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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비판 : 인간해방과 혁명 1

<가치에 관한 과학> 중에서 제2부, 제3장, 제3절인 <정치학 비판:인간해방과 혁명>을 번역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일단 앞 부분에 해당하는 것만 싣고, 뒷 부분에 해당되는 내용은 <정치학 비판:인간해방과 혁명2>라는 것으로 포스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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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부. 맑스의 과학적 혁명 #

 

@ 제3장. 비판으로서의 인간학 : 청년 맑스의 이론적 개념 @

 

** 제3절. 정치학 비판 : 인간해방과 혁명 **

 

『유대인 문제』에서 맑스는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의 저작과 대립한다. 바우어는 정치적 해방에 대한 유대인의 요구에 대해, “기독교” 국가에서는 결코 해방될 수 없으며, 정치적 해방은 종교적 해방을 전제로 한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맑스는 바우어가 단순한 정치적 해방과 “인간” 해방을 혼동하고 있다고 바우어를 비난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본질적으로 맑스가 포괄적으로 사용하는 포이어바흐의 인간 “유적 존재”라는 개념에 기인한다. 『기독교의 본질』에서 포이어바흐는, 인간이 종교 속에서 자신의 유적 존재로부터 소외되고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대해 낯선(신적인) 존재로서 관계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인간) 고유한 유적 존재가 낯선 존재로서 자립화될 수도 있다는 이러한 비판적 형태를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종교로부터 정치적 영역의 자립적 형태인 국가로 옮겨 놓았다. 그러나 거기서 맑스는 이러한 소외의 해소를 민주주의 속에서 보았다. 이에 반해 이제 맑스는 “유적 삶”의 자립화를 역시나 “완전한 정치적 국가”의 특징으로 파악한다. 또

한 그 정치적 국가에서 인간은 “이중적인 삶”을, 즉

 

“인간이 국가로 간주되는 정치적 국가에서의 삶, 그리고 인간이 사적 인간으로서 활동하며 다른 인간들을 수단으로 파악하는 시민사회에서의 삶……”(Ⅰ.2/149; Ⅰ/354)(주19-) 

 

을 산다.

자립화의 해소, 즉 실질적인 해방은 따라서 결코 하나의 정치적 행위, 즉 민주주의의 실현일 수 없다.(주20-) 따라서 이제 맑스에게서 더 이상 특정한 국가 체제에 대한 비판만이 문제가 아니라 정치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 문제이다. 따라서 인간 해방은 정치적으로 가능할 수가 없으며 오로지 자립화된 유적 존재를 현실적 인간으로 되가져옴으로써만 가능하다 :

 

“모든 해방이란 인간 세계, (인간) 관계의 기원을 인간 그 자체에서 찾는 것이다. 정치적 해방은 인간을 한편으로는 시민사회의 구성원으로, 즉 이기적이며 더 이상 서로에게 의존하지 않는 개인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국민, 즉 도덕적 인격(Person)으로 환원시키는 것이다. 바로 현실적인 개인적 인간이 자신 안에서 그리고 개인적 인간으로서 자신의 경험적 삶 속에서, 자신의 개인적 노동 속에서, 자신의 개인적 관계들 속에서 추상적 국민을 폐기할 때, 유적 존재가 된다. 바로 인간이 자신의 ‘고유한 능력들’을 사회적 힘으로서 인식하고 조직함으로써 사회적 힘이 정치적 힘의 형태로 자신과 결코 분리될 수 없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인간 해방이 완수된다.”(Ⅰ.2/162f; 1/370)

 

인간이 어떻게 유적 존재가 되는가, 인간해방을 누가 완수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맑스는 물론 어떤 대답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짧은 논문 2부에서 맑스는 처음으로 소외의 경제적 원인들을 다룬다. 맑스는 이제 결코 유적인 삶이 정치적 영역에서 자립화된다는 사실만을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무엇보다도 우선 시민사회가 “인간의 모든 유적 관계를 파괴하고” “인간 세계가 원자화되고 적대적으로 대립해 있는 개인들의 세계 속으로 해소될” 수 있다(Ⅰ.2/168; 1/376)는 사실을 비판한다. 따라서 맑스는 소외가 시민사회와 국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 시민사회 안에서 구성된다는 사실을 말하였다.(주21-)

국가라는 이성적 존재에 대해서 이제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 맑스는 “시민사회가 정치적 국가를 완전히 발생시킨다”(Ⅰ.2/166; 1/374)는 사실, 따라서 정치적 해방이 오로지 제한된 목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맑스는 이제 국가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고 이성적 공공성에 대해서도 설명하거나 의식을 개혁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맑스는 이성과 비이성의 충돌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유적 존재로부터 인간의 소외를 문제 삼는다. 포이어바흐의 종교비판으로부터 넘겨받은 이 개념(인간 소외)을 맑스는 처음에는 오로지 시민사회와 국가의 관계에만 적용시켰는데, 이제는 그 개념을 시민사회 자체에 적용시킨다 : 맑스는 소외의 원인들과 소외의 해소 가능성을 경제에서 찾고자 하였다. 따라서 맑스는 청년헤겔학파의 표상의 영역과 부르주아-민주주의적인 요구들의 영역을 완전히 떠나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실질적인 진보에 있어서 맑스의 이론적 문제의식의 구조가 여전히 존재와 현실 사이의 모순이라는 동일한 지평에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맑스가 『독불 연보』에 실은 두 번째 짧은 논문인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은 독일에서 종교 비판이 끝나야 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맑스는 이제 인간의 종교적 자기소외의 사회적 원인에 관한 문제에 서 있게 된다 :

 

“그러나 인간 그것은 결코 세계 바깥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추상적 존재가 아니다. 인간 그것은 인간 세계, 즉 국가, 사회이다. 이러한 국가, 이러한 사회는 종교, 즉 전도된(거꾸로 된) 세계의식을 만들어 내는데,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전도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인간 존재가 환상적인 방식으로 현실화된 것인데, 왜냐하면 인간 존재는 어떤 참된 현실성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Ⅰ.2/170; 1/378) 

 

이렇게 인간 존재의 사회성을 추상적으로 파악하면서, 그렇지만 그렇게 파악한다고 할지라도, 맑스는 이미 포이어바흐의 추상적 인간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종교비판의 위상이 변하기 위해서, 종교비판은 단지 고유한 비판의 시작에 불과한 것이다. 종교비판으로부터 종교가 발생하는 상황들에 대한 비판으로 확장되어 나아가야 한다(Ⅰ.2/171; 1/379). 맑스가 현실적 상황에 대한 이러한 비판을 하필이면 법철학 비판과 더불어 시작한다는 사실에 대한 이유를 맑스는 독일의 현실이 그가 다른 나라들에서 얻을 수 있었던 역사적 상태에 여전히 도달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통해 밝히고 있다. 유일하게 독일 법철학과 국가철학만이 “액면가 그대로 공식적인 근대라는 현재와”(Ⅰ.2/175; 1/383) 관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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