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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2/07
    주례들...(4)
    손을 내밀어 우리
  2. 2009/11/27
    안개
    손을 내밀어 우리
  3. 2009/11/26
    고 김준 동지 1주기 추모식(4)
    손을 내밀어 우리
  4. 2009/11/13
    김 준 동지를 추억하며(6)
    손을 내밀어 우리
  5. 2009/11/09
    늦가을...(2)
    손을 내밀어 우리
  6. 2009/10/30
    10월이 간다
    손을 내밀어 우리
  7. 2009/10/15
    [서평] 77일간의 저항을 기억하라
    손을 내밀어 우리
  8. 2009/10/11
    노동연지부 창립 18주년...
    손을 내밀어 우리
  9. 2009/09/25
    [가문비] 사랑해~(3)
    손을 내밀어 우리
  10. 2009/09/06
    [가문비] 휴교(6)
    손을 내밀어 우리

주례들...

지역본부에서 한 때 열정을 다해 일했던

조훈 동지의 딸 아라가 오늘 낮에 결혼식을 했다.

 

모처럼 지역의 많은 동지들이 모였고,

내친 김에 술자리가 걸판지게 차려졌다.

 

아라를 너무 일찍 보냈다고 못내 서운해하던 신부 아빠는

한창 무르익은 술자리에 와서는 애써 웃음을 보였고,

맥주컵에 가득 따른 소주들은 금세 잔이 깨어진 듯 사라졌다.

 

세월이 흐르니 다들 나이는 먹어서

심심치 않게 주변의 동지들이 주례로 등장을 한다.

 

민주적 가정을 이루자, 가정 안에서 여성문제를 잘 풀어가라,

오늘 김예준 동지의 짧은 주례사와

새로운 형식으로 진행했던 결혼서약, 좋았다.

 

오늘 주례를 선 김예준 동지,

어제 다른 결혼식에서 주례를 본 나,

지난 봄에 주례를 했던 날세동 동지,

술김에 번갈아 사진 하나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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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안개 속에서 긿을 잃다.

 

그저께, 밤 늦은 시간,

강남에서 유성으로 오는 고속버스를 탔다.

터미널에 도착하니 1시 20분,

거리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내려

불과 50미터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내 차가 서 있는 사무실 앞까지

유유자적하게 걷기로 했다.

인적 드문 거리에는 택시들이 주로 달리고

24시간 노동하는 편의점, 해장국집, 족발집들과

밤에만 반짝하는 노래방들이 안개 속에 깨어 있다.

 

혹시라도 달리는 차가 나를 보지 못하면 어쩌나,

짐짓 걱정도 하면서 횡단보도를 건너고 다리를 건너

사무실 앞길로 접어들자 안개 속 아경이 몽환적이다.

왼쪽으로 대학생들을 위한 원룸형 빌딩,

오른쪽으로는 청계천을 꿈꾼다는 유성천,

그 사이로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이

안개의 땅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사진을 몇 장 찍었고 곧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어랍쇼, 어느 순간

내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너무 낯설다, 아니

익숙한 곳이기는 한데 내가 도달하고자 한 곳은 아니었다.

이게 웬 일이람?

그곳은 사무실을 한참 지나친 곳이었다.

 

되돌아 보았다.

사무실은 여전히 안개 속에 묻혀 보이지 않고

길 가에 세워둔 내 차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이냐?

오던 길을 다시 걸었다.

곧 백설공주가 사는 성처럼 안개 속에 우뚝 선

사무실 건물을 만났다.

길을 잃을 수도 없는 직선도로 위에서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내가 몽유병이라도 걸렸다는 말인가?

 

길은 언제나 걷던 그 길이었고,

차는 곧 쉽게 찾아서 움직일 수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집으로 돌아와

안개 속에 찍은 사진들을 꺼내 보았다.

 

사진 속에는

물에 반사된 건너편 모텔의 네온사인과 가로등,

사무실 앞 가로수, 낙엽이 덮인 길가 잔디밭,

아스팔트를 떠도는 마지막 잎새들,

그런 새벽 풍경들이 맘 편한 자세로 누워들 있고,

저 앞 길 건너편에는

세웠던 그 자리에 내 차가 또렷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어디를 걷고 있었으며

어디를 향해 가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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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준 동지 1주기 추모식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김 준 동지를 추억하며] 에 관련된 글.

 

1년전,

장례식을 치르던 그 날만큼 폭우는 아니었지만,

어제도 비가 내렸다.

 

1부. 제1주기 추모식

 

2부. 식사 및 추모사업회 출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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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준 동지를 추억하며

손을 내밀어 우리님의 [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했던 동지여...] 에 관련된 글.

 

김 준 동지가 떠난 지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11월 25일 오후 3시에 갑산공원묘지에서

동지의 1주기 추모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아래 글은

동지들에게 미리 보낼

리플렛에 담겠다고 해서 썼다.

 

동지를 땅에 묻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면서

모두가 오열했던 작년의 기억이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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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준 동지를 추억하며

 

2008년 11월
억수같이 비가 내리던 늦가을에
동지는 두물머리 너머 고즈넉한 산기슭으로 가고,
어느 덧 1년이 지났습니다.
 
동지의 호탕한 웃음
동지의 형형한 눈빛
동지의 거침없는 논리
동지의 유려한 언변
동지의 한결같은 투지
동지의 의연한 투병
 
어느 것 하나 과거형이 아니라
오늘 여기에 살아서 우리와 함께 하고 있기에
동지를 추모하는 것은 참으로 낯설기만 한 일입니다.
 
삶과 죽음의 길은
누구한테나 똑같이 열려 있지만
먼저 간 동지가
살아남은 자들에게 남긴
참으로 뜨거운 사랑에
이 가을에는 비가 더 자주 내립니다.
 
바람 불고 눈 내리고
잎 피고 단풍 들고 다시 또 지고
갑산공원묘지의 키 큰 나무들이
1년 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동지를 지키고 있듯이
우리 이제 다 함께 동지에게 가려고 합니다.
 
슬픔의 노래들과
하염없는 눈물은 걷어버리고
동지가 살고자 했던 세상
동지가 꿈꾸었던 세계
동지가 가고자 했던 미래
우리의 꿈과 소망과 포부로 이어받겠다고 했던 약속,
잘 지키고 있는지 잘 살아가고 있는지
가서 동지와 서로 보듬고 어루만지며 살펴볼 것입니다.
 
모두 오소서.
김 준 동지, 어서 오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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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하나씩

잿빛으로 변해 간다.

 

아침 안개도

말없이 흐르는 저 물빛도

다시금 팔딱거리며

날 것들의 혈색으로 돌아오는 날,

 

오겠지.

 

-오늘 아침, 출근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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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이 간다

노란 은행잎이

연구단지의 가로를 이리저리 몰려다니면

여지없이 가을이 다 가는 것이다...

오래 전에 그렇게 썼었던 것 같고

올해도 마찬가지이다.

 

이번 단풍은 유난히 도드라진다.

붉은 색은 낮과 밤의 온도차가 크고

햇빛이 좋을 때 가장 좋다고 했던가,

2주전에 마니산 갔을 때 봤던

단풍나무의 붉은 잎이 생각난다.

 

10월은 일요일을 제외하고는

2/3를 서울을 오가면서 지낸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공간에 잠깐씩 오는 게 힘든 일도 아닌데

소소한 일상들이 그냥 파묻혀 간다.

 

늘 갖고 다니던 카메라가 고장이 난 것을

바쁘다는 핑계로 두달을 그냥 두었다가

그저께 서울간 김에 수리점에 갖고 갔더니

수리비가 최소 13만원, 최대 18만원 든다고 했다.

 

노트북도 수리비가 40만원쯤 나온다고 해서

결국 할부로 질러 버린게 얼마 되지 않았고

3년반을 잘 버티어오던 휴대폰도

밧데리가 도저히 감당이 안되어 바꿨는데

이제는 카메라까지...

기계들도 나를 배겨내지 못하는 모양...후후.

 

그렇게 10월이 간다.

노동연지부의 전면파업은 어느새 40일째 이르고,

용산에 대한 재판부의 판결도

신문법 방송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결정도

나를 딴 세상으로 밀어내고 있다.

 

10월에 못다한 일들도 많지만

이번 주말은 벼락치기로 보내기보다는

난마처럼 얽힌 생각타래부터

차분하게 하나씩 풀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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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77일간의 저항을 기억하라

참 오랜만에 미디어충청에 써보낸 글.

 

 

77일간의 저항을 기억하라

[서평] '77일, 쌍용자동차 노동자 파업 사진 기록'

2009-10-14 08시10분 이성우

80년 5월 광주는 그 시대를 살았으나 그 지역을 비켜난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이 광주에서 싸우거나 숨져간 사람들에게 빚진 것이라’ 느끼게 했다. 사람들은 계엄령 아래 철저히 차단된 보도 통제를 뚫고 전해져온 국가권력의 야만적 폭력에 전율했고, 그것에 온몸으로 맞선 투쟁의 자취들을 접하면서 통곡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빚을 갚기 위해 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이를 앙다물고 변혁의 꿈을 갈무리하며 치열하게 살았다. 그런 부채의식이 80년대 이후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우리 사회 정치적 민주주의의 일정한 진전을 이루었다고 역사는 평가하고 있다.

2009년 5월 22일부터 8월 6일까지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에서 있어난 일은 29년 전에 광주에서 일어난 일과 어떻게 다를까?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일만 해오던 사람들을 하루 아침에 공장 밖으로 내몰고는 그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고립시키고 무참하게 폭력을 가했으며 급기야 그 과정에서 6명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총을 쏘지는 않았지만 고무총탄을 쏘았고 유독성 최루액, 치명적인 테이져건과 해머, 경찰 특공대의 집단 린치는 사실상 전쟁터와 다를 바 없는 아비규환의 참상을 만들었다. 공장 밖에서는 자본이 동원한 구사대와 용역들이 물과 음식물과 전기와 의약품을 차단했고, 심지어 쇠파이프로 노동자의 가족들과 연대온 사람들을 서슴없이 공격했다. 정리해고라는 사망선고를 받은 노동자들은 오로지 맨몸으로 자본과 권력이 결탁한 잔인한 폭력에 맞섰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77일간, 그들은 고립무원의 섬에 갇혀서 극단의 상황으로 내몰렸지만 분연히 저항했다. 자본과 권력은 집요하게 '산자'와 '죽은 자'를 나누고, '파업참가자'와 '파업불참자'를 분열시켰지만, 노동자들은 머리를 맞대며 토론하고 스스로 갈 길을 차분하게 결정해 나갔다. 오로지 함께 살기 위하여, 노동자들은 지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인간임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연하고 의로운 저항 앞에서 이미 사람이기를 포기한 자본의 광기는 물 한 모금조차 허용하지 않았고 다쳐도 치료받지 못하게 했으며 잠조차 잘 수 없게끔 만들었다.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생체실험실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바깥의 '노동자'와 '인간'들은 무엇을 했던가. 지금 여기가 2009년 대한민국인가 의아했을 정도로 야만적인 폭력이 판치는데 그것을 제압하지 못했다. 가족들은 전국을 누비며 눈물로 호소했고 연대하러 온 사람들은 이어졌지만 공장을 둘러싼 바리케이트와 철조망과 폭력집단의 벽을 넘지 못했다. 모두 발만 동동 굴렀다. 빤히 보이는 공장 안에서 가공할 폭력이 자행되고 있는데도 속수무책이었다. 분노가 모자랐던 것일까, 단결력이 약했던 것일까, 바깥 사람들은 참으로 무기력했다. 반면에, 사랑하는 사람들을 상상을 뛰어넘는 폭력으로 갈라놓고도 정부는 그것을 법치라고 했다. 법치를 내세운 폭력 앞에서 공장을 아꼈고 일을 사랑했던 노동자들은 77일만에 저항을 일단 멈췄다.


그것은 끝나지 않은 싸움이다. <77일, 쌍용자동차 노동자 파업 사진 기록>은 이 싸움이 얼마나 정당한 것이며 이후로도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차분하게 기록하여 보여주고 있다. 77일간 자신들이 선택한 길을 함께 걸었던 진정한 동지들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 고립된 공장 안에서 희망을 일구는 노동자들의 공동체가 거기에 담겨 있다. 짐승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공존하는 순간들이 거기에 들어 있다. "당신은 정말 예뻐요" 하는 수줍은 고백과 "여기 인간이 살아있다"고 외치는 절규가 절절하게 새겨져 있다. 그러나 이 사진모음은 결코 감정에 의탁하지 않고 하나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노동자의 삶을 통째로 파괴하는 해고는 곧 살인이며 그것에 저항하는 투쟁은 필연이라는 것을 담담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은 희망의 기록이며 함께 사는 세상에 대한 열망이고 의지이다. 그래서 사진들은 대체로 밝고 씩씩하다.

2009년 10월, 노사간의 합의서를 무시하고 쌍용자동차의 자본은 여전히 투쟁에 참가했던 노동자들을 공장 밖에서 차단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른다. 사회적으로는 보이지 않은 폭력이 77일의 투쟁 이후 또 다른 77일이 더하도록 백주대낮에 자행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2009년 여름에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 갇혔던 노동자들과 함께 하지 못했다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부채의식이 이윽고 천박하고 야만적인 한국의 자본주의를 아래로부터 갈아엎는 힘이 될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이 사진기록을 통해서 내가 다시금 반추하는 역사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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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연지부 창립 18주년...

우리 노조 한국노동연구원지부가

9월 14일부터 간부(쟁대위) 파업, 9월 21일부터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거의 한달째 파업인데 조합원들이 참 밝고 꿋꿋하고 한결같이 열심이다.

왜 파업을 하는지는 따로 시간나면 쓰기로 하고

(검색창에 박기성을 치면 기막힌 얘기가 참 많이 나온다)

그저께 난지도에서 있었던

노동조합 창립 18주년 행사에 다녀와서

지부 카페에 올린 글을 여기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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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기념행사에 다녀와서...>

 

한강이 온 가슴 활짝 열고 있는 난지도 캠프장,

따스한지 따가운지 헷갈리는 가을 햇살의 시샘 듬뿍 받으며

노동연구원지부 창립 19주년 기념행사가 열렸습니다.

아, 연혁보고를 듣다가 보니

19주년이 아니라 18주년이었습니다.

이은정 동지의 보고대로 91년에 출범한 것이 맞다면요.

 

가람아 사랑해애~~~ 그리고

생일 축하노래가 울려퍼지면서 기념식이 끝났습니다.

이런 기념식 마무리는 처음이었습니다.

참 여유롭고 분위기 좋았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는 잘 먹었습니다. 

대천에서 갖고 왔다는 윤미례 동지의 엄마표 김치,

아버님이 주셨다는 정성미 동지의 가시오가피술,

햅쌀에 밤과 강낭콩 듬뿍 넣어 지은 밥(이름을 잊었네요-.-),

차려내는 음식마다

모든 조합원과 그 가족들의 정성이 넘치는 것들이었습니다.

 

참 잘 놀았습니다.

풍성하게 차린 밥과 고기와 술, 갖가지 음식들을 놓고

그저 즐기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왁자지껄하고 떠들썩한 분위기는

주변의 10대, 20대들까지 압도해버리더군요.

한잔 주고 두잔 받으면서 참 흐뭇하기만 했습니다.

 

동지들의 이쁜 아이들도 보고

오래된 조합원들의 사연도 힐끔힐끔 듣고

10년 20년이 되었어도 직원들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야유회 한번 제대로 못했다는 기억도 엿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불현듯

뭉클하고 뜨거운 심장의 박동을 내 가슴에서 느낍니다.

 

세상을 살리는 파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멋들어지게 지어낸 하나의 구호로 생각했더니 그게 아닙니다.

 

무수한 박기성들을 양산하는 이 땅의 전도된 상식 앞에서

우리네 소박한 마음들을 하나로 모으고

일터에서 만나는 동료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심장과 머리와 손발이 제각기 돌아가는 이율배반의 사회를

물이 아래로 흐르고 산바람 강바람 순리대로 불어오듯이

나의 상식과 너의 상식을 일치하게끔 하는 것,

파업은 그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대전으로 돌아오는 길은

그래서 내 마음까지 참 넉넉해졌습니다.

노동연지부 동지들 덕분입니다.

김가람 동지의 선창에 따라

동지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고 사랑해애, 하고 외쳤던

그 느낌이 입술에 팔딱팔딱 살아나는 듯합니다.

 

이렇게 잠시 흔적을 남기고

이제 내가 속한 생명지부의 조합원 동지들을 만나러 갑니다.

이 저녁 내내 노동연지부 동지들 얘기를 안주 삼아

난지도에서 다 마시지 못한 소주 실컷 마셔볼 생각입니다.

 

내일, 여의도에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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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비] 사랑해~

이삼일 전이었나,

아침 9시 반쯤 차를 운전하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큰딸이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

 

가문비 문자였다.

아니 이 시간이면 한참 수업하고 있을텐데

이게 무슨 문자람?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한손으로 급히 답문을 보냈다.

"그럼, 근데 왜?^♡^"

 

금세 다시 답이 왔다.

"사랑하니까   "

 

뭐야, 이거...이 시간에 학교를 나와서 딴데 있는 건가?

난생 처음 있는 일이라 궁금하기도 하고 슬며시 걱정도 되고...

그래도 나도 바빠서 일단 넘어갔다.

 

점심시간에 다시 생각이 나서 문자를 하나 보냈다.

"별일 있는 건 아니지? 점심 맛있게 먹었니? 홧팅^.^"

 

좀 있다 보니까 답이 와 있다.

"그냥 한문시간에 효성 관련 지문 배우고나서 부모님한테 문자보내기 했어~

 난 이제 밥먹고 있음!"

 

에효...그러니까 수업중에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모두가 (금지된) 휴대폰을 꺼내서 일제히 문자를 보냈다는 거?

 

나중에 가문비한테 물어보니

나처럼 당황스러워하면서 답을 보낸 부모들이 제법 있었던 듯...

 

아빠, 실내화 안가져왔어. 아빠, 수업료 냈어? 아빠, *월 *일 한겨레 광고 좀 구해 줘.

이런 문자에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는데

사랑 어쩌고 하는 문자가 오는 순간 슬며시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나도 어쩔 수 없는, 고정관념에 찌든 기성세대라는 거겠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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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비] 휴교

그저께,

그러니까 금요일 저녁이었나,

가문비가 그러더라.

-2학년 5반에 신종 플루 환자가 있어서 그 반만 쉬게 했어.

-우리 교실은 3학년들하고 같은 건물에 있는데, 3학년들한테 전염되면 큰일이라고,

 교실을 다른 곳으로 옮겼어.

-아니, 3학년들하고 매점에서도 만나고 복도에서도 만나는데, 층과 벽으로 가로막힌

 교실을 왜 옮기는 거야?

 

뭐, 그렇게 줄레줄레 얘기하고 넘어갔는데

다음날 오후에 아내가 외출했다가 와서는 그런다.

-가문비, 니네 학교 1주일간 휴교했다고 문자 왔어.

=에이, 그거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왜?

=월요일에 학교가라고 깨우면 나 오늘 학교 안가, 하고 놀리려고...ㅎㅎ

 

3학년들이 감염될까봐서

같은 학교에 다니는데도 1학년과 2학년들만 휴교하는 거,

이걸 어떻게 봐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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