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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적 페미니즘[여이연 08여름강좌] 2

아래의 내용들은 어제 배웠던 가사노동과 관련된 논쟁들의 일부를 강사 선생님의 말씀과 강의록, 그리고 그 말씀과 강의록을 제가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을 일부 정리한 것입니다. 앞으로 계속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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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문화이론연구소-08여름강좌>


# 유물론적 페미니즘 #

(강사 : 문은미 tothemoon00@naver.com)


@ 2강. 가사노동 논쟁 @ 


** 가사노동과 관련된 논쟁들은 나의 졸고들에서 이야기되었던 것과 아주 유사하다. 그렇지만 결이 다르다. 가사노동과 관련된 논쟁들은 벌써 3,40년 전에 했던 논쟁들이다. 60년대 말서부터 70년대 말까지 이루어졌던 논쟁들이다. 그 이후엔 가사노동과 관련된 논쟁들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요즘 들어 다시 가사노동과 관련된 논의들이 살살 고개를 들고 있단다.

여기에 나와 있는 가사노동 논쟁들은 가사노동을 협소하게 기능적 측면(예를 들면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아이 기르고 등등)에만 한정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논쟁 지점이 결과적으로 가사노동이 자본을 생산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련된 ‘가치 있는’ 노동인가 아닌가 또는 이 두 논의들을 부정하면서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 ‘외부’에 존재하는 노동(이 논의에서는 사회화된 무엇이라고 하는데 사회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가지고 있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지 못함으로써 신비화된 무엇으로 남게 된다)으로 봐야 한다는 데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사노동과 관련된 논의의 지점을 이런 기능적 측면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인간을 생산’한다는 총체적인 측면으로 옮겨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사노동은 자본주의형 인간을 만들어 내는 물적 토대이다. 이는 자본이 가정, 가족을 얼마나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고 있는지, 그리고 사람들에게서 가족 이데올로기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엄마가 뿔났다]라는 주말 연속극을 보라. 엄마(정한자)가 안식년 휴가 1년을 달라고 했을 때 가족 구성원 대다수가 엄청 반대했다).

그런데 자본은 이 구체적인 자본주의형 인간을 만들어 내는 물적 토대인 가사노동의 비용을 전혀 감당하지 않는다. 만일 자본이 이 비용을 떠안게 되면 그 즉시 자본은 자본이 아니게 된다. 자본은 그 비용을 개별 남성 노동자에게 떠넘기게 되었고, 그 개별 남성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생산노동을 여성들에게 떠넘기게 된다. 만일 이렇게 여성 노동자에게 노동력 재생산 노동을 떠넘기지 않게 되면, 자본은 남성 노동자에게 그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따로 계산해야 되고, 그러면 현재 임금의 몇 배를 남성 노동자에게 지불해야 한다. 또한 새로운 세대의 노동력을 생산하기 위한 비용도 자본이 모두 대야 한다. 한 아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들어가는 총비용을 1억 정도라고 치고, 그 아이들을 500만으로만 잡는다 하면 과연 얼마인가! 아마도 천문학적인 숫자일 것이다. 자본이 이 비용들을 댄다면 자본은 또한 더 이상 자본이 아닐 것이다.

자본이 자본이기 위해서는 <자본 = 남성 노동자 임금 = 여성 가사노동>이라는 먹이사슬 구조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맑스의 상품교환관계 형태로 바꾸게 되면 <여성 가사노동 = 남성 노동자 임금 = 자본>이 된다. 여기서 자본은 ‘등가 형태’인데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신과 같은 절대적인 보편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남성 노동자 임금은 자본에 대해서는 ‘상대적 가치형태’인데 자본에 의해서만 자신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단순한 개별자이지만, 여성 가사노동에 대해서는 자본과 마찬가지로 ‘등가형태’로서 보편자가 된다. 자본은 이러한 먹이사슬 형태를 끊임없이 유지해야 자신의 몸집을 끊임없이 불려나가게 되고, 그리하여 자신을 자본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것을 계급 문제와 연관시켜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계급은 이러한 먹이사슬 관계 속에서 생산된다. 그러므로 노동자 계급은 자신 속에 이러한 가사노동의 착취와 억압을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 계급이 노동해방을 이루려면 먼저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이러한 착취와 억압 관계 방식을 철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철폐는 자본 생산의 물적 토대인 <여성 가사노동(상대적 가치형태, 개별자) = 남성 노동자 임금(등가형태, 보편자)>라는 관계 구조 방식을 완전히 뒤바꾸어야 한다. 뒤바꾼다는 것은 이 둘 사이의 위치를 단순히 바꾸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단순히 바꾸는 것에만 머무르게 된다면 착취, 억압의 구조는 그대로인 채 얼굴마담만 바꾸는 격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뒤바꾼다는 것은 보편자가 되는 형식을 바꾼다는 것이다. 즉 등가형태의 자리를 차지하여 영원히 그 자리를 유지하려고 하는 방식이 아니라 등가형태의 자리를 여성과 소수자에게 넘겨주어 그들을 통해 자신의 삶의 문제를 표현하고 해결하려는 관계 맺음 방식을 창출하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최근의 촛불집회에서 볼 수 있다. 누구든지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고, 그 의견을 통해 자신의 의견을 좀더 깊이 있고 총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함으로써(통일시킴으로써) 자신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광장문화라고 할 수 있으며, 가타리는 이 광장문화 만들기를 <여성 되기>, <소수자 되기>로 표현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생산되는 인간을 맑스는 공산주의 인간, 즉 각기 자유로운 개인이 연대하는 사회의 사회적 인간이라고 하였다.

이제 나의 얘기는 일단 접고, 나의 얘기가 여기에 나와 있는 페미니즘에서의 가사노동 논쟁과 어떻게 결이 다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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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틀 ★


1. 여성 노동

- 이것과 관련해서 크게 3가지의 논쟁 흐름이 있다고 한다.

- ① 노동 X ---> “노동”   ② 가치 절하(미숙련) ---> 제대로 된 “가치평가”(숙련)   ③ 노동의 성별 분업

- 이 3가지의 논쟁 흐름의 문제의식은 <왜, 여성의 노동이 저임금, 불안정, 미숙련 노동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이다.

- ①과 관련해서 이전에는 여성노동이 노동으로 취급되지 않았는데, 현재 와서는 노동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생각) 여기에서 노동이라는 것을 자본주의 시대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노동으로 봐야 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노동’이라고 할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상품(가치)을 만들어 내는 노동’, 즉 직접적으로 ‘자본을 생산하는 노동’이라고 해야 이해하기가 훨씬 쉽고, 논의의 맥락을 잘 따라갈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②나 ③의 논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 ②와 관련해서 이전에는 여성노동이 가치 절하되었는데 현재 와서는 이 여성 노동이 제대로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는 것이다. 가사노동 중에서도 특히 감정노동이 임금노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 마트 판매직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의 웃으며 친절하게 손님을 맞아 물건을 판매하는 것은 미숙련 노동처럼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 정도의 기간을 거쳐 아주 숙련된 노동에 속한다는 것이다. 

▶(나의 생각) 여기서 가치 절하라는 것은 가치 즉 자본을 생산하는 데 있어 쓸모없다거나 아주 부차적인 것이라는 것으로 봐야 하고, 제대로 된 가치평가는 여성노동이 충분히 상품화되어 자본을 직접적으로 창출할 수 있다는 것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위의 예를 보면 알 수 있다.

-③과 관련해서 노동의 성별 분업은 바로 이전의 여성노동에 대한 편견에서 시작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라고 이야기되었던 것 같다.   

▶(나의 생각) ①과 ②의 논쟁의 결과로서 ③이 나타났다고 보여진다. 다시 말하자면 여성 노동이 자본을 직접적으로 생산하는 가치 있는 노동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의 성별 분업의 철폐는 여성 노동을 모두 임금노동, 즉 자본을 직접적으로 생산하는 노동으로 만들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현실은 그러하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성별 분업의 철폐는 자본이 지속적으로 추구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자본은 상품화가 가능하다면 무엇이든지 상품화시키려고 한다. 이 논의는 자본의 상품화의 흐름에 따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2. 가사노동 

- 가사노동과 관련해서 크게 2가지의 논쟁 흐름이 있다고 한다.

- ① 생산노동/비생산노동     ② 자본주의 생산양식 외부에 존재하는 노동

- ①과 관련된 논쟁 틀은 맑스주의 문제의식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생산노동과 관련하여서는 다시 이 생산노동이 ㉠ 소외된 노동 ㉡ 소외되지 않은 노동 2가지로 나뉘게 된다고 한다.

▶(나의 생각) ①에서 생산노동/비생산노동이라고 할 때 ‘생산’이라는 말은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자본의 생산’으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가사노동이 자본주의 생산양식 내에서 설명 가능한 것이 되려면, 어쨌든 가사노동이 자본의 이익을 생산하는 노동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 ②와 관련된 논쟁 틀은 ①의 논쟁 틀이 가사노동을 개인의 사적인 영역에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즉 가사노동을 사적인 영역의 노동으로 봄으로써 자본주의 생산체제 안에서 가사노동을 설명하고자 하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자본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하게 되는 꼴이 됨으로써 가사노동을 통한 여성의 억압과 착취를 보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에 가사노동을 자본주의 생산양식 바깥에 있는 그 무엇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나의 생각) ②의 견해는 어찌 보면 ①의 비생산노동의 견해와 매우 유사해 보인다. 그렇지만 후자는 어쨌거나 ‘자본주의 생산양식 안’에서 간접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이지만, 전자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해서 볼 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바깥에 있는 가사노동이 어떻게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아무런 관계도 맺지 말아야 할 것들이 현실에서는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오면서 촉발되었던 ‘신 존재 증명’ 논쟁에서의 딜레마를 그대로 옮겨 온 것 같은 느낌이다. 절대적으로 완전한 신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유한하고 불완전한 인간(세상)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가 하는 것과 똑같은 딜레마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서는 별다른 얘기가 없다. 또한 이것은 바로 다음에 ‘여성노동’과 관련하여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의 외부에 있는 가부장제의 관계가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지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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