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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

이 글은 <작은 책 06년 11월호>에 실리 글 중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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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9?11 사태 이후 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나섰다. 부시를 비롯한 미 제국주의자들에게 테러 단체나 테러 국가는 이들의 이익에 반하거나 이들에게 저항하는 모든 세력들을 의미한다. 이들의 대표적인 국가는 단연 사회주의권 국가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들 중에서도 좀 만만하다 싶은 제3세계 사회주의권 국가이다. 미 제국주의에게 이들 국가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미 제국주의는 자본의 최대한의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놓는 반면에, 이와는 정반대로 사회주의권 국가들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세계를 최상의 가치로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제3세계의 사회주의권 국가들 중 중심이 되는 국가 중의 하나가 바로 쿠바이다. 그리고 사회주의 권 국가인 쿠바를 이끌어 낸 중심인물들은 바로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이다.
보통 사람들은 사회주의 사회 하면 모두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분배 받는 사회인 줄로만 안다. 그러나 이런 사회는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다. 사회주의라는 양의 탈을 쓴 전체주의 사회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산술적인 평균치로 모두 획일화시키며 개인들의 개성을 말살시키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보통 사람들은 사회주의 국가가 전체주의 독재 국가, 독재국가=테러국가쯤으로 알고 있으며, 따라서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암적인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는 위에서 말한 그런 사회가 아니다. 만일 사회주의가 이런 사회라면 맑스를 비롯한 이전의 모든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머리 풀고 통곡할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는 인간이 적대적 경쟁 속에서 ‘기계화되고 가축보다도 못한 삶’을 사는 자본주의 사회와는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삶의 양식과 새로운 인간관계 속에서의 삶을 끊임없이 지향하는 사회를 말한다. 즉 끊임없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운동 과정 속에 있는 사회이다. 바로 이러한 사회를 지향했던 사람이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였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운 삶의 양식과 새로운 인간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이런 문제는 현실적으로 당연히 제기될 수밖에 없고 제기되어야 하는 문제이며, 체와 피델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체와 피델은 그 첫 번째 노력으로 경제에서의 생산관계를 문제 삼고 이 생산관계를 바꾸려고 하였다. ‘어떻게 생산하고 분배하며 소비하느냐’ 하는 경제에서의 생산관계는 인간의 모든 삶과 그 양식인 인간관계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체와 피델은 토지를 비롯한 모든 생산수단을 국유화해서 모든 민중에게 민중의 필요에 따라, 즉 공공의 필요에 따라 생산물을 공급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실천했다. 이러한 생각과 실천은 모든 산업과 기업이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처럼 채산성에 그 목적을 두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것만이 사회주의의 전부가 아니다. 이러한 것에는 민중 자신이 자본주의형 인간으로부터 사회주의형 인간으로 새로이 생산해 낼 수 있는 민중 자신의 자기 생산과정이 빠져 있다. 왜냐하면 이러한 민중 자신의 생산과정이 빠져 버리게 되면, 여전히 민중들은 자본주의의 문화, 정치 등의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삶에 익숙해지게 돼서 이후에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도정에서 민중 자신이 사회주의의 커다란 장애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체는 “야수 같은 인간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을!”이라는 슬로건을 내 걸었다. 새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민중 자신의 생산과정은 동료들에게 나눔의 마음과 공동의 노력에 대한 가치를, 그리고 공동의 사회적 과업을 성취함으로써 개인으로서 민중 자신의 자기의식을, 즉 인간으로서의 자기의식(계급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 민중 자신의 자기 생산과정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어야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누구도 배제되고 소외되지 않는 자유로운 의사소통 체계, 즉 민주주의적 관계가 유기적이고도 긴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글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쿠바에서는 초기부터 문맹 퇴치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이런 쿠바의 노력에 대해 프랑스 주요한 환경운동가 중의 한 사람인 르네 뒤몽은 1965년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혁명은 완전한 기쁨 속에서 실현되었다. 그것은 그토록 미미한 존재에 불과하던 노동자 대중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들이 보여 준 문맹 퇴치 운동에 대한 집념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민중 자신의 자기 생산과정은 코뮌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쿠바에서는 이러한 코뮌 형태가 협동농장과 같은 협동생산 체제, 그리고 이러한 체제에 맞는 교육 체제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는 직접적으로 적용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는 어떻게 코뮌을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코뮌을 구성할 수 있는 물적 기초가 있긴 하다. 그 물적 기초는 노동조합이다. 그러나 노동조합 그 자체가 코뮌은 아니다. 왜냐하면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종속되어 있는 임노동자’의 연합체이며, 조합원들 자신의 자기 생산이 현실적으로 노동조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가족 형태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코뮌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의 당면 과제이다. 이 당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는 쿠바의 경우를 그대로 따라할 수도 없으며, 따라 해서도 안 된다. 이는 체와 피델, 그리고 쿠바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아니다. 쿠바와 우리의 삶의 물적 조건은 아주 다르다. 체와 피델은 이러한 생각 위에서 쿠바만의 물적 조건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사회주의의 길을 걸었다. 이는 체가 정통 맑스주의의 주장처럼 사회주의 혁명 2단계에 따른 첫 번째 단계인 민족부르주아지 혁명의 단계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코뮌이 가족이건 국가이건 간에 개별적인 하나의 형태에 머물러서는 실패할 확률이 높다. 코뮌은 그 태생 상 본질적으로 끊임없는 연대의 과정 속에 있어야 한다. 쿠바는 자신들만의 사회주의적 코뮌을 만들면서 끊임없이 사회주의권 국가와 제3세계 국가와의 교류와 연대를 추구해 왔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가 체와 피델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다(물론 체가 쿠바의 소련 핵무기 배치의 문제에 대한 소련의 태도와 관련해서 피델과는 다른 길을 갔지만 말이다).
이러한 쿠바의 끊임없는 연대의 노력이 미 제국주의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쿠바라는 국가 코뮌을 유지시키면서도 발전시켜 온 원동력이 되었다. 체는 체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제3세계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하여 세계 연대의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피델은 피델대로 자신의 생각과 정책을 묵묵히 밀고나가 최근에 베네수엘라, 볼리비아와의 민중무역협정 체결이라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민중무역협정은 자본주의 무역 방식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자본주의 무역 방식은 채산성, 즉 얼마만큼 최대한 자본의 이익을 낼 수 있는가에 초점이 있다면, 민중무역협정은 각 국가의 민중들이 기본적으로 필요로 하는 공공재를 필요한 만큼 교환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쿠바는 모든 산업을 가동시킬 수 있는 연료인 천연가스와 석유가 필요하고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는 의료와 교육 자원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쿠바는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에 교육과 의료 자원인 교육자와 의사, 그리고 쿠바의 교육, 의료 시스템을 제공한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와 볼리비아는 쿠바에 천연가스와 석유를 제공한다. 이것이 이들 세 나라가 맺은 민중무역협정의 기본 골격이다.
이러한 민중무역협정이 세 나라의 민중들의 삶을 인간다운 삶으로 바꾸는 기초이며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첫 술에 배부르지 않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인간과 삶의 양식, 나아가서 새로운 세계의 모습의 현실적인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쿠바와 베네수엘라를 방문하여 공부하고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국제적인 연대의 흐름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사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코뮌을 구성하기 위한 틀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새로운 세계를 만드는 데 필요한 어떠한 생산물(우리 자신을 포함해서)도 제공하지 못하고 또한 그들로부터 어떤 생산물도 받을 수 없다. 설령 생산물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 삶의 양식과 이데올로기에 익숙한 우리 자신에게는 현실적으로 아무런 필요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어떤 세상을 원하는가? 야수 같은 자본주의 세상을 원할 것인가, 아니면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원할 것인가? 선택은 우리 자신의 손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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