 사랑을 줄 수 없었기 때문에 떠났다. 당신은 공포와 신경질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괴로워한다. 당신의 생각은 성욕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누군가는 당신에게 당신을 이해하고 돕고 싶어 하는 섹스 이코노미(성 경제)에 대해 얘기해준다. 그것은 당신이 낮 동안에는 성에 관한 생각에서 해방되어 일을 할 수 있고, 밤에는 성욕이 살아 있을 수 있도록 해준다. 그것은 당신의 품안에서 아내가 절망적이 아니라 행복한 모습일 수 있도록 해준다. 그것은 당신의 자식들이 창백한 대신 혈색이 좋고, 잔인한 대신 사랑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러나 당신은 섹스 이코노미에 관해 듣고는 이렇게 말한다. "섹스가 전부는 아니다. 인생에는 다른 중요한 것들이 있다." 하찮은 인간이여, 바로 그게 당신의 모습이다.

 

또는, 당신은 '마르크스주의자'이고 '프로 혁명가'이며, '자칭 세계 무산계급의 지도자'이다. 당신은 세상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싶어 한다. 기만당한 대중은 당신으로부터 도망친다. 당신은 그들을 뒤쫓으며 고함을 지른다. "서라, 서, 이 무산계급 집단아! 정말이지, 내가 당신들의 해방자라는 것을 알 수 없다는 말인가! 자본주의를 타도하자!" 하찮은 혁명가여, 나는 당신의 대중에게 말한다.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보잘것없고 불행한 삶을 보여준다. 그들은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 차 귀를 기울인다. 그들은 떼 지어 당신의 조직에 가입하는데, 그곳에서 나를 발견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당신은 "성욕은 소시민의 조작이다. 중요한 것은 경제 요인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당신은 사랑의 테크닉에 관한 '밴 드 벨드'의 책을 읽는다. 당신은 어떤 위대한 인간이 경제 해방에 과학 원리를 부여하기 시작할 때, 그를 굶주리게 했다. 당신은 삶의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을 반대하는 진실이 들어오는 것을 애초부터 막았다. 이러한 그의 첫 시도가 성공했을 때는, 당신이 행정을 인수했고 두 번째 기회에는 그것을 억압했다.

 

처음에는 위대한 인간이 당신네 조직을 해산시켰다. 두 번째에는 그가 그 사이에 죽어서 더 이상 아무것도 당신에게 반대하는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그가 당신의 일에서 가치를 창조하는 살아 있는 힘을 발견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신은 그의 사회학이 당신의 정부로부터 사회를 보호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신은 전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경제 요인'들을 갖고도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다.

 

위대하고 현명한 인간은, 인생을 즐기고 싶다면, 경제 상태를 개선해야 한다, 배고픈 사람들은 문화를 조성할 수 없다, 모든 인생의 조건들은 예외 없이 여기에 속한다, 당신은 모든 압제자로부터 자신과 자신의 사회를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을 당신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혼자서 죽도록 일했다. 이 진실 되고 위대한 인간은 당신을 계발하려 하면서 중요한 실수를 저질렀다. 그는 해방에 대한 당신의 능력을 믿었던 것이다. 그는 당신이 일단 싸워서 획득하면 자유를 단단히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또 다른 실수를 저질렀다. 무산계급인 당신으로 하여금 '독재자'가 되게 하는 실수를.

 

하찮은 인간이여, 당신은 이 위대한 인간에게서 나오는 풍부한 지식과 사상을 어떻게 했는가? 그 모든 것 가운데 오직 한 단어만이 계속 당신의 귀에 울리고 있었다. 독재! 훌륭한 정신과 커다랗고 따뜻한 가슴이 쏟아낸 그 모든 것 중에서 한 단어만 남아 있었다. 독재. 당신이 다른 모든 것들은 버렸다. 자유, 명석, 진실, 경제적인 노예 신분에 대한 문제의 해결책, 미리 생각하는 방법 등등 모두 버렸다. 좋은 의미였기는 하지만 불행하게 선택된, '독재!'라는 단어 한 개만이 당신에게 박혀있었다. 당신은 위대한 인간의 이 작은 실수를 이용해 거짓, 박해, 고문, 완강한 방해자들, 교수 집행인, 비밀경찰, 스파이 행위, 고발, 제복, 육군원수, 훈장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체제를 건설했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들은 버렸다.

 

하찮은 인간이여, 당신은 자신이 어떻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기 시작하는가? 아직은 아닌가? 그렇다면 다시 해보자. 당신은 사랑과 인생에서 행복의 '경제적인 조건들'을 '기계'와 혼동한다. 인류의 해방을 '위대한 정부'와 혼동하고, 수백만 명의 봉기를 대표 행렬과 혼동하고, 사랑의 해방을 독일에 와서 손 댄 모든 여자에 대한 강간과 혼동하고, 빈곤의 제거를 가난하고 약하고 무력한 사람들에 대한 박멸과 혼동하고, 유아 돌보기를 '애국자 양성'과 혼동하고, 가족계획을 '열 명의 자녀를 둔 어머니'에게 주는 훈장과 혼동한다. 당신은 열 명의 자식을 낳은 어머니에 대한 이 아이디어를 스스로 묵인하지 않았던가? 다른 나라들에서도 역시 '독재'라는 불길하고 짧은 단어가 당신의 귀에 쟁쟁했다. 그곳에서 당신은 독재를 휘황찬란한 제복 속에 끼워 넣었고, 당신을 제3제국으로 인도하고 6천만 명의 동포들을 무덤으로 이끈 하찮고 무능력하며 신비론주의자이고 새디스트적인 관리를 당신 한가운데서 만들어냈다. 그리고 당신은 계속 소리를 지른다. "만세, 만세, 만세!"

 

별 볼일 없는 인간이여, 그것이 당신의 본 모습이다. 그러나 아무도 감히 당신이 어떻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별 볼일 없는 인간이여, 사람들은 당신을 두려워하면서도 당신이 시시한 사람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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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라 하찮은 인간들아2 - 당신은 솟아오르는 것이 두렵다

당신은 솟아오르는 것이 두렵다

 

하찮은 인간이여, 당신은 하찮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는 당신에게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과 '황홀'과 '득의만면'과 '고양'의 순간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당신은 더욱더 높이 솟아오르고 커다란 기쁨으로 더욱더 앞으로 나아갈 정력을 갖고 있지 않다. 당신은 솟아오르는 것이 두렵고 높이와 깊이를 두려워한다.

 

니체는 오래 전에 당신에게 이 얘기를 훨씬 더 잘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유는 말해 주지 않았다. 그는 내면의 인간을 극복하기 위하여 당신을 초인간으로 변화시키려 했다. 그의 '초인'은 당신에 '히틀러 총통'이 되었다. 그리고 당신은 여전히 '인간 이하의 사람'으로 남아 있었다. 나는 당신이 인간 이하의 사람이기를 그만두고 당신 자신이 되기를 바란다. 당신이 읽는 신문이나 타락한 이웃에게서 듣는 조잡한 의견 대신에 진정한 자신이 되기를.

 

나는 당신이 마음 속 깊이에서 자신이 정말로 어떤 존재이고 어떤 모습인가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안다. 당신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사슴이나 신 또는 시인이나 현자와 같은 모습이다. 그러나 당신은 자기가 재향군인회, 볼링클럽 또는 3K단의 한 일원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당신은 이것을 믿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이 얘기를 들었다. 25년 전 독일의 하인리히 만, 미국의 업톤 싱클레어와 도스 파소스, 그리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그러나 당신은 만이나 싱클레어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당신은 오로지 권투 선수권 보유자와 알 카포네만을 알고 있다. 당신은 도서관이나 언쟁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의심할 여지없이 언쟁을 선택할 것이다.

 

당신은 인생에서 행복을 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척추나 생명을 대가로 바쳐야 할지라도 안전이 더 중요하다. 당신은 행복을 창조하고 즐기면서 보호하는 방법을 결코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정직한 사람의 용기를 알지 못한다.

 

하찮은 인간이여, 당신이 어떤 모습인가를 알고 싶은가? 당신은 라디오의 변비약과 치약, 냄새 제거 약 광고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당신은 그 광고 속의 선전 음악은 듣지 못한다. 당신은 당신의 귀를 사로잡도록 만들어진 그러한 것들의 무한한 어리석음과 메스꺼운 악취미를 인지할 수가 없다. 나이트클럽에서 사회자가 당신에 관해 하는 농담들을 주의 깊게 들어본 적이 있는가? 당신과, 그 자신과, 그 하찮고 불행한 전 세계 사람들에 대한 농담들을. 당신네 그 변비 약 선전을 들어 보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존재이고 어떤 모습인가를 알 수 있다.

 

하찮은 인간이여, 들어 보라. 인간 존재의 불행은 그 모든 나쁜 것들 때문에 돋보이게 된다. 당신의 모든 하찮음 때문에 당신 운명의 개선에 대한 희망이 더욱더 멀어지게 된다. 하찮은 인간이여, 이것이 가슴 찢어지는 듯 한 깊은 슬픔의 원인이다.

 

당신은 이 슬픔을 느끼지 않기 위하여 서투르고 하찮은 농담들을 하면서, 그것을 '서민의 유머'라고 부른다. 당신은 당신 자신에 대한 농담을 듣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열심히 웃는다. 당신은 자신이 스스로를 비웃기 때문에 웃지는 않는다. 당신은 하찮은 인간을 보고 웃지만, 그것이 곧 자신을 비웃는 것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당신을 비웃는다는 것을 모른다. 수백만의 하찮은 인간들은 사람들이 자기를 비웃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찮은 인간이여, 어째서 사람들이 그 모든 세월 동안 내내 당신을 그처럼 공개적으로 심술궂게 즐거워하면서 열심히 비웃는 것일까? 영화 속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우습게 보이는지 한번이라도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당신을 몹시 진지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나는 어째서 사람들이 당신을 비웃는가를 말해 주겠다.

 

자랑스러운 명사수가 시종일관 과녁 한복판 밖에다가 명중시킬 수 있는 것처럼, 당신의 사고는 한결같이 진실을 놓친다. 그렇다고 생각지 않는가? 나는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이겠다. 당신의 사고가 진실을 향하기만 했더라면 오래 전에 자기 존재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신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것은 모두 유대인들의 잘못이다"라고.

 

내가 묻는다. "유대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유대인의 피를 가진 사람들"이 당신의 대답이다. "유대인의 피와 다른 피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당신을 당황하게 한다. 당신은 망설이고 어리둥절해져서 대답한다. "유대 민족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묻는다. "무엇이 민족인가?" "민족? 아, 그건 간단해. 독일 민족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대 민족도 있다." "유대 민족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은 무엇인가?" "글쎄, 유대인은 검은 머리털에 긴 매부리코와 예민한 눈을 갖고 있다. 유대인들은 탐욕스럽고 자본주의적이다." "유대인과 함께 있는 지중해 연안의 프랑스인이나 이탈리아인을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을 구별할 수 있는가?" "음, 꼭 그렇지만은 않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유대인인가? 혈통의 모양새는 차이점을 나타내지 않는다. 유대인은 프랑스인이나 이탈리아인과 달라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독일계 유대인들을 본적이 있는가?" "물론, 그들은 독일인들처럼 보인다." "그러면 독일인은 어떤 사람인가?" "독일인은 북방 아리아 인종이다." "인도계의 아리아인?" "그렇다." "그들은 북방 인종인가?" "아니다." "그들은 금발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사람이 독일인이고 어떤 사람이 유대인인지를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유대인들은 있다." "기독교도와 회교도들이 있는 것처럼 확실히 유대교도들은 있다." "난 유대교인을 말하는 것이다." "루스벨트는 네덜란드 사람이었는가?" "아니다." "루스벨트를 네덜란드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어째서 다윗의 자손은 유대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유대인들에 관해서는 다르다." "무엇이 다른가?" "모른다."

 

하찮은 인간이여, 그게 바로 당신이 철없는 소리를 하는 방식이다. 당신은 허튼 소리로 무장한 조직을 만들어내고, 어떤 사람이 유대인인가를 말할 수조차 없지만 그 때문에 수천만의 사람들이 유대인으로 학살됐다.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당신을 비웃는 이유이고, 진지하게 할 일이 있을 때면 당신을 피하는 이유이며, 그것이 바로 당신이 곤경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이유이다. 당신은 '유대인'이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우월감을 느낀다. 당신은 정말 불행하게 느끼고 있으므로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당신은 정확히 유대인으로 간주된 사람에게 살인을 저지른 것이기 때문에 불행하게 느낀다.

 

하찮은 인간이여, 이것은 당신에 관한 극히 작은 한 조각의 진실에 불과하다. 당신은 거만하게 또는 경멸적으로 '유대인'이라고 말할 때, 자신의 하찮음을 덜 느낀다.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나는 그것을 발견했다. 당신은 누군가가 당신에게 너무 작거나 너무 많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킨다면, 그를 '유대인'이라고 부른다. 당신은 제멋대로 누가 '유대인'인가를 결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하찮은 아리아인이든 또는 유대인이든 이것이 당신에게 옳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내가 누구인가를 결정할 권리를 갖는다. 나는 생물학적으로, 문화적으로 잡종이다. 나는 모든 계급과 인종과 국가의 정신적, 육체적 결과임을 자랑스러워한다. 나는 당신처럼 '순수한 인종'도 아니고, 당신처럼 '순수 계급'에 속하지도 않고, 모든 국가의 인종과 계급의 하찮은 파시스트인 당신처럼 배타적이지 않은 것을 자랑스러워한다. 나는 당신이 팔레스타인에서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유대인 기술자를 원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나는 어떤 다른 사람들과도 공통점이 없듯이, 유대인 파시스트들과도 전혀 공통점이 없다. 하찮은 유대인이여, 어째서 당신은 오직 셈족에게만 돌아가고 원형질로는 돌아가지 않는가?

 

나에게는 삶이 랍비의 사무실에서가 아니라 혈장의 수축에서 시작된다. 당신이 해파리에서 육지의 두 발 짐승으로 진화하는 데는 수백만 년이 걸렸다. 경직된 형태인 당신의 생물학적 이상은 오직 6천년밖에 존속되지 않았다. 당신이 자신에게서 자연을 재발견하고 다시 해파리를 발견하려면, 백년이나 5백년 또는 아마도 5천년이 걸릴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서 해파리를 발견했고, 그것을 당신에게 분명한 말로 설명했다. 처음으로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당신은 나를 새로운 천재라고 불렀다. 당신은 기억할 것이다. 당신이 스칸디나비아에서 새로운 레닌 같은 사람을 찾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내게는 더욱 중요한 할 일이 있었으므로 이 역할을 거절했다. 또한 당신은 나를 새로운 다윈, 마르크스, 또는 파스퇴르, 프로이드라고 선언했다. 나는 오래 전에 당신에게 언제나 '만세' '만세','메시아여!'를 외치지만 않는다면, 당신도 나처럼 말하고 쓸 수 있으리라고 말했었다. 그 이유는 이 승리를 자랑하는 외침이 당신의 마음을 약하게 하고 창조적인 성향을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하찮은 인간이여, 당신은 '사생아를 낳은 어머니'를 부도덕한 존재로 박해하지 않는가? 당신은 '합법적'인 '적자'와 '비합법적'인 '서자'를 엄격히 구별하지 않는가? 오 그대, 가련하구나. 당신은 자기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당신은 어린 예수를 경모한다. 어린 예수는 결혼증명서를 갖지 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났다. 여편네 손에 쥐어 사는 그대 하찮은 인간이여, 이처럼 당신은 자신의 성적인 자유에 대한 갈망을 전혀 모르고 어린 예수를 숭배한다. 당신은 '비합리적'으로 태어난 아이를 사생아들을 모르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로 만들었다. 그러나 한편 당신은 사도 바울로서 진정한 사랑의 결실인 아이들을 박해하면서, 진정한 증오의 결실인 아이들에게는 종교적인 법의 보호를 베풀기 시작했다.

 

당신은 정말 불쌍하고 하찮은 인간이다! 당신은 위대한 갈릴레오가 발명한 다리 위로 자동차와 기차를 달리게 한다. 하찮은 인간이여, 당신은 위대한 갈릴레오가 결혼 허가를 받지 않고 자식을 세 명이나 두었다는 것을 아는가? 당신은 학생들에게 그 사실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당신은 그 이유로 갈릴레오를 고문하지 않았던가? '슬라브 민족의 조국'에 사는 하찮은 인간이여, 세계 모든 무산계급의 가장 위대한 아버지인 당신네 위대한 레닌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에 강제적인 결혼을 폐지했다는 것을 아는가? 그 자신이 결혼 허가가 없이 아내와 살았다는 것을 아는가? 당신은 레닌의 중대한 행동을 살아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도 못한 채 모든 슬라브 민족의 지도자를 통해 강제 결혼이라는 낡은 법을 다시 제정하지 않았는가? 이 모든 것들에 대해 당신은 전혀 아무것도 모른다.

 

무엇이 당신에게 진실이고 역사이고 자유를 위한 싸움인지. 어쨌든, 당신이 누구인데 자기 의견을 갖는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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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라 하찮은 인간들아1

들어라, 하찮은 인간들아 (Listen, Little Man)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지음

 

 

하찮은 보통사람

 

그들은 당신을 '하찮은 인간' 또는 '보통 사람'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은 '보통 사람의 시대'인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누군가 당신을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당신 자신이 '하찮은 인간'은 아닌 것이다. 하찮은 사람은 바로 강대국의 타락한 대통령들과 권력을 잡은 노동운동의 지도자들, 후회하는 자본가 가족의 아들들과, 정치가와 철학자들인 '그들'인 것이다. 그들은 당신에게 미래에 대한 환상은 주지만 당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당신은 두려운 과거를 이어가고 있는 계승자이다. 그리고 당신의 유산이란 당신이 손안에서 불타오르고 있는 다이아몬드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신의 일을 하고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려는 모든 의사와 구두 만드는 사람과 기계공과 교육자는 모두 자신의 단점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당신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이 지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아서 일해 왔다. 인류 사회의 미래는 바로 당신의 생각과 행동들의 전개 방식에 달려 있다. 그러나 당신의 교사와 지배자들은 당신이 진정 어떻게 생각하고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해 당신에게 말해주지 않는다. 그 어느 누구도 당신이 당신 자신의 운명을 잘 다룰 수 있게 할 수 있는 따끔한 충고의 말을 당신에게 감히 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당신은 오직 하나의 의식 안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다. 그것은 당신 스스로 당신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교육으로부터 벗어날 자유와 자아비판으로부터 벗어날 자유이다.

 

나는 한 번도 당신이 이런 식으로 불평하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너희들은 나를 내 자신 스스로와 이 세상에 대해 미래의 주인이 되도록 격려해왔다. 그렇지만 너희들은 어떻게 사람이 자신 스스로를 지배하는 주인이 되는 지에 대해 나에게 말해주지 않았고, 내가 저지른 생각과 행동의 잘못들에 대해서도 나에게 얘기해 주지 않았다"고 말이다.

 

당신은 밖으로 힘을 가진 자들이 '하찮은 인간들에 대해서' 힘을 행사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당신은 안으로 당신 스스로에게 침묵을 지키고 있다. 당신은 권력자들이나 사악한 의도를 가진 무능한 사람들에게 당신을 대표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그리고 오직 때가 너무 늦은 후에야 당신은 자신이 속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또 깨닫는다.

 

나는 당신을 이해한다. 당신이 가면이나 파티 초대장, 혹은 '인기'가 없이 육체적, 정신적으로 벌거벗고 있는 것을 수없이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신생아나 속바지 차림의 필드 마샬 처럼 벌거벗은 모습을. 당신은 내 앞에서 불평하고 울고 자신의 갈망에 대해 말하고, 사랑과 슬픔을 털어놓아 왔다. 나는 당신을 알고 이해한다. 나는 정말로 위대한 미래를 믿기 때문에 그대 '하찮은 인간'에게 당신의 현재 모습을 말해주려 한다. 위대한 미래는 의심할 것 없이 당신의 것이다.

 

그러니 우선 자신을 한번 바라보라! 진정한 모습 그대로의 자신을 보는 것이다. 당신의 지도자와 대표자들 그 누구도 감히 말해주지 않는 것에 귀를 기울이도록. 당신은 '하찮은 보통 사람'이다. 이 '하찮은'과 '보통'이란 말속에 담겨 있는 이중의 의미를 당신은 이해해야 한다.

 

달아나지 말라! 자신을 바라보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무슨 권리로 내게 말하는 거야?" 나는 당신의 불안한 표정에서 이러한 질문을 읽을 수가 있다. '하찮은 인간'이여, 나는 당신의 뻔뻔스러운 입에서 나오는 이 질문을 들을 수가 있다. '하찮은 인간이여', 당신은 스스로를 바라보는 것을 두려워하고, 비평을 두려워한다. 그들이 당신에게 약속하는 권한을 두려워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은 이 권한을 사용하는 방법을 모를 것이다. 당신은 언젠가는 자신이 자아를 다르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감히 생각지 못한다. 위축되는 대신 자유롭고, 약삭빠른 대신 탁 터놓고, 밤도둑처럼 이아니라 솔직하게 사랑하면서. '하찮은 인간'이여, 당신은 자신을 무시하고 있다. 당신은 "내가 누구인데 나의 의견을 갖고, 나의 삶을 결정하고, 세상이 내 것이라고 선언한단 말인가?"라고 말한다. 당신의 말이 옳다.

 

당신이 누구인데 자신의 인생을 주장한단 말인가? 그러면 이제 당신이 누구인가를 내가 말해 주겠다.

 

당신은 오직 한 가지 점에서 정말로 위대한 사람과 다르다. 위대한 사람 역시 한때는 아주 하찮은 인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능력 하나를 개발했는데, 그것은 자신의 사고와 행동이 어디가 미숙한가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에게 소중한 어떤 과업의 압력을 받으면서 더욱더 자신의 미숙함과 하찮음을 감지할 줄 알게 되었다. 위대한 사람은 자신이 언제 어떤 점에서 하찮은 인간인가를 안다.

 

그러나 하찮은 인간은 자신이 하찮다는 것을 알지 못하며 그것을 아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는 자신이 미숙함과 편협을 다른 사람들의 힘과 크기라는 환영으로 덮어 버린다. 그는 자기의 훌륭한 대장들을 자랑스러워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긍지가 없다. 그는 자신이 갖지 못한 생각을 존경하나, 자신이 갖고 있는 생각은 존경하지 않는다. 그는 사물을 덜 이해할수록 더욱더 철저히 믿고, 가장 손쉽게 이해하는 사상들의 올바름은 믿지 않는다.

 

우선 내 자신 속에 있는 '하찮은 인간'으로부터 얘기를 열어 가기로 하자. 25년 동안 나는 말이나 글로써 이 세계에서 당신의 행복에 대한 권리를 주장해 왔다. 나는 자신에게 속한 것을 취하지 못하는 당신의 무능력을 비난해 왔다. 나는 파리와 비엔나 방책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그리고 미국 해방이나 러시아혁명에서 획득한 것을 단단히 지키지 못하는 당신의 무능력을 비난해왔다. 당신의 파리는 쁘뗑과 라바예에서 끝났고, 비엔나는 히틀러에서, 러시아는 스탈린에서 끝났다. 그리고 당신의 미국은 3K단 체제에서 끝나 버렸다. 당신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유를 지키는 방법보다는 자신의 자유를 획득하는 방법을 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오랫동안 알아 왔다.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당신이 매번 어렵게 싸워 하나의 곤경에서 벗어났을 때마다 어째서 다시 더욱더 악화된 곤경에 빠져들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윽고 나는 서서히 당신을 이해하게 되면서 무엇이 당신을 노예로 만드는가를 알아냈다. 그것은 당신 자신 스스로가 노예 감시자라는 것이다. 당신 자신 외에 다른 사람은 아무도 당신의 노예 신분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다른 어느 누구도.

당신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발견일 것이다.

 

당신을 해방시킨 자들은 당신에게 당신의 억압자들이 빌헬름이나 니콜라스, 교황 그레고리 28세, 모건, 크루프 또는 포드라고 말한다. 그리고 당신의 '해방자'들은 무솔리니, 나폴레옹, 히틀러, 스탈린이라고 불린다.

 

정말이지, 오직 자기 자신만이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다!

 

이 말은 나를 주저하게 한다. 나는 순수와 진실을 위한 투사가 되기 위해 싸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것이 당신에게 당신자신에 대한 진실을 말해 주는 문제가 되자 망설인다. 진실에 대한 당신과 당신의 태도가 두렵기 때문이다. 당신에 대한 진실을 말하는 것은 생명에 위험을 준다. 진실은 한편으로 생명을 구하지만 모든 패거리들의 전리품도 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지금의 당신이 아니고 지금의 위치에 있지도 않을 것이다.

 

나의 지성은 내게 이렇게 말한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진실을 말하라"고. 내 안에 있는 '하찮은 인간'은 말한다. "자신을 '하찮은 인간'에게 노출시키고 그의 처분에 맡기는 것은 어리석다." '하찮은 인간'은 자신에 대한 진실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져야만 하는 커다란 책임을 원하지 않는다. 그는 '하찮은 인간'으로 남아 있기를 원하거나, '하찮은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는 부자가, 당 지도자, 또는 군대의 지휘자나, 악덕 폐지를 위한 사회 집단의 간사가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일, 식량, 주택, 교통, 교육, 연구, 행정 또는 무엇이 되던 그것에 대한 책임을 떠맡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내 안의 '하찮은 인간'은 말한다. "너는 독일, 오스트리아, 스칸디나비아, 영국, 미국,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알려진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당신과 싸운다. '문화적 가치의 구세주들'은 당신을 증오한다. 학생들은 당신을 사랑한다. 옛 환자들은 당신을 존경한다. 감정적으로 남을 괴롭히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시달리는 이들은 당신을 따른다. 당신은 삶의 불행과 '하찮은 인간'의 불행에 대해 열두 권의 책과 백 오십 개의 논문을 썼다. 당신의 조사 결과와 이론들은 수많은 대학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중이고, 다른 훌륭하고 고독한 사람들은 당신이 대단히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당신은 우주의 생명 에너지와 생존 기능의 법칙을 발견했기 때문에 과학의 역사에서 지성의 대가들과 비유된다. 당신은 암을 이해할 수 있게 했다. 당신은 진실을 말하기 때문에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이제는 느긋해지도록. 노력의 결실과 명성을 즐겨라. 수년 후면 당신의 이름이 도처에서 들릴 것이다. 당신은 충분히 해냈다. 이제는 그만두고, 서재로 물러나 자연의 기능 법칙을 연구하라!"

 

'하찮은 인간'이여, 당신을 두려워하는 내 안의 '하찮은 인간'은 이렇게 말한다. 오랫동안 나는 당신과 가깝게 교제해 왔다. 내 자신의 경험으로 당신의 삶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당신을 돕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정말로 당신을 도왔고, 종종 당신의 두 눈에 어린 눈물로 당신이 내 도움을 원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 관계를 유지했다. 아주 서서히 나는 당신이 기꺼이 내 도움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지킬 능력은 없다는 것을 알기 시작했다. 나는 분명 그것을 지켰고 당신을 대신해서 당신을 위해 열심히 싸웠다. 그때 당신의 지도자들이 나타나 내 일을 산산이 부수어 버렸다. 당신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로 그들을 따랐다. 이제 나는 당신의 지도자나 또는 희생자로서 소멸하지 않고 어떻게 당신을 도울 수 있는가를 배우기 위하여 그 관계를 유지했다.

 

내 안의 '하찮은 인간'은 당신을 설득하고 '구하기'를 원한다. 그는 당신으로부터 '고등 수학'에 대한 존경과 똑같은 존경심을 갖고 평가되기를 원한다. 그것은 당신이 그게 대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덜 이해할수록 좀 더 기꺼이 존경을 보내게 되어 있다. 당신은 니체보다 히틀러를, 페스탈로찌보다는 나폴레옹을 더 잘 알고 있다. 왕은 지그문트 프로이드보다 당신에게 더 많은 의미를 갖는다.

 

내 안의 '하찮은 인간'은 지도자의 방법으로 평범하게 행해지는 것처럼 당신을 설득하고 싶어 한다. 나는 당신을 '자유'로 이끌 사람이 바로 내 안의 '하찮은 인간'일 때에 당신이 두려워진다. 당신은 내 안에서 당신 스스로를, 그리고 당신 안에서 나를 발견할지 모르며, 겁이 나서 내 안에 있는 당신을 죽일 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누군가의 노예가 될 수 있는 당신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죽기를 그만두었다.

 

나는 당신이 방금 한 내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의 노예가 될 수 있는 자유'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더 이상 한 개인인 주인의 노예가 되지 않고, 누군가의 노예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이 개인 억압자, 이를테면 전제군주를 제거해야 한다. 사람은 자유와 혁명적인 동기에 대한 높은 이상이 없이는 이 정치적인 살인을 저지를 수 없다.

 

 

 

 

하찮은 위대한 사람

 

곧 사람은 예수나 마르크스, 링컨, 또는 레닌 같은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의 지도하에 혁명적인 자유당을 창설한다.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당신의 자유를 몹시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그는 실질적으로 그것을 확립하기 위해 많은 하찮은 인간들과, 협력자들과, 심부름꾼들로 둘러싸여야 한다. 혼자서는 거대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신은 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쓰러진 채 방치되게 할 것이다. 만일 그가 자신을 '하찮은 위대한 사람'들로 둘러싸이게 했다면 말이다.

 

많은 '하찮은 위대한 사람'들로 둘러싸인 그는 당신이나, 한 조각의 진실, 또는 새롭고 더 좋은 믿음을 위해 권력을 정복한다. 그는 복음과 자유의 법령 등등을 쓰고 당신의 도움과 진심을 기대한다. 그는 사회적인 곤경으로부터 당신을 끌어낸다. 그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당신과 당신의 일상적인 소음과는 멀지만 그래도 당신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깊은 지성적인 외로움 속에서만 이룰 수 있는 위대함을 서서히 희생해야 한다. 많은 '하찮은 위대한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당신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하여. 그는 당신이 그를 접근하기 어려운 신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견디어야 한다. 당신을 이끌 수 있기 위하여.

 

만일 그가 여전히 결혼증명서가 없을 지라도 한 여자를 사랑할 수 있는 단순한 남자로 남아 있었다면 그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당신은 직접 자신의 새로운 주인을 만들어낸다. 새로운 주인의 역할로 승격된 그 위대한 사람은 자신의 위대함을 상실한다. 이 위대함은 솔직함과 단순함, 용기, 그리고 삶과의 진정한 접촉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람으로부터 위대함을 얻은 '하찮은 위대한 사람'들은 재정, 외교, 정부, 과학, 예술 등에서 높은 자리를 떠맡고, 당신은 여전히 계속되어 온 곤경 속에 남아 있다. 당신은 '사회주의의 미래'나 '(나찌) 제3제국'을 위하여 계속 누더기 옷을 입는다. 당신은 계속 그을음으로 뒤덮인 벽과 초가지붕으로 된 불결한 집에서 산다. 그러나 당신은 문화의 궁전을 자랑스러워한다. 당신은 새로운 주인의 몰락과 다음 전쟁이 있을 때까지는--자신이 지배하는 환상에 만족한다.

 

먼 나라들에서는 하찮은 인간들이 부지런히 누군가의 노예가 되려는 당신의 갈망을 연구해서 약간의 지적인 노력으로 하찮은 위대한 사람이 되는 방법을 배워 왔다. 그 하찮은 위대한 사람들은 대저택과 궁전이 아니라 당신과 같은 계급 출신이다. 그들은 당신처럼 굶주렸고 고통을 받았다. 그들은 주인을 바꾸는 과정을 단축시킨다. 그들은 당신의 자유를 위한 희생과 행복을 위한 개인적 희생, 심지어는 당신의 자유에 대한 수백 년의 힘든 지적인 노력까지도 당신의 새로운 노예 상태를 위해서는 너무나도 엄청난 대가임을 배웠다.

 

진정으로 위대한 자유사상가들이 백 년 동안 공들여 만들고 고통을 받은 것이 5년도 채 못 되는 동안에 파괴될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과 같은 계급출신의 하찮은 인간들은 그 과정을 단축시킨다. 좀 더 공개적이고 좀 더 야만적으로. 그 이상으로, 또 그들에게 있어서 당신과 당신의 삶, 당신의 가족과 자녀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당신에게 당신은 어리석고 비굴하며 누구나 당신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해 준다. 그들은 당신에게 개인의 자유가 아니라 국가의 자유를 약속한다. 그들은 당신에게 인간적인 자기 확신이 아니라 국가에 대한 경의를, 개인의 위대함이 아니라 국가의 위대함을 약속한다.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위대함'은 당신에게 아무것도 아니고 막연한 개념이다. 한편, '국가의 자유'와 '국가의 이해'는 개가 뼈다귀를 대하듯 군침이 나게 하므로, 당신은 큰 소리로 그것들을 환호하며 맞이한다. 이 하찮은 인간들은 아무도 예수나, 칼 마르크스 또는 링컨처럼 진정한 자유를 위해 희생을 치르지 않는다.

 

하찮은 인간이여, 그들은 당신이 스스로를 무시하기 때문에 당신을 사랑하지 않고 무시한다. 그들은 록펠러 같은 사람이나 토리 당원들이 당신을 아는 것보다 당신을 훨씬 더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오직 당신만이 알고 있어야 할 당신의 최대 약점을 알고 있다. 그들은 어떤 상징에 당신을 희생시킨다. 당신은 스스로 그들을 당신을 지배하는 권력으로 인도한다. 당신의 주인들이 모든 가면을 벗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 사실 때문에 당신 자신에 의해 받들어 모셔졌고 키워진다. 참으로 그들은 당신에게 분명히 말한다. "당신은 어떤 책임도 없는 열등한 존재이고, 여전히 그렇게 남아 있을 것이다"라고. 그런데도 당신은 그들을 '구세주'와 '새로운 해방자'라고 부르면서, 큰 소리로 "만세, 만세!"를 외친다.

 

하찮은 인간이여, 이것이 바로 내가 당신을 끔찍이 두려워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운명이 당신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전혀 달아날 곳이 없기 때문에 당신이 두렵다.

 

하찮은 인간이여, 당신은 몹시 병들었다. 물론, 당신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스스로 이 병에서 벗어나는 것은 당신의 책임이다. 만일 억압을 참지 않았거나, 그것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훨씬 전에 압제자들을 떨쳐버렸을 것이다. 당신이 만일 실체의 일상적인 삶에서 한 조각이나마 자존심을 갖고 있기만 했더라면, 그리고 마음 속 깊이 당신이 없으면 인생이 한 시간도 더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더라면, 세상의 어떤 경찰력도 당신을 억압할 만큼 강력하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의 '해방자'가 이와 같은 것을 당신에게 말해 주었던가? 아니다. 그는 당신을 '세계 무산계급'이라고 부르지만 오직 당신만이 자신의 인생에 책임이 있다는 것은 말해 주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당신이 '조국의 명예'에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당신은 하찮은 사람들을 자신의 박해자로 만들었다.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들을 순교자로 만들어 십자가에 못 박고 살해하고 굶주리게 했으며, 당신을 위한 그들의 노고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당신이 당신의 삶에서 어떤 성취를 하던 그것은 그들의 덕을 입은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은 '당신을 신뢰하기 전에 당신의 생활 철학을 알고 싶다'고 말한다. 내 생활 철학을 들으면 당신은 지방검사, '비 미국적 행동 추방위원회', 에프 비 아이, 소련의 국가안보위원회, '선정적 신문', 3K단, 또는 '세계 무산계급 지도자들'에게로 도망칠 것이다. 혹은 마침내는 무턱대고 달아날 것이다. 나는 빨갱이도, 흑인도, 백인도, 황색인도 아니다. 나는 기독교인, 유대인, 또는 회교도, 모르몬교도, 일부다처주의자, 동성연애자, 무정부주의자, 의화단이 아니다. 나는 우연히 결혼증명서를 갖고 있어서라거나 혹은 성적으로 굶주려서가 아니라, 사랑하고 갈망하기 때문에 내 아내를 포옹한다. 나는 내 아이들을 때리지 않고, 낚시를 하지 않으며, 사슴이나 토끼를 총으로 쏘아 잡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우수한 사수이고 과녁 복판을 맞히기를 좋아한다. 나는 브리지 놀이를 하지 않고, 내 이론을 전파하기 위해 파티를 열지 않는다. 만일 내 가르침이 옳다면 저절로 전해질 것이다.

 

나는 나보다 더 정통해 있지 않는 한, 어떤 위생국 관리에게도 내 일에 대해 진술하지 않는다. 그리고 누가 내 발견에 대한 지식과 복잡함에 정통했는가는 내가 결정한다. 나는 이치에 닿을 때는 모든 법을 엄격하게 지킨다. 그러나 그것이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무분별할 때는 싸운다. (하찮은 인간이여, 지방검사에게로 도망치지 말도록. 만일 그가 존경할 만한 사람이면 그 역시 똑같이 할 테니까 말이다)

 

나는 어린이들과 젊은이들이 사랑의 육체적인 행복을 경험하고 위험이 없이 즐기기를 원한다. 나는 말 그대로 선하고 진정한 의미에서 종교적이기 위하여 자신의 애정 생활을 망치고 몸과 마음이 경직돼 움츠러들어야 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나는 소위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은 알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나는 신이 우주의 근본적인 에너지이고, 당신의 몸속에 있는 사랑이며, 당신과 당신 주위의 본질에 대한 느낌이고 성질이라고 본다.

 

나는 환자나 어린이를 위한 내 의료와 교육 활동에 어떤 얄팍한 구실로든 간섭하려는 자는 누구든 쫓아 보낼 것이다. 어떤 공개 법정에서도 나는 그에게 이후 내내 부끄러워하지 않고는 대답할 수 없는 어떤 지극히 단순하고 분명한 질문을 할 것이다. 정말로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일에 대한 의견이 아니라, 세상을 다스리는 일을 원하는 '일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의견을 갖고 있다. 나는 늘 어떤 도구처럼 사용하면서 사용 후에는 깨끗이 간직하는 거짓말과 진실을 구별할 수 있다.

 

하찮은 인간이여, 항상 그래왔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당신을 아주 깊이 두려워한다. 나 자신도 수억만의 하찮은 인간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나는 자연과학자가 되었고 정신병의사가 되었으며, 당신이 얼마나 병들어 있고 그 병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것이 어떤 외부의 압력이 없다 해도 시시때때로 당신을 억압하는, 외부의 힘이 아니라 당신 자신의 정서적인 병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이 살아 있고 건강했더라면 당신은 오래 전에 압제자들에게 이겼을 것이다. 당신의 박해자들이 과거에는 사회의 상부 계층 출신이었으나, 이제는 당신과 같은 계급 출신이다.

 

하찮은 인간이여, 그들은 당신보다 훨씬 더 하찮다. 왜냐하면, 그들은 경험적으로 당신의 불행을 알고 있으므로 당신을 더욱더 지독하게 억압하려면 이 지식을 이용한 아주 약간의 하찮음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당신에게는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을 알아보는 감각기관이 없다. 당신을 위한 그의 존재와, 고통과, 갈구와, 분노와, 투쟁방법이 당신에게는 낯설다. 당신을 억압하거나 이용하기는커녕 오히려 진정으로 당신이 자유롭고 참되며 정직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이해할 능력이 당신에게는 없다. 당신은 그러한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의 본질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하고 솔직하다. 그들의 진실은 당신의 책략과 같다. 그들은 비웃는 마음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운명에 아픔을 느끼면서 당신을 꿰뚫어 본다. 그러나 당신은 간파되는 기분으로 느낀다.

 

하찮은 인간이여, 당신은 오로지 많은 다른 하찮은 인간들에 의해 위대하다고 말해질 때만, 이 위대한 사람들을 환호하며 맞이한다. 당신은 위대한 사람들과, 그들의 생명에 대한 친밀함과, 인생에 대한 사랑을 두려워한다. 위대한 인간은 당신을 단순히 살아 있는 동물이며 살아 있는 존재로서 사랑한다. 그는 당신이 수천 년 동안 고통을 받아 왔던 것처럼 고통 받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는 당신을 운반이나 노역에 사용하는 소나 말 따위의 동물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인생을 사랑하고 당신이 고통과 치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들로 하여금 당신을 무시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하찮음 때문에 고통 받고 물러나면서 당신을 피하게 한다. 최악의 경우에는 당신을 불쌍하게 여기기 시작하는 경지로까지 몰아간다.

 

하찮은 인간이여, 당신이 이를테면 롬 브루소 같은 정신병의사라면, 위대한 인간을 기대에 부응치도 못하고 정신병자가 되지도 못한 범죄자인 양 짓밟을 것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인간은 당신과 달리 돈을 모으는 것, 사회적으로 적절한 딸의 결혼, 정치 경력, 학위 또는 노벨상을 인생의 목표로 삼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러한 이유에서 그가 당신과 같지 않기에, 그를 '천재'나 '괴짜' 라고 부른다. 반면에 그는 기꺼이 자신이 천재가 아니라 단순히 살아 있는 존재라고 말한다. 당신은 그가 당신의 공허하게 재잘거리는 사교 '파티들'보다, 사고하는 공부나 일하는 연구소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비사교적'으로 단정한다. 당신은 그가 당신처럼 주식이나 채권을 사는 대신, 과학적인 연구에 돈을 쓰기 때문에 미쳤다고 생각한다.

 

하찮은 인간이여, 끝없이 타락한 당신은 뻔뻔스럽게도 '정상'의 원형이고 '정상인'이라고 스스로 믿는 당신과 비교하여 단순하고 솔직한 사람을 '비정상적'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당신의 인색한 자로 그를 재면서 그가 당신이 생각하는 정상의 요구에 미치지 못함을 발견한다.

 

하찮은 인간이여, 당신은 당신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차 기꺼이 도울 준비가 되어 있는 그를 사회생활에서 몰아내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알 수가 없다. 선술집에서건 궁전에서건 당신 자신이 그를 견딜 수 없도록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수십 년 동안 가슴이 찢어 지는듯한 고통을 추구하고 있는듯하게 만든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바로 10년의 사회발전 후까지도 살아남지 못하는 '요지부동의 원리'와, 옳지 못한 생각과, 편협과, 무책임을 지닌 당신이다.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수 년 동안에 당신이 옳다고 맹세한 모든 것들을 좀 생각해 보라. 당신은 그들 중에서 얼마나 잘못됐다고 깨달았으며 얼마나 철회했는가? 하찮은 인간이여, 전혀 없다.

 

진정으로 위대한 인간은 신중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일단 중요한 아이디어를 파악하면 장기적으로 생각한다. 하찮은 인간이여, 위대한 인간의 생각이 옳고 영속적이며, 당신의 생각은 하찮고 덧없을 때에 그를 세상에서 버림받게 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다. 당신은 그를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으로 만들뿐만 아니라, 그에게 지독한 고독의 씨앗을 심는다. 위대한 행위를 낳는 고독의 씨앗이 아니라, 당신으로부터의 오해와 학대에 대한 두려움의 씨앗을. 왜냐하면 당신이 '국민'이고 '여론'이며 '사회 양심'이기 때문이다.

 

하찮은 인간이여, 한번이라도 솔직하게 이것에 연루된 엄청난 책임을 생각해 보았는가? 정말로 장기적이고 사회적인 사건이나 자연, 또는 훌륭한 인간다운 행위--이를테면 예수라는 이--나 견지에서 당신이 옳게 생각하고 있는 지의 여부를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는가? 아니다. 당신은 자신의 생각이 잘못인가를 자문해 보기는커녕 이웃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혹은 정직하려면 아마도 돈이 들지 않을까 하는 것을 자신에게 물어보았을 따름이다.

 

하찮은 인간이여, 바로 이것이 당신이 스스로에게 질문했던 것이다. 당신은 이처럼 위대한 인간을 고독으로 몰아넣고도 당신이 그에게 한 짓을 잊어버렸다. 당신이 한 일이라고는 오직 이런저런 실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하찮고 비열한 짓을 저지르고 깊은 상처를 지운 것뿐이다.

 

당신은 잊는다. 그러나 위대한 인간들은 잊을 뿐만 아니라, 복수를 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그들은 당신이 그처럼 비열하게 행동하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 애쓴다. 그것이 그들의 천성이다. 나는 이 또한 당신의 생각이나 느낌과는 다르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 말을 믿도록, 만일 당신이 백 번 수천 번 백만 번 고통을 가하고,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히고도 곧 스스로 한 짓을 잊어버린다 해도 위대한 인간은 당신의 나쁜 짓 때문에 당신을 대신해서 고통의 굴레를 뒤집어쓴다. 그 나쁜 짓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하찮기 때문에. 그는 무엇이 당신을 움직여서 그 같은 짓을 하게 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실망시켰다는 이유로 결혼 상대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부도덕한 이웃을 만족시켜 주지 않는다고 자녀를 괴롭히고, 친절한 사람을 냉소하며 바라보면서도 이용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것은 날름 받아들이고 요구되는 곳에는 주지만, 결코 사랑이 주어진 곳에는 주지 않고, 쓰러지거나 쓰려지려는 친구를 또 한 번 발로 차고', 진실이 필요한 곳에서 거짓말을 하고, 거짓을 박해하기보다는 진실을 항상 박해하는 짓들을.

 

하찮은 인간이여, 당신은 언제나 고발자의 편에 선다. 하찮은 인간이여, 위대한 인간은 당신의 호의와 쓸모없는 우정을 얻기 위하여 당신에게 적응하고, 당신이 하는 방식으로 말하고, 당신의 가치로 자신을 치장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가 만일 당신의 가치와 언어와 우정을 지니고 있다면, 더 이상은 위대하지도 진실하지도 단순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 증거로 당신이 원하는 대로 말하는 당신의 친구들은 결코 위대한 인간이 아니었다.

 

당신은 친구가 무언가 위대한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당신은 은밀히 자신을 무시한다. 특별히 자신의 위엄을 한껏 과시할 때조차도. 당신은 스스로를 무시하기에 당신의 친구를 존경할 수가 없다. 당신은 당신과 같은 테이블에 앉거나 같은 집에 사는 누군가가 무엇이든 위대한 일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하찮은 인간이여, 당신과 가까이에 있으면 생각하기가 힘들다. 누구든 오로지 당신에 대해 생각할 수는 있지만 당신과 함께 생각할 수는 없다. 당신은 어떤 훌륭하고 멋진 생각이라도 숨통을 끊어 놓기 때문이다.

 

당신은 어머니로서 세상을 탐험하는 자식에게 말한다. "그건 어린이들이 할 일이 아니야." 당신은 생물학 교수로서 말한다. "그건 예의바른 학생들이 할 짓이 아니야." 교사로서 당신은 말한다. "어린이들은 보기 위한 것이지 얘기를 듣기 위한 존재는 아니다." 아내로서 당신은 말한다. "뭐! 발견이라고! 당신이 발견을 한다고! 어째서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직장에 나가 품위 있는 생활을 하지 못하지? " 그러나 당신은 이해하든 그렇지 못하든 신문에 난 것은 믿는다.

 

정말이지 하찮은 인간이여, 당신은 자신이 갖고 있는 가장 좋은 장점에 대한 느낌을 잃어버렸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 자식들, 아내, 남편, 부모 등 누구이건 간에 그에게서 좋은 장점을 감지하면 목을 조르고 죽여 왔다. 당신은 하찮으며 여전히 하찮은 그대로이기를 원한다. 당신은 내게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느냐고 묻는다. 말해두지만, 나는 당신을 경험했고, 당신과 함께 경험했으며, 당신에게서 나 자신을 경험했다. 나는 임상의사로서 당신을 하찮음으로부터 해방시켰다. 나는 종종 교육자로서 당신을 정직과 솔직함으로 인도했다. 나는 당신이 정직으로부터 자신을 어떻게 방어하는가를 알고 있으며, 진정한 본질을 따르라는 요구를 받을 때면 당신에게 급습하는 공포를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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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를 묻는 날

그것도 권력이라고 얻고자 한다면,

 

우리가 반드시 끌어내리리라! 그리고 그날은 너희가 기대고 서있던 가부장제, 권위주의, 관료주의, 의회주의, 부르주아정파와의 계급협조주의.. 이 모든 쓰레기더미가,
 

피맺힌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  너희와 함께 영원히 매장되는 날일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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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은 걸 수 있어도 왜 혁명은 꿈꾸지 못하는가

# 용기있는 동지의 더 많은 성찰과  완전한 치유를 기원하며, 이글을  이곳에도  올린다.  동시에  여전히 가해자로 운동의 지도부로 우리곁에 살아남아,  작은곳에선 혁명의 외피를 쓰고  큰곳에선 대중지도자의 가면을 쓰고  피해자에게 계속 상처를 주며, 노동자운동/혁명운동을 나락으로 절망으로 왜곡시키는 그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낸다.  

 

 

 

목숨은 걸 수 있어도 왜 혁명은 꿈꾸지 못하는가

 

 

정자 대게를 푸짐하게 먹고 찜질방에서 한 잠 자고 나니 명박氏가 대통령이 되어 있었다
TV 앞에 있던 찜질방의 사람들은 보이콧주의자들이었지만
경제를 살리겠다는 공약 앞에 순응 하고 있었다
“비지니스 프랜들리”를 외치는 명박氏의 뱀눈은
세계공황 위에 세워진 가건물처럼 불안해 보였다
 

 

민주노동당 선거대책위 선거 전광판 앞에 나란히 앉아 있던
영길氏와 석행氏는 완전히 똥 씹은 얼굴이었다
그들은 표를 구걸하기 위해 부르주아 독재의 성지인 현충원을 참배하고
중소기업사장들에게 친절하게도 ‘동지’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이도 모자라 해고를 자유롭게 해주고 파업권을 팔아넘긴 한국노총을 찾아가
머리 숙여 지지를 호소했다
‘표’를 위해서라면 쫀심이고 전통이고 혁명이고 나발이고 없었다
 

 

금속노조 위원장인 갑득氏는 자본가들을 만나는 것이 자신의 ‘신념’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오늘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하늘로 오르고 매달리고
또 한 명의 분신한 노동자는 또 한 명의 분신한 노동자가 됐다
이제 유서가 있어야 열사가 되고 투쟁은 조합비를 날리고 조직력을 훼손하는 일
갑득氏는 산별교섭(사회적 합의주의)에 걸림돌이 되는 모든 행위는
금속노조 위원장의 이름으로 엄단하겠다고 신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노동부 정례협의회(노사정 협약)를 통해
비정규직 장기 투쟁사업장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선포하고
곧바로 위로금과 민주노조 깃발을 맞바꿔치기 한 하이닉스 합의서에 당당하게 직권조인 했다
갑득氏는 현대자동차 정규직노동자였고 민주노동당 열혈 당원이었으며 당사수파다
 

 

GM부평비정규직지회 이준삼 해고자가 ‘해고자 전원 복직’을 외치며 한강 물로 뛰어 내릴 때
회찬氏와 상정氏는 한강 물의 이미지를 복사 해 ‘푸른 진보’를 외치기 시작했다
너무 너덜너덜해진 부르주아 민주주의 제복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선 그/녀들이
과연 한 겨울에 한강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심정을, 뼈 속까지 사무치는 분노를 이해나 할까?
푸른 진보신당이 내거는 새로운 슬로건은 사회연대전략이었다
연대 들어가고 전략 들어가서 말은 무지하게 거창해보이지만
결국 정규직 노동자들이 양보하고 타협해서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자는 것
부르주아 독재를 그대로 놔두고 개량의 무지개 색으로 덧칠하는 일이다
 

 

나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비판적 사이였던 몇 몇 혁명적사회주의 정치그룹들이 연합했다
그들은 비정규직 악법폐기, 노동시간단축(년 1800시간) 생활임금쟁취 요구를
혁명하자는 것으로 해석하는
개량주의자들(노사협조주의자들, 조합주의자들)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하지만 그들의 이행강령은 연합을 위한 기준선이었지만
지나치게 전투적 현장주의와 유착 돼 있었다
난 행동해야 할 때 단호한 직접행동을 위해 강령상의 통일은 더욱 엄격해져야 한다고
비판적 거리를 두었다
 

 

사십 무렵, 정세는 변하고 있었고 정치적 재편기였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비정규직 노동조합 대표자로 살아왔다
배달호, 김주익, 곽재규, 이용석, 박일수, 류기혁, 김동윤
손 내밀면 봄빛처럼 손끝에 와 닿을 것 같은 이름들이
나의 강령이었고
라인을 세우고 공장을 점거하는 비정규직 조합원들의 긴장된 눈빛이
내 손금을 타고 심장에 새겨진 전술이었다
내 30대는 전적으로 목숨 걸고 투쟁하는 비정규직 투사들의 몸짓에 소속되어 있었다
 

 

정치적 재편기,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싶었던 동지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경제투쟁에는 목숨 걸 수 있었어도
목숨을 다하여 혁명을 꿈꾸지 못했던 한 시기를 다 보내고
난 혁명정당이 건설되기 전까지 하나의 써클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수정한다
혁명은 조직운동이다
하늘로 오르고 푸른 강물에 몸을 던지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거는
이 비상한 몸짓이 찾아야 할 주소는 노동자혁명정당건설이다 1)
 

 

사십 무렵, 정세는 변하고 있었고 정치적 재편기였다
난 지금까지 투쟁하자고만 했지 한 번도 동지를 사랑한다고 고백해 본적이 없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인간의 시간이 태어나는 장소에 때늦지 않게 도착하는 감각이다
이제 내가 먼저 손 내밀어 손금을 통해 대화하고 싶다
그대 심장에 새겨진 따뜻한 언어를 안아 보고 싶다
심장과 심장의 따뜻함 속에서
다른 삶으로의 이행기가 불쑥 다가오고 있다 (2008년3월23일)
 

 


각주)--------------------------------------------------
1)
조력자들, 시간을 앞서서 실행하는 사람들
 

 

“아직도 혁명정당이냐 ㅋ”
한 때 혁명을 꿈꾸었던 이들의 냉소에 대해
난 그들의 고해성사보다 나의 자기비판이 더 뼈아픈 것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속했던 한 조직의 혁명정당건설운동은
한심한 지령이었고 뚱뚱한 위계였으며
오류투성이의 무오류였고 고철처럼 딱딱하게 녹슨 규율이었다
고립은 치명적이었다
적을 향해 날아가야 할 비수가 오히려 조직 내부에 와 박혔다
비판은 좀처럼 허용되지 않았고 서둘러 정치적 반대파는 축출됐다
조직의 가부장 문화에 항의하고 투쟁했던 성폭력 피해자의 절규는
조직의 공인된 방침에 의해 가차 없이 매장당했다
배제와 축출을 통해 위조된 조직적 통일!
이를 위해 사용됐던 가부장주의는 관료주의가 기생하며 자신의 군락지를 이룬 조직노선이었다
난 혁명정당운동을 휘감고 있는 가부장-관료주의에 타협하지 않았으나 이것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난 첨탑 위에 한 발로 선 것처럼 절망했으나... 내 절망의 바깥에서...
이미 투쟁사업장 노동자들과 미조직노동자들은 서로 만나고 있었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으로 행진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은 지령 없이도 충분히 의식적이었고 위계 없이도 활력 있는 주체들이었다
자신이 걸어온 걸음을 항상 평가하며 세대를 넘고 성별을 넘어 다종의 아름다운 색채를 띠고 있었다
화염병과 쇠파이프를 들지 않았지만 무장한 공권력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았다
내가 새롭게 학습한 원전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으로의 결정적인 한걸음, 이 시간을 앞서서 실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조력자들’, 지금 내가 생각하는 혁명정당에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다
 

by  조성웅

 

 

 

민주노총 김**성폭력사건 피해자 지지모임 주최
000 후보 사퇴 촉구를 위한 3.30 촛불집회
 


일시: 2012년 3월 30일 오후 7시 
장소: 서울 관악구 서원동 소재 이상규 후보사무소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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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이일재 선생 영전에 드리는 헌정시

故이일재 선생 영전에 드리는 헌정시

 

 

 

20세기를 넘어 21세기를 관통하라!

영원한 청춘의 플로레타리아, 이일재 동지여!

 

 

 

66년 전, 이곳은

조선노동조합평의회 사무실이 있었던 곳이다

1946년 9월, 이곳은

전평 경상북도 평의회 간사로 활동했던 스물 세 살의 청년이

대구노동자 총파업을 이끌었던 곳이다

그해 10월, 이곳은

미군정에 대항해 삐라를 뿌리고 무기를 치켜들고

계급항쟁의 도화선에 불길을 내질렀던

어느 젊은 공산주의자가 질주하던 거리였다

바로 그 청년은,

나이 열 여섯에 일찌기 공장으로 뛰어들었다

플로레타리아가 되어, 파르티잔이 되어

끝내는 20년 장기수가 되었다

90평생을 영원히 변치 않는 혁명의 열정으로

노동자의 벗으로,

배반의 20세기를 넘어

치욕의 21세기를 관통해 왔다

아, 영원히 늙지 않는 청춘이여

꼿꼿하게 살아오는 老플로레타리아, 이일재 동지여!

 

그 처절한 세월을 거슬러 오르며

동지는 얼마나 피맺힌 다짐을 곱씹었으랴

얼마나 뼈저린 분노를 안고, 결의를 안고

고문과 징역으로 팔딱거리는 자신의 심장을 꺼내

저 도도한 민중의 바다에 씻고 또 씻었으랴

어쩌면 많이 외롭기도 했으리라

병마와 싸우며 이제 그만 눈을 감고도 싶었으리라

그러나, 적들을 겨냥하여 이미 발사된 탄환처럼

동지는 오로지 일직선으로 뻗은 한 곳만을 응시했다

노동해방의 과녁, 사회주의혁명의 과녁!

시야에서 점차 사라져가는 그 과녁 끝에서

동지는 사상의 혈맥을 결코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것은 생명과도 같은 ‘주의자’의 길이었기에

그것은 일생을 걸고 맹세한 ‘운동’의 길이었기에

동지야말로 동지의 삶을 플로레타리아에게 온전히 바쳤기에

 

그러므로, 예감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살아온 길을 절대 후회 안 해!

죽을 때, 아! 잘 살았다.

내 나름대로 잘 살다가 죽는구나‘ 라고,

‘마지막 임종을 할 거예요.

기쁨이 영원하니 가는 거요.

정주영이나 김대중 한 평생하고 내 생활의 한 시간하고 안 바꿔!‘

아, 자신의 생활 한 시간이 곧 자신의 일생이었다니!

동지의 담담한 이 말 한마디는

이루지 못한 꿈을 기쁨으로 받드는 철학이었다

다가오는 미래를 응시하는 마지막 눈빛이었다

그 어떤 회한도 후회도 없는 불굴의 사회주의자,

21세기를 위한 혁명적 낙관이었다

 

동지가 살아온 이력은 송곳처럼 한국현대사를 꿰뚫었구나

일제폭압기, 보통학교를 마치고 제화공장, 화학공장, 담배공장, 군수공장,

철도노동자를 전전하며, 항일노동조합운동의 살아있는 증인이셨구나

전평활동, 조선공산당 입당, 대구항쟁, 미군정포고령위반, 문경탄광파업,

팔공산 빨치산, 총상, 체포, 남조선해방전략당 무기징역, 그리고...

1988년 가석방!

그러나 동지는 1997년, 민주노총 지도위원으로 다시 섰구나

전평에서 민주노총까지!

20세기 노동운동가는 21세기를 꺾임없이 관통해왔구나

그렇다, 동지는 승리의 믿음이 단 한순간도 흔들린 적이 없었다

그렇다, 동지는 플로레타리아로 살아온 삶이 가장 행복했다고 했다

빨치산 유격대로 총을 잡았을 때가 온 생애를 통털어 가장 행복했다고 했다

춥고 배고픈 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아무런 감시와 간섭이 없는 해방구에서 믿는 바대로 살았던 그때가 그립다고

 

 

 

영원한 청춘의 플로레타리아, 이일재 동지여!

이제 우리는, 동지의 자부심을 기억하며

이제 우리는, 동지의 송곳처럼 빛나는 뜻을 따라

동지의 70년 전의 꿈이자 전세계노동자계급의 꿈을 향하여

시발점도 종착역도 없는 혁명의 역사에

오로지 ‘승리’라는 두 글자를 아로새겨야만 한다

승리의 그날이 도래할 때!

동지는 여전히 우리들을 가르치는 교과서로 남아

인터네셔널가를 부르며, 노동자 대오와 함께 이 거리를 행진하리니!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 던져라

정의는 분화구의 불길처럼 힘차게 타오른다

대지의 저주받은 땅에 새세계를 펼칠 때

어더한 낡은 쇠사슬도 우리를 막지는 못해

들어라, 최후의 결전 투쟁의 외침을

민중이여, 해방의 깃발 아래 서자

역사의 참된 주인 승리를 위하여

참 자유 평등 그 길로 힘차게 나가자.‘

 

 

 

2012년. 3월 27일. 임 성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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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강령의 원칙에 어긋나는 '후보전술'

혁명 강령의 원칙에 어긋나는 '후보전술'

 

 

'후보전술'은 역사적으로 코민테른 시기에는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중요한 논쟁의 화두였지만, 쇠퇴하는 자본주의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사민주의가 의회(선거)제도를 통해 일반화 된 현재에는, 오히려 계급투쟁과 계급의식의 발전을 가로막는 아주 낡은전술이 되어버렸다. 낡은 후보전술은 우리가 추진하는 혁명당의 건설 경로, 공산주의자의 반의회주의 원칙 모두에 부합하지 않는 자본의 좌익을 구성하는 특정정파들(트로츠키주의, 스탈린주의)의 교조적 전술일 뿐이다.

 

☞ 또한 혁명조직(당)에서의 후보전술은 전략적 차원으로 접근해야 하며, 특히 한국에서 의회/후보전술 문제는 강령적 차원에서 토론된 바 없기 때문에, 이후 강령건설의 과정에서 원칙을 확립할 사안이다.

 

낡은 후보전술은 한국에서도 92년~2010년 경험을 통해서도 완벽한 파산을 맞았으며, 현행 선거법,제도 하에서 혁명세력이 강령에 입각한 후보전술을 구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후보전술이 기껏해야 노동조합의 요구를 내거는 노동자후보 정도로 후퇴하거나, 강령의 혁명적 요구를 선거공약으로 희화화시키는 부르주아 선거서커스의 들러리 역할을 하는것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한다.

 

 

 

1) 부르주아 선거는 기본적으로 부르주아 지배질서를 강화시키고 각 정세에 따라 재편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 따라서 현 선거제도 하에서 부르주아 지배 권력과 국가기구를 파괴하는 혁명적 역할은 선거의 결과와 그 과정 어디에서도 불가능하다. 부르주아 선거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자본주의 체제 위기가 가속화 되고 있는 시점에, 자본주의 체제 비판과 혁명 정치를 직접적으로 내걸고, 계급투쟁 활성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지금 시기에, 노동자 계급이 부르주아 의회와 선거에 참여하도록 권하는 것은, 현 자본주의 위기가 의회를 통해 극복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줄 뿐이다. 이런 점에서 계급 대중투쟁의 직접적인 행동과 대립되는 부르주아 선거와 의회의 참가는 결정적인 장애물이다. 더욱이 반자본주의적이거나 부르주아 지배 권력을 타도하고자 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선거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들이 차려놓은 서커스 판에 눈요기 감이거나 오히려 활력을 제공하는 것 이상을 넘어서기 힘들다. 부르주아 선거판에서 무대와 대중은 이미 그들이 정한 범위, 그들이 정한 순서와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2) 혁명조직(당)에서의 선거방침은 강령상의 원칙문제이라서 전략적 차원으로 접근해야 한다.

 

부르주아 선거는 선거에 참여하는 유권자(자신들이 선출해준 대리인들에게 권력을 위임했다고 착각하는)들과 후보로 나선 정당들(정치인) 모두 에게 자신들이 권력의 주인이라는 혹은 권력의 일부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선거에 실패하면 권력에 맞서 투쟁으로 돌파하는 것이 아니라, 4년 혹은 5년 후의 선거를 통한 권력을 준비하게 된다. (자신들을 지지해준 지지자들이 이미 선거에 패배한 순간, 투쟁이 아닌 다음기회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점에서는 사회주의 후보, 행동강령을 공약을 내거는 노동자후보 또한 자유로울 수 없다. 즉 선거전술에서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와 피티 독재 수립 (반의회적 대중투쟁)' 이라는 목표를 명확히 하지 않고 후보전술을 구사하는 것은, 반의회적 대중투쟁을 이끌어낼 수 없으며 오히려 의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확산시킬 뿐이다. 더욱이 대중투쟁 공간에서 노동자후보 전술을 사용하는 것조차도, 선거공간을 과감히 뛰어넘는 투쟁을 전개하지 않고서는, 대중투쟁을 집중시키고 확산시키기 보다는 후보자 중심의 대리전, 상징적 투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선거전술은 혁명 강령의 보편적 전략전술에 규정 받아야 하며, 혁명당의 전략전술은 오로지 '부르주아 국가의 파괴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립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사노위-노혁추 과정에서 의회-선거전술문제를 강령에 구체적으로 담아내지 못한 것은, 강령을 타협의 산물이 아닌 행동의 지침으로 삼고자, 주체들의 조건을 고려하여 이후 과제로 미루어 놓은 것이지, 전략적 원칙 문제를 강령의 하위전술이나 정치방침으로 대신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실제로 의회주의-선거전술문제는 소련성격 문제, 반제민족해방투쟁 문제, 노동조합의 전략적 문제 등과 함께 강령의 명료화 과정의 일환으로 훗날의 과제로 미뤄놓았던 것뿐이다. 따라서 의회주의-선거전술문제는 노혁추 당 건설 경로에 나와 있듯이 강령건설의 과정에서 충분한 토론과 검증과 혁명적 원칙의 정립 속에서 강령수준에서 채택되어야 할 문제이지, 일시적인 정세에 따라 전술문제로 축소되어서는 안 된다.

 

 

3) 후보전술(공동선거투쟁단)은 아래로부터의 독립적인 총회 조직과 무관하며, 특히 계급투쟁의 과정에서 창출되며 노동자들에 의해 언제나 선출되고 소환할 수 있는 노동자 투쟁조직들과도 무관하다.

 

더욱이 '야권연대에 반대하는 독립적인 노동자 후보가 있을 시 비판적 선거 지지를 한다.'는 방침은 '노동자들에 의해 언제나 선출되고 소환할 수 있는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조직들'과 대립하고, 이들의 배신과 투쟁회피를 제어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결국 강령에 반하는 방침이 된다. 노동자들에 의해 실질적으로 통제되지 않는 후보와 정강들을 비판적 지지한다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자립화와 혁명당의 강령원칙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선거이후 대중투쟁(비공인 파업투쟁, 부르주아 법질서를 넘어서는 아큐파이 투쟁 등)을 전개함에 있어 노동자투사의 대표로 나선 후보자와 정치조직이, 합법적인 선거운동에 참여한 이상, 적들의 법 테두리와 공권력 앞에 무기력하거나 대중 앞에 자신들의 정치노선의 모순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동선거투쟁단이 선거기간에 일관되게 후보중심의 합법적 선거운동이 아닌 실질적 대중투쟁을 촉진시킬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후보전술이 아닌 대중투쟁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 투쟁을 확장시키고 발전시키는 일이다.

 

또한, 선거를 치르는 비용도 지역 당 기본 수천만 원 이상 소요되어 노동자투쟁과는 거리가 멀고, 그 다수금액이 생활하기에도 어려운 노동자들의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것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매우 비효율적이다. 특히 그간의 경험에 미루어 오랜 기간 철저하게 인적, 재정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선거의 결과는 분명히 선거조직, 대중투쟁조직 모두의 피폐화와 치명적 인적자원의 유실을 초래해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4) 선거 시기 '노동자참가단'과 같은 대중투쟁조직이 선거에 참여하는 순간 정치적 대안세력-정치적 실물로 자리매김 할 수 없다.

 

부르주아선거판에서 노동자후보는 선거후보일 뿐 결코 투쟁의 구심점이 될 수 없다. 선거 시기에 돌입하는 순간 모든 조직은 후보를 중심으로 한 선거운동 체제(실무팀, 정책팀, 재정 및 조직, 공식 비공식 선거운동원)로 운영될 수밖에 없다. 결국 모두가 선거운동을 하던가, 선거운동 따로, 대중투쟁 따로 해야 한다. 또한 선거기간 노동자후보가 자본가권력에 맞선 투쟁(공공연한 정치집회, 점거, 거리시위, 비공인파업)에 나서는 순간 이미 그는 선거법을 무시한 비공식후보가 되어버린다. 그렇다면 반대로 대안세력으로서의 정치적 실물은 후보전술이 아니더라도 투쟁의 주체역량과 내용에 따라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여전히 문제는 대중투쟁이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지 못하는것과, 반 MB정서가 부르주아 권력과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저항으로 표출되지 못하는 것이다. 여기서 야권연대에 대당하는 정치실물을 창출하기 위해 후보를 내세운다는 것은, 선거시기 이중적 태도를 갖는 노동자계급에게 '의회주의 환상'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왼쪽의 환상'을 갖게 할 뿐이다. 부르주아 선거에서 노동자가 얻을수 있는 최대치는 '자본의 좌익'의 수혜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재와 같은 정세에서는 낡은 후보전술과 야권연대 반대가 아닌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 '부르주아 지배질서인 의회주의 환상을 벗어나게 하여 계급투쟁의 출구를 찾게 하는 것'이 정세돌파의 핵심이다.

 

현장의 노동자들이 투표에서 대안세력을 찾는다 해서 우리가 기성정치(진보정당 포함)의 왼편에 독자후보를 내세우면, 현장노동자들이 갑자기 야권연대나 진보정당후보를 지지하지 않고 우리와 같이 투쟁에 나설 것이라는 착각이야말로 서커스 쇼의 광대놀음에 관객으로만 참여한 무경험의 소치이다.

 

반의회적 대중투쟁은 선거나 후보를 매개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노동자들에게 설득하고 주장해야할 것은 정리해고나 비정규직 문제를 '선거를 통한 해결' '의회진출을 통한 해결'이 아니라, 노동자의 직접행동을 통한 해결, 노동자의 직접정치를 통한 노동자권력을 주장해야 한다.

   

 

5) 과도한 정세판단과 위로부터의 선거개입은 정치조직과 노동자운동의 파산을 초래한다. 혁명당 건설이라는 초심으로 돌아가자.

 

전 세계적으로 자본주의 위기상황이 첨예화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저항이 명백한 계급투쟁의 부활과 혁명의 현실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아직 한국의 정세는 위기상황의 전면화와 계급투쟁의 분출로 나타나지 않고 단지 그 조건들을 충족시키면서 예열되고 있는 과정에 있다. 즉 선거정국 이후에나 경제적 위기 상황(국제-금융.원자재.환율 불안, 수출 감소, 국내-가계부채 문제폭발, 물가상승, 실업.비정규.빈곤 문제폭발 등)이 전면화 될 것이며, 이를 계기로 계급투쟁이 강령적요구를 내 걸만큼 대규모로 다양하게 분출될 가능성을 도출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과도하거나 잘못된 정세판단으로, 선거이후 정세를 선거이전에 주관적으로 규정하여, 아래로부터 존재하지 않거나 준비되지 않은 선거투쟁을 위로부터 기획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칫 그나마 대중투쟁의 불씨로 남아 있거나 아래로부터의 직접행동의 맹아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노동자투쟁들과 희망버스(뚜벅이)–노동자참가단의 흐름을 부르주아 선거의 불구덩이에 밀어 넣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의 현실은 투쟁중이거나 총파업을 주도할 투쟁사업장 노동자 다수가 통진당에 집단 가입하는 등의 선거환상에 빠져있다. 선거환상이란 좌우를 막론하고 선거와 의회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집단적 환상이다. 이러한 환상은 더 혁명적인 후보, 더 투쟁적인 후보, 더 노동자 편인 후보를 내세운다고 해소되지 않는다. 더구나 대중투쟁을 촉발하고 확산시키기에도 부족한 혁명조직에서, 대중투쟁의 불씨를 선거정국에 밀어 넣어, 총선 이후 대선까지 이러한 환상을 갖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우리가 해외의 아큐파이 투쟁에서 얻은 교훈은 대중들의 직접행동과 대중총회 공간에서는 그 어떠한 기성정치와 선거참여 세력들도 배제하고 스스로의 직접정치를 만들어나가려는 대중의식이었으며, 우리가 예비하고 준비해야 할 투쟁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모두가 선거에 빠져 들어갈 때 우리는 선거 이후를 준비해야 한다. 민노총내의 선언운동본부가 갑자기 정치운동으로 보이는 이유는 평소엔 조합주의자들인 이들이 모두 선거에 빠져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중투쟁 없이 선거 국면을 통한 정치적 선명성만으로 정치세력화를 꾀하고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 이들은 아래로부터의 평조합원 운동이나 대중투쟁의 동력과는 거리가 먼 노조관료 중심의 좌파 중도주의 블록 일 뿐이다. 이들의 선거에 대한 환상이나 상층부중심의 정치세력화 시도를 막기 위해서라도 이들의 왼편에 후보전술로 맞서는 것이 아니라, 선거와 연계되지 않는 투쟁전술로 이들이 대중투쟁에 나서게 만들어야 한다. 현재와 같이 주체가 불분명하거나 새로운 주체가 형성이 되기 어려운 조건에서의 후보전술은 선거운동과 대중투쟁을 전투적조합주의자들과 중도주의자들의 영향력 하에 묶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전국에서 극우에서 좌까지 수백의 후보들이 매스컴과 선거운동을 통해 지역노동자들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고 있을 때, 겨우 한 두 지역에서 노동자후보를 내서 정세를 돌파할 수 있다는 도박과도 같은 1%의 환상을 버리자. 선거운동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과 인적역량을 그 어떠한 선거결과와 선거투쟁으로도 해법과 희망을 찾지 못하는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99%의 소외받은 프롤레타리아를 위해 투여하자. 오랜 기간 어렵게 투쟁하고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만큼은 후보를 내지 않아 배신하지 않는 진정한 혁명세력의 존재와 우리의 주장을 알릴 수 있는 새롭고 현실적인 방침을 마련하자.

 

역사는 기억할 것이다. 2008년 이후 중동과 아프리카 프롤레타리아 봉기를 촉발한 사건이 무엇이었으며, 유럽과 북미의 아큐파이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이 어떤 실천을 했는지를, 그리고 2012년 한국의 혁명운동세력은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는지를...

 

선거참여와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은 아무런 연관이 없거나 서로 반대되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대중운동이 있어야 혁명적 정치투쟁이 가능하다. 혁명적 정치투쟁이 가능한 새로운 운동이 한국에서는 이제 겨우 시도되는 단계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의회전술, 후보전술이라는 낡은 한탕주의 운동을 버리고 대중투쟁과 계급의식에 조금이라도 발전을 가져올 수 있는 실질적인 혁명운동을 지금부터 준비하고 실행해야 한다. 2012년 여전히 소수의 혁명세력인 우리의 목표와 임무는 현재의 계급투쟁에 끝까지 함께하며, 다가올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혁명적 전망을 제시하며, 계급운동과 계급의식의 발전에 공헌하는 길임을 명심해야 한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앞으로도,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해방과 혁명의식은 노동자들 자신의 일이고, 혁명가들의 역할은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힘으로 혁명을 만들어가게 하는 것임을 명심하자!

 

-이형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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