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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1/02
    NO! APEC
    젤소미나
  2. 2005/10/31
    안티 삼성 문화제는 끝나고
    젤소미나
  3. 2005/10/31
    소소한 생각들
    젤소미나
  4. 2005/10/31
    늘 반겨주는 경주, 始林
    젤소미나
  5. 2005/10/31
    수세미로 수세미 만들기
    젤소미나
  6. 2005/10/31
    지금도 제대로 말 못하지? 진보 3부작
    젤소미나
  7. 2005/10/31
    빛나는 미소를 가진 친구여
    젤소미나
  8. 2005/10/31
    우리동네 사이기
    젤소미나
  9. 2005/10/31
    혼자 버스를 탔어요.
    젤소미나
  10. 2005/10/31
    호주제여 안녕!!
    젤소미나

NO! APEC

진보네님의 [트랙팩 21: NO! APEC] 에 관련된 글.

 

 

- WANTED! 아펙기동대 부산회동 -아펙반대 2D실사합성애니메이션
No Apec 문화제 상영작

2005년 11월, 대한민국 부산.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 21개 회원국의 정상들이 모인다.
1989년 출범한 APEC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 속한 국가들의 번영과 안정을 목표로 모인 경제협력체다.
그런데 이들은 진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번영과 안정을 위해 모일까? 그들이 말하는 번영과 안정은 혹시 그들만을 위한 것은 아닐까?

 

(참세상 열린세상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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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 삼성 문화제는 끝나고

아침부터 감기기운에 목이 맛이 가고 있었는데...

발바닥을 각목으로 몇대 맞은 것 같고 다리도 퉁퉁 부었고..

화곡동 은진언니네 집에 가다가 내렸다.

아무래도 집에 와서 자야지 내일 수련회 가서 한마디 말이라도 보탤 것 같아서..

뒷풀이 자리에서 내내 삼성해복투 아저씨들과 얘기를 나눴다.

아저씨들은 참 맑다.

맑은 기운에 늘 엎어진다. 일주일동안 전국 삼성 사업장 순례를 한 것을 보면서 내년에 한달이상 한번 걸어보자 했다.

그중 한 아저씨가 내년에 싸움에 이겨서 공장 식당에 다들 모시겠다고..그말이 뭔지 안다.

삼성이 노조를 인정하게 되는 그날의 기쁨을 같이 누리고 싶은 마음, 그때까지 싸우겠다는 결의라는 것을..

왠만한 공장들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헤아려보니 삼성에서 먹어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네..그날을 기다릴께요."

안티삼성 문화제를 준비하면서 사람들을 만나서 가슴이 뻐근했고..

오랜만에 이런 행사 준비를 해서 좋은 시간들을 보냈다.

 

여하튼....

지금은 목과 다리가 아프지만, 고생한 박진동지...삼성해복투 아저씨들 얼굴...

돌아서면서 머리위에 팔을 올려 "동지들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그 아저씨들의 주름잡힌 얼굴, 눈빛...그것만 일단 기억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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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생각들

광마우스..익숙치 않아서 싫어라

나의 휠 마우스가 드디어 맛탱이가 갔다. 난 광마우스의 매끄러운 느낌이 별로여서 바꿀 생각이 없었는데 결국 6천원에 상당한 돈을 주고 광마우스로 바꿨다. 음, 역시 맘에 안들어. 볼이 돌아가는 느낌이 없어서 손에 쥐고 있는 느낌이 영 아니올씨다.

나는 익숙한 것에 영영 머물고 싶은가?

 

예술치료..현무로 이름 짓다

일주일에 두시간 여러가지 재료로 표현하는 놀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드디어 시작했다. 내가 너무 좋아하는 해자언니의 리더로 몇몇 인민들이 모였다. 오늘은 첫시간. 역시 난 파스텔과 목탄, 콩테 이런 것들이 좋다. 풍부한 느낌과 부드러운 질감...

오늘의 주제는 일주일동안 있었던 일중에서 하나를 표현해보는 것과 우연의 효과를 이루어내는 데칼코마니를 해보면서 자기 이름 정하기. 데칼코마니에서는 육질의 느낌이 역동적으로 나와서 나도 놀랐고 해자언니가 두마리 뱀이 마구 꿈틀대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내 이름은 현무로 정했다. 맘에 든다.

 

동생의 결혼..드디어 나는 우리 집안의 진정한 솔로가 되다

내년 군대의 사택을 받기 위해서는 10월안에 결혼신고를 해야 한다고 해서 이달 안에 처리하기로 했단다. 내가 시간을 내지 못해 얼굴도 보지 못하고 녀석이 유부남이 된다. 동생이나 올케에게나 너무 미안하다.

내동생..여린 감수성을 가졌으나 농촌사회와 장남이어서 그것을 누르는 법을 배워야 했던 눈물많은 막내이다. 요즘도 충격을 받으면 술먹고 울면서 전화한다. 한창 진로를 결정할 당시 엄마가 아프다 보니 군인의 길로 뛰어들었는데 그때 옆에서 이런저런 얘기 한마디 못했다. 미안한 것 투성이지..

11월에 녀석이 훈련 다녀오면 술이나 한잔해야겠다. 진정한 대작을 해야겠군.

그리고........

나는 드디어 우리 집안의 하나 남은 결혼 안한 자식이 되어버렸다.

흐흐...시원섭섭하네..

울엄마 날 또 들들볶는 것 아닐지 아주 기대만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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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반겨주는 경주, 始林

대학 교지 후배 결혼식이 있어서 경주에 다녀왔다.
날씨가 너무 좋아서 기차에서 잠을 안자고 내내 풍경을 봤다.
동대구에서 경주까지 통근열차를 타고 갔는데 맞은편 자리에 꼬맹이와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있었다.
아이와 여자를 무심히 바라보다 서른 넘으면서 가졌던 이상한 슬픔이 왈칵 치솟았다.
'나는 아마 아이를 가지고 낳는 경험을 못해보겠지.'
내가 생각하는 가장 동물적인 경험은 섹스보다 임신을 하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것이다. 그 원초적인 경험을 어쩌면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내 선택일지라도 많이 우울하고 슬퍼진다.
종족보존의 본능은 남자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니까..
<앞자리에 앉아있던 모자>
 
 
경주역에 내리니 '아, 그렇지 여기는 남쪽이야, 이 따뜻한 기운속에 25년을 보냈구나.' 훈풍에 감격하고 말았다.
서둘러 결혼식에 가서 후배를 만나고 교지후배들과 밥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아이들이 학교에 가자고 했다.
결혼식에 온 후배들은 군대를 다녀왔고 4학년쯤 되니까 선배들을 잘 챙긴다. 마음을 헤아린다는 말이다. 감사하게도..
학교에는 고향집에 내려올 때 한번씩 들르곤 했지만 워낙 명절이 껴있으니까 교지사무실에 들어가본 일은 벌써 여러해가 지났다.
오랜만에 가본 사무실은 늘 그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제일 먼저 창가에 가서 동대교와 학교 앞에 펼쳐져 있는 풍광을 바라보았다. 나무들이 많이 자랐다. 세월이 그렇게 흐른 것이겠지.
서울에 있으면서도 가끔 그 창턱에 앉아 100원짜리 커피를 마시면서 바라보던 풍경을 떠올리곤 했다. 始林교지는 생각이상으로 내 맘에 확연한 어떤 기억인게 분명하다.
철제 캐비넷, 낡은 책상, 의자, 바닥에 날아다니던 먼지, 사람들이 오가며 피워대던 담배연기, 100원짜리 커피, 삐걱이며 열리고 닫히던 문...사람들 사람들...
<영종이가 찍어준 것!>
 
전에 만났을 때 잘 몰랐는데 군대 다녀오고 4학년이 된 영종이는 어느새 약간 능글능글한 아저씨의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넘의 돼지 때문에 잘 움직이지 못하는 농촌총각 재영이도 본지 한참 되었고..(돼지고기값 올랐다고 하니 술한잔 사라고 해야겠다.)
결혼식 내내 영경이와 얘기를 못한게 영 맘에 걸리네..
1학년때 진짜 귀여웠던 00학번 우섭이는 늘 머리속에 교지 아이템으로 가득차 있는 열정적인 편집장이다.
후배들이 나이를 먹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괜찮구나.
나이차이란 참 별거 아니다. 비슷하게 1,2학년때 얘기들 하고, 사는 얘기도 하고..그런 것이지. 그러면서 내 나이도 희미하게 저멀리 넘어갈 무렵...
 
갑자기 문이 열리며 오늘 결혼식한 후배와 비슷하게 생긴 한 꼬맹이가 들어왔다. 수습인 아이인데, 방년 19살이란다. 갑자기 나이가 내 온몸을 덮친다. 허걱...멀뚱멀뚱 우리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후배님을 보면서 너무 귀여워서 미치는 줄 알았다. 아무리 우겨도 얼굴빛이 틀리긴 하더라..예쁘다.
모쪼록 고민하는 것들 잘 풀어가면서 좋은 책 만들고, 졸업들 하시길..
 
그리고 나는 석장에서 막걸리 딱 3잔 마시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어...진짜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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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세미로 수세미 만들기

요것이 포획한 수세미...남의 집의 것을 훔친 주제에 흐뭇한 농부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니!!!

이것을 물속에 담궈 2~3일을 보냅니다. 그냥 껍질을 벗기기 힘들기 때문이죠. 워낙 커서 그에 맞는 대야가 없기 때문에 세탁기에 물을 받아서 이틀간 담궈놨습니다.

 

주먹과 벽돌로 내리쳐서 껍데기를 벗겼습니다. 끈적끈적한 즙이 마구마구 나오던데요. 게다가 얼기설기 그물같은 섬유질에 단단히 싸여있는 씨를 빼기 위해서는 반으로 잘라야 했기에 그전에 기념컷을 찍었습니다.

 

 

자~보시라..즙을 짜내고 씨도 다 빼고 난뒤의 수세미의 모습.

바디용품 파는 곳에 파는 그 수세미랑 비슷하죠?

요놈을 말려서 한개는 욕실에서 한개는 부엌에 쓸 예정입니다.

그리고 짜낸 즙은 냉장고에 보관했습니다.

조금씩 덜어서 화장수로 쓰면 좋다고 하네요..

게다가 수세미를 통째로 끓이거나 원액 그대로의 즙은 기관지, 천식, 요통, 진통제, 복수차는 것 등등 거의 만병통치약 수준이더라구요..

먹기는 좀 그렇고 그냥 화장수로 쓰려고 합니다..

밀가루나 꿀을 섞어서 팩을 해도 좋다고 하는데, 원하시는 분은 방문하세요..나는 귀찮아서 팩은 안할텐데 원하는 분께는 팩해드리죠 뭐...친절한 선희씨...

원액이 꽤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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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제대로 말 못하지? 진보 3부작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진보 3부작을 인터넷으로 열심히 봤다.
분노하지 않는 내가 이상할 정도였다. 그만큼 언론에서 그리는 그림이라는 것에 대한 뼈에 사무친 배신감과 그에 따른 포기이겠지.
민주노동당을 위한 프로그램이라고나 할까. 나는 그저 80년대부터 지금까지 노동운동의 동영상을 잠깐이라도 보고 싶은 마음에 참고 봤다.
86년 구로동맹파업 이제 2006년이면 20년을 맞이한다. 관련 다큐도 준비중인 것 같던데..

내가 그자리에 없었던 시기에 대해서는 역사로 인식하고 여러 평가를 본다고 할 지라도, 내가 있었던 시기에 대해서 빼먹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닌 것에 좀 생각이 많다.
(그러니 80년대부터 달려온 선배들로서는 그 엄청난 시기에 있었던 엄청난 조직들과 사건들이 거의 생략된 그 영상물이 얼마나 기가 찼겠나.)
90년대 중반, 그러니까 민주노동당이 실체를 제대로 드러내기 전의 당운동에는 진정추가 다가 아니었다. 내 기억속에서는..또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는..기록된 문서속에서도..
민정연..민중정치연합은 그래도 지부가 지역마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작지 않은 세력이었던 것으로 안다. 진정추와 민정연의 통합과정은 지난했고, 많은 사람들이 패배감을 가졌던 것도 어렴풋이..10년 가까이 된 일이니까..

내가 민정연을 기억하는 것은 그때 대학선배가 지부장이었고 제주도 출신 털보아저씨가 같이 상근하고 있었고 꽤나 들락날락한 덕분이다.
(졸업하면 당연히 노동운동, 정치운동에 몸을 던질 것이라 생각했었던 대학생활이었으니까..)
두분을 통해서 울산화학공단의 노동자들을 만났고, 경주지역의 택시노동자들을 만났다.
그리고 몇몇 동기들과 경제학과 철학에 관한 외부학습을 민정연에서 받았다. 조그만 사무실에 석유난로를 피워놓고 놀다가 학습하고, 지역의 노동자 아저씨들과 소주잔을 부딪치며 나누던 얘기들이 어렴풋하다. 그때 꼬맹이어서 동지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어색하고..그 나이 많은 아저씨들한테 그럴 수도 없었다. 흐흐..결국 대학선배에게는 형, 지역의 노동자들이나 털보아저씨한테는 결국 아저씨로...호칭정리를 했다. (그때 들어버린 습관인지 모르겠는데..지금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가끔 나이 많은 노동자들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아저씨라고 불렀다.)
말이 별로 없던 털보아저씨가 90년대 말 중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건너건너 들었고, 푸른색 작업복을 두툼하게 걸치고 웃던 수염이 텁수룩한 그얼굴을 기억하며 괜스리 울적해했다. 지금도 그 아저씨 얼굴이 이렇게 선명한데...

이런 기억이 8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얼마나 숱하게 노동자들과 지역의 활동가들 사이에 이어져 왔는지를..말할 수 있는 방송이 있을까? 왜 그사람들은 그렇게 살아왔을까? 반드시 힘있는 조직으로 성장하지 않아도, 혹은 세월이 흘러 그것이 실패한 운동이라고 말하더라도, 그들(혹은 우리)이 관계를 맺으면서 가져갔던 삶의 희망, 패배속에서 한편 패배하지 않는 그 마음의 귀퉁이를 도대체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있나?
그것을 제도권 방송에서 말할 수 있을까? 그 경험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흡족할 만큼..동의할 만큼..아니..이해라도 하면 참말로 다행이다.

그런데 문제는 말이지..아마..민주노동당이 정권을 잡아도 불가능할 것 같다는 것이지..흐흐..승리의 관점에서 정리하지 않을까..
뒤안길로 사라진 털보아저씨 같은 사람은 그 관점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껄..아마도..그렇겠지..
기록된 역사란 생각해보면 대단한 것이지만, 참 헛헛한 구석도 많다.
그래도 달리는 기차에는 중립이 없고, 사람들은 레일사이에 구석구석 놓여있는 돌맹이처럼 이름없이 소리없이 또 살아가겠지.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

비가 많이도 온다. 오늘밤 털보아저씨를 생각하며 유일하게 집에 있는 술인 김빠진 소주한잔 마셔야겠다.

(2005.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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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미소를 가진 친구여

나도 결론부터 말하면..그대가 참 좋다.

어른도 아이도 아닌, 길밖으로 나가야 하는
초조하고 불안한 그 시기에 만난 그대.
어떤 편견에도 굴하지 않는 왕성한 호기심과 호기로움.
그대의 그런 모습이 참으로 당당해서 마음이 갔다네.
세월이 흐르고, 몇굽이를 또 돌아서 우리는 차츰 나이를 먹어가고,
나이듦에 부끄럽지 않으려는 몸부림을 바라봐주는 그대.
그대의 호기로움은 늘 한결 같고, 부단히 움직이는 그대,
그나이에 갖추는 편견을 쌓아가지 않고 더욱더
밖으로, 밖으로 몸을 내밀고,
안으로, 안으로 내면을 만들어 가고 있는 그대,
그대 있어서 위안을 얻는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나라고 불안하지 않을까, 나라고 세상의 편견에 자유로울까.
가족, 결혼, 돈, 명예 이런 개념들이 가끔은 나를 쥐흔들어놓고,
태풍이 논바닥을 긁어가듯 마음을 할퀴고 가기도 하고,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쓸때, 나역시 대단치 않구나
우울함에 빠져들때...
그대 따라주는 술한잔과 수많은 얘기들 속에
내가 보잘 것 없는 인간은 아니구나 어깨에 기운이 생긴다는 것을
그대는 아시는지.

그대 바라보는 아름다움이 내안에서 공명할 때..
내가 바라보는 아름다움을 그대가 온전히 이해할 때..
아..이런 짜릿함!! 카타르시스!!

우리가 오십을 살지, 육십을 살지, 아니면 내일 당장 눈을 감을지,
알 수 없지만..
벗이여..나는 그대와 함께
나이듦과 세계와 그대와 나에 대해, 숨어있는 작지만 큰 진실을,
또 그 아름다움과 슬픔을 오래오래 함께 나누고 싶다네.

나는 그대를 진짜 좋아한다네..그대 아름다운 모습을..

<비오는 날..한껏 맞으면서 뛰어들어간 그대의 집에서 글을 본날 밤, 답신을 보내오. 혹 그것이 나에게 보낸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내가 그글의 주인공이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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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 사이기

가끔 자전적, 혹은 농촌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보면 다른 곳에도 이런 사람들 있었구나, 그랬구나 하며 고개 주억거리며 우리동네로 달려가게 된다.
우리동네에도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사이기'이다.
본명은 알 수 없고,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아주 어렸을 때에도 그는 그저 사이기였고, 내가 자라서 대학생이 되고 30대가 넘은 지금도 그는 사이기이다.
키가 좀 작았고 우리집에서 두부공장으로 가는 길에 있는 감나무가 입구에 있었던 그 집에 할머니(그의 어머니)와 둘이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아마 다른 가족이 있었을 텐데..잘 기억은 안난다.)

그는 온동네 어른들 잔심부름을 했는데, 내가 중학교 가기 전까지 그를 보려면 장터 어드메쯤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을 찾으면 되었다.
그는 아이들을 비행기를 태워주거나 말이 되어주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유치원, 초딩때에도 그는 이미 나이가 20대가 넘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늘 그는 사이기였다.
약간 지능이 부족했는지 어떤지 우리가 "사이가 놀아도."라고 하면 두말 없이 움직이는 놀이기구가 되었다. 엄마가 말리기 전까지 나도 꽤 그의 놀이기구를 이용했던 것 같은데...

우리 동네 바다가 알려지면서 휴양객이 늘자 그는 그때 아이스크림이나 음료수 같은 것을 아이스박스에 넣어서 팔러 다니기도 했고, 어디서 오토바이를 구해서 핫도그를 담아서 팔러 다니기도 했다.
때마다 그는 하는 일이 바뀌었다. 그렇지만 사춘기가 되고 여고로 진학하면서 사이기란 이름은 내가 궁금해 할 것에서 점점 멀어졌다.

대학 입학 자취를 하다가 집에 돌아온 날, 일부러 솔밭에서 미리 내려 바다를 보면서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정말 오랜만에 사이기를 만날 수 있었다.
그동안 그가 여전히 우리 동네에 있었는지, 아니면 외지에 나갔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사이기라고 부르기가 민망할 정도로 그는 늙어있었다. 머리는 히끗히끗했고, 얼굴에는 깊은 주름 몇가닥이 이마와 눈가에 고랑을 파고 있었다. 표정은 어릴 때나 그때나 별로 변함없는 무표정했지만...
난 갑자기 미안했다. 그는 나보다 적어도 스무살은 많았을 텐데 사이기라고 마구 불러댔다는 것이..
그얼굴의 주름에서 그가 힘들게 하루하루 견디고 살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마주친 그를 외면하면서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바다의 풍경에 집중했다. 여전히 그를 아저씨라고 부를 수 없었다.
지금도 그를 사이기아저씨가 아니라 사이기라고 부르고 있으니!!

그 이후 서울에 올라와서 살다가 한번씩 내려가면 2년에 한번 꼴로 그를 만나게 되지만, 똑같이 그를 외면한다. 그는 사이기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나는 기억한다. 그가 태워주는 비행기에 실려 우리동네 위로 빙빙 날아가던 그때..그 희열을...
사이기가 이제 좀 편히 살고 있기를..멀리 타향에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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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버스를 탔어요.

조그만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날도 역시 소녀는 남색 리본이 달린 남색 유치원 모자와 원복을 입고 노란색 가방을 크로스로 메고 유치원에 가기 위한 준비를 마쳤습니다.
여느날과 다름없는 아침이었지만 그날은 소녀에게는 아주 특별한 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같이 유치원을 다니던 두동무가 모두 유치원에 결석하는 날이어서 혼자 버스를 타고 유치원에 가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소녀가 유치원을 다니던 시절은 지금보다 훨씬 전이었고, 시골이었기 때문에 유치원 차가 없었고, 유치원은 집앞에서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 가야 하는 거리였습니다.
엄마는 소녀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습니다.
"제일 앞자리에 앉았다가 아저씨가 내려라 하면 내려라. 그리고 딴짓하지 말고, 졸지 말고. 알았나?"
소녀는 긴장한 두눈동자를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드디어 버스가 도착했습니다.
소녀의 엄마가 소녀의 손을 꼭 쥐고 버스 앞으로 가서 기사아저씨와 차장언니에게 행선지를 말하며 연신 꼭 내리게 챙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소녀는 엄마가 시킨대로 맨 앞자리에 앉아 무릎위에 꼭 쥔 손을 조심스레 내려놓았습니다.
기사 아저씨가 소녀에게 물었습니다.
"니가 약국집 막내딸이가?"
"네"
"몇살이고?"
"일곱살."
입술을 꼭 다물고 두눈을 크게 뜨고 앞만 바라보면서 앉아있는 소녀가 귀여웠던지 아저씨는 연신 빙그레 웃으면서 돌아보았습니다.
차가 슬금슬금 출발하자 아저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앞만 바라보며 운전을 하셨습니다.
창밖에는 바닷가 마을인 우리 동네가 조금씩 뒤로 물러나는 것이 보였습니다.
소녀는 어느새 손을 창틀에 얹고 그위에 턱을 괸채 밖을 보고 있었습니다.
동무가 없이 처음 유치원을 가는 소녀의 마음은 긴장감과 뿌듯함으로 가득차 있었고,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어느새 유치원이 있는 마을에 도착했고, 아저씨가 의자에서 내려오는 조그만 구두를 보면서 기특했는지 허허 웃으셨습니다.
"잘가라"
"고맙습니다."
엄마가 시켜서 감사인사를 했지만 사실은 소녀는 뭐가 감사한지는 잘 몰랐습니다.
유치원으로 종종 걸어가는 길이 이제서야 가벼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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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좀 일찍 잤더니 오늘도 새벽 6시에 눈을 떴다.
아주 오래전 얘기이다. 처음으로 혼자서 버스를 탔던 날의 기억.
무지 긴장한 강한 기억이었는지 창밖으로 보이던 바다의 색깔, 버스의 시트 색깔, 버스 안의 냄새, 긴장한 느낌이 그대로 남아있다.
나름대로 귀여웠던 시절..푸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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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여 안녕!!

어제 뉴스를 보고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어머니 성을 따를 수 있고, 개인별 등록제이고..뭐뭐..가능해졌다는 말을 들으면서 실감이 안났다.
아..정말 이루어졌구나..오늘 회의자리에서 모두 그얘기를 하면서 다들 기뻐했다.
한편으로 유림 및 성균관 관련 늙은 아저씨들의 침통한 표정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들은 이미 법적인 차별이 사라진 이마당에 호주제가 남녀차별의 기제가 아닌데 왜 전통가족의 근간을 흔드냐고 주장한다. 유치하게 반문해보면 왜 당신들은 별 효용성 없는 제도를 틀어쥐고 싶냐고 질문해본다.
결국은 호주제가 남성의 기득권의 근간이라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당신들의 호주제유지 주장이 아니냐는 것이다.
제도는 한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남성 중심의 가족관계는 더나아가 직장, 정치, 문화, 국가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것을 떡하니 50년 가까이 호주제가 당당하게 부끄러움 없이 존재하면서 한국사회의 근간이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제도의 변화보다 관습은 더욱 느리게 변화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 제도의 변화는 관습과 정서를 좀더 빨리 바꾸는데 일조를 하게 될 것이다.
평등한 부부, 평등한 가족, 평등한 사회...이 모든 나의 꿈을 이루는데 작은 디딤돌 하나 놓은 기분이다. 물론 호주제 철폐를 위해서 직접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나름대로 그제도의 문제에 대해서 참 많이 고민하고 참 많이 얘기했다고 생각한다. 10년 넘게...
이런 고민들이 하나둘 모여서 이루어낸 성과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호주제 철폐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인 모든 남성과 여성들과 자축을 하는 심정이다. 4년 넘는 법정 공방을 지치지 않고 지켜낸 호주제 철폐를 위한 시민모임의 모든 사람들은 복받아야 한다.히히히..
만세 만세~~~~

ps1.근데..호주제 철폐 되지 않으면 결혼 안하겠다는 내 결혼거부의 이유가 하나 사라졌는데..이제 뭐라고 하면서 안한다고 그래야 하나..휴..흐흐흐흐....
ps2. 동성교배로 인해 윤리가 문란해진다는 유림 쪽 주장은 참 불쾌하다..문구자체가 너무 불쾌하다...참 싫다..유림들...

(2005.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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