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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적 페미니즘[여이연08여름강좌] 2-2

 

2. 생산적 노동으로서의 가사노동

▶(나의 생각) 제목과 관련해서, 위의 제목을 고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밑에 나올 내용들과 또한 위에서의 큰 틀과 연관해서 볼 때, <비생산적 노동/생산적 노동으로서의 가사노동>으로 고쳤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강사 선생님께서 급하게 강의안 만드시느라 살짝 빼먹으신 것 같다^^. 

* 가사노동을 보는 두 가지 시각

- 그 자체가 소비되는 일련의 서비스(비물질 생산)와 즉각적 소비를 위한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 보는 것(비생산적 노동).

- 자본주의 생산관계 하에서 노동력이라는 명백한 생산물을 만드는 활동으로 보는 것(생산적 노동).

▶(나의 생각) 이 두 시각이 내가 볼 때에 가부장제에 의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착취와 억압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은 가사노동을 비생산적 노동의 측면에서 보고자 하는 것 같고, 자본주의 구조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것은 가사노동을 생산적 노동(임금노동)의 측면에서 보고자 하는 것 같다. 다시 말하자면 양손에 자본주의라는 칼과 가부장제라는 칼을 들고 있는 페미니즘이 어떤 칼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서 이러한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나오지 않나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강사 선생님께서 요즘은 가부장제도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다. 임옥희 선생 같은 분은 가부장제 대신에 ‘가부장 시스템(구조)’으로 쓰자고 하셨다고 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못 들었는지, 아니 이해를 잘 못 했던 것 같다. 지금에야 생각해 보면 자본주의 생산 체제와 가부장제도의 관계와 관련이 있다고 본다. 자본주의 생산체제는 역사적인 시간에 제약을 받는 역사적 산물이다. 가부장제도 역시도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도라는 것은 시대적인 지배 권력 형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역사적인 자본주의와 역사적인 가부장제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이다. 이 문제는 페미니즘 내에서 사실상 철학에서의 근본문제 중의 하나인 물질-정신과의 문제만큼이나 근본적인 문제이지 않을까 싶다. 가부장 제도라고 하면 자본주의 생산 체제로 환원되어 설명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생산체제는 자본주의 권력 체제를 설명할 수 있는 상위 개념이고, 가부장제는 자본주의 권력 체제에서 파생되는 하나의 제도로서 이 권력 체제보다 하위의 개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증적으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착취와 억압은 인간의 거의 모든 역사에서 나타나는 초역사적인 어떤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제도’라는 개념을 해체하고 ‘시스템’이라는 개념을 쓰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 시스템이라는 개념은 어떤 변화도 겪지 않는 구조 틀로서 이해되는데, 이는 바티유와 알튀세의 구조주의로부터 차용한 개념이지 않을까 싶다.)  

1) 가사노동의 사회화 - 비생산적 노동의 측면

* 벤스톤(Margaret Benston, "The Political Economy of Women`s Liberation", Monthly Review 21, no.4(September, 1969)

- ① 여성은 본래 생산자이고 부차적으로 소비자일 뿐. “가정과 가족과 관련된 그런 행위들 속에서 단순한 사용가치품의 생산을 책임 맡고 있는” 하나의 계급을 구성.

- ② 가사의 사회화. 그것이 반드시 여성을 가사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일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하는 것을 인식하게 만든다는 것.


- ③ 가사노동 임금화 반대. 다른 일을 할 기회 박탈, 상품화 경향에 일조, 노동의 성적 분업의 유지.  

▶(나의 생각) ① - ㉠ 여기서 벤스톤은 생산과 소비를 처음부터 분리된 것으로 전제하고 논의를 시작하는 데에 한계점이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자본이 생산과 소비를 분리시켜 놓고 (자본의) 생산을 주도적인 것으로 보고, 소비를 하찮은 것으로 보는 자본의 시각이 ‘여성은 본래 생산적이고 부차적으로 소비자일 뿐’이라는 말 속에 녹아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생산을 여전히 자본의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게 되면,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으로서의 노동자 생산을 늘 (생산의 영역과 동떨어진) 소비의 영역으로, 즉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하찮은 것으로 볼 위험성이 크게 된다. 생산을 이제 현실적인 인간의 생산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만, 소비와 생산의 분리를 전제로 삼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인간의 생산은 곧 사용가치의 소비를, 즉 현실적인 욕구 충족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가사노동을 ‘단순한’ 사용가치의 생산과 연관시키고 있는데, 도대체 ‘단순한’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만일 ‘단순한’을 그야말로 말 그대로 ‘단순한’, 즉 예를 들어 시장에 가서 비누 등과 같은 상품들(사용가치)을 구매해서 그 사용가치들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집에서 폐식용유를 이용해서 비누를 만들고 그 비누의 사용가치를 소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자본처럼 가사노동을 정말로 하찮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단순한’ 사용가치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가 잘 드러나고 있지 못하다. 다른 한편, 복잡한 사용가치란 누가 어떻게 생산하는 것인지도 설명해 주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단순’과 ‘복잡’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인가도 설명되었더라면 좋겠다.

㉢ ‘하나의 계급’을 구성한다고 했는데, 이 계급은 자본과 적대적으로 대립해 있는 노동자 계급과는 별개의 노동자인 것처럼 보인다. 즉 제3계급처럼 보인다. 공적인 영역에서의 자본-노동의 두 계급과 사적인 영역에서의 또 하나의 계급을 상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 있는 이 ‘하나의 계급’은 자본계급 그리고 노동계급과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가 모호하다.

② 그렇기 때문에 가사노동의 ‘사회화’라는 것에 대한 정의가 애매모호하게 되어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여성을 가사로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아마도 내 생각엔 여성의 가사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하나의 계급’으로부터의 해방이고 따라서 그 ‘계급’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것은 자본주의로부터의 해방일 터인데, 이러한 과정의 구체적인 물질적 관계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관념적이고 의식적인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여성의 가사노동의 중요성을 인식하자’라는 것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한다.  

③ 다른 한편으로 가사노동의 사회화가 여성의 가사노동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회화를 사람들이 상품화, 자본화와 등치시켜 생각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 주된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적 영역’에 있는 가사노동을 사회화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사회화를 ‘공적 영역’인 ‘상품화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관념적인 수준에서만 언급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 가사노동 임금화

* 달라코스타/제임스(Mariarosa Dalla Costa, Selma James, “The Power of Women and the Subversion of Community”, Falling Wall Press, 1972)

- ① “여성의 힘과 공동체의 붕괴”(1972) : 가사노동도 노동력 상품의 교환가치에 관여하고 따라서 잉여가치를 창출한다는 관점에서 가사노동이 생산적임을 주장.

- ② “the double day” - 여성의 이중 노동의 상황

- ③ 개별적인 남성들이 아니라 정부와 고용주가 가정주부들에게 임금을 지불할 것을 제안.

- ④ 자본주의는 남성들과 어린이들의 노동력을 창조하려면 여성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성들의 그러한 반란은 혁명적인 잠재력을 지닌다.

- ⑤ 가사노동이 ‘간접적’으로 생산적이면서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다는 논리를 토대로 하여, 여성이 가사노동이라는 특수한 관계를 둘러싸고 보편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계급으로서 효과적으로 조직될 수 있다고 주장.

- ⑥ 여성이 의식화된 상태에서는 그들의 종속 원인이 물적 기반을 소유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고 ‘가사노동에 대한 임금’을 요구하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 전통적 맑스주의의 입장에 대한 비판

- 여성을 사회적 노동에 참여하도록 하는 주장을 약화.

- 여성들이 맑스주의적 ‘계급’을 구성한다는 주장의 오류.

- 자본이 여성의 노동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간과.

▶(나의 생각) ① 여기에서 제기되고 있는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일면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여성의 가사노동을 임노동으로 편입시킬 때,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자본의 착취를 설명하고 맑혀 낼 수 있지만, 동일한 임노동이라는 차원에서 보게 될 때 노동자 계급의 노동력 재생산 과정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가사노동에 대한 노동자 계급의 착취 부분은 은폐될 위험성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가사노동의 ‘생산적’ 측면을 ‘자본의 생산’이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의 생산, 즉 반자본주의적이면서 질적으로 새로운 인간의 생산이라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②, ③, ⑥ “the double day”는 여성이 밖에서 하는 임금노동과 임금노동으로 편입되지 못한 가사노동의 이중적 노동의 담당자라는 현실을 표현하기 위한 말인 것 같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 아래에서 여성이 자신의 물적 조건을 확보함으로써 남성의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이러한 여성의 이중 노동의 상황을 단일한 임금노동으로 환원함으로써 임금이라는 (남성) 노동자 계급과 동일한 물적 토대에서 찾고 있는 것 같다.

④ 타당한 말이다. 그런데 이것도 애매모호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남성과 어린이들의 노동력 창조’라는 것이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본을 위한’ 노동력 창조의 의미로 읽힐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즉 ‘생산력’을 ‘자본의 생산력’으로 환원시켜 볼 위험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이는 맑스주의에서 생산력-생산관계 사이의 관계 문제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력’을 ‘현실을 변혁할 수 있는 인간’에서 찾아야 하며, 그럼으로써 여성이 ‘혁명적 잠재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생각한다.

⑤ 위의 ‘가사노동의 사회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하나의 계급’이란 자본-노동계급 이외의 제3의 계급을 의미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여성이 자본-노동의 관계와는 다른 가사노동이라는 특수한 관계 속에서 억압을 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생산양식 하에서 임노동자로서 여성이 제3의 계급으로 조직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라 생각한다. 먼저 자본주의 아래에서 자본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은 (남성)노동자계급의 임노동이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본은 어쨌거나 지금의 이 상태를 유지하려 할 것이며 언제나 노동자계급을 분리시키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연관해서 두 번째로 임노동자의 계급이 둘로 분리된다는 것은 어쨌거나 자본에게 유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둘로 분리된 이 두 계급은 자본의 이데올로기 경쟁 속에서 무한 경쟁을 하게 되는 위험성에 늘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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