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유물론적 페미니즘[여이연08여름강좌]2-1

 

★ 작은 틀 ★


1. 가사노동의 성격과 위상

-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의해 규정되는 자본주의 사회 구성체 내에서 가사노동에 관한 논쟁은 주로 노동력 상품 생산에 있어서의 가사노동의 역할, 즉 가사노동이 노동력의 가치에 기여하는가 하는 물음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 가사노동은 생산적 노동인가 아니면 비생산적 노동인가?

- 가사노동은 소외된 노동인가 아니면 소외되지 않은 노동인가?

▶(나의 생각) 가사노동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재생산에만 주목해서는 힘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자의 노동은 임노동의 측면, 즉 자본에게 노동력이라는 이름으로 팔리면서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것으로 완결되는 자본의 운동 시스템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노동의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노동자의 노동을 임노동의 측면에서만 바라보게 된다면, 노동자 계급에 대한 자본의 착취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노동 = 임금노동>이라고 놓고 보면 <노동자의 노동의 대가 = 임금>이라는 도식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이는 맑스가 ‘노동’과 ‘노동력’을 그토록 구분하고자 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노동자의 노동은 모순적인 이중적 측면을 가지고 있다. 첫째가 바로 위에서 말한 임금노동의 측면, 즉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하는 운명적 측면, 둘째, 자신의 노동력을 판 대가로 얻게 되는 임금을 가지고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고자 하는 측면, 즉 ‘인간’으로서 자신을 생산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물론 주도적인 것은 둘째 측면이다. 이 둘째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맑스가 주목한 것도 이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맑스는 『자본론』에서 이 측면을 미처 다루지 못하였다. 아마도 다루었다면 3권 <계급투쟁> 장에서 다루었을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장의 내용을 심화시켜야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와 관련해서는 마이클 리보위츠의 『자본론을 넘어서』(백의)를 참조하면 좋겠다).

바로 이 둘째 측면 때문에 정치경제학적으로 <착취>에 대한 설명이 가능할 수 있다. 자본은 항상 생물학적으로 겨우 연명할 수 있을 정도의 임금을 주지만, 창조력과 상상력을 훨씬 풍부하게 갖춘 인간으로서 ‘공장 안’으로 들어오기를 바라며, 또한 그렇게 강제한다. 이것이 바로 <착취>이다(맑스는 이것을 두고 “죽은 자가 산 자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고 말했다).

가사노동에 대한 논쟁도 단순하게 노동력이라는 상품 재생산의 측면에만 주목하게 되면 안 될 것으로 보인다.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재생산은 임금으로 환원되고, 즉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재생산 = (남성) 노동자의 임금>이라는 도식으로 나타나게 되고, 따라서 <가사노동 = (남성) 노동자의 임금>이라는 도식으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사노동에 대한 착취, 나아가서 여성노동의 착취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의 논쟁에 대해서는 노동자의 노동의 둘째 측면에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