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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계급정치학>-2

<여성의 임노동은 매우 값싸기 때문에 자본에 유리하다. 여성들의 임금은 여성들이 노동력의 가치 이하로 임금을 지불받고, 노동력의 가치 면에서 남성보다 낮은 상황에 있음을 보여 준다. 여성노동의 이런 면들은 명백히 자본에 유리하다. 왜냐하면 임금 수준을 전체적으로 낮추어 주기 때문이다. 비치는 여성이 자본에 이런 이득을 제공하기 위해서는 가족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39쪽)
<기혼여성 노동자의 경우 국가보험과 사회보장 제도에 의해 남편의 피부양자로 간주되어 여성이 실업 상태에 있을 때 그녀의 재생산 비용은 남편 임금으로부터 충당된다. 그러므로 기혼여성을 고용하는 개별 자본가는 여성의 임노동이란 아내와 어머니라는 주된 역할에 비해 부차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이용해서 임금을 매우 낮게 지불하고, 여성이 하나의 노동자로서 자신을 일상적으로 재생산하는 비용조차 충당하지 못하게 한다. 결국 여성들이 재정적으로 남편(혹은 동거인)에게 의존하게끔 만드는 가족구조와 이데올로기가 존재함으로써 여성들은 자신의 노동력 가치보다 낮은 임금을 지불받게 되는 것이다.>(이 역시도 비치의 견해) 
(40쪽)
⇒ 그런데 이러한 비치의 주장이 여성이 남성과 동일한 임금을 받는데 방해가 되는 요인이 가족이기 때문에 (포스트 모더니즘처럼) 가족만을 단순히 해체하고자 하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공동체(코뮌)를 염두에 두고 주장하는 것인지를 잘 알 수 없다.
(이 책에서 미셀 바렛이 비치를 언급하고 있는 내용으로 봐서) 또한 비치가 단지 여성과 남성의 동일한 임금 체계만을 주장하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호하다. 만일 비치가 여성과 남성의 동일한 임금 체계만을 문제 삼는다면, 그래서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성의 이중적 억압은 여전히 존재하게 될 것이다. 남성 노동자와 동일한 임금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여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전히 착취 받는 노동자일 뿐만 아니라 여전히 가사노동을 전담함으로써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이중적 구조에 끊임없이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의 동일 임금 체계는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위해 진일보한 것이지만, 개량적인 측면이 강하다. 만일 정규직, 비정규직을 막론하고 여성과 남성의 동일 임금체계를 노동자 계급의 강력한 투쟁을 통해 자본이 어쩔 수 없이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자본은 자신의 이익을 보존, 유지하고 더 나아가서 더 많은 이익을 내기 위하여 노동 강도를 엄청나게 강화시키거나, 아니면 동일 임금 체계의 영역에서 벗어난 노동자들(하위 주체)의 상대적인 임금 삭감을 하고자 할 것이다.
문제는 여성과 남성의 동일 임금 체계가 아니다(물론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여성 노동의 가치가 자본의 가치에 얼마나 기여하는가에 따라서 정해진다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여성 노동의 가치가 인간의 가치에 기여한다는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의 기본적인 전략은 노동을 개별화하는 데 있다. 자본은 자기 자신을 보편자(인간 실천 활동의 결과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실천 활동을 가능하게 만든다고 착각하고 있는 형이상학적?초역사적 보편자)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노동자를 추상적이고 순수한 개별적 개인(예를 들면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개인)으로서의 개별자로 만들고자 하고, 또한 만든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노동자가 인간(인간관계를 맺음으로써 되는 사회적 인간, 즉 유적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자본으로부터 보편성을 부여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인간(개인)은 사회적 인격(사회적으로 인간임을 인정받는 보증서와 같은 것)을 가지지 못한 비인간이 된다. 자본은 바로 자기가 이러한 보편성을 인간에게 부여하는 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이것을 자본의 물신성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자본은 노동자에게 보편성을 부여하려고 하는가? 그것은 노동자가 없으면 자본은 보편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노동자의 노동이 가지고 있는 보편성(이는 자본의 보편성과 완전히 다르다. 이 보편성은 인간 실천 활동(생산 활동, 노동)의 결과물로서의 보편성이며, 절대적 보편성이 아닌 역사적 보편성(상대적 보편성)이며, 과정으로서의 보편성이다)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보편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노동의 보편성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노동은 보편성과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맑스에 따르면 노동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기본적인 조건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발전해 온 역사적 산물이다. 그리고 이 역사적인 산물인 노동에는 인간의 사회적 관계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노동은 임노동으로 대표되는데, 이 임노동은 그 자체로 노동이 가질 수 있는 보편성을 자기 자신 안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 왜냐하면 노동자의 임노동은 노동자가 순수하고 추상적인 개별적 개인으로서 자본가와 1대1의 계약 관계를 통해 비로소 현실화될 수 있을 뿐이며,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임노동은 순수하고 추상적인 개별적 노동자의 노동이 될 수밖에 없으며, 노동의 보편성을 자본으로부터 부여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의 노동에는 자본에 종속되어 있으면서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는 임노동만 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의 노동에는 임노동 말고 자기 자신을 위해 생활필수품을 소비하면서 자신을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의 노동자를 만들어 내는 노동이 있다. 이 노동은 임노동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철저하게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삶을 계획하며 현실화시키고자 하는 노동이다. 바로 이 노동이 인간 유적 존재의 보편성을 현실화시키고 실현시키는 역사적 산물로서의 노동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동은 여성의 노동, 특히 여성의 가사노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 노동이 인간의 유적 보편성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가치를 지닌 노동이며, 인간의 가치를 실현시킬 수 있는 노동이다. 또한 노동자 계급을 생산하는 노동이며, 계급의식을 형성하며 보편화시킬 수 있는 씨앗을 가지고 있는 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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