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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5/10/31
    할머니와 구전가요
    젤소미나
  2. 2005/10/31
    술김에 기차타고 부산으로
    젤소미나
  3. 2005/10/31
    30대 미혼여성, 꿈은 있나
    젤소미나
  4. 2005/10/31
    대자투쟁, 긴싸움을 끝낸 창곤이형에게
    젤소미나
  5. 2005/10/31
    지리산, 소의재 풍성한 삶이여
    젤소미나
  6. 2005/10/31
    죽음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
    젤소미나
  7. 2005/10/31
    '꼭'이란 놈과 싸우다
    젤소미나
  8. 2005/10/31
    가오리에 남은 사람들(1)
    젤소미나
  9. 2005/10/31
    고향마을 오일장, 진한 팥죽
    젤소미나
  10. 2005/10/31
    people의 뜻
    젤소미나

할머니와 구전가요

새벽에 경주에 도착해서 조카들 방에 누웠으나 잠은 아니오고..
생뚱맞게 할머니 생각이 났다..
어떤 겨울밤, 할머니가 부르는 옛날 노래를 들으면서 수많은 질문을 했는데 귀찮은 기색없이 낱말 하나하나 설명하던 할머니.
너무 그립다.

"상큼상큼 쌍가락지 호작질로 닦아내어" "할메야, 호작질이 뭔데"
할머니는 마치 가락지를 진짜로 손에 든 것처럼 시늉을 하며 "요래 들고 옷고름으로 살금살금, 요래요래 닦는기를 보고 호작질이라 칸다."
"먼데 보니 달일래라 잩에 보니 처잘래라""할메야 달이 뭐꼬?"
"여자가 결혼을 하모 비녀를 꽂는다 아이가. 비녀 꼬븐 기 꼭 달가타 캐서 결혼한 여자를 달이라꼬 했다 아이가."
"그 처자야 자는 밤에 말소리도 둘이래라 숨소리도 둘이래라.
호랑호랑 오라바시 거짓말쌈 말아주소 동지섣달 그믐달에
문풍지 우는 소릴래라." "오라바시는 뭔데?"
"오라바시는 오래비를 오라바시가 칸다.""오래비는 뭔데?"
"오빠야..오빠야가 오래비고, 오래비가 오라바시다."
"죽고재라 죽고재라 자는 듯이 죽고재라.
내가 죽거덜랑 앞산에도 묻지 말고
뒷산에도 묻지 말고 연대밭에 묻어주소
연꽃이 피거덜랑 연화라 불러주소."
"할매야 연대밭이라 카모 연꽃이 많이 피는 곳이가?"
"맞다. 그라고 이노래가 무슨 노래고 하모. 겨울 섣달 그믐 깜깜한데 달이 흔들흔들 비치니까 처자가 자는 방에 꼭 사람이 있는 거 맨치로 보였던 기라. 그래가 처자 오래비가 처자보고 니는 처잔데 와 남자로 끌여들였노라고 지 동생을 뭐라했는기라. 처자는 마 억울해가 죽었삐고, 죽으면서 연대밭에 묻어달라 유언을 하는기재. 할메가 어렸을 때 동네에서 배운 노래다."
"할메야 오래비가 너무 못됐다. 와 동생을 못믿노. 그러니까네 동생이 죽어삤지. 그라고 그 동생은 그런 걸로 죽기는 와 죽노"
"옛날에는 여자들이 결백하다꼬 보일라카모 죽어야 했데이."

어렸을 때 처음 이 노래를 들은 뒤로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가서도 할머니 댁에 가면 이노래를 불러 달라고 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이해하면서는 더욱 애잔해졌고, 할머니와 나눈 그 대화를 잊지 않는다. 지금도 생생하게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좌우로 흔들흔들 흔들면서 할머니가 부르던 그 노래를 들으면서 노래 중간중간에 툭툭 끼어들면서 질문했던 그 모습이 생생하기만 하다.
할머니!
나의 얘기 곳간이었고 같이 내 동화책을 나란히 누워서 읽었고, 얘기꺼리를 좋아하고 책을 좋아하는 유년의 정서를 만들어 주신 고마운 분.
아직도 할머니의 마당에 뛰어들면 "아이고야. 니가 왔나. 우짠일이고." 웃으면서 반겨주실 것만 같은데, 이제 어디에서고 할머니의 흰머리카락 한개 조차 볼 수가 없다.
믿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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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김에 기차타고 부산으로

영등포역으로

노래마라톤이 끝나고 새벽까지 술마시다가..뭔가 뒤틀렸었는지..
혼자 새벽길 터벅터벅 걸어 집에 가다가 펑펑 울다가..친구가 보고 싶어서..그냥 영등포역으로 갔네요..불꽃같았던 내친구..내일 모레면 애엄마가 되는 내친구..그아이가 사는 부산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어요. 60% 술기운이고..40%는 눈빛으로 알아주는 친구가 보고싶다는 마음이었죠..

그 친구는 노래패였고..나는 교지 편집위원이었어요..

활동하는 방식도 하나에서 열까지 달랐고..표현하는 방식도 달랐고..술먹으면서 그 술집을 장악하는 것이 그아이가 속해있는 노래패였다면..우리는 조근조근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밤을 새는 스타일이죠..쉽게 격해지거나..감정을 마구 드러내거나..정해진 룰을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그래야 한학기를 버티면서 책을 만들 준비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노래패는 다르죠? 잘 아시죠?
서로를 조금씩 부러워했답니다. 무대공포증, 두눈들이 나에게 와서 박히면..몸이 딱딱하게 굳어서 어버버 거리는 나는..무대위에서 수많은 대중앞에서 거침없이 표현하는 그 친구..그 힘으로 사람을 조직하는 활달한 성격..그게 너무너무 부러웠고..그친구는 감정과 사람관계에 마구 휘둘리거나 생각이 왔다갔다 하지 않고 하나를 향해서..조금씩조금씩 채워가기 위해서 책을 읽고..글을 쓰고(되지도 않는 글이지만) 고민하는 내가 부러웠다고 하더군요.

노동자가 된 내친구..

우리는 졸업을 했어요. 나는 서울로 와서 직장생활하다 쫓겨나고 고민끝에 노동문화단체에서 상근활동가로 일하게 되었고..내친구는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가 되었습니다.
울먹거리며 전화통화를 하던 날은 재능교육교사노조를 만들기 위해 파업에 들어갔던 어떤 날이었습니다. 내친구가 경주지역에서 열심히 노조건설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를 했죠.
상투적이지만 정말로 자랑스러웠어요. 자기가 서있는 그자리에서 투쟁하는 것! 그래서 스스로 노동자가 되는 것! 친구 왈.."선희야..요즘은 진짜로 살맛난데이..너무너무 즐겁고..살아있는 것 같다." 이말은 참으로 고전이죠? 고전은 몇세기가 지나도 진리에 가깝게 살아있지 않을까 싶어요.
내가 자랑스럽다고 말하자..그아이는 니가 활동하고 있어서 적극적으로 할 수 있는 거라고..
둘이서 아이들처럼 울먹울먹 거렸습니다.
그리고 그아이는 너무나 착하디 착한, 형과 결혼했습니다.

부산에 도착했어요..

눈을 뜨니 구포를 지나가고 있었고..아~하..큰일났다..눈앞에 오늘 해야할 일들이 전기불처럼 지나치고..이 사실을 어떻게 알릴 것이며..나는 뭐라고 할까..아이고...조금만 덜 취했어도..으흑흑
그래도 어쩌겠어요..부산에 와버린 것을..친구에게 전화를 했죠..
"동주야..여기 구포다..너거 집은 부산역에서 머나?"
"뭐~어..니 부산왔나?" 놀란 친구의 목소리와 활당한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서면에서 만나기로 했죠..
그리고 먼저 도착해서 친구를 기다렸습니다..저만치 서서 나를 쳐다보면서 피식 웃는 산만한 배를 하고 있는 친구가..처음으로 던진말..
"미친년."
밥을 먹고..찻집에 앉아서..수다를 떨기 시작했죠..남편얘기..시댁 얘기..주변에 보이는 학교 사람들 얘기..내가 사는 얘기..
그중에 문득 친구가 "내가 가르치던 애 아빠가 민주노총 쟁의국장인데 서울에 가있고..의문사.." 말을 잘랐습니다.
"성호형? 박성호?" 하하..노문센터 박성호 회계감사님의 아이들이었어요..세상이 이렇게 좁아도 될까 모르겠어요..덕분에 성호형 집안 얘기도 들었네요..
친구는 여전히 불꽃처럼 살고 있어요. 시댁의 가부장적인 생활방식에도 과감히 칼날을 들이대고..남편에게도 당당하게 집안일을 자기 일로서 하게 하고..아이도 그렇게 키워야 한다는 사실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알게 하고..
내친구들..지가 힘들다고 끙끙거리다가 훌쩍 도망쳐서 저를 찾아온 나를, 그렇게 사는 일이 대단하다고..오히려 고개를 숙여보이는 친구앞에 쑥스럽지요..히히..
몇일 뒤면 엄마가 되는 그아이와 올해가 가면 서른이 되는 나는 처음 만났던 94년 여름처럼 재잘거리는 아이들 같습니다. 아마도 이런 풍경이 그리웠나 봅니다. 몇시간을 얘기해도 끝날 것 같지 않게 목이 쉬도록 수다를 떨고..왠종일 같이 있어도 지루하지 않고..즐겁기만 한..오후의 풍경이요..
그리고 부른 배를 슬슬 만지는 내손 끝에 느껴지는 온기..작은 움직임..임산부의 배는 경이로움 그자체입니다. 골초인 엄마가 담배를 끊도록 만든 아이라서...더 대단하지요. 흐흐...

그뒤에

다시 서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선로에 서있는 철도노동자들에게 마음으로 인사하고.. 사실은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꼬실이형에게 먼저 전화를 했어요..혼났죠..나에게는 이유가 있지만..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니까..명확하니까..변명도 하지 않고..잘못했다고..
그리고..이러지 말아야겠어요..뒷수습이 힘든 것보다 부끄러워서..창피해서..하지 말아야겠어요..다음에는 당당하게 휴가 갈래요..라고 말하고 댕겨와야겠어요...

(2002.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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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미혼여성, 꿈은 있나

[친구를 만나다]

서울와서 참세상 BBS 동호회에서 만나 햇수로 벌써 5년째가 되어가는 친구가 있다.
둘다 홈페이지를 가지고 있어서 문득문득 글을 남기기도 하고..
봄이 가기 전에 만나야 되지 않겠냐는 약속을 하고서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만났다.
이 친구가 워낙 한 직장에 오래 머무는 일이 별로 없는데, 이번에는 1년을 채워야겠다는 목표아래 꾹 참고 회사생활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회사사람들 얘기를 하다가 현대카드 광고 얘기가 나왔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이 광고에 대해서 나도 나름대로 분노하고 있었는데, 그 친구도 그랬다.
엘리트주의의 전형 아니냐는 얘기이다. 주 5일 근무를 겨냥한 광고에 대해서 열심히 일하고 멋진 차와 멋진 애인과 함께 떠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사람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가 말이다.
돈 좀 버는 전문직에서나 가능한 말이다라는 얘기이다.
더 나아가 5일동안 열심히 일하고 2일 동안 멋지게 논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한 환상인지를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다며 분노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잘논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잘 논다는 것은 일상에서의 자신에 대한 투자와 꾸준히 쌓아가야 하는 것이지 죽도록 일하고 나서 잘 논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본주의 적인 성공한 사람의 상을 제시하는 것일 뿐이라는 말이다.
무엇보다 친구는 왜 열심히 일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혼신을 다바쳐 일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어차피 내일이 안보이는데.
40대까지 10여년 바짝 열심히 일해서 탄탄하고 안정된 생활을 만드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오늘이 죽어 있는데..

주 5일 근무는 허상이다. 친구는 2일간의 휴일은 열심히 일한 5일간의 스트레스의 배출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투자로 스스로가 성장하는 풍요로운 시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광고처럼 되면 일과 휴식의 엄청난 이분화에 따른 분열을 누가 감당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당연한 말이다. 매일매일이 자신을 돌아보며 쉬는 시간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친구의 말이고 나역시 한발 더나아가 하루의 8시간은 노동문화운동으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노동문화운동의 주장을 설명했다.

상기되었지만..어느새 둘은 이게 실현되기 어려운 꿈일까? 큰 욕심인가?

[절망과 꿈이 없는 20대,그리고 30대 미혼 여성으로 한국 땅에서 산다는 것! ]

나나 그친구나 내년이면 서른살이 된다. 서른살이 된다고 해서 특별히 내 생활 조건이 바뀌는 것도 아니고 그저 또 하루를 사는 것일텐데..40대까지를 바라봤을때..참 갑갑하다.
"30대가 되면 직장을 옮겨다닐 수 있는 폭도 훨씬 좁아지고, 파트타임의 일을 할때 한국은 아직도 직업에 대한 편견이 너무 심하잖아. 거기다가 전문직으로 입지를 세우기도 힘든 일이고..결국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결혼 밖에 없는 것이지. 그래서 내 주변의 20대 후반의 여자애들은 너무너무 초조해 해. 너도 알다시피 나는 결혼에 대한 꿈도 환상도 없고, 결혼생활을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은데..앞이 안보여. 한편으로는 한국이라서 더 심한 것 같아. 욕심이 나는 것은 다른 문화를 만나보고 싶지. 담배하나 피우는 것 하나도 다른 사람 눈치를 봐야 하고, 예를 들어 내가 청소부를 하겠다고 해봐봐. 주변에서 난리가 날 걸..직업을 선택할 때도 가족과 친구들의 눈치를 봐야 하고..옷차림, 걸어다는 것 하나하나 마찬가지지. 선택은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을 하던가, 아니면 주위의 시선에 대해서 나를 놔주던가, 아니면 이땅을 떠나던가.. 앞으로를 위해서 선택을 해야 하는 때인것 같아. 나도 살아야 하니까"

내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우리의 이십대가 다르지 않기 때문에 그 절망의 깊이를 알고 있어서이다.
90년대 중후반, 철학의 빈곤, 부정을 먼저 해야 하는, 적과 아의 뒤섞임의 시대. 사회에 첫발을 딛는 순간 IMF를 맞아 오갈데 없이 해매었던 숱한 청춘들이다.
폭력적인 적에 대한 존재를 알았고, 그래서 지금에 와서 평가가 어떠하든 당시에는 자신의 몸을 던져 싸워야할 명확한 목적이 있었던 선배들의 시대가 얼마나 견디기 힘든 고통을 감내해야 했는지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그래도 우리가 보기에는 명확한 목적이,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면 이렇게 될 것이라는 계획과 꿈이 참 부럽다.
우리는 어떤 일을 두고 이게 될까?라는 생각부터 한다. 왜? 작은 것 하나도 되는 것을 본적이 없으니까..그래서 우리는 질문을 던졌다. 나는 왜 여기에 있나? 나는 왜 이것을 하나? 사회에 나가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운동을 하면 나는 행복할까? 내 앞가림이라도 감당해낼 수 있나?
이 모든 질문의 배후에는 잘 안될 것이다라는 부정의 의미들이 그림자처럼 깔려 있다.
오늘을 산다는 것, 그래서 내일이 만들어진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하나도 즐겁지 않고, 한가닥의 꿈도 보이지 않아서 내가 무슨 꿈을 꾸었는지도 거의 지워지고..희망이라는 말에 코웃음 치는 오늘..그래서 일은 그냥 돈받기 위한 정신이 떠난 시간이며, 휴일은 멍뚤린 가슴에 뭔가 채워넣을 것이 없나 두리번 거리는 발길이라..그 이전의 어떤 세대들 보다 영화를 열심히 보고...음악을 열심히 듣고..
개개인들이 표현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고, 살아가는 방식에 차이가 있지만 늘 내 또래들을 만나면 암울하고 절망스런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전화통화를 하게 되면 누구나 묻는 말..
"잘 지내냐?"
"너는 잘 살고 있나? 나야 뭐..죽지 못해서 살지뭐.."
"나도 그렇지 뭐.."
노문센터에서 일하기 전까지 잎에 달고 다니던 말이다. 죽지 못해서 산다..

[살기 위해서 ]


운동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을때 회사에서 웃기지도 않은 이유로 짤리고, 이런저런 상실의 아픔까지 겹쳐서, 이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었다.
회사에서 짤리기 전부터 이건 사는게 아니다 싶었다. 회사생활에서 향휴 몇년 동안 생활하면 전망이 보이겠다라는 생각이 들 수 없는 탄탄한 구조에 숨막혀 있었으니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포기해버린 나의 싸움에 대한 패배감까지..살고 싶었다.
99년도에 노문센터 준비위 활동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일하고 있는데..일상에서의 어려움이나 괴로움..일의 항상 즐겁냐고 물으면 그것은 아니지만..적어도 죽지 못해서 살고 있는 상황도 아니고..내 의지로 선택한 일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있고..같이 사는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들 속에 내가 있어서..좋다. 친구도 나보고 참 다행이라고 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한편 나는 친구가 자신이 자유로워질 공간이 있다면 그곳이 어디라도 상관없으니 찾아 떠났으면 좋겠다. 이 땅이 질식하게 만든다면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지 않나 싶다. 물론 다른 곳에도 다른 아픔이 있음을 그 친구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니까.
서로에게 던지는 한마디가 뭉클하다..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말인지..
"넌 잘 할 거야..잘 할 수 있어."

(200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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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투쟁, 긴싸움을 끝낸 창곤이형에게

오래전 썼던 이글을 다시 읽자니..가슴이 저미고 눈물이 난다.
300일 넘는 시간 동안 성곡성당에 갖혀있다 집에 돌아온 대우자동차 노조 쟁의국장이었던 창곤이형은 많이 아프다. 지금 잘 관리하지 않으면 암이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아이들 셋을 기르는 순이언니는 그래도 힘든 기색없이 웃었다.
사람들은 긴박한 싸움의 자리에는 관심이 있었도, 그자리가 끝나면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내후년쯤 복직 될 것도 같다고 하는데, 패배한 공장에서는 어떤 싸움도 제대로 되지가 않고..서로 침묵만 늘어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도 괴롭다.
아래는 창곤이형이 성당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고 썼던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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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곤이형.

대자 싸움을 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긴 시간이 지났는데, 그동안 몇번의 편지구절도 생각해보았지만 안하던 짓 한다는 쑥스러움에 그만 접어두었어요.
이제 정리하고 떠나는 길에서야 왜 그때 편지 한번 못했을까 후회를 합니다.


처음 형과 술을 마시던 날, 기억하시나요?
99년 6월이었을 거예요. 노문센터 준비위원 총회를 끝내고, 미친듯이 술을 먹은 대오가 한강대교를 건너, 여의도로 한강변에서 한바탕 난리를 치고 꽃다지 사무실로 가서 잠들었던 그날입니다.

영등포 공원인지, 여의도 공원인지 그 어디메쯤 지나고 있을 때, 노문센터에 들어오진 1달 밖에 안되어서 말문을 열지 못하고 있는 저에게 형이 이렇게 말했어요.

"일단 이거다 싶을때 열심히 하고, 만약에 하다가 아니다 싶으면 뒤도, 사람도 돌아보지 말고 떠나라. 미련도 두지 말고."

그때는 이제 갓 들어온 새내기 문화일꾼에게 떠날때 얘기를 하는 것에 당황해서 눈만 깜빡 거렸습니다만, 요즘은 형의 투쟁에서 또 우리의 삶에서 새록새록 새롭게 다가오는 말입니다.

99년에 그렇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노동문화 박람회를 하고 창립대회를 통해 노문센터가 정식 발족을 했습니다. 그리고 형은 노문센터 회계감사가 되었지요. 일에서 뿐만 아니라 인천에 가끔 놀러갈때 변하지 않는 웃음이 있었고, 나는 창곤이형 팬할거라고 선배들에게 공언하곤 했었어요.

어떤 큰 힘에 좌지우지 하지 않고, 늘 그 모습으로 평화로운 웃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가르치지도 훈계하지도 않지만 잔잔한 감동으로 찡하게 만들어요.

그러던 2000년 대우자동차노조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에 우리는 모두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형이 고생한 보람이 있구나.'
아, 그리고 그다음이 이렇게 될줄은 몰랐죠. 선배들은 짐작했을런지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단지 형이 문화부장이 아니라 쟁의국장이 된 것이 못내 서운했을 뿐이지요.

대우자동차의 해외매각에 대한 논의들이 진행되기 시작했고, 부평공장이 사라지고 대량해고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에 바쁘게 투쟁일정이 돌아가기 시작했죠.

아직 공장점거에 들어가기 전이라 집회에 나왔던 형이 잠시 숨돌리며 사무실에 들러선 담배 한대 피면서 정신없다고 말하면서도 그웃음은 여전했어요.

겨울로 접어들면서 행보는 빨라졌어요. 공장 점거농성, 그 끝에 공권력 투입. 작년 2월의 눈보라 치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을 거예요.

공권력 투입이 되기 전날이었나?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노동자들이 하나둘씩 들어오던 그 식당에 저도 참가해서 사진을 찍고, 순희언니와 형의 애기들을 만났어요. 물론 형이 무대에서 사회를 보는 모습도 보았지요. 그날은 뭐랄까, 폭풍이 치기 전의 고요함, 알 수 없는 고조된 실내공기. 허탈함도 패배감도 아닌 사람들의 얼굴들이 영화의 한 컷처럼 남아 있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의 시간들에 대해서는 더 말하지 않을려구요. 그동안 형의 세번째 아들이 태어나고, 순희언니는 혼자서 아이 낳고...아니 아이를 들춰 업고 길거리로 나섰던 언니와 가대위 분들의 모습도 오래오래 가슴속에 남아있을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까 분기별로 한두번씩은 형을 만나러 갔었네요. 여름에는 모기에 뜯기면서 산곡성당 소나무 아래에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었고, 일일주점, 송년의 밤에서는 막걸리 한잔 나누면서 언제쯤 밖에서 만날까 조바심이 나기도 했었어요.

무엇보다, 노문센터가 창립되고 나서 진행했던 메이데이 문화행동의 날, 세상만사, 노동만화전, 노동문화 사랑방 등등을 진행하면서 행사 당일이 되면 늘 형 생각이 났어요. 분명히
오고싶어할 텐데 못오는구나 가슴 아프고.

제일 가슴 아팠던 날은, 사무실 집들이 하던 날이었어요. 형이 직접 간판을 만들어 주마 약속했었는데 다들 그 생각에 목이 매였지요. 그뒤에 형을 만났을 때 집들이 잘했냐는 말에 우리는 간판 만들어 주기로 한 약속 지키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었어요.

창환이형이 형이 불구속으로 나왔다는 말을 전해주었어요. 기뻐하면서도 구속된 분들 때문에 아주 좋다고만은 못하겠네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조금만 아이들과 언니 곁에서 좀만 쉬고, 같이 공연장도 가고, 행사도 같이 진행하고..
새로운 싸움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싸움을 이제 가까이에서 함께 할 수 있겠다 싶어서 가슴이 두근두근 거려요.

아! 마지막으로 형, 지난 1년 열심히 하셨어요. 누구보다 순희언니, 그 마음 고생을 누가 알겠어요? 두분께 소주 한잔 따라 드립니다.

(20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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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소의재 풍성한 삶이여

<출발하기 전>

처음부터 망설이던 길이었다.
'갈까? 아..이번 연말은 정말 조용히 좀 보내고 싶은데. 지리산까지, 차타고 사람들과 술마시고. 휴~. 그런데 어머님과 아버님이 우리에게 배푸신게 얼만데, 연말 가기 전에 찾아뵈어야 할텐데. 에고, 그냥 갈까.'

오락가락 하는 마음을 붙잡은 것은 세상만사 끝나던날 지리산에서부터 서울까지 바리바리 사갖고 온 두분을 뵙고선 더 망설일 수가 없었다.

아, 참 내가 가려는 그곳은 '소의재(少義齋)' 작은 의리도 저버리지 않는 집이다. 87년 2월 20일 꽃같은 젊음을 세상을 위해 바친 박선영 열사의 부모님이 '피맺힌 역사가 흐르고 있는' 지리산 자락에 손수 지은 집이다.

<12월 23일>

서울에 일보러 오셨던 어머님을 모시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봉고에는 박선영 열사와 같이 활동했던 사실을 확인하면서 딸처럼 두분을 모시는 혜경언니와 남편이자 사무처 선배인 운전기사 꼬실이형, 해솔이, 사무처 왕언니인 자영언니, 만화가 도단이 언니, 나 요렇게 옹기종기 앉아서 출발했다.
밤 12쯤 지나서 소의재에 도착하니 아버님이 반갑게 맞으셨다.

"워메, 빨리 도착혔네. 소주한잔 혀야지."

어머니는 "방이 워처고롬 차갑냐. 아가 춥쟈? 워쩐디야."라며 부산하게 왔다갔다 하신다.

어느새 어머니 손끝에서 한상 차려졌다. 아버지는 "소주만한 술이 없다." 보혜소주 패트병을 꺼내셨다. 다른 술은 안드시는데 우리가 사간 술도 드셨다. 40년을 교단에 계셨던 분이라서 한사람한사람 이름을 물어보시고는 금새 외우셨다.

한참을 말씀을 하시다가 "빨치산들이 뭔 노래를 불렀어? 투쟁가여. 그라고 군대에서는 왜 4분의 4박자 행진곡을 부르는지 아남? 그것이 사람들을 모아서 힘을 돋구게 하는 것이여. 천막 농성할쩍에 나가 노래가사를 써서 붙여놓고 갈치기도 했거든. 그런 의미에서 노래 한곡 불러볼란다."

'민들레처럼'을 참 곱게도 부르셨다. 주름이 가득한 얼굴에서 소년의 눈빛, 소년의 마음이 느껴진다.

어머님의 투쟁사는 짧은 몇줄로 쓸 수가 없다. 지금까지도 긴장을 놓지 않고 무엇과 어떻게 싸울 것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온몸을 다바치고 있으시니.

미문화원 방화사건 재판장에서 기소문을 찢어버려서 구속되고 8개월여의 감옥생활을 하셨다. 그 생활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 끝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일반수들한테 목욕하는 시간을 10분 줬는데. 그걸 갖고 싸우고. 밥주는 것으로도 싸우고, 으메 감옥에서도 바뻐"

웃음이 나오는 상황이 아닌 것을 들으면서 한마디 한마디에 우리는 자지러졌다.
감옥에서도 바쁘다는 어머니.

"사람들이 나보고 선영이 귀신이 들렸다고 허데. 나는 선영이 이름으로 싸워서 이길 것이여."

아버님은 연신 요즘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한다고 하신다.

"그 하나님은 참 요상허지. 안그냐? 사람을 좋은 사람은 좋게만 허고, 나쁜 사람은 나쁘게만 혀면 될 것이지. 요래저래 왔다갔다 혀서 헷갈리게 하잖여?"

무슨 말씀인가 했더니 "지들이 그렇게 말하면 그런 갑다허고 그냥 있으면 될것인디, 저것들이 왜저런디야라면서 또 대꾸하게 나를 만드셨으니. 하나님이란 양반이 참 요상허다 그쟈." 하하하하하....

새벽 5시까지 끊어지지 않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얘기자락에 파묻혀 피곤한 줄도 모르고 술을 마셨다.

일주일의 반이상을 밖에서 싸우는 어머니 덕분에 퇴직 후 소의재를 지키고, 지역 농민회의 젊은이들과 등산 모임을 갖고 계신다. 그래서 적적하실게다. 사람들 찾아오라고 넓게 지은 집에 늘 혼자 계시다가 찾아온 이들과 얘기를 하시면 밤이 새도록 즐겁기만 하신가 보다.

나이를 뛰어넘어 친구같은 두분, 박선영 열사를 기억하고 두분의 삶을 같이 살고 싶어해서 찾아온 이들의 친부모가 되어주시는 두분이 걸죽한 전라도 사투리로 들려주시는 10여년의 삶을 녹음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12월 25일 마지막날>

눈을 뜨니 아버지는 벌써 산악모임에 나가셨다.

아침부터 애기처럼 나는 칭얼거렸다. 섬진강에 가보자고. 대학시절에도 광주, 여수로 돌면서도 결국 시간이 모자라서 섬진강에 가보질 못했다.

어머니는 같이 나가시고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서울갈 때 챙겨줄 것을 장만해야 하는 갈등에 휩쌓이셨다. 아참, 사위가 왔으니 씨암닭도 한 마리 잡아야 쓰겄는데...

어제, 그저께 만들어 둔 것 먹겠다는 우리의 얘기는 역시 흘려버리시고 백숙을 끓이기 시작하셨다. 닭이 익었을 무렵 또 일하실까봐 어머니를 모시고 섬진강으로 갔다.

옥빛 물결, 반짝이는 금모래라는 표현이 딱이다. 매화마을을 지나서 잠시 정차했다.
모래사장에 뛰다가 자빠진 나를 보고 선배들을 대놓고 웃음을 참지 않았다.

오는 길에 화개사도 들렀다. 큰 절인데도 단청을 칠하지 않아 소박해보이는 절이다. 30분 1시간에 휙 돌아볼 수 있는 규모가 아니어서 아쉬운 나마 돌아섰다.

아버지가 돌아오셨을까, 뵙고 가야할텐데...아직 안오셨나보다.
닭백숙을 송구스럽게 받아 먹기 시작할 즈음 통일이와 가을이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오셨나 보다" 빵빵 경적소리가 요란하다.

"아직 안갔구나." 기분좋게 한잔 걸치셨나보다.

"전화를 했는데 안받아서 야들이 가버렸구나 했지. 그래서 사람들한테 나는 쓸쓸한 집으로 돌아가야 헌다고 했는데..요럼코롬 니들이 있으니까 참말로 기분이 좋다. 이별주 한잔 혀야제?"

어제 어머니도 함께 올라가기로 했었는데 오전에 일정이 바뀌어서 우리만 올라가게 된 것을 아버지는 모르셨나보다.

아버지와 이별주 한잔을 주거니 받거니, 방명록에 이름석자와 가슴에 새긴 말들을 풀어놓기도 했다. 어머니는 어느새 서울 가는 아그들의 먹거리를 챙기시기 시작한다. 어찌나 빠른지 말릴 틈이 없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 우리를 보시면서 아버지는 "참, 열심히 살았다. 참말로 열심히 살았어." 하신다. 아버지는 그 말씀 끝에 혜경언니를 안으시며 "니가 선영이여, 니가. 선영이가 살아 돌아왔어."하신다. 나는 돌아보면 엄두가 나질 않아 묵묵히 그릇을 닦았다.

내년 2월 20일은 박선영 열사의 15주기이다. 혜경언니가 박선영 열사의 애창곡인 '의연한 산하'와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을 부르기로 했고, 주변의 작곡가들을 조직해서 노래를 한곡 만드는데 힘을 더하겠다고 약속했다.

집을 나서는 우리를 아버지는 꼭 한번씩 안아주셨다.
이렇게 섭섭할 수가 창문으로 다시 어머님 손을 맞잡으니, "아가, 엉덩짝 괜찮으냐? 어이고..섭섭해서 어쩌냐" 하신다.

그렇게 다시 서울로 오면서, 어머니의 말씀을 되새겨 본다.

"운동은 더불어 하는 것인디. 사람들이 잘 몰라. 더불어 해야되는디. 그러면 못 이룰 것이 없어야."

(2001.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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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살아남은 자의 몫이라

이십대 중반이 넘으면서 잦은 죽음을 경험했다.
가까이는 내 반려자라 믿었던 이부터 멀게는 같은과 2년 선배의 변사까지..
그리고 또 죽음을 맞이했다.
어떤 사람들은 기욱이형이 할일이 많은데 저리 가서 어쩌나..
어떤 사람들은 어린 아들과 젊은 형수의 모습때문에 밟혀서 어쩌나..
어떤 사람들은 좋은 세상 못보고 가서 원통해서 어쩌나..
어떤 사람들은 ...
나는 아쉬워서 원통하다.
형을 처음 본 게 99년 5월 구로에서 열린 열사문화제에서 연대공연을 하러 왔던
인천 철의 노동자 형들을 만난 것인데..
그 이후 인천이 옆동네라고 해도 가까운 거리도 아니고..같은 활동공간도 아니라 자주 만나기는 힘들었다.
뙤얕빛 아래 열렸던 거리공연에 땀 뻘뻘 흘리며 노래부르던 모습을 보았고, 인천노동문화제의 감동적인 공연, 노둣다리 공연. 뒤풀이에서 가끔 막걸리 따라주던 손길을 기억한다.
인천에서 형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던 2000년.
인천 노동문화의 총화와 힘으로 발휘하게 만들었고, 그 힘이 전국의 노동문화일꾼들에게 까지 전달되었다. (2000년 여름캠프에 처음으로 기획단으로 나가서 나는 어리버리했다. )
기욱이형은 전국의 노동자문화패장단 회의를 이끌었고, 밤새 술도 참 많이도 마셨다.
폭우속에서 여름캠프도 끝나고..곧바로 인천에서는 노동문화제에 돌입했다.
아..그리고..형이 암이라는 소식.
나는 정말 아쉽다. 너무너무 아쉽다.
형과 많은 얘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이제는 더 없어서 나는 너무나 아쉽다.
개인적으로 만났던 적이 딱 한번 있었다. 딱 한번!
투병중의 인터뷰를 하고 싶었던 나는 여러번 상황을 보다가 형의 몸도 괜찮을 때 종남언니와 함께 인천으로 향했다. 형이 마중을 나와 분위기 좋은 카페로 갔다.
피자를 시켰다. 피자라...형도 맛있게 먹었고..
인터뷰하면서 실제로 형이 살아왔던 삶, 노동자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변화한 가치관들을 보았고, 상상치 못했던 잘못도 참 많이 했던 형이 담담하게 풀어가는 모습에 놀라서 눈만 동그랗게 떴다.
주거니 받거니 노문센터 얘기를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했던 기억..
올해 항암치료를 받기 위해 여의도 성모병원에 찾아갔던 날.
고향에 내려가던 길, 우연히 종남언니에게 전화했다가 창곤이형과 통화하고, 기욱이형과 통화하고..가슴이 저릿했던 기억.
그리고 눈을 감기 직전 응급실에서 응급실 유리문에 매달려 있던 동지들을 고통속에서도 바라보던 그 깊은 눈길..
나는 그것이 다이다. 진짜..그래서 너무나 아쉽다.
그러나 어찌하겠나. 형은 그렇게 떠났고, 우리는 남아서 살아간다.
여려명의 친우들을 떠나보내면서, 그것을 깨달았다.
죽은 사람을 보내며 슬퍼하는 것은 산사람들의 아쉬움과 한과 고통을 죽음을 빌어서 풀어낸다는 것을, 그래서 장례는 한판의 굿이며 축제라는 것을.
기욱이형을 보내면서 나는 눈을 감고 암흑 속에서 내 자신을 본다.
땅을 박차고 뛰어올라 두손을 흩뿌리며 덩실 덩실 춤을 춘다.
형을 만나서 배웠으니 나는 스승을 만나 행복했오, 이런 어린 후배가 줄줄이 있었으니 형도 오지게 좋았고, 행복했겄소. 그러니 슬퍼하지 맙세다.
잘 가세요..기욱이형..이승에서 춤추며 보내드립니다. 웃으며 보냅니다.

(20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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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이란 놈과 싸우다

정신없이 모니터를 보다보니 벌써 새벽 한시..이런..
갑자기 몸이 무거워진다..오늘은 이것까지는 꼭 해야되는데, 저것도 내일까지는 꼭 해야되는데..꼭..꼭...꼭.

잠시 '꼭'이란 놈과 소주잔을 마주하면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눠보기로 했다.
" '꼭'아 너는 왜 '꼭'이냐..하고 많은 것중에서..천천히, 게으르게, 최선을 다해..
뭐 이런 것들 많잖아."

'꼭'은 담담하게 대꾸한다.
"내이름을 만든 것은 당신들인데..무슨 소리셔? 내발로 찾아온 적 없어요..
2월달부터 간절히 당신이 내 이름을 불러서..여기 있는 것인데..참..내.."

나는 그만 불끈 화가 나서 소주잔과 소주병을 던져버리고 테이블 위에 올라가 구둣발로 인정사정없이 '꼭'의 얼굴을 걷어찼다.

"야..그래서 내 탓이란 말야? 내가? 널 찾았다고..웃기지마..그런 식으로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개인의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야..그래서 경쟁을 부추기지..알아..니가 알어? 야 씨발놈아..니 뭐 알어?"

씩씩 거리는 나를 피칠갑한 얼굴로 바라보며 '꼭'은 비웃듯이 말했다.
"어이...참내..내가 이런 인간들때문에..피곤하다니까..보쇼..당신 운동한다며? 그것도 문화운동? 그러면서..왜 나를 이기지 못해서 안달복달이셔?
누구보다 잘 알면서..."
잠시 한숨 한번 쉬고 툭툭 털고 일어나..주섬주섬 얼굴의 피를 닦고서..풀이 죽어있는 나에게 술잔을 건네는 '꼭'
"아..뭐..그렇게 죽을 상하고 있지 말고..나를 떼어내던지..아님..나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살던지..잘 살아서..내가 필요없던지..그렇게 해보슈..술이나 한잔 마셔.."



(200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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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오리에 남은 사람들

어제 밤 '제 3지대'인가요? 하여튼 텔레비젼 프로그램입니다.
어제의 주제는 가리봉오거리였습니다.
수출자유공단이었던 구로, 그곳을 대표하는 가리봉시장과 접해있는 일명 가오리에 남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쓸쓸한 보고서였습니다.
아래의 미영언니의 글에서도 보듯이 수많은 전자회사, 봉제공장과 노동자들이 넘실거렸고, 구로동맹파업을 비롯해 노동운동사의 주요한 장면으로 남아있는 그곳..구로..가오리..
젊은 시절 사랑도, 명예도 던지고 위장취업을 시작으로 뛰어들었던 나이든 선배들은 구로는 나의 고향이라고 가슴 벅차게, 한편 쓸쓸하게 말합니다.
처음 '삶이 보이는 창'을 찾아가던 길, 동행한 자영언니는 평소보다 유난히 더 말이 많아져서, 초차배기인 저에게 이곳이 원래 공단서점이었으며 저기가 어떤 곳이었다고 설명을 하고, 어떻게 사람들과 만났는지 급한 말로 이어갔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아직도 그곳 공장에 강습가는 미영언니, 16년을 구로를 지키며 노동자문학회를 꾸려가고 있는 구로노동자문학회, 노래단체 햇빛세상 등,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거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텔레비젼은 좀 다른 풍경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주노동자가 많아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거리의 닭장집을 매꿔준 이들의 대부분은 중국인 교포라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불법체류자들이지요.
한국에서 구로지역은 유일하게 중국교포에 대한 검문/단속이 없는 곳, 그들에게는 치외법권이나 마찬가지랍니다.
그곳에 모여 사는 그들은 모습은 한편으로는 가슴이 미어지고, 한편으로는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서는 어떻게든 작은 공동체가 만들어지는구나 감탄했습니다.

22살 미혼모가 된 한 중국교포는 사랑했던 한국 남성의 부모, 가족들이 찾아와 사정하며 '떠나달라'고 하면서 '애기는 없애던 살리던 마음대로 하라'고 했답니다.
그녀가 처음 한국으로 올때에는 돈도 모으고 컴퓨터도 배워서 돌아가리라는 꿈을 꾸었지만 지금은 자기가 낳은 아이도 키우지 못하고 입양시키게 된 미혼모이지요. 유도분만 끝에 태어난 아기를 바라보며 그녀는 고통스럽게 눈물을 흘렸습니다. 화면속의 그녀의 아픔이, 고통이 전염되어서..저는 너무 괴로웠습니다.

구로에 와서는 세번 놀란다고 하네요. 집이 커서 놀라고, 그 큰집에 너무나 많은 집이 있어서 놀라고, 그방이 너무 작아서 놀란다고. 그렇게 다닥다닥 붙은 닭장집에 모여사는 중국교포들은 나름대로 명절에 모여 마작을 즐긴다거나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고 그 친구들은 서로가 배려하며 기대는 마음의 의지가 됩니다. 그들만의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가고 있더군요.
한편으로 구로의 거리 한귀퉁이 점차 중국교포의 거리화 되고 있음을 간판들이 입증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댈 곳 없는 노인들이 구로의 한 구성원으로 중국교포들과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나게 돌아가는 공장의 기계들이 멈춘 그 곳에 의류 가내수공업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다름아닌 당시 구로의 봉제업에 종사하며 미싱을 돌리던 여공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은 중국교포들과 함께 여전히 미싱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저 밑바닥에, 꿈틀꿈틀거리는 사람들. 초라하고 희망도 없고, 왜 사는지 의미도 알 수 없는 생활을 하는 저 사람들. 그저 보기엔 그렇습니다만..지겨울 만치 반복되는 지긋지긋한 일상을 그야말로 견디면서 사는 끈질긴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한 희망을 가지거나 의미부여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경찰을 피해 마음대로 거리를 걷지도 못하는 밑바닥 생활속에서도 사람과의 관계를 이루는 모습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어제 밤 발견했습니다. 아니 확인했다고 해야지요. 저는 아직도 곳곳에서 끈질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런 저의 작은 소망이 여기 이자리, 이정표도 잘 보이지 않는 이곳에 서있게 하고 있지 않나라고 돌아보았습니다.

(200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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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마을 오일장, 진한 팥죽

굿놀이 마라톤 마지막 주자 터울림의 해보내기굿에서 팥죽과 막걸리가 제공된다고 한다.
팥죽...하면 생각나는 풍경이 있다.
우리 동네 장터는 매월 4, 9일이 붙은 날은 왁자지껄 질서있게 늘 그자리 그물건으로 장을 연다.
한 귀퉁이에 첩실이면서 알콜중독자인 남편과 자식을 키워야 했던 고달픈 삶의 무게를 진 친구 어머니가 여는 국수집이 있다. 파란 비닐로 벽을 만들고 삐걱거리는 긴나무의자에 마구 짠 테이블. 테이블 밑에는 물을 담아놓는 타원형의 큰 다라이..후후..
기웃기웃 장구경을 하다가 국수집에 들르면 어머님이 여름에는 국수와 묵종류, 겨울에는 국수와 팥죽을 끓여서 내놓는다.
어머님 손이 얼마나 큰지 세알도 큼직큼직하고 짙은 팥색깔이 침이 꿀꺽 넘어가게 만든다.
초등학교 4학년 까지는 세알이 너무 싫어서 요리조리 피해서 팥죽을 먹고는 세알도 쪽~빨고는 뱉어놓다가 엄마에게 빗자루로 맞곤 했는데, 조금씩 나이가 들면서 팥죽의 진미는 찹쌀가루로 빚은 세알임을 알게 되었다.
장이 서는 날은 어김없이 점심은 친구네 국수집에 가서 친구랑 국수 한그릇, 팥죽 반그릇을 공짜로 먹었다. 가끔 옆자리의 아주머니나 할머니가 "니, 약국집 딸네미 맞제? 아이구야 우째 지할미랑 똑같노."라며 감탄사 연발이다. 쑥스러워서 입을 꼭 다물고 국수를 건져먹는 나.
우리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찾아서 부산으로 가기전까지 우리 동네 장터에서 콩나물을 팔았으니, 동네 어른신들은 콩나물 아지메로 기억하고 있다. 아..내고향은 우리 아버지의 외가이며 할머니의 고향이다.
요즘도 친구 어머니는 국수집을 하고 계시다. 가끔 얼굴을 뵙게 되면 시집 안가냐고 묻는다. 내친구는 어느새 애엄마가 되었으니까. 지금은 그저 "어머님 건강하시죠?" 엉뚱하게 말을 돌리면서 손한번 잡아본다. '에고..많이 늙으셨네..' 다음에 가도 그자리에 계시려나, 그 진한 팥죽 한그릇 먹을 수 있으려나..
(200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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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의 뜻

 

혼자 홈페이지 만들어 놓고..뿌듯해서 제대로 보질 않고 있었다.
종남언니가
"여기 피플이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피플 맞니?"
"예.." 당연하다고 고개를 끄덕끄덕 거린다.
"풋..그러면 이상한데..peple가 아니라 people겠지"
이럴 수가 한나절 넘게 'o'가 빠진 피플이 설치고 있었단 말인가.
있어 보이기 위해서 영어를 메뉴에 넣은 내가 잘못이지..후후..
포토샵을 얼른 열어서 고치고 나서 혹시나 불안한 나머지 인터넷 영어사전에서 다시 확인했다.
"people 뜻; 인민"
헉..인민이라는 대문짝 만한 글자에 깜짝 놀랐다. 이렇게 당당하게 인민이라는 말을 보여줘도 되는가. 사람, 인민, 민중이라는 뜻임을 알고는 있지만 레드 컴플렉스 투성이인 남한에서 '인민'이라는 단어는 '동무'만큼이나 금기시 되는데 말이다.
이야..정말 놀랐다..그리고 '인민'이라는 말이 낯설어서..한참 인민?인민? 이렇게 평범하게 그냥 써도 괜찮을까..
다시 인민? 인~민, 인민! 좋네..

2001/12/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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